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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쿠라 토시카게가 죽자 같은 시대를 살았던 어느 귀족은,
라고 욕을 퍼부었다.
그 외에도 다이죠우 원[大乗院]의 진손[尋尊]이나 이치죠우 카네요시[一条 兼良]가 토시카게의 행동에 비난과 욕설을 퍼부었을 정도로 당시의 귀족이나 중들에게 있어서 토시카게는 장원(荘園 - 귀족이나 사원의 영유지)을 빼앗아 갔기에 저주받아야 마땅한 존재였다. 토시카게는 구질서 아래서 온존되어 왔던 귀족의 특권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너뜨렸던 것이다.
아사쿠라 씨[朝倉氏]는 대대로 에치젠[越前] 슈고[守護] 1 시바 씨[斯波氏]의 가신이었다. 토시카게 때 삼가로(三家老 2)의 하나로 승진하였다. 토시카게가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시바 가문의 가독 상속 싸움으로 인해서였다.
1452년.
시바 요시타케[斯波 義健]가 죽자, 그의 양자(養子) 요시토시[義敏]가 필두가로인 카이 씨[甲斐氏]와 싸워 카이, 아사쿠라, 오다의 삼가로에게 추방당하였고 새로이 요시카도[義廉]가 양자로 들어왔다. 시바 가문의 이 두 양자간의 상속 싸움이 '오우닌의 대란[応仁の乱]'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처음 토시카게는 요시카도의 밑에서 막부[幕府]의 실력자인 야마나 소우젠[山名 宗全]의 서군에 속해 있었다. 그런 토시카게에게 은밀한 모략의 손길이 뻗쳐왔다. 야마나에 대항하는 실력자인 동군의 총대장 호소카와 카츠모토[細川 勝元]에게서였다. 서군을 배신한다면 에치젠 슈고에 임명한다는 것이었다.
[아사쿠라 도시카게(朝倉 敏景)]
1428년 에치젠[越前] 사카이 군[坂井郡] 쿠로마루 성[(黒丸城]에서 태어났다. 타카카게[孝景]라고도 한다. 1471년 주군인 시바 씨[斯波氏]를 대신해서 에치젠[越前] 슈고[守護]가 되었다. 미신 타파에 힘쓰는 한편 당시 종교계의 신흥 세력인 렌뇨[蓮如] 4와 친교를 맺어 에치젠 요시자키[吉崎]에 절을 만들어 주었다. 1481년 54살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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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 : 쿠와타 타다치카(桑田 忠勝)
저자 : 나카지마 시게오(中嶋 繁雄)
1978년 2월 10일 첫 출간.
일본에 있을 때 제일 처음 산 책이 되시겠다.
이상한 동네의 헌 책방에서 데려 옴.
참고로 나랑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남.
하이텔 전클 시절에 열 몇개 까지는 해석했는데 이번에 다시 해석하려고 함.
(가끔 이 책에서 번역한 글들이 돌아다녀서 쪼금 행복함 *^^* ...
근데 굉장히 쪽팔림...--;
내가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고(지금도 마찮가지 이지만...--; ,
한자음은 틀린 것도 굉장히 많음).
어쨌든 그렇다고 여기다 올리는 글을 퍼가게 하지는 않겠음.
어디까지나 링크!!)
간단히 소개하자면, 그 무장의 일생에 관한 글.
유명 무장은 4페이지, 그럭저럭 유명한 무장은 3페이지, 짧은 건 2페이지.
학술적이라기 보다는 일반적으로 알려진(즉 실제와는 다른) 에피소드가 많이 수록되어 있음.
업데이트 주기는 지금까지 [말년과 최후]올리는 페이스로 주중에 올릴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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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호쿠(東北) 지역
츠가루 타메노부(津軽
爲信)
쓸쓸함과 후회로 가득 찬 독립 무장의
말년.
쿠노헤
마사자네(九戶
政実)
천하의 대군을 상대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은 노장(老將)의
의지.
난부
노부나오(南部
信直)
새로운 성 밑 마을(城下町) 모리오카(盛岡)를 발전으로
이끌다.
다테
하루무네(伊達
晴宗)
아들 테루무네(輝宗)와 노선 대립하여 은거 생활.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
뒤늦은 오우슈우(奥州) 패왕이 가졌던 백만석의 꿈.
╚
마사무네의
어떤 임종(다른 책의 번역글)
아시나
모리우지(盧名
盛氏)
은거를 깨고 다시 정무를 맡은 말년.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
자식들에게 닥친 비극에 후회로 점철된 나날.
사타케
요시노부(佐竹
義宣)
막부에 대한 충성으로 신뢰 회복에 힘쓴 좌천 다이묘우(大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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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1616년 4월 17일 병사(病死) 75세.
미카와[三河]
오카자키[岡崎] 성주(城主) 마츠다이라 히로타다[松平 広忠]의 아들.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の戦い] 1를 기회로 이마가와 씨[今川氏]에게 독립.
토요토미[豊臣] 정권에서 오대로(五大老) 필두(筆頭)가 된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승리하여 에도 막부[江戸 幕府]를 열었으며,
토요토미 씨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손 안에 넣었다.
취소된 은거소(隱居所)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75세라는 장수(長壽)를 누리며, 생애(生涯)의 꿈이었던 천하 제패를 확립한 후 저 세상으로 여행을 떠났다. 주위 사람들의 눈에는 미련 따윈 없는 대왕생(大往生)으로 보였을 것이다. 단지 직접적인 사인(死因)이 식중독에 의한 쇠약이었던 것이 본인에게는 조금 아쉬웠을 지도 모른다.
1615년 4월.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大坂 夏の陣)에서 소원이던 토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자, 순푸[駿府]로 되돌아와 본격적인 은거 생활에 들어갈 준비를
시작한다. 어느새 74살이 되어 있었다. 그 당시도 이미 쇼우군[将軍] 자리는 히데타다[秀忠]에게 물려주고 순푸에서 은거를 하고
있었기는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오오고쇼(大御所)로서 쇼우군[将軍]보다 더 강한 권력을 쥐고 정치를 진두지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가장 신경 쓰이던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을 멸망시켜 이제는 더 이상 표면적으로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에 대항하는 다이묘우[大名]도 없게 되자, 평범한 노인의 심정에 가까워졌던 듯 하다. 그래서 순푸 성(城)을 10째 아들인 요리노부[頼宣] 2에게 물려주고 이즈[伊豆] 미시마[三島]의 근교인 이즈미가시라[泉頭]에 은거할 곳(隱居所)을 만들려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마음의 변화가 생겼는지 건설은 중단되었고 결국 없었던 일이 되었다.
은거할 수 없던 은거
다도(茶道)나 매사냥, 바둑 등 취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무엇보다 즐겼던 취미는 역시 천하의 형세를 관망하면서 그때그때 자신의 정치이념에 따라 수정을 한다거나 보강을 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자신이 죽은 뒤에도 히데타다 이하 토쿠가와 가문의 후계자들이 대대로 정권을 유지해 갈 수 있게 해 두지 않으면 아니 되었을 것이다.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大坂 夏の陣]에서 완승한 뒤 다이묘우 통제를 위해서 일국일성령(一国一城令 3), 텐노우[天皇]나 귀족[公家]을 통제하는 [궁중 및 쿠게 에 대한 법도(禁中並公家諸法度)], 불교계를 장악하기 위한 [오산과 십찰, 제산에 대한 법도(五山十刹諸山法度 4] 등의 반포되었다. 이런 법들은 쇼우군 히데타다의 이름으로 공포(公布)되기는 하였지만, 이는 이에야스의 지시로 그의 측근들이 만든 것이다.
이에야스에게 평범한 노인과 같은 은거 같은 것은 가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는 진심으로 속세에서 벗어날 생각 같은 것이 없었을 지도 모르며, 있다고 하여도 예전부터 바래왔던 정치이념의 실현과 토쿠가와 정권의 토대(土臺)를 굳건히 하기 위해선 유유자적한 은거 생활은 즐길 수 없었다. 이즈[伊豆]의 시골에서 은거하려다 관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에야스의 추종자들 중에는 정치나 군사 전문가들 외에도 취미나 교양이 풍부한 문화인들이나 상인들이 있어 그들과의 교류를 차마 끊을 수 없었던 사정도 있었을 것이다. 이즈[伊豆] 은거 대신 측근 중의 하나인 텐카이[天海]에게 권고 받아 염불을 매일 외는 것 만은 실행하였다.
도미 튀김이 목숨을 앗아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추종자들과의 교류가 남은 생명을 줄였다고 말할 수 있다.
1616년 1월 21일. 그는 순푸[駿府] 근교의 타나카[田中]에 매사냥을 하러 간 날 밤. 격심한 복통을 일으켰다. 식중독이었던 듯하다. 타나카까지 문안 인사를 하러 온 어용상인(御用商人) 챠야 시로우지로우[茶屋 四郎次郎]의 추천으로 도미 튀김을 먹었기 때문이다.
이 챠야 시로우지로우는 토쿠가와 가문의 어용상인으로써 이에야스와 깊은 친분을 나누었던 시로우지로우(四郎次郎)의 아들 쪽이다 5. 본명은 마타시로우[又四郎]였지만 부친이 죽은 뒤 이름을 계승하였다.
그는 요즘 쿄우토[京都] 부근에는 도미를 비자나무의 기름으로 튀긴 후 마늘을 갈아서 곁들여 먹는 것이 유행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에야스는 곧바로 도미를 가져오게 하여 유행하는 것과 같이 튀겨 먹었다. 굉장히 맛있었는지 참도미, 옥돔을 다섯 마리나 먹었다고 한다. 이래서는 건장한 사람이라도 위에 무리가 간다. 하물며 체력이 약한 노인에게는 버틸 수 있는 여지도 없을 것이다.
그 이후, 25일에 순푸[駿府]로 돌아온 이에야스의 병상(病狀)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도 확실히 나쁜 쪽으로 진행되었다. 에도에 있던 히데타다도 2월 2일에 순푸[駿府]로 달려와 병문안을 하였다.
이에야스는 손수 약을 만드는 취미가 있어 이 때도 [만병단(万病丹)], [은액환(銀掖丸)]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던 자신이 제조한 약 이외에는 복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용태는 더욱더 악화되어 간 듯하다. 결국 그도 죽을 때가 된 것을 깨달아, 4월이 되자 측근인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나 텐카이[天海], 곤치인 수우덴[金地院 崇伝]들을 불러 유언을 전했다.
유체를 순푸[駿府] 가까이에 있는 쿠노우산(久能山) 산에 묻어줄 것, 장례식은 에도의 조우죠우 사[増上寺]에서 행할 것, 위패(位牌)는 미카와(三河)의 다이쥬 사[大樹寺] 6()에 둘 것, 일주기(一週忌) 후에는 닛코우[日光]에 작은 암자를 세우면 거기에서 칸토우[関東]의 수호신이 되겠다는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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