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jbpress.ismedia.jp/articles/-/27372
저자 : 타마키 타다시[玉置 直司]

 2011년 10월 26일에 치러진 한국 서울 시장보결선거에서 야당계열의 무소속후보 박원순(55세, 당선 다음 날 시장에 취임)가 여당인 한나라당 후보인 나경원(47세)씨에게 압승하였다.

 1년 뒤 대통령선거를 남겨놓은 시점의 ‘수도결전’에서 승부수가 된 것은 ‘경제양극화’에 대한 불만이었다. 대기업이나 재벌을 강하게 비판해 온 시민운동가 출신 박원순씨의 당선에 경제계는 술렁이고 있다.


20~40대의 70%가 여당후보에게 NO!

참패한 여당 한나라당 후보인 나경원씨의 선거공보물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그야말로 야당 단일후보의 압승이었다. 박원순씨의 득표율은 53.4%로 여당인 나경원 후보에 7포인트 이상 크게 앞섰다.

 특히 큰 차이가 났던 것이 젊은층의 득표율이었다. 지상파방송 3사의 공동출구조사에 의하면 20대 69.3%, 30대 75.8%, 40대 66.8%가 박원순씨에게 투표하여 여당의 나경원 후보를 압도하였다.

 20대~40대 젊은 층의 70%가 여당후보에게 NO를 외친 결과이기에 여당에게 있어서는 충격적이다.

 “또다시 하필이면 피곤한 사람이 당선되었군”. 개표 뒤 하루 지난 10월 27일 낮에 만난 한 재벌기업의 임원은 이렇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피곤한 사람’이라는 것은 정말 그럴 것이다. 당선된 박원순 시장은 한국 재벌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박시장은 검사출신이지만 곧바로 사직하고 변호사가 되어 시민운동에 몸을 던졌다.

 2000년 총선거 때 특정 정치인을 저격하며 ‘낙선운동’을 펼친 것은 일본에서도 굉장히 유명한데, 한국 경제계에서는 그 이상으로 유명한 것이 ‘참여연대’라는 시민운동단체이다.


한국경제계가 두려워 한 ‘참여연대’

 박원순씨가 설립 시 주요멤버로 참여한 이 시민단체는, 재벌의 세습인사나 불투명한 기업통치를 강하게 비판했다. 대상기업의 주식을 취득하여 주식총회에 참석해 적극적으로 경영진을 추궁했다. 1998년 삼성전자 주식총회는 이 참여연대의 추궁으로 13시간 반이라는 기록적인 마라톤 총회가 되었다.

 박원순씨는 그 후 ‘아름다운 재단’이라는 사회공헌단체를 설립하였는데, 이 단체에는 삼성, 현대자동차, 포스코 등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이나 대기업이 빠짐없이 기부에 응하였다. 이 기부에는 대기업에 ‘박원순씨의 목표가 되었다간 큰일난다’는 생각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박원순씨는 시민운동계에서 유명했지만 일반적인 지명도는 결코 높지 않았다. 박원순씨를 단번에 유명하게 만든 사람은 한국 젊은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사회운동가로 서울대 교수이기도 한 안철수(49세)씨였다.

 안철수 교수는 서울대 의학부를 졸업 후 연구직에서 활동하였다. 원래 컴퓨터를 좋아하여 1980년대 말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프로그램을 개발하였고, 이를 사업화하여 대성공을 거둬 ‘한국의 빌 게이츠’로 불리고 있었다. 그 후 회사 운영에서 손을 떼고 대학에서 교편을 잡는 한 편, 전국을 순회하며 학생이나 젊은이들을 격려, 지원하는 강연이나 모임을 이어오고 있다.


‘안철수 열풍’이 커다란 순풍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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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의 승리를 기뻐하는 박원순씨]

 그 인덕과 젊은이들을 자기 돈으로 지원하는 모습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많으며, 책을 쓸 때마다 베스트셀러가 되는 등 지금은 젊은이들의 교주적 존재가 되어 있다. 안철수 교수는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할 의향을 보였지만 ‘예부터 알던 맹우’인 박원순씨도 출마한다는 소식에 단념. 박원순씨 지원이라는 포지션을 취했다.

 둘이 ‘후보단일화’에 합의한 모습은 계속해서 TV의 뉴스에 보도되어 박원순씨도 일약 유명인이 되었다. 박원순씨는 야당인 민주당 등의 지지도 얻어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여 압승하였다.

 이에 대해 여당 한나라당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열세인 선거전이었다.

 무엇보다 이번 ‘보궐선거’는 한나라당 소속의 전 시장이 야당 계열의 교육감이 결정한 ‘학교 무상급식’에 반대하여, ‘시장직을 건’ 주민투표를 실시했지만 투표율이 규정에 미치지 못해, 투표자체가 무효로 되어 시장직에서 물러나면서 시작된 소동극이 보궐선거의 계기가 되었다.

 혼란을 일으킨 여당의 전 시장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던 중 반한나라당 세력은 눈깜짝할 새에 박원순씨를 내세웠다.

 당황하며 여당이 내세운 후보가, 서울이 지역구로 미모로 인기가 높은 국회의원 나경원 후보였다.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의 선두주자’인 박근혜(59세) 의원도 4년 만에 선거지원 유세에 나서 필사적으로 나경원 후보를 지원했지만, 그 차이는 마지막까지 좁히지 못했다.


‘선거의 여왕’이라 일컬어지는 차기 대통령후보에게 뼈아픈 상처

 이번 선거결과의 의미는 (1) 수도 서울에서 여당후보가 참패했다. (2) 당선자가 무소속후보였다. (3)젊은이들이 압도적으로 야당측 후보에게 투표하였다 – 일 것이다.

 서울시장에 무소속 후보가 당선된 것은 처음 있는 일로 2012년 총선거(봄), 대통령선거(연말)를 앞두고 정치계에 큰 움직임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여당 한나라당에 있어서는 수도결전에서 참패한 타격이 크다. 박근혜씨는 지금까지 ‘선거의 여왕’이라 불리며, 그녀는 지원한 후보를 대부분 당선시켜 왔다.

 이번에도 서울시장 선거와 동시에 치러진 부산시 구청장 선거 등에서는 지원 유세한 후보를 격전 속에서 전부 당선시켜 자신이 가진 위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가장 오랜 시간을 들여 유세한 서울 시장선거에서 여당후보가 참패한 것은 본인에게 있어서도 큰 상처가 될 것이다.

 투표일인 10월 26일은 부친인 박정희 전대통령의 기일이었다. 박근혜씨는 32주년인 이날 부친의 묘 앞에서 무엇을 보고하였을까?

 야당인 민주당은 더 큰일이다. 무엇보다 서울시장 선거에 후보조차 내세우질 못했으니까. 박원순씨에게는 집요하게 민주당 입당을 권했지만 박원순씨는 일축했다. 어쩔 수 없이 박원순 지원에 힘쓰긴 했지만, ‘민주당 해체와 정계재편은 불가피’라는 목소리가 점점 강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결과가 된 것인가? 경제양극화에 대한 불만이 기존정당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 ‘새로운 얼굴의 정치인’을 원하는 커다란 흐름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경제양극화에 대한 불만이 폭발, ‘새로운 얼굴의 정치인’을 요구하는 목소리

 한국은 1997년에 IMF위기로 일컬어지는 통화위기, 경제위기를 기점으로 초경쟁사회, 초격차사회로 재탄생 해버렸다. 과감한 합리화와 국제화를 추진한 일부 대기업은 더 강해지고 더 거대해졌다. 그런 한편 경제격차도 훨씬 벌어져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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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대통령의 경제정책으로 인해 일부 대기업은 돈을 벌었지만 일반시민의 생활은 어려워지기만 했다.]

 2007년 말의 대통령선거에서 이명박후보가 압승할 수 있었던 것은 “대기업 CEO출신으로 누구보다 경제에 정통한 내가 경제를 재건하여 누구나 잘 살게 하겠습니다”라는 메시지에 많은 국민들이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기업중시’의 경제정책으로 일부 대기업은 더 거대화했지만 격차는 벌어지기만 했다.

4년 전에 경제를 지지했던 젊은층…’그들만의 경제’에 분노, 反한나라로(링크:조선일보)’. 선거 다음날 ‘조선일보’는  이런 제목으로 시장선거를 총괄했다.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가 크게 성장하는 한편 ‘생활은 더 안 좋아지기만 했다’라는 것이 일반시민의 체감경기이다.

 이명박대통령은 파이를 크게 한 뒤 분배한다고 약속했다. 확실히 파이는 커졌지만, 일부 대기업으로의 부의 편중은 더욱더 심화될 뿐이었다.

 이러한 정권에 대한 잠재적 불만에 불을 붙인 뉴스도 선거기간 중 나왔다. 이명박대통령이 퇴임 후에 살 집을 준비하였는데, 토지구입비 등을 위해 43억 원의 국비를 투입한다는 발표로 인해 국민의 반발을 사 허둥지둥 철회를 하게 되었다.

 나경원 후보에 대해서는 연회비가 1억 원이나 하는 ‘초고급 피부관리 클리닉’에 다니고 있다는 뉴스가 선거전 종반에 진보계열의 인터넷 뉴스사이트에 ‘특종’으로 올라와, 눈깜짝할 새에 네티즌에게 퍼졌다. 나경원 후보진영은 ‘연회비가 1억 원이라는 것은 허위보도다’고 반론하였지만, ‘역시 갑부 패거리’라는 네거티브이미지를 붙여 효과는 절대적이었다.

 ‘격차확대’에 대한 불만 이상으로 커다란 변화가 한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어, 이것이 선거전에 영향을 끼쳤다는 흥미 깊은 시각도 나왔다.


한국사회에 커다란 변화? ‘경제논쟁은 아무런 성과도 없다’라는 의식도

 어떤 정치학자는 이렇게 분석하였다.

 “IMF 위기직후부터 한국은 극심한 약육강식의 자본주의국가로 변신하였다. 누구나가 경제를 최우선시하였다. 이명박씨에게 기대한 것도 실리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IMF위기에서 15년 가까이 지나 최근에는 경제적 가치관보다도 도덕적 의식이나 정(情) 등 전통적인 가치관을 중시하는 풍조가 강해졌다.
여당인 한나라당은 꿈과 같은 경제성장을 말하며, 야당인 민주당은 분배중시를 주장한다. 많은 국민, 특히 젊은 층은 이러한 경제논쟁이 성과가 없기만 하다는 것에 자각하여 기존 정당에 속하지 않는 안철수 교수나 박원순씨에게 끌린 것이 아닐까?”

 박원순씨는 시민운동 출신이라고는 해도 지금까지의 많은 시민운동가들과는 굉장히 다른 경력의 소유자이다. 서울의 명문고인 경기고등학교에서 서울대(학생운동으로 중퇴)를 거쳐 검사가 되었다. 그 후 시민운동으로 위치를 바꾸었지만, 이데올로기를 중시하는 과격파가 아닌 보다 실무에 정통한 시민운동을 계속해 왔다.

 안철수 교수도 좀 특이한 경력이다. 둘의 공통점은 프로 정치가가 아니라는 것. 특정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운동가도 아니라는 것이다.

 투표 이틀 전인 24일 오후. 안철수 교수는 박원순씨의 선거사무소를 방문하여 격려했다. 기자 등 보도진의 앞에서 악수하고 대화를 나눈 것은 불과 5분이었지만, ‘안교수가 직접 응원했다’는 모습이 몇 번이나 TV에 나와, 마지막까지 투표할지 정하지 못하고 있던 젊은층에 나름 영향을 끼쳤다 것에는 틀림이 없다.

 이번 선거결과는 앞으로의 한국 정치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것이다.

 정계에서 당면의 최대 초점은 안철수 교수가 내년 대통령선거에 출마를 할지 안 할지이다.

 이번 선거에서 박원순씨를 당선으로 이끈 최대의 공로자는 안철수 교수이다. 8월말에 정계진출의 뜻을 나타낸 이후 그 인기는 상승일로이다. 대통령 선거를 생각한다면 그 전에 있는 총선거에도 준비할 필요가 있다. 안철수 교수가 기존 정당에 입당할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기에, 그럴 경우 야당의 재편은 불가피하다.

 안철수 교수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지금까지 ‘박근혜 대세론’으로 굳혀져 있던 여당도 커다란 변화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예측 불가능한 정치의 계절, 대기업은 전전긍긍

 투표 당일인 10월 26일부터 27일에 걸쳐 한국의 정계, 미디어 관계자는 혼란에 빠졌다. 대부분의 반응은 “충격적인 결과다. 내년 대통령 선거에는 필시 안철수 교수가 출마할 것이다. 이젠 누구도 안교수에게 이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성질 급한 어느 학자는 “여당은 2012년의 대통령선거를 포기하는 편이 좋다. 2017년을 향해 지금부터라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이다.

 물론 대통령선거까지는 1년 이상 남았다. 안철수 교수나 박원순 시장의 인기가 일과성으로 끝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단지 젊은층의 압도적 다수가 ‘기존 정당이 아닌 새로운 선택기’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은 그리 간단히 바뀔 것 같지는 않으며, 정계는 큰 변화를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좀 더 눈앞의 일을 생각한다면 대기업이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원순씨가 서울시장에 취임하여 시장이라는 자리에서 대기업을 때리는 사태가 충분히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세론의 대기업에 대한 시선이 더욱 싸늘해질 가능성이 높다. 또한 세론의 압력으로 이명박정권이 ‘친기업정책’에서 더 거리를 둘 수 밖에 없을 터이다.

 ‘정치에는 될 수 있는 한 관여하지 않는다’가 한국 대기업의 기본적인 자세이지만, 세계경제가 불경기인 지금 기업성과 악화가 예상되는 시점에서 정부의 협력을 얻지 못하는 것은 기업활동에도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 2012년 총선거(봄)과 대통령선거(연말)를 실시한다. 같은 해에 두 대형선거가 실시되는 것은 20년에 1번 있을 수 있는 일로, 앞으로 본격적인 ‘정치의 계절’을 맞이한다. ‘예측 불가능한 정치의 계절’은 대기업에 있어서도 굉장히 불안한 일일 것이다.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가 히데요시의 본진을 방문하는 그림.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 때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에 대한 평판은 굉장히 나빴다. ‘우인(愚人)’[각주:1], ‘영승(佞僧)’[각주:2], ‘요승(妖僧)’[각주:3] 등 최저의 표현으로 기록되어 비난 받았다.
 이는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 때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를 서군의 총수로 내세워 쓰라린 패전의 맛보게 만들었고, 그에 따라 120만석이었던 영지를 단번에 37만석으로 떨어뜨린 장본인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주로 모우리 가문[毛利家]가 퍼뜨린 악담인 듯 하다.

 우선 그에 대해선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안코쿠지 에케이라고 하면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횡사(橫死)와 히데요시[秀吉]의 천하제패를 예언한 통찰력이나 안목으로 유명하다.
 1573년. 당시 모우리[毛利]의 외교승이었던 에케이는 쇼우군[将軍]
요시아키[義昭]의 처우를 놓고 오다[織田]-모우리[毛利] 의 사이에 긴장상태가 일어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상경해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 절충을 거듭하고 있었다.
예언은 이 교섭이 끝난 뒤 돌아오는 길에 오카야마[岡山]에서 모우리 가문의 중신에게 보낸 보고서에, 에케이는 다음과 같이 썼다.

노부나가가 3~5년은 버틸 것입니다. 내년 즈음에는 공가(公家)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각주:4] 그러나 그 뒤 높은 곳에서 벌렁 자빠져 떨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토우키치로우[藤吉郎][각주:5]는 만만치 않게 뛰어난 사람입니다.
 에케이의 이 예언은 10년 뒤 현실이 되었다.[각주:6] 

 에케이의 출신성분에 대해서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듯 하지만, 아키[安芸] 카나야마 성[銀山城]의 성주 타케다 노부시게[武田 信重][각주:7]  핏줄이라 전해지며[각주:8] 아키[安芸]의 안코쿠 사[安国寺][각주:9] [각주:10]에 들어가 중이 되었으며, 이 절의 주지가 되었다.[각주:11] 이러는 사이 에케이의 스승인 에신[恵心]이 당시 외교승(外交僧)으로 모우리 가문[毛利家]과도 친했기에, 에케이도 모우리 가문의 외교승이 되었다.

 앞의 예언에서 10년. 에케이는 급격히 바빠졌다.[각주:12] 1582년 5월, 히데요시가 이끄는 대군이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을 포위하여, 당장이라도 오다-모우리 간에 대결전이 일어날지 모르는 정세가 된 것이다. 이때 에케이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를 대리하여 히데요시와 강화교섭에 나섰다. 히데요시는 타카마츠 성의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清水 宗治]의 할복을 강화의 조건[각주:13]으로 냈다.[각주:14] 에케이는 독단으로 이것을 받아들여 시미즈 무네하루를 설득하여 배를 가르게 만들었다.[각주:15] 

 얼마 뒤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대승을 거둔 히데요시는, 강화 때의 조건으로 내걸었던 모우리 가문의 영지 할양을 다시 꺼냈다. 그거도 만약 불복한다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위협적인 내용이었다.
 에케이는 다시 히데요시와 절충을 거듭했지만, 히데요시의 실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우리의 중신들 눈에는 에케이가 하는 일들이 모두 히데요시의 뜻을 대변하는 것으로만 보여, 나중에는 에케이를 “대갈이만 큰 땡중놈”이라고 욕하는 자까지 생겼다.
 이에 대해 에케이는 “지금은 사람의 외모나 모습으로 떠들 때가 아닙니다. 서로가 진심을 나눌 때입니다. 부디 저의 진심을 믿어주길 바랍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또한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은 모우리의 가문을 지키기 위함이며, 이것에 반대함은 천하의 정세에 어둡기 때문이다 – 라는 편지도 보냈다.[각주:16] 

 어쨌든 모우리 가문은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에케이도 이렇게 오랫동안 히데요시와 절충을 하는 동안 히데요시의 신뢰를 받아 승려인 채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각주:17]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의 항에서 언급했듯이, 세키가하라 결전에서 모우리 가문은 에케이와 킷카와 히로이에[吉川 広家][각주:18]의 대립[각주:19] [각주:20]으로 인하여 결국 아무 것도 못한 채 패배한 것이었다.[각주:21]

 에케이는 일단 전장에서 벗어났지만 쿄우토[京都]에서 잡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와 함께 참수되었다.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
아키[安芸] 안코쿠 사[安国寺]의 주지가 되어 모우리 가문[毛利家]의 사승(使僧)으로 활약, 후에 히데요시[秀吉]에게 이요[伊予] 와케 군[和気郡] 2만3천석을 하사 받았고 몇 년 뒤 6만석이 된다. 참수되었을 때는 63~4세라 한다.

  1. 오오타 규우이치[太田 牛一]의 케이쵸우기[慶長記], [본문으로]
  2. 아첨하고 얍삽한 중이란 뜻으로, 이와쿠니 킷카와 가문[岩国吉川家]의 가로(家老)인 카가와 마사노리[香川 正矩]가 저술한 인토쿠기[陰徳記]에 나오는 표현. 이 책은 주군인 킷카와 씨를 정당성을 주기 위해 각색한 티가 많이 난다고 한다. [본문으로]
  3. 1663년 아사노 히로시마 번[浅野広島藩]의 번 의사[藩医]인 쿠로카와 도우유우[黒川道祐]가 만든 지역 역사지인 게이비국군지[芸備国郡志] [본문으로]
  4. 실제로 노부나가는 다음 해인 1574년 종삼위(從三位) 산기[参議]가 되었다. [본문으로]
  5. 히데요시의 통칭 [본문으로]
  6. 저자는 이 예언을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가 일으킨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을 떠올린 듯 한데, 이는 결과론으로, 아마도 에케이는 노부나가의 부하가 반란을 일으킨다는 의미보다, 이 1573년 당시 노부나가의 권력기반이 강고하지 않다보니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였을 것이다. [본문으로]
  7. 노부시게는 다른 이름으로 ‘토모 노부시게[伴 信重]’라 하며, 아키 타케다[安芸武田家]의 당주인 카나야마 성주인 타케다 노부자네[武田 信実]의 사촌뻘이다. 사촌뻘이라 한 이유는, 노부자네가 와카사 타케다[若狭武田家]에서 아키 타케다 가문에 양자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어쨌든 에케이[恵瓊]가 아키 타케다 가문의 핏줄인 점은 맞는 듯 하다. 에케이의 증조할아버지인 타케다 모토시게[武田元繁]는 아키 타케다 가문의 당주였으며, 모토시게의 아들이자 에케이의 할아버지인 ‘토모 시게키요[伴繁清]’ 부터 토모 씨[伴氏]를 칭했다. [본문으로]
  8. 에케이의 출신을 알려주는 유일한 기록 ‘후도우인 유래기[不動院由来記]’에 따름. [본문으로]
  9. 안코쿠 사[安国寺]는 14세기 초반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를 세운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가 전란으로 죽은 사람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일본의 각 쿠니[国]에 세운 임제종(臨濟宗) 계열의 절이다. [본문으로]
  10. 아키[安芸]에 있는 안코쿠 사[安国寺]는 아키의 슈고[守護]였던 아키 타케다 가문[安芸武田家]의 위패를 보관하는 보제사(菩提寺)였기에, 아키 타케다의 피가 흐르는 에케이도 이런 연으로 이 절에 들어간 듯 하다. 여담으로 이 절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 후에 아키 지역에 들어 온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가 서군의 수괴가 주지였던 이 절을 임제종에서 진언종(真言宗)으로 바꾸고 절이름도 ‘후도우 원[不動院]’으로 바꾼다. 위의 주석에 에케이의 출신을 알려준다는 기록이 ‘후도우 원 유래기[不動院由来記]’인 이유를 아실 수 있으리라 [본문으로]
  11. 1569년. 쿄우토 오산[京都五山] 중 4위이며 임제종 총 본산인 토우후쿠 사[東福寺]의 도서관장인 장주(藏主) 겸임. [본문으로]
  12. 뭐 사실 이 이전에도 모우리 가문이 오오토모 가문[大友家], 우키타 가문[宇喜多家] 등과의 대결에서 외교절충이나 후방지원 등에 활약했다. 갑자기 바뻐진 것은 아니다. [본문으로]
  13.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쳐했던 모우리가 히데요시에게 화평을 청했고 이에 히데요시가 제시한 것이 ①모우리의 영지 중 5개 쿠니[国] 할양 ②인질제출 ③앞으로 개기지 않겠다는 기청문(起請文) 제출로. 무네하루의 할복을 조건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본문으로]
  14. 그러나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일어나, 히데요시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를 처벌하기 위해 상경하고자 하여 일시정전을 바라며 무네하루의 할복을 요구. 어차피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으로 낙성과 마찬가지였던 타카마츠 성의 성주 무네하루가 성의 병사들 목숨을 구하는 대신 할복하여 죽었다. [본문으로]
  15. …는 모우리 가문[毛利家]이 에케이 악인-무네하루 충신설을 만들기 위해 후세에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무네하루 할복에 에케이는 관여하지 않았으며, 에케이는 이 이후 모우리-히데요시 간의 화평교섭 때 참가하였을 뿐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16. 에케이의 끈질긴 교섭으로 본래 히데요시가 원했던 5개 쿠니[国] – 빗츄우[備中], 빈고[備後], 호우키[伯耆], 이즈모[出雲], 미마사카[美作] - 중 히데요시에게 비젠, 미마사카, 호우키의 세 개군(郡), 빗츄우의 동부를 할양하게 되지만, 대신 빈고[備後], 이즈모[出雲]와 호우키의 일부, 그리고 빗츄우의 서부를 지키게 된다. [본문으로]
  17. 에케이가 다이묘우[大名]였다는 것은 에도 시대의 편찬물에 쓰여졌을 뿐으로, 당시의 사료에는 안코쿠 사[安国寺]의 사령(寺領)으로 서국(西国)의 각 다이묘우 들의 영지에서 500~5000석씩 각출한 총 1만1500석이 주어졌다고 한다. 즉 에케이 개인이 아닌 절의 영지로 주어진 것이다. 거기에 만약 에케이가 다이묘우[大名]였다면, 히데요시 정권이 다른 다이묘우들에게 부과한 군역(軍役)처럼 군역을 부과받았겠지만, 에케이는 그것이 없었으며, 또한 영지 경영에 필수적인 가신단이 있어야 했지만, 역시 에케이에게는 가신단 또한 없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8. 모우리 양천[毛利両川] 중 하나이며, 모우리 모토나리[毛利元就]의 둘째 아들 킷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의 셋째 아들. [본문으로]
  19. 대립이 있었다는 것은 킷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가 세키가하라 전쟁이 지난 후에 비망록[覚書]으로 적어 놓은 것에 나오는 것으로, 내용은 모우리 가문이 서군에 붙게 된 것은 에케이의 말빨에 이은 독단에 이은 것이며, 나님(히로이에)는 말쌈하면서 까지 말렸지만 에케이가 듣지 않았다. - 는 식으로, 나쁜 것은 모두 에케이때문이라는 것과 그에 따라 모우리 가문과 킷카와 히로이에는 이에야스에게 개긴 적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내용을 날조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20. 후세의 편찬물이 아닌 당시의 서장 들을 살펴보는 한 히로이에와 에케이가 특별히 사이가 나쁘다거나 혹은 싸운 적은 없다. [본문으로]
  21. 사실 이는 서군 총사령관이면서도 양다리를 걸쳐 동군과도 부전조약을 맺은 모우리 테루모토[毛利輝元] 탓이 크다. 테루모토는 은거해 있던 미츠나리[三成]에게 에케이를 파견하여 반 이에야스 공작을 주도하였고, 한편으론 동군의 부사령관격이었던 쿠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와 친한 킷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에게 명령하여 동군과도 연락하며, 전투가 일어나기 전날에는 동군-모우리 가문간에 부전조약을 맺는다. [본문으로]

BBC에서 만들었다는 세키가하라

동영상 2011. 10. 19. 12:31 Posted by 발해지랑


1편


 

2편



[전투장면만 나온 다이제스트]

원래대로라면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가 일어난 서력 10월 21일에 올려야 하나 잊어버릴 것 같아서 미리 올림.

ps; 세세한 거에 신경 쓰시면 지는 겁니다. 허허허~ 

내가 해봐서 아는데

일본사 이것저것 2011. 10. 17. 07:58 Posted by 발해지랑

각지를 전전하던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가 1568년 쇼우군이 되자, 그때까지 키나이[機内] 지방을 장악하고 있다가 쫓겨났던 미요시삼인중[三好三人衆]은 재탈환을 노리며 쇼우군 요시아키가 임시로 거처를 삼고 있던 로쿠죠우[六条]의 혼코쿠 사[本圀寺][각주:1]를 1569년 1월 4일 공격합니다.

1569년 1월6일 자신이 옹립한 쇼우군이 공격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기후 성[岐阜城]의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는 동원령을 내리는 한편 자신은 단기(單騎)로 쿄우토[京都]를 향합니다. 하필 눈이 엄청나게 와 생각만큼 나아가질 못하던 중 노부나가는 오다 군(織田軍)의 물자를 수송하던 운송업자들이 다투고 있는 것을 목격합니다.

노부나가는 운송업자들이 다투고 있는 곳에 가서 “어째서 다투느라 가질 않고 있는가?”라고 물어, 그 이유가 서로 자기 말에 배당된 물품이 더 무겁다는 등이 이유로 다투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노부나가는 각자의 말들에 짊어진 물품들을 내리게 한 뒤 직접 짊어진 뒤 “똑같은 무게다. 서두르길 바란다”며 진격을 재촉합니다.

이때의 모습을 신장공기는

운송업자들이 물품 배당 문제로 다투고 있었다. (노부나가는) 말에서 물품을 내리게 하여 양쪽 다 살펴보신 뒤, “같은 무게다. 서둘러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봉행(奉行)인 자가 어느 한쪽만 편들고 있는 것인가를 생각하셨기에 하신 일이다.
馬借の者も、御物を馬に負候とて、からかいを仕り候。御馬より下りさせられ、何れも荷物一々引見御覧じて、同じおもさなり、急ぎ候へと仰せ付げられ候。是れは奉行の者に依怙贔屓もあるかと、おぼしめしての御事なり。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나라의 대통령 되시는 분이 자주 쓰시는 “내가 해봐서 아는데”는 이렇게 직접 해본 뒤 해결책을 내놓아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뿐인 “내가 해봐서 아는데”는 비웃음만 살 뿐이라는 것은 어째서 몇 년이 지나도록 이해하지를 못하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1. 여담으로 당시는 '혼코쿠 사[本國寺]'라고 '코쿠'의 글자를 國자로 썼으나, 에도 시대에 미토 코우몬[水戸黄門]으로 유명한 토쿠가와 미츠쿠니[徳川光圀] 생모의 추선공양을 한 뒤 미츠쿠니의 보호를 받아, 이후 혼코쿠의 '코쿠' 자가 圀로 바뀌었다. [본문으로]

 상인(商人)출신으로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까지 승진한 인물. 그리고 기독교도. –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는 센고쿠 무장으로서 이색적인 존재이다.  
 상인으로서의 특질은 언변이 뛰어난 외교관, 경제감각을 갖춘 행정관으로 발현되었다. 거기에 무인으로서도 재능도 상당하여, 히데요시를 섬긴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582년 히데요시가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에 수공(水攻)을 결행하였을 때, 유키나가는 물 위에 배를 띄어 놓고 타카마츠 성에 포격을 하는 활약을 보였다.[각주:1]
 “힘이 굉장히 셌고, 지모는 남들보다 훨씬 뛰어났으며, 흰 피부에 키가 커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는 소리를 들은 유키나가는 역시 평범한 상인이 아니었다.

 200석으로 히데요시를 섬긴 것이 1579~80년[각주:2] [각주:3], 나이는 21~2세 즈음이라고 하는데, 10년도 지나지 않은[각주:4] 1588년에는 히고[肥後] 절반인 24만석의 다이묘우[大名]로 발탁되었다. 이례적인 스피드 출세로, 유키나가의 능력이 굉장히 뛰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유키나가가 확실한 기독교도로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1583~84년 즈음으로 경건한 기독교 무장인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과 친교를 맺으면서 부터이다. 유키나가의 양친은 예전부터 기독교도였기에 유키나가도 어려서부터 세례를 받아 ‘아고스티뉴(Agostinho)’라는 세례명이 있었지만 형식적인 것으로 신앙은 그다지 깊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타카야마 우콘과 친해지면서 유키나가는 그때까지 거만했던 행동이 사라져, 주위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온화하고 겸손한 성격이 되었다고 한다. 신앙도 깊어져 오오사카[大坂]에 한센병 병원을 세우거나, 고아원 사업에 힘썼다.

 하지만 1587년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 중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갑자기 선교사 추방령을 발령한 것이다. 이로 인해 타카야마 우콘도 다이묘우에서 추방의 몸이 되었다.
 유키나가는 이때 선교사나 우콘이 숨을 수 있는 집을 준비해 주었으며, 큐우슈우[九州]의 기독교 다이묘우들에게도 선교사 보호에 힘써줄 것을 요청하였다.
 유키나가는 이미 기독교 신앙에 깊이 빠져 있었다. 만약 이러한 일들이 히데요시에게 알려져 추방당한다면 순교(殉敎)하려고까지 생각하였던 것 같다. 실제로 히데요시가 힐문하자 유키나가는 당당히 자신의 주장을 역설하였다.[각주:5] 그 때문인지 히데요시의 기독교 탄압은 완화되었다. 거기에 다음 해인 1588년 유키나가는 히고 절반 및 예부터 기독교의 아성인 아마쿠사 지방[天草地方]까지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히고의 나머지 절반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에게 주어졌다. 창 한 자루로 출세한 전형적인 무공 다이묘우이다. 이러한 인간은 보통 유키나가처럼 머리를 쓰는 능력으로 출세한 자에 대해 세찬 반감을 품고 있다. 한편 유키나가 역시 키요마사와 같은 무장을 ‘머리가 없는 녀석’이라고 경멸하는 경향이 있었다. 더구나 이 둘, 키요마사는 열렬한 법화종(法華宗) 신자였으며 유키나가는 경거한 기독교도였다. 서로 사이가 가까워질래야 가까워질 수가 없었다.

 양자의 반목은 조선침략에서 함께 선봉을 서게 되면서 더욱 심해졌다. 이 침략에서 유키나가는 시종 화평교섭을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키요마사는 끝까지 주전론자였다. 이 대립은 일본군의 작전에 지장을 끼칠 정도가 되었다. 거기에 더불어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유키나가와 친한 감찰[軍監]의 불리한 보고로 인해 키요마사가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귀국하게 되어 질책을 받은 것이다. 키요마사의 유키나가-미츠나리에 대한 증오는 참기 어려운 것이 되어 있었다.

 세키가하라 결전[関ヶ原決戦]은 천하제패의 야망에 불타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이러한 키요마사를 대표로 하는 무공파(武功派)와 미츠나리-유키나가 등 봉행파(奉行派)의 대립을 이용해 일으킨 것이다. 패한 유키나가는 이부키야마[伊吹山] 산중으로 도망쳤지만, 몇 일 뒤 근처의 마을 사람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리고 동군(東軍)의 진영으로 데려가게 만들었다. 기독교도인 유키나가는 자신의 신앙상 자살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사카이[堺]의 약종상(藥種商) 코니시 류우사[小西 隆佐]의 아들. 비젠[備前] 오카야마[岡山]에 있는 상인 가문의 양자가 되어 오카야마 성주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와 자주 만나게 되었다. 히데요시[秀吉]의 츄우고쿠 공략[中国攻略] 때 우키타 가문[宇喜多家]의 외교관으로 히데요시에게 접근, 그 재능을 인정받아 히데요시의 요청으로 히데요시를 섬기게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 후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와 함께 로쿠죠우 강변[六条河原]에서 참수되었다.

  1. 히데요시[秀吉]의 일생을 다룬 군기물 태합기(太閤記)에 나오는 이야기로, 이에 따르면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와 함께 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2. 이 당시는 아직 우키타 가문[宇喜多家]의 어용상인 아부라야[油屋]의 양자였는데, 유키나가의 뛰어난 능력을 눈여겨 본 우키나 나오이에[宇喜多 直家]가 히데요시로 보내는 사자로 유키나가를 보냄으로 히데요시와 만나게 되었다. 여기에는 당시 히데요시의 참모로 사카이[堺]의 유력자 중 하나였던 유키나가의 애비 코니시 류우사[小西 隆佐]의 존재도 영향을 끼쳤던 듯 하다. [본문으로]
  3. 이전까지 우키타 가문의 가신이었던 유키나가가 히데요시의 직신이 된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1581년 히데요시의 명령을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에게 전하는 역할을 맡았고 이 즈음 무로츠[室津]를 관리한 이 즈음부터가 아닐까 한다. 그후 히데요시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친 야마자키 전투[山崎の合戦] 후인 1582년 히데요시에게 세토 내해[瀬戸内海]의 쇼우도 섬[小豆島]의 관리권과 3000석의 녹봉을 받으며 수군의 장수로 세토 내해[瀬戸内海]를 장악하였다고 한다. 여담으로 루이스 프로이스는 이런 그를 '바다의 사령관'이라 표현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중간인 1585년 히데요시의 키이 정벌[紀伊征伐] 때의 공으로(기록으로는 패했다는 것만 있음 - 프로이스의 일본사) 3000석에서 1만석으로 봉록이 가증됨과 동시에 관리만 하던 쇼우도 섬[小豆島]를 영지로 받게 됨. 일설에는 10만석을 영유했다고도 함. [본문으로]
  5. 사실 처음에는 도움을 청하는 선교사들을 '내 사정도 있잖아~'하는 식으로 쫓아내거나 잠시동안 단교하였지만 오르간티노 신부에게 설득당하여 타카야마 우콘이나 기독교 신부들을 영지인 쇼우도 섬[小豆島]에 숨겼다고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