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 자체가 장난꾸러기’라고 에도시대[江戸時代]의 사서(史書)에 쓰여있듯이, 마에다 케이지로우 토시타카[前田 慶次郎 利太=토시오키[利大], 토시마스[利益]라고도 전해진다 [각주:1]]는 기행(奇行)으로 유명하다.


 카가[加賀] 100만석의 시조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조카이다. 그러나 조카이긴 하지만 피가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휘하였던 오와리[尾張] 아라코 성[荒子城]의 성주 마에다 토시히사[前田 利久]에게는 적자(嫡子)가 없었기에, 토시히사는 자기 마누라의 오빠인 타키가와 기다이유우 마스시게[滝川 義太夫 益重][각주:2]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각주:3] 마에다  가문[前田家]를 잇게 하려고 하였다. 이 양자로 들어온 인물이 바로 케이지로우[慶次郎]이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토시히사의 셋째 동생인 토시이에를 가문 당주로 앉혀버린 것이다.[각주:4] 그리고 케이지로우는 토시이에의 가신으로 편입된다.


 무용(武勇)도 뛰어났지만 가무음곡(歌舞音曲)도 좋아하였다. 그런 케이지로우를 토시이에는 ‘세상을 얕보는 녀석’이라며 엄히 질책하였다. 케이지로우는 그런 잔소리가 맘에 들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의 자리였을 지도 모를 당주자리에 앉아있는 삼촌이 맘에 안 들었을 수도 있다.
 “이거 떠나야 겠구먼”
 이렇게 맘을 정했지만, 그냥 나가기에는 재미가 없었다. 케이지로우는 궁리하였다.


 어느 날인가 케이지로우는 토시이에에게 다도(茶道)의 자리에 초대하고 싶으니 부디 참석해 주시기를 바란다며 요청하였다. 토시이에는 ‘허허~ 이제 케이지로우도 맘을 고쳐 잡았나 보군’이라며 기쁜 마음으로 케이지로우의 저택으로 갔다. 케이지로우는 겨울이니 우선 뜨거운 물로 목욕부터 하라고 토시이에에게 권했다. 추위에 떨던 토시이에는 케이지의 마음씀씀이가 더 맘에 들었다.      
 하지만 케이지로우는 한 번 맛 좀 보라는 심산이었다. 욕조에는 냉수로 채우고 욕실에는 누가 보아도 물이 뜨거운 듯이 보이기 위해서 김이 나오도록 욕실 주변에 뜨거운 물이 담긴 그릇을 여러 개 두었다. 그렇게 김이 가득 차 있기에 속은 토시이에는 욕조로 풍덩하고 몸을 던진 것이다. 찬물에 정신이 번쩍 든 토시이에는,
 “네 이놈 케이지로우!!”
 하고 화냈지만, 그런 토시이에를 무시한 채 뒷문에 메어두었던 명마 마츠카제[松風]에 올라타자 마자 곧바로 말달려 떠난 것이다.


 전국을 방랑하였다. 하지만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의 가로(家老)로 지장(智將)으로 이름 높은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와 우정을 맺은 뒤[각주:5]에는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을 섬기게 된다. 이때 케이지로우는 코쿠조우인 횻토사이[穀蔵院 ひょっと斎]라는 이름으로 칭하며 기묘한 옷을 입고 카게카츠를 알현했다고 한다. 기인(奇人)으로 이미 유명했기에 우에스기 가문에서는 2000석[각주:6]을 하사 받았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 케이지로우는 나오에 카네츠구를 따라 데와[出羽]의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 공략에 참가하였는데, 이때 당시 모습이 눈에 띄었다. 자루가 붉은 색인 창을 들고 ‘대 후헨모노[大ふへん物]’라 쓰여진 큰 깃발을 등에 지고 전투에 나선 것이다. 우에스기 가문은 유명한 무사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이들은 케이지로우의 이 등깃발[旗指物]을 보고 화를 냈다.
“신참주제에 대무변자[大武辺者=다이부헨모노[だいぶへんもの]]라는 것을 메다니 무슨 생각이냐”
고 트집을 잡았다. 그러자 케이지로우는 낄낄대더니,
“이거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하는군요. 여러분들은 시골뜨기다 보니 글자의 촉음(濁音)도 모르나 보네요. 이는 ‘대 불편자[大不便物=다이후헨모노[だいふへんもの]]’라 읽는 것입니다. 제가 오랜 낭인생활을 하여 가난하기에 이리 썼을 뿐이외다”
고 놀렸다고 한다.

굉장히 궁핍하여 불편하게 산다[だいふへんもの]고 쓰인 등깃발

 이때 입은 옷들도 눈에 띄었다. 검은 갑옷에 새빨간 전포[羽織], 황금색 염주를 목에 걸고, 금칠을 한 표주박을 옷깃에 주렁주렁 매달았다. 자신과 타는 말에는 자신과 똑같은 두건[頭巾]을 씌었다고 한다.


 나중에 주군 카게카츠[景勝]를 수행하며 에도[江戸]에 갔을 때, 또다시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목욕탕에 들어갈 때 훈도시의 옆에 작은 칼[脇差]를 차고 들어간 것이다. 그것을 보고 같이 입장하려던 사람들도 따라서 작은 칼을 찬 채 들어갔다. 케이지로우는 욕탕에 들어갔다 나온 뒤 차고 있던 작은 칼을 꺼내어 몸을 비비기 시작했다. 작은 칼은 사실 대나무로 된 때주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진짜로 작은 칼을 차고 온 사람들은 칼자루도 젖고 쇠에 습기가 차 고생했다고 한다.


 세키가하라 전쟁 뒤 우에스기 가문은 요네자와[米沢]로 삭감되어 이봉 되었기에 가신들 중에는 떠나는 사람도 많았지만, 어디까지나 우에스기 가문의 기풍을 사랑했던 케이지로우는 죽을 때까지 머물렀다고 한다.


마에다 게이지로[前田 慶次郎]
마에다 가문[前田家]에서는 엣츄우[越中] 아오 성[阿尾城]에 있었지만[각주:7], 1590년[각주:8] 아이즈[会津]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을 섬겼고, 말년에는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강의하거나 하였다. 카게카츠[景勝]의 아들 사다카츠[定勝] 때 요네자와[米沢]에서 죽었다.[각주:9]

  1.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을 따라 요네자와[米沢]로 옮긴 뒤에는 주로 토시사다[利貞]라는 이름을 썼던 듯. 이 ‘토시사다’를 새긴 표주박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함 [본문으로]
  2. 마스우지[益氏]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3. 또는 마스시게의 부인으로 이미 마스시게의 자식을 임신했던 여성을, 토시히사가 그런 것을 알면서도 그 여성과 결혼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4. 1569년의 일. 사족으로 아라코의 마에다 토시히사는 후년 노부나가에게 과거 반항하였다는 이유로 추방당하는 하야시 히데사다[林 秀貞]의 영향력 하에 있었기에 노부나가에게 개기는 히데사다의 의향에 따라 자주 노부나가에게 반항적인 태도를 취했기에, 그런 반항적인 토시히사를 경질하여 노부나가의 측근인 토시이에[前田利家]를 마에다 가문의 당주로 앉혔을 가능성도 크다. 단 이는 역자인 내 개인적인 생각이며 일본에선 아직까지 이런 주장을 하는 이는 없으니 주의요망. [본문으로]
  5. 대략 1597년 난카 겐코우[南化 玄興]라는 승려의 소개로 묘우신 사[妙心寺]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본문으로]
  6. 단 현재 남아있는 사료(慶長五年会津御在城分限帳=1600년 아이즈에 거주하는 가신 명부) 에는 외인부대[組外衆]의 필두 1000석이라 함. [본문으로]
  7. 이 당시 아오 성의 성대[城代]로 약 6000석의 지행을 받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8. 나오에 카네츠구와 만난 것이 1597년이라 하니 1598년이 맞을 듯. [본문으로]
  9. 생몰년에 대해서 마에다 가문의 자료에 따르면 생년은 1533년이고 야마토[大和]에서 1605년에 73세로 죽었다고 하며, 우에스기 가문 사료에 생년은 1541년이며 요네자와[米沢]에서 1612년에 70세로 죽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581년 9월.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의 에치고[越後] 카스가야마 성[春日山城]에서 모우리 히데히로[毛利 秀広]라는 무장이 카게카츠의 측근 나오에 노부츠나[直江 信綱][각주:1]와 야마자키 슈우센[山崎 秀仙]을 습격하여 살해하였다. 모우리 히데히로는 ‘오타테의 난[御館の乱]’에서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이 둘을 원흉이라 생각하여 앙심을 품고 있었다.[각주:2]  
 카게카츠는 켄신[謙信] 때부터 우에스기 가문[上杉家] 집사(執事)의 가문인 나오에 노부츠나[直江 信綱]가 후계자도 없이 살해당했기에 나오에 가문이 끊기는 것을 안타까워 하며, 자신의 시동[小姓] 히구치 요로쿠[樋口 与六]에게 나오에 가문을 잇게 하였다. 이 히구치 요로쿠가 후에 우에스기 가문을 지탱하고 있다고 칭송 받는 명신(名臣) 나오에 야마시로노카미 카네츠구[直江 山城守 兼続]이다. 카게카츠의 시대에 우에스기 가문의 군정(軍政), 민정(民政)은 모두 이 나오에 카네츠구가 담당하였다.

 카네츠구는 키가 크고 용모도 뛰어났으며 말을 하는데 막힘이 없어 변설(辯舌)에도 능했다고 한다. 더구나 문학적인 소양도 갖추고 있었다. 에도 시대[江戸時代] 초기의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藤原 惺窩]도, 문무 양쪽에 뛰어난 인물로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와 함께 거론하였다.

 우에스기 가문이 임진왜란에 종군하였을 때, 카네츠구는 점령한 조선 성에 들어가면 반드시 서고(書庫)부터 찾았다고 한다. 지금 요네자와 시[米沢市]에 있는 일본의 국보 송판(宋版)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는 그때의 전리품이다.[각주:3]
또한 요네자와[米沢]로 옮긴 뒤에도 일반적으로 ‘나오에 판 문선[直江版文選]’이라 칭해지는 『오신주문선(五臣註文選)』을 출판. 성 밑에 있는 젠린 사[禅林寺=현재는 호우센 사[法泉寺]]’에 학문소 ‘젠린 문고[禅林文庫]’를 열었다.

 카네츠구는 뛰어난 시인이기도 했다.

봄 기러기가 날 닮았나. 내가 기러기와 닮았나. 낙양성의 화려함을 뒤로하고 돌아가네
春雁我に似たり 我雁に似たり 洛陽城裏花に背いて帰る[각주:4]
 라는 한시가 유명하다.

 카네츠구는 이렇게 학문적인 인간이면서도 의표를 찌르는 일화도 있다.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아이즈를 영유하고 있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산호우지 쇼우조우[三法寺 勝蔵][각주:5]라는 무사가 자신의 하인을 죽였다. 죽일 정도의 죄는 아니었던 듯 하인의 친척들이 화를 내며 죽은 하인을 살려내라고 소동을 일으켰다. 이를 들은 카네츠구는 백은(白銀) 20매로 합의를 보도록 하였지만, 하인의 친척들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더욱 큰소리를 쳤기에 카네츠구가 아무리 조정을 하려고 노력해도 “죽은 사람을 살려 내라”고 할 뿐으로 결말이 나지 않았다. 카네츠구는 결국 마음을 정해 판결을 내렸다.
 “어쩔 수 없구나. 그렇다면 내가 염라대왕에게 편지를 써 줄 테니 너희가 저승에 가서 그 하인을 데려오도록”
 라며 소동을 일으킨 자들[각주:6]을 저승으로 보내버렸다. 그리고서는 염라대왕과 저승사자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맞이하는 자를 보냈으니 부디 죽은 자를 살려서 돌려 보내 주십시오”
 라는 푯말을 세워 사람들에게 알렸다고 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사실 일리 없고 원래 중국에 있었던 이야기라고 하지만 민정가로서 유명했던 카네츠구와 연관시킨 것이 흥미롭다.[각주:7]

 또한 이런 일화도 전해진다.
 
히데요시[秀吉]가 아직 살아있을 때의 일로, 후시미 성[伏見城]에 여러 다이묘우[大名]가 모였을 때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가 품속에서 커다란 황금판을 꺼내어 모두에게 자랑하였다. 커다란 황금판이 신기했는지 다이묘우들은 모두 조심스레 손에 들고는 구경하였다. 그 말석에 카네츠구도 있었다. 카네츠구에게도 차례가 오자 카네츠구는 부채를 펴서는 그 황금판을 받고 마치 배드민턴 라켓으로 셔틀콕을 튕기듯이 통통 튀기며 살펴보았다.
 마사무네는 카네츠구가 배신(陪臣=다이묘우의 가신)이기에 다른 다이묘우들과는 달리 나름 겸손하게 행동하는 줄 알고,
 “직접 손으로 잡고 보아도 되네”
 라는 말을 건넸다. 그러자 카네츠구는,
 “제 손은 켄신 공[謙信公] 때부터 선봉장의 지휘봉을 쥔 손이외다.[각주:8] 저런 천한 물건을 손에 쥐면 손이 더러워지니 이렇게 부채에 올려서 보는 것이올시다.”
 라고 말하고는 부채로 탁 쳐서는 황금판을 마사무네 앞으로 보냈다고 한다.[각주:9]
 이 역시 사실이 아니지만, 카네츠구의 호방함을 말해줌과 동시에, 카네츠구가 배신이면서 다이묘우들 사이에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도 꿀림이 없는 위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카네츠구가 섬긴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은 켄신[謙信]이라는 영걸이 있었으며, 그의 자식[각주:10] 카게카츠[景勝]는 오대로(五大老)[각주:11] 중 한 명이다. 그리고 그 카게카츠의 중신인 카네츠구는 히데요시에게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인물’이라 평가 받았고[각주:12] [각주:13], 그렇기에 카게카츠가 아이즈[会津] 120만 석을 영유했을 때 히데요시의 특명으로 데와[出羽] 요네자와[米沢] 30만 석을 하사 받았다.[각주:14] 당시 30만 석 이상 영유하는 다이묘우[大名]는 이에야스[家康] 이하 11명, 히데요시가 직접 키운 무장인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는 25만석,[각주:15]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는 20만 석[각주:16]이었다.
 이렇듯 카네츠구는 배신(陪臣)의 신분이면서도 보통의 다이묘우가 가지지 못한 기량과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당당하게 다른 다이묘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진면목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발휘된다.

 1598년 8월 히데요시의 죽음으로부터 1년 동안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천하에 대한 야심을 명확히 드러냈고,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나오에 카네츠구는 차례로 아이즈로 귀국하였다. 아이즈 120만 석으로 이봉되어 아직 1년 반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고, 그 동안 히데요시의 조문을 위해 상경하거나 하여 아이즈 경영이 늦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쿄우[京]-오오사카[大坂]에는 아이즈의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카게카츠가 영내에 도로나 다리의 정비, 성의 수축과 낭인을 새로이 등용하고 있다. 거기에 아이즈 와카마츠[会津若松]의 교외인 코우자시하라 평원[神指原]에 새로이 성을 쌓고, 본성인 와카마츠 성[若松城]의 해자를 깊게 파는 등의 행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곧바로 모반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의심했다.

 1600년 4월. 이에야스는 카게카츠에게 상경을 재촉하는 사자를 보냈다. 동시에 나오에 카네츠구에게는 카네츠구와 친분이 있던 쇼우코쿠 사[相国寺]의 승 사이쇼우 죠우타이[西笑 承兌]에게 명령하여 카게카츠의 상경을 권하라고 하는 편지를 쓰게 하였다.
 카네츠구는 죠우타이에게 답서를 썼다. 카게카츠에게는 이미 허락을 맡은 상태였다. 이것이 후세에 ‘나오에 장[直江状]’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에야스에 대한 통렬한 도전장이다. 내용은 죠우타이[承兌]가 의심하며 거론한 항목 하나하나씩 반론한 것이기에 굉장히 장문이지만 요점을 말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선 상경 재촉에 대해서는, 신영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고 그나마 여러 사정으로 영지 경영할 시간이 없었다. 더 늦기 전에 지금 착수해야만 한다는 뜻을 밝힌 후 ‘이번에 또 다시 상경하라면 영지를 다스릴 틈도 없지 않은가?’라고 하였으며, 서약서를 제출하라는 것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썼으며 또다시 같은 것을 쓰더라도 효과가 있을 것 같지 않다’고 튕겼고, 전쟁 준비를 하는 것 같다는 것에 대해서는, ‘쿄우토 근방의 무사들은 차제구(茶諸具)를 모으겠지만 우리들 시골뜨기 무사들은 창이나 철포, 활과 화살을 모은다. 이는 그 지역의 풍속이니 쓸데없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소”라 하였다. 이는 반쯤 약올리는 생각으로 답했던 것이리라. 계속해서 말했다. “도로나 다리를 만드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자라면 당연한 일. 만약 역심을 품었다면 다른 나라와의 국경에 해자를 파고 길을 끊을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굉장히 도발적인 어구를 이어갔다.
 “역심이 없으면 상경하라니 이건 마치 아이들의 말투외다. 무엇보다 역심을 품었던 자가 실패해서 도망쳐 상경해서는 새로이 땅을 하사 받고 권세가(여기서는 이에야스를 지칭)와 인척관계를 맺으며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이러한 현 세태는 카게카츠의 마음과 맞지 않는다”고 한 뒤,
 “나이후 님[内府様=이에야스], 츄우나곤 님[中納言様=히데타다]께서 아이즈를 공격하러 오신다고 하는데 모든 것은 그때 해결합시다”고 끝을 맺었던 것이다.

 5월3일. 이 서장은 오오사카의 이에야스에게 전해졌는데, 이를 본 이에야스는, 
 “63살 내 평생 지금까지 이렇게 무례한 서장은 본 적이 없다”
 며 분노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정벌[上杉征伐]의 군을 일으켰는데, 이후의 경과는 지금까지 몇 번 언급했기에 생략하지만, 이에야스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거병 소식을 듣고 오야마의 진[小山の陣]에서 병을 되돌리자, 카네츠구는 언젠가 다시 이에야스와 싸우게 될 것이라며 그 전에 배후를 든든히 하기 위해 모가미 령[最上領]을 침공하지만 그러던 중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서군(西軍)의 패전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나오에 가네쓰구[直江 兼続]
1560년생.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의 고굉지신으로 히데요시[秀吉]에게도 인정받았다. 세키가하라 전쟁 후 우에스기 카게카츠는 카네츠구의 영지였던 데와[出羽] 요네자와[米沢]로 삭감되어 이봉되는데, 카네츠구는 계속해서 성과 성 밑 마을 조영을 담당했다. 1619년 12월 19일 에도[江戸]에서 죽었다. 60세.

  1. 나중에 카네츠구의 부인이 되는 오센노카타[お船の方]의 남편이었다. 나오에 가문에는 데릴사위로 들어와 나오에 카게츠나[直江 景綱]의 딸 오센노카타와 결혼하여 남자자식이 없었던 나오에 가문을 이었다. [본문으로]
  2. 모우리 히데히로는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사망 후 후계자 다툼인 오타테의 난[御館の乱]에서 처음엔 카게카츠의 반대편인 카게토라[景虎] 측이었으나 그를 배신하고 카게카츠 측으로 넘어와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동맹을 맺을 때는 카츠요리에게 사자로 파견되는 등의 활약을 하였다. 야마자키 슈우센은 유학(儒學)을 숭상하여 배신자인 히데히로에게 약속된 은상을 못 받게 하였다. 이에 분노한 히데히로는 야마자키 슈우센과 말다툼하다 살해하였고 그 옆에서 말리던 나오에 노부츠나도 함께 살해하였다. [본문으로]
  3. 송판(宋版)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는 원래 일본에 있었던 것으로, 소유주였던 일본의 승려 난카 겐코우[南化 玄興]에게 물려받은 것이고, 조선에서 가져간 것은 『송신언행록(宋臣言行錄)』 65권 20책,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90권, 『신편고금사문유취(新編古今事文類聚)』 221권, 『부석음주례주소(附釈音周礼註疏)』 42권, 『중용장구대전(中庸章句大全)』 4권, 『산곡시집(山谷詩集)』, 『오조명신언행록 전집(五朝名臣言行録前集)』 등이라 한다. [본문으로]
  4. 언제 지어졌는지는 모르나, 일반적으로 토요토미 정권의 수도였던 후시미[伏見]를 뒤로하고 아이즈[会津]로 향할 때 지어진 것이라 한다. 낙양성과 후시미를 엮은 것. [본문으로]
  5. 쇼우조우는 ‘카츠조우’라고도 읽는다 [본문으로]
  6. 죽은 하인의 형, 큰아비, 조카. [본문으로]
  7. 이 일화는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에 간행된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 권15[巻之十五] 나오에 카네츠구[直江兼続] 편에 실린 것으로, 원문에 따르면 푯말에는 케이쵸우 2년(慶長二年=1597년) 2월 7일이라고 쓰여있다고 한다. 즉 본문대로 카게카츠[景勝]가 아이즈[会津]를 영유하던 때가 아닌 아직 에치고[越後]에 머물 때이다. 카게카츠가 아이즈로 이봉되는 것은 1598년의 일 [본문으로]
  8. 에피소드 같은 일화 상이 아닌 실제로 카네츠구와 켄신이 만났을 가능성은 낮다. 더구나 켄신이 죽은 1578년 당시 카네츠구는 아직 19살. 지휘봉을 쥐기에는 너무도 어리 나이이다. [본문으로]
  9. 역시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에 나오는 일화. [본문으로]
  10. 양자. 켄신 누나의 아들. [본문으로]
  1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12. 메이지 시대에 간행 된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 에 따르면, 히데요시는 배신(陪臣)으로 나오에 카네츠구,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 호리 나오마사[堀直政]는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자들이라며 절찬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13. 한편 에도시대[江戸時代] 중기에 만들어진 사가 나베시마번[佐賀鍋島藩]의 번사(藩士)가 간행한 하가쿠레[葉隠]의 10권 145편에서 히데요시는 천하를 취하기 위해서는 대기(大氣), 용기(勇氣), 지혜(知慧)를 겸비해야 하는데, 현재 다이묘우[大名] 중에서는 그런 사람이 없지만, 배신(陪臣) 중에는 삼요소 중 두 개씩 가진 자가 세 명이 있다. 다만 나오에 카네츠구는 대기, 용기는 있지만 지혜가 부족하고,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대기와 지혜는 있지만 용기가 부족,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는 용기와 지혜가 있지만 대기가 없다고 하였다 한다. [본문으로]
  14.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를 에치고에서 아이즈 120만석으로 이봉할 때, 히데요시가 카네츠구에게 30만석을 주라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카네츠구가 카게카츠에게 하사 받은 것은 6만석(위키에 따르면 카네츠구 휘하 무장[与力]까지 포함하면 30만석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15. 카토우 키요마사는 히고[肥後]의 절반. 사실 카게카츠가 아이즈로 이봉한 1598년 당시에는 19만 5천 석. [본문으로]
  16.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오와리[尾張] 키요스[清洲]를 중심으로. 24만석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센고쿠 바사라 점[戦国BASARA占]

내 이야기 2012. 3. 7. 14:34 Posted by 발해지랑
트위터에서도 한번 언급했지만, 센고쿠 바사라 캐릭터가 나오는 점占입니다.

하는 곳은  http://www.capcom.co.jp/sengoku/uranai.html 

처음에 이런 화면이 나오는데, 태어난 해와 날짜 그리고 혈액형을 입력하신 후 진단한다[診断する]라는,

를 클립하시면 됩니다. 

저의 경우...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타입이라 나오는군요. ...맘에 안 드는군요.

설명부분 해석.

토쿠가와 이에야스 타입인 당신은,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기에 "나는 1억만 파워를 가지고 있다!"
며 뭐라는지 알 수 없는 거짓말을 합니다만,
그런 거짓말이 효과를 나타내어 거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로보트처럼 강하고 믿을 수 있는 부하와 만나게 됩니다만,
그 부하가 더 주목을 받기에,
정작 자신은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일어납니다.
금색 옷이라도 입어서 존재감을 어필하십시오.
(그래도 부하가 더 눈에 띕니다만)

군요...  

그 아래 


오늘의 운세를 전투로 점친다>>
 
를 누르시면, 전투가 막 일어나더니

라며,
쓰러뜨린 적 무장[倒した敵武将] : 135명
쓰러뜨린 적 군사[倒した敵軍師] :  74명
쓰러뜨린 적 병사[倒した敵兵士] : 2813명
합계 점수 3858점으로 대흉(大凶).....오전만 해도 소길(小吉)이었는데 말입죠... --;

합계점수 밑에 있는

오늘의 운세 상세를 클릭하시면,

라고 뜹니다.

오늘 하루 당신은 파란만장한 하루가 될 것임을 보장합니다.
"죽더라도 시체를 줍는 이 없다"는 말을 듣지 않도록
많이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토쿠가와 이에야스 타입 럭키한 대사
"좋지 않아~ 좋지 않아!"
========================================
부하에게 의지하지 말고 당신도 무언가를 해야만 합니다.

................
..........
......
사실 저는 점을 믿지 않습니다. 점을 보거나 믿을 그 시간에 딴 것을 하는 것이 백배천배 낫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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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jbpress.ismedia.jp/articles/-/34593
저자: 아이바 히데오[相場 英雄]

1월에 한국을 대표하는 자동차와 전자회사의 연간업적이 발표되었다. 일부 전문지나 비지니스 잡지에서는 크게 보도하였지만, 일본 주요 신문사나 방송국에서 세부사항까지 전한 곳은 극히 일부였다.

대지진의 영향이나 엔고, 태국 홍수피해 등 일본기업을 둘러싼 환경이 가혹할 정도로 좋지 않아 주력업종인 자동차, 전자업계의 업적은 참담하였다. 일본기업은 한국기업에 지분률을 계속 빼앗기고 있는데, 그 요인은 외부의 돌발적인 사건만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일본 회사들이 한 묶음이 되더라도 한국 주요기업에게는 안 된다.

2월 초순. 일본의 종합전기, 민간 대형 전기업계의 2012년 3월의 연결 업적 전망이 나왔을 때, 어느 대형일간지에 이런 헤드라인이 찍혀있었다.

“한국 기업들의 거센 추격으로”…

칼럼 첫머리에 언급했듯이, 일본의 종합전자나 자동차 각 회사는 이번에 돌발적인 외부요인으로 힘들었다. 그 틈을 타서 한국이나 대만 그리고 중국의 신흥기억이 일본기업을 몰아붙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칼럼에서도 언급했지만, 새삼 강조해 두고 싶다. ‘한국 기업의 거센 추격’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오인이다.

액정패널이나 반도체 제조의 삼성전자를 살펴보자. 삼성의 작년(2011년) 1년간 얼마나 번지를 나타내는 영업이익은 16조 2000억 원. 일본엔 환산으로 약 1조 1000억 엔이다.

참고로 파나소닉의 2012년 3월기 예상(미국회계기준)은 300억 엔이다. 여러 악조건으로 인해 당초 예상의 1300억 엔의 흑자에서 하향수정 된 것을 감안하더라도 삼성의 이익이 얼마나 거대한 액수인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알기 쉽게, 삼성의 1조 1000억 엔이라는 영업이익은 일본의 주요 전자 회사의 이익을 모두 더한 액수보다도 큰 것이다. ‘한국 기업의 거센 추격’이라는 헤드라인이 엉터리 오보임을 알 수 있으실 것이다.

비슷한 방법으로 현대자동차를 살펴 보자. 현대에 대해서는 매출에 대해 영업이익의 비율을 나타내는 영업이익률을 예로 들어 보자. 현대의 경우 영업이익률이 14%이다.

이익폭이 굉장히 큰 고급 스포츠카에 특화된 독일 포르쉐각 약 12%. 소형 대중차나 중형 세단이 주력인 현대자동차의 체질이 얼마나 튼튼한지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전자와 마찬가지로 영업이익률에 대해서도 일본 회사들과 비교해 보자. 토요타 자동차의 올 시즌 예상은 1.1%, 혼다는 2.5%. 열세인 일본 자동차 회사 중 유일하게 호조라는 닛산 자동차조차 5.4%에 머물고 있다.

“국제적인 시장으로 보면, 한국 주요 메이커는 일본 자동차 회사들에 비해 4바퀴나 5바퀴 앞서고 있다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
(외자계 자산운용회사 애널리스트)

의 말에 따르면, 앞으로도 한국회사는 일본 메이커에 한층 더 간격을 벌려놓게 된다.

필자는 예전 이 칼럼란에서 『’메이드 인 저팬’이 사라지는 날』이라는 칼럼을 썼었다. 오버스펙인 일본제품을 대신하여 한국이나 신흥국 제품의 비율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음을 예상하는 내용이었다.  공교롭게도 2년 반이 지난 지금 일본의 주요기업이 가볍게 제쳐진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이젠 일본 전체가 갈라파고스화

한국기업은 기록적인 원 약세를 바탕으로 수출을 늘려 세계적인 지분률을 늘리고 있을 뿐. - 그런 비판이 들릴 듯 하지만 앞서 보여드린 듯이 수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막대한 이익을 신속히 신제품의 연구개발비로 쏟아 붓기에 강한 기업이 더 강해지는 것이 제조업의 구조”
(외자계  증권 애널리스트)

현실적인 문제로서 리엔지니어링으로 악전고투하고 있는 일본기업에 돌아선 기술자는 수없이 많다. 한국, 대만이나 중국의 신흥기업이 높은 연봉과 충실한 연구시설, 스탭을 준비해서는 계속해서 일본인 기술자를 헤드헌팅하고 있는 것 역시 틀림없는 사실인 것이다.

앞선 칼럼 『세계의 중심에 없는 하이브리드 카』에서 필자는 일본의 하이브리드 기술이 일찌감치 세계의 조류에서 멀어졌다는 것을 언급하였다. 피처폰이 해외 메이커의 스마트폰에 밀린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 전자업계와 자동차업계도 신흥세력에 추월 당할 것이라는 염려를 떨칠 수가 없다.

이 컬럼란에서 몇 번이나 언급했지만 일본 메이커는 해외시작에서 침식 당한 지분률을 비교적 비싼 국내 상품 가격으로 보충하여 어떻게든 버텨왔다. 하지만 이러한 고육지책은 국내시장에서도 여유가 없어짐에 따라 통용되지 않게 되었다. 일본 미디어가 세계 업계도식의 전체상을 제대로 전하지 않던 중 일본 기업의 자리는 차츰 좁아지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3년 전까지 파나소닉의 휴대전화를 4대 연속으로 사용해 왔다. 하지만 애플의 ‘아이폰’을 구입한 이후 피처폰은 더 이상 쓰지 않는다.

또한 최근에는 11년간 사용해 왔던 파이오니아의 플라즈마TV가 수리불능일 정도로 고장 났기에, 한국LG의 LED액정으로 바꾸었다.

독자들도 필자처럼 바꾸신 분들이 많으실 것이다. 일본 메이커가 상상하고 있는 이상으로 일본기업 전체의 쇠퇴, 갈라파고스화는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니가 행복하기를 (작사작곡 : 니시다 료우지[西田 遼二]) 

落ち込んでる君に かける言葉見つからない
오치콘데루 키미니 카케루 코토바 미츠카라나이
우울해 있는 너에게 걸 말조차 생각나질 않아

考えてみたところで 君の気持ち分かるはずもなく
칸가에테미타 토코로데 키미노 키모치 와카루하즈모나쿠
생각해 보긴 했지만 너의 마음 알 리도 없고

頑張れって言ったって 気休めにもなりゃしない
간바렛테잇탓테 키야스메니모나랴시나이
힘내라고 말해보았자 위안도 되지 않을 거야
 
流れ星に祈ったって どうもこうもなりゃしない
나가레보시니 이놋탓테 도우모코우모나랴시나이
별똥별에게 빌어보더라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거야

だけど今は声を枯らして願いをかけたら
다케도 이마와 코에오 카라시테 네가이오 카케타라
하지만 지금은 목이 쉬도록 소원을 담아 
 
少しでも力になれると思うから
스코시데모 치카라니 나레루토 오모우카라
조금이라도 힘이 되었으면 하니까
 
‘頑張れ! 負けるな!’
간바레! 마케루나!
힘내! 지지마!

無責任な言葉だけど、ひたすら君にエールを贈る
무세키닌나 코토바다케도 히타스라 키미니 에이루오 오쿠루
무책임한 말이지만 무작정 너에게 성원을 보낼께
  
今年も笑って君が春を迎えられますように
코토시모 와랏테 키미가 하루오 무카에라레마스요우니
올해도 니가 웃으며 봄을 맞이할 수 있도록

最近気づいた 何も出来ない自分と
사이킨 키즈이타 나니모 데키나이 지분토
요즘 알게 된 일인데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나와
 
決してあきらめはしない強い君の事
켓시테 아키라메와 시나이 츠요이 키미노코토
결코 포기하지 않고 지지 않는 너

もしも君に僕の声が届いて
모시모키미니 보쿠노코에가 토도이테
만약 너에게 내 목소리가 전해져
 
少しでも勇気づけてやれたら
스코시데모 유우키즈케테야레타라
조금이라도 용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다면

‘頑張れ! 負けるな!’
간바레! 마케루나!
힘내! 지지마!

単純な言葉を投げつける事しかできないけど
탄쥰나 코토바오 나게츠케루코토시카 데키나이케도
이런 단순한 말밖에 전하지 못하지만

今年も君がキレイな桜を見られますように
코토시모 키미가 키레이나 사쿠라오 미라레마스요우니
올해도 니가 아름다운 벚꽃을 볼 수 있게

‘頑張れ! 負けるな!’
간바레! 마케루나!
힘내! 지지마!

無責任な言葉だけど、ひたすら君にエールを贈る
무세키닌나 코토바다케도 히타스라 키미니 에이루오 오쿠루
무책임한 말이지만 무작정 너에게 성원을 보낼께

今年も笑って君が春を迎えられますように
코토시모 와랏테 키미가 하루오 무카에라레마스요우니
올해도 니가 웃으며 봄을 맞이할 수 있도록

‘頑張れ! 負けるな!’
간바레! 마케루나!
힘내! 지지마!

しょうもないジョークで笑わせる事しかできないけど
쇼우모나이 죠크데 와라와세루코토시카 데키나이케도
썰렁한 농담으로 웃기는 것밖에 못하지만

今年も君がキレイな桜を見られますように
코토시모 키미가 키레이나 사쿠라오 미라레마스요우니
올해도 니가 아름다운 벚꽃을 볼 수 있게

とにかく君に幸あれ…とにかく君に幸あれ…
토니카쿠 키미니 사치아레… 토니카쿠 키미니 사치아레…
어쨌든 니가 행복하기를… 어쨌든 니가 행복하기를…
 
とにかく君に幸あれ…とにかく君に幸あれ!
토니카쿠 키미니 사치아레… 토니카쿠 키미니 사치아레!
어쨌든 니가 행복하기를… 어쨌든 니가 행복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