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치스카 코로쿠 마사카츠(蜂須賀 小六 正勝)의 이름은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도적 두목이었던 코로쿠가 소년 시절의 히데요시 즉 히요시마루(日吉丸)와
야하기(矢作) 다리[각주:1]위에서 만났다. 다리 위에서 자고 있던 부랑아 히요시마루의 머리를 발로 차서 깨우자 소년을 대담하게도 “무례하구나! 이리 와 사과하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코로쿠는 그 호방함에 반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시바 료우타로우(司馬 遼太郎) 선생의 글에 나오는 것인데, 선조가 도적이라는 것에 옛
아와(阿波) 번주인 하치스카 후작은 창피를 느꼈다고 한다. 메이지(明治) 시대에 귀족원 의장을 지낸 하치스카 가문의 당주 모치아키[각주:2](茂韶) 후작은 어느 날 메이지 텐노우(明治天皇)를 알현하였을 때 테이블에 진귀한 담배가 있었기에 2~3개를 품 안에 넣었다. 도중에 자리를 뜬 텐노우(天皇)가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역시 선조는 속일 수 없구만”하고 크게 웃었다고 한다. 텐노우(天皇)까지 하치스카 코로쿠가 도적이었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각주:3]
 
그러나 이 불명예스러운 전설은 쇼우와(昭和) 초기 와타나베 요스케(渡辺 世祐) 박사의 고증으로 인해 사라지게 된다. 무엇보다 당시 야하기바시 다리는 걸려있지 않았다는 것이 명확해 진 것이다.[각주:4]

 하치스카 가문은 도적 따위가 아닌 오와리(尾張) 아마 군(海部郡)의 호족으로, 현재도
렌게 사(蓮華寺)라는 이름있는 절이 남아있어 그곳에는 하치스카 가문에 관한 문서가 전해지고 있다.

 히데요시와 연을 맺게 된 것이 히데요시의 떠돌이시절인지 오다 가문(織田家) 내에서 만나면서부터인지 확실치 않지만 코로쿠 마사카츠가 세상에 얼굴을 내밀게 된 계기가 된 것은 히데요시의 스노마타(墨俣) 축성으로 인해서이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는 자신의 영지(領地)인 오와리(尾張)와 사이토우 가문(斉藤家)의 미노(美濃)와의 국경에 성을 쌓아 전선기지로 만들려고 하였지만 사이토우 군의 방해로 인해 그 시도는 참담한 결과로 끝나 거의 불가능이라 여겨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오다 가문에서도 미관말직이던 토우키치로우(藤吉郎=히데요시)가 단번에 만들어 버렸다. 세상에서 말하는 ‘스노마타 일야성(墨俣一夜城)’이다. 이를 계기로 토우키치로우는 크게 출세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성공의 뒤에서 활약한 것이 코로쿠 마사카츠이다.[각주:5] 코로쿠는 휘하의 도적들을 거느리고 스노마타 축성 공사와 수비에서 활약하였다. 스노마타 성이 완성되자 코로쿠는 오다 가문에 고용되어 성주가 된 토우키치로우를 돕는 역할을 하게 된다.

 코로쿠 마사카츠에게도 무공담은 전해지지만 그의 본질은 정략(政略)에 있었다.
 히데요시의 전투 방식은 상대를 죽이지 않고 항복시키는데 있었다. 상대를 이익으로 꼬시는 것인데 그 역할을 코로쿠가 담당하였다. 히데요시의
츄우고쿠(中国) 정벌에서 비젠(備前), 빗츄우(備中), 미마사카(美作), 호우키(伯耆)등의 여러 성을 공략했을 때 대부분 마사카츠의 외교절충으로 무혈 개성시켰다. 세토 내해(瀬戸内海)의 해적들도 코로쿠의 뛰어난 외교로 히데요시의 산하가 되었다.

 특히 가장 커다란 외교적 무대가 된 것은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 공략 시의 절충이었다.
 츄우고쿠(中国)의 실력자 모우리 씨(毛利氏)와의 강화(講和)가 이번 공성전의 처리 결과에 달려 있었다. 마사카츠는
쿠로다 칸베에(黒田 官兵衛)와 함께 모우리의 외교승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惠瓊)와 화의 교섭을 거듭하고 있었는데 하필 그때 혼노우 사(本能寺)의 변보가 전해진 것이다. 노부나가가 횡사했다는 소식이 모우리 측에 전해지면 강화는커녕 오다의 원군을 기대할 수 없기에 히데요시의 군은 모우리의 총공격에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패했을 것이다. 마사카츠는 이 중대한 위기 속에서 타카마츠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清水 宗治)를 할복시키며 화의를 성공시킨 것이다.

 하치스카 가문은 후에 아와(阿波) 토쿠시마(徳島) 25만 7천석으로 막말까지 이어진다.

[하치스카 마사카쓰(蜂須賀 正勝)]
오와리(尾張)
하치스카 출신. 처음엔 그 지역의 소영주(小領主)였지만 오다 가문(織田家)을 섬겨 노부나가(信長)의 명령으로 히데요시(秀吉)에게 배속[각주:6]. 1581년 하리마(播磨) 타츠노(竜野) 성주가 된다. 1586년 오오사카(大坂)에서 죽었다.

  1. 링크된 맵은 야하기 야하기바시 역(矢作橋駅). 오른쪽에 흐르는 것이 야하기가와 강(矢作川). 다리는 역에서 동북쪽 근처에 있었다 한다 [본문으로]
  2. 이 책에서는 ‘시게아키’라고도 루비가 되어 있지만 ‘茂’라는 글자는 14대 쇼우군 토쿠가와 이에모치(徳川 家茂)의 모치(茂)를 물려 받았으니 모치아키가 정확하다. [본문으로]
  3. 모치아키의 부친 나리히로(斉裕)는 에도 바쿠후 11대 쇼우군 토쿠가와 이에나리(徳川 家斉)의 아들로 하치스카 가문에 양세자로 들어갔기에 혈연적으로 이어져 있지는 않다. [본문으로]
  4. 야하기바시 다리는 1601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참고로 히데요시는 1598년에 죽었다. [본문으로]
  5. 이 이야기는 주로 무공야화(武功夜話)의 기술에 따른 것이라고 하는데, 그 책에는 현대에나 쓰는 말이나 당시에는 없었지만 마을끼리 합병되면서 만들어진 지명, 교차검증에 따라 틀린 기술이 많은 점 등으로 인해 근년 무공야화는 위서(僞書)가 아니냐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본문으로]
  6. 1573년에 아자이 가문을 멸망시킨 노부나가가 히데요시에게 옛 아자이 가문 영지를 하사하였을 때 히데요시에게서 1600석의 영지를 받았다고 하니 이 즈음부터는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볼 수 있다고 본다. [본문으로]

十三.

 요도도노(淀殿)는 분노했다. 상경하라니 마치 주인이 가신에게 보이는 태도가 아닌가? 사실 여기서 히데요리(秀)가 상경한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관습에서 보건대 이에야스(家康)의 부하 다이묘우(大名)가 된다는 계약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요도도노는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키요마사(正)나 요시나가(幸長)는 [고(故) 타이코우(太閤)가 직접 키운 무장]이라는 자격으로 끈기 있게 요도도노를 설득했다. 이 귀부인을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그녀의 자존심을 자극하면 안 되었기에 다소 말을 모나지 않게 하였다.
 - 지금만 조금 참으시면 됩니다
 라는 것이었다. 천하의 누구도 믿지 않는 관측이었지만 요도도노와 그녀의 시녀들에게만은 통용되었다. 이에야스가 죽고 나면 바라던 모든 것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토요토미 가문은 전쟁을 피해야만 하옵니다. – 고 키요마사들은 말했다. 요도도노도 그 점이 두려워,

 "그렇다면 히데요리님이 상경하시면 이에야스의 마음을 풀 수 있다는 것인가?"

 라는 것을 몇 번이나 키요마사에게 물었다. 그렇사옵니다. 그렇사옵니다. – 하고 키요마사는 몇 번이나 말했을 것이다. 상경만 하신다면 양 가문에는 평화만 있을 뿐이옵니다 - 고 지금은 이에야스의 부하 다이묘우(大名)가 된 키요마사는 그 입장으로 보증하였다. 요도도노는 그 말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요도도노는 차츰 마음이 풀어졌다. 잠시 갸웃거리더니 뜬금없이 밝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코우다이인(高台院)님께서 히데요리님에게 해가 되실 말씀을 하시지는 않을 터이니 그에 따를 수밖에 없겠지"

 하고 그녀가 혼자 중얼거리자 예전부터 이 여성을 좋아하지 않았던 키요마사조차 가슴이 저려와 눈물을 흘리며, 졸자가!! – 감정을 주체 못하겠는지 거센 말투로 말했다.

 "졸자가 우다이진(右大臣)님의 손을 잡고 메시어 니죠우 성(二城)까지 함께 하는 이상, 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우다이진님의 생명은 지키겠사옵니다"

 라고 말했다. 키요마사가 이런 말을 한 이유는 이에야스가 이번 기회에 히데요리를 죽이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소문이 오오사카 성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도도노에게 전쟁이라는 자신의 생각 범위를 넘어선 커다란 위협보다도, 히데요리가 칼날에 쓰러진다는 자기나름의 현실적 상상 쪽을 훨씬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요도도노는 통통한 턱을 끄덕이면서 그제서야 승낙했다.

 이 해의 히데요리는 19살. 더 이상 소년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으며 거기에 벌써 1남 1녀의 부친이기도 했다. 정실 센히메(千)의 자식이 아니라 히데요리가 자신의 곁에 있던 시녀들에게 낳게 만든 아이들이었다.
 - 굉장히 어린아이 같다.
 라는 것이 이에야스의 귀에 들어와 있는 히데요리의 평판이었지만 그러나 아이를 만드는 능력에 있어서만은 망부 히데요시(秀吉)보다 뛰어났다. 그러면서도 상경여부 등 자신의 몸과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중대사에 관해서는 모두 모친에게만 맡겼다.

 히데요리가 오오사카(大坂)를 출발한 것은 그로부터 수일 후인 3월 27일이었다. 텐마(天)에서 화려한 귀족선(御座船)에 몸을 싣고 요도가와(淀川) 강을 거슬러 북상하였다. 이 히데요리의 신변을 지킴에 있어서도 키요마사는 만전을 기했다. 우선 쿄우토(京都)에서 예상치 못했던 사태가 일어났을 때를 대비하여 자기 가문 내에서 억센 무사 500명을 추려 상인이나 중으로 변장시켜 시내를 돌아다니게 하였으며, 거기에 300명을 후시미(伏見)에 주둔시켰고, 요도가와 강의 강변 경비를 위해서 아사노 요시나가(野 幸長)의 부하들을 포함한 철포 1000, 창병 500, 궁수 300인 부대를 배와 함께 북상시키는 한편 자신은 신발담당 하인, 가벼운 차림의 하급무사(足軽) 30명만을 주변에 두고 있었다. 이 신발담당 하인이나 하급무사들도 실은 변장으로 모두 경험 풍부한 무사 중에서도 용사만을 고르고 골라 따르게 하고 있었다. 거기에 항상 키요마사와 일컬어지는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와 미리 상담하여 후쿠시마 가문의 병사 1만 명을 자신의 본거지 히로시마(広島)에서 올라오게 하여 만일을 대비하였다. 마사노리 자신은 당장 쿄우()를 제압하기 쉬운 야하타(八幡)에 숙소를 정하여 거기서 뿌리라도 박힌 듯 다른 다이묘우(大名)들처럼 니죠우 성(二条城)에 가지 않았다. 단지 이에야스 측에게는 병 때문에 거동을 못한다는 식의 말은 하였다. 이에야스 측으로서는 카토우, 후쿠시마의 거동은 불유쾌했을 것이다. 그러나 카토우, 후쿠시마에게 있어선 세키가하라()에서 이에야스를 위해 그렇게 많은 활약을 해 주었다는 자부심이 있었기에, 그런 만큼 이에야스는 좀 과중하게 보일지 모를 경비태세를 이해해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히데요리는 후시미(伏見)의 선착장에서 배를 내렸다. 키요마사와 요시나가는 히데요리의 가마의 양 옆에 찰싹 붙어 둘 다 거대 다이묘우(大名)의 신분에 걸맞지 않게 종자라도 되는 듯 예의 바르고 조심스럽게 더구나 말에도 타지 않은 채 걸어갔다. 후시미(伏見)에는 이에야스가 보낸 자신의 11살 난 아홉 번째 아들 토쿠가와 요시나오(徳川 義直[각주:1]) 9살 난 10남 요리노부(頼宣[각주:2])가 마중 나와 길 위에서 인사를 올렸다. 그 요시나오와 요리노부가 각각 자신의 종자들에게 양산을 받치게 하고 있는 것을 키요마사가 보고,

 귀인에 대해서 무례하오. 당장 양산을 치우시오

 하고 주의를 주었다. 이런 키요마사의 과감한 태도도 후에 이에야스를 불쾌하게 만들었지만 그러나 이에야스는 곧바로 화내지 않았다. 이에야스가 죽은 뒤 카토우, 후쿠시마 양 가문은 에도 정권에 의해 멸문을 당한다.
 
어쨌든 19살 히데요리의 행렬은 입경하였다. 그 화려함은 타이코우 생전의 행렬을 방불케 하여 히데요시 행렬의 특징인
대모갑(玳瑁甲)으로 코팅된 창 천 자루를 2열 종대로, 철포대의 철포 덮개는 하나하나가 전부 호랑이 가죽이라는 화려함이었기에 쿄우토(京都)의 사람들은 오래간만에 토요토미 가문의 행진을 보고 타이코우가 살아있을 적의 그 눈부심을 떠올려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 즈음 쿄우토(京都)의 시민감정은 압도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친토요토미였기에 당시 쿄우토의 거리에는 [15살이 되었다면 앞 싸리를 묶으시오~ 묶으시오]라는 노래가 불려지고 있을 정도였다. 노래의 의미는 히데요리님이 15살이 되면 이에야스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성 앞의 방책을 준비하라는 뜻이었다. 그 히데요리가 지금은 훌륭히 자라 나이도 19살이 되어 죽은 아비와 같은 행렬을 하고 쿄우토(京都)에 올라온 것을 – 쿄우토(京都)의 사람들은 한 편의 웅장한 연극이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그 행렬을 보았을 것이다. 히데요리가 탄 가마 옆에서 황공해하면서 시종해 가는 180cm가 넘는 키요마사를 보며 그 충성스럽고 의로움에 감동하여 키요마사라는 사나이에게 더욱 깊은 애정을 품었을 것이다. 키요마사는 살아있을 때 서민들에게 경애 받아 토쿠가와 가문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에도의 시민들조차 그를 의한 노래를 불렀다. [에도의 모가리에게 거칠 것은 없겠지만 밤색 제석천(帝釈栗毛=키요마사의 애마)은 피하시오].[각주:3]
 
후시미(伏見)에서 쿄우()로는 타케다(竹田) 가도를 이용했다. 도중 도로 옆에 마중을 나온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와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가 절을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그들은 이에야스 휘하 다이묘우이긴 하였지만 이 시대 이 시기의 그들 감각으로 말하자면 이에야스는 상관이긴 했어도 주군이 아닌 다소 애매한 상하관계였으나 토요토미 가문과는 순수한 주종관계였다. 때문에 그들은 무릎 꿇고 넙죽 엎드린 예를 취하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형식상 그렇다는 것이지 그들의 충성심은 이미 토요토미 가문에서 떠나 있었다. 가마 옆의 키요마사는 그들을 보자마자,

 "두 분도 따르시오"

 하고 말을 걸었다. 이 때문에 토자마다이묘우(大名[각주:4]) 중에서도 이에야스에게 충성하기로는 손에 꼽히는 그들도 어쩔 수 없이 그 장소부터 키요마사처럼 예의 바르게 가마를 시종했다.
 가마는 니죠우 성의 성문을 거쳐 곧이어 현관에 다다랐다.


큰 지도에서 관련지명-요도도도_아들_13 보기

 이에야스는 현관까지 마중 나와있었다. 30여명의 다이묘우들도 전부 현관 앞 흰 모래를 깐 곳에 넙죽 엎드려 히데요리가 가마에서 나오는 것을 기다렸다.

 키요마사가 가마 옆에 오른쪽 무릎을 꿇고 곧이어 양손을 들어 가마의 문을 잡고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었다.
 '어떻게 자랐는가?'
 라는 것이 이에야스의 이 날 최고 관심사로 거의 숨을 죽이고 마른침을 삼키며 히데요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오사카 성 깊은 곳에서만 성장한 히데요시의 아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며 히데요리가 역사에 그 몸을 노출하는 것도 이번이 최초였다.

 히데요리가 나왔다.

 이에야스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키가 180cm 가까이 되는 듯했다. 백설 같은 피부에 시원스런 눈매를 가진 위풍당당한 위장부(偉丈夫)로 그가 서 있는 것만으로 그 주위에서 광채를 뿜는 듯했다. 이런 훌륭한 골격은 모계 쪽 할아버지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의 판박이 같아 만약 그 머리와 심장까지 나가마사에게 물려받았다면 절대 쉽지 않으리라.
 이에야스는 그리 생각했다. 생각하면서도 기분이 갑자기 상쾌해진 것은 이에야스의 정치적 입장에서 보면 묘했지만 그러나 좋은 골격을 가진 젊은이를 좋아하는 이에야스의 – 뿐만이 아니라 이 시대의 인간으로서의 – 말하자면 습성으로써 이에야스는 유쾌한 기분이 되었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직접 앞장서 안으로 들어갔다. 히데요리는 키요마사를 거느리고 아직 청년이라고 부르기에는 이른 키무라 시게나리(
木村 重成 – 히데요리 유모의 아들)에게 칼을 들게 하고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중앙 복도를 거쳐 객관의 앞을 지나 곧이어 [대면실]이라고 칭해지는 건물 끝으로 들어갔다.

 이에야스는 북을 향해서 앉았다.
 히데요리는 남을 향해서 이에야스와 대좌하는 자리에 앉았다. 쌍방 대등한 자리였다. 키요마사가 히데요리의 곁 60c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이 날 성안에서 작은 칼(
脇差
)도 차면 안되었기에 품 안에 단도를 숨기고 있었다.
 쌍방 대등한 입장이었기에 동시에 절을 하였다. 곧이어 키타노만도코로 – 이미
법체(
法體)가 된 코우다이인(高台院) 네네() – 가 나타나 이에야스와 히데요리 사이에 앉아 쌍방을 주선(周旋)하였다. 위계라는 점에서 말하면 종일위(從一位)인 코우다이인이 제일 높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안상이 나왔다. 들고 나오는 역할을 맡은 이들은 토쿠가와 가문 직속의 중신들로 이타쿠라 이가노카미(
板倉 伊賀守[각주:5]), 나가이 우콘(永井 右近[각주:6]), 마츠다이라 우에몬타이후(松平 右衛門大夫[각주:7]) 등이 예법대로 발을 바닥에 끌며 상을 내왔다. 히데요리는 사전에 키요마사에게 들은 대로 칠오삼의 상차림[각주:8]으로 나온 주안상에 한 번도 젓가락을 대지 않았고 잔도 입술에 가까이 대기만 할 뿐 마시지는 않았다. 대면은 말하자면 의식(儀式)으로 쌍방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곧이어 술잔을 세 번 받았을 때 키요마사가 히데요리를 향해서,

 "오오사카의 어머님께서 기다리실 것입니다. 오늘은 이만 자리를 뜨시옵소서"

 라고 말하자, 이에야스는 처음으로 입술을 떼어 목소리를 내었다. 굉장히 밝은 목소리로,

 "정말 오오사카의 어머님께서 기다리시겠구려. 오늘 참 경사스러운 날이었소. 그만 돌아가시길"

 하고 말했다. 그 말을 하며 이에야스가 일어나자 히데요리도 일어났다. 시종 무언이었다.
 이에야스는 다음 방까지 히데요리와 함께 갔다. 가다가 히데요리를 올려다 보며,

 "도노(殿)는"

 하고 그런 경어를 사용하여, 기분이 좋은 듯 말했다.

 "도노는 생각보다 훨씬 멋진 성인이 되셨소. 경사롭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 같소. 졸자는 나이를 많이 먹어 내일은 어찌 될지도 모르오."

 하고 말했다. 더 말하길,

 "졸자의 수명이 다하거든 우효우에(右兵衛=9남 요시나오)와 히타치노스케(常陸介=10남 요리노부)를 잘 부탁 드리옵니다."

 거기에는 요시나오, 요리노부라는 이에야스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히데요리는 그 쪽으로 눈길을 주고는 미소를 지으며(처음으로 표정이 변했다)

 "알겠습니다."

 하고 명쾌하고 또렷또렷하게 말했다. 이 상쾌한 말투를 들었을 때, 이에야스는 이때만큼 히데요리에게 시샘을 느낀 적이 없을 것이다. 늙음이란 이미 그 자체로 약함을 뜻하며 젊음이라는 것은 노인에게서 보면 그 자체가 거만함이었다. 이에야스는 이 젊은이를 자기가 죽을 때까지 살려 놓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히데요리는 쿄우토(京都)를 떠났다. 그 후 이에야스가 자기 방에서 휴식하고 있을 때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가 찾아왔다. 이에야스의 침실에까지 올 수 있는 것은 이 늙은 모신(謀臣)에게 주어진 특권이었다. 마사노부는 히데요리와 대면했을 때의 감상을 들으러 온 것이다. 어떠셨습니까? 하고 마사노부가 묻자 이에야스는 잠시 생각에 잠긴 뒤 곧이어 툴툴대며,

 히데요리는 어리석다고 들었지만 전혀 그렇지 않고 현명했다. 다른 사람의 명령 같은 것은 받을 것 같지 않다

 는 뜻의 말을 하였다. 마사노부는 이때 이에야스에게 가까이 가, 걱정할 거 없지 않습니까? 저에게 그 분을 어리석게 만드는 묘안이 있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을 했다지만 사실인지 어떤지. 마사노부의 묘안이라는 것은 칸토우()에서 센히메()를 따라 오오사카(大坂)에 가 있는 시녀들에게 지시를 내려 히데요리가 주색에 빠지도록 만들어 정신을 황폐화시키자는 내용으로 사실 그렇게 비밀리에 지시를 내렸다고는 하지만 현실의 이에야스도 마사노부도 그런 것에 기대할 정도로 철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거친 방법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1. 쇼우군 가문(将軍家)의 후사가 끊겼을 때 쇼우군을 배출할 수 있는 어삼가(御三家) 필두인 오와리 가문(尾張家)의 시조. 단 결국 한 번도 쇼우군 배출을 하지 못했다. [본문으로]
  2. 어삼가 No.2 키이 가문(紀伊家)의 시조. 후에 8대 요시무네(吉宗), 14대 이에모치(家茂)를 배출. [본문으로]
  3. 원문은 [江戸の無頼漢(もがり)にさわりはすとも、よけて通しゃれ帝釈栗毛]. 모가리(もがり)란 당시 에도에서 유명했던 공갈범을 말한다. 역자는 '帝釈栗毛'을 밤색 제석천이라고 해석하였다. 栗毛는 말의 털이 밤색을 의미하며, 帝釈는 불교의 수호신인 제석천(帝釈天)을 말한다. [본문으로]
  4. 세키가하라(関ヶ原) 이후부터 토쿠가와 가문을 따른 다이묘우(大名). [본문으로]
  5. 이타쿠라 카츠시게(板倉 勝重). 당시 에도 바쿠후의 쿄우토 감시관(京都所司代). [본문으로]
  6. 나가이 나오카츠(永井 直勝) – 뛰어난 전술지휘관으로 작지만 각 요소요소에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본문으로]
  7. 마츠다이라 마사츠나(松平 正綱) 당시 에도 바쿠후 재정장관(勘定頭). [본문으로]
  8. 七五三の本膳. 메인에 7개의 안주, 두 번째 상에 다섯 가지 안주, 세 번째 상에 세 가지 안주로 구성된 상. 성대한 주연에 나오는 차림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十二.  

 이 챠챠 부인(茶御料人), 요도도노(淀殿), 다이구인(大虞院)이라고 불리는 여성이 자기 자식 히데요리(秀)의 이름으로 이 땅에 남긴 업적이라면 신사나 절을 다시 부흥시킨 정도였는데 그 광신적인 종교에 대한 투자가 이 즈음부터 시작되었다. 쿄우(京)의 키타노 신사(北野社), 이즈모(出雲)의 타이샤(大社), 쿠라마(鞍馬)의 비사문당(毘沙門堂), 카와치(河)의 혼다 하치만 궁(田八幡宮), 쿄우(京)의 토우지(東寺) 남대문, 에이잔(叡山)의 요카와(川) 중당(中堂), 산죠우(三) 돈게 원(曇華院), 셋츠(津)의 카츠오 사(勝尾寺), 오오사카(大坂)의 시텐노우 사(四天王寺), 타이고(醍醐)의 산보우 원(三院) 인왕문(仁王門), 쿄우(京)의 난젠 사(南寺) 법당(法堂), 야마시로(山城)의 이와시미즈 하치만 궁(岩水八幡宮), 오오사카(大坂)의 이쿠쿠니타마 신사(生魂社), 카미다이고(上醍醐)의 미에이 당(御影堂)과 오대당(五大堂), 여의륜당(如意輪堂), 사쿠라 문(門) 등이다. 킨키(近畿) 및 그 주변에서 [우다이진 히데요리 건립(右大臣秀建立)] 혹은 수축했다는 현판(懸板[각주:1])이나 기록이 보이지 않는 옛 신사나 절 오히려 드물다고 해도 될 정도로 엄청났다. 절이나 사원의 건립이나 수리는 하나의 절, 하나의 사원에도 많은 돈이 든다고 하기에 이런 것들에게 든 돈은 기절할 정도의 금액이었으며, 요도도노가 히데요리의 앞날을 비는 성심에는 칸토우(東)에 있는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조차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어이구~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에야 귀천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고(故) 타이코우(太閤)의 남겨진 재산은 엄청나지 않습니까?"

 하며 마사노부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한다. 이 세상에 히데요시(秀吉)만큼이나 돈에 관해서 도가 튼 사람도 드물 것이다. 히데요시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을 즈음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직할령은 불과 200만여 석에 지나지 않았다. 그 히데요시가 이에야스를 칸토우(東) 250만여 석에 봉하였으니 석고로 따지자면 신종(臣從)하는 이에야스(家康) 쪽이 컸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미곡중심의 경제에서 자시의 두뇌를 빼내었다. 그는 사도 금산(佐渡金山[각주:2]) 등을 개발하여 광업이익을 독점하였으며, 사카이(堺[각주:3])나 하카타(博多[각주:4])의 무역을 진흥하여 관세를 받았고, 비와고(琵琶湖) 호수 교통의 거점인 오오츠(大津)를 도시화하여 국내 무역의 이윤을 얻거나 하는 식의 수익으로 정권과 토요토미 가문의 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결실은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축적되어 히데요리에게 상속되었다.

 "오오사카의 어리석은 아줌마와 아이는 조금도 두렵지 않지만"

 하고 혼다 마사노부는 입버릇같이 말했다. 사실 에도(江戸) 정권이 이미 여러 다이묘우(大名)를 장악하고 있는 이상 히데요리가 아무리 발버둥치더라도 에도 정권에 금이 가는 일은 없겠지만 그러나 두 가지 점에 있어서 불안했다. 서쪽의 다이묘우(大名)가 야심을 품으며 히데요리를 내세우려고 할 지도 모른다는 점과 토요토미 가문이 가진 재산이었다. 히데요시는 금화를 주조하여 유통경제 체제를 확립하였는데 그 때문에 쌀이 없어도 돈만 있다면 단번에 10만의 낭인을 고용하는 것도 불가능이 아니었다. 그 돈을 줄이기 위해서 마사노부는 여러 사람을 거치는 방식으로 요도도노와 그녀의 유모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大蔵卿局)에게 원령(怨靈)의 공포를 불어넣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들은 칸토우(関東)의 모략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유산은 말이 연못의 물을 마신 정도 밖에도 줄이지 못한 듯했다. 그 정도로는.

 "쿄우()의 대불(大佛)을 재건시키면 어떨까?"

 하고 이에야스는 마사노부에게 말했다. 오오~, 하고 마사노부는 외치며, 과연 묘안이지 않습니까? 하고 무릎을 쳤다. 쿄우의 대불이라는 것은 히가시야마(東山)의 호우코우 사()의 불상으로 히데요시가 그것을 건립했다. 히데요시는 나라(奈良)의 대불[각주:5]보다도 거대한 것을 만들고자 하였고 실제로 그것을 만들었다. 단 이 시대는 주조기술에 있어 가장 퇴보한 시기였기에 목조 회반죽으로 하였다. 건물의 높이는 약 60.6미터, 대불의 높이는 약 48.48미터로 이를 위해 소비한 일수는 이천일, 총인원 1천만 명이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대불은 1596년의 후시미(伏見)-쿄우토(京都) 지진으로 파괴되어 지금은 없었다.

 "필시 돌아가신 타이코우(太閤) 전하도 미련이 남으셨을 걸세. 유지를 받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토요토미 가문의 가로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불러 직접 이에야스가 말했다. 카츠모토는 넙죽 엎드려 절해 그 말을 받들고는 서둘러 오오사카 성으로 돌아와 히데요리와 요도도노에게 그 뜻을 보고하자 그들은 –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 크게 기뻐하였다. 항상 배석해 있는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 등은 미칠 듯이 기뻐하여 카츠모토의 이야기에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곧이어 요도도노 쪽으로 몸을 돌리고는,

 "이는 모두 타이코우 전하가 저 세상에서까지 가문을 보호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서둘러 시작하시옵소서"

 라고 말했다. 감격에 몸을 떨고 있었다.
 요도도노도 떨고 있었다. 그녀들의 기쁨은 이에야스의 마음에 악마가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로써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 타이코우의 유지를 받들라는 식의 말이 이에야스의 입에서 나올 줄은, 세키가하라(
) 후의 저 영감탱이의 태도로 보았을 때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히데요리의 안녕을 빌기 위해 신불에게 수없이 투자했던 보람도 이걸로 보답 받은 듯 했으며, 하늘도 이에야스의 마음에 따스한 바람을 불어 넣는 듯했다. 요도도노는 히데요시도 그렇게 하지 못했던 금동불상을 주조하기로 하였다. 기술상 조금 작게 만들 수 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약 19미터라는 웅대함이었다.

 대불 건립은 예전 쇼우무 텐노우(聖武天皇) 때도 알 수 있듯이[각주:6] 국가적 규모의 사업이지 아무리 히데요시의 유산이 많다고는 해도 토요토미 가문이라는 70만석이 될까 말까 한 일개 다이묘우(大名)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요도도노는 그것을 했다. 곧이어 주조가 중반쯤 진행되고 안치하는 건물도 거의 다 되었을 무렵 주물사(鑄物師)의 부주의로 화재가 발생하여 그렇게 공들인 대불도 녹고 건물도 재로 변했다.

 하지만 요도도노와 그녀의 유모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는 굴하지 않았다. 새로이 시작하려 하였다. 단지 그 많다던 토요토미 가문의 재산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히데요시가 남긴 황금 중 다이훈도우킨(大法馬金)이라는 대형 주괴(鑄塊)를 녹이기로 하였다. 이 덩어리 하나로 오오반(大判)이라는 금화 천 닢을 만들 수 있다는 것으로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때부터 천수각 깊은 곳에 숨겨져 있었지만 결국 그것에 손댔다[각주:7]. 그러나 그래도 충분하지 않았기에 부족한 분은 에도 바쿠후(幕府)에게 원조받고자 하였다. 요도도노는 그녀의 친동생인 쇼우군() 히데타다(秀忠)의 부인 오고우(お)에게 사자(使者)를 보내어 히데타다를 설득시켰다. 참고로 히데타다는 오오사카(大坂)에 대한 밀모에 대해서 부친 이에야스에게 조금도 전해 듣지 못한 상태였다. 히데타다는 곧바로 사자를 순푸(駿府)의 이에야스에게 보내어 그 뜻을 상담하게 하였다.

 "어처구니가 없군"

 하고 이에야스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때처럼 떫은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히데타다의 사람 좋음에도 화가 났다. 더불어 또한 이에야스에게 있어 적 –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인 토요토미 가문 여성들의 사람 좋음, 어리석음, 순진함도 이렇게까지 한도 끝도 없으면 불유쾌했다. 예를 들면 이에야스 정도나 되는 인물이 토요토미 가문의 기껏해야 여성들을 상대로 전력을 다해서 장기를 두고 있는데 상대는 그렇다고는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순진하게 한 수 물려달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에야스는 아무 말 않고 있었다.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자기 자식이며 현 쇼우군 히데타다라고 하여도, 실은 이 대불 재건을 권한 나에게 타이코우의 명복 어쩌고 하는 생각은 조금도 없으며 토요토미 가문의 재산을 없애기 위해 서란다 – 는 마음 속의 것을 알릴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도 히데타다 놈은 알아서 생각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고 또 화가 나,

 "처먹을 만큼 처먹은 나이로 그런 말밖에 못하나?"

 하며 입술을 여덟 팔자로 만들었다. [스루가 토산(駿河土産)[각주:8]]이라는 옛 서적에는 이에야스의 말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히데요리는 어린아이, 요도도노는 여성이기에 철없는 소리를 하는 법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매사에 숙련된 사나이들이다. 그런데도 어린아이인 히데요리나 부인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더구나 그것을 나한테까지 상담해 오는 것은 무슨 경우인가? 당초부터 호우코우 사()의 대불건립이라는 것은 고 타이코우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지 천하를 위한 사업이 아니다. 그러니 이번 히데요리의 재건도 자기네 가문의 사사로운 일에 지나지 않으니 그렇기에 쇼우군 가문에 있는 자가 관련할 문제도 아니다"

 고 이에야스는 내뱉듯이 말하고는 자리를 떠버렸다.
 그 보고는 오오사카(
大坂)로 전해졌다.

 "그렇게 말했나?"

 하고 요도도노는 그 말을 들었을 때 일단 달리 생각했던 이에야스에 대한 생각을 제자리로 원위치 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전히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에게 차가웠다.
 요도도노는 토요토미 가문만의 돈으로 하기로 하여 카타기리 카츠모토에게 그렇게 명령하였다. 금고가 그로 인해 바닥을 드러낼 것이라는 것을 카츠모토는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한편으로 이에야스의 본심을 이 노인은 알고 있었던 만큼 애써 요도도노의 낭비에 목숨 걸고 '아니되옵니다'를 할 마음도 일지 않았으며 또한 의견을 낸다고 해서 들을 요도도노도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물러나 재정담당관에게 그렇게 전했다.

 대불공사는 진행되었다.
 그러는 동안 쿄우토(
京都)에서는 여러가지 소문이나 유언비어가 난무하며 요도도노의 귀에도 들어왔다. 난무했던 만큼 소문 중에는 이에야스의 책모를 정말로 제대로 눈치챈 듯한 것도 있어, '이에야스는 대불건립을 이용하여 히데요리를 서서히 궁핍하게 하여 무일푼으로 만든 뒤 공격하여 죽이려는 생각인 듯하다'는 것이었다. 요도도노는 그것을 듣고 놀람과 공포와 분노로 인하여 갑자기 다리가 얼음과 같이 차가워지고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아 결국 쓰러졌다. 복도 여기저기서 의사를 부르고 물을 준비하는 여관들로 떠들썩했지만 유모인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는 핏덩이일 때부터 요도도노를 알고 있었기에 그다지 당황하지 않았다. 이 자리는 우선 요도도노가 안심할 만한 말을 들려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씨. 걱정할 것은 없사옵니다. 카가(加賀)의 마에다(前田)에게 명령을 내리시면 됩니다. 명령하여 이에야스를 물리치게 하는 것입니다"

 꿈과 같은 이야기였다.
 카가(
加賀)의 마에다 가문(前田家)은 창업자인 다이나곤(大納言) 토시이에(利家)가 히데요시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참고로 토시이에는 히데요시가 젊었을 적부터의 친구로 히데요시는 병상에서 자신의 죽음을 깨닫기 시작했을 즈음부터,
 - 토시이에는 내 죽마고우이며 또한 다시 없는 의리의 사나이이니,
 라는 말을 눈물 섞인 목소리로 거듭했다. 토시이에야말로 자신이 죽은 뒤의 히데요리를 지켜줄 수 있다는 말이었다. 히데요시는 한창 잘 나갈 때도 이에야스의 대항자로서 항상 토시이에를 키웠다. 이에야스의 관위를 승진시킬 때는 반드시 토시이에의 관위도 승진시켰다. 이에야스의 관위 쪽이 항상 한 단계 위였지만 그러나 히데요시는 평소 잡담을 나눌 때는 '다이나곤(토시이에), 나이후(
=이에야스)'라고 순위를 반드시 반대로 하여 토시이에의 이름을 먼저 말하는 식으로 배려를 함으로써 토시이에의 마음을 잡고자 하였다. 히데요시는 이 토시이에를 자신의 사후 히데요리의 후견인으로 만든 것인데, 다행히도 토시이에의 의리는 그에 응했으며 또한 토시이에만큼 히데요리의 장래를 걱정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토시이에는 히데요시의 사후의 다음 해 뒤를 쫓듯이 죽었다.
 때문에 마에다 가문은 토시이에의 장남 토시나가(
利長)가 당주가 되었지만 그에게는 부친 토시이에가 토요토미 가문에 대해 계속 품어왔던 감상이 전혀 없었다. 토시나가는 앞으로의 천하가 이에야스에게 옮겨질 것이라 내다보고 이에야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모친을 에도로 보내어 인질로 삼게 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에서도 이에야스 편으로 호쿠리쿠(北陸)에서 싸웠으며 싸움 후 영지가 증가되었다. 카가(加賀) 백만석이라고들 하지만 히데요시 시대의 마에다 가문은 80여만석에 지나지 않았으며, 세키가하라에서 이에야스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노토(能登) 1개국과 그 외의 지역을 하사 받아 100만석이 되었다[각주:9]. 이후 히데요리의 후견인이 되어야만 할 가문이면서도 토시나가는 토요토미 가문에게 눈길을 보내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듯했다.
 그런 토시나가인데도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는,

 "그에게 이에야스를 물리치게 하시옵소서"

 라고 요도도노에게 말한 것이다. 그랬다. 마에다 가문은 현재 다이묘우(大名)로서는 가장 컸으며 거기에 히데요시의 유언도 있었기에 토시나가가 히데요리를 옹립하여 다이묘우들을 규합하면 에도 정권에 대항할 수 있을 정도의 세력이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 물론 어디까지 꿈 속에서의 이야기지만.
 단지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에게 있어서는 이것만큼 현실감 넘치는 착상(
着想)도 없었다. 그녀의 두뇌는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과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엄격한 자기중심 논리가 섞였을 때 현실이 생기는 것 같았다. 요도도노도 다를 바 없다. 요도도노는 이 한마디에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곧바로, 서둘러 오늘 안으로 카가(加賀)에 사자를 보내라, 토시나가에게 충성심을 보이게 하라, 고 떠들어댔다.

 사자가 카가(加賀)로 달려갔다.
 이때가 1610년 가을이었다. 이 즈음 세간에서는 마에다 토시나가를 '카가 재상(
加賀宰相)'이라고 불렀다. 나이는 이제 50에 가까웠으며 매일 생각하는 것이라곤 자기 가문을 후세까지 보전하는 것 하나뿐이었다. 그랬던 만큼 과거의 망령과 같이 오오사카의 요도도노와 히데요리에게서 온 밀사(密使)만큼이나 이 소심한 재상님을 놀라게 한 것도 없을 것이다. 오오사카의 여성들이 그렇게까지 마에다 가문에 의지하는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마에다 가문에 있어 몰락을 의미했다. 한편으로 마에다 가문은 토쿠가와에게 있어 눈 위의 혹이기에 엄청난 노력을 하지 않으면 뭉개질지도 몰랐다. 때문에 토시나가는 친모인 호우슌인(芳春院)을 에도에 인질로 보냈으며 또한 그걸로도 부족한 듯하여 토시나가는 이에야스에게 아첨을 떨어 토쿠가와 가문의 직신 중 하나를 마에다 가문 필두가로로 보내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혼다 아와노카미(本多 安房守)[각주:10]가 바로 그로, 가로는 명색일 뿐 마에다 가문에 대한 감시자였다.
 토시나가는 어중간한 태도가 반대로 해를 불러온다고 생각하였다. 오오사카의 여성들에게 이번 기회에 확실히 말해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답변은 이러했다.

 "확실히 말씀하신 대로 타이코우의 은혜는 크게 느끼고 있소. 그러나 그 은혜를 갚으라고 하는데, 망부 토시이에가 오오사카 성에 머물며 히데요리님에게 진력을 다하여 그 때문도 있어 병환으로 돌아가셨소. 그것으로 은혜는 전부 다 갚은 셈이 될 것이오. 졸자(拙者) 같은 경우 망부와는 또 입장이 다르오. 졸자는 망부와는 달리 새로 에도에 은혜를 입어 그 새로운 은혜덕분에 카가(加賀), 엣츄우(越中), 노토(能登) 3국의 태수가 될 수 있었소. 이 큰 은혜는 칸토우()를 위해서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다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 은혜를 갚기 위한 일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소. 그러하니 졸자에게 기대를 품고자 하는 것은 큰 착각이며 이쪽에게 이보다 더 큰 폐는 없을 것이오."

 라는 것이었다.
 이 답변을 요도도노와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가 오오사카에서 받았을 때, 잠시 동안 믿을 수 없다는 듯 자리에 침묵이 이어졌지만 곧이어 꿈에서라도 깨어난 듯이 달린 입들마다 떠들며 토시나가의 배은망덕을 공격했다.

 한편 마에다 토시나가는 그래도 불안했다. 이로 인해 토쿠가와 가문이 오해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토시나가는 은거하기로 결심하였다. 예전에 토요토미 가문에 들락날락한 자신이 당주로 있는 한 오오사카는 이루어지지도 않는 원조를 계속 기대할 것이라 생각하여 이것을 계기로 막냇동생인 토시츠네(利常)를 양자로 삼아 당주자리를 물려주기로 하고 순푸(駿府)에 급사를 보내어 그 뜻을 전하며 이에야스의 의향을 살피게 하였다. 물론 요도도노와 히데요리에게서 밀사가 왔다는 것도 이에야스에게 알렸다.

 "카가 재상(토시나가)님이 하신 처치는 정말로 맘에 드는구려"

 하고 이에야스는 크게 칭찬하였지만 그러나 한편으로 오오사카가 칸토우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감정이 거기까지 끓기 시작한 이상 서둘러 오오사카를 멸하지 않으면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멸하기 위해서는 천하가 납득할 수 있을 만큼의 이유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생기는 것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지'
 하고 이에야스는 생각했다. 적당한 이유가 성장하여 숙성되기까지 기다리는 것이 지금까지 이에야스가 해 온 사고방식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을 가만히 기다리기에는 이에야스가 너무 늙었다. 지금 오오사카에 있는 후환의 뿌리를 남긴 채 죽어버리면 이에야스의 사후 천하는 히데요리에게 빼앗겨 이에야스가 살아 생전에 무엇 때문에 그 고생을 했는지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여생 얼마 안 남았으니 지금은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오오사카를 도발해서 저 모자를 화나게 하여 그쪽에서 먼저 칼을 뽑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에야스가 그 결의를 품고 상경한 것은 1611년 3월이었다. 숙소를 니죠우 성()로 정했다. 이 성은 이에야스가 쿄우토에 토쿠가와 가문의 성으로 전년에 세운 것으로, 쿄우토 조정의 감시와 이에야스-히데타다 상경시의 숙소라는 두 가지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
 곧바로 오오사카(
大坂)에게,

 "상경하여 나에게 인사하러 오라"

 고 사자를 보냈다. 사자는 토쿠가와 가문에 있어서도 토요토미 가문에 있어서도 옛 주인 격에 해당하는 오다 우라쿠(織田 )가 선정되었다. 다인(茶人)이며 웅변가로 또한 무엇보다도 요도도노와 히데요리에게 있어 친족[각주:11]이었기에 사자로서는 최적이었을 것이다.
 - 만약 히데요리가 상경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면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로 인식하여 힘에 의지할 생각이다. 겸해서 또한 이것이 히데요리에 대한 최후통첩임을 명심하도록.
 이라는 결의를 사자에게 전했다. 오다 우라쿠도 긴장하였고 쿄우토(
京都)의 시민들까지 당장 내일이라도 전쟁이 일어날 거라며 떠들어댔다. 이에야스는 이래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는 김에 확실히 해야 했다. 그래서 다른 패도 꺼냈다. 코우다이인 네네(高台院 )였다. 이 히데요시의 미망인 – 이에야스에게 있어서는 세키가하라 승리의 배후 공로자이지만 – 은 이에야스의 두터운 신뢰 속에서 쿄우() 히가시야마(東山)의 산 속에서 살고 있었다. 이 토요토미 가문의 정실이야말로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를 설득시키기에는 가장 알맞은 인물일 것이다.

 코우다이인도 이에야스의 결의를 듣고 긴장하여 곧바로 자신이 손수 키웠다 할 수 있는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와 자기 친정의 당주인 아사노 요시나가( 幸長) 거기에 오오사카(大坂)의 가로인 카타기리 카츠모토를 불러 요도도노에게 세상의 사정을 제대로 이해시키도록 의뢰했다. 코우다이인이 생각하기에 이미 이에야스가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이상 오오사카(大坂)도 과거의 권위에만 집착하지 말고 오로지 이에야스를 따를 것이며, 그 성을 건네라고 하면 성을 건네고, 5만석 정도의 신분으로 참으라고 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토요토미 가문의 장래와 히데요리를 위함이다 - 는 것이었다. 그러니 상경하라는 말을 들으면 얌전히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요도도노가 그런 당연함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토요토미 가문을 망치는 사람은 요도도노라는 것을 키요마사, 요시나가, 카츠모토에게 말했다. 그들도 그 뜻에 이의(異意)가 없었다.

  1. 지금으로 말하면 머리돌 같은 것. [본문으로]
  2. 참고로 사도 금산의 금맥이 발견된 것은 1601년. 히데요시가 죽은 해는 1598년. [본문으로]
  3. 현 오오사카(大阪) [본문으로]
  4. 현 후쿠오카(福岡) [본문으로]
  5. 약 15미터라고 한다. [본문으로]
  6. 나라(奈良)의 대불은 이 시대에 만들어졌다. [본문으로]
  7. 이것을 특히 다이부츠 오오반(大仏大判), 즉 '대불을 만들기 위해 만든 돈'이라고 하여 1608년부터 1612년까지 주조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1720년 전후에 '다이도우지 유우잔(大道寺 友山)'이라는 인물이 세키가하라 이후부터 이에야스가 죽을 때까지의 일화를 기록. 이에야스가 은거하면서 에도 바쿠후(江戸幕府)를 조종하는 모습이 잘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9. 세키가하라 이전부터 노토(能登)는 토시이에의 차남 마에다 토시마사(前田 利政)의 영지였다(약 21만석). 즉 마에다 가문 전체의 석고는 이때 이미 100만석을 넘어있었다. 세키가하라 때 토시마사는 중립을 견지하였기에 이에야스는 그의 노토를 빼앗아 형인 토시나가에게 주었다. 본문의 80여 만석은 토시이에-토시나가만을 뜻함. [본문으로]
  10. 혼다 마사시게(本多 政重). 본편에서 자주 언급되는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의 차남이다. 여담으로 본문에 언급되는 것은 두 번째로, 첫 번째는 1604년까지 섬기다가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의 데릴사위로 들어가 세키가하라 때 이에야스에게 반항하여 바쿠후에게 위험시 되고 있던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의 안정에 조력하고 있었다. 1611년 마에다 가문 복귀. [본문으로]
  11. 요도도노에게는 외삼촌이 된다 [본문으로]

十一.

 세간에게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
)란 육체가 없는 유령과 같은 존재였다. 그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자질과 성격을 가진 젊은이인지를 동시대의 어느 누구도 – 그 모친과 시녀들 등 극소수의 측근들을 제외하고는 – 알 방도가 없었다.
 그를 죽이기 위해서 머리를 굴리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
川 家康)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그 분께서는 어떻게 자라셨나?"

 라는 질문을 오오사카(大坂)에서 사람이 오면 꼭 물어보았지만 천편일률적인 것밖에 듣지 못하였다.
 - 똑똑한가? 바보인가?
 라는 것 하나만은 이에야스가 꼭 듣고 싶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노골적으로 그렇게 물을 수 없기에 더더욱 없는 재료에서 억측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똑똑하다면 일찌감치 난을 일으켜 죽이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바보라면 – 역시 죽일 수 밖에 없지만, 단지 죽인다는 것을 천천히 생각해도 괜찮을 것이다.

 이에야스가 마지막으로 히데요리를 본 것은 히데요리가 만 10살 때인 1603년 2월 4일이었다. 이미 세키가하라(ヶ原) 전쟁이 3년 전 과거였으며 이에야스는 사실상 일본의 지배자이기는 했지만 아직 쇼우군(軍)이 되어 있지는 않았던 상태로, 이때 이에야스는 직접 오오사카로 내려가 가신의 신분으로 새해 인사를 올렸다. 그때도,
 '극히 평범한, 뭐 하나 볼 것 없는 아이군'
 이라 생각하며 속으로 안심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우둔한 편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피부가 희멀건 하며 아래쪽이 큰 입술을 새빨갛게 칠하였고, 정신상태가 축 처졌는지 10살이나 되었으면서도 알현의 자리에서 위엄을 지키지 못하여 걸핏하면 유모의 무릎에 파고들려고 하여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이 알현을 마지막으로, 바로 이 해의 바로 같은 달[각주:1]에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軍)이 되어 명실공히 지배자의 자리에 앉았다. 거기에 이 해의 7월, 이에야스는 6살 난 손녀딸 오센(於千)을 오오사카로 내려 보내 히데요리와 결혼시켰다[각주:2]. 센히메(千)의 결혼은 굳이 이에야스가 필요로 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는 고(故) 히데요시(秀吉)가 임종의 자리에서 남긴 유언으로, 이 유언을 지키지 않으면 히데요시의 휘하에 있던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 고 히데요시 은고(恩顧)의 다이묘우(大名)들이 어쩌면 동요할지도 몰라, 이에야스의 입장에서는 막 태어났을 뿐인 토쿠가와 정권의 안정과 그들 토자마다이묘우(外大名)의 진정시키기 위해서 이 소년과 꼬마숙녀의 결혼을 진행시킨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다음 해의 3월.
 이에야스는 후시미(伏見)에 있었다. 이에야스는 이제 자신이 세이이타이쇼우군인 이상 오오사카로 가서 신년인사를 하는 통례대신,

 "그쪽에서 신년인사를 하러 오게"

 라는 뜻을 토요토미 가문에 넌지시 비쳤다. 이에야스에게 있어선 과거가 어찌되었건 현재의 자신이 어떤 '분'인가를 자신의 주인인 히데요리에게 알려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연히 오오사카는 놀랐다. 아무리 세키가하라 이후 이쪽 토요토미 가문의 영지가 불과 70여만석이라는 일개 다이묘우정도로 봉토가 깎였을지언정 이에야스가 토요토미 가문의 신하인 것에는 변함이 없으며, 그가 고 히데요시에게 '히데요리님을 보살펴 키우겠습니다'라고 맹세한 쿠마노 서약서(熊野誓紙[각주:3]
)의 서약은 아직 살아있다. 거기에 관위(官位)라는 점에서도 히데요리, 이에야스에게는 상하가 없었다. 그러한데 어째서 히데요리가 이에야스를 알현하기 위해서 후시미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는가? 주인이 가신에게 알현한 예가 일본 밖의 나라들은 몰라도 일본에는 있을 턱이 없다.

 "그렇지 않은가?"

 하고 요도도노(淀殿)는 가로(家老)인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향해서 열화와 같이 화내며, 그렇게는 안 된다. 토쿠가와님이야말로 이쪽으로 오시라고 하게, 그렇게 전하게, 라고 말했다.

 "말씀대로 하게"

 하고 요도도노의 늙은 시녀들도 달린 입마다 요도도노와 같은 뜻의 말을 했다. 카츠모토는,
 '이렇게 몰라서야'
 하고 거의 절망했다. 여성에게 가장 이해시킬 수 없는 것이 정치일 것이다.

 "물론 도리로 따지면 진정 하시는 말씀대로 일 것이옵니다만"

 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설득시키고자 하였다. 이치는 물론 그러하옵니다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옵니다, 하고 현실을 턱이 빠질 정도로 설득하였건만 끝내 여성들은 납득하지 못하여 결국 카타기리 카츠모토가 히데요리의 대리인이라는 형식으로 사자(使者)가 되어 후시미(伏見)로 올라가 이에야스에게 신년인사하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자네가 대리인으로 가는 것이라면 좋네"

 하고 요도도노(히데요시가 죽은 뒤 다이구인(大虞院)이라는 호로 불리고 있었지만)는 아무렇지도 않게 수긍했다. 이런 면에서도 도리 운운하며 떠벌리는 것치고는 논리의 개념이 요도도노에게 부족한 점이었다. 토요토미 가문의 체면론을 강행하려고 하는 이상 아무리 대리인이라도 히데요리의 굴욕인 점에서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요도도노는 히데요리의 안전을 너무도 걱정한 나머지 앞뒤 가리지 않고 오오사카성에서 후시미로 보내고 싶지 않은 것뿐 단지 그뿐이었다. 요도도노는 다른 수많은 모친과 마찬가지로 자기 몸의 연장으로서의 히데요리만을, 오직 그 안전 하나뿐으로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이 미치질 않는 듯했다.

 카츠모토는 후시미로 올라가 이에야스를 배알하고 신년인사를 올렸다.

 "히데요리님은 어떻게 되셨는가?"

 하고 이에야스는 배경이 알 것 같으면서도 일부러 물었다. 카츠모토도 모나지 않도록,

 "죄송합니다만 감기이옵니다"

 하고 답했다. 이에야스는 아무 생각 없다는 듯 끄덕이며,

 "그거 걱정되는먼. 그러나 그 감기도 내년에는 낫겠지? 내년은 쿄우(京)에서 만나고 싶구나"

 하고 말했다. 즉 내년에는 꼭 오게, 라는 뜻일 것이다. 카츠모토도,

 "내년에는 꼭"

 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이에야스는 다짐이라도 받았다는 듯이 크게 끄덕였다.

 그 내년(1605년)이 왔다. 이 해 4월, 이에야스는 자신의 적자 히데타다(秀忠)에게 세이이타이쇼우군을 계승시켜 정권을 더 이상 히데요리에게 돌려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 천하는 토쿠가와 가문이 세습한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히데타다는 쿄우(京)에 올라가 취임 인사와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입궐하였고, 만천하의 다이묘우들은 모두 쿄우로 몰려들어 이에야스와 히데타다에게 축하의 뜻을 전했다. 하지만 우다이진(右大臣) 토요토미노 히데요리만은 쿄우(京)에 가지 않았고, 이에야스 부자에게도 축하를 하지 않았다. 이에야스는 조바심이 났다. 히데요리를 자신 쪽으로 오게 함으로써 토요토미 가문도 이젠 토쿠가와 가문에 굴복했다는 사실을 천하에 알리고, 토요토미 가문에게도 이 새로운 관계를 인정하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에야스는 쿄우(京)에 살고 있는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히데요시가 죽은 뒤 정식 명칭은 코게츠니고우(湖月尼公))를 움직여 그녀에게서 오오사카(大坂)로 사자(使者)를 보내게 하였다. 키타노만도코로는 명목상 히데요리의 공식 모친이기에 그런 점에서 가장 권위가 있을 터였지만, 그러나 요도도노는 주둥이를 앙 다문 조개와 같이 그 권고를 묵살했다.

 다음 해인 1606년도 쌍방은 만나는 일 없었고, 그 다다음 해 2월에 히데요리는 천연두를 앓아 한때는 사망설조차 퍼졌다. 이에야스는 이 시기 에도(江)에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히데요리는 죽은 건가? 히데요리는 죽지 않은 것일까?"

 하고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죽는 것이 천하를 위해서일 것이다. 살아있으면 이에야스는 곧바로 이를 죽이기 위한 싸움을 걸어 멸하여 자기 후손들에 대한 후환을 없애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분의 죽음을 기도하고 싶을 정도지 않습니까?"

 하고 이에야스의 늙은 모신(謀臣)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는 말했다. 일찍부터 마사노부는 토요토미 가문을 조기에 멸해야 한다는 주장론자로, 지난 1604년 히데요리가 감기를 이유로 상경 거부를 했을 때도 그것을 이유로 싸움을 일으키면 좋지 않습니까? 하고 이에야스를 꼬셨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세간의 반응이 두려웠다. 고 히데요시의 무덤 흙이 아직 마르지 않았는데도 히데요리를 죽여버리면 세간의 평판은 어찌될까? 지금은 좀 더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기에 서쪽으로 보낸 다이묘우들이 토쿠가와 가문에 굴복했다고는 해도 본심은 몰랐다. 특히 히데요시가 손수 키운 카토우 키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에 이르러서는 히데요리에게 은밀히 안부를 묻는 사자를 보낸다고 하며, 그 중에서도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은,
 - 때를 기다리십시오.
 하고 히데요리나 요도도노에게 속삭이고 있다고도 한다. '때'라는 것은 이에야스가 늙어 죽을 때를 기다리라는 것으로 그렇게 되면 히데요시의 옛 은혜를 기억하는 다이묘우들을 규합하여 정권을 에도에서 오오사카로 옮기겠다 – 고 말한다는 것이다. 마사노리가 말하길, 이에야스가 살아있는 동안은 다른 다이묘우들도 이에야스를 겁내 필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자신이나 키요마사도 이에야스에게는 은혜를 입고 있어 그를 상대로 싸움을 걸 마음도 생기지 않지만, 그러나 히데타다의 대가 된다면 더 이상 지킬 의리도 용서도 없다. 그런 것이었다......
 마사노리는 그런 것을 말하며 요도도노와 그녀의 측근들이 경거망동하는 것을 막고 있다고 한다. 그런 정보가 이에야스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이 정보의 진위는 차치하더라도 저 경솔한 후쿠시마 마사노리라면 할 듯한 말이며 다른 토자마다이묘우(
外様大名)들도 크건 작건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문제는 이에야스와 히데요리의 나이였다. 이에야스는 시간이 흐를수록 늙고 약해지는 반면 히데요리는 시간이 갈수록 성인이 되어간다.

 "이외로 히데요리님이 천연두로 돌아가시면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은 오히려 카토우, 후쿠시마 패거리들이지 않겠습니까?"

 하고 마사노부는 말했다. 그들은 히데요시가 손수 키운 자들이지만 세키가하라에서는 이에야스 측에 서(이유는 서군의 주모자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에 대한 증오와 그 이상으로 자기 가문에 대한 보신 때문이었지만), 후쿠시마는 전쟁터에서 선봉이 되었으며 카토우는 큐우슈우(九州)에서 서군의 코니시(小西), 시마즈(島津)를 틀어막아 각각 토쿠가와의 천하 수립에 다대한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두 사람 다 남들보다 배는 더 애증이 깊은 성격인 만큼 토요토미 가문의 쇠퇴에 마음을 아파하여 히데요리에게 자기 가문에 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 존재나마 지키고자 하였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여기서 히데요리가 자연사라도 하면 그들의 감정은 해방되어 위험한 다리를 건너지 않아도 될 것이다. 마사노부는 그 낌새를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에야스에게는 불행하게도 히데요리는 위기를 벗어나 목숨을 건졌다. 이에야스는 실망했지만, 그러나 그러는 사이 그의 마음을 편안케 하는 정보가 귀에 들어왔다. 히데요리가 생사를 왔다갔다하는 동안 그 어느 다이묘우도 그에게 병문안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에야스를 두려워하는 다이묘우의 마음이 그렇게 강하였고, 토쿠가와 정권의 견고함과 지속성을 그렇게 중히 여기고 있었다는 것은 이에야스에게 있어서도 이외였다.

 참고로 이런 정보들은 오오사카성 안에서 보내지고 있었다. 정보제공자는 하나하나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히데요리의 친위군[각주:4] 부대장 7명 중 2명(아오키 카즈시게(青木 一重), 이토우 탄고(伊藤 丹後))은 이에야스의 프락치였으며, 거기에 고 히데요시의 오토키슈우(御伽衆[각주:5])였던 오다 죠우신 뉴우도우(織田 常真 入道=노부나가(信長)의 둘째아들[각주:6])는 나이차이가 나긴 하여도 요도도노의 외사촌이었기에 오오사카성 안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었지만 히데요시 사후엔 뭐든 칸토우()를 위해서 힘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이에야스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보냈다.
 히데요리의 회복은 이에야스와 그의 측근에게 속으로 결심을 굳히게 만들었다. 이제 이 젊은이를 이 세상에서 없애기 위해서는 확고한 정략과 군사밖에 없다는 것을.

 사실상 오오사카성의 실권자는 요도도노의 유모인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大蔵卿局)라는 것을 이에야스도 혼다 마사노부도 알고 있었다. 마사노부는 여러 사람을 거치는 방식으로 칸토우의 사주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여 능숙히 이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에게 하나의 공포심을 심었다. 지금 당장 신사불각(神社佛閣)을 세우지 않으면 히데요리님이 죽는다 - 는 것이었다. 히데요리가 이번에 천연두를 앓은 것도 원령(怨靈)의 저주 때문이다 – 고 하였다. 고 히데요시공은 그 생애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전쟁터에 나가 수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 원령들의 저주가 앞으로도 히데요리님을 괴롭힐 것이다. 천하에 쓰러져가는 신사불각이 많은데 그런 것들을 재건하면 악령들은 물러갈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는 남들에게 들은 그대로 요도도노에게 전했다. 요도도노는 전율했다.

  1. 정확히는 1603년 2월 12일. [본문으로]
  2. 센히메의 모친 오고우(小督)는 요도도노의 막내동생. 따라서 히데요리와는 외사촌지간이다. [본문으로]
  3. 쿠마노는 일본의 거대한 신사(神社)가 있던 곳으로, 여기서 발행되는 부적과 같은 서약서 뒤에 서로 약속한 것을 쓰고 맹세했다고 한다. 이를 어기면 하늘의 벌을 받아 반드시 죽는다고 믿었다. [본문으로]
  4. 명칭은 나나테구미(七手組). 7개의 부대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5. 히데요시의 말상대. 히데요시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지식을 늘려갔다고 한다. [본문으로]
  6. 즉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를 말한다. [본문으로]

十.

 이에야스(家康)도 요도도노(淀殿)의 눈치를 살폈다. 만약 그녀가 성질이라도 부려 히데요리(秀)를 내세워서는 또다시 옛 토요토미(豊臣) 계열의 다이묘우(大名)들을 규합이라도 한다면 곧바로 천하에 난이 일어나 이에야스가 어렵사리 손에 넣은 천하가 주먹에서 모래알 빠져나가듯 사라지게 될 것이다.
 실제로 세키가하라(
ヶ原)에서 이에야스를 위해 일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등은 이에야스에게 각각 50만석 전후의 봉토를 얻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히데요리의 가신이기도 하다는 이중적인 입장을 지키며 틈만 나면 오오사카성(大坂城 )에 가 히데요리를 배알하고 인사를 올렸다. 만약 이에야스가 히데요리를 가혹하게 대하기라도 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알 수가 없었다.

 때문에 이에야스는 에도(江)에 있으면서도 토요토미 가문의 필두 대로라는 자격으로 천하에 임했다. 세키가하라부터 2년 뒤인 1602년 2월 14일에 재차 오오사카에 나타났고, 다음 해 3월 14일 히데요리를 배알하고는,

 "평소 문안 인사를 드리지 못하여 이제서야 신년인사를 올리옵니다"

 라고 말하였다. 3월 중순이 되어서야 신년인사를 하는 것도 묘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가신으로써의 예를 취하였고 취함에 따라 카토우 키요마사 등 옛 토요토미 계열의 다이묘우의 감정을 진정시켰다. 다음 해 1603년의 배알을 마지막으로 이에야스는 오오사카에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그제서야 토요토미 가문이라는 한때 일본을 지배한 강성했던 이름을 잊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히 오오사카 성 밑도 쇠퇴하였고 대신해서 에도가 번창하였다. 토요토미 계열의 다이묘우도 에도에 저택을 세워서는 자신들의 처자식을 자발적으로 에도에서 살게 하는 식으로 이에야스에게 인질을 바쳤다. 카토우 키요마사 조차 – 라기보다 오히려 키요마사가 앞장서 미야케자카(三宅坂) 고개 위에 집터[각주:1]를 달라고 해서는 황금을 여기저기 처바른 저택을 만들어 처와 자식을 살게 하였다. 이제 에도 정권에 거역하지 않겠다는 증거를 이에야스와 천하에 공언한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키요마사를 따라 다른 토요토미 계열의 다이묘우들도 그리하였다. 이에야스는,
 - 이제 오오사카에 새해 인사할 필요가 없겠군
 하고 생각하여 오오사카에 가는 것을 그만두었다.

 히데요리는 힘을 상실했다.
 하지만 관위만큼은 남다르게 승진했다. 승진하는 것이 당연했다. 토요토미 가문이 가진 봉토의 규모야 일개 다이묘우에 지나지 않았지만 다른 다이묘우와 다른 점은 부친 히데요시나 히데요리에게는 형 뻘인 히데요시의 양자 히데츠구(秀次)가 칸파쿠(
白)에 임명 받은 것처럼 귀족(公家)이라는 점에 있었다. 이런 점은 다섯 셋케(五家-섭정, 칸파쿠가 될 수 있는 문벌)인 코노에(近衛), 타카츠카사(鷹司), 쿠죠우(九), 니죠우(二), 이치죠우(一条)와 다를 바 없었다. 히데요리는 소년이었지만 1601년에 종이위(從二位) 다이나곤(大納言)에 임명 받았으며, 1603년에 나이다이진(内大臣)이 되었다. 10살의 어린 나이다이진은 과거를 찾아보아도 드물 것이다.
 나이다이진 정도 되면 조정 백관의 총수라고 말해도 좋았다. 이 때문에 쿄우토(京都) 조정은 오오사카에 마땅한 예를 치렀다. 신년이라도 되면 친왕(親王), 상급귀족(公卿) 등이 오오사카로 대거 내려와, 성내에 있는 건물에서 히데요리를 배알하고는 이 토요토미 성(姓) 2대째인 귀인(貴人)에게 공손히 예를 올렸다. 이런 점에서만은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때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만이 신년인사 하러 오는 것을 그만둔 이유, 더불어 상기와 같은 이유가 있음에도 그만 둔 더 큰 이유는 - 이 해에 이에야스가 조정에 주청하여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에 칭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세이이타이쇼우군은 아주 옛날 키소 요시나카(木曽 義仲)
[각주:2],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각주:3]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겐지(源氏)가 아니면 임명 받지 못한다.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 尊氏)[각주:4]도 겐지였기에 임명되었으며,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도 토키 겐지(土岐 源氏)를 칭하였기에 임명 받았다[각주:5].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織田家)의 부하 장수 시대에 본성(本姓)을 공개적으로 칭하지 않았으며 한때 헤이시(平氏)를 칭했기 때문에 세이이타이쇼우군이 되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조정에 주청하여 조정이 만들어 준 성(姓)을 받는(朝臣) 형식으로 토요토미(豊臣)를 하사 받아서는 귀족(公家)이 되었고 칸파쿠()라는 자격으로 일본을 통치하였다. 이에야스도 처음엔 겐지를 칭하지 않았지만 노부나가(信長)와 동맹을 맺고 있던 시절에 조정에 청하여 겐지 공칭을 허락 받았다[각주:6]. 다행스럽게도 이로 인해 쇼우군 가문(軍家)에 임명되었다. 세이이타이쇼우군의 최대 특전은 바쿠후(幕府)을 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쟁 후 이어지고 있던 에도의 비합법적 정부를 바쿠후 창설로 인해 정당화 할 수 있었으며 그런 합법성을 갖고 다이묘우를 거느리고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토요토미 가문에게 형식상이나마 머리를 굽히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세키가하라에서 승리한지 이미 3년이 지난 상태였다.

 이 소식은 곧바로 오오사카에 전해져 요도도노와 그녀의 시녀들을 놀라게 하였다.

 "가신 주제에 바쿠후를 연다고?"

 이해할 수 없었다. 더욱이 바쿠후를 연 이상 이젠 정권을 토요토미 가문에게 반환할 의사가 없다는 것은 아닌가?
 이때도 요도도노는 카타기리 카츠모토(
片桐 且元)를 불러 마치 카츠모토가 이에야스인 마냥 힐문했다.

 "자네는 거짓말을 한 것인가?"

 하고 요도도노는 숨을 거칠게 하며 책망하였다. 카츠모토는 즉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한 후 자기자신이 그랬으면 좋겠다고 남몰래 바라고 있던 것을 흡사 이에야스의 머리 속 생각인양 말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런~ 쇼우군() 직은 일대에 한해서이옵니다. 그 후에는 히데요리님께 물려주실 생각이옵니다"

 이 시기 에도에서 자기 영지(領地)인 히로시마(広島)로 돌아가던 후쿠시마 마사노리도 오오사카에 들려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를 배알하여 비슷한 말을 하였다.

 "잠시 동안만 참으시면 되옵니다"

 라는 것이었다. 마사노리가 말하길 이에야스는 1543년 호랑이띠로 이미 노령이다. 그와 반대로 나이다이진(内大事=히데요리)님은 어린 나무가 쭉쭉 자라듯이 커가며, 커갈수록 이에야스가 죽음에 가까워진다. 이에야스가 죽으면 졸자(拙者)를 시작으로 한 천하의 제후들은 더 이상 토쿠가와 가문에 세울 의리가 없어진다. 토쿠가와 가문 자체도 이에야스를 잃으면 지금과 같은 강한 전투력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참는 것이 이기는 것이옵니다. 초조해하지 말고 난을 일으킬 생각하는 일 없이 일단 에도의 지시를 따르시길. 언젠가 때가 오면 아무리 토쿠가와 가문이 정권을 반환하고 싶어하지 않더라도 우리들이 활과 칼을 들고 토요토미 가문으로 되찾아 오겠습니다. – 라는 것이었다.

 "반드시 그리 하겠사옵니다"

 하고 마사노리는 힘주어 말했다.

 이 너무도 듬직한 말에는 안심이 되는 한편 아무리 요도도노라도 걱정도 되었다.

 "사에몬다유우(左衛門太夫=마사노리)님. 그러한 말씀하셔서 행여라도 에도(江戸)로 그 말이 새어나가기라도 한다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하고 이 귀부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남을 걱정하였다. 마사노리는 그것만으로도 감동하여 눈물을 머금고,

 "고맙사옵니다"

 라며 목소리를 적셨다. 하지만 곧바로 고개를 쳐들어 큰소리로 외쳤다.

 "듣더라도 무슨 일이 있겠사옵니까? 원래 에도님(江戸殿=이에야스)에게 있어 저는 은인이옵니다. 저 세키가하라 때 제가 미츠나리(三成)를 미워한 나머지 에도님에게 가담하였기 때문에 수많은 제후들은 앞다투어 에도님을 따른다고 말하였습니다"

 사실 그러했다. 선대 히데요시와 친척인 자[각주:7]로, 그 때문에 토요토미 다이묘우 중에서는 키요마사와 더불어 후다이(譜代)[각주:8] 필두로 여겨지고 있었으며, 세키가하라 즈음에는 그런 마사노리조차 이에야스에게 가담하였기에 다른 다이묘우들도 거리낌없이 오오사카 측을 물리치는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 시기의 이에야스에게 있어 마사노리의 정략적 가치는 그만큼 거대한 것으로 그러한 자신의 가치를 마사노리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전쟁터에서 마사노리는 이에야스 측의 선봉으로 가장 치열한 전투의 한가운데서 용맹한 활약을 벌여 서군을 무너뜨렸다. 어쨌든 마사노리가 이에야스에게 기여한 것은 누구보다도 컸다. 거기에 마사노리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기 이전 시모츠케(下野) 오야마(小山)에서 이에야스 편에 서라고 권유한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에게 마사노리는,

 "에도님을 돕기는 하겠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미츠나리(三成)에 대한 원한 때문일세. 이 전투에서 에도님이 이긴 후 결코 히데요리님의 신상에 지장이 없도록 에도님의 입으로 확약을 듣고 싶네"

 라고 말하여 이에야스는 나가마사를 통하여,

 "그러한 일은 없다"

 라는 뜻의 말을 받았다. 그런 후쿠시마 사에몬다유우이기에 가령 이 말이 칸토우(関東)에 전해지더라도 이에야스는 퉁퉁거리지도 못할 터이다 – 라고 말하였다. 요도도노는 비로소 안심했다.

 그러나 에도의 이에야스는 마사노리 정도의 실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 곧 밝혀졌다.
 가볍게 쇼우군 직을 사퇴한 것이다. 취임한지 2년 후인 1605년의 4월이었다. 그런데 그 사임한 그날 조정에 주청하여 쇼우군 직을 적자 히데타다(
秀忠)에게 물려주어 일본의 지배권을 세습시켰다. 이 소식만큼이나 오오사카를 낙담시키고 요도도노와 그녀의 시녀단을 분개시킨 것은 없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히데타다에게 쇼우군 직을 히데타다에게 물려줌으로써 더 이상 히데요리에게 정권을 물려줄 의사가 없다는 뜻을 천하에 공표한 것이다.

 이때 히데요리는 13살로 관위는 우다이진(右大臣)에 임명된 상태였다. 앞으로 승진한다면 칸파쿠밖에 없었으며 칸파쿠가 되면 죽은 아비 히데요시의 선례를 따라 한편으론 백관을 거느리고 조정의 중심에 서며 한편으론 이백여 제후들을 이끌며 천하의 정치를 총괄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면 중세 이래 무가(武家)의 통솔자로 여겨지는 세이이타이쇼우군과 당연하게도 충돌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1. 현재 일본의 헌정기념관. '미야케자카 고개(三宅坂)'라는 이름은 시간이 흘러 17세기 중반에 미야케 가문(三宅家) 참근교대시에 이용하는 에도저택이 생기면서부터 생긴 이름으로 당시는 ...뭐라고 불렸는지 모르겠음. 데헤~ [본문으로]
  2. 미나모노토 요리토모와는 사촌지간이다(부친끼리 배다른 형제. 사족으로 요시나카의 부친은 요리토모의 큰형(悪源太)에게 살해당했다). 겐페이 쟁란기(源平爭亂) 때 토벌 명령이 내려진 헤이케(平家)를 누구보다도 빨리 쿄우(京)에서 쫓아냈다. 키소(木曽)는 묘우지(苗字)이며 본성(本姓)은 미나모토(源). 보통 '미나모토노 요시나카(源 義仲)'로 알려져 있다. 요리토모의 부하뻘이었지만,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며 나대다가 그 꼴을 못 본 요리토모가 정벌군을 파견하자 정치적 우위를 세우기 위해 코시라카와 법황(後白河法皇)을 협박하여 쇼우군이 되었다. [본문으로]
  3. 카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를 연 사람. [본문으로]
  4.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를 연 사람 [본문으로]
  5. 혼노우지의 변(本能寺の変) 이후 미츠히데가 지원을 호소하며 호소카와 유우사이에게 보낸 편지(明智光秀公家譜覚書)에 나타나는 말로 종삼위(従三位)와 쇼우군에 임명받았다고 주장했다. 혼노우지의 변에 있어서의 조정흑막설의 증거로 많이 사용되는 떡밥이지만 개인적으로 당시까지 미츠히데의 관위인 종오위(従五位) 휴우가노카미(日向守)에서 무가로써는 하나의 허들인 사위(四位)를 뛰어넘어 단번에 종삼위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신빙성은 없다고 생각한다.(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다) [본문으로]
  6. 1566년 미카와 통일 기념으로 그때까지 쓰던 마츠다이라(松平)를 토쿠가와(徳川)로 바꾸면서. 마츠다이라 자체의 본성은 가모(賀茂)인 듯 싶지만 이때부터 본성은 미나모토(源)라고 우겼다. [본문으로]
  7. 마사노리의 모친은 히데요시의 숙모. [본문으로]
  8. 대대로 그 가문을 섬기는 가신.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