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쿠고[筑後] 야나가와 성[柳川城]의 성주 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 宗茂]는 용맹하고 정직한 성격이었다. 이러 성격 덕분에 나중에 기적적인 복귀를 할 수 있게 된다.

 무네시게는 큐우슈우[九州]의 강호인 오오토모 씨[大友氏]의 일족 타카하시 죠우운[高橋 紹運]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타치바나 도우세츠[立花 道雪]의 양자가 되었다.[각주:1] 이 도우세츠라는 인물은 오오토모 가문에서도 굴지의 명장이었다.

 무네시게는 이 도우세츠에게 스파르타 교육을 받으며 키워졌다.
 예를 들면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식사 중의 일이다. 도우세츠가 보자 무네시게는 생선의 뼈를 발라내며 입안에서도 뼈를 혀로 골라내서는 손으로 집어 상 위에 놓았다. 도우세츠는 천둥 같은 큰소리를 지르며 화냈다. 
 “계집애처럼 뼈를 골라내며 쳐먹다니. 머리부터 입에 넣어라. 뼈도 이빨로 으깨어 삼켜라. 타치바나 가문을 잇는다고 하는 녀석이 생선 뼈도 삼기지 못하다니 앞길도 훤하구나!”
 이렇게 성장한 무네시게이다.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그 용명(勇名)은 높아져만 갔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의 출진명령으로 인하여 전국에서 여러 다이묘우[大名]이 쿄우토[京都]로 상경하였다. 이때 히데요시[秀吉]는 일부러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불러 그 휘하에 있는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도 함께 호출하여 타치바나 무네시게와 대면하게 한 뒤,
 “동국(東国)에 그 누구보다 뛰어난 혼다 헤이하치[本多 平八], 그리고 서국무쌍의 타치바나 무네시게.”라고 하며 여러 다이묘우들 앞에서 소개했다고 한다.

 무네시게는 용맹함에 더하여 인정미도 넘쳤다고 한다.
 히데요시가 큐우슈우의 시마즈 가문을 정벌하기 위해 큐우슈우로 내려오자, 무네시게는 그런 토요토미 가문의 휘하 무장으로 어느 성을 공격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무네시게는 히데요시를 알현하게 될 일이 생겼는데, 그때 적의 성에 사자를 보내어,
 “태합[太閤] 전하를 알현하기 위해 잠시 휴전하고자 하오. 당신들이 지금 정전을 받아준다면 반드시 당신들을 위해 구명탄원하겠소.”
 라고 말하였기에, 성 측도 무네시게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맡겼다고 한다.
 무네시게가 알현하러 오자 히데요시는 굉장히 기뻐하며 명마(名馬)와 명도(名刀)까지 주며 대접하였지만, 무네시게가 성을 수비하는 자들을 살려달라고 하자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무네시게는 열심히 탄원하였다. 너무도 끈질기게 달라붙자 히데요시의 참모인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가 손으로 저리가라는 시늉까지 하며 쫓아내려 할 정도였다. 하지만 무네시게는 굴하지 않고,
 “그들을 살려주시지 않는다면 저도 역시 함께 죽여주십시오”
라고 힘주어 말했다.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무네시게가 이렇게까지 나오자 결국 받아들여 수성하던 자들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고 한다.

 도리를 지킨다는 점에서도 무네시게는 명쾌했다. 삿사 나리마사가 다스리기 시작한 히고[肥後]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무네시게도 동원되어 공적을 세웠는데, 히데요시는 이때의 공적에 대한 상으로 무네시게를 사위(四位) 지쥬우[侍従]에 임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무네시게는 이때,
 “생각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하오나, 주인 뻘인 오오토모 요시무네[大友義統 = 소우린[宗麟]의 아들, 분고[豊後] 후나이 성[府内城]의 성주]의 관위가 오위(五位)이기에, 관위로 주인을 뛰어넘는 것은 도리가 아니옵니다.”
고 하며 오위(五位)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히데요시의 의향에 따라 사위(四位)에 서임되었다.[각주:2]

 임진왜란 때 무네시게의 용맹함에 대해서도 명성이 높다. 조선 측에 “일본군의 맹장 타치바나”라 평판이 높을 정도였다.
 특히 경기도 벽제관(碧蹄館)에서는 명나라 군의 총대장 이여송(李如松)을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와 함께 격파하였다. 
 이때 일본군의 군감(軍監)이었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무네시게에게 한가지 제안을 하였다. 이렇게 발군의 무공을 세우더라도 히데요시[秀吉]에게는 총사령관인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공적으로 알려질 터이지만, 만약 나에게 부탁한다면  무네시게의 공적으로 히데요시에게 전달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무네시게는 쌀쌀맞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거참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는구려. 있는 그대로 태합 전하에게 전하는 것이 군감인 당신의 임무가 아니었습니까? 부탁하면 잘 말해주겠다니 그 무슨 소리입니까?”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에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할 정도로 권세를 부리던 미츠나리라 하더라도 굴함이 없는 강직함이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서군 측에 서 오우미[近江]의 쿄우고쿠 타카츠구[京極 高次]가 지키는 오오츠 성[大津城]을 공략하였지만, 주전장(主戰場)인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合戦]에서 서군은 참패하였다. 무네시게는 군을 되돌려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입성한 뒤 동군에 대한 철저항전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네시게는 할 수 없이 군을 재정비한 뒤 큐우슈우[九州] 야나가와[柳川]로 철수하였다.
 도중 역시 같은 서군에 서서 장렬한 적중돌파에 이은 철수를 감행한 사츠마[薩摩]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와 맞닥뜨리게 되었다.[각주:3] 
 타치바나 가문의 부대는 거의 손실이 없는 편인 것에 비해, 시마즈 가문의 부대는 참담한 모습의 패잔병으로 7~80명에 불과했다. 이를 보고 타치바나의 가신들 중에는, 
 “지금이야말로 아버님의 원수를!” 
 하고 은밀히 무네시게에게 권하는 자가 있었다. 무네시게의 친아비 타카하시 죠우운[高橋紹運]은 시마즈와의 전투에서 성을 함락당해 자해했기 때문이다.[각주:4]
 무네시게는 그 가신에게 용사가 할 짓이 아니라며 혼을 내고는, 시마즈와 함께 일심하여 큐우슈우로 향했다고 한다.[각주:5]
 나중에 시마즈에서는 이때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무네시게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에게 야나가와 성[柳川城]가 공격 당했을 때 원군을 보냈다.[각주:6]

 야나가와로 귀향한 뒤 큐우슈우에 있던 동군 측의 무장들과 싸웠지만 승산이 없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개성하였다. 무네시게가 성을 떠날 날이 되자, 영내의 백성 150여명 정도가 무네시게의 앞길을 막고,
 “치쿠고[筑後] 네 고을(四郡)의 백성들 모두 무네시게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칠 각오이오니, 부디 성으로 돌아가시옵소서”
하고 탄원한 것이다.
 무네시게는 백성들의 마음씀씀이에 감사한 뒤, 싸우지 않고 항복하는 것은 영민을 위해 개성하는 것임을 알리자, 백성들은 모두 엉엉 울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무네시게는 일개 낭인의 신분으로 전락하지만 기적적으로 컴백을 이루어낸다. 유랑하던 무네시게를 이에야스[家康]가 고용한 것이다. 처음엔 오우슈우[奥州] 타나쿠라[棚倉] 1만석이었지만, 차츰 승진하여 결국 옛 영지였던 치쿠고[筑後] 야나가와[柳川] 10만석[각주:7]의 성주로 복귀한 것이다. 무네시게의 인덕이 이에야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 宗茂]
1568년생. 무네토라[宗虎, 統虎], 시게토라[鎮虎], 마사나리[正成] 등 여러 번 이름을 바꾸었고 ‘무네시게[宗茂]’라고 한 것은 말년에 와서이다. 1587년 치쿠고[筑後]의 네 개 군(四郡)에 13만 2천 석을 하사 받아 야나가와 성[柳川城]의 성주가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서군에 속하였기에, 전쟁 후 치쿠고 영내에서 나베시마 카츠시게[鍋島 勝茂][각주:8]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등과 싸우나 항복. 1620년 재차 야나가와 성의 성주가 된다. 1642년 11월 25일 죽었다. 75세.    

  1. 타치바나 도우세츠의 딸이며 당시 여성으로는 드물게 타치바나 가문[立花家]의 가독을 잇고 있던 긴치요[立花誾千代]와 결혼해서. [본문으로]
  2. 히데요시의 큐우슈우 정벌이 끝난 다음 해인 1588년 당시, 큐우슈우[九州]에서 '지쥬우[侍従]'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오오토모 요시무네[大友義統], 류우조우지 마사이에[竜造寺政家], 타치바네 무네시게[立花宗茂] 단 4명 뿐이었다. 요시히로는 사츠마[薩摩], 요시무네는 분고[豊後], 마사이에는 히젠[肥前]이라는 각각 한 지역[国]의 주인[国主]이었으나, 무네시게는 치쿠고[筑後]의 절반 정도만을 소유함에도 지쥬우[侍従]가 되었다. 이는 무가관위(武家官位)로 다이묘우들의 서열을 만들려 하던 히데요시의 의향에 비추어보았을 때 오오토모 가문[大友家]의 휘하에 있던 무네시게를 히데요시가 얼마나 맘에 들어 했는지 알 수 있으리라. [본문으로]
  3. 1600년 9월 22일 오오사카 앞바다인 니시노미야 앞바다[西宮沖]에서 만났다고 한다. [본문으로]
  4. 그러나 실제로는 세키가하라 전후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가장 신경을 쓰고 있던 시마즈 가문[島津家]의 후계자 문제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인 며느리 카메쥬[亀寿]의 오오사카 탈출을 도운 것이 먼저 오오사카에 와 있던 타치바나 무네시게였다고 한다. 타치바나는 임진-정유재란 때 조선에서 함께 싸운 요시히로를 존경하고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여담으로 둘이 함께 츄우고쿠[中国] 스오우[周防]에 도착하였을 때, 무네시게는 요시히로의 배로 건너가 인사를 하였는데 둘은 만나자 마자 눈물을 흘리며 서로의 생존을 기뻐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6. 사실 시마즈 가문이 원군을 보낸 것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清正]가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영지를 공격하였기에 코니시 가문이 같은 서군이었던 시마즈 가문에 원병 요청에 따른 것. 오히려 시마즈 가문과 카토우 키요마사의 군이 대치 중일 때 먼저 항복한 타치바나 무네시게가 시마즈 가문에 편지를 써서 화해를 권고하였다. [본문으로]
  7. 정확히는 10만 9200석이라 한다. 참고로 세키가하라 전쟁 이전에는 13만 2000석. [본문으로]
  8.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 直茂]의 아들. [본문으로]

 1581년 9월.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의 에치고[越後] 카스가야마 성[春日山城]에서 모우리 히데히로[毛利 秀広]라는 무장이 카게카츠의 측근 나오에 노부츠나[直江 信綱][각주:1]와 야마자키 슈우센[山崎 秀仙]을 습격하여 살해하였다. 모우리 히데히로는 ‘오타테의 난[御館の乱]’에서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이 둘을 원흉이라 생각하여 앙심을 품고 있었다.[각주:2]  
 카게카츠는 켄신[謙信] 때부터 우에스기 가문[上杉家] 집사(執事)의 가문인 나오에 노부츠나[直江 信綱]가 후계자도 없이 살해당했기에 나오에 가문이 끊기는 것을 안타까워 하며, 자신의 시동[小姓] 히구치 요로쿠[樋口 与六]에게 나오에 가문을 잇게 하였다. 이 히구치 요로쿠가 후에 우에스기 가문을 지탱하고 있다고 칭송 받는 명신(名臣) 나오에 야마시로노카미 카네츠구[直江 山城守 兼続]이다. 카게카츠의 시대에 우에스기 가문의 군정(軍政), 민정(民政)은 모두 이 나오에 카네츠구가 담당하였다.

 카네츠구는 키가 크고 용모도 뛰어났으며 말을 하는데 막힘이 없어 변설(辯舌)에도 능했다고 한다. 더구나 문학적인 소양도 갖추고 있었다. 에도 시대[江戸時代] 초기의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藤原 惺窩]도, 문무 양쪽에 뛰어난 인물로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와 함께 거론하였다.

 우에스기 가문이 임진왜란에 종군하였을 때, 카네츠구는 점령한 조선 성에 들어가면 반드시 서고(書庫)부터 찾았다고 한다. 지금 요네자와 시[米沢市]에 있는 일본의 국보 송판(宋版)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는 그때의 전리품이다.[각주:3]
또한 요네자와[米沢]로 옮긴 뒤에도 일반적으로 ‘나오에 판 문선[直江版文選]’이라 칭해지는 『오신주문선(五臣註文選)』을 출판. 성 밑에 있는 젠린 사[禅林寺=현재는 호우센 사[法泉寺]]’에 학문소 ‘젠린 문고[禅林文庫]’를 열었다.

 카네츠구는 뛰어난 시인이기도 했다.

봄 기러기가 날 닮았나. 내가 기러기와 닮았나. 낙양성의 화려함을 뒤로하고 돌아가네
春雁我に似たり 我雁に似たり 洛陽城裏花に背いて帰る[각주:4]
 라는 한시가 유명하다.

 카네츠구는 이렇게 학문적인 인간이면서도 의표를 찌르는 일화도 있다.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아이즈를 영유하고 있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산호우지 쇼우조우[三法寺 勝蔵][각주:5]라는 무사가 자신의 하인을 죽였다. 죽일 정도의 죄는 아니었던 듯 하인의 친척들이 화를 내며 죽은 하인을 살려내라고 소동을 일으켰다. 이를 들은 카네츠구는 백은(白銀) 20매로 합의를 보도록 하였지만, 하인의 친척들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더욱 큰소리를 쳤기에 카네츠구가 아무리 조정을 하려고 노력해도 “죽은 사람을 살려 내라”고 할 뿐으로 결말이 나지 않았다. 카네츠구는 결국 마음을 정해 판결을 내렸다.
 “어쩔 수 없구나. 그렇다면 내가 염라대왕에게 편지를 써 줄 테니 너희가 저승에 가서 그 하인을 데려오도록”
 라며 소동을 일으킨 자들[각주:6]을 저승으로 보내버렸다. 그리고서는 염라대왕과 저승사자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맞이하는 자를 보냈으니 부디 죽은 자를 살려서 돌려 보내 주십시오”
 라는 푯말을 세워 사람들에게 알렸다고 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사실 일리 없고 원래 중국에 있었던 이야기라고 하지만 민정가로서 유명했던 카네츠구와 연관시킨 것이 흥미롭다.[각주:7]

 또한 이런 일화도 전해진다.
 
히데요시[秀吉]가 아직 살아있을 때의 일로, 후시미 성[伏見城]에 여러 다이묘우[大名]가 모였을 때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가 품속에서 커다란 황금판을 꺼내어 모두에게 자랑하였다. 커다란 황금판이 신기했는지 다이묘우들은 모두 조심스레 손에 들고는 구경하였다. 그 말석에 카네츠구도 있었다. 카네츠구에게도 차례가 오자 카네츠구는 부채를 펴서는 그 황금판을 받고 마치 배드민턴 라켓으로 셔틀콕을 튕기듯이 통통 튀기며 살펴보았다.
 마사무네는 카네츠구가 배신(陪臣=다이묘우의 가신)이기에 다른 다이묘우들과는 달리 나름 겸손하게 행동하는 줄 알고,
 “직접 손으로 잡고 보아도 되네”
 라는 말을 건넸다. 그러자 카네츠구는,
 “제 손은 켄신 공[謙信公] 때부터 선봉장의 지휘봉을 쥔 손이외다.[각주:8] 저런 천한 물건을 손에 쥐면 손이 더러워지니 이렇게 부채에 올려서 보는 것이올시다.”
 라고 말하고는 부채로 탁 쳐서는 황금판을 마사무네 앞으로 보냈다고 한다.[각주:9]
 이 역시 사실이 아니지만, 카네츠구의 호방함을 말해줌과 동시에, 카네츠구가 배신이면서 다이묘우들 사이에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도 꿀림이 없는 위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카네츠구가 섬긴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은 켄신[謙信]이라는 영걸이 있었으며, 그의 자식[각주:10] 카게카츠[景勝]는 오대로(五大老)[각주:11] 중 한 명이다. 그리고 그 카게카츠의 중신인 카네츠구는 히데요시에게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인물’이라 평가 받았고[각주:12] [각주:13], 그렇기에 카게카츠가 아이즈[会津] 120만 석을 영유했을 때 히데요시의 특명으로 데와[出羽] 요네자와[米沢] 30만 석을 하사 받았다.[각주:14] 당시 30만 석 이상 영유하는 다이묘우[大名]는 이에야스[家康] 이하 11명, 히데요시가 직접 키운 무장인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는 25만석,[각주:15]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는 20만 석[각주:16]이었다.
 이렇듯 카네츠구는 배신(陪臣)의 신분이면서도 보통의 다이묘우가 가지지 못한 기량과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당당하게 다른 다이묘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진면목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발휘된다.

 1598년 8월 히데요시의 죽음으로부터 1년 동안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천하에 대한 야심을 명확히 드러냈고,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나오에 카네츠구는 차례로 아이즈로 귀국하였다. 아이즈 120만 석으로 이봉되어 아직 1년 반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고, 그 동안 히데요시의 조문을 위해 상경하거나 하여 아이즈 경영이 늦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쿄우[京]-오오사카[大坂]에는 아이즈의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카게카츠가 영내에 도로나 다리의 정비, 성의 수축과 낭인을 새로이 등용하고 있다. 거기에 아이즈 와카마츠[会津若松]의 교외인 코우자시하라 평원[神指原]에 새로이 성을 쌓고, 본성인 와카마츠 성[若松城]의 해자를 깊게 파는 등의 행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곧바로 모반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의심했다.

 1600년 4월. 이에야스는 카게카츠에게 상경을 재촉하는 사자를 보냈다. 동시에 나오에 카네츠구에게는 카네츠구와 친분이 있던 쇼우코쿠 사[相国寺]의 승 사이쇼우 죠우타이[西笑 承兌]에게 명령하여 카게카츠의 상경을 권하라고 하는 편지를 쓰게 하였다.
 카네츠구는 죠우타이에게 답서를 썼다. 카게카츠에게는 이미 허락을 맡은 상태였다. 이것이 후세에 ‘나오에 장[直江状]’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에야스에 대한 통렬한 도전장이다. 내용은 죠우타이[承兌]가 의심하며 거론한 항목 하나하나씩 반론한 것이기에 굉장히 장문이지만 요점을 말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선 상경 재촉에 대해서는, 신영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고 그나마 여러 사정으로 영지 경영할 시간이 없었다. 더 늦기 전에 지금 착수해야만 한다는 뜻을 밝힌 후 ‘이번에 또 다시 상경하라면 영지를 다스릴 틈도 없지 않은가?’라고 하였으며, 서약서를 제출하라는 것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썼으며 또다시 같은 것을 쓰더라도 효과가 있을 것 같지 않다’고 튕겼고, 전쟁 준비를 하는 것 같다는 것에 대해서는, ‘쿄우토 근방의 무사들은 차제구(茶諸具)를 모으겠지만 우리들 시골뜨기 무사들은 창이나 철포, 활과 화살을 모은다. 이는 그 지역의 풍속이니 쓸데없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소”라 하였다. 이는 반쯤 약올리는 생각으로 답했던 것이리라. 계속해서 말했다. “도로나 다리를 만드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자라면 당연한 일. 만약 역심을 품었다면 다른 나라와의 국경에 해자를 파고 길을 끊을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굉장히 도발적인 어구를 이어갔다.
 “역심이 없으면 상경하라니 이건 마치 아이들의 말투외다. 무엇보다 역심을 품었던 자가 실패해서 도망쳐 상경해서는 새로이 땅을 하사 받고 권세가(여기서는 이에야스를 지칭)와 인척관계를 맺으며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이러한 현 세태는 카게카츠의 마음과 맞지 않는다”고 한 뒤,
 “나이후 님[内府様=이에야스], 츄우나곤 님[中納言様=히데타다]께서 아이즈를 공격하러 오신다고 하는데 모든 것은 그때 해결합시다”고 끝을 맺었던 것이다.

 5월3일. 이 서장은 오오사카의 이에야스에게 전해졌는데, 이를 본 이에야스는, 
 “63살 내 평생 지금까지 이렇게 무례한 서장은 본 적이 없다”
 며 분노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정벌[上杉征伐]의 군을 일으켰는데, 이후의 경과는 지금까지 몇 번 언급했기에 생략하지만, 이에야스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거병 소식을 듣고 오야마의 진[小山の陣]에서 병을 되돌리자, 카네츠구는 언젠가 다시 이에야스와 싸우게 될 것이라며 그 전에 배후를 든든히 하기 위해 모가미 령[最上領]을 침공하지만 그러던 중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서군(西軍)의 패전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나오에 가네쓰구[直江 兼続]
1560년생.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의 고굉지신으로 히데요시[秀吉]에게도 인정받았다. 세키가하라 전쟁 후 우에스기 카게카츠는 카네츠구의 영지였던 데와[出羽] 요네자와[米沢]로 삭감되어 이봉되는데, 카네츠구는 계속해서 성과 성 밑 마을 조영을 담당했다. 1619년 12월 19일 에도[江戸]에서 죽었다. 60세.

  1. 나중에 카네츠구의 부인이 되는 오센노카타[お船の方]의 남편이었다. 나오에 가문에는 데릴사위로 들어와 나오에 카게츠나[直江 景綱]의 딸 오센노카타와 결혼하여 남자자식이 없었던 나오에 가문을 이었다. [본문으로]
  2. 모우리 히데히로는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사망 후 후계자 다툼인 오타테의 난[御館の乱]에서 처음엔 카게카츠의 반대편인 카게토라[景虎] 측이었으나 그를 배신하고 카게카츠 측으로 넘어와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동맹을 맺을 때는 카츠요리에게 사자로 파견되는 등의 활약을 하였다. 야마자키 슈우센은 유학(儒學)을 숭상하여 배신자인 히데히로에게 약속된 은상을 못 받게 하였다. 이에 분노한 히데히로는 야마자키 슈우센과 말다툼하다 살해하였고 그 옆에서 말리던 나오에 노부츠나도 함께 살해하였다. [본문으로]
  3. 송판(宋版)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는 원래 일본에 있었던 것으로, 소유주였던 일본의 승려 난카 겐코우[南化 玄興]에게 물려받은 것이고, 조선에서 가져간 것은 『송신언행록(宋臣言行錄)』 65권 20책,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90권, 『신편고금사문유취(新編古今事文類聚)』 221권, 『부석음주례주소(附釈音周礼註疏)』 42권, 『중용장구대전(中庸章句大全)』 4권, 『산곡시집(山谷詩集)』, 『오조명신언행록 전집(五朝名臣言行録前集)』 등이라 한다. [본문으로]
  4. 언제 지어졌는지는 모르나, 일반적으로 토요토미 정권의 수도였던 후시미[伏見]를 뒤로하고 아이즈[会津]로 향할 때 지어진 것이라 한다. 낙양성과 후시미를 엮은 것. [본문으로]
  5. 쇼우조우는 ‘카츠조우’라고도 읽는다 [본문으로]
  6. 죽은 하인의 형, 큰아비, 조카. [본문으로]
  7. 이 일화는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에 간행된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 권15[巻之十五] 나오에 카네츠구[直江兼続] 편에 실린 것으로, 원문에 따르면 푯말에는 케이쵸우 2년(慶長二年=1597년) 2월 7일이라고 쓰여있다고 한다. 즉 본문대로 카게카츠[景勝]가 아이즈[会津]를 영유하던 때가 아닌 아직 에치고[越後]에 머물 때이다. 카게카츠가 아이즈로 이봉되는 것은 1598년의 일 [본문으로]
  8. 에피소드 같은 일화 상이 아닌 실제로 카네츠구와 켄신이 만났을 가능성은 낮다. 더구나 켄신이 죽은 1578년 당시 카네츠구는 아직 19살. 지휘봉을 쥐기에는 너무도 어리 나이이다. [본문으로]
  9. 역시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에 나오는 일화. [본문으로]
  10. 양자. 켄신 누나의 아들. [본문으로]
  1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12. 메이지 시대에 간행 된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 에 따르면, 히데요시는 배신(陪臣)으로 나오에 카네츠구,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 호리 나오마사[堀直政]는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자들이라며 절찬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13. 한편 에도시대[江戸時代] 중기에 만들어진 사가 나베시마번[佐賀鍋島藩]의 번사(藩士)가 간행한 하가쿠레[葉隠]의 10권 145편에서 히데요시는 천하를 취하기 위해서는 대기(大氣), 용기(勇氣), 지혜(知慧)를 겸비해야 하는데, 현재 다이묘우[大名] 중에서는 그런 사람이 없지만, 배신(陪臣) 중에는 삼요소 중 두 개씩 가진 자가 세 명이 있다. 다만 나오에 카네츠구는 대기, 용기는 있지만 지혜가 부족하고,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대기와 지혜는 있지만 용기가 부족,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는 용기와 지혜가 있지만 대기가 없다고 하였다 한다. [본문으로]
  14.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를 에치고에서 아이즈 120만석으로 이봉할 때, 히데요시가 카네츠구에게 30만석을 주라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카네츠구가 카게카츠에게 하사 받은 것은 6만석(위키에 따르면 카네츠구 휘하 무장[与力]까지 포함하면 30만석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15. 카토우 키요마사는 히고[肥後]의 절반. 사실 카게카츠가 아이즈로 이봉한 1598년 당시에는 19만 5천 석. [본문으로]
  16.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오와리[尾張] 키요스[清洲]를 중심으로. 24만석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센고쿠 바사라 점[戦国BASARA占]

내 이야기 2012. 3. 7. 14:34 Posted by 발해지랑
트위터에서도 한번 언급했지만, 센고쿠 바사라 캐릭터가 나오는 점占입니다.

하는 곳은  http://www.capcom.co.jp/sengoku/uranai.html 

처음에 이런 화면이 나오는데, 태어난 해와 날짜 그리고 혈액형을 입력하신 후 진단한다[診断する]라는,

를 클립하시면 됩니다. 

저의 경우...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타입이라 나오는군요. ...맘에 안 드는군요.

설명부분 해석.

토쿠가와 이에야스 타입인 당신은,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기에 "나는 1억만 파워를 가지고 있다!"
며 뭐라는지 알 수 없는 거짓말을 합니다만,
그런 거짓말이 효과를 나타내어 거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로보트처럼 강하고 믿을 수 있는 부하와 만나게 됩니다만,
그 부하가 더 주목을 받기에,
정작 자신은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일어납니다.
금색 옷이라도 입어서 존재감을 어필하십시오.
(그래도 부하가 더 눈에 띕니다만)

군요...  

그 아래 


오늘의 운세를 전투로 점친다>>
 
를 누르시면, 전투가 막 일어나더니

라며,
쓰러뜨린 적 무장[倒した敵武将] : 135명
쓰러뜨린 적 군사[倒した敵軍師] :  74명
쓰러뜨린 적 병사[倒した敵兵士] : 2813명
합계 점수 3858점으로 대흉(大凶).....오전만 해도 소길(小吉)이었는데 말입죠... --;

합계점수 밑에 있는

오늘의 운세 상세를 클릭하시면,

라고 뜹니다.

오늘 하루 당신은 파란만장한 하루가 될 것임을 보장합니다.
"죽더라도 시체를 줍는 이 없다"는 말을 듣지 않도록
많이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토쿠가와 이에야스 타입 럭키한 대사
"좋지 않아~ 좋지 않아!"
========================================
부하에게 의지하지 말고 당신도 무언가를 해야만 합니다.

................
..........
......
사실 저는 점을 믿지 않습니다. 점을 보거나 믿을 그 시간에 딴 것을 하는 것이 백배천배 낫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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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슈우 우에다 성[信州上田城]은 검은 판자벽[黒板壁]의 망루와 함께 사나다 가문[真田家]의 성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성의 역사를 보면 사나다 가문의 재성 기간은 마사유키[昌幸]와 그의 장남 노부유키[信之]를 합쳐도 40년에 불과하며[각주:1], 그 뒤를 이어 들어온 센고쿠 가문[仙石家][각주:2]은 85년이며[각주:3], 그 다음을 이은 마츠다이라 가문[松平家][각주:4]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까지 160년이라는 오랜 기간 이 성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덧붙여 이야기하자면 현재 남아있는 우에다 성[上田城]의 망루는 센고쿠 가문이 있을 때 세워진 것이다.

 이와 같이 우에다 성[上田城]과 사나다 가문[真田家]의 연결성은 역사적 시간상으로 보면 가장 짧지만, 사람들의 역사적 지식상에는 센고쿠 가문이나 마츠다이라 가문의 이름이 우에다 성과 연결되는 일은 굉장히 드물다. 즉 불운하게도 센고쿠 가문과 마츠다이라 가문은 사나다의 이름에 가려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 정도로 사나다와 우에다 성의 이름을 높인 사실은 어떤 것인가?

 사나다라는 명성만으로 보자면, 그것은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에서 「사나다 일본 제일의 무사[真田日本一の兵]」라며 칭송 받았던 유키무라[幸村]가 그 중심일 것이다. 그러나 유키무라의 명성은 우에다 성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으며, 유키무라의 부친이며 축성자인 마사유키가 이 성의 주역이다. 사실 사나다의 위명(威名)이라는 것도 마사유키가 쌓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후년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이 목전으로 다가왔을 때,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마사유키와 함께 서군 측에 섰기에, 전쟁이 끝난 후 키이[紀伊]의 쿠도야마[九度山]로 유배 당했던 사나다 유키무라가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입성하였는데, 그 소식이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에게 전해졌다. 이때 이에야스는 “아비냐 아들이냐?”라며 두 번이나 거듭해서 물었으며, 더구나 그때 문을 손으로 잡고 있었는데 그 문이 덜컹덜컹 소리를 낼 정도로 떨었다. 입성한 것이 유키무라라는 것을 알고 그제서야 떨림이 멈추었다고 한다. 이 즈음 마사유키는 이미 죽어 이 세상에는 없었지만, 이에야스는 ‘사나다’라는 이름만 듣고서도 혼란에 빠져 몸을 떨 정도였던 것 같다.

 상기의 일화가 사실인지 거짓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이에야스가 이리도 사나다 마사유키의 이름에 두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를 찾자면 이에야스는 두 번이나 우에다 성의 마사유키를 공격하여 두 번 다 격퇴 당했다는 사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사실이 이에야스에게는 사나다 마사유키와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는 패배자 근성에 가까운 심리상태로까지 발전하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사나다 가문은 마사유키의 부친 유키타카[幸隆] 때부터 옆 나라 카이[甲斐]의 주인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을 섬겼다. 마사유키는 유키타카의 셋째 아들로 코우후[甲府]에서 태어나, 소년일 즈음부터 신겐의 측근 시동[小姓]이 되었으며, 카이의 명문 무토우 가문[武藤家]을 이어, 무토우 키헤에[武藤 喜兵衛]라는 이름으로 신겐의 곁에서 활약하였다. 신겐은 그런 마사유키를,
 “무토우 키헤에와 소네 타쿠미[曽根 内匠][각주:5]는 내 양 눈과 같다”
 라 평했다. 이런 마사유키가 신겐의 외교, 군략(軍略), 전법을 배우지 않을 턱이 없다. 또한 부친 유키타카는 신겐 휘하의 모장(謨將)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런 부친의 지모도 마사유키에게 흐르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1582년. 주가(主家)인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가 오다 가문[織田家]에게 공격 당한 끝에 도망치다 텐모쿠 산[天目山]에서 죽자, 마사유키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따랐으며,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횡사하자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에 속하였고 이어서 토쿠가와[徳川] 그리고 우에스기[上杉] 식으로 주가(主家)를 바꾸어, 어떻게든 하나의 세력으로 열강들 사이에 존재감을 발휘해 갔는데, 이 수완은 주군 신겐, 부친 유키타카에게 물려받은 재능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히데요시[秀吉]도 이러한 마사유키를 ‘종잡을 수가 없어 얕잡아 볼 수 없는 자[表裏比興の者]’라고 평할 정도였다.

 어쨌든 이야기를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사유키와의 싸움으로 되돌리자.
 1584년. 마사유키는 이 즈음 이에야스에 속해있어, 이에야스는 적대관계였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 손을 잡고 있던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에 대항하기 위해 우에다 성[上田城]을 쌓았지만, 그 다음 해 이에야스가 호우죠우 우지마사[北条 氏政]와 화의(和議)를 맺으면서 사나다의 영지 코우즈케[上野] 누마타 지방[沼田地方]을 호우죠우 가문에 넘긴다는 방침을 정하고는 마사유키에게 통고하였다. 이에 대하여 마사유키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 누마타는 이에야스에게 받은 것이 아니오. 우리들의 힘으로 손에 넣은 것이외다.”
 며 거절하였다. 거기에 지금까지 적대하고 있던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손을 잡은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런 마사유키의 반항에 격노하며 토리이 모토타다[鳥居 元忠], 오오쿠보 타다요[大久保 忠世] 등에게 8000의 병력[각주:6] 을 거느리게 하여 우에다 성을 공격시켰다.
 대군을 자랑하는 토쿠가와 군[徳川軍]은 단번에 성 밑 마을을 돌파하여 성벽에 달라붙었다. 그러나 이것이 마사유키의 책략이며 바라던 바였던 것이다. 이때까지 유유히 바둑을 두고 있던 마사유키는 적을 충분히 끌어들였다고 판단하자 곧바로 명령을 내려, 성안에서 철포를 일제히 발사하게 하였다.
 토쿠가와 군은 대군인 만큼 한번 혼란에 빠지자 헤어나오질 못했다. 성 밑 마을에서 갈팡질팡 도망치는 토쿠가와 군을 목표로 이번엔 복병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공격하였다. 그야말로 토쿠가와 군은 총붕괴 상태가 되었다.
 토쿠가와 군은 결국 3개월에 걸쳐 우에다 성과 대치했지만, 토쿠가와 가문의 중신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 数正]가 히데요시에게로 망명하는 대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결국 다시 공격하지 못하고 병사를 물렸다.
 
이로 인해 사나다 마사유키의 무명(武名)은 천하로 퍼졌다.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에서 히데요시 조차 이기지 못했던 토쿠가와 군세를 작은 성 하나에 의지하여 패퇴시켰기 때문이다.

 사나다 마사유키가 다음으로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싸우게 되는 것은 이로부터 15년이 지난 1600년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였다. 잘 알려졌듯이 사나다 가문은 마사유키와 그의 둘째 아들 유키무라[幸村]가 서군(西軍)에 속하였고, 장남 노부유키[信之]가 동군(東軍)에 속하였다. 우에스기 정벌[上杉征伐][각주:7] 도중 노부유키와 헤어져 시모츠케[下野]에서 거성 우에다 성으로 돌아 온 마사유키-유키무라 부자는 여기서 나카센도우[中山道]를 거슬러 서상(西上)하려는 토쿠가와 군의 발을 묶고자 하였다.

 9월.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가 거느리는 3만8천이 코모로 성[小諸城]에 착진. 곧바로 우에다 성을 개성하라고 명령하였다. 마사유키는 순순히 알았다고 대답하였다. 머리까지 밀고는 공순(恭順)의 뜻을 나타냈다. 하지만 증거가 되는 서약서를 제출하는데 시간을 끌었다. 히데타다는 초조해하며 재촉하였다. 그러자 마사유키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사실은 농성 준비를 위해서 답변이 늦어졌습니다. 이제야 군량 반입도 끝나, 무기나 장비류도 제대로 갖추어졌으니 한번 싸워보자 합니다”
 히데타다는 분노하였다. 지금 여기서 단번에 물리쳐주마 - 하고 우에다 성을 공격하였다. 토쿠가와 군은 15년 전과 똑같은 전법을 취하여 그때와 똑같이 총격을 받고 복병에 당하는 등 전투를 주도하지 못하고 끌려 다니기만 했다. 히데타다는 이 우에다 공성에서 몇 일이나 소비하였지만 세키가하라로 서둘러야 했기에, 끝내 이루는 일 없이 샛길을 이용하여 전쟁터로 향했지만 결국 세키가하라 결전에는 시간을 맞추지 못하고 이에야스의 역정을 사게 된다.

 이렇게 사나다 마사유키의 이름은 두 번이나 토쿠가와 군을 쳐부순 사나이로 만천하에 그 무명(武名)을 떨치게 되지만, 불운하게도 세키가하라에서의 결전에서 서군은 패하였다. 
 이렇게 되면 다른 서군의 제장들처럼 참수죄에 처해질 터였지만, 동군에 속해있던 장남 노부유키가 필사적으로 조명탄원하였기에, 죽음만은 면하여 유키무라와 함께 코우야 산[高野山]으로 유배 당하게 되었다.
 
유배에 앞서 마사유키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나이후[内府=이에야스][각주:8]야말로 이러한 처지로 만들고 싶었는데…”
 하면서 눈물을 떨구었다고 한다.

 유배지의 마사유키에게는 노부유키를 시작으로 사나다 가문의 사람들은 일족이건 가신이건 예를 다하여, 편지도 끊임없이 주고 받았고 금전 등도 계속 보냈다. 그러나 마사유키는 유배당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16명의 가신이 따라붙었으며 다이묘우[大名]였을 때의 격식도 계속해서 유지하였다. 그랬던 만큼 드는 돈도 많았을 것이다. 마사유키는 자주 노부유키 등에게 돈을 보내라고 요청하였다.
 또한 언젠가 사면 받을 날이 올 거라 기대하여, 이에야스의 측근인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에게 활발히 청탁하거나 하였다. 이런 것을 보면 아무리 마사유키라도 늙어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1611년, 64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
1545년생. 두 명의 형 – 노부츠나[信綱], 마사테루[昌輝]가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전사하였기에 사나다 가문[真田家]의 당주가 된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9]에 종군하였을 때 히데요시[秀吉]가 여러 무장들 앞에서 마사유키에게 전략을 물어보는 등 영예(榮譽)와 면목을 세우게 된다. 장남 노부유키[信之]가 이에야스[家康]의 중신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둘째 유키무라[幸村]가 히데요시의 봉행(奉行)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의 딸과 결혼하여[각주:10] 토쿠가와 - 토요토미 양측과 연을 맺었다. 또한 마사유키의 부인은 우타 요리타다[宇田 頼忠]의 딸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부인과는 자매지간이었다. 

  1. 우에다 성 축성한 1583년~사나다 가문이 마츠시로[松代]로 이봉한 1622년까지. [본문으로]
  2. 만화 센고쿠로 유명한 센고쿠 히데히사[仙石 秀久]의 아들 센고쿠 타다마사[仙石 忠政]가 입봉. [본문으로]
  3. 1622년~ 1706년. [본문으로]
  4. 열여덟 마츠다이라[十八松平] 중 후지이 마츠다이라 가문[藤井松平家]. [본문으로]
  5. 타케다 24장[武田二十四将] 중 한명인 소네 마사타다[曽根 昌世]. [본문으로]
  6. 토쿠가와 막부가 대패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병력을 적게 기록하였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7.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여, 이에야스는 카게카츠에게 상경하라고 명령하나 카게카츠의 가로(家老)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의 편지에 빡쳐 정벌하러 간다. [본문으로]
  8. 당시 이에야스의 관직 나이다이진[内大臣]을 중국풍으로 부른 것. [본문으로]
  9.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10. 사위 유키무라와 장인 요시츠구의 나이차이가 최소 2 ~ 최대 11살 차이라 아마 조카나 친족의 여성을 양녀로 삼은 뒤 시집 보낸 듯, [본문으로]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의 세상이 된 다음의 일이다. 
 어느 날,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의 거성 치쿠젠[筑前] 후쿠오카 성[福岡城]에서 무사들이 모여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한 무사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사무라이 대장[侍大将] 시마 사콘[島 左近]은 정말 무서웠지. 지금도 눈 앞에 있는 듯 생생하게 기억난다니까”고 몸서리치며 말하자, 그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자기들도 그러하다며 수긍하였다. 
 그러나 그 시마 사콘이 당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각자의 기억들이 달라 서로 맞지가 않았다. 그래서 마침 쿠로다 가문에 있던 미츠나리의 옛 가신(家臣)이었던 사람을 불러다 물어보았다. 그 가신의 말에 따르면 투구의 앞장식[立物]은 삼 척(尺)[각주:1] 정도 되는 텐츠키[天衝]를 붙이고, 갑옷은 옻칠을 한 가죽 몸통갑옷[溜塗り桶革胴], 연황색 목면의 전포[陣羽織]를 입고 있었다고 한다.(링크:당시 시마 사콘이 입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갑옷 - 위에서 두 번째 것이 시마 사콘의 갑옷
 이것을 듣고 모여있던 쿠로다 가문의 무사들은, “보통 그렇게 눈에 띄는 모습을 하고 있으면 잊지 못할 터인데… 더군다나 우리 쿠로다 가문은 이시다 가문과 정면으로 맞붙어 싸웠잖아. 정말 그렇게 가까이서 사콘을 보았으면서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니, 우리는 정말 당황했었나 보군, 정말 쪽 팔린 일이로세”하고 개탄하였다. 그래도 그 중 하나가, “아니지. 그렇게 온몸의 털이 다 설 정도로 공포에 떨었으며, 자칫하면 우리들 목도 사콘의 창에 꿰였을 수도 있을 터인데, 기억이 안 난다고 하더라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시마 사콘 – ‘미츠나리에게 과분한 것이 두 개 있으니, 시마 사콘과 사와야마의 성[佐和山城]’이라 일컬었을 정도의 무장이지만, 그의 이력은 확실하지 않다. 일설에 따르면 처음엔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의 성주 츠츠이 쥰케이[筒井 順慶]를 섬기었으며, 쥰케이의 가신 마츠쿠라 우콘[松倉 右近]과 쌍벽을 이루며 ‘우콘-사콘’이라 칭해진 전술가(戰術家)였다. 후에 낭인이 되어 오우미[近江] 타카미야[高宮]에 은거하고 있을 때, 사콘의 장재(將材)를 높이 산 이시다 미츠나리의 거듭된 부탁에 꺾여 미츠나리를 섬겼다. 그때 미츠나리는 4만석의 소령(所領) 중 반분 가까운 1만5천석을 사콘에게 주었다고 한다.[각주:2]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도 이런 사콘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기에, 히데요시[秀吉]가 죽은 뒤 미츠나리와 사이가 나빠지자, 검술사범 야규우 무네노리[柳生 宗矩]를 사콘에게 파견하여 사콘의 뱃속을 살피게 하였다. 무네노리와 사콘은 동향 출신이었으며, 또한 무네노리 역시 츠츠이 가문[筒井家]을 섬긴 적이 있어 사콘과 친분이 있었던 것 같다.[각주:3] 
 잠시 잡담을 나눈 후 무네노리는 사콘에게 천하의 향방이 어찌될 것 같은지에 대해 물었다. 사콘은 웃으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지금은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처럼 지모와 결단력 있는 인물이 없기에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는 자신의 주군 이시다 미츠나리가 지모는 있어도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돌려서 말한 것이다. 사실 사콘은 몇 번이나 미츠나리에게 중대한 결단을 촉구했으며, 그럴 때마다 각하 당했다.

 미츠나리가 무공파 칠장[각주:4]에게 공격받아 이에야스의 중재로 사와야마에 은퇴하게 되었을 때, 사콘은 일전불사를 주장하며 이런 작전을 세웠다. “사와야마를 1천의 병사로 수비하고, 2천의 병사를 거느리고 후시미[伏見]의 성 밑 마을[城下町]에 불을 질러 혼란을 일으키고 그 틈에 이에야스를 죽여버립시다.”고 진언하였다. 미츠나리는 때가 아니라며 그 책략을 쓰지 않았다. 또한 이 이후 이에야스가 아이즈의 우에스기 정벌[上杉征伐]에 향하던 도중 오우미[近江] 미나구치[水口]에 머문다는 정보가 들어왔을 때도 사콘은 야습을 진언했지만 미츠나리는, “그에 대해서는 미나구치 성주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에게 맡겨두었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1600년 9월 14일 세키가하라 결전의 하루 전. 아이즈 정벌군을 회군한 동군(東軍)의 총수 이에야스가 미노[美濃] 아카사카[赤坂]에 도착하자, 오오가키[大垣]에 있던 서군(西軍)은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다. 이때 사콘은 아군의 사기를 여기서 높이지 않으면 단번에 무너질 것이라 보고, 500 정도의 병사를 이끌고 오오가키와 아카사카 사이에 흐르는 쿠이세 강[杭瀬川]까지 진출하여 동군의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 一氏], 아리마 토요우지[有馬 豊氏]의 군을 유인해서는 쳐부수어 서군의 사기를 높였다. 이어서 그날 밤 작전회의에서 야습을 진언했지만 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콘은 자신의 진소(陣所)에 돌아가서는 가신들을 모아, 가신들의 목숨을 자신에게 맡기라고 전했다 한다.

시마 사콘[島 左近]
이름은 키요오키[清興]. 일반적으로 카츠타케[勝猛]가 유명하다. 츠츠이 가문[筒井家] 다음에는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의 아들[각주:5] 히데야스[秀保]도 섬긴 적이 있다고 한다.

  1. 약 91cm. [본문으로]
  2. 미츠나리가 미나구치 성[水口城] 4만석일 때 이러했다고는 하나, 미츠나리는 미나구치 성의 성주가 된 적이 없었으며, 시마 사콘은 미츠나리가 사와야마 성[佐和山城] 19만석의 영주일 때 얻었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본문으로]
  3. 거기에 더해 사콘의 딸은 무네노리의 조카이며 후에 오와리 야규우[尾張柳生]의 시조인 야규우 토시토시[柳生 利厳]의 부인이다. [본문으로]
  4. 일반적으로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를 말한다[関原始末記], [徳川実記]. 다만 그 인물 구성은 기록마다 틀려 '전국무장의 말년과 최후 - 토요토미 히데요시 편'에 잠깐 이름이 나온 이타자카 보쿠사이[板坂 卜斎]의 메모[板坂卜斎覚書]에는 이케다 테루마사가 빠지고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가 있으며, 미츠나리를 습격한 무장 일곱명에게 보낸 편지인 [윤3월5일자 이에야스의 편지(閏三月五日付家康書状)의 수신인은 이케다 테루마사, 카토우 요시아키가 빠지고 대신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 家正],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가 포함되어 있다. [본문으로]
  5. 양자.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