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야스케는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 때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죽음을 알게된 후 그의 후계자 노부타다織田信忠에게로 가서 싸우다 항복. 아케치 '더 반란군노무새끼' 미츠히데明智光秀는 그런 그를 보고는 '흑인는 동물이기에 아무 것도 모르며, 또한 일본인도 아니니 풀어주라'고 하여 남만인南蛮人의 성당으로 보내졌다고 한 뒤에는 어찌되었는지 아무도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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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스루가성 어전시합駿河城御前試合에 나온 흐긴 - 작품상에서는 불법승仏法僧이라 함 - 이 정확하게 야스케인지 어떤지는 모름. 다만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불법승과 싸운 적이 있던 가로 사에구사 이즈노카미三枝伊豆守가 '혹시 귀공은 야스케가 아닌가!?' 하고 물어보며 간접적으로 야스케임을 암시함.
ASEAN 관련 정상회의 참석차 라오스 비엔티안을 방문 중인 이시바 시게石破茂 내각총리대신은, 현지 시간 10월 10일 오후 3시 45분(일본시간 같은 날 오후 5시 45분)부터 약 40분간 윤석열 한국 대통령과 한일정상회담을 가졌으며, 그 개요는 아래와 같습니다.
양정상은 내년 양국이 국교정상화 60주년을 맞이하는 것을 기반으로 하여 인적교류 추진, 경제 협력, 안보 분야에서의 협력 등 폭넓은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해 나가는 것과 국제사회에서 일한 양국이 파트너로서 해야 할 역할에 대해 솔직한 의견을 교환하였습니다. 양정상은 국교정상화 60주년인 내년을 일한 관계를 크게 도약시키는 해로 만들기 위해 양국간 논의를 가속화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또한 안보 분야에서 일본-한국-미국간의 협력을 더욱 강화해 나가기로 하였습니다.
양정상은 북조선에 대한 대응을 시작으로 하는 지역 정세에 대해서도 의견을 교환하였습니다. 북조선에 대해서는 핵미사일 활동이나 러시아와의 군사협력 강화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공유하면서 일한, 일한미 3국 간 긴밀한 공조를 지속해 나가기로 하였습니다. 또한 납치문제에 대해서도 윤 대통령으로부터 재차 지지를 받았습니다.
양정상은 이시바 총리대신의 취임 후 곧바로 만나 의견을 교환할 수 있게 된 것을 환영하며, 앞으로도 긴밀한 소통을 계속해 나가기로 하였습니다.
* 일본 외무성의 글이기에 한미일, 한일 등을 일본 외무성의 표현 순서대로 일한, 일한미로 표기.
시바 가문斯波家은... 시바이누柴犬할 때의 '柴'를 썼네요. 발음은 같습니다만 왠지 웃기네요. 위 그림에서 설명대로 오다 노부나가와 관련이 있습니다. 신장공기信長公記의 수권首巻에서 자주 나오는 부에이님武衛様는 저 시바 가문의 당주인 시바 요시카네斯波義銀를 지칭합니다. 그러니 노부나가와 관련이 있기는 하죠. 그러나 어쨌든 어삼가는 아닙니다. 그나저나... 시바를 斯波가 아니라 柴라니... 芝.
그럼 저는 시바이누斯波犬라고 하죠.
하지만, 일본어로 물어보면...
-----번역 시작----- 고산케[御三家]는 일본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세 가문을 가리킨다. 구체적으로는 아래의 세 가문을 지칭합니다.
1. 오와리 토쿠가와 가문[尾張徳川家]
· 오와리 토쿠가와 가문[尾張徳川家]은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직계 가문으로, 현재 아이치현 나고야(愛知県 名古屋)를 본거지로 삼고 있었다. 이에야스의 손자인 토쿠가와 요시나오[義直公]가 설립하여 되어 오와리번을 통치했습니다.오와리 토쿠가와 가문은 에도시대 내내 중요한 다이묘우 가문 중 하나로 나고야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지배했다. 2. 키슈 도쿠가와 가문[紀州徳川家]
· 키슈우 토쿠가와 가문은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동생인 토쿠가와 요시노부[徳川頼宣]가 설립하여 현재의 와카야마현을 중심으로 키슈우번을 통치했다.키슈우 토쿠가와 가문도 에도시대의 중요한 다이묘우 가문으로, 키슈우번의 지배를 통해 막부의 정책과 지방 통치에 기여했습니다. 3. 미토 도쿠가와 가문(水戸徳川家)
· 미토 토쿠가와 가문은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인 토쿠가와 미츠쿠니[徳川光圀]가 설립한 가문으로, 현재의 이바라키현 미토시를 거점으로 미토번을 통치했다.미토번은 특히 학문과 문화의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토학'이라는 학문 체계를 발전시켰습니다.
이들 '고삼가(御三家)는 모두 토쿠가와 가문의 일족으로 막부에 대한 중요한 지지기반을 제공했다.또한 각 가문의 영지는 일본의 역사와 정치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번역 끝-----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9째 아들인 오와리의 요시나오를 손자, 10째 아들인 키슈우의 요리노부를 동생, 미토의 경우 미츠쿠니의 애비인 요리후사[徳川頼房]를 빼고 미츠쿠니가 설립했다는 등... 자잘한 거 말고는 대체로 맞는 듯이 보입니다.
참고로 작년 초인 2023년 2월에 쳇지티피에게 일본어로 어삼가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의 결과는
마츠다이라 씨는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토쿠가와를 칭하기 이전의 가문입니다. 이에야스는 초반에 마츠다이라 모토야스[松平元康]를 칭하였고 이후 마츠다이라 이에야스[松平家康]를 거쳐 토쿠가와 가문으로 개성한 후에야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되었습니다.
이에야스가 몸을 일으킨 미카와三河에는 같은 친척들인 마츠다이라가 엄청 많았습니다. 오죽했으면 열여덟 마츠다이라十八松平라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거기에 일개 쿠니国 또는 그 이상을 영유할 정도인 마에다 가문前田家, 다테 가문伊達家, 시마즈 가문島津家 등등도 에도 막부의 정식 호칭은 각각 마츠다이라 카가노카미松平加賀守, 마츠다이라 무츠노카미松平陸奥守, 마츠다이라 사츠마노카미松平薩摩守이었을 정도로 에도 시대에 마츠다이라는 너무도 많습니다.
토쿠가와 고산케...는 아예 싸잡아서 미토로 한정 시켰네요.
토쿠가와 시미즈 번徳川清水藩...은 아마도 어삼경御三卿 중 하나인 시미즈 가문清水家과 헷갈렸나 보네요. 시미즈 말고 키요미즈 번清水藩은 에도시대 초기에 잠깐 있었다가 없어진 번이 있습니다만.. 여기에 낄 급도 아니고요.
그럼 제미나이에게 일본어로 물어보면...
-----번역 시작----- 어삼가에 대해서
어삼가는 에도 시대에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에 있어서 쇼우군 가문将軍家와 특히 가까운 혈연관계였던 세 가문을 지칭합니다. 이들은 쇼우군 가문에 후계자가 없을 경우에 이 세 가문에서 양자를 보낼 수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높은 지위와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삼가를 구성하는 가문.
오와리 토쿠가와 가문 :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형 마츠다이라 야스치카松平康親의 자손으로 오와리 번을 다스렸다.
키슈우 토쿠가와 가문 :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9남 토쿠가와 요리노부의 자손으로 키슈우 번을 다스렸다.
미토 토쿠가와 가문 :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11남 토쿠가와 요리후사의 자손으로 미토 번을 다스렸다.
-----번역 끝-----
가격家格이라고 '가문'이라는 단어로 고풍스럽게 표현한 것이 재밌네요.
오와리 토쿠가와 가문 설명에... 이에야스의 형이라고 했는데, 이에야스에게는 대놓고 형제라 할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부제.. 그러니까 모친이 히사마츠 가문久松家에 시집가 낳은 동생들만 있었죠. 후손들이 자신이 선조는 이에야스의 배다른 형제였다고 주장하거나 하는 경우는 있었습디마만 이에야스가 살아있는 동안에 동생취급 했던 것은 저 히사마츠 가문 사람들 말고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키슈우 토쿠가와 가문은 이에야스의 9째가 아닌 10째 입니다.
미토번은 틀린 곳 없네요.
마지막으로 윈도우 11의 코파일러.
먼저 한국어로
틀린 곳 없습니다.
일본어로 물어볼 시,
-----번역 시작-----
御三家고산케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 중 오와리(요시나오), 키이(요리노부), 미토(요리후사)의 가계를 가리킵니다. 이들 가계는 장군가 다음가는 가문으로 특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토쿠가와 어삼가는 에도시대에 쇼운군직을 계승할 가능성이 있는 가계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오와리번(61만석)은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9남인 요시나오, 키이번(55만석)은 10남 요리노부, 미토번(35만석)은 11남 요리후사가 각각 번주가 되었습니다.
어삼가御三家라는 단어는 다른 분야에서도 유력한 세 가지 존재를 지칭할 때 사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연예계나 산업계 등에서 「어삼가」라고 불리는 그룹이 존재합니다.
-----번역 끝-----
틀린 곳 없네요.
그래서 결론은,
쳇지티피나 제미나이의 경우, 어삼가御三家에 관해서 한국어로 물어 볼 시 제대로 된 답변을 얻을 수 없다.
쳇지티피나 제미나이의 경우, 어삼가에 대해 일본어로 물어볼 시 크게는 맞고 자잘하게는 틀린 답변을 얻을 수 있다.
신장공기는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일대기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가신 오오타 규우이치[太田牛一]가 쓴 책입니다.
원래 이름은 신장기[信長記]였습니다.
그러나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의 삼단철포라던가,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の戦い] 기습설이 나오는 오제 호안[小瀬甫庵]의 동명의 책 신장기信長記가 더 유명해지다 보니, 현대에 와서는 구별을 위해 오오타의 것은 신장공기[信長公記], 오제 호안이 쓴 것은 그의 이름을 붙여 호안신장기[甫庵信長記]라고 합니다.
이 신장공기는 일반적으로,
노부나가가 상경하는 1568년부터 1982년까지의 15년간 1년당 1권씩 총 15권
+
태어나면서 상경이전까지인 수권首卷
해서 총 16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자 오오타 규우이치가 직접 쓴 자필본 세트는 크게 2가지가 있습니다.
현재 15권 세트로 전해지는 것은 이케다 가문[池田家]이 소장하다 현재 오카야마 대학[岡山大学] 부속 도서관에 있는 통칭 이케다본(池田本)
그리고 노부나가의 후손가문이 소장하다가, 노부나가를 모신 신사 타케이사오 신사(建勲神社)에 봉납한 타케이사오 신사본(建勲神社本)의 두 판본이 있습니다.
(뭐 그 외에도 따로 일부분만 있는 것도 있지만 생략)
상경이전까지의 노부나가를 그린 수권(首卷)이 포함된 것은 타케이사오 신사본 建勲神社本 체계이며 수권이 포함된 16권 체계의 사본들은,
옛 사츠마[薩摩] 시마즈 가문[島津家]의 방계인 마치다 히사나리[町田久成]가 소장했던 마치다 본(町田本). 이건 현재 일본 국회도서관 디지털 콜렉션에서 볼 수 있는 것. 그래서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신장공기는 이것이 원본입니다. 사족으로 제가 이 블로그에서 번역하고 있는 것도 일본 국회도서관에 올라와 있는 것입니다.
코노에 가문[近衛家]이 소장하여 코노에 가문의 별칭인 요우메이[陽明]가 붙은 요우메이본(陽明本). 이건 서적화된 것들의 원본. 종이화된 신장공기를 사면 이 양명본이 원본입니다. 그래서 서적화된 신장공기와 인터넷에서 구할 수 있는 신장공기를 비교해 보면 미묘하게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키이 토쿠가와 가문[紀伊徳川家]가 소장했었다가 현재 동경대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구남규문고본(旧南葵文庫本)
이상은 내용은 같지만 고유명사나 노부나가를 부르는 호칭 등의 세세한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호리오 가문[堀尾家]이 소장하다가 현재 텐리대학(天理大学)이 소장하고 있는 천리본(天理本).
이 천리본은 상기의 것들과 대동소이하나 고유명사 레벨이 아닌 그 이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큰 예를 들자먀면, 오케하자마 전투 전날 회의에서,
천리본을 제외한 버전들은,
(대략적으로)
작전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않고 잡담만 하다가, '자~ 밤 늦었으니까 이제 집에들 가지~'하고 노부나가가 말했기에, 돌아가던 가로(家老)들이 '운이 다할 때는 지혜의 거울도 흐려진다더니 바로 이걸 보고 하는 말인 듯'하면서 노부나가를 비웃었다.
라 하는데, 이 천리본은 회의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의 침공 소식을 들은 노부나가가 반드시 출진하여 국경 근처에서 요시모토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가로들이 '적은 4만5천. 우리는 그것의 10분의 1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우리에게는 키요스 성[清洲城]이라는 굉장한 성을 가지고 있으니 농성합시다'며 출진을 반대 하자, 노부나가는 '야스미 우콘[安見右近]이란 사람은 농성하다 아군의 수가 줄어 몰락했다.'며 끝까지 출진을 주장하여 관철시킴.
회의가 끝나서 술상이 나오나, 노부나가의 결전주장이 채택되어 분위기가 죽자, 부하 중 하나가 분위기 띄운다며 노래 부르자 노부나가는 북까지 쳐줌. 그렇게 시끌벅적한 술잔치가 벌어지고, 술잔치가 끝나자 노부나가는 침소로 향했다.
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버전에선 대책없이 잡담만 하다가 집에 갑시다~ 하는데,
천리본에서는 회의 자체도 활발했지만 노부나가도 적극적으로 작전을 개진하였고 자신의 주장이 통해 분위기까지 다운되자 개선까지 시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