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와리[尾張]는 여덟 개의 군(郡)이다. 오와리 위쪽에 네 개의 군(郡)[각주:1]이 있어 이곳은 오다 이세노카미[織田 伊勢守][각주:2]가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다스리며 이와쿠라[岩倉]를 거성으로 하고 있었다. 오와리 반국(半国) 아래의 군(郡)도 네 개 군[각주:3]으로 오다 야마토노카미[織田 大和守][각주:4]가 다스리고 있었다. 위와 아래의 군(郡)은 강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오다 야마토노카미는 키요스[清洲]의 성에 부에이 님[武衛様][각주:5]을 모시며 보호하고 있었다. 오다 야마토노가미 휘하에 삼봉행(三奉行)이 있었는데 오다 이나바노카미[織田 因幡守], 오다 토우자에몬[織田 藤左衛門], 오다 단죠우노죠우[織田 弾正中] 세 봉행(奉行)이다.[각주:6]

이 중 단죠우노죠우는 오와리의 변방 쇼바타[勝幡]라는 곳에 거성을 두고 있었다. 사이간[西巌][각주:7], 겟간[月巌][각주:8] 그리고 지금의 당주 빈고노카미[備後守][각주:9]의 동생인 요지로우 님[與二郎殿][각주:10], 마고사부로우 님[孫三郎殿][각주:11], 시로우지로우 님[四郎二郎殿][각주:12], 우에몬노죠우[右衛門尉][각주:13]라고 있었다. 이 가문은 대대로 무명이 높은가문이다. 빈고노카미 님은 특히나 뛰어난 기량을 갖춘 사람으로, 여러 가문의 능력있는 사람들과 친교를 맺으며 아군으로 삼았다.

어느 때인가 빈고노카미가 오와리 가운데에 있는 나고야[那古野]에 오셔서는 견고한 요새를 만들도록 명하신 후 이 성에 후계자인 오다 킷포우시 님[織田 吉法師殿][각주:14]에게 머물게 하며 필두 가로(家老) 하야시 신고로우[林 新五郎][각주:15], 차석 가로 히라테 나카츠카사[平手中務][각주:16], 삼번 가로 아오야마 요소우에몬[青山 與三右衛門][각주:17], 사번 가로에 나이토우 쇼우스케[内藤 勝介]를 배치하였으며, 재정을 히라테 나카츠카사에게 담당시켰다. 킷포우시는 불편한 점이 많았지만 텐노우보우[天王坊][각주:18]라는 절에 공부하러 다녔다.

빈고노카미는 나고야의 성을 킷포우시에게 물려주고 아츠타[熱田] 근방 후루와타리[古渡]라는 곳에 새로이 성을 쌓고 거성으로 삼으셨다. 재정담당으로 야마다 야에몬[山田彌右衛門]을 임명했다.

  1. 하구리 군[葉栗郡], 니와 군[丹羽郡], 나가시마 군[長島郡], 카스가이 군[春日井郡]. [본문으로]
  2. 오와리[尾張] 상사군(上四郡)의 슈고다이[守護代] 가문. 이 당시의 당주는 오다 노부야스[織田 信康] [본문으로]
  3. 카이사이 군[海西郡], 카이토우 군[海東郡], 아이치 군[愛知郡], 치타 군[知多郡]. [본문으로]
  4. 오와리 하사군(下四郡)의 슈고다이[守護代] 가문. 이 당시 당주는 오다 타츠카츠[織田 達勝]로 추정되고 있다. [본문으로]
  5.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수상 격인 칸레이[管領]가 될 수 있는 세 가문[三管領] 중 필두인 시바 가문[斯波家]의 종가(宗家). 무로마치 막부 중기부터 시바 가문 종가의 당주는 지부다이후[治部大輔]->사효우에노스케[左兵衛佐]->사효우에노카미[左兵衛督] 순으로 승진하였기에, 효우에[兵衛]의 당명(唐名)인 부에이[武衛]로 칭해졌다. 이 글에서 지칭하는 인물은 시바 요시무네[斯波 義統]. [본문으로]
  6. 소위 '키요스 삼봉행[清洲三奉行]'. [본문으로]
  7. 노부나가의 증조부 오다 나가노부[織田 良信]의 법명. [본문으로]
  8. 노부나가의 조부 오다 노부사다[織田 信定]. 사족으로 이 오다 노부사다가 당시 오와리 제일의 상업도시였던 츠시마[津島]를 장악한 것이 단죠우노죠우 가문[弾正忠家] 비약의 초석이 되었다. [본문으로]
  9. 노부나가의 부친 오다 노부히데[織田 信秀] [본문으로]
  10. 요지로우는 '與(与)次郎'라고도 씀. 노부사다의 차남 오다 노부야스[織田 信康]. [본문으로]
  11. 노부히데 사후 세력이 약화된 노부나가를 도와 오와리 통일에 조력한 오다 노부미츠[織田 信光]. 노부사다의 삼남. [본문으로]
  12. 노부사다의 넷째 아들 오다 노부자네[織田 信実] [본문으로]
  13. 노부사다의 다섯째 아들 오다 노부츠구[織田 信次]. [본문으로]
  14.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본문으로]
  15. 하야시 히데사다[林 秀貞]. [본문으로]
  16. 히라테 마사히데[平手 政秀]. [본문으로]
  17. 아오야마 히데카츠[青山 秀勝]. 위키에서는 아오야마 노부마사[青山信昌]로 되어 있으나, 당시에는 아오야마 히데카츠[青山秀勝]라는 기록만 있다고 하니[谷口克広-織田信長家臣団辞典], 이 블로그에선 아오야마 히데카츠[青山秀勝]로 한다. [본문으로]
  18. 츠시마 신사[津島神社]. 우두천왕(牛頭天王)을 모셨기에 별칭이 텐노우 사[津島天王社]였다. [본문으로]

출처:  http://www.mofa.go.jp/mofaj/area/korea/visit/1112_pre/meeting.html 


2011년 12월 18일(일요일) 오전 9시 10분부터 약 한 시간,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총리대신은 쿄우토[京都]에서 방일 중인 이명박 한국 대통령과 일한 정상회담을 행하였으며, 개요는 다음과 같다(동석자 : 일본측부터 사이토우 츠요시[斎藤 勁] 내각관방 부장관 외, 한국측에서 신각수 주일본 대사, 천영우 외교안보 수석비서관 외). 본 회담은 10월 일한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셔틀외교’ 활성화의 실현이며, 양 정상은 17일 노다 총리 주최의 정상만찬에서 대통령의 71살의 생일 축하 및 41회째 결혼기념일(둘 다 12월 19일)을 축하하는 등을 통해서 개인적 신뢰관계를 더욱 강화하였다.

1. 일한관계

1. 노다 총리가 (1)일한 양국은 미국의 동맹국이며 기본적 가치,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와 번영의 확보 등의 이익을 공유하고 있다. (2) 대통령과의 개인적 신뢰관계, 활발한 양국 국민간의 교류도 포함한 것을 기초로 하여 다양한 계층에서 미래지향적인 일한관계를 구축해 간다. (3) 일본은 동일본대지진 때의 피해지의 청소년 교류를 통하여 일본재생에 관한 이해를 증진하는 ‘유대 강화 프로젝트[キズナ強化プロジェクト]’를 만들어 2013년 3월말까지 한국과 약 1300명 규모의 청소년교류를 실시하고자 한다는 뜻을 전했다. 이대통령은, 세계경제가 어둡고 불확실적이며, 지금은 북한과의 문제가 있는 때이기에 한일쌍방의 의사소통을 강화하고, 지역-세계의 관심사에 대비하여야 함이 다른 어느 때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뜻을 말했다.

2. 도서 인도에 관해서 노다 총리는, 인도가 종료된 도서를 일한우호의 증거로써 보존하고 싶다, 한국에 있는 일본에서 전해진 문서에 관한 접근이 개선됨에 따라 일한의 문화교류가 더욱 활발해 지기를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이대통령은 도서의 인도에 관한 노다 총리의 노력에 대해서 감사한다는 뜻을 전하고, 한국에 있는 일본에서 전해진 문서에 대한 접근이 개선될 것이라 본다는 뜻을 전했다.

3.  양 정상은 10월의 회담에서 합의한 ‘제2차 일한 신시대 공동연구 프로젝트’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환영하였고, 또한 양 정상은 ‘제3차 역사 공동연구 프로젝트’의 개시에 합의하였다.
[참고] 일한 역사공동연구 : 제1차 공동연구는 2001년에 발족하여 2005년에 보고서를 공표. 제2차 공동연구는 2005년에 발족하여 2010년 3월에 보고서를 공표. 제3차의 구체적 개시시기, 멤버 등에 관해서는 앞으로 조절한다.

4. 위안부문제에 관하여 이대통령에게서는, 이 문제가 해결되면 여러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된다. 이 문제해결을 위해서 진실된 용기가 필요하다는 등 위안부문제의 중요성을 말하며 그에 따른 대처를 요구하였다. 노다 총리는 이에 대해, 일본은 일관되며 명확한 법적 입장에 기초하여 일본의 입장은 알고 계시는 대로라는 뜻을 전한 뒤, 지금까지 일본은 인도적인 면에서 노력을 해왔으며 앞으로도 인도적인 견지에서 여러 고려를 하겠다고 전했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건설된 위안부 동상에 관해 노다 총리는 이대통령에게 동상의 건설은 유감스럽다며 조속한 철거를 요구하였다.

5. 노다 총리가 일한관계에는 일본측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도 포함하여 어려운 문제가 있지만, 일한관계 전체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대국적인 견지에서 협력하고 싶다, 셔틀외교를 자주 행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였으며, 이 대통령은 일한간에 여러 현안이 있지만 개인적 관계에 바탕한 대화를 행하고 싶다, 셔틀외교에 관해서도 자주 행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이번 초대에 감사하며, 쿄우토[京都]의 영빈관에는 감명을 받았다는 뜻을 전했다.
[참고] 2011년 12월 17일에 겐바 코우이치로우[玄葉 光一郎] 외무대신이 청와대의 천영우 외교안보수석비서관에게, 한국 국회의원의 독도방문이나 시설구축의 중지를 요구하였다.

6.  양 정상은 군사정보의 교환의 중요성에 대해서 의견교환을 하였다.

2. 일한EPA를 포함하여 일한경제관계 등

노다 총리가 – 일중한(日中韓)FTA산관학(産官學) 공동연구가 성공리에 종료, 일중한 투자협정교섭에 있어서 일한의 노력, 일한EPA교섭의 재개, 토우호쿠 지방[東北地方]의 부흥, 원자력안전 등에 대해서 말하였고, 이 대통령은 일본과 한국간 민간레벨에서의 교류가 많아졌으며 앞으로도 활발한 교류를 행하고 싶다는 뜻을 말했다.

3. 북조선문제

북조선문제에 관해서 양 정상은 북조선에 의한 우라늄 농축활동을 포함한 핵개발이나 미사일 문제에 대한 대처에 있어서 일한 및 미국이 긴밀히 연대하는 것, 남북대화, 미국과 북한 대화를 계속해서 실시하여 북조선의 구체적 활동에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최근의 동향은 일한미(日韓美) 3개국의 긴밀한 협력의 성과임에 일치하였다. 또한 노다 총리는 납치문제에 관한 한국측의 이해와 협력에 감사하며, 이대통령은 납치문제에 대한 한국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는 뜻을 표명하였다.

ps; 일본 외무성의 내용을 번역하였기에 원래 '한일'로 해야 하지만 '일한' 그대로 번역하였습니다.
ps2; 
일본 외무성의 내용을 번역하였기에 원래 '한중일'이나 '한미일'로 해야 하지만 '일중한', '일한미' 그대로 번역하였습니다. 
ps3; 조선일보의 "
[韓·日정상회담] 日 "동상(위안부 평화비) 철거해달라"… 韓 "이러면 제2·3 동상 나와기사도 함께 보심이 좋은 줄 아뢰옵니다.

 



오늘 19일(월요일) 오후 2시 50분 즈음부터 약 10분간, 노다 요시히코[野田 佳彦] 내각총리대신은 이명박 한국대통령과 전화로 회담하였으며, 개요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이명박 대통령에게서, 김정일 북조선국방위원장의 사거라는 긴급사태에 대해, 일한 정상 간에 긴밀히 연대할 필요가 있다, 돌발사태에 대비하여 정보를 면밀히 교환하며 긴밀하게 협력하고 싶다는 뜻의 발언이 있었습니다.

2. 이에 대하여 노다 총리는, 이번 사태가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악영향을 주지 않기를 기대한다는 뜻을 말한 뒤, 오늘 오후 개최된 안전보장회의에서 (1) 정보수집태세의 강화, (2) 한국을 포함한 관계국간 정보공유, (3) 불측의 사태에 대비하여 만전의 태세를 취하도록 지시하였다며 회의에서 나온 대략적인 내용에 대해서 설명하였습니다.

3. 추가로 양 정상은 다양한 정보수집이나 그런 정보를 공유함에 있어서 협력하며, 긴밀히 연대를 취할 것 및 앞으로도 필요에 따라 서로 연락을 취해가는 것에 의견이 일치하였습니다. 

ps; 일본 외무성의 내용을 번역하였기에 원래 '한일'로 해야 하지만 '일한' 그대로 번역하였습니다.
ps2; 일본 외무성의 내용을 번역하였기에 원래 '한반도'로 해야 하지만 '조선반도' 그대로 번역하였습니다.  

출처 : http://jbpress.ismedia.jp/articles/-/27869
저자 : 후쿠야마 타카시[福山 隆]
 

1.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의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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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Foreign Policy”지(10월 11일호)에 ‘앞으로 세계 정치는 아시아에서 결정된다.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에서가 아니다. 미국은 앞으로도 계속 사태 해결의 중심에 있을 것이다.”를 제목으로 하는 장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약간 필자의 사견을 더해서 요약하자면, 논지는 다음과 같다.

(1). 미국은 경제력 쇠퇴로 인하여 계속해서 ‘세계의 경찰관’을 완수하기에 충분한 전력을 유지할 수 없다.

따라서 앞으로는 중점지역을 정하여 일부에서는 과감히 철퇴하고, 특정지역에 전력을 집중시켜 배치할 필요가 잇다.

(2). 그렇다면 중점적으로 미국을 배치할 곳은 어디가 될까? 그것은 중국이 대두하고 미국의 경제적 이익도 큰 아시아-태평양 외에는 없다.

(3) 냉전 후 아시아에 있어서의 중점배치는 일본과 한국(합계 5만 명 이상의 미군을 배치)이었지만, 이를 재검토한다(일본의 전략적 기대치가 저하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4) 새로운 배치의 방향성은 다음과 같다.

  • 미군배치를 지리적으로 좀 더 널리(distributed), 그리고 항감성(抗堪性[각주:1])이 있으며, 정치적으로도 문제될 것이 적은(sustainable) 곳으로 한다.
  • 특히 남아시아, 인도양에서의 미군의 존재감을 강화한다. 오스트레일리아는 남아시아, 인도양을 컨트롤하기에 전략적으로 중요국가.
  • 근래에는 태평양과 인도양이 군사적으로도 하나의 연결성을 지니게 되었다. 싱가포르는 두 바다를 잇는 조임목(choke point)이기에 전략적으로 중요. 싱가포르에는 이미 연안방위용 함정을 배치했으며, 앞으로 공동작전도 검토한다.
  • 이와 같은 전략 상의 필요에 미군의 배치, 행동을 어떻게 맞추어 갈 수 있을 것인가? 현재의 배치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미군의 존재감을 더 널리 분포시킬 필요가 있으며, 그를 위해 동맹국, 파트너 국가를 늘려간다.

 

2. 종래 미군 배치의 개요.

냉전 동안 미군은 소련을 봉쇄하기 위한 체제 – 전방전개 전략(前方展開戰略) – 에 기준을 두고 배치되어 왔다. 따라서 1991년 소련 붕괴 후 미국은 세계전략의 재검토를 해야만 했다.

미군의 전개상태의 재검토를 의미하는 GPR(Global Posture Review)은 해외주둔 미군의 체제를 근본에서부터 재검토한 것으로, QDR2001(2001년에 공표. 4년마다 국방정책을 재검토)에서 선언된 후 2003년 11월부터 정식으로 개시되었다.

그 기준구상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공산권 국가를 봉쇄하기 위해 그 주변에 배치했던 미군병력은 구시대 방식.
(2) 사단(약 2만 명)이 아닌 여단(약 4000명)을 전투단위로 하며 소형경량의 부대를 급속히 전개할 수 있게 한다.
(3)  IT를 전면적으로 활용하여 정보수집과 명중 정밀도를 비약적으로 향상시키고 헤비 웨폰을 줄인다.
(4) 테러 활동과 대량파괴병기의 확산은 미국에 대한 위협이기에, 그에 대한 대응에 역점을 둔다.

이 기본구상은 소련 붕괴 후의 미국이 상대적으로 돌출된 군사력을 보유하여, 세계의 경찰관으로 전세계에 관여한다 – 는 전제가 되었다.

참고로 이 일환으로 일본에서도, (1) 오키나와[沖縄]의 제3해병 원정군사령부, 제3해병사단 등 8000명을 괌으로 이전, (2)주한미군인 제8군사령부를 폐지하는 대신에 소형(약 300명)의 제1군단사령부를 미 워싱턴에서 카나가와 현[神奈川県]의 자마[座間]로 이전 – 이 발표되었다.

3. 미국과 미군에 있어 새로운 정세의 출현

그러나 QDR2001이 책정될 시기에 비하여, 미국과 미군의 전략환경은 다음과 같이 커다란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1) 일본의 몰락

일본이 경제적으로 몰락하고 있다. 이번 동일본대지진은 일본의 몰락을 가속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민주당정권이 출현하여, 지금까지의 자민당 만큼 미국의 뜻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일본을 「태평양의 요석(Key Stone of the Pacific)」이라는 위치에 놓고 중요시해 왔지만, 앞으로 일본을 미국전략에 활용할 계산을 세우기 어려워지고 있다.

(2) 중국의 대두와 군사적 위협의 현저화

당초 미국의 對중국정책은 ‘헷지(hedge)’와 ‘인게이지먼트(engagement)[각주:2]’ 정책에 양다리를 걸친 것이었다.

‘헷지’라는 것은 종래, 중국이 미국의 패권에 도전할 때에는 언제라도 중국을 군사력으로 제압 혹은 봉쇄할 수 있는 체제 작성을 지칭한다.

‘인게이지먼트’정책이란 공산당 독재국가인 중국을 미국과 같은 스탠다드로 서서히 바꾸기 위해 중국과 관련성을 갖는 것으로, 경제, 사회, 인권기준 등을 미국 수준으로 맞추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미국은 중국이 항공모함 건조를 강행하고, 미국 항공모함 투입을 저지하기 위해 대함탄도 미사일 개발을 서두르는 등 현저히 군비확장에 우려를 표하며 ‘헷지’정책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3) 미국의 쇠퇴

원인이 어찌되었건 미국의 경제는 ‘세계의 경찰관’이라는 역할을 맡을 정도의 여력을 잃어가고 있다. 앞으로 10년간 국방예산을 최대 6000억 달러 삭감할 예정으로 육군, 해병대 최대 약 20만 명, 해군함정 최대 60척, 공군 전투기 최대 486대를 없애려 한다는 보도도 있다.

(4) 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철군

10월 21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라크 주둔 미군부대를 연말까지 전면철퇴 시킨다고 발표하였다. 또한 6월에는 약 10만 명의 규모인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을 7월부터 부분 철퇴하여 2012년 여름까지 약 3만3000명을 철수시키려는 계획을 발표했다.

아프가니스탄 주둔 비용은 지금까지 4400억 달러에 달하여 미국 재정에 무거운 부담이 되어 있으며, 남은 부대도 조기철퇴를 할 수 밖에 없을 거라 여겨진다.

이라크-아프가니스탄 부대의 철퇴는 이어지는 미국의 세계전략책정을 서두르게 만드는 스위치가 될 것이다.
 

4. 새로운 미군전략의 골격과 특징.

(1) 미국의 기본 스탠스 – 팍스 아메리카나에 대한 미련

미국이 초대국의 지위에서 내려오는 것을 납득할까? 펜타곤이나 국무성 등의 전략책정 담당자들은 신전략을 검토함에 앞서, 현실적으로 이제 미국이 팍스 아메리카나를 유지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여전히 과거의 영광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종래의 수법처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 일본의 지원을 받으며 팍스 아메리카나를 유지하는 것에 노력하겠지만, 얼마 안가 단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의 신전략을 책정하기 위해서, 자국의 현재 상황 – 초대국인지, 대국 중 하나의 나라에 지나지 않는지 – 를 객관적으로 평가, 인식하는 것이 ‘앞으로 나가야 할 전략’을 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니까.

말을 바꾸자면, (1) 지금과 같이 세계 패권의 유지를 목표로 한다. (2) 세계 패권의 유지를 단념하고 아시아 패권의 유지만을 최우선적 목표로 삼을 것인지 - 라는 것이다.

2014년에 발표될 예정인 다음 QDR에서 미국이 자국의 입장을 어떻게 인식하여 기술할지 주목된다.

(2) 미국의 이용해야 할 중국의 아킬레스건

중국은 자원을 해외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 더구나 히말라야, 신장위구르 자치구나 몽골을 경유하여 내륙정면에서 물자를 반출, 반입하는 양이 한정적이기에, 역시 주요한 무역은 해양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해양 상의 중국 생명선(sea-lane)은 세 곳 있다.

제1의 루트는 믈라카 해협에서 인도양 경유로 중근동-아프리카에 이르는 것.

제2의 루트는 파푸아뉴기니 주변을 통과하여 오스트레일리아나 남미에 이르는 것. 참고로 이 루트는 대동아전쟁 때 일본(제국육해군)이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를 분단시키기 위해 실시한 ‘SF작전’의 방향과 같다.

‘SF작전’은 피지, 사모아 및 누벨칼레도니를 점령함에 따라, 남방전선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위협을 배제함과 동시에 미국(하와이 제도)과 오스트레일리아 사이의 시레인을 분단시킴으로 오스트레일리아를 고립시켜, 오스트레일리아를 영연방에서 탈락시키는 것을 노린 작전이었다.

제3의 루트는 류큐 제도[琉球諸島]에서 북미에 이르는 것.

제1의 루트의 조임목(choke point)은 믈라카 해협. 제2의 루트의 조임목은 파푸아뉴기니-마셜 제도-솔로몬 제도 등의 주변해역. 제3의 루트의 조임목은 오키나와[沖縄]-미야코 섬[宮古島]이 아닐까?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File:Ryukyu_map.jpg

미국은 중국과의 유사시에 상기의 초크포인트를 점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라 여겨진다.

(3) 새로운 배치를 하기 위한 고려요건

중국은 ‘Anti-Access(접근저지) / Area-Denial(영역거부) :A2AD’라는 해양전략을 내세우고 있다.

이 전략은 멀리에서 오는 적을 방위선 안에 침입시키지 못하게 하고(접급저지), 방위선을 돌파 당하여도 그 안쪽에서 적에게 자유로운 행동을 허용하지 않는(영역거부)라는 콘셉트이다.

추가하자면 중국은 이 방위선내에 존재하는 기존 미군기지에 대해서, 미국의 전투기가 기지에서 이륙하기 전에 탄도 미사일로 적 기지(일본 주둔 미군기지)의 활주로 등을 선제 공격하는 군사독트린을 새로 세웠다고도 보도되었다.(6월20일자 요미우리 신문).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이 각 전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하의 요소가 중요해 진다.

(i) 중국과의 거리를 종래 이상으로 떨어져 탄도 미사일의 사정 밖(약 1850km라 추정)으로 나오는 것이 바람직하며, 미사일의 기습공격에 대처(미사일 요격 미사일 등)할 수 있도록 한다.

(ii) 광역으로 분산할 것.

(iii) 미사일에서 피해를 국한시키기 위해 항감성(抗堪性) 강화나 활주로의 피해복구 능력을 강화

(4) 중시지역

상기 (2)의 분석과 같이 앞으로 미국은 오스트레일리아와 태평양 제도(파푸아뉴기니, 마셜 제도, 솔로몬 제도 등)을 종래 이상으로 중시하여 군사적 배치를 강화할 것이다.

특히 오스트레일리아는 상기의 3루트를 전부 장악(대처)할 수 있는 위치이며, 앞으로 오스트레일리아의 전략적 가치는 미국에게 있어 굉장히 중요한 것이 될 것이다.

(5) 이중포위망의 형성

중국은 태평양 정면으로의 진출목표선으로서, 제1열도선(列島線=큐우슈우[九州]를 기점으로 오키나와, 대만(台湾), 필리핀, 보르네오 섬에 이르는 라인) 및 제2열도선(이즈 제도[伊豆諸島]를 기점으로 오가사와라 제도[小笠原諸島], 괌-사이판, 파푸아뉴기니에 이르는 라인)을 목표로 하고 있다.

미국은 앞으로 이에 대항하여, 종래의 일본-한국-대만-필리핀의 라인에 더해, 괌-마셜제도-솔로몬제도-오스트레일리아를 잇는 또 하나의 방위라인을 만들어, 중국을 이중으로 봉쇄하는 새로운 배치(new transformation)를 구성할 것이라 예상된다.

장래 미국이 전력 삭감을 큰 폭으로 하고, 중국의 상대적 전력이 제1열도선 부근에서 열세가 된 것을 인정할 경우, 제1열도선의 방위를 폐기하고, 괌-마셜제도-솔로몬제도-오스트레일리아를 잇는 또 하나의 방위라인까지 후퇴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이는 일본이 미국의 방위선에서 버림받는 것을 의미한다.

(6) 군사 인프라 건설을 위한 재정 조치

앞으로는 오키나와의 제3해병 원정군사령부, 제3해병사단 등 8000명을 괌으로 이전할 때처럼 일본이 재정부담을 해주는 듯한 ‘좋은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미군의 새로운 전개기지는 관계국에 있는 기존 군사기지 외에 민간시설(공항, 항구)를 최대한 활용하는 방침이 될 것이다.
 

5. 결언 – 일본에 미치는 영향

지금까지 일본은 미국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전략기반이었다. 그 이유는 (1) (냉전시대) 소련 극동군을 봉쇄하기 위한 거점. (2) 인도양이나 중동까지도 전개하는 미군에게 기지 기능의 제공. (3)재정적인 지원 등

그러나 근래 경제적으로 피폐해지고 있는 일본은 장래 재정적인 면에서 그다지 큰 공헌을 하기에는 기대할 수 없게 되고 있다. 미국은 일본을 더 이상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중국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일본에 주둔하는 미군기지는 서서히 중국의 탄도미사일 등의 위협에 노출되게 될 것이다. 더욱이 자민당 정권에 비하여 민주당 정권은 컨트롤하기 어렵다.

가까운 장래 미국은 일본의 전략적 가치를 지금처럼 ‘요석’이라고 여기지 않게 될 것이다. 그 결과로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생각할 수 있다.

제1시나리오 : 미국은 미일안보를 유지하기는 하겠지만 그 신뢰성은 속 빈 강정이 될 것이다.
제2시나리오 : 미국은 일방적으로 미일안보를 폐기한다.
제3시나리오 : 미국은 미일안보조약을 쌍무조약으로 개정할 것을 강요할 것이다.

2차대전 이후 60년 이상에 걸쳐 일본의 평화와 번영의 기반이 되어 온 미일안보체제가  현재 중대한 기로의 앞에 놓여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일본은 전후 체제의 코페르니쿠스 적인 전환의 시기를 맞이할 지도 모른다.

또한 일본정부에게 있어 긴요한 과제인 해병대를 후텐마[普天間]에서 괌으로 옮기는 계획에 대해서 미국정부는 상기와 같은 의도에서 백지로 돌려, 새로운 재배치의 전체 계획을 책정한 후에 일본주둔미군의 재배치를 새로이 정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10월25일. 노다 요시히코[野田 佳彦] 총리와 회담한 레온. E. 파네타 국방장관은 지금까지 주장해온 것처럼 헤노코[辺野古]로의 이설을 주장했다. 이는 “어차피 이설의 가능성이 낮으니, 일본정부에 은혜를 만들어 둘 심산”이라 보아야 할 지도 모른다.

반세기 이상 이어온 전후체제를 어떻게 바꾸면 좋은 것일까? 일본국민은 안전보장과 번영의 길 – 생존의 길 – 에 대하여 진지한 토론을 나누지 않으면 안 될 중대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1. 군사기지나 레이더 기지에 적의 공격을 받더라도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 [본문으로]
  2. 적과의 대화. NYT선정 2009년도 오바마 정부 올해의 단어...라고 함. [본문으로]

 천하의 분수령이 대전투의 승패를 배반이라는 행위로 결정짓게 한 인물 – 때문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는 ‘사상 최대의 배반자’라는 오명을 역사에 남기고 있다.

 히데아키는 히데요시[秀吉]의 부인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의 오빠 키노시타 이에사다[木下 家定]의 아들[각주:1]로 태어났지만, 히데요시 부부에게 자식이 없었기에 양자가 되어 키타노만도코로의 손에 키워졌다. 이 즈음에는 히데토시[秀俊]라는 이름을 썼다.

 1588년. 히데요시는 쥬라쿠테이[聚楽第]에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 天皇]의 행행(行幸)을 주청하여 성사시켰는데, 7살의 히데아키도 이 영광스런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이 즈음 히데아키는 히데요시의 후계자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각주:2] 하지만 다음 해인 1589년에 히데요시의 애첩 요도도노[淀殿]가 남자아이를 낳았다. 이때부터 히데아키의 운명은 어긋나기 시작한다.

 히데요시는 이 첫 아들에게 츠루마츠[鶴松]라는 이름이 지어주었다. 하지만 이 아이는 불과 3년을 살았을 뿐이었다. 히데요시는 츠루마츠 사망이라는 충격을 잊으려는 듯 조선 침략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히데아키도 또한 히데요시의 총애를 되찾은 듯이 보였다. 그러나 조선 침략이 한창이던 1593년, 요도도노는 또다시 남자아이(히데요리[秀頼])를 낳았기에 히데요시의 히데요리에 대한 눈먼 사랑이 시작되어, 우선 관백(関白)인 히데츠구[秀次]를 실각시켰다. 히데아키의 신분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는 히데요시의 의중을 헤아려, 히데아키를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양자로 들여보내는데 성공하였다.[각주:3]

 정유재란 때 히데아키는 일군의 대장으로 출진하였다.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의 농성으로 유명한 울산성(蔚山城)에 대규모 구원군을 이끌고 갔을 때의 일이었다. 도망치는 명나라 군사를 쫓아 총대장인 히데아키가 직접 창을 꼬나 쥐고 휘두르며 짐승을 쫓는 사냥꾼처럼 학살하고 다녔다고 한다. 대장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행위였다.

 다음 해인 1598년. 돌연 히데아키는 귀국 명령을 받았다. 히데아키는 득의만만한 얼굴로 히데요시에게 출두하였다. 필시 조선에서의 활약에 대한 칭찬해 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히데아키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것은 의외로 조선에서의 경거망동을 질타하는 히데요시의 노호였다. 히데요시는 “네 녀석과 같은 놈을 대장으로 삼다니 내 눈이 삐었구나”라고 까지 말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북부 큐우슈우[九州] 33만 6천 석을 삭감하여, 에치젠[越前] 15만석의 이봉이라는 가혹한 결정까지 내렸다.
 히데아키는 이 사태가 모두 군감(軍監)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참언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라고 골똘히 생각한 끝에 결론 내렸다. 하지만 지금은 뾰족한 수도 없었다.

 이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준 것이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였다. 온화한 얼굴로 히데아키의 불평을 들어주고서는, 히데요시에게도 가 히데요시의 분노가 풀리도록 노력하였다.

 1598년 8월. 히데요시가 죽었다. 이에야스의 조처로 감봉에 따른 이봉을 피한 히데아키의 처우도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해 흐지부지해졌다. 히데요시 사후 천하를 쥐고자 계획하고 있던 이에야스는 이러한 히데아키에게 은혜를 입힌 형태가 되었다.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히데아키가 배반한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의 결전 당일, 마츠오 산[松尾山]에 진을 치고 있던 히데아키는 시간이 흘러도 어느 편인지 확실히 나타내지를 않고 지켜만 보았다. 애간장이 탄 이에야스는 철포대에게 명령하여 히데아키의 배반을 재촉하는 철포를 쏘게 하였다. 이때서야 비로서 히데아키는 병사들을 움직여 서군의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부대를 공격한 것이다. 알려진 대로 이것이 세키가하라의 승패를 갈랐다.[각주:4]

세키가하라 포진도. 왼쪽 중간 마츠오 산[松尾山]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부대가 진을 치고 있다.

 싸움이 끝난 후 히데아키는 세키가하라 때 서군을 배반한 공적으로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에 51만석을 하사 받아 오카야마 성[岡山城]의 성주가 되었지만, 2년 뒤인 1602년에 21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계속 배반자라는 비난을 받아 정신이 병들었다던가,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망령에 괴롭힘을 받아 미쳤다는 등 여러 가지가 전해진다.

츠키오카 요시토시[月岡芳年]의 괴제백선상(魁題百撰相)에 나오는 금오중납언(金吾中納言) 히데아키[秀秋]에게 원령(怨霊)이 되어 나타난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1582년 오우미[近江] 나가하마 성[長浜城]의 성 밑 마을에서 태어났다. 1584년 히데요시[秀吉]의 양자가 된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5]에 출진. 이때 미노[美濃] 오오가키 성[大垣城]의 성주로 관직은 쇼우쇼우[少将]였다. 이어서 우코노에츄우죠우[右近衛中将], 산기[参議]
[각주:6] 겸 곤츄우나곤[権中納言]으로 이례적인 스피드로 승직하였다. 1594년에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양자가 되었다.

  1. 이에사다의 다섯 번째 아들. [본문으로]
  2. 이때 다른 거대 다이묘우[大大名]는 텐노우[天皇] 나아가서는 텐노우의 대리인인 히데요시에게 대들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였는데, 다이묘우들이 서약한 대상이 히데아키였다. [본문으로]
  3. 히데츠구의 실각이 나중(1595년)이며, 히데아키가 코바야카와 가문에 양자로 간 것은 1594년의 일. [본문으로]
  4. 지금까지는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 때 히데아키가 서군이었다는 시각이었으나(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기 전 히데아키가 동군이 지키고 있던 후시미 성[伏見城] 공격군의 총대장이었던 것도 있어), 근래에 들어서는 동군으로 참전했다는 시각도 있다. 정황증거로 마츠오 산에 진을 치고 있던 서군 이토우 모리마사[伊藤 盛正]를 쫓아내고 차지한 점, 이후 행해진 서군 군의(軍議)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점, 말단인 시마즈의 사츠마 병사들 역시 히데아키를 동군으로 보고 있었다는 점 등이 있다. 그런 동군으로 참가한 히데아키가 참전을 주저했던 것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내건 당근인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가 성인이 될 때까지 관백(関白)직과 킨키[近畿] 근방에 2개국 가증에 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5.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6. 1590~92년 사이의 관직이라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