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0일 오후 2시 즈음부터 약 2시간 반 동안, 나가노현[長野県] 가루이자와[軽井沢]에서 북한에 관한 일미한 협의가 실시되었습니다. 회담에는 후나코시 타케히로[船越健裕] 아시아대양주 국장, 성 김 미국 대북담당 특별대표 및 김건 한국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참석했습니다. 또 같은 날 삼자는 실무 만찬을 행했습니다. 후나코시 국장은 성 김 특별대표 및 김 본부장과 내일 21일에 걸쳐 각각 의견을 교환할 예정입니다.
이러한 기회를 통해 삼자는 저번 주 12일 ICBM급 탄도미사일 발사와 19일 2발의 탄도미사일 발사를 포함한 북한의 전례 없는 빈도와 태도의 탄도미사일 발사를 강력히 비난하고, 이러한 도발 행위는 지역 안보에 중대하고도 임박한 위협이자 국제사회에 대한 명백하고 심각한 도전이라는 인식을 재차 공유했습니다.
또한 14일 일미한 외무장관 회담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삼자는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른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향해 일미한 안보보장협력을 포함한 지역 억지력, 대처력 강화, 안보리 대응 및 동지국과의 협력을 포함한 국제연계, 사이버 분야에서의 대응 등에 대해 계속해서 일미, 일한, 미일한에서 긴밀히 연계할 것임을 재확인했습니다. 북한과의 대화의 길이 열리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인식을 공유하고, 이 관점으로도 미일한이 한층 긴밀히 연계해 나갈 것임을 확인했습니다.
또한 후나코시 국장으로부터 성김 특별대표 및 김 본부장에게 납치 문제에 대해서도 지속적인 이해와 협조를 구하며 지지를 얻었습니다.
삼자는 각각 강화된 이개국간 관계를 토대로 미일한 공조를 한층 더 높은 목표로 끌어올리기 위해 미국 제안의 일미한 정상회의의 기회를 포함하여 삼국 간에 계속 긴밀히 연계해 나가기로 하는데 일치했습니다.
북한군은 겨울과 여름에 각각 훈련을 한다. 매년 12월 1일부터 3월말까지 겨울훈련이, 7월1일부터 9월말까지 여름훈련이 실시된다. 이러한 정기훈련과는 별도로 특별훈련도 있다. 되돌아보니 1992년 5월에 인민무력부와 호위사령부간에 죽음도 불사하는 "주석궁 공방 훈련"이 실시되었다. 이것은 어떤 훈련이었을까?
1992년 5월. 김일성이 주석궁 내의 저택정원에서 오진우 인민무력부장, 리을설 호위사령관과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오진우 부장이 인민무력부의 공격능력을 자랑하자, 리을설 사령관은 호위사령부의 수비능력을 자랑했다.
둘의 자랑을 듣고 있던 김일성이 '그럼 한번 붙어보라'고 농담삼아 말하자, 오진우 부장과 리을설 사령관은 이것을 농담이 아닌 진담으로 받아들였다. 김일성의 반쯤 농담이 인민무력부와 호위사령부의 죽음도 불사하는 "주석궁 공방 훈련"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김일성이 정한 목표물은 주석궁이었다. 인민무력부의 군인이 한사람이라도 주석궁에 침입하여 훈련판정단이 발급한 빨간 종이를 건물벽에 붙이면 인민무력부의 승리, 호위사령부가 침입을 막으면 호위사령부의 승리였다. 판정기간은 30일로 실탄을 제외한 모든 것이 가능한 훈련이었다.
오진우 부장과 리을설 사령관은 김일성의 전투훈련 판정을 놓고 제대로 붙어보고자 했다.
오진우 부장은 인민무력부의 한국침입을 전문으로 하는 특수부대를 모아 침입조를 짰다. 한편 리을설 사령관은 호위사령부의 병력을 총동원하여 주석궁을 수비했다. "인민무력부 공격침입조"는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1개월 이내에 주석궁에 침입하여 빨간 종이를 붙이는 것에 목숨을 걸었고, 그에 대비하여 호위사령부 역시 침입저지에 목숨을 걸었다.
차례로 목숨을 잃은 주석궁 침입조의 면면들
인민무력부와 호위사령부가 훈련에 목숨을 건 승부에 도전한 이유에는 역사적인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 인민무력부는 전쟁을 수행하는 군대이고, 호위사령부는 쿠데타나 반란 등을 진압하는 부대이다. 그러나 호위사령부는 수뇌부를 호위하고 있기에 인민무력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우대를 받고 있었다.
군복부터 달랐고, 물자보급에서도 훨씬 우대받았다.
인민무력부의 병력은 120만명이고 호위사령부는 그 인민무력부의 11%에 지나지 않는 13만명이지만, 화력 밀도는 호위사령부가 북한군 전체의 40%에 달했다. 거기에 김일성이나 김정일을 호위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기에 긍지가 높았다.
그에 대하여 인민무력부의 호위사령부에 대한 반감이나 열등감은 위험하다고 할 수준까지 달해있었다. 인민무력부의 군인들은 김일성 주석 앞에서 전투력을 과시하여 호위사령부의 콧대를 꺾어 놓겠다는 각오로 임했다.
주석궁으로의 침입은 세 방향에서 행해졌다. 첫번째는 주석궁에 전력을 공급하는 고압송전선을 이용하여 침입하는 작전이었다.
송전선의 전력을 차단하여 3인1조로 구성된 6명의 침입조가 반대측에 있는 철탑에서 고압송전선을 탔다. 등에 단 수소풍선으로 중심을 잡아 침입해서는 주석궁의 지붕에 착지하여 빨간 종이를 붙이는 작전이었다.
그리고 침입조가 한반 중에 철탑에 올라가 침입을 시도했지만 차단되었던 고압송전선의 전력이 복구되자 감전된 6명은 땅에 떨어져 죽었다.
공포의 "주석궁 공방 훈련" 매뉴얼
두번째는 대동강에서의 침입이었다. 주석궁은 평양 중심을 가로지르는 대동강에 인접하였기에 수중에서 침입이 가능했다.
그렇기에 북한 호위사령부는 주석궁이 위치하는 수면 아래에 적의 침입을 차단하는 고압전기선을 깔아놓았다. 호위사령부 예하 1호위대 제3중대 군인들은 정기점검을 핑계로 수중고압선에 전기를 넣어 감전사하여 물에 뜬 생선으로 잔치를 열 때도 있었다.
그 대동강에서 3조9인의 침입조가 잠수복을 입고 침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대동강 가까이서 보초업무를 서고 있던 호위사령부의 군인이 실탄 이외에 무엇으든 사용가능하다는 "주석궁 공방 훈련"의 매뉴얼에 따라 수중의 고압전기선에 전기를 흘려넣었다.
9명의 수중침입조는 생선과 함께 물에 떴다. 곧바로 구급차로 병원으로 운반했지만 전원이 즉사였다.
세번째는 터널을 이용한 침입이었다. 주석궁에서 1.5km 떨어진 곳에서부터 인민무력부의 공작부대가 터널을 파기 시작했다. 침입목적으로 터널을 팠지만 주변도로나 건물에 균열이 생겨나 불만이 속출했다. 터널을 이용한 침입도 실패했다.
이것들 외에도 주석궁에 출입하는 차의 아래에 붙어 침입을 시도했지만 군의 수색견에 물려 부상당한 병사나 호위사령부의 차를 탈취하여 침입을 시도한 병사 등, 훈련개시부터 2주 동안 28명이 사망, 중상자 107명, 경상자 322명이 발생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주석궁 공방 훈련"이 중지되었다. 이 이상 계속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 수 없다고 우려한 김일성이 훈련의 중지를 선언한 것이다. 죽음을 불사한 "주석궁 공방 훈련"은 수백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키고 승패를 결정짓지 못하고 끝났다.
인민무력부와 호위사령부의 오랜 갈등과 김일성 앞에서 전투력을 평가받는다는 것을 명예라 생각하는 북한군 군인의 세뇌가 낳은 참극이었다. 이러한 훈련은 김정은 시대인 지금도 행해지고 있을지 모른다. 많은 북한의 젊은이들이 10년 이상의 청춘기를 군에 바치고, 정권자들의 장난에 목숨을 바치고 있는 현실이 씁쓸하다.
그런데, 빈고 님[備後殿][각주:1]은 오와리[尾張]의 군세를 규합하여 어느 달은 미노노쿠니[美濃國]으로 진격하셨고, 또 다음 달은 미카와노쿠니[三川の國]에 출격하셨다.
어느 때[각주:2]인지 9월 3일. 오와리 국내의 군세를 이끄시고는 미노노쿠니에 침공하셨다. 이곳저곳에 불을 지르며 진격하셨고, 9월 22일에 사이토우 야마시로 도우산[斎藤 山城 道三]의 거성 이나바야마[稲葉山]의 산 밑의 마을들을 목표로 불지르며 마을 입구까지 다가갔으나, 이미 밤에 가까운 오후 4시 전후가 되었기에 군세를 물리려 하셨다. 군세의 반 정도가 철수 하였을 즈음에, 야마시로 도우산이 갑자기 남쪽을 향해서 돌격해 왔다. 반격에 나섰지만 여기저기 무너졌기에 수비하지를 못하였고, 빈고 님의 동생 오다 요지로우[織田 與次郎][각주:3], 오다 이나바노카미[織田 因幡守][각주:4], 오다 몬도노카미[織田 主水正], 아오야마 요소우에몬[青山 與三右衛門][각주:5], 센슈우 키이노카미[千秋 紀伊守][각주:6], 모우리 쥬우로우[毛利 十郎][각주:7], 가문의 장로인 테라사와 마타하치[寺澤 又八]의 동생 모우리 토우쿠로우[毛利 藤九郎], 이와코시 키사부로우[岩越 喜三郎]를 시작으로 총 5000명 정도가 전사하였다.
아오야마 히데카츠[青山 秀勝]. 위키에서는 아오야마 노부마사[青山 信昌]로 되어 있으나, 당시에는 아오야마 히데카츠[青山 秀勝]라는 기록만 있다고 하니, 이 블로그에선 아오야마 히데카츠[青山 秀勝]로 한다 사족으로 아오야마는 앞의 '3. 킷포우시 님 관례식에 대하여[吉法師殿御元服之事].'에서도 등장하지만, 앞의 주석에서도 달았듯이, 노부나가가 관례식을 치른 해는 1546년이기에, 앞의 기록은 저자 오오타 규우이치[太田 牛一]의 착각으로 여겨지고 있다. 단, 신장공기를 그대로 받아들여 이 4장의 기사를 1544년이 아닌 1547년의 일로 받아들여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본문으로]
아오야마 히데카츠[青山 秀勝]. 위키에서는 아오야마 노부마사[青山信昌]로 되어 있으나, 당시에는 아오야마 히데카츠[青山秀勝]라는 기록만 있다고 하니, 이 블로그에선 아오야마 히데카츠[青山秀勝]로 한다 사족으로 아오야마는 1544년 9월, 노부나가의 부친 노부히데[織田信秀]의 미노[美濃] 이나바야마[稲葉山] 공격 때 전사. 노부나가가 13세가 되는 해는 서력으로 1546년으로 이때는 이미 사망한지 2년이 지난 후로. 이는 작자 오오타 큐우이치[太田牛一] 착각으로 여겨지고 있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