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츠구[吉継]라는 이름이 아닌 요시타카[吉隆]로 나와 있다. 갑옷을 입지 않고 지팡이 같은 것을 잡고 있는 인물이 요시타카(=요시츠구)

 오오타니 교우부쇼유유우 요시츠구[大谷 刑部省 吉継]는 천하의 분수령이 된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에서 패할 것을 알면서도 우정을 위해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편에 서 장렬히 싸우다  그 병든 몸을 산화시킨 비창(悲槍)의 무장으로 유명하다.

 1600년 6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는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정벌하기 위해 여러 다이묘우[大名]를 동원하여 아이즈[会津]로 향했다. 이때 에치젠[越前] 츠루가[敦賀] 5만석의 성주 오오타니 요시츠구도 이에야스의 동원령에 응하여 7월에 츠루가를 출발하였다.
 이날이 되기 전까지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이름은 역사의 표면에 눈에 띄게 등장한 적도 없었으며, 이 아이즈 정벌[会津征伐]의 시점에서도 극히 평범한 다이묘우로,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후견인인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에 순순히 따르고자 하였다.

 도중, 요시츠구는 미노[美濃] 타루이[垂井]에서 오우미[近江]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의 이시다 미츠나리에게 사자(使者)를 보냈다. 요시츠구와 함께 아이즈로 향하게 된 미츠나리의 아들 하야토노쇼우[隼人正][각주:1]를 맞이하기 위함이었다. 이 즈음 사와야마에 은거하고 있던 이시다 미츠나리는 이에야스에게 대항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첫째 아들 하야토노쇼우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아이즈에 보내겠다고 신청한 상태였다.

 요시츠구는 사자의 구두로 미츠나리도 함께 아이즈로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고하였다.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미츠나리가 무공파 장수들에게 습격 받았을 때, 이에야스에게 도망쳐 보호를 받게 되지만[각주:2] 그로 인해 은퇴를 강요당한 미츠나리가, 반(反)이에야스의 태도를 버리기는커녕 여전히 이에야스 토벌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것은 천하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츠나리가 아이즈로 함께 가준다면 요시츠구 자신이 이에야스와 화해할 수 있도록 주선하겠다는 뜻도 전했다.

 이에 대하여 미츠나리는 상담하고 싶은 것이 있다며 사와야마로 와 주길 바란다고 사자를 보내온 것이다. 요시츠구는 이 시점에도 무슨 일인가?하고 궁금해 하면서도 사와야마로 향했다. 미츠나리는 요시츠구와의 만남을 대단히 기뻐하며 잠시 옛정을 떠올린 뒤, 중대한 계획을 밝혔다.

 “이에야스의 행태를 보자니, 돌아가신 태합(太閤)님의 유훈(遺訓) 정치를 위반할 뿐만 아니라 히데요리 님을 무력화시키려 하고 있네. 우리처럼 태합의 은혜를 입은 자들로서는 굉장히 불쾌한 일. 이에야스가 아이즈로 향하는 지금이야말로 이에야스 토벌을 위한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일세. 거병하여 이에야스를 쓰러뜨리려 하오.”

 듣고 있던 요시츠구는 놀랐다. 너무 무모하다 – 요시츠구는 잠시 틈을 준 뒤 입을 열었다.

 “나이후[内府=이에야스]는 300만석에 달하는 거대 다이묘우일세. 군사수도 많으며 더구나 지금에 와서는 그의 명망에 비견되는 이조차 없네. 돌아가신 태합도 항상 ‘이에야스 님은 지용을 겸비하신 분, 너희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고 말씀하신 인물이네…”

 요시츠구는 불과 19만석의 미츠나리가 그러한 이에야스와 싸운다는 것은 미친 짓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열심히 미츠나리의 뜻을 꺾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미츠나리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일설에 따르면 이때 미츠나리는 이 계획이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의 가로(家老)인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와 공모한 것이기에, 이제는 취소할래야 취소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며, 요시츠구도 부디 참가해 주길 바란다고 부탁했다고 한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자 요시츠구도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일단 요시츠구는 사와야마 성에서 나와 본진이 있는 타루이로 되돌아와 심사숙고 하였다.

 요시츠구는 미츠나리와의 우정과 그런 자신을 믿고 미츠나리가 밀모를 털어놓았다는 생각이 들자, 그것을 무시한 채 아이즈[会津]로 향할 수가 없었다. 되돌아보면 히데요시[秀吉]가 츄우고쿠[中国] 방면사령관으로 히메지[姫路]에 있을 때, 16살의 자신이 먼 분고[豊後][각주:3]에서 와서 섬길 수 있었던 것도 미츠나리의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 아래서 150석으로 시작해 에치젠[越前] 츠루가[敦賀] 5만석의 다이묘우[大名]가 되어 종오위하(従五位下) 교우부쇼우유우[刑部少輔]에 임명되어, 히데요시가 관백(関白)으로 승진했을 때는 미츠나리와 함께 제대부(諸大夫)의 한 사람[각주:4]으로도 선정되었다. 요시츠구의 이런 출세에는 미츠나리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각주:5] 요시츠구는 미츠나리의 그런 우정을 머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요시츠구와 미츠나리 사이에 속설이지만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히데요시가 다회(茶会)를 열었을 때의 일이다. 그 즈음 요시츠구는 불치의 업병(業病)을 앓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여러 장수들은 요시츠구가 입댄 찻종을 꺼려했다.[각주:6] 그때 미츠나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요시츠구에게 찻종을 받아 깨끗이 원샷한 것이다. 요시츠구는 이 일을 평생 잊을 수 없는 도움을 주었다며 미츠나리에게 고마워했다고 한다.

 한편 요시츠구는 이에야스[家康]와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자주 이에야스의 저택을 방문하였다. 단지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일어난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집안싸움을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와 함께 양측의 화해조정에 힘쓰고 있을 때, 야스마사가 이에야스에게 크게 질책을 당하였기 때문에 요시츠구도 또한 이에야스의 저택에 방문하는 것을 관두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에야스를 미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요시츠구는 이에야스를 따라 아이즈 정벌[会津征伐]에 응하려 했던 것이다.

 타루이의 본진에서 요시츠구는 심사숙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츠나리에게 승산은 없었다. 때문에 또다시 사자를 보내어 미츠나리에게 결심을 바꾸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미츠나리의 결심에 변함이 없었다.
 7월 11일. 오오타니 요시츠구는 타루이에서 전군을 이끌고 사와야마 성으로 향했다. 미츠나리를 위해서 죽자고 결심한 것이다. 
미츠나리를 만면에 기쁨을 표하며 요시츠구를 맞이하였다. 그리하여 이에야스 타도의 준비계획은 이시다 미츠나리, 오오타니 요시츠구 그리고 역시 미츠나리의 요청에 응하여 사와야마 성에 온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의 협의에 따라 진행되었다.

 이에야스 타도에 임하기 전에 요시츠구가 미츠나리에게 전한 유명한 충고가 있다. 이하는 그 내용이다.
 “귀공(미츠나리)에게는 방자하고 거만한 점이 있다 – 고 다이묘우를 시작으로 말단 병사들까지 날마다 떠들고 있는 듯 하네. 다른 사람의 위에 서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의 인기를 얻지 않으면 안 되네. 이것을 잘 판단하여 이번 큰일도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님과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님을 위에 세우고, 귀공은 그 아래서 일을 진행시키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네. 거기에 남들이 보기에 귀공은 지혜와 능력에 있어서 천하무쌍이지만 그에 비해 용기는 부족하다고들 여기고 있소. 이에야스 타도계획에는 모우리, 우키타 님 외 다른 다이묘우들도 참가할걸세. 이 계획을 처음부터 짠 것은 귀공이니, 계획이 진행될 때는 남들보다 먼저 목숨을 바친다는 각오를 임하길 바라네.”
 그야말로 미츠나리의 결점에 대한 충고였다. 미츠나리도 당장은 친구 요시츠구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1600년 9월 15일.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동서 20만의 대군이 격돌하였다.
 이날 요시츠구[각주:7]는 토다 카츠시게[戸田 勝成],
히라츠카 타메히로[平塚 為広][각주:8], 오오타니 요시하루[大谷 吉治][각주:9], 키노시타 요리츠구[木下 頼継][각주:10] [각주:11]의 부대를 후지카와 대[藤川台]에 두고, 자신은 그 후방에 본진을 두었다. 오오타니 부대의 우익에는 아카자 나오야스[赤座 直保][각주:12], 오가와 스케타다[小川 祐忠][각주:13], 쿠츠키 모토츠나[朽木 元綱][각주:14] 등을 배치하였다[각주:15]. 이 포진은 더 오른편에 있던 마츠오야마[松尾山]에 진을 치고 있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에 대비한 것이었다. 요시츠구는 처음부터 히데아키에게 딴마음이 있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에서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주변의 배치도. 빨간색은 동군. 파란색은 서군. 노란색은 도중 배신하는 무장들이다.

 오전 8시. 결전이 시작되었다. 오오타니 부대는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高虎], 쿄우고쿠 타카토모[京極 高知]의 부대를 상대로 격전을 펼쳐 압도하고 있었다. 요시츠구는 병든 몸이었다. 뚜껑이 없는 가마에 타고서는 지휘하였다. 뭉개진 얼굴을 흰 포로 감싸 눈 만을 내 놓고 있었다. 그 눈도 거의 실명에 가까웠다.

 전황은 서군이 조금이지만 유리. 그러나 일진일퇴. 곧이어 정오가 되었다. 이때였다. 마츠오야마 산에서 형세를 관망하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갑자기 산을 내려와 오오타니 부대를 공격한 것이다. 요시츠구는 침착하게 맞아 싸웠다. 하지만 요시츠구의 오산이 생겼다. 이 배반에 대비하여 배치한 아사자 나오마사 등의 부대까지도 함께 배신하여 오오타니 부대를 향해서 공격한 것이다.[각주:16] 오오타니 부대는 세 방향의 적과 싸우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다 카츠나리, 히라츠카 타메히로 두 무장이 전사를 하였다. 요시츠구는 두 무장의 죽음을 보고 받고 각오를 정했다. 옆에 있던 유아사 고스케[湯浅 五助]를 가까이 불러,
 “내 목을 적에게 넘기지 마라”[각주:17]
 고 명한 뒤 배를 갈랐다. 고스케는 배 가르는 요시츠구의 목을 베어 준 뒤 그 목을 전포[羽織]에 싸서 땅에 묻은 다음 토우도우 부대를 향해 돌격하였다.[각주:18]

오타니 요시쓰구[大谷 吉継]
분고[豊後] 오오토모 가문[大友家]을 섬겼던 오오타니 씨[大谷氏]의 출신이라고 한다[각주:19]. 처음엔 키노스케[紀之介] 나중엔 요시타카[吉隆][각주:20]라는 이름을 썼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측근시동[小姓]부터 시작하여 1585년 에치젠[越前] 츠루가[敦賀] 5만석의 성주가 되어[각주:21] 종오위하(従五位下) 교우부쇼우유우[刑部少輔]에 서임, 관백 히데요시의 제대부(諸大夫) 중 한 명이 된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신뢰를 받았기에 그에 대한 의리로 서군에 참가하였다. 사나다 유키무라[真田 幸村]의 부인은 요시츠구의 딸[각주:22]이다. 묘는 기후 현[岐阜県] 세키가하라 정[関ヶ原町]의 옛 전쟁터[古戦場], 후지카와 대[藤川台]에 있다. 격전을 펼친 토우도우 가문[藤堂家]이 요시츠구의 분전에 감명받아 세운 것이라고 한다.

요시츠구가 나온 그림으로 이런 것도 있습죠.


  1. 이시다 미츠나리의 첫째 아들 이시다 시게이에[石田 重成] [본문으로]
  2. 미츠나리 포스팅에서도 썼듯이 실제로는 이런 적 없다. 오오사카[大坂]에서 공격받은 미츠나리는 사타케 요시노부[佐竹 義宣]나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도움으로 후시미 성[伏見城] 안에 있는 자신의 저택으로 피했고, 여기서 농성했으며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와 연계하여 무공파 칠장 및 이에야스를 협격하려 하였다. 다만 동료였던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가 주저하는 사이 협격 모의는 실패하고, 이에야스와 화해를 하는 조건으로 책임을 지고 미츠나리는 봉행에서 물러나 은거를 하게 된다. [본문으로]
  3. 근래엔 오우미[近江] 출신이라고는 하나 정확히 어디 출신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오오타니 촌[小谷] 출신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요시츠구의 성과 같은 오오타니[大谷]라고 ‘큰 大’자를 썼으나,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의 수장의 고향인지라 그것을 감추기 위해 발음은 같지만 ‘작을 小’를 써서 마을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나카무라 시키부쇼유유우 카즈우지[中村 式部少輔 一氏], 이코마 우타노카미 치카마사[生駒 雅楽頭 – 이 당시엔 마사카츠[政勝]라 하였음], 오노기 누이도노스케 시게카츠[小野木 縫殿助 重勝], 아마고 쿠나이쇼우유우 하루히사[尼子 宮内少輔 晴久], 이나바 효우고노스케[因幡 兵庫助], 츠게 사쿄우노스케[柘植 左京亮], 츠다 오오이노카미[津田 大炊頭], 후쿠시마 사에몬다이후 마사노리[福島 左衛門大夫 正則], 이시다 지부노쇼우유우 미츠나리[石田 治部少輔 三成], 오오타니 쿄우부우쇼우유우 요시츠구[大谷 刑部少輔 吉継], 후루타 효우부쇼우유우 시게츠네[古田 兵部少輔 重恒], 핫토리 우네메노카미[服部 采女正]. [본문으로]
  5. 미츠나리의 도움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나 요시츠구의 출세에는 히데요시의 마누라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의 집사격인 모친 ‘히가시도노[東殿]’의 영향력이 컸다고 한다. [본문으로]
  6. 요시츠구가 콧물을 떨어뜨렸다고도 하며, 얼굴의 고름이 찻종에 떨어졌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7. 병사는 600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본문으로]
  8. 둘이 합쳐 900명. [본문으로]
  9. 요시츠구의 첫째 아들. [본문으로]
  10. 요시츠구의 둘째 아들 [본문으로]
  11. 둘이 합쳐 3500명. [본문으로]
  12. 에치젠[越前] 이마죠우[今庄] 2만석의 다이묘우[大名]. 600명 동원. [본문으로]
  13. 이요[伊予] 이마바리[今治] 7만석의 다이묘우. 2000을 동원. [본문으로]
  14. 오우미[近江] 쿠츠키[朽木] 2만석의 다이묘우. 600을 동원. [본문으로]
  15. 여담으로 아와지[淡路] 수모토[洲本] 3.3만석의 다이묘우로 1000명을 동원한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도 배치되어 있었지만, 일본에서 와키자카는 듣보잡 중의 듣보잡이라 이 책에선 4명 중 3이 나오면서도 기술에서 빠져있다. 정말 몇 년 전의 일이지만 이런 듣보잡 중의 듣보잡을 감히 이순신 장군의 라이벌 포지션에 배치한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제작진은 평생 좆잡고 반성해야 한다. [본문으로]
  16. 여담으로 이 배신자들은 전후,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배신한다는 뜻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며 아카자 나오야스, 오가와 스케타다는 영지 몰수, 쿠츠키 모토츠나는 반토막(2만석에서 9590석)이 되며, 와카시카 야스하루만이 전투가 일어나기 전부터 배신한다는 뜻을 알렸다며 영지를 보전받았다. [본문으로]
  17. 병들어 추해진 얼굴을 적에게 보이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18. 유아사 고스케는 이때 묻는 모습을 토우도우 타카토라의 조카인 토우도우 타카노리[藤堂 高刑]에게 걸려, 타카노리에게 자신의 목을 줄테니 대신 주군의 목이 여기에 묻혀 있는 것을 비밀로 해주길 바란다고 하였다고 한다. 후에 이에야스가 타카노리에게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목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고 묻자, 알기는 하지만 유아사 고스케와 약속을 하여 말할 수 없다고 끝까지 버티자, 오히려 감심한 이에야스에게 상을 받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19. 위에도 언급했지만 분고[豊後] 오오토모 가문[大友家]의 가신 출신이 아니라고 한다. 여담으로 유명한 '내적인 일은 센노 소우에키[千 宗易]에게 외적인 일은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에게'라고 가신에게 편지를 보낸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은, 그 편지에 요시츠구의 애미 히가시도노[東殿]의 영향력이 쎄다는 것도 썼지만, 만약 요시츠구의 가문이 오오토모 가문의 가신뻘이었다면 특별히 언급하였을 텐데도 그런 것이 없는 것을 보면, 오오토모 가문과 오오타니 가문은 관련이 없는 것 같다. [본문으로]
  20. 한때 킨키[近畿]를 지배했던 미요시 가문[三好家] 마지막 당주의 이름 미요시 요시츠구[三好 義継]의 이름과 같아서 불길하다며 서군에 가담하기 직전에 바꾸었다고 한다. 위에 사진에도 나와 있듯이 세키가하라 병풍에는 요시타카[吉隆]로 나와 있다. [본문으로]
  21. 츠루가 성주가 된 것은 1589년의 일 [본문으로]
  22. 사위 유키무라와 장인 요시츠구의 나이차이가 최소 2 ~ 최대 11살 차이라 아마 조카나 친족의 여성을 양녀로 삼은 뒤 시집 보낸 듯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tele-mann.tistory.com BlogIcon telemann 2011.09.06 13: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 좋은 글 감사드려요. 좋은 하루 되시길....

  2. Gyuphy IV 2011.09.06 22: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으헣헣허헣. 요시츠구의 악령이군요. 재밌게 봤습니다.
    그럭보면 세키가하라 고전장에 갔을적에 요시츠구의 묘에도 들렀었던 기억입니다만 참 산새우는소리만 들리는 산기슭이라, 그 처절한 전장터가 지금은 이런 촌구석(정말 학생들도 잘 안다니는 촌..;;)이라 기분이 묘했던 기억이 듭니다.

  3. Favicon of http://tele-mann.tistory.com BlogIcon telemann 2011.09.06 22: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어 공부를 하다가 일본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발해지랑님 블로그를 알게되었습니다.

    실시간으로 못 보고 복습하다 보니,, 댓글이 늦었네요.

    글 올라오면 종종 댓글 달아드리겠습니다. ^^

  4.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9.07 01: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은 참 가혹한 것이 돋보이는 미남자였던 요시쓰구에게는 나병을 내렸고, 통일을 눈앞에 둔 노부나가에게는 직전의 죽음을 선사했으며, 자식을 그리도 사랑하던 히데요시에게는 자식의 끔찍한 죽음을 내려주었으니 말입니다. 핀트가 엇나간 듯 합니다만, 요시쓰구란 인물은 곱씹을 수록 새로운 맛이 나는 사람입니다.

    군사적 재능은 킨고를 상대로 보여준 분전을 생각해 보았을 때 더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으며(히데요시가 요시쓰구에게 병사 십만을 주어보고싶다고 했던가요 제대로 기억이 안 나는군요.)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이자, 뛰어난 재사였으니 모든 면에서 준수한 팔방미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댓글을 등록하기에 생각난 것입니다만, 어쩌면 요시쓰구는 패배를 알고서도 미쓰나리의 편을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병이란 지옥에서 벗어나는 길은 죽음이었을테니까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9.07 09: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시츠구가 미남이었다는 것은 후세의 창작이 아닐지... 보통 뛰어난 활약을 한 사람은 어느새 미남이 되는 경우가 있나 보더군요.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 義経]도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에 등장했을 때만해도 그다지 미남은 아니었나 본데 이후 절세의 미남이 되었듯이요.

      확실히 세키가하라 전쟁에서는 엄청난 활약을 했습지요. 머리 하나로 마에다 토시나가[前田 利長]의 마에다 군 1만 5천을 되돌리게 하였으며, 사나다 부자를 끌어들여 토쿠가와 주력군 3만 이상을 시나노에 묶어 놓았으니까요. 아마 요시츠구가 없었음 서군은 아예 싸워보지도 못하고 끝났을 가능성도 있었습지요.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병들어 죽느니 전쟁터에서 죽길 바랬을지도.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9.07 13: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시츠네가 미남이 아니었다는 것을 전 튀어나온 이빨을 근거로 한 말이었는데, 당시는 그것이 추남이 아닌 용사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자세히는 耿君님의 블로그를 참조해 주시길.
      http://hyunk02.egloos.com/4126094

    •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9.07 20: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고가는군요. 요시쓰네는 토끼상이었단 것인가(..)

      사나다 유키무라가 받아온 미화를 생각해본다면, 발해지랑님의 말씀이 사실일 듯합니다. 요시쓰구 본인은 지하에서 이 얘기를 알게된다면 웃고 있겠군요.

      쓸데없는 소리입니다만 어언 100명을 다 채워가는 듯 한데, 요시쓰구는 몇번째인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9.08 00: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시츠구가 84번째 였습니다.
      어서 빨리 이 책을 끝내고 신장공기 해야 하는데 말입죠..--;

  5. Favicon of http://pray4abyss.egloos.com/ BlogIcon 로날드럭 2011.09.14 19: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게임 전국바사라3에서는 좀 다크하게 나오더군요.
    분고 오토모 씨와 연줄이 있다고 해서 놀랐습니다만,
    발해지랑님도 여기에 그닥 동의하시지는 않는 것 같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9.14 23: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위에 주석에도 언급했습니다만, 만약 오오토모[大友] 가신 출신이라면 오오토모 소우린[大友宗麟]이 그런 것을 언급했을 것 같은데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오오타니 씨[大谷氏]가 큐우슈우[九州] 출신은 아닌 것 같습니다.

  6.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11.09.15 21: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켄신이랑 같이 흰두건이 아이콘이 된 것 같은 요시츠구랄까;;
    요시츠구 얼굴 그림은 요괴나 악령 뺨치게 그려놨군요(...) 히데아키가 생각보다 일찍 죽어서 그런지 요시츠구의 저주 때문에 죽었다는 연관 스토리도 나름 임팩트가 강한거 같네요.

    각주 2번에 히데이에 한자가 나오이에로 써져있네요.

  7. 권지용 2011.09.17 21: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코에이 일러 탓에 첫인상은 타이의대모험의 미스트번 코스프레인줄 알았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9.18 16: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비슷한가 보죠? 어떤가 해서 찾아보려고 해도 어떤 것인지 모르겠군요. 검색해도 전국바사라의 것만 나와서요
      (전국바사라는 마치 떠돌이 검심의 시시오 같은 이미지군요. ^^)


 센고쿠 시대[戦国時代]는 좋은 주군을 찾아 여러 가문에 발길을 남기는 것이 일상다반사였기에, ‘7번 주군을 바꾸지 않으면 제대로 된 무사라고 할 수 없다’고 일컬어졌을 정도였다. 그런 의미에 전형적인 인물이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였다. 타카토라는 7번 주군을 바꾸었다.

 처음 오우미[近江] 아자이 가문[浅井家]을 섬긴 타카토라는 이때 아직 13살의 소년이었다. 그 당시 일화로 도망자를 처치한 이야기가 있다. 죄를 짓고 도주하다 어느 집에 숨어 들어가 저항하는 죄인을 처치하였는데, 이때 행한 타카토라의 모습에서 그의 인생 전반에 걸친 삶의 방식을 엿볼 수 있다. 부친과 형이 집 안에 들어가 죄인과 싸우자, 죄인은 틈을 엿보다 집 밖으로 도망쳤다. 타카토라는 문 근처 그늘에 숨어있다가 도망에 성공했다고 방심한 죄인을 불현듯이 덮쳐 처치하였다고 한다. 즉 정공법보다도 오히려 물밑 정치교섭에 뛰어난 타카토라의 특색을 엿볼 수 있다

 다음으로 타카토라는 아자이 가문이 아네가와[姉川]에서 오다[織田]-토쿠가와[徳川] 연합군에게 패하여 위세가 낮아지자, 17살에 낭인이 되어 같은 오우미의 아츠지 아와지노카미[阿閉 淡路守]를 섬겼고[각주:1], 그 다음으로 이소노 탄고노카미[磯野 丹後守]를 섬긴다. 둘 다 한 달 어쩌면 수개월 만에 각 가문에 한계를 느껴 오다 노부즈미[織田 信澄]의 가신이 되었지만[각주:2] 노부즈미도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 때 누명을 쓰고 살해당했다. 노부즈미의 부인이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딸이었기에 미츠히데 일당으로 오해 받아 살해당한 것이다[각주:3].

 다음으로 히데요시[秀吉]의 동생 하시바 히데나가[羽柴 秀長]를 섬기면서 2만석까지 출세. 그제서야 안정을 찾나 싶었더니 그 히데나가도 1591년에 죽었고, 다음으로 히데나가의 양자인 히데야스[秀保]를 섬기지만 히데야스 역시 몇 년 뒤 죽자, 아무리 타카토라라도 한때는 세상을 버리고 코우야 산[高野山]에 은거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아까워한 히데요시의 소환에 응하여 하산하여 이요[伊予] 7만석에 봉해졌다. 이렇게 타카토라는 여러 가문을 전전하다 히데요시 휘하에 속하게 된 것인데, 그러는 동안 눈에 뛸만한 무용담이 거의 없다. 타카토라는 창놀림보다는 원활한 인간관계를 추구함으로써 세상을 헤쳐나간 것이다.

 훗날의 일로 그가 부하를 얼마나 능숙히 썼는가에 대해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가신 중에 유녀(遊女)에 빠진 자와 도박에 미친 자가 있어 둘 다 재산을 모두 잃고 말았다. 타카토라는 유녀에 빠진 자를 좆병진이라며 영구추방하였지만, 도박에 미친 자에게는 100일간 근신과 급료 감봉에 그쳤다. 이 둘에 대한 처분에 차이가 생긴 것은 이러했다. 유녀에 빠져 무기까지 파는 놈은 앞길이 암담하지만, 도박에 미친 자는 남에게 이기려는 호승심이 있기에 무사로서는 아직 쓸만한 곳이 있다는 것이었다.[각주:4]

 또한 사표를 내고 떠나는 가신에게 타카토라는 그 무사를 초대하여 직접 차를 대접하고 차고 있던 칼을 주면서,
“새로 취직하는 곳에서 맘에 안 드는 일이 생기면 언제든 다시 돌아오게나”
라는 말을 항상 하였기에 일단 토우도우 가문[藤堂家]을 떠났더라도 다시 돌아와 예전 봉록을 그대로 받은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타카토라는 이름있는 무사를 자신의 가신으로 삼는 것에도 노력하였다. 센고쿠 시대에 탑 클래스 급의 무용을 자랑하던 와타나케 칸베에[渡辺 勘兵衛]를 2만석으로 데리고 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전쟁터에서는 무명잡배 100명보다도 명성이 자자한 와타나베 칸베에 쪽이 적에게 더 공포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이 타카토라의 생각이었다.

 타카토라의 이름이 갑자기 역사의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은 히데요시가 죽은 다음부터이다. 혼돈스러운 정세 속에서 타카토라는 그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주인 고르기를 행했다. 타카토라는 히데요시 사후의 천하인(天下人)을 이에야스[家康]로 보고 자주 친해지려고 접근하였으며[각주:5], 그러기 위해 이에야스와 대립하고 있던 사람들의 정보를 크건 작건 세세히 이에야스에게 보고하였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무리가 꾸미던 이에야스 타도 계획을 밀고 한 것도 타카토라였다. 선택 받은 이에야스는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가 죽어 히데요리[秀頼] 후견자로 사실상 No.1 실력자가 되자, 모반을 꾸몄다는 이유를 대며 마에다 토시나가[前田 利長=토시이에의 후계자]와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에게 인질을 바치게 만들었다.
 
이에야스가 이렇게 인질을 얻도록 만든 것이 타카토라였다. 자신도 나서서 동생 쿠라노스케 마사타카[蔵之助 正高]를 에도[江戸]에 보냈다. 곧이어 세키가하라[関ヶ原] 결전이 다가오자 타카토라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있어 중대한 역할을 맡게 된다.

 1600년.
 이시다 미츠나리가 거병했다는 소식에 이에야스는 아이즈[会津]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정벌 중이던 군사를 회군하였지만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등의 부대가 오와리[尾張] 키요스 성[清洲城]까지 진출하였는데도, 이에야스 자신은 에도 성[江戸城]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선견 부대의 장수들의 동향이 신경 쓰였던 것이다. 그들은 전부 토요토미 은고[豊臣恩顧] 다이묘우[大名]들이기에, 갑자기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에게 돌아설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타카토라의 무대 뒤 활약은 이때도 펼쳐지게 된다. 이에야스가 에도 성에서 대기하도록 진언한 것도 타카토라였으며, 키요스 성에 있으면서 다른 장수들의 동향을 시시각각 에도에 보고한 것도 타카토라였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러한 타카토라의 정보에 따라 안심하고 에도를 출발하였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9월 15일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동서(東西) 결전의 막이 올랐다. 여기서도 타카토라의 수면 하 공작이 빛을 발한다. 타카토라의 부대는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지휘아래서 서군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의 부대와 싸웠지만 차츰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배반이 형세를 역전시켰다. 마츠오 산[松尾山]에 진을 치고 있던 코바야카와 부대가 오오타니 부대의 옆구리를 찌른 것이다. 그리고 오오타니 부대에 속해 코바야카와를 대비하기 위해 배치했던 쿠츠키[朽木], 와키자카[脇坂], 오가와[小川], 아카자[赤座] 등의 약소 다이묘우마저 코바야카와에 동조하여 오오타니를 공격한 것이다. 이 약소 4명의 다이묘우가 배신하도록 사전에 공작한 것이 타카토라였던 것이다.
 이런 일련의 활약으로 인해 타카토라는 8만석에서 단번에 이요[伊予]의 반인 20만석으로 가증되었다.

 이에야스에 대한 타카토라의 헌신은 계속 이어졌다. 앞서 언급된 동생 마사타카[正高]에 이어, 1606년에는 다른 다이묘우들보다 앞서 처자식을 에도에 보냈을 뿐만 아니라, 휘하 가로[家老] 4명의 자제들까지도 에도에서 살게 만들었다.

 타카토라의 헌신적인 자세는 이에야스가 죽어서도 이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막부(幕府)에 대한 충성으로 닛코우[日光]에 이야야스 묘소 선정, 건물 설립 등에 조력하였으며, 에도 우에노[上野]에는 칸에이 사[寛永寺]가 세워졌을 때에는 지금도 남아있는 우에노 토우쇼우 궁[上野東照宮][각주:6]을  만들어 바쳤다.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1556년 오우미[近江] 아자이 군[浅井郡] 토우도우 향[藤堂郷]에서 태어났다[각주:7]. 아자이 가문[浅井家] 멸망 후 여러 가문을 전전하다가 1594년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섬겨 이요[伊予] 우와지마[宇和島]에 7만석. 1597년 제2차 조선침공[각주:8]에서는 수군(水軍)으로 출동.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이요[伊予]의 절반을 하사 받았으며, 오오사카 전쟁[大坂の役]에서 세운 공적으로 이가[伊賀], 이세[伊勢] 거기에 더해 시모우사[下総] 카토리 군[香取郡]을 합쳐 총 32만3900여석의 영지를 거느린다. 1616년 4월 17일 죽었다. 75세.

  1. 아자이 가문[浅井家]과 아츠지를 떠난 것은, 두번 다 성질을 참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다투다 칼을 뽑아 부상을 입혔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2. 오다 노부즈미[織田 信澄]는 이소노 탄고노카미의 양자였기에, 이소노가 노부나가에게 쫓겨난 뒤 그대로 노부즈미를 섬기게 아닌가 싶다. [본문으로]
  3. 노부즈미가 살해당하기 이전에 노부즈미와 결별하였다. 결별이유는 뭔가 맘에 안 들었기 때문이라고만 한다. [본문으로]
  4. 사족으로 만약 저였다면 둘 다 쫓아 냈을 것입니다. 도박이건 유녀건 앞뒤 가리지 못 하는 놈들이기에 앞길이 암담하긴 마찬가지. 오히려 도박이 더 맘에 안 듭니다. 주위에 도박에 미친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피하시길. [본문으로]
  5. 그 이전 히데요시의 정무소였던 쥬라쿠테이[聚楽第]의 이에야스 거처를 건축한 것이 타카토라로, 이때부터 친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6. 에도에 있던 토우도우 저택[藤堂藩邸]에 만들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7. 이누가미 군[犬上郡] 혹은 코우라 군[甲良郡] 출신이 더 유력하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정유재란.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0.08.30 08: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오랜만에 보는 새 포스팅의 느낌이란 이런 것이군요!
    독자들을 갈증에 시달리게 하기 위해 일부러 장치를 마련하셨다고 믿겠습니다. 무정한 분 같으니(..응?)

    일본에서 도도하면 가장 빠르게 생각나는 것은 다카토라와 헤이스케가 아닐런지요. 다카토라는 이순신에서의 굴욕 덕분인지 그나마 대중에게 더 유명한 느낌이 듭니다.

    다카토라는 7번이나 주인을 바꿨지만 사람됨됨이를 보아 주인을 섬길때는 정말 열과 성을 다해서 섬겼다는 느낌이 듭니다.

    사족입니다만 유녀와 도박에 빠진 이야기를 하셨는데, 도박에 빠진 자의 경우에는 저도 써볼 의향은 있습니다. 인생은 도박판이니까요. 승부사라고 완곡하게 바꿔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후후) 아, 그리고 각주 5번에 '타카노라'라고 쓰셨네요. 첫 댓글을 다는 자는 오타도 제일 처음 지적하는 영예를 누릴 수 있어서 참 좋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8.30 23: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말 죄송합니다. 늙은 것이 그저 게을러서....

      토우도우[藤堂]하면 말씀하신 이름에 더해 전 개인적으로 토우도우 효우에[藤堂 兵衛]가 추가로 떠오르는군요. 지상 최강의 교장[校長]에게 한 칼에 두동강이가 나도 죽지 않는 양반입죠.

      초반에 지 성질머리 못 참고 뛰쳐 나온 것을 보면 히데나가 이후에나 열과 성의를 다 했나 봅니다.

      인생은 도박판이다!!라고 외쳐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그만큼 판돈(빽이라던지 돈이라던지)이 있어서 성공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 같더군요. 거기에 휩쓸리지 않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꼼꼼히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얼릉 고치겠습니다.

  2. Gyuphi IV 2010.08.30 11: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면 세키가하라 이전에 가봤을때 서군 패배조(...)들 포진터 한꺼번에 몰린데를 보긴 했는데 세부공작은 이녀석 때문이었던가(...) 서군측에 있어서는 정말 눈엣가시었겠군요(...) 초전에서 잘 싸우던게 다 망했으니(...)

    시간당 6000엔의 아가씨와 자금운용의 묘에 따라 같은 금액으로 수시간 이상 버틸 수 있는 게임센터 파칭코를 비교해 본다면 도박쪽에 미친 친구가 묘하게 재능에서 앞선다는 느낌을 받긴 합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8.30 23: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 책에선 그렇다는데... 다른 곳에선 그렇다고 한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책의 신뢰도야... (번역하고 있는 제가 할 말은 아닙니다만...^^; )

      일본에 있을 때, 파친코에 빠진 유학생을 보았습니다만... 그분을 말리려 그분 부인께서 파친코에 갔다가 같이 빠져서 부부가 함께 파친코를 하더군요.....결국...

      파친코가 지금도 그때와 같은 시스템인지 모르겠지만, 가장 소액인 3000엔짜리 카드는 금방 사라지더군요. ^^ 6000엔으로 그 이상 불릴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지만 같은 경우라면 아가씨에게...(퍽~)

      재능은 모르는 거라 생각합니다. 단순히 파친코에 특화된 재능으로 다른 곳에는 무능할 수도 있으니까요.

      여자건 도박이건 자기 일을 내팽게친 상태에서 이미 아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같음 차라리 자기 일 내팽게치지 않고 승부욕 있는 사람을 찾는 노력을 더하겠습니다.

  3. 1 2010.09.02 11: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게 읽었습니다. 언제 올라오나 한달에 몇 번씩 들어왔는데 드디어 올라왔네요!
    계집질, 도박 둘 다 뭐. 근데 보통 음주까지 세 개 같이 하지 않습니까?ㅋ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9.04 23: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워서 죄송합니다. 그럼에도 꾸준히 찾아와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뭐든 적당히만 하면 스트레스 풀기도 하기에 나쁘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적당을 넘어서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입죠. 공자할배도 그랬다고 하더군요. 뭐든 과하면 부족한만 못하다고 했다니까요.

  4. 정동희 2010.09.09 16: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간만에 글 정말 잘 봤습니다
    다카토라 이 놈은 정말... 전국시대에서도 보기 드물게 흥미로운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이 놈을 모사꾼, 기회주의자 수준으로만 생각했는데, 나름 인생은 열심히 살았더라구요
    만화책 '센코쿠' 인가 에서는 의외로 상당한 무용의 인물로 묘사했더군요(근거가 있는 모양입니다)

    다카토라가 주인을 여러번 바꿨다지만 역시 주인이라면 히데나가가 떠오르는데
    저도 직장생활 10년하면서 여러가지 느낀 바가 있지만
    이 히데나가를 섬길때가 이 인물의 최 전성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나중에 이에야쓰를 섬기면서 더 출세를 하긴 했지만, 뒤로 욕도 많이 먹었으니)

    다카토라의 출신이나 그 간에 섬긴 주인(이소노, 노부즈미)을 보면 참 재수가 없었다 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던 그가 히데나가를 만나면서 앞길이 확 트인거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9.11 11: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타카토라는 키와 덩치가 크다는 기록과 그가 죽었을 때 살펴보니 수 많은 상처가 있었다는 것을 보면 무용도 꽤 뛰어났을 것 같습니다.

      젊었을 때의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인한 실패 등을 히데나가 밑에 와서야 경험으로 살린 것 같습니다.

    • 정동희 2010.09.13 11: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젊어서 사람 죽이고 도망친 건 도시이에 하고도 비슷하네요
      제가 늘 주장하지만 역시 인간은 여러가지 경험을 통해서 바뀐다는...
      젋어서는 욱해서 사람 죽이고 했지만, 나이 들어서는 엄청 신중해 질 수도 있다는...

  5. 정동희 2010.09.09 16: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뭐랄까... 그 동안 전망도 안보이고 딱히 실력도 없는 그저 그런 중소 하도급업체 부장정도로 근무하다가
    갑자기 초 일류 대기업 회장의 동생 회사에 임원급으로 입사를 하게 됐다고나 할까요

    말이 동생 회사지 사실은 본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고, 사세(영지)도 상당하고
    같이 일하는 동료들도 빵빵하고, 주인도 능력있고...
    그야말로 가진 능력을 보여주며 도약 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를 만났다랄까...

    특히 시코쿠 원정은 그 절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마 히데요시가 직접 참전하지 않은 최초의 대규모 원정으로 생각되는데, 글자 그대로
    회장의 대리인으로 부회장(히데나가)이 프로젝트의 총책을 맡았고,
    히데나가가 그 밑에 수석 중역이었으니, 이 때의 감개가 어떠했을지...
    특히 도중에 일(죠쇼카베 공략)이 지연되자 회장이 직접 나서겠다 했는데
    이 때 히데나가가 처음으로 제가 직접 나섰는데 체면좀 살려 주십쇼 하면서 거절했잖아요

    이 때의 기분도 생애에 다시 느끼기 어려운 쾌감이 아니었을까 생각 됩니다

    그리고 뒤 이은 규슈 정벌에서도 별동대(10만)를 이끌고 전공을 세웠고,
    누가 보더라도 히데요시 정권에서의 이인자는 히데나가
    히데나가의 오른팔은 다카토라 라고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도쿠가와 정권 하에서의 몇 십만석이 뭐 대단하겠습니까)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9.11 11: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당시와 지금을 좋은 예로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확실히 히데나가의 오른팔 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히데나가가 죽고 난 뒤 히데나가의 후계자인 히데야스[秀保]의 대리인 격으로 임진왜란에 출정한 것을 보면 야마토 토요토미 가문[大和豊臣家]에서 지위는 수석가로급이었듯 합니다.

    • 정동희 2010.09.13 11: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히데나가도 보통 인물이 아닌데
      그 가로격으로 발탁이 됐다면 다카도라가 여러가지로
      능력을 보였던 모양입니다
      사실 그 전에 근무했던 곳을 보면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데 말이죠...(최종 이력이 쓰다 노부즈미 밑에 있다 나온...)
      암튼 다카도라나 시마사콘이나 히데나가집이 잘 됐으면
      훨씬 역사에 크게 남았을 것 같은데요
      능력도 능력이지만 역시 사람을 잘 만나야 합니다

  6. 정동희 2010.09.09 16: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더구나 히데나가는 어쩄든 히데요시 보다 나이가 적고,
    히데요시는 마땅히 후계자도 없으니
    다카토라의 마음속에 원대한 포부와 계획이 어찌 없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주인(히데나가)이 갑자기 졸 하고,
    그 후계자 마저 얼마 살지 못했으니,
    이 때 절망감과 상실감이...

    미쓰나리 처럼 일찌 감치 엘리트로 발탁되어 본사 중역을 했던 것도 아니고,
    도라노스케나 이치마스 처럼 인척관계로 승승 장구 한 것도 아니고,
    그저 그런 중소기업 전전하다 마침내 줄을 잡아 대권까지 바라보게 됐는데
    한순간에 다시 퇴물 뒷방 늙은이가 되었으니...

    그래도 은거했다가 다시 나와서 히데요시, 이에야쓰를 섬긴 걸 보면
    젊어서 부터 인고의 세월을 거치며 쌓은 공력이 헛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간만에 글을 보고 기뻐서 두서 없이 말이 많아졌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9.11 11: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중이되겠다고 세상을 등졌던 것을 히데요시가 설득하여 자기 휘하로 만든 것을 보면 히데요시에게도 인정받았던 것 같습니다. 말씀대로 헛된 공력은 아니었던 듯.

      감사한 말씀 정말 고맙습니다. ^^ 꾸준히 글을 올리겠습니다.(...근데 전 이 주말에도 일하고 있어요...T.T)

    • 정동희 2010.09.13 11: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히데요시의 인정은 당연한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시코쿠 정벌 사령관, 큐슈 정벌 별동대 사령관의
      수석가로격이니...
      지금으로 따지면 대표PM이나 본부장이 있지만 실제 업무는 그 밑에 실무수석이 많이 하잖아요
      히데요시 특기가 옆집 기둥뿌리 뽑기인데, 자기 동생이자 정권이 2인자 격인 히데나가의 심복을 몰랐을 리 있을까요

      암튼 그건 그렇다 치고
      토요일까지 근무로 노고가 많으십니다
      풀뿌리 민초의 삶이 참 고단하네요

十三.

 요도도노(淀殿)는 분노했다. 상경하라니 마치 주인이 가신에게 보이는 태도가 아닌가? 사실 여기서 히데요리(秀)가 상경한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관습에서 보건대 이에야스(家康)의 부하 다이묘우(大名)가 된다는 계약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요도도노는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키요마사(正)나 요시나가(幸長)는 [고(故) 타이코우(太閤)가 직접 키운 무장]이라는 자격으로 끈기 있게 요도도노를 설득했다. 이 귀부인을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그녀의 자존심을 자극하면 안 되었기에 다소 말을 모나지 않게 하였다.
 - 지금만 조금 참으시면 됩니다
 라는 것이었다. 천하의 누구도 믿지 않는 관측이었지만 요도도노와 그녀의 시녀들에게만은 통용되었다. 이에야스가 죽고 나면 바라던 모든 것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토요토미 가문은 전쟁을 피해야만 하옵니다. – 고 키요마사들은 말했다. 요도도노도 그 점이 두려워,

 "그렇다면 히데요리님이 상경하시면 이에야스의 마음을 풀 수 있다는 것인가?"

 라는 것을 몇 번이나 키요마사에게 물었다. 그렇사옵니다. 그렇사옵니다. – 하고 키요마사는 몇 번이나 말했을 것이다. 상경만 하신다면 양 가문에는 평화만 있을 뿐이옵니다 - 고 지금은 이에야스의 부하 다이묘우(大名)가 된 키요마사는 그 입장으로 보증하였다. 요도도노는 그 말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요도도노는 차츰 마음이 풀어졌다. 잠시 갸웃거리더니 뜬금없이 밝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코우다이인(高台院)님께서 히데요리님에게 해가 되실 말씀을 하시지는 않을 터이니 그에 따를 수밖에 없겠지"

 하고 그녀가 혼자 중얼거리자 예전부터 이 여성을 좋아하지 않았던 키요마사조차 가슴이 저려와 눈물을 흘리며, 졸자가!! – 감정을 주체 못하겠는지 거센 말투로 말했다.

 "졸자가 우다이진(右大臣)님의 손을 잡고 메시어 니죠우 성(二城)까지 함께 하는 이상, 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우다이진님의 생명은 지키겠사옵니다"

 라고 말했다. 키요마사가 이런 말을 한 이유는 이에야스가 이번 기회에 히데요리를 죽이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소문이 오오사카 성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도도노에게 전쟁이라는 자신의 생각 범위를 넘어선 커다란 위협보다도, 히데요리가 칼날에 쓰러진다는 자기나름의 현실적 상상 쪽을 훨씬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요도도노는 통통한 턱을 끄덕이면서 그제서야 승낙했다.

 이 해의 히데요리는 19살. 더 이상 소년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으며 거기에 벌써 1남 1녀의 부친이기도 했다. 정실 센히메(千)의 자식이 아니라 히데요리가 자신의 곁에 있던 시녀들에게 낳게 만든 아이들이었다.
 - 굉장히 어린아이 같다.
 라는 것이 이에야스의 귀에 들어와 있는 히데요리의 평판이었지만 그러나 아이를 만드는 능력에 있어서만은 망부 히데요시(秀吉)보다 뛰어났다. 그러면서도 상경여부 등 자신의 몸과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중대사에 관해서는 모두 모친에게만 맡겼다.

 히데요리가 오오사카(大坂)를 출발한 것은 그로부터 수일 후인 3월 27일이었다. 텐마(天)에서 화려한 귀족선(御座船)에 몸을 싣고 요도가와(淀川) 강을 거슬러 북상하였다. 이 히데요리의 신변을 지킴에 있어서도 키요마사는 만전을 기했다. 우선 쿄우토(京都)에서 예상치 못했던 사태가 일어났을 때를 대비하여 자기 가문 내에서 억센 무사 500명을 추려 상인이나 중으로 변장시켜 시내를 돌아다니게 하였으며, 거기에 300명을 후시미(伏見)에 주둔시켰고, 요도가와 강의 강변 경비를 위해서 아사노 요시나가(野 幸長)의 부하들을 포함한 철포 1000, 창병 500, 궁수 300인 부대를 배와 함께 북상시키는 한편 자신은 신발담당 하인, 가벼운 차림의 하급무사(足軽) 30명만을 주변에 두고 있었다. 이 신발담당 하인이나 하급무사들도 실은 변장으로 모두 경험 풍부한 무사 중에서도 용사만을 고르고 골라 따르게 하고 있었다. 거기에 항상 키요마사와 일컬어지는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와 미리 상담하여 후쿠시마 가문의 병사 1만 명을 자신의 본거지 히로시마(広島)에서 올라오게 하여 만일을 대비하였다. 마사노리 자신은 당장 쿄우()를 제압하기 쉬운 야하타(八幡)에 숙소를 정하여 거기서 뿌리라도 박힌 듯 다른 다이묘우(大名)들처럼 니죠우 성(二条城)에 가지 않았다. 단지 이에야스 측에게는 병 때문에 거동을 못한다는 식의 말은 하였다. 이에야스 측으로서는 카토우, 후쿠시마의 거동은 불유쾌했을 것이다. 그러나 카토우, 후쿠시마에게 있어선 세키가하라()에서 이에야스를 위해 그렇게 많은 활약을 해 주었다는 자부심이 있었기에, 그런 만큼 이에야스는 좀 과중하게 보일지 모를 경비태세를 이해해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히데요리는 후시미(伏見)의 선착장에서 배를 내렸다. 키요마사와 요시나가는 히데요리의 가마의 양 옆에 찰싹 붙어 둘 다 거대 다이묘우(大名)의 신분에 걸맞지 않게 종자라도 되는 듯 예의 바르고 조심스럽게 더구나 말에도 타지 않은 채 걸어갔다. 후시미(伏見)에는 이에야스가 보낸 자신의 11살 난 아홉 번째 아들 토쿠가와 요시나오(徳川 義直[각주:1]) 9살 난 10남 요리노부(頼宣[각주:2])가 마중 나와 길 위에서 인사를 올렸다. 그 요시나오와 요리노부가 각각 자신의 종자들에게 양산을 받치게 하고 있는 것을 키요마사가 보고,

 귀인에 대해서 무례하오. 당장 양산을 치우시오

 하고 주의를 주었다. 이런 키요마사의 과감한 태도도 후에 이에야스를 불쾌하게 만들었지만 그러나 이에야스는 곧바로 화내지 않았다. 이에야스가 죽은 뒤 카토우, 후쿠시마 양 가문은 에도 정권에 의해 멸문을 당한다.
 
어쨌든 19살 히데요리의 행렬은 입경하였다. 그 화려함은 타이코우 생전의 행렬을 방불케 하여 히데요시 행렬의 특징인
대모갑(玳瑁甲)으로 코팅된 창 천 자루를 2열 종대로, 철포대의 철포 덮개는 하나하나가 전부 호랑이 가죽이라는 화려함이었기에 쿄우토(京都)의 사람들은 오래간만에 토요토미 가문의 행진을 보고 타이코우가 살아있을 적의 그 눈부심을 떠올려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 즈음 쿄우토(京都)의 시민감정은 압도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친토요토미였기에 당시 쿄우토의 거리에는 [15살이 되었다면 앞 싸리를 묶으시오~ 묶으시오]라는 노래가 불려지고 있을 정도였다. 노래의 의미는 히데요리님이 15살이 되면 이에야스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성 앞의 방책을 준비하라는 뜻이었다. 그 히데요리가 지금은 훌륭히 자라 나이도 19살이 되어 죽은 아비와 같은 행렬을 하고 쿄우토(京都)에 올라온 것을 – 쿄우토(京都)의 사람들은 한 편의 웅장한 연극이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그 행렬을 보았을 것이다. 히데요리가 탄 가마 옆에서 황공해하면서 시종해 가는 180cm가 넘는 키요마사를 보며 그 충성스럽고 의로움에 감동하여 키요마사라는 사나이에게 더욱 깊은 애정을 품었을 것이다. 키요마사는 살아있을 때 서민들에게 경애 받아 토쿠가와 가문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에도의 시민들조차 그를 의한 노래를 불렀다. [에도의 모가리에게 거칠 것은 없겠지만 밤색 제석천(帝釈栗毛=키요마사의 애마)은 피하시오].[각주:3]
 
후시미(伏見)에서 쿄우()로는 타케다(竹田) 가도를 이용했다. 도중 도로 옆에 마중을 나온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와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가 절을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그들은 이에야스 휘하 다이묘우이긴 하였지만 이 시대 이 시기의 그들 감각으로 말하자면 이에야스는 상관이긴 했어도 주군이 아닌 다소 애매한 상하관계였으나 토요토미 가문과는 순수한 주종관계였다. 때문에 그들은 무릎 꿇고 넙죽 엎드린 예를 취하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형식상 그렇다는 것이지 그들의 충성심은 이미 토요토미 가문에서 떠나 있었다. 가마 옆의 키요마사는 그들을 보자마자,

 "두 분도 따르시오"

 하고 말을 걸었다. 이 때문에 토자마다이묘우(大名[각주:4]) 중에서도 이에야스에게 충성하기로는 손에 꼽히는 그들도 어쩔 수 없이 그 장소부터 키요마사처럼 예의 바르게 가마를 시종했다.
 가마는 니죠우 성의 성문을 거쳐 곧이어 현관에 다다랐다.


큰 지도에서 관련지명-요도도도_아들_13 보기

 이에야스는 현관까지 마중 나와있었다. 30여명의 다이묘우들도 전부 현관 앞 흰 모래를 깐 곳에 넙죽 엎드려 히데요리가 가마에서 나오는 것을 기다렸다.

 키요마사가 가마 옆에 오른쪽 무릎을 꿇고 곧이어 양손을 들어 가마의 문을 잡고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었다.
 '어떻게 자랐는가?'
 라는 것이 이에야스의 이 날 최고 관심사로 거의 숨을 죽이고 마른침을 삼키며 히데요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오사카 성 깊은 곳에서만 성장한 히데요시의 아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며 히데요리가 역사에 그 몸을 노출하는 것도 이번이 최초였다.

 히데요리가 나왔다.

 이에야스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키가 180cm 가까이 되는 듯했다. 백설 같은 피부에 시원스런 눈매를 가진 위풍당당한 위장부(偉丈夫)로 그가 서 있는 것만으로 그 주위에서 광채를 뿜는 듯했다. 이런 훌륭한 골격은 모계 쪽 할아버지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의 판박이 같아 만약 그 머리와 심장까지 나가마사에게 물려받았다면 절대 쉽지 않으리라.
 이에야스는 그리 생각했다. 생각하면서도 기분이 갑자기 상쾌해진 것은 이에야스의 정치적 입장에서 보면 묘했지만 그러나 좋은 골격을 가진 젊은이를 좋아하는 이에야스의 – 뿐만이 아니라 이 시대의 인간으로서의 – 말하자면 습성으로써 이에야스는 유쾌한 기분이 되었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직접 앞장서 안으로 들어갔다. 히데요리는 키요마사를 거느리고 아직 청년이라고 부르기에는 이른 키무라 시게나리(
木村 重成 – 히데요리 유모의 아들)에게 칼을 들게 하고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중앙 복도를 거쳐 객관의 앞을 지나 곧이어 [대면실]이라고 칭해지는 건물 끝으로 들어갔다.

 이에야스는 북을 향해서 앉았다.
 히데요리는 남을 향해서 이에야스와 대좌하는 자리에 앉았다. 쌍방 대등한 자리였다. 키요마사가 히데요리의 곁 60c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이 날 성안에서 작은 칼(
脇差
)도 차면 안되었기에 품 안에 단도를 숨기고 있었다.
 쌍방 대등한 입장이었기에 동시에 절을 하였다. 곧이어 키타노만도코로 – 이미
법체(
法體)가 된 코우다이인(高台院) 네네() – 가 나타나 이에야스와 히데요리 사이에 앉아 쌍방을 주선(周旋)하였다. 위계라는 점에서 말하면 종일위(從一位)인 코우다이인이 제일 높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안상이 나왔다. 들고 나오는 역할을 맡은 이들은 토쿠가와 가문 직속의 중신들로 이타쿠라 이가노카미(
板倉 伊賀守[각주:5]), 나가이 우콘(永井 右近[각주:6]), 마츠다이라 우에몬타이후(松平 右衛門大夫[각주:7]) 등이 예법대로 발을 바닥에 끌며 상을 내왔다. 히데요리는 사전에 키요마사에게 들은 대로 칠오삼의 상차림[각주:8]으로 나온 주안상에 한 번도 젓가락을 대지 않았고 잔도 입술에 가까이 대기만 할 뿐 마시지는 않았다. 대면은 말하자면 의식(儀式)으로 쌍방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곧이어 술잔을 세 번 받았을 때 키요마사가 히데요리를 향해서,

 "오오사카의 어머님께서 기다리실 것입니다. 오늘은 이만 자리를 뜨시옵소서"

 라고 말하자, 이에야스는 처음으로 입술을 떼어 목소리를 내었다. 굉장히 밝은 목소리로,

 "정말 오오사카의 어머님께서 기다리시겠구려. 오늘 참 경사스러운 날이었소. 그만 돌아가시길"

 하고 말했다. 그 말을 하며 이에야스가 일어나자 히데요리도 일어났다. 시종 무언이었다.
 이에야스는 다음 방까지 히데요리와 함께 갔다. 가다가 히데요리를 올려다 보며,

 "도노(殿)는"

 하고 그런 경어를 사용하여, 기분이 좋은 듯 말했다.

 "도노는 생각보다 훨씬 멋진 성인이 되셨소. 경사롭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 같소. 졸자는 나이를 많이 먹어 내일은 어찌 될지도 모르오."

 하고 말했다. 더 말하길,

 "졸자의 수명이 다하거든 우효우에(右兵衛=9남 요시나오)와 히타치노스케(常陸介=10남 요리노부)를 잘 부탁 드리옵니다."

 거기에는 요시나오, 요리노부라는 이에야스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히데요리는 그 쪽으로 눈길을 주고는 미소를 지으며(처음으로 표정이 변했다)

 "알겠습니다."

 하고 명쾌하고 또렷또렷하게 말했다. 이 상쾌한 말투를 들었을 때, 이에야스는 이때만큼 히데요리에게 시샘을 느낀 적이 없을 것이다. 늙음이란 이미 그 자체로 약함을 뜻하며 젊음이라는 것은 노인에게서 보면 그 자체가 거만함이었다. 이에야스는 이 젊은이를 자기가 죽을 때까지 살려 놓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히데요리는 쿄우토(京都)를 떠났다. 그 후 이에야스가 자기 방에서 휴식하고 있을 때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가 찾아왔다. 이에야스의 침실에까지 올 수 있는 것은 이 늙은 모신(謀臣)에게 주어진 특권이었다. 마사노부는 히데요리와 대면했을 때의 감상을 들으러 온 것이다. 어떠셨습니까? 하고 마사노부가 묻자 이에야스는 잠시 생각에 잠긴 뒤 곧이어 툴툴대며,

 히데요리는 어리석다고 들었지만 전혀 그렇지 않고 현명했다. 다른 사람의 명령 같은 것은 받을 것 같지 않다

 는 뜻의 말을 하였다. 마사노부는 이때 이에야스에게 가까이 가, 걱정할 거 없지 않습니까? 저에게 그 분을 어리석게 만드는 묘안이 있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을 했다지만 사실인지 어떤지. 마사노부의 묘안이라는 것은 칸토우()에서 센히메()를 따라 오오사카(大坂)에 가 있는 시녀들에게 지시를 내려 히데요리가 주색에 빠지도록 만들어 정신을 황폐화시키자는 내용으로 사실 그렇게 비밀리에 지시를 내렸다고는 하지만 현실의 이에야스도 마사노부도 그런 것에 기대할 정도로 철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거친 방법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네~네~ 기다리시던 변명입니다.

  1. 쇼우군 가문(将軍家)의 후사가 끊겼을 때 쇼우군을 배출할 수 있는 어삼가(御三家) 필두인 오와리 가문(尾張家)의 시조. 단 결국 한 번도 쇼우군 배출을 하지 못했다. [본문으로]
  2. 어삼가 No.2 키이 가문(紀伊家)의 시조. 후에 8대 요시무네(吉宗), 14대 이에모치(家茂)를 배출. [본문으로]
  3. 원문은 [江戸の無頼漢(もがり)にさわりはすとも、よけて通しゃれ帝釈栗毛]. 모가리(もがり)란 당시 에도에서 유명했던 공갈범을 말한다. 역자는 '帝釈栗毛'을 밤색 제석천이라고 해석하였다. 栗毛는 말의 털이 밤색을 의미하며, 帝釈는 불교의 수호신인 제석천(帝釈天)을 말한다. [본문으로]
  4. 세키가하라(関ヶ原) 이후부터 토쿠가와 가문을 따른 다이묘우(大名). [본문으로]
  5. 이타쿠라 카츠시게(板倉 勝重). 당시 에도 바쿠후의 쿄우토 감시관(京都所司代). [본문으로]
  6. 나가이 나오카츠(永井 直勝) – 뛰어난 전술지휘관으로 작지만 각 요소요소에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본문으로]
  7. 마츠다이라 마사츠나(松平 正綱) 당시 에도 바쿠후 재정장관(勘定頭). [본문으로]
  8. 七五三の本膳. 메인에 7개의 안주, 두 번째 상에 다섯 가지 안주, 세 번째 상에 세 가지 안주로 구성된 상. 성대한 주연에 나오는 차림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이서당 2009.04.19 07: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 편도 잘 읽었습니다! 히데요리가 키가 180가까이 되었다니 놀랍네요 (정말 히데요시의 씨? --a).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4.21 00: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모계쪽 유전자를 이어 받았다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초년기에 험하게 살았다는 히데요시에 비해 세상의 좋은 것은 모두 먹고 자란 히데요리는 키가 컸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담으로...
      60년대에만 하더라도 180만 넘어도 거구 소리를 들었지만(모 하드보일드 풍의 탐정은 6피트의 키로 엄청난 거구란 묘사가 있습죠) 지금은 그렇지도 않습죠. 어딘가에서 읽기로는 사람의 키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이유에는 냉장고의 보급을 들더군요. 신선한 먹거리가 인간의 키를 늘려 주었다고요.

  2. 댓글달자 2009.04.19 14: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확인해 볼수는 없지만 십중팔구 히데요시 진짜 아들이 아닐겁니다.
    다른 여자들이 다 히데요시 씨를 못 받았는데 요도기미만 받았다는게 뭔가 수상하지 않습니까? 외모도 현저히 다르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4.21 00: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예전엔 그리 생각했지만 지금은 반반입니다.

      여담으로...히데요시에게도 친자식은 있었습니다. 히데카츠(秀勝)라고...그를 너무 아쉬워 했는지 후에 양자 두 명(노부나가의 4째 아들, 살생관백 히데츠구의 동생)에게도 물려줄 정도였습죠.

      떠도는 말로는 딸도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다산이 가문 특징인 오다 가문의 여인 요도도노만이 두 명이나 히데요시의 자식을 배출한 것도 일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요약하자면 애기씨가 부족한 히데요시와 임신을 쉽게 하는 몸을 가진 요도도노...유독 요도도노만 임신한 이유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임신이란 생각외로 쉽기도 혹은 어렵기도 하다더군요.

  3. dameh 2009.04.22 15: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전에 니조성에 갔을때 遠侍の間에 들어간적이 있었는데 설명에 '니조성 회견'이 여기서 열렸었다는 글이 있더군요.

    왠지 이 글을 읽고 그 광경을 떠올리니 전율 비슷한게 느껴집니다. 이래서 역사라는게 해볼만한 학문인가..싶기도 합니다만;

    사실 나고야에 산다면서 나고야성은 한번도 안가본 주제에 교토이야기 하려니 좀 묘하긴 묘하군요;; 아 게으름이랄까; 잡다하게 바쁨이랄까..;; 세월만 빨리 흐르고있으니 원;;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4.22 16: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원문에서는 御座の間(저는 '대면실'이라고 번역)라 하여 응? 이라는 생각에 검색해 보니 다메엣찌님 말씀대로군요. 이루어진 곳은 토오자무라이(遠侍)에서 행해졌네요.

      御座の間는 시로쇼인(白書院)- 저는 '객관'이라고 번역했지만 이곳은 쇼우군의 침실이었고 - 의 별칭이었군요.

      아이 참~ 시바 선생님도...
      시로쇼인을 지나 시로쇼인으로 들어간다니...

      아~ 그 전율 저도 느끼고 싶군요...
      (당분간 일본에 갈 일이 없네요. 전...)

      뭐 전 한국에 살면서 일본에 관한 것만 포스팅하는데요 뭐.... 참~ 나고야성에 가시거든 사진 많이 찍고 저 좀 공유해 주세요~~~(나고야성 뿐만 아니라 역사관련 사진은 찍으면 전부 공유해 주세요)

  4.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4.25 21: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번 편에 이어서 잘읽었습니다.

    히데요리 얘기가 나와서입니다만...정실이 낳은 아들이 적자가 될수 있는것 같은데, 측실이 낳은 히데요리를 적자라 볼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딱히 경쟁자(?)가 없는 후계자라....;;; 상속은 했지만 적자라고는 부르지 않는지, 아님 그냥 그래도 적자라고 하는지 궁금하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4.26 21: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른 아이가 있었다면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만 외동아들만 있는 상황에서 적자라는 명칭에 모친을 구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일본에서 적자는 모친의 구별보다는 우리의 '세자'...말씀하신 후계자에 가깝지 않았을까요?

      특히나...公家의 경우.
      적자의 선택은 부친의 권한이었다고 합니다. 그 부친인 히데요시가 적자라고 했으니 그것으로 끝이 아닐까요?

      ....까지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노아님께서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시면 말씀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4.29 22: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적자는 정실의 자식만.이라는 생각이었던지라 그냥 왠지 애매한 느낌이랄까...

      ...생각해보니 노부나가-노부타다의 경우도 있는게 제 고정관념이었나 봅니다;;

  5. 본다충승 2009.05.06 14: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나 아이를 만드는 능력에 있어서만은 망부 히데요시 보다 뛰어났다." 이 구절이 참 재밌네요.
    어삼가 도련님들과 오사카 전투의 토요토미측 중요 무장 키무라 시게나리도 등장 했네요.

四.

 

 삼 년이 지났다.

 챠챠(茶々)는 20살이 되었다.

 “아자이 님(浅井殿)의 아씨를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하고 어느 날 밤에 히데요시에게 물은 것은 놀랍게도 그의 부인인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였다.

 “이미 시집갈 곳은 정하셨겠죠?”

 “아직이다”

 히데요시는 그다지 흥미가 없는 듯한 얼굴을 하였다.

 “아직이요?”

 “그렇다”

 “알고 계십니까? 벌써 스무 살이옵니다”

 말할 것까지도 없사옵니다만 - 하고 키타노만도코로는 거듭 말했다.

 “보통 15살이면 시집을 갑니다. 20살이면 좋은 날이 다 가 정실이 먼저 죽은 곳이라도 찾을 수 밖에 없는 나이라고 할 수 있죠. 소중한 분을 맡고 계시면서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하고 그녀가 끈질기게 말한 것은 성안의 소문을 하루 종일 듣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렇게 존귀한 핏줄이며 저렇게 미인인데도 – 하고 소문은 말한다. 어디로 갈 것이라는 결혼 소식을 전혀 들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전하는 뭐랄까 그 거시기 한 마음이 있으신 것은 아닐까? 필시 그럴 것이다 - 라는 것이었다. 히데요시의 호색은 천하에 유명했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 시대는 남자건 여자건 모이면은 그런 종류의 이야깃거리로 쑤군거렸다. 예를 들어 성안의 소문에 따르면 –

히데요시님은 옛날부터 챠챠 님의 모친이신 오이치 마님(お市御料人)을 짝사랑하고 계셨었다. 아자이 씨(氏) 멸망 후 오이치 마님께서 오다 가문(織田家)으로 돌아오셨을 때도, 제발~제발~하면서 돌아가신 노부나가 님께 매달려서는, 제 부인으로 받아 들이고 싶습니다고 부탁하였지만 정작 오이치 님께선 그 분을 싫어하여 우연히 정실이 돌아가셔 홀몸이셨던 시바타(柴田)님께 가셨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시바타 공격은 사랑의 복수이죠. 그 증거로 히데요시님은 좀처럼 적을 죽이시지 않던 분이셨는데 시바타 님만은 용서하지 않고 텐슈각(天守閣)을 아예 재로 만드셨잖아요.

 라는 것이었다. 물론 모든 것은 억측에 지나지 않았다. 오이치가 아직 결혼하기 전엔 짝사랑하고자 하여도 아예 만날 기회조차 없었다. 또한 오이치가 과부가 되었을 때 히데요시가 그녀를 부인으로 하고 싶다며 울며 매달렸다고 하지만 히데요시에게는 비루한 신분일 때부터 처 네네(寧々) – 키타노만도코로가 있었다. 히데요시는 엄청난 호색한이었으면서도 이 조강지처를 유난히도 존중하며 둘도 없는 상담 상대로 하였고 겸해서 조심하는데 있어 예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처를 버리고 오이치를 정실로 맞아들인다는 이야기는 우선 이 남자에 한해서 있을 수 없었다. 참고로 호쿠리쿠(北陸)에서 시바타 카츠이에를 공격하여 죽였을 때는,

 “카츠이에를 죽이고 싶지는 않지만~”

 하고 몇 번이나 부하들에게 말했다. 죽이고 싶지 않지만 카츠이에를 죽이지 않으면 천하가 안정 되지 않는다, 이건 어쩔 수 없다 - 고 말하였다. 히데요시에게 놓여진 조건이 카츠이에를 죽여버렸다. 오다 정권의 필두가로를 이 세상에 살려두면 히데요시 정권은 성립되지 않는다. 사랑 놀음이 아니었다. 또한 히데요시는 원한을 몸 안에 저장하기 어려운 성격으로 원한, 복수라는 에너지가 이 인물의 성정에서는 절대 끓어 오르지 않을 것이다.

 소문은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 않다고도 확신할 수 없었다. 히데요시는 에치젠(越前) 이치죠우다니(一乗谷)에서 처음으로 성숙해진 챠챠를 보았을 때 이렇게 오이치님과 똑 빼 닮을 수 있을까? 하고 틀림없이 피가 끓었다. 오이치를 짝사랑했다고 할 수 있는 과거는 없었다고 하여도, 오이치를 이 세상에서 미모가 제일인 사람이라고 마음 속으로 깊이 동경했었던 적은 틀림없이 있었으며 이는 히데요시뿐만이 아니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오다 가문의 가신들 중에서 수 없이 많이 있었을 터이며 오이치는 그런 존재였다. 오이치는 하늘나라 사람이었다. 히데요시는 거기까지 손을 뻗으려고 생각한 적이 없었고 그것이 무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으며 현실인식 감각이 너무 예리했던 그 당시의 히데요시는 무리인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할 정도 별난 인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치젠 이치죠우다니의 단계에서 달랐다.

 ‘이 아이는 내 날개 품 속에 있다’

 라는 것이 현실이었다. 오이치 그 자체는 아니더라도 그녀와 쏙 빼 닮은 소녀가 하늘나라에서 떨어져 자신의 날개 품에서 보호받는 몸이 되어 있는 것이다. 언젠가는 품어주마 하고 몰래 결심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러한 히데요시의 기분을 집요하게 윤색하고 왜곡하면 소문과 같은 이야기처럼 될 것이다.

 히데요시는 요 삼 년 챠챠를 조용히 그 생활 속에서 살게 해 두었다.

 - 조용히……

 라는 것이 히데요시의 챠챠에 대한 방침이며 머지않아 챠챠를 얻는 길이라고도 믿고 있었다. 그것은 공성전과도 닮아있었다. 하리마(播磨) 미키 성(三木城)도 이나바(因幡) 톳토리 성(鳥取城)도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도 히데요시는 결코 무리하여 공격하지 않았다. 장기 포위전 형태를 취하며 적의 보급선을 끊고 수로를 끊어 때로는 수공을 하여, 어쨌든 농성하는 병사들의 전의를 잃게 하는 전술에 주안점을 두어왔다. 그런 감각으로 챠챠라는 존재를 보고 있었다. 무턱대고 챠챠의 침실에 함부로 뛰어드는 식의 어리석음을 이 남자만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히데요시가 보건대 챠챠에게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긴 시간이 챠챠가 가지고 있는 옛 상처를 아물게 할 것이다. 그 동안 빈번한… 그러나 담백하고 온정에 넘치는 접촉이 히데요시에 대한 챠챠의 마음을 조금씩 바꾸어갈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 때문에 히데요시는 요 삼 년 궁중의례를 위해서 쿄우(京)에 올라와서 전쟁 때문에 몇 번이나 스즈카토우게(鈴鹿峠) 고개를 넘어[각주:1] 동쪽으로 정벌하러 떠나면서, 그렇게 간 곳곳마다 반드시 챠챠에게 진귀한 선물들을 보내며 근황을 묻는 편지를 보냈다. 자연스레 챠챠도 예의상 그에 대한 답장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챠챠에게 있어서 요 삼 년은 일분일초가 히데요시의 온정 속에 있었다.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당연히 네네는 그러한 히데요시의 거동을 그렇게 볼 수 있다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시녀들에게서도 여러가지 소문을 듣고 있었다. 편지 왕복 등도 챠챠의 시녀가 남들에게 흘렸기 때문에 네네의 귀까지 들어왔다.

 불길한 생각을 계속 하던 차에 몇 일전 오다 우라쿠(織田 有楽)가 차(茶)의 자리에서,

 “오우미(近江) 사람들이 열심이더군요”

 라는 것을 네네에게 뜬금없이 말한 것이다. 우라쿠는 많이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네네의 현명함은 그것을 헤아릴 수 있었다. 오우미 사람들은 토요토미 가문의 주력인 오와리 파벌(尾張衆)에 대항하기 위해 열심일 것이다. 오와리 파벌은 이 네네에게 옹호 받고 있다고 세간에서는 보고 있었다. 오와리 파벌의 다이묘우(大名)나 무장이 히데요시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하면 반드시 네네에게 울며 매달려서는 히데요시에 대한 중재를 부탁했다. 네네는 언제나 기분 좋게 받아들였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네네에게 그 이상의 야망 같은 것은 없었다.

 오히려 성안의 소문은 달랐다. 오와리 파벌이라는 이 오오사카 성에서 가장 큰 관료, 무신 세력의 중심에 네네가 있다고 보고 있어, 네네의 존재는 그녀의 의도와는 달리 선명하게 정치적 자력(磁力)을 띠기 시작하고 있었다.

 네네도 시녀의 입으로 그러한 풍문은 듣고 있었다.

 “오우미의 사람들이 자기들도 오와리에 태어나고 싶었다며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네네에게 있어서는 이외였다. 오우미 파벌의 대다수는 이 네네에게 접근조차 하지 않았으며 부탁하러도 오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극소수의 오우미 사람만이 네네와 접촉하고 있었다. 서 오우미 출신인 타나카 요시마사(田中 吉政)나 비와고(琵琶湖) 호수 동쪽 중부 출신인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 등이 그들로, 그들은 오히려 같은 지역인 오우미 사람들과는 소원하며 오와리 파벌들과 잘 지내고 있었다. 참고로 오와리 파벌의 대표적 인물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일 것이다. 그 외에 젊은 축으로는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이케다 테루마사(池田輝政), 카토우 요시아키라(加藤 嘉明), 다소 나이가 있는 자로는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 一氏),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 등이 있으며, 모두 초창기의 히데요시와 함께 전쟁터의 먼지를 뒤집어 쓰며 성장한 역전의 무장들이었다. 오와리 파벌의 특색은 전투의 스페셜리스트라는 것에 있었다.

 이 점 오우미 파벌은 관리에 뛰어났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나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는 거의 ‘희대의’라고 붙여도 좋을 정도로 뛰어난 경제 관료로, 미츠나리 등은 거대하게 성장한 히데요시의 재산을 꾸려나가기 위해서 각종 장부를 발명했다. 천하 재정을 위한 장부부터 부엌의 자잘한 출납장에 이르기까지 장부를 만들어 그것을 가지고 하위 관료들을 지휘하였고 관리하였다. 그들 오우미 파벌의 관료가 없으면 히데요시는 병사를 일으킬 수 없었고, 직할지를 다스릴 수 없어 하루라도 편안히 지낼 수 없을 것이다.

 위와 같은 이유로 이미 이 신정권의 중추에는 그들 오우미 사람들이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오다 우라쿠의 걱정은 그들 오우미 사람들이 만약 결속하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우라쿠는 네네에게 말로 하지 않았을 뿐, 조심하시길, 만약 그들이 옛 주인격인 아자이 님(浅井殿=챠챠(茶々))을 옹립하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라기보다 좀더 대놓고 말하면,

- 그들은 아자이 님께서 측실이 되신다면……

 라고 그것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아예 까놓고 말하면 그들 오우미 사람들은 히데요시를 그녀의 침실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것이었다.

  1. 교통의 요지로 스즈카 산맥 중 가장 낮은 위치에 있어 이로부터 동쪽을 東国이라 일컬었다. 쿄우토에서 동쪽으로 간다는 의미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一.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통칭 네네(寧々). 히데요시의 정실이기에 당연히 토요토미 가문[豊臣家門] 가정(家庭)의
주재자(主宰者)이다. 소탈하고 밝은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종일위(從一位)라는 신분이 되어서도 잘난 척하지 않았고 삶이 끝나는 날까지 태어난 고향인 오와리[尾張] 사투리를 사용하였으며 히데요시와의 대화도 누가 보건 말건 꺼리낌이 없었다.

 어느 날, 부부가 함께 란부[舞]를 보고 있었다. 보던 중 뭔 일인지 말싸움이 시작되어 서로 언성을 높였지만 둘 다 오와리 사투리로 빨리 내뱉었기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곧이어 키타노만도코로가 깔깔거리며 웃었고 히데요시도 등이 휘도록 웃어 제꼈다.
 ‘싸움이 아니었나 보군’
 이라 생각하며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안심하였는데, 히데요시는 그런
예인(藝人)들에게,

 “지금 싸움을 어떻게 보았나?”

 라고 말했다. 히데요시는 어떤 때이건 밝은 분위기로 만들고 싶어하는 버릇이 있어, 쿄우카[狂歌]나 임기웅변(臨機應變)적인 재치를 굉장히 좋아했다. 예인들도 그런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우선 큰 북을 치던 이가,

 “부부싸움에 모두 놀랐습니다요”

 라며 갑자기 북을 쳐 좌중을 놀라게 하며 대답했다. 피리를 불던 이가 곧바로,

 “어느 쪽이건 삐리리비리리♪”

 어느 쪽이건 잘못 하였고() 또한 말이 맞다()……라고 피리의 음에 맞추어 말하였다. 이 재치 있는 대답에 부부는 배를 움켜잡고 웃었다.
 키타노만도코로는 그런 귀부인(貴婦人)이었다.

 이 귀부인이 아이를 낳았다면 토요토미 가문의 운명도 크게 변했을 것이다. 토요토미 가문에 아이가 없다는 것은 토요토미 정권이 성립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이 입에는 담지 않았지만 맘속으로는,
 ‘이 정권은 오래가지 못한다. 전하가 살아계신 동안만이다.’
 라 생각하여 다음에 이 천하를 계승할 사람이 누굴까라는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당연 누구의 눈에건 실력을 말해도, 혈통을 말해도, 인물을 말해도, 관위를 말해도
제후(諸侯) 필두(筆頭)인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였다. 자연히 토요토미 가문을 존중하고는 있었지만, 뒤로는 이에야스와 끈을 잇고자 하는 사람도 많았다. 히데요시가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 등은 이에야스와 다이묘우[大名]라는 점에서는 동격이면서도 은밀히 이에야스에게,

 “절 부하로 여기시옵소서.”

 라고 까지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한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해 토요토미 가문은 후계자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것이 그런 의미에서는 이 정권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불행은 혈연(血緣)이라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조카인 히데츠구[秀次]를 양자로 삼았다. 그러나 히데츠구 이외에 더 이상 적당한 인물이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혈연이 아닌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까지도 양자로 하여 토요토미 가문의 일족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히데요시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킨고 츄우나곤[金吾 中納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까지 히데요시의 양자 중 한 명이 된 데에는 그러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히데아키는 키타노만도코로의 혈연이었다.
 키타노만도코로의 친정집은
생가(生家)와 양가(養家)의 두 곳이 있다.
 그녀는 오다 가문[織田家]의
미관(微官)이었던 스기하라[杉原 = 후에 키노시타[木下]로 성을 바꾸었다] 스케자에몬 사다토시[助左衛門 定利]의 딸로 태어났지만, 일찍부터 이모가 있던 아사노 가문[浅野家]에서 키워졌다. 히데요시가 천하를 손에 넣는 것과 동시에 이 스기하라(키노시타) 가문도 아사노 가문도 제후가 되었고, 기묘하게도(이유는 있지만) 키타노만도코로의 이 두 친정만은 토쿠가와 다이묘우[徳川大名]로 남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까지 살아 남는다.

 히데요시가 천하를 취할 즈음, 키타노만도코로의 생가 스기하라 가문 당주는 그녀와 연년생 동생 이에사다[家定]였다. 그 이에사다에게는 자식들이 많아 키타노만도코로는 일찍부터,

 “니가 가진 많은 아이들 중에서 한 명 갖고 싶구나”

 고 말했었다. 그 키노시타 가문에 다섯 번째 남자아이가 1582년 태어났다. 히데아키였다.
 이 당시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의
츄우고쿠[中国] 방면 사령관이었으며, 키타노만도코로는 거성(居城)인 오우미[近江] 나가하마[長浜]에 있었다. 스기하라 가문은 이미 히데요시의 부하가 되어있었기에 당연히 그 집은 나가하마 성 밑에 있었다. 그녀는 성주 부인이면서도 자신의 친정에 남자 아이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동생이자 부하인 이에사다의 집에 방문하였다.

 “얘는 참 귀엽구나”

 아기를 들여다보다 키타노만도코로는 손벽을 치며 기뻐했다. 아예 이 아이를 기저귀를 차고 있을 때부터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이에사다에게 말하자,

 “그 정도로 맘에 드신다면”

 하면서 누이의 뜻에 따라주었다.
 키타노만도코로는
하리마[播磨]의 전쟁터에서 돌아 온 히데요시에게 그 뜻을 말하자,

 “오~ 그거 좋은 생각이군. 양자로 삼자구”

 떠들썩한 것을 좋아하는 히데요시는 간단히 처의 요청을 승낙하였고, 이로 인해 히데아키는 나가하마 성에서 돌보게 되었다. 물론 유모가 있었지만 키타노만도코로 자신도 아이를 좋아하였기에 아기보기도 – 아이를 가지지 못한 것 치고는 능숙했다.

 히데아키는 무사히 성장했다. 통칭을 타츠노스케[辰之助]라고 하였다.
 동그란 얼굴에 흰 피부로 눈동자 움직임이 빨랐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과 비교해서도 굉장히 똑똑해 보였다.

 “저 아이가 자라면 한 몫을 할만한 인물이 될 거에요”

 라고 키타노만도코로는 히데요시에게 말했다.

 “그거 기대되는군”

 히데요시도 고양이와 아이를 굉장히 좋아했다. 거기에 히데요시는 자기 처의 장점 중 하나가 사람을 보는 안목에 있다고 은근히 생각하고 있었으며 실제로도 그러했다. 따라서 히데요시도 히데아키에게 기대를 하였다. 집안 내에서 히데아키의 위치는 양자 서열 1위인 히데츠구의 동생이라는 순위였지만 그러나 히데츠구에게 만약의 일이 있을 경우에는 가문의 상속권을 주어도 좋다고까지 히데요시는 생각하여,

 “네네, 이 가문을 저 아이에게 물려주어도 좋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시게”

 라고 까지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말하였다.

 1585년 히데요시는 관백(関白)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조정에 요청하여 12살인 히데아키를 종사위하(從四位下) 우에몬노카미[右衛門督]에 임명 받게 하였다. 이 관을 당명(唐名)으로는 킨고쇼우군[金吾将軍]이라고 한다. 궁문(宮門)의 경비대장이며, 금혁(金革)을 차고 문을 지킨다고 하여 [금오(金吾=킨고)]라는 호칭이 생겼을 것이다. 이 때문에 제후들은 이 토요토미 가문의 소년을,
  "킨고님"
 이라 부르며 각별한 경의를 표했다. 물론 뒤에서는 ‘킨고놈’ 이라고 소곤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 즈음부터 히데아키는 아이였을 때의 귀여움이 사라지고 영특함이 사라져, 간단히 말하면 우매해지고 얼빠지기 시작했다. 장래
상급 귀족(公卿) 사회에서 창피를 당하지 말라고 글과 시의 선생을 붙여주었지만 조금도 나아질 기색이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 본 것 같네’
 키타노만도코로는 그것을 깨닫기에 이르러 차츰 정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히데아키는 조정에서도 행동거지가 나빠 코를 흘리고 엄숙해야 할 곳에서 갑자기 웃거나 했다. 아주 조심히 걸어야만 하는 조정의 복도에서 동동거리며 뛰어다니기도 했다.

 “저 아이만큼은 창피하네요”

 키타노만도코로는 히데요시에게 푸념했다.
 원래 그녀의 생가인 스기하라(키노시타) 가문의 핏줄은 모두 무사(武士)로서의 용기나 과감함이 결여되어 있었지만 그러나 그녀와 닮아서 총명한 인물도 많아, 히데아키의 큰 형 
카츠토시[勝俊 = 지쥬우[侍従], 후에 쵸우쇼우지[長嘯子]] 등은 시에 대한 재능에 있어서만은 어느 제후의 자식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시게”

 히데요시는 그 점에 있어서 낙관적이었다. 어렸을 때의 얼간이 짓이라면 자기 또한 그러했으며, 그의 옛 주군이며 생애의 스승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악동(惡童)스러움은 당시 오다 가문의 사람들을 절망에 빠뜨렸다. 그에 비추어보아 어릴 때의 난폭함과 우둔함을 가지고 나중의 그 인물이 현명하게 될지 어리석게 될지를 잴 수 없다.

 “뭐 그런 것일세”

 히데요시는 그렇게 말하며 오히려 키타노만도코로를 달랬다.
 그러나 키타노만도코로의 마음은 좋아지질 않았다. 왜냐하면 히데아키는 12살의 꼬꼬마인 주제에 성(性)에 대한 관심만은 이상할 정도로 강하여,
여관(女官)들이 방에서 옷이라도 갈아입고 있을 때면 어느 순간에 들어왔는지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고 빤히 쳐다보았다. 타이르면 미친 사람마냥 소리질렀다. 그렇지만 키타노만도코로는 히데요시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히데요시는,

 “색을 좋아하는 것은 각자의 개성이나 경향과 같은 것으로 착하고 나쁘고 현명하고 우둔함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런가~ 킨고도 벌써 훔쳐보기인가.. 나이에 비하면 빠르군”

 이라 말하며 웃을 것이 뻔했다. 호색(好色)과 조숙(早熟)이라는 점에서는 히데요시 자신도 그러했기에 이런 남편에게 호소해 보았자 였다.
 히데요시는 오히려 자신의 친족인 히데츠구보다도 히데아키 쪽을 중시하고 있는 듯한 모습까지 보였다.

 1588년.
 히데요시는 쿄우[京]에 쥬라쿠테이[聚楽第]를
조영(造營)하여 4월 14일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의 방문을 요청하였다. 텐노우[天皇]가 신하의 사저(私邸)에 방문하는 것은 요 백 년 동안 없었기에, 토요토미 정권의 안정을 화려하게 알릴 수 있는 효과를 기대했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온 힘을 다하여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이날 쿄우토[京都]의 근방은 물론 먼 지방 사람들까지 구경을 하려 몰려들어, 길가와 거리를 경비하는 경비병 만으로 6000명이 동원되었다. 행렬은 화려함의 극을 달했다.
 -텐노우님이라는 것은 이렇게까지 존귀하신 것인가?
 라고 다이묘우[大名] 이하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이 히데요시가 기대했던 이 의식의 정치적 효과였다. 텐노우의 존귀함을 천하에 알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텐노우 다음가는 이는 관백(関白)이다. 텐노우의 존귀함을 알게 됨에 따라 자연히 관백의 신성함도 알 수 있게 됨에 틀림이 없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천하가 갑자기 성립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제후는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의 가신으로 있었을 때의 옛 동료들이었고, 토쿠가와 이에야스 등은 오다 가문과 동맹했던 나라의 국주(国主)로 히데요시보다 오히려 지위가 높았다. 거기에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는 옛 주군 노부나가의 아들이었다. 히데요시가 무력과 운(運)으로 그들을 휘하에 두고는 있었지만 출신이 출신인만큼 사람들이 마음속으로는 복종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에게 존비(尊卑)의 가치관만큼이나 완고한 것은 없다. 히데요시는 그것을 부수고자 했다. 천자의 존귀함을 빌려 그것을 선전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새로운 존비관(尊卑觀)과 질서를 알려주고자 하였다.

 텐노우는 쥬라쿠테이에서 4일간 머물렀다.
 머물던 중 마당을 구경하려는 텐노우[天皇]의 짚신을 천하의 지배자인 히데요시가 마당으로 내려가 자기 손으로 직접 가지런히 정리하였다. 또한 쥬라쿠테이[聚楽第]의 방 하나에 토요토미 가문에서 가장 힘 있는 여섯 명의 제후를 모아 놓고 텐노우를 모시고 와 이들과 대면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여섯 명은 다음과 같다.

나이다이진[内大臣]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
다이나곤[大納言]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곤다이나곤[権大納言]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 = 히데요시의 동생]
츄우나곤[権中納言]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
산기사코노에노츄우죠우[参議左近衛中将]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우코노에노곤쇼우쇼우[
右近衛権少将]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이들에게,

 “너희들은 들으라. 이제 천자(天子)의 고마움과 고귀함에 감루(感淚)를 흘렸을 것이다.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조정에 충성을 다할 것을 서약서에 써서 제출하도록”

 하고 명령하였다. 앉은 자리 앞으로 서약서가 놓였다. 이미 문장은 쓰여있었기에 일동은 여기에 혈판(血判) 서명을 하기만 한 것이다. 서약서에 쓰인 문장의 말미에,

칸파쿠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어떤 것이든 따르며 조금이라도 거부하지 않겠다.

 고 적혀 있었다.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는, 텐노우[天皇] 앞에서 제후에게 복종을 맹세시키는 이 일이야말로 이번 텐노우의 쥬라쿠테이[聚楽第] 방문 최대의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서약서를 받는 인물은 히데요시 본인이 아니었다. 히데요시의 대리인(代理人)이었다. 히데요시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 대리인에 히데아키를 선택하였다.
 [킨고님]
 이라고 서약서에는 미리 쓰여져 있었다. 맹세하는 상대는 15살의 킨고 히데아키에 대해서였다. 이렇게 되면 토요토미 가문의 후계자는,
 ‘이외로 킨고님이?
 라는 것이 되었다. 당연한
추찰(推察)이었다. 이 서약서로 인해 토요토미 가문에 있어서의 히데아키 지위는 명확해졌다. 비약(飛躍)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였다. 히데요시는 히데츠구보다도 히데아키에게 천하를 물려줄 생각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킨고님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안되지’
 라 다이묘우[大名]들은 생각하며 이제 막 ‘이방 수염’이 나기 시작한 소년에게 알랑거리기 위해서 다투듯이 선물을 보내게 되었다.

 “저래서는 거만해지지 않을까?”

 하고 키타노만도코로는 걱정했지만 히데요시는 히데츠구의 경우에도 그랬듯이 히데아키에 대해서도 제후들이 떠받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오히려 기뻐하는 듯 했다.

 “선물 같은 것 받게 내비 두시게. 히데아키가 얼마나 존귀한가를 천하에 알리는 편이 좋은 것일세”

 “그러나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킨고님에게는 독이 될 것입니다”

 키타노만도코로는 말했지만 그러나 가정(家庭)에서의 히데요시는 팔불출(八不出)에 가까웠다.

 “쓸데없는 걱정일세”

 그 총명함에 있어서는 고금무쌍(古今無雙)이라 일컬어지는 히데요시에게도 단점이 있었다. 자식 교육이라는 것이었다.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말하지만, 교육은 원래 쓸데없는 걱정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히데요시는 교육을 받지 않고 어른이 되었다. 그렇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것은 토요토미 가문의 결함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 가문은 갑자기 성립된 귀족(貴族)인 만큼 다른 다이묘우[大名]나 하다못해 촌구석의 조그만 호족 가문에도 반드시 전통으로 지켜져 내려오는 자녀교육이라는 것을
가풍(家風)으로써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히데요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관위를 승진시켜주는 것 정도였다.
 히데아키가 15살이 되는 해인 1591년에는 산기[参議]에 임명되었는데, 우에몬노카미[右衛門督]는 그대로 겸하게 하였다.
 16살인 1592년에는 곤츄우나곤[権中納言]에 임명되어 정삼위(正三位)로 승진하였다. 이리하여 세간에서는,
"킨고츄우나곤[金吾中納言]"
 이라 불렀다. 단 히데아키 승진의 속도는 이 곤츄우나곤에서 우선 멈추게 된다. 왜냐면 이 해에 형 뻘인 히데츠구가 갑자기
약진(躍進). 관백에 임명되어서는 명실공히 천하의 후계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kjw791 BlogIcon 허공 2007.12.15 18: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흠... 왜 서약서에 히데아키에게 충성을 다하라고 했는지 궁금하네요... 이때는 히데아키의 성이 도요토미 였을려나?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15 19: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본문을 읽어보니, 히데아키가 1577년에 태어난건가요? 위키페디아나 여타 자료처럼 1582년에 태어난건가요..(음..)

    도요토미가의 자식교육이 캐실패(;)였다는건 공감합니다. 오히려 거의 손을 못댄 히데요리쪽이 가장 괜찮아 보일 정도로..(..)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17 00: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공님//이 당시는 아직 토요토미 성이었죠.

    다메엣찌님//그렇습니다... 본문은 천정 5년이라고 나왔지만, 1582로 고쳤습니다. 문맥상(히데요시가 천하를 취함 즈음...)으로 보아도(다른 책들을 보아도 천정 10년 1582년생이라고 하더군요)

    중간에 1584 -> 1585로 고칩니다... 근데 그럼 두살인데 열두살... 책이 잘 못 된것인지... 시바 선생이 착각했는지...--;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chaosrinor BlogIcon chaosrinor 2008.01.31 04: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에야스가 조정의 권한으로 히데요리를 교토로상경하라고 명했을때, 히데요리가 상경하면 죽이고, 상경하지 않으면, 반역으로 몰아 공격할려고 했지만 가토,아사노 2명에게 호위를 하도록하여 상경한것을 보고, "히데요리는 어지리만 얕잡아볼수 없는 인물이다, 살려놓으면 나중에 큰 후환이 될 것이다."라고도 말한적이 있지요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31 10: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이 글에 어째서 히데요리와 이에야스의 만남에 대한 덧글을 다셨는지 조금 의문이군요...
    (다메엣찌님이 히데요리 언급하셔서 인가요?)

    미묘하게 제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군요.

    조정의 권한이라기 보다는 손녀 사위 얼굴 함 보자는 의미였고, 토요토미 가문은 쿠게(公家)에서도 쿠교우(公卿)인지라 텐노우(天皇)가 바뀌는데 참석 안 할 수가 없었죠.

    상경하면 죽인다뇨? 대의명분 없이 자기 주인격인 히데요리를 죽이면 나중에 뒷감당은 어떻게 할려구...이에야스도 그 대의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려서 호우코우(方広)사(寺) 종명 사건을 만든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대의명분이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힘이 있더라도 상전을 이유없이 죽였다간 후에 당장은 자기한테 머리를 숙이고 있는 토자마(外様)들에게 나중에 들고 일어날 명분을 줄 수 있으니까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chaosrinor BlogIcon chaosrinor 2008.02.11 18: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네 다메엣찌님이 히데요리를 언급하셔서 몇자 더 적어보았구요.
    이에야스가 센히메를 히데요리에게 시집보내 히데요리의 장인어른의 신분이였지만, 정략결혼에 의한것이지요. 도요토미가가 공경가문인것 맞는말이지만 그 당시 시국으로보아도 어쩔수 없었습니다. 이미 세키가하라 전투후 도요토미가를 표면적으로 받느는 가문은 거의 없다시피했지요. 히데요리가 교토로 상경하면 이에야스가 표면적으로 죽이지않고 암살을 할것이기때문이죠. 외냐하면 새로운 천황이 등극하는시기에 히데요리가 자신을 호위하는 군사는 데리고 교토로 상경할수 없으니, 히데요리는 십중팔구 이에야스의 의지에따라 교토로상경하면 암살될것이란걸 알고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상경하지않는다면 반역으로 몰아 도요토미가를 공격하려고 했던것이죠. 이에야스는 도요토미가를 멸할 명분은 찾고있었으므로.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chaosrinor BlogIcon chaosrinor 2008.02.11 18: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기때문에 히데요리가 얻은 방법이 자신에게 교토로 상경할것을 설득하러온 카토,아사노에게 호위를 하도록 하죠. 이렇게되면 이에야스에게있어서는 히데요리는 결국 교토에 상경하였으니 반역으로 몰아넣을수도 없었고, 암살을하자니 가토와 아사노까지 죽이면 도요토미계 출신장수들이 반발할것임은 분명했으니 말이죠. 그래서 히데요리는 얕볼수없는 자라고 평하기도했습니다.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chaosrinor BlogIcon chaosrinor 2008.02.11 19: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코사종명사건은 상황이 좀 틀립니다. 호코사종명사건은 히데요리가 오사카성에서 칩거할때의 얘기죠. 히데요리가 오사카성에 틀어박혀있는동안은 암살은 꿈도 못꾸는것이니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chaosrinor BlogIcon chaosrinor 2008.02.11 19: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리고 암살에 대의명분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에야스가 히데요리를 암살을해도 대명들은 심증만 있을뿐잊 물증이 없을테니까요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chaosrinor BlogIcon chaosrinor 2008.02.11 19: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히데요리에게 오사카성 밖은 결코 안전할수 없는곳이였습니다.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11 19: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덧글 감사합니다.

    미묘하게 서로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군요. 전 chaosrinor님께서
    [히데요리가 상경하면 죽이고, 상경하지 않으면, 반역으로 몰아 공격할려고 했지만]라고 언급하시길레 그에 대한 반론으로 상경한다고 죽이면 대의명분이 없기에 나중에 호오코우사 종명 사건을 이으켜 대의명분을 얻었다고 말씀 드린 것이고....

    chaosrinor님께서 오늘 달아주신 말씀은 저와 비슷한 의견이시군요.
    (표면적으로 죽이지 않고 암살을 한다는 말씀은 어떤 의도로 하신 말씀인지는 모르겠고, 상경하면 암살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것은 다르지만...)

    상경하면 부하인 이에야스의 명령에 주가인 토요토미 가문이 부하에게 굴복한 꼴이 되고,
    상경을 거부하면 실질적인 힘(무가의 톱인 쇼우군 가문)을 가진 이에야스가 대의명분으로 삼을 것이고..

    때문에 그 중간책을 사용해서, 손녀 사위의 얼굴을 본다는 말이 나온 거라고 생각합니다.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11 19: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직 끝나지 않으셨었군요...

    자꾸 반역 반역 하시는데, 반역이란 아랫 사람이 윗사람에 대해서 하는 것입니다.
    주가는 어디까지나 토요토미, 부하가문은 토쿠가와.
    하지만 토쿠가와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세이이다이쇼우군 이라는 무가 정치를 만들어서 복잡하게 된 것입니다.

    호코우사 종명 사건은 왜 일어났을 까요?
    토요토미 가문이 가지고 있던 재산(즉 '힘')을 소비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쿄우토에서 만날 때까지만 하더라도 토요토미의 힘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전쟁이란 그리 쉽게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만, 이에야스가 그렇다고는 전 생각할 수 없군요)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