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음력으로 9월 15일[각주:1]이 되면 카고시마 현[鹿児島県] 히오키 군[日置郡] 이쥬우인 정[伊集院町]이 시간여행의 무대라도 된 듯 센고쿠 시대처럼 갑주를 몸에 걸친 무사들이 오며 “체스토! 세키가하키라”를 외치면서 행진한다.
 ‘체스토[チェスト]’라는 것은 카고시마 방언으로 ‘
치쿠쇼우[畜生]’라는 의미이며 화 났을 때나 분노했을 때 표현하는 단어이다.
이 행사를 ‘묘우엔 사 참배[妙円寺詣り]’라고 하며, 9월 15일에 행해지는 것은 1600년 9월 15일[각주:2]에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에서의 패전을 잊지 않기 위함이라고 한다. 묘우엔 사[妙円寺]는 시마즈 군[島津軍]의 대장이었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의 위패를 안치한 절이다.[각주:3]

                                                                [묘우엔 사 참배[妙円寺詣り]]

  시마즈 요시히로는 세키가하라의 패장이다. 그러나 요시히로가 세키가하라 전쟁터에서 보여준 모습에 패자의 비참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그러기는커녕 당시 요시히로의 후퇴는 ‘시마즈의 전진철수[島津の背進]’라 칭송 받으며 무명(武名)을 높였다. 요시히로의 무명(武名)은 시마즈의 큐우슈우[九州] 제압 때부터 유명했지만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조선에서의 활약과 세키가하라 전투이다.

 우선 조선에서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상대방인 명나라 측에 ‘석만자(石曼子)’로 계속 기억될 정도의 활약을 보여주었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598년 가을. 요시히로는 사천(泗川)의 성에 7천의 병사를 이끌고 농성하고 있었다. 사천성(泗川城)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가 지키는 울산성(蔚山城),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가 지키는 순천성(順川城)과 함께 명나라 군이 ‘왜의 세 소굴(倭之三窟)’이라 부르며 최대의 공격목표로 삼은 곳이었다.

 10월 1일, 명나라 군 20만[각주:4]은 사천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요시히로는 명나라 군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상대를 충분히 끌어들이는 작전이었다. 명나라 군은 의심 없이 성벽에 달라붙었다. 알맞은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요시히로는 총공격을 명했다. 시마즈 군의 철포가 굉음을 내며 일제히 불을 뿜었다. 더구나 미리 숨겨놓았던 화약통을 저격하여 대폭발 시킨 것이다.[각주:5] 명나라 군은 혼란에 빠졌다. 그런 명나라 군에 시마즈 군이 돌격하였다. 혼란에 빠져 도망치려던 명나라의 피해는 굉장히 컸다. 기록에는 시마즈 군이 이 일전에서 벤 목은 3만8천7백여[각주:6]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각주:7]
 
요시히로 스스로도 “명예를 중국, 일본에 드높였다”고 할 정도로 이 사천의 대승리를 자랑스러워 하였다. 더구나 이 승리의 영향은 커 울산, 순천의 두 성을 포위하고 있던 명나라 군도 사천에서의 패전소식을 듣고 철퇴한 것이다.

 또한 임진왜란에서 요시히로는 벤 적의 목들 대신 코를 베어 히데요시에게 보내어 공적의 증거로 삼았다고 한다. 또한 히데요시에게 몸보신하라며 호랑이의 머리, 고기, 내장 등을 소금에 절여 보내거나 하였다.

 어쨌든 요시히로가 특출한 장수의 그릇이며 또한 개인적으로도 무예, 무용이 뛰어났다는 것은, 이 조선에서의 전쟁에서 “스스로도 칼로 공적을 세웠다” – 즉 스스로도 칼을 휘두르며 싸웠다는 것에서도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요시히로도 또한 조부 짓신사이 타타요시[日新斎 忠良][각주:8] 이래 시마즈 가문[島津家]의 전통에 따라 아군, 적군 구별 없이 전사자의 공양에 힘썼다는 것에 있다. 현재 와카야마 현[和歌山県] 코우야 산[高野山]에 있는 “조선진공양비(朝鮮陣供養碑)”가 그것이다.

 참고로 요시히로의 조부 타다요시[島津 忠良]는 시마즈 가문의 중흥의 시조로 유교, 불교, 신도(神道)에 밝은 학자이며 실천자였다. 1583년 사츠마[薩摩] 카세다 성[加世田城]을 공략한 타다요시는 당시 경험한 종교적 체험으로 인해 전사자는 모두 부처라 깨닫고는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극진히 공양하였고, 이 전통은 아들인 타카히사[貴久][각주:9] 그리고 타카히사의 아들인 요시히사[義久], 요시히로에게로 이어진 것이다.

 어쨌든 1600년 9월 15일 – 세키가하라 전투 당일의 일이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300기(騎), 총 1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부대의 오른 편에 진을 쳤다.[각주:10] 그 시마즈의 우측에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본진이 있었다.
 오전 8시[각주:11]. 전투가 시작되었다. 서군 중에서 주력으로 싸운 것은 이시다, 코니시, 우키타의 부대였다. 요시히로는 어째서인지 병사 한 명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이시다 측의 사자[각주:12]가 싸워달라고 부탁하여도, 말투가 싸가지 없다
[각주:13] 쫓아내는 식이었다.[각주:14] 결국 미츠나리 자신이 직접 움직여달라고 요청하러 왔다. 그러자 요시히로[각주:15]는, “오늘 전투는 각 부대가 스스로의 힘을 다하여 싸울 뿐이외다. 승패는 하늘이 정할 터” 라고 하며 더 이상 대화도 하려 하지 않았다.

 사실 요시히로는 당초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뜻을 같이하고, 이에야스의 아이즈 정벌[会津征伐] 때 후시미 성[伏見城]의 수비를 담당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미츠나리가 거병하자 농성군 주장인 토리이 모토타다[鳥居 元忠]가 요시히로의 입성을 거부한 것이다.[각주:16] 요시히로는 미츠나리의 세력범위의 한 가운데 남겨진 꼴이 되어 어쩔 수 없이 방침을 180도 전환하여 서군에 속하게 된 것이었다.[각주:17]

 정오가 조금 지났을 즈음,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전황 [각주:18] [각주:19]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배신으로 인해 서군이 급격히 무너졌다. 요시히로는 그래도 싸우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군이 붕괴하자 동군은 요시히로의 진영으로 밀물처럼 다가왔다.

 이때가 되자 요시히로는 처음으로 싸우려 결심하였다. 그러나 전황은 이제 싸우다 죽는 것 외에 없는 듯 했다. 그러나 전투에서 대장이 싸우다 적의 손에 죽는 것은 예부터 사츠마 군[薩摩軍]이 가장 부끄러워하는 것이었다. 요시히로 주종은 사력을 다하여 전쟁터에서 탈출을 꾀하려 하였다. 퇴로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동군의 후방에 있는 ‘이세로[伊勢路]’뿐이었다. 요시히로 이하 300기(騎)는 기치(旗幟)를 버리고, 부대표식[馬標]을 부러뜨린 뒤 전군 일환이 되어 고함을 지르며 동군의 한가운데로 돌진하였다.

 동군은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의 부대가 시마즈 군을 포위하면서 공격해 왔다. 요시히로의 조카 토요히사[豊久][각주:20]가 요시히로의 진바오리[陣羽織][각주:21]를 입고 요시히로의 영무자가 되어 전사, 이어서 쵸우쥬인 세이쥰[長寿院 盛淳]이 “내가 바로 시마즈 요시히로다”고 외치며 동군의 주의를 끌다 격전 끝에 전사하였다. 그들 외의 다른 병사들도 길 위에 각각 앉아 총을 쏘는 “좌선진(座禪陣)”이라는 진형을 취해 추격해오는 동군을 저지하였다. (대충 이런 식으로 빠져나간 듯(링크))

 이러한 휘하의 용감한 싸움 덕분에 요시히로는 구사일생하여 이세로[伊勢路]로 빠져나간 것이다. 이때 당초 300기였던 무사는 80기로 줄어있었다.[각주:22]
 
이 요시히로 주종의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탈출 전투는 장렬히 싸운 모습으로 인해 패주라는 인상을 전혀 주지 않고 반대로 크게 무명을 드높이는 결과가 되었다.

 그 후, 종전처리는 형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가 중심이 되어 뻐팅김과 끈질긴 외교를 전개하여 2년 뒤, 요시히로의 무죄와 시마즈 가문의 본령이 안도를 쟁취하게 된다. 그러나 요시히로는 은거의 몸이 된다.
 이때부터 요시히로는 시마즈 가문을 이은 아들 타다츠네[忠恒=이에히사[家久]][각주:23]에게 치세의 마음가짐 등을 가르쳤다. 화려함과 문약(文弱)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말년에 저술한 한문체의 자서전에 그러한 정치철학을 담았다.
 “예부터 내려오는 전통을 무시하고 단지 일신의 능력만을 믿고 세상을 살아가려는 자는 곧 멸망해 버리지만, 우리 시마즈 가문은 대대로 신불(神佛)을 우러르며, 선조를 공경하였다. 학문을 갈고 닦으며 번영해 오늘에 이르렀다. 그렇기에 앞으로 우리 가문을 잇는 자는 더욱 이 전통을 지켜나가야만 한다”
 라는 것이었다. 또한 나중에는 “쿄우[京]의 말투를 쓰거나 다른 지역[国]을 따라 한다면 사츠마는 멸망한다”고까지 말했다.

 요시히로는 굉장히 건강했다. 세키가하라에서 장거리 도피행에 이어 귀국했을 때가 66세였다. 그리고 1607년 이때 나이 73세였다. 이해에 전 관백[前関白] 코노에 사키히사[近衛 前久]가 보내온 편지에,
 “귀공은 여전히 천하에 그 무명을 떨치고 있으면서도, 여기까지 들려오는 바에 따르면 지금도 여자들에게 하자고 조른다는 말을 들었소이다. 스스로 무명을 깎아 내리는 일이 아니오?”
 라고 놀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요시히로도 차츰 쇠약해져 곧이어 식사하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늙어갔다. 그래도 이 노웅(老雄)에게 식사하도록 만드는 방법이 하나 있었다. 밥상을 준비하고는 측근들이 큰 소리로 전쟁터의 함성을 지르며 “적이 다가왔습니다. 어서 식사를 하시고는 적에 대비하십시오”라고 말하면, 그 순간만은 요시히로도 정신이 돌아와 혼자서 밥을 먹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85년의 생애에서 수많은 격전을 쌓아 온 무인의 면목이 드러나는 일화이다.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
1535년생. 형 요시히사[義久], 동생 토시히사[歳久], 이에히사[家久]와 함께 ‘시마즈 사형제[島津四兄弟]’[각주:24]로 용명을 떨쳤다. 1587년 히데요시의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각주:25]사츠마[薩摩], 오오스미[大隅], 휴우가[日向]의 시마즈의 본령(本領) 중 오오스미를 히데요시에게 영유를 인정받았다.[각주:26] 임진왜란-정유재란을 통해 용명을 떨쳐, 그 공적으로 총 69만9천석이 된다[각주:27] .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에서 패하지만, 패장인 채 그대로 영지를 인정받은 것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1619년 죽었다. 85세.

  1. 지금은 참가하기 쉽게 10월 넷째 주 일요일 날 행해진다고 함. [본문으로]
  2. 서력으로는 10월 21일. [본문으로]
  3. 그러나 지금은 토쿠시게 신사[徳重神社]에서 행해지고 있다고 한다.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가 망하고 들어선 메이지 정부[明治政府] 초기 불교탄압과 신도 일원화를 위한 폐불훼석(廃仏毀釈) 때 사라진 묘우엔 사[妙円寺]가 있던 자리에 대신해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를 받드는 토쿠시게 신사[徳重神社]가 세워진 후에는 "「토쿠시게 ‘신사’」에서 「묘우엔 ‘사’ 참배」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조선측 기록에서는 약 3만 9천. [본문으로]
  5. 선조실록[선조 105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0월 8일(경신) 7번째기사 군문 도감이 동 제독이 후퇴하였다고 아뢰다]에 따르면 모국기의 진영에서 취급주의로 인하여 폭발이 있었던 듯. [본문으로]
  6. 「시마즈가문 문서[島津家文書]」의 주장. [본문으로]
  7. 사족으로 일본 측에서 전쟁 중이나 후에 가증을 받은 가문은 없지만 시마즈 가문은 이때의 공적을 인정받아, 요시히로의 아들 타다츠네[忠恒]가 종사위하(従四位下) 사코노에쇼우쇼우左[近衛少将]로 임관됨과 동시에 5만석의 가증을 받게 된다. [본문으로]
  8. 짓신사이[日新斎]는 33살에 은거 후 불문에 들어가면서 칭한 호칭. [본문으로]
  9. 요시히로의 아비. [본문으로]
  10. 근래의 주장으로는, 이 자리 즉 미츠나리 진영의 우측에는 시마즈 토요히사[島津 豊久]가 있었으며, 요시히로는 미츠나리 진영 후방에 있었다는 듯. [본문으로]
  11. 오전 10시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12. 야소지마 스케사에몬[八十島 助左衛門]. 임진왜란 때부터 미츠나리가 시마즈 측에 자주 사자로 보내던 인물이었기에 시마즈 측의 면면들과도 안면이 있었다고 한다. 사족으로 히데요시가 죽었을 때 미츠나리의 사자가 되어 토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히데요시의 죽음을 알린 것도 이 야소지마 스케사에몬이었다. [본문으로]
  13. 말투라기 보다는 야소지마가 급하다며 말 위에서 출격을 부탁한 것이 당시 예의나 군법에 어긋났기에, 사츠마의 병사들이 욕하며 죽인다고 난리를 쳤다. 오히려 야소지마와 안면이 있었던 상급지휘관들이 말리는 일면이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4. 사족으로 야소지마 스케사에몬은 이에 대한 일건을 미츠나리에게 보고한 뒤 본진을 빠져나와 전쟁터에서 도망쳤다. 세키가하라 후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에게 취직하여 500석, 후에 타카토라에게 인정받아 타카토라의 문서담당관[右筆]이 되어 1000석을 받게 된다. [본문으로]
  15. 요시히로가 아닌 시마즈 토요히사[島津 豊久]와의 대화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16. 이에야스[家康]는 상경을 거부하며 불온한 움직임을 행하고 있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처벌하기 위해 아이즈[会津]로 향하면서 요시히로에게 후시미 성[伏見城]에 입성하여 지켜줄 것을 명령하였으나, 구두로만 전했을 뿐 문서로 남기지 않았기에 모토타다는 요시히로를 믿지 못하였다고 한다. 다른 시각으로 보면 당시 후시미 성을 지키던 군세는 전부 이에야스 휘하의 군세였던 만큼 이질적인 사츠마의 군세가 들어왔을 시 명령계통과 통일적인 움직임에 균열이 생길까 하여 모토타다가 거부하였을 수도 있다 [본문으로]
  17. 요시히로의 사츠마 군세가 이런 것을 포함하여 여러 이유로 세키가하라 때 싸우려 하지 않았다는 시각이 현재도 주류이지만, 카고시마[鹿児島] 출신으로 사츠마[薩摩] 관련 전문가인 키리노 사쿠진[桐野 作人]씨는 이때 사츠마의 군세가 방관이나 눈치보기를 했다기 보다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주장한다. 즉 야소지마의 일건과 이시다 미츠나리의 내방 사이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배반이 일어나 서군이 무너지는 시점이었기에, 미츠나리의 요청으로 군을 움직인다고 하여도 사츠마 1500명의 군세로는 전국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츠마 측 참전인물들의 회고록에 따르면 오히려 전투 초반 요시히로는 활발히 미츠나리의 진영에 사자를 보내어 수고한다고 격려하면서 작전계획을 면밀히 짜는 한편 응원이 필요한 곳에 철포 부대를 파견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8. 시간흐름과 전황은 일본군 참모본부의 「일본전사 세키가하라역[日本戦史・関ヶ原役]」에 따른 것인데, 문제는 일본군 참모본부는 센고쿠 관련 연구를 당시의 일차사료가 아닌 에도시대에 나온 군기물(軍記物)에 주로 의존하여 정리하였기에 80년대 중반부터 관련연구가들로부터 자주 까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듯. [본문으로]
  19. 참고로 사츠마 참전 병사들의 회고록에 따르면 미츠나리의 군세는 2시간도 버티지 못하였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듯이 서군의 분전은 없었다는 인식인 듯. 뭐 전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쓰여진 회고록인지라 아군의 붕괴에 일어났던 일보다 과장된 감정과 지식을 가질 수도 있기에, 그에 대해선 감안해서 보아야 할 듯. [본문으로]
  20. 시마즈 4형제 중 막내 이에히사[家久]의 아들. [본문으로]
  21. 갑옷 위에 덧입는 조끼처럼 생긴 전포(戰袍) [본문으로]
  22. 요시히로와 함께 탈출한 이는 50명 정도인 듯, 밤 10시 즈음 오와리 코마노 고개[駒野峠] 앞마을 주민들에게 밥 좀 달라고 할 때 50명 정도 준비해 달라고 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23. 1606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이름자 하나를 물려 받고, 시마즈 가문 당주의 통자 ‘히사[久]’를 결합하여 타다츠네에서 이에히사로 바꿈. [본문으로]
  24. 사족으로, 본문에도 나오는 시마즈사형제의 할애비인 시마즈 타다요시[島津 忠良]는 사형제의 인물됨을 평하며, "요시히사[義久]는 삼주(=사츠마[薩摩], 오오스미[大隅], 휴우가[日向])의 총대장이 될 덕목을 태어나면서부터 갖추었으며, 요시히로[義弘]는 영웅의 무략을 갖추어 이에 따를 자 없으며, 토시히사[歳久]는 사건처리의 일부시종의 이로움과 해를 깨닫는 지략에는 견줄 이 없으며, 이에히사[家久]는 군법전술의 묘를 터득했다"고 평하였다. - 덕분에 듣보잡인 토시히사는 신장의 야망이 버전업 할 때마다 지략이 상향조정되어 등장한다. [본문으로]
  25. 1586년~1587년 사이에 히데요시가 시마즈 가문[島津家]에 공격당하던 큐우슈우[九州]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의 구원요청에 응하여 일으킨 전쟁 [본문으로]
  26. 그러나 사츠마에 태합검지(太閤検地)가 끝난 1596년에는 히데요시 측의 의중으로, 요시히로가 사츠마[薩摩]를, 요시히사는 요시히로의 영지였던 오오스미[大隅]로 영지가 바뀌게 된다. 당시는 본거지에 대한 애착이 강하였던 때인지라 시마즈 가문의 본령이 있는 사츠마를 영유하게 된 요시히로가 시마즈 가문을 대표하게 된다는 의미였다. 사족으로 요시히로는 형 요시히사를 의식하여 사츠마에는 자신의 자식이며 요시히사의 딸을 부인으로 삼아 후계자 취급을 받던 타다츠네[忠恒]를 입성시키고, 자신은 오오스미와 사츠마의 국경에 있는 쵸우사[帖佐]라는 곳에 머문다. [본문으로]
  27. 실제로는 61만 9430석. [본문으로]

오와리[尾張]는 여덟 개의 군(郡)이다. 오와리 위쪽에 네 개의 군(郡)[각주:1]이 있어 이곳은 오다 이세노카미[織田 伊勢守][각주:2]가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다스리며 이와쿠라[岩倉]를 거성으로 하고 있었다. 오와리 반국(半国) 아래의 군(郡)도 네 개 군[각주:3]으로 오다 야마토노카미[織田 大和守][각주:4]가 다스리고 있었다. 위와 아래의 군(郡)은 강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오다 야마토노카미는 키요스[清洲]의 성에 부에이 님[武衛様][각주:5]을 모시며 보호하고 있었다. 오다 야마토노가미 휘하에 삼봉행(三奉行)이 있었는데 오다 이나바노카미[織田 因幡守], 오다 토우자에몬[織田 藤左衛門], 오다 단죠우노죠우[織田 弾正中] 세 봉행(奉行)이다.[각주:6]

이 중 단죠우노죠우는 오와리의 변방 쇼바타[勝幡]라는 곳에 거성을 두고 있었다. 사이간[西巌][각주:7], 겟간[月巌][각주:8] 그리고 지금의 당주 빈고노카미[備後守][각주:9]의 동생인 요지로우 님[與二郎殿][각주:10], 마고사부로우 님[孫三郎殿][각주:11], 시로우지로우 님[四郎二郎殿][각주:12], 우에몬노죠우[右衛門尉][각주:13]라고 있었다. 이 가문은 대대로 무명이 높은가문이다. 빈고노카미 님은 특히나 뛰어난 기량을 갖춘 사람으로, 여러 가문의 능력있는 사람들과 친교를 맺으며 아군으로 삼았다.

어느 때인가 빈고노카미가 오와리 가운데에 있는 나고야[那古野]에 오셔서는 견고한 요새를 만들도록 명하신 후 이 성에 후계자인 오다 킷포우시 님[織田 吉法師殿][각주:14]에게 머물게 하며 필두 가로(家老) 하야시 신고로우[林 新五郎][각주:15], 차석 가로 히라테 나카츠카사[平手中務][각주:16], 삼번 가로 아오야마 요소우에몬[青山 與三右衛門][각주:17], 사번 가로에 나이토우 쇼우스케[内藤 勝介]를 배치하였으며, 재정을 히라테 나카츠카사에게 담당시켰다. 킷포우시는 불편한 점이 많았지만 텐노우보우[天王坊][각주:18]라는 절에 공부하러 다녔다.

빈고노카미는 나고야의 성을 킷포우시에게 물려주고 아츠타[熱田] 근방 후루와타리[古渡]라는 곳에 새로이 성을 쌓고 거성으로 삼으셨다. 재정담당으로 야마다 야에몬[山田彌右衛門]을 임명했다.

  1. 하구리 군[葉栗郡], 니와 군[丹羽郡], 나가시마 군[長島郡], 카스가이 군[春日井郡]. [본문으로]
  2. 오와리[尾張] 상사군(上四郡)의 슈고다이[守護代] 가문. 이 당시의 당주는 오다 노부야스[織田 信康] [본문으로]
  3. 카이사이 군[海西郡], 카이토우 군[海東郡], 아이치 군[愛知郡], 치타 군[知多郡]. [본문으로]
  4. 오와리 하사군(下四郡)의 슈고다이[守護代] 가문. 이 당시 당주는 오다 타츠카츠[織田 達勝]로 추정되고 있다. [본문으로]
  5.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수상 격인 칸레이[管領]가 될 수 있는 세 가문[三管領] 중 필두인 시바 가문[斯波家]의 종가(宗家). 무로마치 막부 중기부터 시바 가문 종가의 당주는 지부다이후[治部大輔]->사효우에노스케[左兵衛佐]->사효우에노카미[左兵衛督] 순으로 승진하였기에, 효우에[兵衛]의 당명(唐名)인 부에이[武衛]로 칭해졌다. 이 글에서 지칭하는 인물은 시바 요시무네[斯波 義統]. [본문으로]
  6. 소위 '키요스 삼봉행[清洲三奉行]'. [본문으로]
  7. 노부나가의 증조부 오다 나가노부[織田 良信]의 법명. [본문으로]
  8. 노부나가의 조부 오다 노부사다[織田 信定]. 사족으로 이 오다 노부사다가 당시 오와리 제일의 상업도시였던 츠시마[津島]를 장악한 것이 단죠우노죠우 가문[弾正忠家] 비약의 초석이 되었다. [본문으로]
  9. 노부나가의 부친 오다 노부히데[織田 信秀] [본문으로]
  10. 요지로우는 '與(与)次郎'라고도 씀. 노부사다의 차남 오다 노부야스[織田 信康]. [본문으로]
  11. 노부히데 사후 세력이 약화된 노부나가를 도와 오와리 통일에 조력한 오다 노부미츠[織田 信光]. 노부사다의 삼남. [본문으로]
  12. 노부사다의 넷째 아들 오다 노부자네[織田 信実] [본문으로]
  13. 노부사다의 다섯째 아들 오다 노부츠구[織田 信次]. [본문으로]
  14.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본문으로]
  15. 하야시 히데사다[林 秀貞]. [본문으로]
  16. 히라테 마사히데[平手 政秀]. [본문으로]
  17. 아오야마 히데카츠[青山 秀勝]. 위키에서는 아오야마 노부마사[青山信昌]로 되어 있으나, 당시에는 아오야마 히데카츠[青山秀勝]라는 기록만 있다고 하니[谷口克広-織田信長家臣団辞典], 이 블로그에선 아오야마 히데카츠[青山秀勝]로 한다. [본문으로]
  18. 츠시마 신사[津島神社]. 우두천왕(牛頭天王)을 모셨기에 별칭이 텐노우 사[津島天王社]였다. [본문으로]

출처:  http://www.mofa.go.jp/mofaj/area/korea/visit/1112_pre/meeting.html 


2011년 12월 18일(일요일) 오전 9시 10분부터 약 한 시간,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총리대신은 쿄우토[京都]에서 방일 중인 이명박 한국 대통령과 일한 정상회담을 행하였으며, 개요는 다음과 같다(동석자 : 일본측부터 사이토우 츠요시[斎藤 勁] 내각관방 부장관 외, 한국측에서 신각수 주일본 대사, 천영우 외교안보 수석비서관 외). 본 회담은 10월 일한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셔틀외교’ 활성화의 실현이며, 양 정상은 17일 노다 총리 주최의 정상만찬에서 대통령의 71살의 생일 축하 및 41회째 결혼기념일(둘 다 12월 19일)을 축하하는 등을 통해서 개인적 신뢰관계를 더욱 강화하였다.

1. 일한관계

1. 노다 총리가 (1)일한 양국은 미국의 동맹국이며 기본적 가치,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와 번영의 확보 등의 이익을 공유하고 있다. (2) 대통령과의 개인적 신뢰관계, 활발한 양국 국민간의 교류도 포함한 것을 기초로 하여 다양한 계층에서 미래지향적인 일한관계를 구축해 간다. (3) 일본은 동일본대지진 때의 피해지의 청소년 교류를 통하여 일본재생에 관한 이해를 증진하는 ‘유대 강화 프로젝트[キズナ強化プロジェクト]’를 만들어 2013년 3월말까지 한국과 약 1300명 규모의 청소년교류를 실시하고자 한다는 뜻을 전했다. 이대통령은, 세계경제가 어둡고 불확실적이며, 지금은 북한과의 문제가 있는 때이기에 한일쌍방의 의사소통을 강화하고, 지역-세계의 관심사에 대비하여야 함이 다른 어느 때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뜻을 말했다.

2. 도서 인도에 관해서 노다 총리는, 인도가 종료된 도서를 일한우호의 증거로써 보존하고 싶다, 한국에 있는 일본에서 전해진 문서에 관한 접근이 개선됨에 따라 일한의 문화교류가 더욱 활발해 지기를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이대통령은 도서의 인도에 관한 노다 총리의 노력에 대해서 감사한다는 뜻을 전하고, 한국에 있는 일본에서 전해진 문서에 대한 접근이 개선될 것이라 본다는 뜻을 전했다.

3.  양 정상은 10월의 회담에서 합의한 ‘제2차 일한 신시대 공동연구 프로젝트’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환영하였고, 또한 양 정상은 ‘제3차 역사 공동연구 프로젝트’의 개시에 합의하였다.
[참고] 일한 역사공동연구 : 제1차 공동연구는 2001년에 발족하여 2005년에 보고서를 공표. 제2차 공동연구는 2005년에 발족하여 2010년 3월에 보고서를 공표. 제3차의 구체적 개시시기, 멤버 등에 관해서는 앞으로 조절한다.

4. 위안부문제에 관하여 이대통령에게서는, 이 문제가 해결되면 여러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된다. 이 문제해결을 위해서 진실된 용기가 필요하다는 등 위안부문제의 중요성을 말하며 그에 따른 대처를 요구하였다. 노다 총리는 이에 대해, 일본은 일관되며 명확한 법적 입장에 기초하여 일본의 입장은 알고 계시는 대로라는 뜻을 전한 뒤, 지금까지 일본은 인도적인 면에서 노력을 해왔으며 앞으로도 인도적인 견지에서 여러 고려를 하겠다고 전했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건설된 위안부 동상에 관해 노다 총리는 이대통령에게 동상의 건설은 유감스럽다며 조속한 철거를 요구하였다.

5. 노다 총리가 일한관계에는 일본측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도 포함하여 어려운 문제가 있지만, 일한관계 전체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대국적인 견지에서 협력하고 싶다, 셔틀외교를 자주 행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였으며, 이 대통령은 일한간에 여러 현안이 있지만 개인적 관계에 바탕한 대화를 행하고 싶다, 셔틀외교에 관해서도 자주 행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이번 초대에 감사하며, 쿄우토[京都]의 영빈관에는 감명을 받았다는 뜻을 전했다.
[참고] 2011년 12월 17일에 겐바 코우이치로우[玄葉 光一郎] 외무대신이 청와대의 천영우 외교안보수석비서관에게, 한국 국회의원의 독도방문이나 시설구축의 중지를 요구하였다.

6.  양 정상은 군사정보의 교환의 중요성에 대해서 의견교환을 하였다.

2. 일한EPA를 포함하여 일한경제관계 등

노다 총리가 – 일중한(日中韓)FTA산관학(産官學) 공동연구가 성공리에 종료, 일중한 투자협정교섭에 있어서 일한의 노력, 일한EPA교섭의 재개, 토우호쿠 지방[東北地方]의 부흥, 원자력안전 등에 대해서 말하였고, 이 대통령은 일본과 한국간 민간레벨에서의 교류가 많아졌으며 앞으로도 활발한 교류를 행하고 싶다는 뜻을 말했다.

3. 북조선문제

북조선문제에 관해서 양 정상은 북조선에 의한 우라늄 농축활동을 포함한 핵개발이나 미사일 문제에 대한 대처에 있어서 일한 및 미국이 긴밀히 연대하는 것, 남북대화, 미국과 북한 대화를 계속해서 실시하여 북조선의 구체적 활동에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최근의 동향은 일한미(日韓美) 3개국의 긴밀한 협력의 성과임에 일치하였다. 또한 노다 총리는 납치문제에 관한 한국측의 이해와 협력에 감사하며, 이대통령은 납치문제에 대한 한국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는 뜻을 표명하였다.

ps; 일본 외무성의 내용을 번역하였기에 원래 '한일'로 해야 하지만 '일한' 그대로 번역하였습니다.
ps2; 
일본 외무성의 내용을 번역하였기에 원래 '한중일'이나 '한미일'로 해야 하지만 '일중한', '일한미' 그대로 번역하였습니다. 
ps3; 조선일보의 "
[韓·日정상회담] 日 "동상(위안부 평화비) 철거해달라"… 韓 "이러면 제2·3 동상 나와기사도 함께 보심이 좋은 줄 아뢰옵니다.

 



오늘 19일(월요일) 오후 2시 50분 즈음부터 약 10분간, 노다 요시히코[野田 佳彦] 내각총리대신은 이명박 한국대통령과 전화로 회담하였으며, 개요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이명박 대통령에게서, 김정일 북조선국방위원장의 사거라는 긴급사태에 대해, 일한 정상 간에 긴밀히 연대할 필요가 있다, 돌발사태에 대비하여 정보를 면밀히 교환하며 긴밀하게 협력하고 싶다는 뜻의 발언이 있었습니다.

2. 이에 대하여 노다 총리는, 이번 사태가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악영향을 주지 않기를 기대한다는 뜻을 말한 뒤, 오늘 오후 개최된 안전보장회의에서 (1) 정보수집태세의 강화, (2) 한국을 포함한 관계국간 정보공유, (3) 불측의 사태에 대비하여 만전의 태세를 취하도록 지시하였다며 회의에서 나온 대략적인 내용에 대해서 설명하였습니다.

3. 추가로 양 정상은 다양한 정보수집이나 그런 정보를 공유함에 있어서 협력하며, 긴밀히 연대를 취할 것 및 앞으로도 필요에 따라 서로 연락을 취해가는 것에 의견이 일치하였습니다. 

ps; 일본 외무성의 내용을 번역하였기에 원래 '한일'로 해야 하지만 '일한' 그대로 번역하였습니다.
ps2; 일본 외무성의 내용을 번역하였기에 원래 '한반도'로 해야 하지만 '조선반도' 그대로 번역하였습니다.  

출처 : http://jbpress.ismedia.jp/articles/-/27869
저자 : 후쿠야마 타카시[福山 隆]
 

1.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의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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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Foreign Policy”지(10월 11일호)에 ‘앞으로 세계 정치는 아시아에서 결정된다.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에서가 아니다. 미국은 앞으로도 계속 사태 해결의 중심에 있을 것이다.”를 제목으로 하는 장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약간 필자의 사견을 더해서 요약하자면, 논지는 다음과 같다.

(1). 미국은 경제력 쇠퇴로 인하여 계속해서 ‘세계의 경찰관’을 완수하기에 충분한 전력을 유지할 수 없다.

따라서 앞으로는 중점지역을 정하여 일부에서는 과감히 철퇴하고, 특정지역에 전력을 집중시켜 배치할 필요가 잇다.

(2). 그렇다면 중점적으로 미국을 배치할 곳은 어디가 될까? 그것은 중국이 대두하고 미국의 경제적 이익도 큰 아시아-태평양 외에는 없다.

(3) 냉전 후 아시아에 있어서의 중점배치는 일본과 한국(합계 5만 명 이상의 미군을 배치)이었지만, 이를 재검토한다(일본의 전략적 기대치가 저하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4) 새로운 배치의 방향성은 다음과 같다.

  • 미군배치를 지리적으로 좀 더 널리(distributed), 그리고 항감성(抗堪性[각주:1])이 있으며, 정치적으로도 문제될 것이 적은(sustainable) 곳으로 한다.
  • 특히 남아시아, 인도양에서의 미군의 존재감을 강화한다. 오스트레일리아는 남아시아, 인도양을 컨트롤하기에 전략적으로 중요국가.
  • 근래에는 태평양과 인도양이 군사적으로도 하나의 연결성을 지니게 되었다. 싱가포르는 두 바다를 잇는 조임목(choke point)이기에 전략적으로 중요. 싱가포르에는 이미 연안방위용 함정을 배치했으며, 앞으로 공동작전도 검토한다.
  • 이와 같은 전략 상의 필요에 미군의 배치, 행동을 어떻게 맞추어 갈 수 있을 것인가? 현재의 배치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미군의 존재감을 더 널리 분포시킬 필요가 있으며, 그를 위해 동맹국, 파트너 국가를 늘려간다.

 

2. 종래 미군 배치의 개요.

냉전 동안 미군은 소련을 봉쇄하기 위한 체제 – 전방전개 전략(前方展開戰略) – 에 기준을 두고 배치되어 왔다. 따라서 1991년 소련 붕괴 후 미국은 세계전략의 재검토를 해야만 했다.

미군의 전개상태의 재검토를 의미하는 GPR(Global Posture Review)은 해외주둔 미군의 체제를 근본에서부터 재검토한 것으로, QDR2001(2001년에 공표. 4년마다 국방정책을 재검토)에서 선언된 후 2003년 11월부터 정식으로 개시되었다.

그 기준구상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공산권 국가를 봉쇄하기 위해 그 주변에 배치했던 미군병력은 구시대 방식.
(2) 사단(약 2만 명)이 아닌 여단(약 4000명)을 전투단위로 하며 소형경량의 부대를 급속히 전개할 수 있게 한다.
(3)  IT를 전면적으로 활용하여 정보수집과 명중 정밀도를 비약적으로 향상시키고 헤비 웨폰을 줄인다.
(4) 테러 활동과 대량파괴병기의 확산은 미국에 대한 위협이기에, 그에 대한 대응에 역점을 둔다.

이 기본구상은 소련 붕괴 후의 미국이 상대적으로 돌출된 군사력을 보유하여, 세계의 경찰관으로 전세계에 관여한다 – 는 전제가 되었다.

참고로 이 일환으로 일본에서도, (1) 오키나와[沖縄]의 제3해병 원정군사령부, 제3해병사단 등 8000명을 괌으로 이전, (2)주한미군인 제8군사령부를 폐지하는 대신에 소형(약 300명)의 제1군단사령부를 미 워싱턴에서 카나가와 현[神奈川県]의 자마[座間]로 이전 – 이 발표되었다.

3. 미국과 미군에 있어 새로운 정세의 출현

그러나 QDR2001이 책정될 시기에 비하여, 미국과 미군의 전략환경은 다음과 같이 커다란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1) 일본의 몰락

일본이 경제적으로 몰락하고 있다. 이번 동일본대지진은 일본의 몰락을 가속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민주당정권이 출현하여, 지금까지의 자민당 만큼 미국의 뜻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일본을 「태평양의 요석(Key Stone of the Pacific)」이라는 위치에 놓고 중요시해 왔지만, 앞으로 일본을 미국전략에 활용할 계산을 세우기 어려워지고 있다.

(2) 중국의 대두와 군사적 위협의 현저화

당초 미국의 對중국정책은 ‘헷지(hedge)’와 ‘인게이지먼트(engagement)[각주:2]’ 정책에 양다리를 걸친 것이었다.

‘헷지’라는 것은 종래, 중국이 미국의 패권에 도전할 때에는 언제라도 중국을 군사력으로 제압 혹은 봉쇄할 수 있는 체제 작성을 지칭한다.

‘인게이지먼트’정책이란 공산당 독재국가인 중국을 미국과 같은 스탠다드로 서서히 바꾸기 위해 중국과 관련성을 갖는 것으로, 경제, 사회, 인권기준 등을 미국 수준으로 맞추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미국은 중국이 항공모함 건조를 강행하고, 미국 항공모함 투입을 저지하기 위해 대함탄도 미사일 개발을 서두르는 등 현저히 군비확장에 우려를 표하며 ‘헷지’정책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3) 미국의 쇠퇴

원인이 어찌되었건 미국의 경제는 ‘세계의 경찰관’이라는 역할을 맡을 정도의 여력을 잃어가고 있다. 앞으로 10년간 국방예산을 최대 6000억 달러 삭감할 예정으로 육군, 해병대 최대 약 20만 명, 해군함정 최대 60척, 공군 전투기 최대 486대를 없애려 한다는 보도도 있다.

(4) 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철군

10월 21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라크 주둔 미군부대를 연말까지 전면철퇴 시킨다고 발표하였다. 또한 6월에는 약 10만 명의 규모인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을 7월부터 부분 철퇴하여 2012년 여름까지 약 3만3000명을 철수시키려는 계획을 발표했다.

아프가니스탄 주둔 비용은 지금까지 4400억 달러에 달하여 미국 재정에 무거운 부담이 되어 있으며, 남은 부대도 조기철퇴를 할 수 밖에 없을 거라 여겨진다.

이라크-아프가니스탄 부대의 철퇴는 이어지는 미국의 세계전략책정을 서두르게 만드는 스위치가 될 것이다.
 

4. 새로운 미군전략의 골격과 특징.

(1) 미국의 기본 스탠스 – 팍스 아메리카나에 대한 미련

미국이 초대국의 지위에서 내려오는 것을 납득할까? 펜타곤이나 국무성 등의 전략책정 담당자들은 신전략을 검토함에 앞서, 현실적으로 이제 미국이 팍스 아메리카나를 유지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여전히 과거의 영광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종래의 수법처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 일본의 지원을 받으며 팍스 아메리카나를 유지하는 것에 노력하겠지만, 얼마 안가 단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의 신전략을 책정하기 위해서, 자국의 현재 상황 – 초대국인지, 대국 중 하나의 나라에 지나지 않는지 – 를 객관적으로 평가, 인식하는 것이 ‘앞으로 나가야 할 전략’을 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니까.

말을 바꾸자면, (1) 지금과 같이 세계 패권의 유지를 목표로 한다. (2) 세계 패권의 유지를 단념하고 아시아 패권의 유지만을 최우선적 목표로 삼을 것인지 - 라는 것이다.

2014년에 발표될 예정인 다음 QDR에서 미국이 자국의 입장을 어떻게 인식하여 기술할지 주목된다.

(2) 미국의 이용해야 할 중국의 아킬레스건

중국은 자원을 해외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 더구나 히말라야, 신장위구르 자치구나 몽골을 경유하여 내륙정면에서 물자를 반출, 반입하는 양이 한정적이기에, 역시 주요한 무역은 해양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해양 상의 중국 생명선(sea-lane)은 세 곳 있다.

제1의 루트는 믈라카 해협에서 인도양 경유로 중근동-아프리카에 이르는 것.

제2의 루트는 파푸아뉴기니 주변을 통과하여 오스트레일리아나 남미에 이르는 것. 참고로 이 루트는 대동아전쟁 때 일본(제국육해군)이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를 분단시키기 위해 실시한 ‘SF작전’의 방향과 같다.

‘SF작전’은 피지, 사모아 및 누벨칼레도니를 점령함에 따라, 남방전선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위협을 배제함과 동시에 미국(하와이 제도)과 오스트레일리아 사이의 시레인을 분단시킴으로 오스트레일리아를 고립시켜, 오스트레일리아를 영연방에서 탈락시키는 것을 노린 작전이었다.

제3의 루트는 류큐 제도[琉球諸島]에서 북미에 이르는 것.

제1의 루트의 조임목(choke point)은 믈라카 해협. 제2의 루트의 조임목은 파푸아뉴기니-마셜 제도-솔로몬 제도 등의 주변해역. 제3의 루트의 조임목은 오키나와[沖縄]-미야코 섬[宮古島]이 아닐까?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File:Ryukyu_map.jpg

미국은 중국과의 유사시에 상기의 초크포인트를 점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라 여겨진다.

(3) 새로운 배치를 하기 위한 고려요건

중국은 ‘Anti-Access(접근저지) / Area-Denial(영역거부) :A2AD’라는 해양전략을 내세우고 있다.

이 전략은 멀리에서 오는 적을 방위선 안에 침입시키지 못하게 하고(접급저지), 방위선을 돌파 당하여도 그 안쪽에서 적에게 자유로운 행동을 허용하지 않는(영역거부)라는 콘셉트이다.

추가하자면 중국은 이 방위선내에 존재하는 기존 미군기지에 대해서, 미국의 전투기가 기지에서 이륙하기 전에 탄도 미사일로 적 기지(일본 주둔 미군기지)의 활주로 등을 선제 공격하는 군사독트린을 새로 세웠다고도 보도되었다.(6월20일자 요미우리 신문).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이 각 전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하의 요소가 중요해 진다.

(i) 중국과의 거리를 종래 이상으로 떨어져 탄도 미사일의 사정 밖(약 1850km라 추정)으로 나오는 것이 바람직하며, 미사일의 기습공격에 대처(미사일 요격 미사일 등)할 수 있도록 한다.

(ii) 광역으로 분산할 것.

(iii) 미사일에서 피해를 국한시키기 위해 항감성(抗堪性) 강화나 활주로의 피해복구 능력을 강화

(4) 중시지역

상기 (2)의 분석과 같이 앞으로 미국은 오스트레일리아와 태평양 제도(파푸아뉴기니, 마셜 제도, 솔로몬 제도 등)을 종래 이상으로 중시하여 군사적 배치를 강화할 것이다.

특히 오스트레일리아는 상기의 3루트를 전부 장악(대처)할 수 있는 위치이며, 앞으로 오스트레일리아의 전략적 가치는 미국에게 있어 굉장히 중요한 것이 될 것이다.

(5) 이중포위망의 형성

중국은 태평양 정면으로의 진출목표선으로서, 제1열도선(列島線=큐우슈우[九州]를 기점으로 오키나와, 대만(台湾), 필리핀, 보르네오 섬에 이르는 라인) 및 제2열도선(이즈 제도[伊豆諸島]를 기점으로 오가사와라 제도[小笠原諸島], 괌-사이판, 파푸아뉴기니에 이르는 라인)을 목표로 하고 있다.

미국은 앞으로 이에 대항하여, 종래의 일본-한국-대만-필리핀의 라인에 더해, 괌-마셜제도-솔로몬제도-오스트레일리아를 잇는 또 하나의 방위라인을 만들어, 중국을 이중으로 봉쇄하는 새로운 배치(new transformation)를 구성할 것이라 예상된다.

장래 미국이 전력 삭감을 큰 폭으로 하고, 중국의 상대적 전력이 제1열도선 부근에서 열세가 된 것을 인정할 경우, 제1열도선의 방위를 폐기하고, 괌-마셜제도-솔로몬제도-오스트레일리아를 잇는 또 하나의 방위라인까지 후퇴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이는 일본이 미국의 방위선에서 버림받는 것을 의미한다.

(6) 군사 인프라 건설을 위한 재정 조치

앞으로는 오키나와의 제3해병 원정군사령부, 제3해병사단 등 8000명을 괌으로 이전할 때처럼 일본이 재정부담을 해주는 듯한 ‘좋은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미군의 새로운 전개기지는 관계국에 있는 기존 군사기지 외에 민간시설(공항, 항구)를 최대한 활용하는 방침이 될 것이다.
 

5. 결언 – 일본에 미치는 영향

지금까지 일본은 미국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전략기반이었다. 그 이유는 (1) (냉전시대) 소련 극동군을 봉쇄하기 위한 거점. (2) 인도양이나 중동까지도 전개하는 미군에게 기지 기능의 제공. (3)재정적인 지원 등

그러나 근래 경제적으로 피폐해지고 있는 일본은 장래 재정적인 면에서 그다지 큰 공헌을 하기에는 기대할 수 없게 되고 있다. 미국은 일본을 더 이상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중국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일본에 주둔하는 미군기지는 서서히 중국의 탄도미사일 등의 위협에 노출되게 될 것이다. 더욱이 자민당 정권에 비하여 민주당 정권은 컨트롤하기 어렵다.

가까운 장래 미국은 일본의 전략적 가치를 지금처럼 ‘요석’이라고 여기지 않게 될 것이다. 그 결과로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생각할 수 있다.

제1시나리오 : 미국은 미일안보를 유지하기는 하겠지만 그 신뢰성은 속 빈 강정이 될 것이다.
제2시나리오 : 미국은 일방적으로 미일안보를 폐기한다.
제3시나리오 : 미국은 미일안보조약을 쌍무조약으로 개정할 것을 강요할 것이다.

2차대전 이후 60년 이상에 걸쳐 일본의 평화와 번영의 기반이 되어 온 미일안보체제가  현재 중대한 기로의 앞에 놓여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일본은 전후 체제의 코페르니쿠스 적인 전환의 시기를 맞이할 지도 모른다.

또한 일본정부에게 있어 긴요한 과제인 해병대를 후텐마[普天間]에서 괌으로 옮기는 계획에 대해서 미국정부는 상기와 같은 의도에서 백지로 돌려, 새로운 재배치의 전체 계획을 책정한 후에 일본주둔미군의 재배치를 새로이 정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10월25일. 노다 요시히코[野田 佳彦] 총리와 회담한 레온. E. 파네타 국방장관은 지금까지 주장해온 것처럼 헤노코[辺野古]로의 이설을 주장했다. 이는 “어차피 이설의 가능성이 낮으니, 일본정부에 은혜를 만들어 둘 심산”이라 보아야 할 지도 모른다.

반세기 이상 이어온 전후체제를 어떻게 바꾸면 좋은 것일까? 일본국민은 안전보장과 번영의 길 – 생존의 길 – 에 대하여 진지한 토론을 나누지 않으면 안 될 중대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1. 군사기지나 레이더 기지에 적의 공격을 받더라도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 [본문으로]
  2. 적과의 대화. NYT선정 2009년도 오바마 정부 올해의 단어...라고 함.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