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refox 2.0.0.12 업데이트 내용

불여우_이야기 2008. 2. 9. 11:04 Posted by 발해지랑


몇 개의 크리티컬 급의 취약성이 있으니 반드시 업데이트 하라고합니다.

업데이트(버그수정)에 대한 내용입니다.

위험 최고 : 임의의 코드를 실행하거나 임의의 소프트웨어를 인스톨할 가능성이 있는 취약성.

위험 고 : 방문했던 다른사이트에서 정보를 모아, 그런 사이트에 데이터나 코드 주입 가능.

위험 중 : 디폴트가 아닌특수한 설정을 행할 경우에만 공격 가능

위험 낮음 : 서비스방해 공격, 소량의 데이터 유출, 트로이 등.

MFSA 2008-01 메모리 파괴의 흔적이 있는 크래쉬.

MFSA 2008-02 파일 입력 포커스 탈취에 관한 복수의 취약성.

MFSA 2008-03 특권 승격, XSS, 리모트 코드의 실행.

MFSA 2008-04 보존되어 있던 패스워드를 파손.

MFSA 2008-05 chrome: URI를 통한 디렉토리 트래버설(directory traversal)

MFSA 2008-06 웹페이지 방문 기록과 앞으로버튼 기록을 읽게 하는 것.

MFSA 2008-08 파일 처리 다이얼로그를 고의로 고침

MFSA 2008-09 로컬 컴퓨터에 plain/text이 설정된 파일이 있을 시의오처리.

MFSA 2008-10 스타일 쉬트의 리다이렉트를 이용한 URL 토큰을 읽을 수 있던것.

MFSA 2008-11 div 오버레이에 의한 피싱 사기 경고를 표시하지 않음.

가 수정되었다고 합니다.

항상 자기 멋대로 업데이트하는 불여우의 어디가 고쳐졌는지 알아보려고 저번 버전부터 하고 있는데…… 우리 나라 쪽은 영어로 연결시켜놓으셔서들……소스는 입니다.

하고자 했던 것은 각케이스 별로 자세히 하고 싶었는데,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일본 쪽에서 쓰는 용어와 국내 용어의 차이를구별 못한다는…… (아울러 이 쪽 업계에서 손을 뗀 지도 몇 년이 흘렀는지 모를 정도의 졸자)

결국 일본어 그대로번역……--;

어쨌든 읽으면서 안것은 모질라 분들은 정말 세세하고 조그만 가능성도 놓치지 않으신다는 거.

그런 분들의 노력은왠지 쓰는 보람이 있다고나 할까요 ^^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1582 6 13일 패사(敗死) 55?

1528? ~ 1582.

미노(美濃)의 명족(名族) 토키(土岐)()의 후예.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동반하여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긴다. 후에 노부나가와 사이가틀어져, 혼노우(本能)()의 변()을 일으키지만, 직후에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의 야마자키(山崎) 전투에서 패하여 퇴각 중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이에게 습격 받아 살해당했다.







어긋난 시나리오


 1582 6 13일 밤.

 아케치 미츠히데는 쇼우류우지(勝龍寺)() 안에 있었다.

 주군 노부나가의 복수전이라며 싸움을 걸어온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맞서 싸워 이김으로 쿄우토(京都) 지배의 토대를 다져놓을 수 있었던 야마자키의 전투에서 참패하여 지금 막 도망쳐 온 것이었다. 추격해 오는 적군의 움직임을 생각하면 갑옷을 벗을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사이토우 쿠라노스케(内蔵(=토시미츠(利三))의 말을 들어, 오늘의 전투를 피하여 사카모토(坂本)에서 농성(籠城)을 하였다면……]

 [평소 모아두었던 군세를 (나누지 않고) 한 곳에 모아 두었다면……] (太閤記)

 라는 등의 제 3자의 평은 아무 의미가 없다.

 어쨌든 적이 포위망을 굳히기 전에 성을 나가 본거지인 오우미(近江) 사카모토(坂本)()에서 진용을 재구축해야 하겠지만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은 예상했던 것과는 반대로 급격히 불리해진 국면(局面)이었다.


 계획했던 대로 주군 오다 노부나가를 혼노우(本能)()에서 습격하여 자살하게 만들고 궁정에 들어가 전승(戰勝)을 보고했던 것이 불과 10일전의 일은 아니었는가? [아케치의 삼일천하[각주:1]]라고 후대에 걸쳐 비웃음을 받고 있는데 당사자인 본인도 예상과 현실의 갭이 너무도 큰 것에 당혹하여 어째서 이런 결과가 되었는지를 자신에게 되묻고 있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러한 결과가 된 것일까?

 직접적인 패인(敗因)은 히데요시가 예상을 뛰어넘는 신속한 [츄우고쿠 대반전(大返し)]을 감행한 것과 더불어 동원한 병력이 총 4[太閤記]이라는 이 또한 예상외의 대군(大軍)으로 이 대군에는 대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라이벌 히데요시가 그렇게 대군을 모을 수 있었는가를 생각했을 때, 우선 떠오르는 것이 인척[각주:2]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 藤孝=유우사이())타다오키(忠興) 부자의 협력 거부였다. 모든 것은 여기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주군을 죽인다는 것이 도의에 어긋나는 행위이며 문제인 것은 누구보다도 미츠히데 자신이 자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지원을 요청함에 있어서 사리사욕이 없다는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 호소카와 부자에 재고(再考)를 촉구한 9일자 편지의 말미에도 이번 쿠데타의 의도는 타다오키, 오키모토(興元[각주:3]) 등을 위한 것으로, 따라서 쿄우토(京都) 주변을 평정한 후에는 곧바로 타다오키 등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쓸데 없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설득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호소카와 부자는 응하지 않았다.


 또한 이어서 당초 미츠히데에게 가세(加勢)했었던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郡山)()츠츠이 쥰케이(筒井 順慶) 9일에는 태도를 바꾸고 곧이어 히데요시 측으로 돌아선 것이었다.


대의명분이 없는 [모반(謀反)]


 확실히 미츠히데의 반역의 배후에는 바쿠후(幕府) 즉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어, 그와 기맥상통(氣脈相通)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이세 사다오키(伊勢 貞興), 스와 히다노카미(諏訪 飛), 미마키 카게시게(御牧 景重) 등 쇼우군()의 부하들이 아케치 측에서 전사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명백하다.

 즉 무로마치 바쿠후(室町 幕府) 체제의 재건을 꾀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추측한다면 나름대로 대의명분이 존재했었던 것으로 미츠히데 개인의 사리사욕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견해도 가능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척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오다 다이묘우(大名)들은 미츠히데의 권유를 거절했다. 특히 위에 언급한 9일자 편지에서 혼노우(本能)()에서의 일을 의도하지 않았던 일(不慮)”이라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내세울 정도의 대의명분은 없었던 듯하다.


 어쨌든 반격의 준비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미츠히데는 사카모토 성()으로 귀환을 하려 하였고 미조오 시게토모(溝尾 茂朝) 등 근신(近臣) 수 명과 함께 밤의 어두움을 이용하여 쇼우류우지(勝龍寺)()을 탈출했다. 그러나 후시미(伏見) 방면에서 야마시나(山科)에 이르렀을 때 잇키(一揆)에 습격 당하여 샛길로 피했지만 여기서 살해당하고 백성이 목을 주웠다[아사노 가문 문서(野家文書)].
 
일설에는 야마시나의 오구루수(小栗栖)에 이르렀을 때 풀 숲에 숨어있던
노부시(野武士)의 창에 찔려 약 330m쯤 간 곳에서 말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곁에 있던 신하가 목을 베어, 그 목이나 몸통을 덤불 속에 감추었다고 한다[豊鑑].


 이 말로에 대해 나라(奈良) 코우후쿠(興福)()학려(學侶)인 타몬인 에이슌(多聞院 英俊)등은, “노부나가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 출세를 하였으면서도, 그 큰 은혜를 잊고 괘씸한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한 하늘의 벌이라고 단정지었다.

  1. 노부나가를 죽인 후 쿄우토(京都)에 머물렀던 기간은 3일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2. 타다오키의 부인은 미츠히데의 딸. [본문으로]
  3. 후지타카의 둘째 아들. [본문으로]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
1560년 5월 19일 전사(戰死) 42세.

1519년 ~ 1560년.
스루가
[駿河], 토오토우미[遠江], 미카와[三河]의 태수(太守). 형 우지테루[氏輝]가 급사(急死)한 뒤 배다른 형인 겐코우 에탄[玄広 恵探]을 물리치고 가독(家督)을 상속하였다.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와 동맹을 맺고 상락(上洛[각주:1])을 개시하지만, 오케하자마[桶狭間]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패하여 살해 당했다.





결전 오케하자마

 1560년 5월 12일.
 지부다이후[冶部大輔]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자신이 최대한 동원할 수 있는 2만 5천의 군세를 이끌고 순푸[駿府]를 출발하여 정서(征西)의 길에 올랐고 그날은 후지에다[藤枝]에 머물렀다.

 이때 선발 부대는 카케가와[掛川]에 도착해 있었다. 30Km에 이르는 길가엔 군마(軍馬)의 울음소리, 갑옷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나 장병(將兵)들의 노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마가와 씨[今川氏]는 아시카가 씨[足利氏][각주:2]의 한 갈래로, 코우안의 역(弘安の役 – 2차 몽골 내습) 즈음, 키라 나가우지[吉良 長氏]의 둘째 아들 쿠니우지[国氏]가 미카와[三河] 이마가와[今川]라는 땅(현 아이치 현[愛知県] 니시오 시[西尾市] 이마가와 쵸우[町])를 영유(領有)하며 이마가와 씨[今川氏]를 칭하게 된 때부터 시작된다.

 3대 노리쿠니[範国] 때, 처음으로 스루가 슈고[駿河守護][각주:3]에 보임(補任)되어, 이후 순푸를 중심으로 영지(領地) 지배를 강화해 갔다.

 요시모토의 부친 우지치카[氏親] 시대에 토오토우미[遠江]를 손에 넣었고 미카와[三河]에 침공하였다. 미카와는 이마가와 씨 발상(發祥)의 지(地)이며, 요시모토는 출진 직전에 미카와노카미[三河守[각주:4]]에 임명되었다.

 요시모토는 스루가, 토오토우미, 미카와 3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고, 영내(領內) 안정은 그를 쿄우[京] 문화의 수호자로 만들었다. 그를 추앙한 쿄우토[京都]의 상급귀족[公家]들이나 승려, 렌가 사[連歌師]들이 빈번히 왕래하여 순푸는 번화하였다. 이 즈음 '카이도우[海道] 제일의 무가(武家)=海道一の弓取り' 이마가와 씨는 절정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번 요시모토의 출진은 상락이 목적이 아니라 미카와와 오와리(尾張) 국경의 평정에 있었다. 일만 잘 진행된다면 오와리 깊숙이 진출하여 오다 가문[織田家]의 젊은 당주 노부나가에게 철퇴를 가하고자 함에 있었다.

 요시모토의 본진은 다음 날인 13일에는 오오이가와[大井川] 강을 건너 카케가와에 입성하였고 이후 히쿠마[引馬], 미카와의 요시다[吉田], 오카자키[岡崎], 치리후[池鯉鮒]에서 숙영(宿營)을 하며 18일에는 오와리 쿠츠카케 성[沓掛城]에 입성하였다.

 다음 날에는 이른 새벽부터 마츠다이라 모토야스[松平 元康 – 훗날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등을 선봉으로 삼아 오다 측의 와시즈[鷲津], 마루네[丸根] 요새에 공격을 개시, 정오 전에는 함락시켰다. 요시모토의 본대도 토우카이도우[東海道]의 큰길을 벗어나, 언덕으로 둘러싸인 골짜기를 따라 오오타카 성[大高城] 방면으로 나아갔다.

 이 시점에서 오와리[尾張]에 있는 이마가와 측  최전선 기지인 나루미 성[鳴海城]으로 갈 수 있는 길을 확보했다고 확신한 요시모토는, 시작부터 전해져 오는 승리 소식에 기분이 좋아져 '오케하자마[おけはざま]'라고 불리는 언덕 위에서 휴식을 취했다. 우타이[謡]를 세 곡 음송(吟誦)했다고 한다. 요시모토를 따르는 군사들은 골짜기를 따라 길게 늘어져 또한 이세 만[伊勢灣]의 해안을 따라 넓게 퍼져있던 상태라 본진에는 500명 정도의 친위대만 지키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날 아침 일찍 키요스 성[清洲城]을 출발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아츠타 궁[熱田宮]에 들러 승리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리고 있을 때 동쪽에서 피어오르는 두 줄기 검은 연기를 보았다. 와시즈, 마루네가 낙성(落城)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노부나가는 만조(滿潮)가 된 해안가의 길을 피해, 나루미 성(城)을 우회하여 테코시가와[테고에(手越川)] 천이라 불리는 작은 하천을 따라 나아갔다. 유일하게 이길 수 있는 기회는 본진을 급습하여 요시모토의 수급을 취하는 것 외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은밀히 '오케하자마'의 산기슭까지 다가갔을 때 세찬 비바람이 몰아쳤다. 돌풍은 노부나가 군(軍)의 후방에서 요시모토 본진 쪽으로 불어 노보리[幟], 사시모노[指物]를 날려버렸다.

 날씨가 맑아지자마자 노부나가는 큰 목소리로 총공격을 명했다. 거듭 돌격해 오는 노부나가 군(軍)에 요시모토가 타고 있던 가마를 지키는 친위대 300여기(騎)는 차츰 밀려 무너지며 언덕을 내려가 쿠츠카게 방면으로 밀려났다. 최초로 달려든 핫토리 고헤이타[服部 小平太]를 요시모토 스스로 칼을 뽑아 대항하여 핫토리 고헤이타의 무릎을 베어 물리쳤지만, 그에 이은 모우리 신스케[毛利 新助]에게 목이 베어졌다. 요시모토 42세로 한창 일할 나이였다.

 노부나가는 그날 중에 요시모토의 목을 가지고 키요스로 개선하였다. 다음 날 수급 확인을 한 후, 키요스에서 약 2Km 정도 떨어진 남쪽의 스가구치[須賀口]라는 곳에 목 무덤을 만들어, 천부경(千部経[각주:5])을 실행케 하고, 불탑을 세워 요시모토의 넋을 기렸다고 한다. 그 후 요시모토의 수급은 나루미 성(城)을 계속 지키며 물러나지 않고 있던 오카베 모토노부[岡部 元信]에게 건내져 스루가[駿河]로 보내졌다.

말년의 도전

 요시모토의 죽음은 에도 시대 이후에 창작된 책들에 의해 쿠게[公家] 문화에 빠진 교만과 방심의 인물로 그려지게 된다. 오하구로[鉄漿]를 해서 상급귀족[公家]처럼 몸을 꾸몄으며 숏다리에 허리가 길어 말에서 떨어졌다거나, 우유부단하여 도무지 센고쿠[戦国]의 무장답지 않은 인물로 그려졌다. 그런 것들은 창작된 요시모토 상(像)이다.

 그렇기는커녕 부친 우지치카가 제정한 영지(領地) 지배법인 '카나 목록[仮名目録]'을 보완한 '카나 목록 추가[仮名目録追加]'라고 하며 추가 21개조를 정하여, 토지조사[検地]의 실시나 상공업 발전 촉진, 부역(賦役)이나 전마(傳馬) 제도의 정비 등 센고쿠 다이묘우[大名]로서 최상급의 영지(領地) 경영, 시책을 착착 실시하여 영내(領內) 장악에 자신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요시모토는 1558년 즈음부터 후계자인 우지자네[氏真)에게 가독을 일부 위임했다. 적어도 안정된 스루가[駿河]를 맡기고 자신은 미카와[三河], 오와리[尾張]라는 신천지의 영토화를 목표로, 상락을 향한 포석을 깔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다.

 새로운 도전을 하고자 했던 요시모토의 의욕은 노부나가에게 산산이 부서져 한 여름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다.

  1. 상경(上京)의 다른 말. 여기서 락(洛)은 낙양(洛陽)의 “낙(洛)”이다. 여러 번 중국 왕조의 수도가 되었기에, 낙양에 간다는 말은 곧 수도로 간다는 말을 의미했다. [본문으로]
  2.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쇼우군 가문[将軍家] [본문으로]
  3. 슈고[守護]란 무로마치 바쿠후[室町 幕府]의 지방관직 [본문으로]
  4. 이는 막부와는 별개로 쿄우토[京都]의 조정에서 내리는 관직. [본문으로]
  5. 명복을 위해서 천 명의 중이 똑 같은 경문을 한 번씩 읽는 것, 반대로 한 명의 승이 천번을 읽을 때도 있다. 짧은 시간 동안 천 명의 중을 모으기 쉽지 않으니 여기선 후자인 것 같음. [본문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 諭吉)- 다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현 1만엔 지폐

니토베 이나조우(新渡戸 稲造) - 다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옛 5000엔 지폐(미국과 일본 사이(태평양)의 가교가 되고 싶다고 하였다)

나츠메 소우세키(夏目 漱石) - 다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옛 1000엔 지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吾輩は猫である) - 네이버 백과 사전

다케다 가쓰요리[武田 勝]

1582 3 11일 할복(割腹) 37.

1546 ~ 1582.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넷째 아들. 스와 씨[諏訪氏]를 상속하지만, 신겐이 죽자 타케다 가문[武田家] 상속. 나가시노 전투[長篠合戦]에서 오다[織田]-토쿠가와[川] 연합군에게 패한 이후 일족, 중신들에게 계속해서 배반당하여 텐모쿠잔 산[天目山] 산기슭인 타노[田野]에서 부인과 아들 노부카츠[信勝]와 함께 자살.








비극의 무장


 명장(名將) 신겐의 뒤를 이었던 타케다 카츠요리의 비극은 1575 5월 나가시노 전투 때 이미 선명히 나타나고 있다. '그 전투는 구식인 활과 화살로 무장한 타케다 군이 신병기 철포로 무장한 오다-토쿠가와 연합군에 졌다'는 식으로 간단히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진상(眞相)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카츠요리에게 통솔력이 부족했음을 한탄한, 신겐을 오랫동안 섬기며 싸워 왔던 사무라이다이쇼우[侍大将]들이 오히려 나가시노 전투에서 죽음을 선택한 것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카츠요리의 멸망은 전투의 치졸함보다도, 부친 신겐이 쌓아 올린 군단을 유지할 수 없었던 통솔력 부족이 전면적으로 나왔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카츠요리가 막 타케다 가문을 상속 받았을 때 강력한 지지기반이었던 시나노[信濃] 군단이, 멸망에 가까워질 즈음에는 모두 배반하여 반기(反旗)를 든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또한 1581년에 들어서 신푸 성[新府城]을 축성했지만, 성에 있었던 것은 불과 3개월하고 보름. 공격태세를 취하기 보다 방어태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에도 비극이 있었다. 더구나 자기 영지(領地)로 적을 끌어들여 물리친다는 그 자세가 너무도 후수(後手)로 인식된 것이다. 때문에 그 멸망은 카츠요리에게 있어서 태어날 때부터 가진 비극성을 포함하고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카츠요리 부인의 기원(祈願文)


 그 멸망의 모습을 전해주는 사료로써, 카츠요리의 부인 호우죠우 씨[北条氏]-19-타케다 하치만 신사[武田八幡神社]에 올린 기원문과 비구니인 리케이니[理慶尼][각주:1]가 쓴 '타케다 멸망기[武田滅亡記]'[각주:2]가 유명하다. 부인이 하치만 사[八幡社]에 올린 기원문을 의역해 보면,

신이시여,

카츠요리는 운을 하늘에 맡겨 제 목숨 아끼지 않고 적진을 향하였습니다. 이렇게 궁지에 몰린 와중에 가신들 중에는 정의(正義)를 모르는 사람도 있어 그들의 마음은 자신들의 안위에만 있사옵니다. 특히 키소 요시마사[ 義昌]는 조그만 이익에 (눈이 멀어) 신의 뜻을 더럽히고 있으며 불쌍하게도 가족까지 버리고[각주:3], 모반의 병사를 일으켜 버렸습니다. 또한 타케다 가문 누대(累代)에 걸쳐 은혜를 받았던 후다이[譜代] 가신들 까지도 모반인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카츠요리에게 반항하려 하고 있습니다.

라고 누대에 걸쳐 은혜를 받은 자들까지 모두 배반해 버렸다고 신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에 마음이 아플 따름이다. 이 부인이 신에게 호소한 것을 보면 카이[甲斐]의 산천과 카이의 사람들에게 보내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원망과 분노가 타오르는 것을 알 수 있다.


텐모쿠잔[天目山]의 이슬


 이리하여 모든 것을 잃고 신푸 성()을 불태운 뒤 그 성을 뒤로 한 카츠요리 일행 7백 여명은 하루 동안 이동하여 카시오야마 산[柏尾山山]다이젠 사[大善寺]에 이르렀는데, 여기서 하룻밤 다케다 일족의 리케이니[理慶尼]에게 신세를 졌다. 여기서 츠루 군[都留郡]의 이와도노 성[岩殿城]을 목적지로 하였는데, 여기서 재기(再起)를 꾀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사고토우게[笹子峠] 고개의 입구에서 반기를 든 오야마다 노부시게([小山田 信茂]에게 자신의 영지로 들어오는 것을 저지당한 카츠요리 일행은 어쩔 수 없이 텐모쿠잔 기슭의 타노[田野]에서 자신들 운명의 마지막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타노에는 '한 손 베기[片手切り]'[각주:4]라 불리는 사적이 있는데, 이 근방에서 아군에게 배신당하거나 오다 군[織田軍]의 습격을 받은 카츠요리(37)가 부인(19), 노부카츠(16) 들과 함께 자살했다고 한다. 마지막을 맞이한 때 카츠요리 부인은,

검은 머리 나부끼듯 흔들리는 세상에서,

가없는 마음에 떨어져 지워지는 이슬 방울의 흔적.

[黒髪れたる世ぞ,はてしなき思いに消ゆる露の玉の]

라는 사세구(辭世句)를 남겼다고 [코우란키()]는 전하고 있다.


 그 후 리케이니[
理慶尼]는 카츠요리 일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타노[田野]에 가서 죽은 사람들의 넋을 하나하나 기렸다고 한다.

케이토쿠 원[景徳院]에 있는 카츠요리의 묘(墓) [야나나시 현[山梨県] 야마토 촌[大和村]

  1. 타케다 신겐과는 사촌(신겐의 아비인 노부토라의 동생(카츠누마 노부토모[勝沼 信友]의 딸)이며, 카츠요리의 유모(乳母)였다. [본문으로]
  2. 다른 이름으론 '리케니기[理慶尼記]'. [본문으로]
  3. 인질로 바쳤던 70세의 모친, 13살의 장남, 17살의 장녀 모두 사형. [본문으로]
  4. 카츠요리의 측근 츠치야 마사츠네[土屋 昌恒]가 좁은 외길에서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덩굴을 한 손으로 잡고 한 손으로만 싸웠다고 해서 붙은 이름, ‘한 손 천명 베기[片手千人切り]’라고도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