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출처: http://www.nijl.ac.jp/index.html>

 스에 타카후사는 그의 주군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 義隆)와 무엇이든 대조적이었다. 요시타카가 문화에 탐닉했던 것에 반해 타카후사는 그쪽 방면으로는 전혀 흥미를 나타내지 않아 당시 유행이었던 렌가(連歌) 모임조차 참석하지 않았다.

 스에 씨(氏)는 오오우치 가문의 필두 중신이며 원래는 오오우치 씨(氏)의 지족(支族)이다. 부친 오키후사(興房)의 뒤를 이은 타카후사도 오오우치 가문에서 위세가 강하여 주군 요시타카조차 회담 뒤에는 일부러 타카후사를 배웅할 정도였다고 한다.

 무장으로써도 뛰어났다. 사서는 타카후사의 인물상을 [서국(西国) 무쌍의 사무라이 다이쇼우(侍大将), 지용(智勇)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평하고 있다. 오오우치 씨(氏)의 이즈모(出雲) 원정이 실패로 끝나 전군이 철퇴하였을 때 타카후사는 부하들에게 쌀을 주고 자신을 생선의 내장을 먹으며 굶주림을 참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이 이즈모(出雲) 아마고 원정의 실패가 - 타카후사가 요시타카를 정점으로 하는 문치파(文治派)를 공격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었다.

 처음 목표로 삼은 것은 요시타카의 총신(寵臣) 사가라 타케토우(相良 武任)였다. 비서관(祐筆)에서 출세한 문치파의 톱이었다. 신참(新參)이면서 후다이(譜代)의 중신 스에 타카후사 등과 같은 종오위하(從五位下)에 임명 받지만 1545년 5월 타케토우는 타카후사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여 머리를 밀고 히고(肥後)의 사가라(相良)로 물러났다. 타카후사의 행동은 노골적이 되어 주군 요시타카를 은거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기까지 이르렀다.

 이 시점까지 아직 다른 무장들은 타카후사에게 찬동하고 있지 않았다. 타카후사에 다음가는 중신 나이토우 오키모리(内藤 興盛), 스기 시게노리(杉 重矩)는 오히려 타카후사의 위험한 야망을 꿰뚫어 보고 주군에게 [스에 암살]을 권할 정도였다. 하지만 문화인(文化人)인 요시타카는 아무래도 타카후사 암살이라는 과감한 수단을 취할 질 못했다. 이 우유부단함이 후에 자신의 파멸을 부르게 된다.

 주군과 타카후사의 암투는 계속되었다. 요시타카도 나름대로 손은 썼다. 예전에 총애하던 사가라 타케토우를 다시 가문으로 불러들였으며,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장남 타카모토(隆元)에게 자신의 양녀[각주:1]를 시집 보내어 끈을 강화하였다. 모략가 모토나리는 이 때 요시타카와 연락을 하는 한편, 타카후사의 밀사(密使)와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

 어차피 요시타카 측은 문약(文弱)한 무리였다. 대책이 허술했다. 사가라 타케토우 등은 “스에가 반란을 일으킬 턱이 없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3년이 지난 후 모든 정세가 주군 요시타카 측에 불리하게 되었다. 여전히 요시타카의 문화적 탐닉은 고쳐질 낌새도 보이지 않았으며 그에 따른 낭비로 인하여 가문 내의 인심은 떠나가 버린 것이다. 반 요시타카 감정은 스에 씨(氏)뿐만이 아닌 가문 전체로 퍼져있었다.
 타카후사에게 반대하고 있는 스기 시게노리도 스에의 계획에 참가하였고, 나이토우 씨(氏)도 심정적으로는 동조하는 태도를 취한 것이다.

 1550년. 타카후사는 휴가를 청하여 자신의 영지(領地) 와카야마(若山)성(城)으로 돌아와서는 모반 계획을 착착 짜기 시작했다.

 결국 다음 해인 1551년 8월 28일. 반란의 병사를 일으켰다. 스에 이하 스기, 나이토우 등의 군세 5000여가 야마구치(山口)로 침입하여 문치파의 저택을 돌아가며 약탈하였고 오오우치의 저택을 습격하였다. 오오우치 측은 정면으로 대항할 수 있는 병사가 적었으며 거기에 대부분이 뿔뿔이 도망쳤다.
 요시타카 주종은 밤의 어둠을 이용하여 산길을 이용하여 한반도에서 보면 동해(東海) 쪽의
센자키(仙崎) 항(港)으로 피하였지만 결국 이곳의 타이네이(大寧)사(寺)에서 자살하였다.

 타카후사는 이후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를 영유(領有)하여, 츄우고쿠(中国) 일대에 위세를 떨쳤지만, 1555년 9월 30일 모우리 모토나리와 이츠쿠시마(厳島)에서 싸워 전사(戰死)하였다.

큰 지도에서 이츠쿠시마(厳島) 전투 보기

[스에 다카후사(陶 隆房)]
주군 요시타카를 멸한 후 하루카타(晴賢)라는 이름을 칭했다[각주:2]. 1539년 18살의 나이에 가독을 이어 오오우치 가문의 가로(家老)가 되었다. 1541년 모우리 모토나리와 협력하여 아마고 하루히사(尼子 晴久[각주:3])를 물리쳤다. 1551년 오오우치 요시타카를 멸한 뒤,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의 동생 하루히데를 맞이하여 오오우치 가문을 잇게 한 뒤 요시나가라는 이름을 칭하게 하였다. 1555년 이츠쿠시마에서 패사(敗死).

  1. 나이토우 오키모리의 딸. 때문에 나이토우 가문은 이츠쿠시마(厳島) 전투 때, 오키모리가 죽은 다음이기도 하여 타카후사 지지파와 모토나리 지지파로 나뉘었다. [본문으로]
  2. 요시타카의 양자로 꼭두각시로 세운 오오우치 요시나가(大内 義長)가 양자로 오기 전의 이름이 오오토모 '하루'히데(晴英)였기에 그 이름을 따서. [본문으로]
  3. 츠네히사(経久)의 손자. [본문으로]


 아마고 츠네히사[각주:1] 이즈모[出雲] 슈고다이[守護代][각주:2]의 직책을 빼앗긴 뒤 2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도 와신상담 끝에 옛 지위 회복의 비책을 짜내어 결국 그것을 이루어 냈을 뿐만 아니라 산인[山陰]의 패자(覇者)까지 된 굉장한 인물이다.


 떠돌이 생활을 할 때 고생을 많이 하였기에 백성이나 어민(漁民)들에게까지 잘 보살폈고, 언제나 따스한 미소를 잃는 일이 없었기에 여자 아이들조차 친근감을 가졌다고 한다.

 가신(家臣)들에게 대하는 태도는 더욱 헌신적이었다. 부상 당한 자는 손수 간호를 하였으며, 싸우다 죽은 이의 육친에게는 식록(食祿)을 늘려주었고, 명복을 빌며 직접 불경(佛經)을 읽었다. 이 때문에 휘하 병사들은 츠네히사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고 씨[尼子氏]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조부(祖父) 모치히사[持久] 때 부터이다.

 모치히사는 이즈모[出雲]의 슈고[守護] 쿄우고쿠 씨[京極氏]에게 중용 받아 슈고다이까지 출세해서는 토다갓산 성[富田月山城]을 본거지로 삼았다.


 츠네히사의 부친 키요사다[]가 뒤를 이어서는 활발히 영토를 넓혀 미호노세키[美保関]를 손에 넣음으로써 아마고 씨의 재정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즉 이 세키[関][각주:3]의 세키센[関銭][각주:4]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원래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것이지만 횡령하였다.


 강성해졌던 아마고 씨는 츠네히사의 시대가 되자 일시 몰락한다.

 아마고 씨가 너무도 강대해 졌기에 슈고[守護] 쿄우고쿠 씨가 미사와[沢], 엔야[塩谷], 미토야[三刀屋] 등의 호족을 꼬드겨 츠네히사를 공격시켜다. 츠네히사는 슈고다이에서 쫓겨나게 된 것이다.


 토다갓산 성에서 쫓겨난 츠네히사는 이곳 저곳을 방랑하게 된다.

 눈보라가 치던 어느 날 밤. 츠네히사는 옛 신하 야마나카 카츠시게[山中 勝重][각주:5]의 집에 방문한다. 얼굴을 가리는 삿갓[深編笠]을 쓰고, 살을 에이는 추위에도 얇은 마()로 된 옷 한 벌이라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이미 굶주림과 추위로 삐쩍 말라있었다. 야마나카는 젊은 주인의 몰락한 모습에 눈물을 흘리며 불을 쪼이게 하고 술을 내와 위로하였다.

 그러나 츠네히사의 의기는 드높았다. 몸을 녹이면서 토다갓산 성 탈환 계획을 털어놓았던 것이다. 이 야마나카 일당의 협력덕택에 아마고 재기의 발판이 되는 토다갓산 성 탈환이 가능하게 된다.

 

 1485년의 섣달 그믐날 밤이었다.
 
목적지는 예전의 본거지 토다갓산 성이었다. 성주는 츠네히사에게서 슈고다이의 직책과 성을 뺏어간 엔야 카몬노스케[塩谷 掃部助]였다.
아마고 일당은 밤의 어두움을 이용해서 성 안으로 숨어들었다. 천연의 요해(要害)였지만 예전엔 자신의 성이었다. 그들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잠입에 성공하였다.

 

 다음 날은 설날이었다.

 아마고 츠네히사의 노림 수는 신년 축하 행사였다. 츠네히사는 이미 신년 축하에 흥을 돋구는 사당패 가마[賀麻] 일당을 포섭해 두고 있었다. 성 안에서 큰 북(太鼓)이나 작은 북()의 박자에 맞추어 춤이 시작되자 그와 동시에 갑자기 성 안의 곳곳에 숨어 있던 아마고의 군사들이 일제히 불을 지르며 공격하였다. 춤을 추고 있던 가마 일당도 아마고 측 군사들의 함성을 듣자 준비해 두었던 갑옷으로 갈아입고는 성병(城兵)들에게 칼질을 퍼부었다. 아마고의 기습은 보기 좋게 성공하여 불과 100여명으로 성병 700명 이상을 물리쳤다.

 이렇게 토다 성을 탈환한 후 츠네히사는 최대의 강적인 미사와 씨[三沢氏]를 물리치는 것에도 모략을 이용하게 된다.

 

 중신(重臣)이 된 야마나카 카츠시게에게 일부러 누명을 씌어 미사와 씨에게 도망치게 만든 것이다. 야마나카는 일년간 미사와 씨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이제 미사와는 야마나카 카츠시게를 완전히 신용하였. 야마나카 카츠시게는 “츠네히사를 위해 충성을 다하였건만 사소한 죄를 하나 지었다고 저를 쫓아내어 여기로 왔는데, 츠네히사는 제 부인과 자식, 늙은 모친마저 감옥에 가두고 학대하고 있습니다. 억울해 견딜 수 없으니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고 말했다.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미사와는 정예 500명을 야마나카에게 맡겼고, 그는 이 500명을 이끌고 토다 성으로 데리고 갔다. 토다갓산에 도착한 야마나카 카츠시게는 성 안에 있는 자기의 옛 부하들에게 연락을 하여 내응하게 만든다며 사라졌고, 사라진 사이 츠네히사와 함께 병사들을 이끌고 와 미사와의 병사들을 격파하였다.

 

 아마고 씨는 이후 각지에 진출하여 산인산요우[山陽]11개 지역[]에 위세를 떨치는 거대 세력으로 발전해 간다. 그러나 증손자인 요시히사[義久]의 대가 되어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에게 멸망 당한다.

 

[아마고 쓰네히사(尼子 )]

키요사다[清定]의 아들. 이즈모[出雲], 오키[岐], 이와미[石見], 이나바[因幡], 호우키[伯耆]를 영유(領有). 모우리 모토나리도 한때 휘하에 두었다. 1541년 죽었다. 84세라고 한다.

  1. ‘아마코’라고 읽을 수도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지방관인 슈고[守護]의 대리. 오우닌의 난[応仁の乱] 이전만 해도 해당 지역에 가지 않고 주로 쿄우[京]에서 정무를 보았기에, 그런 슈고를 대신해서 해당 지역에 가서 실무를 보았다. [본문으로]
  3. 지금의 세관이라 할 수 있는 곳. 통과하려면 돈을 내어야 했다. [본문으로]
  4. 세키 통행을 위해 내는 돈. [본문으로]
  5. 이 사람의 손자가 후에 아마고 재흥군을 이끌게 되는 야마나카 유키모리[山中 幸盛=시카노스케[鹿之助]]이다. [본문으로]

2008년 4월 9일.

그냥 생각난 것 2008. 4. 9. 19:29 Posted by 발해지랑

은하영웅전설 1

다나카 요시키 | 윤덕주 옮김

서울문화사 2000.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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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의 등장은,
민중이란 근본적으로 민주적인 사고와 그에 따르는 책임보다는
명령과 복종, 그에 따르는 면책 쪽을 선호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뚜렷한 역사적 사례다.
민주정치에서 실정(失政)은 부적격한 위정자를 선출한 민중 자신의 책임이지만 전제정치에서는 그렇지 않다.
민중은 자기 반성을 하기보다는 손쉽게 또한 무책임하게 위정자를 욕할 수 있는 처지를 즐기는 것이다.

- D.싱클레어 -

민중들이 "루돌프 만세"를 외치는 소리가 내 방에도 들려온다.
그들이 자신들을 목매달 사형집행관에게 만세를 불러주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날들이 필요할까?
- 핫산 엘 사이드 -
2008년 4월 9일 19시 27분....
왕당파의 압승이라는 소식을 듣고 생각난 구절.
부디... 내 무지와 착각으로 인해 그들의 승리를 기뻐할 수 없는 것이길 빈다..

ps;...[열악 유전자 배제법]은 왜 [의료보험 민영화]를 떠올리게 할까?

아키[安芸]의 산골에 있던 미력(微力)한 소영주(小領主)에서 출발하여, 실로 10개 쿠니[]에 걸친 거대 다이묘우[大名]로 성장한 모우리 모토나리. 그는 자신의 생애를 시종일관 철저한 모략가(謀略家)로 살았다. 그의 고독한 성장 과정이 원인이었다.

 1558 8월에 장남 타카모토[隆元]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5살에 어머니와 이별하고 10살에 아버지와 사별(死別)하였다. 오로지 형 오키모토[興元]만을 의지하였지만 이 형도 내가 19살 때 죽어버렸다. 이후로는 부모형제도 없고 백부, 조카 등 친척 중에서도 도와주는 친척이 없어, 단지 혼자서 오늘날까지 어떻게든 어려움을 헤치고 살아왔던 것이다……
고 술회하였다.


 모토나리는 모우리 씨[毛利氏]의 본거지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에서 당주 히로모토[弘元]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7살 때까지 코오리야마의 서쪽에 있는 타지히[多治比] 루가케 성[猿掛城]에서 살게 되었다. 이곳은 모우리 가문의 부하 격인 이노우에[井上] 일족의 힘이 강하여 그들의 보호를 받기도 했지만 그대신 모토나리의 땅을 횡령 당하거나 하였다. 모토나리는 이때부터 20여 년간, 이노우에 씨()의 세력 아래서 인종의 나날을 보내었다. 이런 인종의 나날 속에서 옆 군()의 호족 킷카와 쿠니츠네[吉川 国経]의 딸 묘우큐우[妙玖]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1523년에는 장남 타카모토를 얻었다. 모토나리는 27살이 되어 있었다. 이해의 여름이 끝날 즈음 모토나리의 환경이 급변하였다.


 모우리 종가(宗家)인 형 오키모토가 24살에 죽고(1516), 그 뒤를 이은 오키모토의 아들 코우쇼우마루[幸松丸]도 불과 9살로 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 후임 자리를 두고 내란이 일어났다.

 모토나리와 배다른 동생인 모토츠나[元綱[각주:1]]를 축으로 가문이 둘로 나뉘어진 것이다. 이 내란 때 이노우에 일족의 도움으로 모토나리가 상속자의 자리를 손에 넣었다. 모토나리는 이때 라이벌 모토츠나를 죽였다[각주:2].

 조연에서 단번에 주연에 오른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모우리 가문의 당주가 된 모토나리는 기뻤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옹립해 준 이노우에 일족에게는 또다시 갚아야 할 빚를 만들고 말았다. 때문에 모토나리는 여전히 긴 인종의 세월을 이어가야 했다.


 그의 고독하고 남을 믿지 못하는 마음은 이때 배양된 것이다. 후에 이러한 고백을 하게 된다.

 '우리 가문이 잘 되라고 하는 사람은 다른 나라에 있을지언정, 이 나라에는 한 사람도 없다.'

 이것은 모토나리의 소위 네거티브한 면인데, 포지티브한 면을 나타내는 에피소드로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13살 때였다. 가신과 함께 이츠쿠시마 신사[(神社]에 참배한 후 모토나리는 가신에게 무엇을 빌었는지를 물었다. 가신은 우리 주군이 츄우고쿠[国]의 큰 영주가 되게 해달라 빌었다고 했다. 그러자 모토나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몽둥이만큼 빌어도 바늘 정도밖에 이루어 지지 않는 것이다. 어차피 빌 거라면 어째서 천하를 잡게 해달라고 빌지 않은 것이냐?”

 기개와 도량이 큰 인물이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일화이다[각주:3].


 또한 17살 때 중국 명()나라 사람들이 모우리 가문에 들렸는데, 그 일행 중에 관상을 보는 사람이 모토나리의 얼굴을 살펴보고서는,

 너는 고조, 태종의 관상을 겸비하고 있다. 장래 반드시 위세를 사방에 떨칠 수 있을 것이다

 고 예언했다고도 한다.


 모토나리가 당시 직면하고 있던 츄우고쿠[国]의 정세를 말하자면, 산인[山陰] 지방에는 아마고 씨[尼子氏]가 패권을 쥐고 있었고,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에서 북부 큐우슈우[九州]에 걸쳐서는 오오우치 씨[氏]가 세력을 뻗고 있었다. 두 거대 세력에 끼인 소영주(小領主) 모우리 가문이 살아 남기 위해서는 고도의 외교적 수완이 필요했다.


 1531.

 아마고 하루히사[尼子 晴久][각주:4]와 의형제를 맺고 있었지만, 1537년에 결별하고서 그때까지 적이었던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 義隆]에게 적자인 타카모토를 인질로 받치고 그 휘하에 들어갔다.


 1541년 가을.

 아마고 씨() 3만의 병사를 이끌고 모우리의 본거지 코오리야마[郡山]로 진격해 왔을 때 오오우치 요시타카는 스에 하루카타[陶 晴賢]에게 1만의 군세를 주어 구원하도록 하였다. 아마고 군세는 이때 큰 눈을 만나 보급선이 끊겨 참패를 당하였다. 오오우치 군세도 아마고 군세를 이즈모[出雲]까지 깊숙이 추격하였다가 대패를 당했다.


 이 양 세력의 약체화는 모우리 가문이 바라던 바였다. 모토나리는 곧바로 아키 슈고[安芸守護] 타케다 씨[武田氏]를 멸하여 아키[安芸]에 군림한 것이다. 또한 이 지배 체제를 강고히 하기 위해서 모토나리는 세토 내해[瀬戸內海] 연안의 호족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과 산인[山陰]국경에 있는 킷카와 가문[吉川家]을 모략을 이용해 탈취하여, 코바야카와 가문에는 셋째인 타카카게[隆景], 킷카와 가문에는 둘째인 모토하루[元春]를 각 가문의 당주 자리에 앉혔다. 이름만 다를 뿐 실상은 어디까지나 모우리 가문의 분가(分家), 세상에서는 이를 '모우리 양 천[毛利 ][각주:5]'이라고 불렀다.


 양 가문을 손에 넣자, 모토나리는 지금이야 말로 모우리 가문을 장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였다. 중신 이노우에 일족의 숙청이었다. 20년간 모토나리는 그들의 전횡(專橫)을 참아왔던 것이다. 그 숙청은 철저의 극에 달하여 일족의 장로 모토카네[元兼] 이하 30명 이상을 죽였다. 이 과감한 결단으로 인해 가문 내의 공포는 굉장했다고 한다. 모토나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강력한 권력을 일거에 장악하여 가신들에게 복종을 맹세시켰던 것이다.


 이 결집된 힘을 이용하여 모우리 가문은 유명한 이츠쿠시마 전투[島の戦い]에 돌입하게 된다.

 츄우고쿠[国]의 명문 오오우치 가문[内家]을 격퇴하여 더욱 크게 웅비할 수 있는 기회였다. 당시 오오우치 가문은 스에 하루카타가 주군 요시타카를 자살로 몰아 넣고, 그 자리에 요시나가[義長]를 앉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전투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는 모략전에서 모토나리는 진가를 발휘하였다.

 오오우치 씨()의 거점인 야마구치[山口]에 모우리의 밀정들을 잠입시켰다. 모토나리는 그들에게 스에[]의 부하인 용장() 에라 후사히데[江良 房栄]가 모우리와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을 유포시키게 하였다. 작은 의혹들이 끊임없이 이어지자, 결국 하루카타도 그런 소문을 믿고 후사히데를 죽여버린 것이다.


 1555년 봄.

 모토나리는 가신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츠쿠시마 섬[島]에 미야오 성[宮尾城]을 쌓았다. 적의 대군을 작은 섬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미끼였다.

 성을 쌓으려고 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다. 완성할 때까지 스에[陶] 군이 쳐들어 오지 않으면 좋겠는데……”

 이런 생각을 적측에 새어 나갈 수 있도록 모토나리를 손을 써 두었다. 하루카타가 조금 찔러보자 이외로 세찬 반응이 일어났다. 모우리의 숙장(宿) 중의 한 사람이 내응을 약속해 온 것이다.

 모든 것은 모토나리가 놓은 덫이었다.

 결국 하루카타는 모토나리의 유인에 넘어왔다. 하루카타는 2만의 대군을 500척의 군선에 태워서는 이츠쿠시마에 상륙시킨 후 토우노오카[岡]에 본진을 두고서는, 모우리의 미야오 성()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1555 9 21일이었다.

 30일 아침, 모우리 군은 은밀히 행동을 개시하였다. 비바람 세찬 날, 밤의 어둠을 이용하여 100척의 배로 이츠쿠시마[]로 건너 가서는 기습한 것이다.

 스에 군 2만은 4천의 모우리 군에 참패. 총대장 하루카타는 겨우 도망쳤지만 결국 섬의 서안 오오에[大江]의 바위 그늘에서 배를 갈랐다.



크게 보기                                                      < 이츠쿠시마 전투>

 이후 모토나리는 여세를 몰아 빙고[備後], 아키[安芸],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 4개 쿠니[国]를 손안에 넣었다.

 

 모토나리는 죽을 때까지 현역에서 물러날 수가 없었는데, 자신이 죽은 후의 것까지 절치부심하였다.

 3명의 아들에 대한 교훈장[三子],

 '너희 셋 중에 조금이라도 사이가 벌어지기라도 하면 셋 다 멸망 당한다고 생각할 것'

 이라 써서 일치단결의 중요성을 말했으며, 세 아들에게서 서약서까지 받아 두었다.

 2차 대전 전의 일본 국정교과서에 실렸던 [세 대의 화살 교훈]은 유명한 이야기다. 한 대의 화살은 부러뜨릴 수가 있지만, 세 대를 합치면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깨닫게 하여 서로 협력할 것을 맹세케 하였다 한다. 이것은 위의 교훈장을 각색한 것이라고 한다.[각주:6]

 

 1570, 손자인 테루모토[輝元]를 총대장으로 하여 이즈모[出雲]의 아마고[尼子]를 공략하러 보낸 모토나리는 그 보고를 듣지 못하고 다음 해 파란만장했던 생애의 막을 내렸다.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

1497년 아키[安芸] 요시다[吉田]지토우[地頭] 가문에서 태어났다. 처음엔 아마고 하루히사[尼子 晴久]에 속하였고, 후에 오오우치[内] 휘하가 된다. 킷카와-코바야카와 가문을 손에 넣은 다음부터 차츰 세력을 넓혀, 스에 하루카타를 이츠쿠시마[島]에서 물리치고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에서 패권을 확립. 후에 츄우고쿠[国] 10개 쿠니[国]와 부젠[豊前]이요[伊予]의 일부를 영유하는 거대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1571 6 14일 죽었다. 75.

  1. 가지고 있던 영지(領地)가 아이오우[相合]에 있었기에 풀네임은 ‘아이오우 모토츠나[相合 元綱]’라 하였다. [본문으로]
  2. 이때 모토츠나는 아마고[尼子]의 푸쉬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모토나리는 아마고 가문과 멀어지게 된다. [본문으로]
  3. 여담으로 나이를 먹고 죽기 전에는 '천하를 지배하는 자가 아무리 영화를 자랑하더라도, 몇 대가 지나고 나면 쇠하게 되어 자손까지 그 영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천하에 이름을 떨치기 보다는 일본을 다섯으로 나눠 그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잘 보전하여 자자손손까지 이 위세를 남겨라'……는 말을 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4. 아마고 츠네히사[尼子 経久]의 손자 [본문으로]
  5. 코바야카와[小早'川']든 킷카와[吉'川']든 성에 내 천川자가 들어가 있기 때문. [본문으로]
  6. 이 이야기가 이어져 예전 노정윤이 뛰었던 일본 J리그의 산프레체 히로시마[サンフレッチェ広島]의 ‘산프레체’는, 일본 말로 3을 의미하는 ‘산(サン)’과 화살들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프레체(frecce)를 섞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떼법"하니까 생각난 거...

그냥 생각난 것 2008. 3. 20. 20:43 Posted by 발해지랑
대통령께서 "떼법 정서"에 대해서 언급하시자 마자 쏟아지는 "떼법"을 단 기사들...
그러자 생각나는 작년 여름의
돌발영상
정말 한나라당은 축복받은 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