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
1560년 5월 19일 전사(戰死) 42세.
스루가[駿河],
토오토우미[遠江],
미카와[三河]의
태수(太守). 형 우지테루[氏輝]가 급사(急死)한 뒤 배다른 형인 겐코우 에탄[玄広 恵探]을 물리치고 가독(家督)을 상속하였다.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와 동맹을
맺고 상락(上洛 1)을 개시하지만, 오케하자마[桶狭間]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패하여 살해 당했다.
결전 오케하자마
1560년 5월 12일.
지부다이후[冶部大輔]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자신이 최대한 동원할 수 있는 2만 5천의 군세를 이끌고 순푸[駿府]를 출발하여 정서(征西)의 길에
올랐고 그날은 후지에다[藤枝]에 머물렀다.
이때 선발 부대는 카케가와[掛川]에 도착해 있었다. 30Km에 이르는 길가엔 군마(軍馬)의 울음소리, 갑옷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나 장병(將兵)들의 노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마가와 씨[今川氏]는 아시카가 씨[足利氏] 2의 한 갈래로, 코우안의 역(弘安の役 – 2차 몽골 내습) 즈음, 키라 나가우지[吉良 長氏]의 둘째 아들 쿠니우지[国氏]가 미카와[三河] 이마가와[今川]라는 땅(현 아이치 현[愛知県] 니시오 시[西尾市] 이마가와 쵸우[町])를 영유(領有)하며 이마가와 씨[今川氏]를 칭하게 된 때부터 시작된다.
3대 노리쿠니[範国] 때, 처음으로 스루가 슈고[駿河守護] 3에 보임(補任)되어, 이후 순푸를 중심으로 영지(領地) 지배를 강화해 갔다.
요시모토의 부친 우지치카[氏親] 시대에 토오토우미[遠江]를 손에 넣었고 미카와[三河]에 침공하였다. 미카와는 이마가와 씨 발상(發祥)의 지(地)이며, 요시모토는 출진 직전에 미카와노카미[三河守 4]에 임명되었다.
요시모토는 스루가, 토오토우미, 미카와 3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고, 영내(領內) 안정은 그를 쿄우[京] 문화의 수호자로 만들었다. 그를 추앙한 쿄우토[京都]의 상급귀족[公家]들이나 승려, 렌가 사[連歌師]들이 빈번히 왕래하여 순푸는 번화하였다. 이 즈음 '카이도우[海道] 제일의 무가(武家)=海道一の弓取り' 이마가와 씨는 절정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번 요시모토의 출진은 상락이 목적이 아니라 미카와와 오와리(尾張) 국경의 평정에 있었다. 일만 잘 진행된다면 오와리 깊숙이 진출하여 오다 가문[織田家]의 젊은 당주 노부나가에게 철퇴를 가하고자 함에 있었다.
요시모토의 본진은 다음 날인 13일에는 오오이가와[大井川] 강을 건너 카케가와에 입성하였고 이후 히쿠마[引馬], 미카와의 요시다[吉田], 오카자키[岡崎], 치리후[池鯉鮒]에서 숙영(宿營)을 하며 18일에는 오와리 쿠츠카케 성[沓掛城]에 입성하였다.
다음 날에는 이른 새벽부터 마츠다이라 모토야스[松平 元康 – 훗날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등을 선봉으로 삼아 오다 측의 와시즈[鷲津], 마루네[丸根] 요새에 공격을 개시, 정오 전에는 함락시켰다. 요시모토의 본대도 토우카이도우[東海道]의 큰길을 벗어나, 언덕으로 둘러싸인 골짜기를 따라 오오타카 성[大高城] 방면으로 나아갔다.
이 시점에서 오와리[尾張]에 있는 이마가와 측 최전선 기지인 나루미 성[鳴海城]으로 갈 수 있는 길을 확보했다고 확신한 요시모토는, 시작부터 전해져 오는 승리 소식에 기분이 좋아져 '오케하자마[おけはざま]'라고 불리는 언덕 위에서 휴식을 취했다. 우타이[謡]를 세 곡 음송(吟誦)했다고 한다. 요시모토를 따르는 군사들은 골짜기를 따라 길게 늘어져 또한 이세 만[伊勢灣]의 해안을 따라 넓게 퍼져있던 상태라 본진에는 500명 정도의 친위대만 지키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날 아침 일찍 키요스 성[清洲城]을 출발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아츠타 궁[熱田宮]에 들러 승리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리고 있을 때 동쪽에서 피어오르는 두 줄기 검은 연기를 보았다. 와시즈, 마루네가 낙성(落城)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노부나가는 만조(滿潮)가 된 해안가의 길을 피해, 나루미 성(城)을 우회하여 테코시가와[테고에(手越川)] 천이라 불리는 작은 하천을 따라 나아갔다. 유일하게 이길 수 있는 기회는 본진을 급습하여 요시모토의 수급을 취하는 것 외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은밀히 '오케하자마'의 산기슭까지 다가갔을 때 세찬 비바람이 몰아쳤다. 돌풍은 노부나가 군(軍)의 후방에서 요시모토 본진 쪽으로 불어 노보리[幟], 사시모노[指物]를 날려버렸다.
날씨가 맑아지자마자 노부나가는 큰 목소리로 총공격을 명했다. 거듭 돌격해 오는 노부나가 군(軍)에 요시모토가 타고 있던 가마를 지키는 친위대 300여기(騎)는 차츰 밀려 무너지며 언덕을 내려가 쿠츠카게 방면으로 밀려났다. 최초로 달려든 핫토리 고헤이타[服部 小平太]를 요시모토 스스로 칼을 뽑아 대항하여 핫토리 고헤이타의 무릎을 베어 물리쳤지만, 그에 이은 모우리 신스케[毛利 新助]에게 목이 베어졌다. 요시모토 42세로 한창 일할 나이였다.
노부나가는 그날 중에 요시모토의 목을 가지고 키요스로 개선하였다. 다음 날 수급 확인을 한 후, 키요스에서 약 2Km 정도 떨어진 남쪽의 스가구치[須賀口]라는 곳에 목 무덤을 만들어, 천부경(千部経 5)을 실행케 하고, 불탑을 세워 요시모토의 넋을 기렸다고 한다. 그 후 요시모토의 수급은 나루미 성(城)을 계속 지키며 물러나지 않고 있던 오카베 모토노부[岡部 元信]에게 건내져 스루가[駿河]로 보내졌다.
말년의 도전
요시모토의 죽음은 에도 시대 이후에 창작된 책들에 의해 쿠게[公家] 문화에 빠진 교만과 방심의 인물로 그려지게 된다. 오하구로[鉄漿]를 해서 상급귀족[公家]처럼 몸을 꾸몄으며 숏다리에 허리가 길어 말에서 떨어졌다거나, 우유부단하여 도무지 센고쿠[戦国]의 무장답지 않은 인물로 그려졌다. 그런 것들은 창작된 요시모토 상(像)이다.
그렇기는커녕 부친 우지치카가 제정한 영지(領地) 지배법인 '카나 목록[仮名目録]'을 보완한 '카나 목록 추가[仮名目録追加]'라고 하며 추가 21개조를 정하여, 토지조사[検地]의 실시나 상공업 발전 촉진, 부역(賦役)이나 전마(傳馬) 제도의 정비 등 센고쿠 다이묘우[大名]로서 최상급의 영지(領地) 경영, 시책을 착착 실시하여 영내(領內) 장악에 자신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요시모토는 1558년 즈음부터 후계자인 우지자네[氏真)에게 가독을 일부 위임했다. 적어도 안정된 스루가[駿河]를 맡기고 자신은 미카와[三河], 오와리[尾張]라는 신천지의 영토화를 목표로, 상락을 향한 포석을 깔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다.
새로운 도전을 하고자 했던 요시모토의 의욕은 노부나가에게 산산이 부서져 한 여름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다.
- 상경(上京)의 다른 말. 여기서 락(洛)은 낙양(洛陽)의 “낙(洛)”이다. 여러 번 중국 왕조의 수도가 되었기에, 낙양에 간다는 말은 곧 수도로 간다는 말을 의미했다. [본문으로]
-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쇼우군 가문[将軍家] [본문으로]
- 슈고[守護]란 무로마치 바쿠후[室町 幕府]의 지방관직 [본문으로]
- 이는 막부와는 별개로 쿄우토[京都]의 조정에서 내리는 관직. [본문으로]
- 명복을 위해서 천 명의 중이 똑 같은 경문을 한 번씩 읽는 것, 반대로 한 명의 승이 천번을 읽을 때도 있다. 짧은 시간 동안 천 명의 중을 모으기 쉽지 않으니 여기선 후자인 것 같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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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하자마 골짜기..라는 센스가 향간에 통용되던 것도, 그러한 요시모토의 교만한 이미지 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안됐더군요, 무려 나스노요시치의 궁까지 있는 가문인데 그렇게 허망하게..쩝-_-;;;;
P.S. 이마가와 우지자네는 천수를 누렸으니 그나마 나은가...
정작 나스(那須)씨에게는 없는 나스노요이치....--;
여담이지만.... 석 대의 화살도 궁계 필살기로 승화시키는 센스(삼국지 시리즈에 있는 '일제 공격'도 아니고)는 "과연 光栄!!"
나스 가문이 있어야지 요이치의 궁을 보유하든 말든 하죠. 시모츠케에 성 하나밖에 없는데다가 앙숙 우츠노미야에게 돌아갔으니 나스씨로선 이 무슨…
잘 보고 갑니다.
후지와라(藤原) 가문의 나스씨인데도 불구하고, 겐지(源氏)의 아시카가씨와 동 계통의 이마가와씨가 나스 운운하는 것 부터 이상했다고 생각합니다. (나스 씨는 가문기가 아닌 개인 기술로 갖게 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었을텐데...^^)
천통 수준은 아니더라도 혁신은 너무 성이 없다고도 역시 생각하고요.
뭐 롯카쿠가에도 전용 궁기술이 없는걸 보면... (애시당초에 궁계열 전용기술이 산시노 오시에밖에 없는데, 막상 모리가 전용기술은 나스노요이치의 궁이 아니라 호오라쿠비야;;) 대충 대충 만든 느낌이 들어서..(;;)
아~ 모우리 가의 가문 기술은 호우라쿠비야였군요..^^;; 삼시훈은 개인 필살기였고..
(해본지 오래되어서 헷갈리네요 ^^)
제육천마왕의 수군 무리를 수장시켰다는 그 호우라쿠비야...
호우라쿠비야가 배락화시인가요??
그렇습니다. 焙烙火矢(호우로쿠비야)가 정확한 발음이군요.
참고로 모우리 수군이 이용한 것은 "호우로쿠타마(焙烙玉)"로,
깨지기 쉬운 질그릇에 화약이나 인화성 짙은 것을 담아 수류탄 처럼 던졌다고 하네요.
담아갑니다
국내에선 모리 신스케라는 인물에 대한 자료는 많이 없는거 같던데요.
제가 아는 정보라곤 혼노지에서 죽은거 밖엔...
국내 뿐 아니라 일본도 그다지 정보는 많지 않은가 봅니다. 일본판 위키도 짧은 것을 보면 말입죠.
신장공기[信長公記]에서도 이름이 딱 세 번 나옵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죽일 때.
이세[伊勢] 키타바타케[北畠] 공격에 참가. 노부나가는 이때 오오코우치 혹은 오카와치 성[大河内城]을 바리케이트로 둘러 쌓고 그 안을 자신의 친위대들이 순시를 돌게 하였는데 그 그룹[尺限の廻番衆]에 한 명으로 등장.
그리고 마지막은 혼노지의 변에서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타다[信忠]가 농성한 니죠우 성[二条城]에서 싸우다 죽은 멤버 중 하나로 나옵니다.
검은 화살막이 부대[黒母衣衆]라는 노부나가의 친위대에 선발될 정도로 한 무공한 듯 합니다만, 전장에서의 활약은 이세 공략 때를 끝으로 그 다음부터는 사원 등 종교관계를 담당했다고 합니다. 특히 나라[奈良]의 일곱 개의 큰 절[南都七大寺] 중 하나인 '야쿠시 사[薬師寺]' 전담했던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