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어역 신장공기 천리본 수권

現代語訳 信長公記 天理本 首卷

..이 도착했기에 보고.

 

신장공기는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일대기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가신 오오타 규우이치[太田牛一]가 쓴 책입니다.

원래 이름은 신장기[信長記]였습니다.

그러나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의 삼단철포라던가,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の戦い] 기습설이 나오는 오제 호안[小瀬甫庵]이 오오타의 신장기를 바탕으로 상상력을 덧붙인 동명의 책 신장기가 더 유명해지다 보니, 현대에 와서는 구별을 위해 오오타의 것은 신장공기(信長公記), 다른 사람이 쓴 것은 그의 이름을 붙여 호안신장기(甫庵信長記)라고 합니다.

 

이 신장공기는 일반적으로,

노부나가가 상경하는 1568년부터 1982년까지의 15년간 1년당 1권씩 총 15권

+

태어나면서 상경이전까지인 수권首卷

해서 총 16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자 오오타 규우이치가 직접 쓴 자필본 세트는 크게 2가지가 있습니다.

 

현재 15권 세트로 전해지는 것은 이케다 가문[池田家]이 소장하다 현재 오카야마 대학[岡山大学] 부속 도서관에 있는 통칭 이케다본(池田本)

 

노부나가의 후손가문이 소장하다가, 노부나가를 모신 신사 타케이사오 신사(建勲神社)에 봉납한 타케이사오 신사본(建勲神社本)

의 두 판본이 있습니다.

(뭐 그 외에도 따로 일부분만 있는 것도 있지만 생략)

 

상경이전까지의 노부나가를 그린 수권(首卷)은 타케이사오 신사본 체계이며 수권이 포함된 16권 체계의 사본들은,

 

옛 사츠마[薩摩] 시마즈 가문[島津家]의 방계인 마치다 히사나리[町田久成]가 소장했던 마치다 본(町田本). 이건 현재 일본 국회도서관 디지털 콜렉션에서 볼 수 있는 것. 그래서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신장공기는 이것이 원본입니다. 사족으로 제가 이 블로그에서 번역하고 있는 것도 일본 국회도서관에 올라와 있는 것입니다.

 

코노에 가문[近衛家]이 소장하여 코노에 가문의 별칭인 요우메이[陽明]가 붙은 요우메이본(陽明本). 이건 서적화된 것들의 원본. 종이화된 신장공기를 사면 이 양명본이 원본입니다.

 

키이 토쿠가와 가문[紀伊徳川家]가 소장했었다가 현재 동경대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구남규문고본(旧南葵文庫本)

 

이상은 내용은 같지만 고유명사나 노부나가를 부르는 호칭 등의 세세한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호리오 가문[堀尾家]이 소장하다가 현재 텐리대학(天理大学)이 소장하고 있는 천리본(天理本).

이 천리본은 상기의 것들과 대동소이하나 고유명사 레벨이 아닌 그 이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오케하자마 전투 전날 회의에서,

천리본을 제외한 버전들은,

(대략적으로)

작전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않고 잡담만 하다가, '자~ 밤 늦었으니까 이제 집에들 가지~'하고 노부나가가 말했기에, 돌아가던 가로(家老)들이 '운이 다할 때는 지혜의 거울도 흐려진다더니 바로 이걸 보고 하는 말인 듯'하면서 노부나가를 비웃었다.

 

라 하는데, 이 천리본은 회의에서,

 

노부나가가 반드시 국경 근처에서 요시모토[今川義元]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가로들이 '적은 4만5천. 우리는 그것의 10분의 1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우리에게는 키요스 성[清洲城]이라는 굉장한 성을 가지고 있으니 농성합시다'며 반대 하자, 노부나가는 '야스미 우콘[安見右近]이란 사람은 농성하다 아군이 줄어 몰락했다.'며 끝까지 일전을 주장하여 관철시킴.

회의가 끝나서 술상이 나오나 노부나가의 결전주장이 통해 분위기가 죽었는지, 부하 중 하나가 분위기 띄운다며 노래 부르자 노부나가는 북까지 쳐줌. 그렇게 시끌벅적한 술잔치가 벌어지고, 술잔치가 끝나자 노부나가는 침소로 향했다.

 

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버전에선 대책없이 잡담만 하다가 집에 갑시다~ 하는데,

천리본에서는 회의 자체도 활발했지만 노부나가도 적극적으로 작전을 개진하였고 자신의 주장이 통해 분위기까지 다운되자 개선까지 시킵니다.

 

여하튼, 이 천리본은 제가 '오다 노부나가라는 역사 - 신장기의 저편에[織田信長という歴史―『信長記』の彼方へ]'라는 신장공기를 전문적으로 다룬 책에서 단어로만 보았는데, 근래 나이시 선생乃至政彦의 웹연제 글에서 이 책의 존재를 알았기에 냉큼 구입했습니다.

 

불재판火起請

일본사 이것저것 2024. 2. 29. 15:16 Posted by 발해지랑

가모우 우지사토蒲生氏郷의 고향으로 유명한 일본 가모우군蒲生郡 히노日野에서 1619년 하나의 재판이 행해짐.

 

히노 산日野山의 이용을 두고 동측 9개 마을과 서측 9개 마을이 오랫동안 다툼. 오랫동안 다투다 보니 권리관계가 꼬이고 꼬였는지 에도 막부江戸幕府도 어떻게 확정을 짓지 못한 듯 다툼의 시간만 흐름.

 

이때 서쪽 마을 측의 카쿠베에角兵衛라는 사람이 한 제안을 함.

 

그것은 불재판火起請.

불에 달군 철편을 들어 화상이 적은 쪽이 승자, 심한 쪽이 패자가 되는 것.

신이 굽어 살피어 죄가 있는 쪽에 화상을 더 많이 입게 한다는 논리.

 

'카쿠베에'라는 인물은 서쪽 마을 사람들이 먹여 살리고 있던 낭인이었다 함. 나름 똑똑하다는 평가를 받던 이 사람은 불재판 제안뿐만아니라 서쪽 마을에 은혜를 입었다며 스스로 서쪽 마을의 대표로 철편 드는 사람이 되겠다고 함.

 

이 제안이 동쪽 마을에 전해지자 동쪽은 패닉.

거절하면 지들이 권리 포기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며, 신이 보기에 켕기니까 피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었으니. 그러나 졸라 겁나서 우짜나~ 하던 중에 어떤 사람이 자신이 한다며 손을 듬.

 

그러나 서쪽과 동쪽이 불재판에 관해 이러저러한 교섭하던 중에 서쪽이 동쪽의 촌장庄屋 중 하나인 키스케喜助에게 겁쟁이라는 소리를 했나 봄. 키스케는 분노하여 자신이 한다고 하여 동쪽 대표로 촌장 키스케가 대표로 나섬.

 

재판당일.

에도 막부에서 심판으로 파견된 무사들의 입회하에 불재판이 행해짐.

 

도가니에서 도끼 모양을 한 철편을 빨갛게 될 때까지 달구고 그걸 도가니에서 약 9미터 앞에 있는 선반에 올려 놓는 것.

 

, 부정을 막기 위해 서쪽이 가져온 철편은 동쪽이, 동쪽이 가져온 철편은 서쪽이 들기로 함.

 

서쪽의 카쿠베에, 동쪽의 키스케 둘 다 새하얀 옷을 입고 준비.

특히 동쪽 키스케의 모친은 아들이 병신짓을 하면 그자리에서 죽이겠다며 언월도를 들고 옆에서 지켜봄.

 

시작 소리가 울림.

 

동쪽 키스케는 들고서는 달려나갔으나 역시 너무나 뜨거웠는지 약 5.5미터 정도 갔을 때 선반을 향해 도끼를 내던짐. 너무 달궈졌던지 나무로 된 선반이 타서 구멍이 뚫릴 정도 였다 함.

 

제안자이기도 했던 서쪽 카쿠베에는 너무나 뜨거웠는지 들자마자 떨굼. 한발자욱도 떼지 못한 채.

 

도끼를 떨군채 눈치만 보던 카쿠베에는 곧바로 도망치려했으나 막부의 무사들이 붙잡음. 다음 날 카쿠베에는 조리돌림 당한 뒤 십자가형에 쳐해짐.

 

후에 조사한 바로는,

카쿠베에는 불에 달구면 빨갛게 되긴 하는데 그다지 뜨거워지지 않는 철편을 준비했으나, 당일 공정을 위해 바꾸게 된 것이 패착.

 

그리하여 히노산은 동쪽 9개 마을의 소유가 되었고, 키스케는 넓은 땅을 얻을 수 있었으며 키스케 보다 먼저 입후보 했던 사람에게도 작지만 역시 땅을 얻었다고 함.

 

일본 신의 재판의 역사日本神判史, 시미즈 카츠유키清水克行...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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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와리尾張의 한 마을에 진베에甚兵衛라는 사람이 있었고, 그 옆 마을에 사스케左介라는 사람이 삼. 둘은 친구였음.

 

근데 진베에가 출장으로 집을 비운 날 밤에 사스케가 진베에의 집에 물건 훔치러 감. 그러다 진베에의 부인이 잠에서 깨서 싸움을 벌임. 진베에의 부인이 더 쎘는지 사스케 도망. 도망치다 사스케는 칼집을 진베에의 부인에게 빼앗김.

 

진베에 측은 칼집이란 증거를 가지고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관청에 신고를 했지만, 하필 사스케는 노부나가의 젖형제인 이케다 츠네오키池田恒興의 부하였음.

(노부나가는 애기 때 이빨질이 심해서 유모의 유두를 물어뜯는 버릇이 있었는데 츠네오키 모친에게만은 얌전히 젖을 빨았다 함)

 

어찌보면 친형제보다 더 대우받는 젖형제이다 보니 노부나가의 부하들도 츠네오키에게 일해라절해라 하질 못함.

 

결국 불재판하기로 함.

노부나가의 부하들의 입회하에 양측의 인원들이 모여서 불재판을 행하여 사스케가 짐. 그러나 이케다 츠네오키 무리가 사스케를 감싸며 소란을 부림.

 

이렇게 소란이 나자 매사냥 나갔다 돌아오던 노부나가가 이들을 보고 시끌시끌하니 들림.

 

뭔 일인데 서로 활과 창에 갑옷까지 입고 소란인고?

하며, 양측의 주장을 들음.

 

노부나가 안색 변함.

 

불재판을 어떻게 했냐? 철편은 어느 정도 달구었나? 똑같이 달구어라.

 

내가 이 달구어진 철편을 들고 똑같이 할 것이고 그렇게 내가 성공하면 저 사스케는 내 맘대로 할 것이다.

 

라고 하고서는 빨갛게 달구어진 철편을 들고 3보 걸어 선반에 올려놓고는,

 

보았느냐!

 

라 외치고는 사스케를 죽임.

 

 

신장공기信長公記 권수卷首 불재판 행하신 것에 대해火起請御取候事  

 

이런 센스가 부럽네여

그냥 생각난 것 2023. 9. 8. 12:01 Posted by 발해지랑

 

 7월 20일 오후 2시 즈음부터 약 2시간 반 동안, 나가노현[長野県] 가루이자와[軽井沢]에서 북한에 관한 일미한 협의가 실시되었습니다. 회담에는 후나코시 타케히로[船越健裕] 아시아대양주 국장, 성 김 미국 대북담당 특별대표 및 김건 한국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참석했습니다. 또 같은 날 삼자는 실무 만찬을 행했습니다. 후나코시 국장은 성 김 특별대표 및 김 본부장과 내일 21일에 걸쳐 각각 의견을 교환할 예정입니다.

  1. 이러한 기회를 통해 삼자는 저번 주 12일 ICBM급 탄도미사일 발사와 19일 2발의 탄도미사일 발사를 포함한 북한의 전례 없는 빈도와 태도의 탄도미사일 발사를 강력히 비난하고, 이러한 도발 행위는 지역 안보에 중대하고도 임박한 위협이자 국제사회에 대한 명백하고 심각한 도전이라는 인식을 재차 공유했습니다.

  2. 또한 14일 일미한 외무장관 회담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삼자는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른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향해 일미한 안보보장협력을 포함한 지역 억지력, 대처력 강화, 안보리 대응 및 동지국과의 협력을 포함한 국제연계, 사이버 분야에서의 대응 등에 대해 계속해서 일미, 일한, 미일한에서 긴밀히 연계할 것임을 재확인했습니다. 북한과의 대화의 길이 열리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인식을 공유하고, 이 관점으로도 미일한이 한층 긴밀히 연계해 나갈 것임을 확인했습니다.

  3. 또한 후나코시 국장으로부터 성김 특별대표 및 김 본부장에게 납치 문제에 대해서도 지속적인 이해와 협조를 구하며 지지를 얻었습니다.

  4. 삼자는 각각 강화된 이개국간 관계를 토대로 미일한 공조를 한층 더 높은 목표로 끌어올리기 위해 미국 제안의 일미한 정상회의의 기회를 포함하여 삼국 간에 계속 긴밀히 연계해 나가기로 하는데 일치했습니다.

* 일본 외무성의 글이기에 '한미일'이 아닌 일본이 쓰는 '일미한'으로 하였다.

 

출처 : https://www.mofa.go.jp/mofaj/press/release/press1_001514.html

 

北朝鮮に関する日米韓協議(結果)

 7月20日、午後2時頃から約2時間半、長野県軽井沢において、北朝鮮に関する日米韓協議が実施されました。同協議には、船越健裕アジア大洋州局長、ソン・キム米国北朝鮮担当特別代表及

www.mofa.go.jp

 

출처 : https://jbpress.ismedia.jp/articles/-/68398

저자 : JBpress - 곽문완

 

北朝鮮軍の軋轢で始まった主席宮攻防訓練の激しすぎる結末 訓練で死亡者28人、重傷者107人、

北朝鮮軍は冬季と夏季で演習を行う。毎年12月1日から3月末に冬季訓練が、7月1日から9月末に夏季訓練が行われる。こういった定期訓練とは別に特別訓練もある。振り返れば、1992年5月に(1/3)

jbpress.ismedia.jp

북한군은 겨울과 여름에 각각 훈련을 한다. 매년 12월 1일부터 3월말까지 겨울훈련이, 7월1일부터 9월말까지 여름훈련이 실시된다. 이러한 정기훈련과는 별도로 특별훈련도 있다. 되돌아보니 1992년 5월에 인민무력부와 호위사령부간에 죽음도 불사하는 "주석궁 공방 훈련"이 실시되었다. 이것은 어떤 훈련이었을까?

 

 1992년 5월. 김일성이 주석궁 내의 저택정원에서 오진우 인민무력부장, 리을설 호위사령관과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오진우 부장이 인민무력부의 공격능력을 자랑하자, 리을설 사령관은 호위사령부의 수비능력을 자랑했다.

 

 둘의 자랑을 듣고 있던 김일성이 '그럼 한번 붙어보라'고 농담삼아 말하자, 오진우 부장과 리을설 사령관은 이것을 농담이 아닌 진담으로 받아들였다. 김일성의 반쯤 농담이 인민무력부와 호위사령부의 죽음도 불사하는 "주석궁 공방 훈련"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김일성이 정한 목표물은 주석궁이었다. 인민무력부의 군인이 한사람이라도 주석궁에 침입하여 훈련판정단이 발급한 빨간 종이를 건물벽에 붙이면 인민무력부의 승리, 호위사령부가 침입을 막으면 호위사령부의 승리였다. 판정기간은 30일로 실탄을 제외한 모든 것이 가능한 훈련이었다.

 

 오진우 부장과 리을설 사령관은 김일성의 전투훈련 판정을 놓고 제대로 붙어보고자 했다.

 

 오진우 부장은 인민무력부의 한국침입을 전문으로 하는 특수부대를 모아 침입조를 짰다. 한편 리을설 사령관은 호위사령부의 병력을 총동원하여 주석궁을 수비했다. "인민무력부 공격침입조"는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1개월 이내에 주석궁에 침입하여 빨간 종이를 붙이는 것에 목숨을 걸었고, 그에 대비하여 호위사령부 역시 침입저지에 목숨을 걸었다. 

 

차례로 목숨을 잃은 주석궁 침입조의 면면들

 

 인민무력부와 호위사령부가 훈련에 목숨을 건 승부에 도전한 이유에는 역사적인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 인민무력부는 전쟁을 수행하는 군대이고, 호위사령부는 쿠데타나 반란 등을 진압하는 부대이다. 그러나 호위사령부는 수뇌부를 호위하고 있기에 인민무력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우대를 받고 있었다. 

 

 군복부터 달랐고, 물자보급에서도 훨씬 우대받았다.

 

 인민무력부의 병력은 120만명이고 호위사령부는 그 인민무력부의 11%에 지나지 않는 13만명이지만, 화력 밀도는 호위사령부가 북한군 전체의 40%에 달했다. 거기에 김일성이나 김정일을 호위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기에 긍지가 높았다.

 

 그에 대하여 인민무력부의 호위사령부에 대한 반감이나 열등감은 위험하다고 할 수준까지 달해있었다. 인민무력부의 군인들은 김일성 주석 앞에서 전투력을 과시하여 호위사령부의 콧대를 꺾어 놓겠다는 각오로 임했다.

 

 주석궁으로의 침입은 세 방향에서 행해졌다. 첫번째는 주석궁에 전력을 공급하는 고압송전선을 이용하여 침입하는 작전이었다.

 

 송전선의 전력을 차단하여 3인1조로 구성된 6명의 침입조가 반대측에 있는 철탑에서 고압송전선을 탔다. 등에 단 수소풍선으로 중심을 잡아 침입해서는 주석궁의 지붕에 착지하여 빨간 종이를 붙이는 작전이었다.

 

 그리고 침입조가 한반 중에 철탑에 올라가 침입을 시도했지만 차단되었던 고압송전선의 전력이 복구되자 감전된 6명은 땅에 떨어져 죽었다.

 

공포의 "주석궁 공방 훈련" 매뉴얼

 

 두번째는 대동강에서의 침입이었다. 주석궁은 평양 중심을 가로지르는 대동강에 인접하였기에 수중에서 침입이 가능했다.

 

 그렇기에 북한 호위사령부는 주석궁이 위치하는 수면 아래에 적의 침입을 차단하는 고압전기선을 깔아놓았다. 호위사령부 예하 1호위대 제3중대 군인들은 정기점검을 핑계로 수중고압선에 전기를 넣어 감전사하여 물에 뜬 생선으로 잔치를 열 때도 있었다.

 

 그 대동강에서 3조9인의 침입조가 잠수복을 입고 침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대동강 가까이서 보초업무를 서고 있던 호위사령부의 군인이 실탄 이외에 무엇으든 사용가능하다는 "주석궁 공방 훈련"의 매뉴얼에 따라 수중의 고압전기선에 전기를 흘려넣었다.

 

 9명의 수중침입조는 생선과 함께 물에 떴다. 곧바로 구급차로 병원으로 운반했지만 전원이 즉사였다.

 

 세번째는 터널을 이용한 침입이었다. 주석궁에서 1.5km 떨어진 곳에서부터 인민무력부의 공작부대가 터널을 파기 시작했다. 침입목적으로 터널을 팠지만 주변도로나 건물에 균열이 생겨나 불만이 속출했다. 터널을 이용한 침입도 실패했다.

 

 이것들 외에도 주석궁에 출입하는 차의 아래에 붙어 침입을 시도했지만 군의 수색견에 물려 부상당한 병사나 호위사령부의 차를 탈취하여 침입을 시도한 병사 등, 훈련개시부터 2주 동안 28명이 사망, 중상자 107명, 경상자 322명이 발생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주석궁 공방 훈련"이 중지되었다. 이 이상 계속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 수 없다고 우려한 김일성이 훈련의 중지를 선언한 것이다. 죽음을 불사한 "주석궁 공방 훈련"은 수백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키고 승패를 결정짓지 못하고 끝났다.

 

 인민무력부와 호위사령부의 오랜 갈등과 김일성 앞에서 전투력을 평가받는다는 것을 명예라 생각하는 북한군 군인의 세뇌가 낳은 참극이었다. 이러한 훈련은 김정은 시대인 지금도 행해지고 있을지 모른다. 많은 북한의 젊은이들이 10년 이상의 청춘기를 군에 바치고, 정권자들의 장난에 목숨을 바치고 있는 현실이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