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즈 효우고노카미 요시히로[島津 兵庫頭 義弘]! 무운 다하여 여기서 배를 가른다. 일본의 무사들이여! 너희들이 내 목을 베었다고 나중에 자랑하지 말지어다”


1600년 9월13일. 사츠마[薩摩] 카모우[蒲生]에 있던 쵸우쥬인 세이쥰[長寿院 盛淳]은, 소수의 병력[각주:1]으로 서군(西軍)에 참가해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의 동원령에 응하여 요시히로의 저택이 있던 쵸우사[帳佐]와 자신이 다스리던 카모우[蒲生]의 무사 70여명을 이끌고 8월 3일 출발하여 9월 13일 이른 아침 세키가하라의 난구우산 산[南宮山] 근방에 도착.

아침.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휘하의 병사 1000명을 파견하여 마중.  
길 양측에 도열해서는 앞을 지나가는 쵸우쥬인 세이쥰의 병사들에게 큰소리로,
"오시는 동안 많은 고난이 있었을 텐데 이렇게 무사히 오시다니 정말 군신(軍神)이 따로 없소"
라 외쳤고, 마중 나왔던 미츠나리는 금으로 된 지휘부채[軍配]를 주며 쵸우쥬인 세이쥰[長寿院 盛淳]의 노고를 치하.

점심.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가 주둔해 있던 오오가키[大垣]에 도착.
요시히로 문밖으로 달려 나와,
”쵸우쥬[長寿]구나! 자네가 가장 먼저 와 줄거라 믿고 있었네.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어”
라 기뻐하며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하사 받았던 흰 봉황이 새겨진 진바오리[陣羽織][각주:2]를 하사.

이틀 뒤인 1600년 9월 15일.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시작.

서군(西軍)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시마즈 부대의 본영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그 너무도 빠른 서군의 붕괴에 요시히로는 아직 갑옷도 완전히 입지 않은 상태였다.[각주:3] 서군의 좌익 이시다, 우익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는 이미 무너져 전장에 남아있는 서군의 부대는 시마즈 부대 뿐이었다. 앞으로 어느 쪽으로 탈출할 지를 놓고 토론하였다. 그때 세이쥰이 들어왔다.
”이때가 되어서도 한가롭게 말싸움이나 하고 있을텐가? 말로 다툼하는 대신 무공으로 다투고 싶은 사람은 나와 함께 여기에 남아 마지막 무명을 높이세”

막료들이 이러고 있는 동안 요시히로는 할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거기에 조카인 시마즈 토요히사[島津 豊久][각주:4]가 와,
“이제 정해진 천운(天運)을 바꿀 순 없습니다. 살아 장수를 누리는 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희는 여기서 싸우다 죽으려 하니, 그 사이 큰아버지는 가신들을 이끌고 사츠마[薩摩]로 돌아가십시오.”
그래도 요시히로는 듣지 않았다.
“큰아버지의 몸에 시마즈 가문의 운명이 걸려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옵소서”
라고 외치자 그제서야 요시히로는 일어섰다.

그 대화를 보고 있던 세이쥰은 요시히로와 토요히사의 말이 끝나자 재빨리 요시히로의 갑주 쪽으로 가 자신의 무구를 벗은 후 요시히로의 것을 서둘러 입었다. 그것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알고 있기에 요시히로는 아무 말 없이 대신 세이쥰이 벗은 무구를 입었다. 이로 인해 세이쥰은 도착했을 때 요시히로에게 받은 진바오리와 요시히로의 무구, 거기에 미츠나리가 준 황금 지휘부채로 인해 오히려 요시히로보다 더욱 화려한 모습이 되었다.

역할이 정해졌다.
토요히사는 시마즈 요시히로를 호위하며 탈출하기로, 세이쥰은 본진이었던 곳에 남아 요시히로의 영무자[影武者]가 되기로.

요시히로가 부하에게 물었다.
“어느 쪽 적의 기세가 가장 왕성한가?”
부하가 답했다.
“동쪽에 있는 적이 가장 기세 등등합니다.”
부하의 보고를 받고 요시히로는 말했다.
“그렇다면 그 기세를 향해 돌파할 것. 돌파하지 못하면 효우고 뉴우도우[兵庫入道][각주:5]는 할복할 뿐!”
부하들이 합창하듯이 답했다.
“말씀하신 두 명령. 받자와 메시겠습니다”

떠나는 토요히사에게 세이쥰이 다가가 말했다.
“이것으로 금생에서는 더 만나지 못할테니 지금 인사를 올립니다”
토요히사는 말했다.
“오늘은 아군이 약하기에 무공을 세우긴 힘들 것 같군요”
둘은 미소를 지으며 헤어졌다.

남겨진 쵸우쥬인 세이쥰 부대 200~300에 동군(東軍) 부대 700이 돌진해 왔다.
처음엔 본진에 적들이 난입하기 전에 철포로 물리쳤다.
두 번째는 난전이 되었다.
시마즈 부대의 암구호는 ‘자이[ざい]’였는데, 하필 상대도 ‘자이[ざい]’였다[각주:6]. 같은 편끼리 죽고 죽이기도 하였다. 개중에는 두려워 본진 뒤편에 파 두었던 해자[垓字]로 도망치는 자들도 있었다. 세이쥰은 노하여 외쳤다.
“사츠마까지는 500리나 된다. 설사 도망치더라도 멀어서 가기나 하겠나? 거기에 도망치는 놈은 얼굴 다 알려졌을테니 앞으로의 굴욕을 어떻게 감당하려 하나!”
몇몇이 해자에서 기어나와,
“잠시 동안이라도 미련을 가졌던 것이 정말 창피하옵니다.”
라 말했다.

난전이 된 두 번째 적의 파도을 제압한 세이쥰이 부하들에게 물었다.
“주군은 어디까지 가셨나?”
부하들은 모두 입 맞추어,
“적진을 돌파하였습니다. 이제는 아주 멀리 가셨을 것입니다.”
“축하할 일이구나. 이제 내가 주군의 영무자[影武者]로 죽는 일만 남았군”

적의 3차 돌격에서 세이쥰은 죽었다고 한다.
“시마즈 효우고노카미[島津 兵庫頭] 죽으려고 환장했으니 올테면 와라”
라 외치며 돌진하다 무수한 적의 창에 몸이 꿰뚫린 후 힘 다해,

“시마즈 효우고노카미 요시히로! 무운 다하여 여기서 배를 가른다. 일본의 무사들이여! 너희들이 내 목을 베었다고 나중에 자랑하지 말지어다”[각주:7]

외친 후 배를 열십자로 가르고 머리를 북쪽으로 향해 죽었다.

그때까지 남아 있던 283명은 그 모습을 보고 돌진하여 살아남아 도망친 자는 50명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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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토요히사[島津 豊久]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고 한다. 퇴각전 중 그가 타고 있던 말만 나타났다고 한다. 토요히사를 죽였는지 아니면 그가 죽어있을 때 갑주만을 벗겨 전공품으로 삼았는지 알 수 없지만, 토요히사가 입던 갑옷는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양자 후쿠시마 마사유키[福島 正之]의 부대에 꼽사리 끼었던 낭인[浪人] 카사하라 토우자에몬[笠原 藤左衛門]이 가져가 그의 자손이 대대로 소유했다고 한다. 후에 소문을 들은 토요히사의 6대손이 찾아가 살피자, 갑옷에는 창에 꿰뚫린 자욱이 두 군데 있었다고 한다.



쵸우쥬인 세이쥰[長寿院 盛淳] 1548년~1600년.
盛淳을 일본 위키피디아의 해당항목이나 일본 일반 웹에서는 ‘모리아츠’라고 읽으나 세이쥰은 승려에, 그의 스승이 ‘다이죠우인 세이큐우[大乗院 久]’였기에, 스승의 이름자 하나를 물려 받았을 터이니 ‘세이쥰’이라 읽어야 할 듯.
어렸을 적부터 불문에 들어갔다.[각주:8] 처음 입문한 곳은 시마즈 가문[島津家]이 기도를 올리는 사원인 다이죠우인[大乗院]. 그 후 키이[紀伊]의 네고로 사[根来寺], 코우야[高野]에서 수행 후 사츠마[薩摩]로 돌아와 안요우 원[安養院]의 주지가 되었다. 그 후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의 부름으로 환속하여 시마즈 가문의 국정에 참가. 후에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의 휘하 가로가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요시히로의 동원령에 호응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가하였다 요시히로의 영무자(影武者)가 되어 전사. 향년 53세.

  1. 약 200명 이하. 여담으로 1600년 8월 토요토미 정권이 정한 시마즈의 재경 주둔병(在京駐鈍兵)은 7000명이야 했다. [본문으로]
  2. 조끼처럼 생긴 갑옷 위에 덧 입는 옷. [본문으로]
  3. 이를 고쿠소쿠[小具足]라 한다. 갑옷의 내피만 입고 외피를 입지 않은 상태. 요시히로는 당시 60대 중반의 나이였기에 체력 온존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본문으로]
  4. 시마즈 토요히사는 시마즈 4형제의 막내 시마즈 이에히사[島津 家久]의 아들. [본문으로]
  5. 뉴우도우[入道]는 불문에 입도한 사람에 붙는 말. 요시히로는 히데요시가 죽자 그의 명복을 빈다며 중이 된 상태였다. – 단 머리는 밀지 않았던 듯 당시 몇몇 종군기에는 머리 묶는 끈에 대한 묘사가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6. 당시 전투방식으로, 무사들끼리 대치하면 우선 자기 부대의 암구호를 대어, 상대방도 맞으면 다른 적을 찾아 나서고, 다르면 싸우는 식이었다. [본문으로]
  7. 내가 스스로 죽었는데도 나를 죽이고 내 목을 베었다고 무공을 자랑하지 말라는 말. [본문으로]
  8. 이에 대해선 그의 부친 하타케야마 요리쿠니[畠山 頼国]가 “우리 집안은 원래 아시카가 쇼우군[足利将軍]의 중신이었지만 시대를 잘못 만나 서국의 벽지(사츠마[薩摩])에 오게 되었다. 내 자손을 미천하게 키우고 싶지 않으니 불문에 보내고 싶다”고 하여 불문에 보냈다는 설이 있다…카더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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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gorekun.com BlogIcon 고어핀드 2010.11.15 03: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하, 이것이 저 유명한 전진철수 때 있었던 일화로군요! 지금까지는 전진철수와 카게무샤에 대해서도 그냥 듣기만 했을 뿐인데, 이 두 가지가 실제로 어떤 식으로 벌어졌는지에 대해서 알려 주는 흥미로운 일화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

  2. Gyuphi IV 2010.11.15 21: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이에히사-토요히사 경우엔 부자가 참 비명횡사라니(...) 그런데 그런것 치고는 토요히사의 죽음에 대해서 아무런 기록이 안 남은건 참 묘한 노릇이군요.. 창에 뚫린 갑옷만이 남았다라(...) 구스타프 2세 아돌프스가 뤼첸전후에 셔츠바람의 총구멍 수군데 난 시체로만 발견됐던 것과 묘하게 닮은데가 있습니다 (...아니 이런 실례를...)

    오니 시마즈가 승세를 탄 동군의 이이 나오마사를 중앙돌파하며 손가락까지 날려버린데는 참 언제 생각해도 경탄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과연 경륜이 다르군요)


    여담이지만 최근 CAPCOM의 괴작 전국바사라3(...)를 하고 있습니다만 저 장렬한 시마즈 요시히로(나 영무자나..)의 모습과는 달리 간헐천에 뛰어들었다 튀어나왔다를 하며 플레이어를 괴롭히는 유치찬란함은 참으로(....)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1.16 09: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내용상 불필요할 것 같아서 토요히사는 짧게 썼는데, 토요히사의 부대도 꽤나 장렬하게 싸우긴 한 것 같더군요. 아무래도 요시히로를 튀게 만들려다 보니 쫓아오는 적들을 상대하는 임무를 맡았던 듯 합니다.(다만 그 전술이 잘 못 되었기에 에도 시대 내내 사츠마 번내에서는 까였다고 하더군요.)

      적진 퇴각이 성공한 이유 중에 하나는 동군 대부분이 우키타나 이시다 부대 쫓아가는데 몰두하다 보니 요시히로 일행에게는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요인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요시히로 역시 적들이 자기 쪽으로 오기보다는 이시다나 우키타 부대를 쫓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적진을 돌파라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센고쿠 바사라라...일본에 레키죠[歴女] 열풍을 불게 만들었다는 그 작품이군요!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는 시즈가타케 칠본창[賤ヶ岳の七本槍[각주:1]]에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과 함께 이름을 올리고 있는 뛰어난 무용(武勇)의 장수이지만, 센고쿠[戦国] 무장 특유의 연극적 행동이나 허세가 없어 어렸을 때부터 노련(老鍊)한 느낌을 준다.

 반 단에몬[塙 団右衛門]이라고 하는 요시아키의 가신이 있었다. 그는 소위 호걸형 무사였기에 주종간에 다툼이 많았다. 어느 날 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 카토우 키요마사가, 저렇게나 유명하고 뛰어난 무사를 어째서 우대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러자 요시아키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화를 내었다고 한다. 보통 자기 부하의 무명(武名)이 높으면 기뻐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건만, 요시아키는 단에몬과 같은 스타 플레이어를 선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단에몬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 한 부대의 지휘관으로 출진했지만, 지휘관이라는 자신의 지위를 망각하고 필마단기로 돌격하여 가장 먼저 적진에 돌입하였으며(一番槍), 적의 목을 베어 오는(一番首) 수훈을 세웠다. 그러자 요시아키는,
 “네 녀석은 지휘관을 맡기엔 부족한 놈이다”
 고 차갑게 질책하여 단에몬을 화나게 하였다. 결국 단에몬은 요시아키에게서 떠났다[각주:2]. 즉 요시아키는 단에몬과 같은 스탠드플레이어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요시아키 자신도 떠들썩하게 남의 주목을 끄는 행동을 싫어하였다.

 요시아키가 얼마나 침착했는지를 알려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날, 요시아키의 부하들이 모닥불에 둘러앉아 장난 삼아 불에 달구어진 불쏘시개를  거꾸로 세워 나중에 온 사람이 그것을 쥐다 뜨거움에 놀라는 것을 보며 낄낄대고 있었다. 거기에 요시아키가 지나치게 되었다. 부하들은 만약 요시아키가 불쏘시개를 쥐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지만, 말하는 타이밍을 놓쳐 누구 하나 말하지 못하던 중 결국 요시아키가 아무 생각 없이 불쏘시개를 잡았다. 요시아키의 손에서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 올랐다. 하지만 요시아키는 태연히 그 불쏘시개로 땅바닥에 한 일(一)자를 그리고 잠시 떠들다 갔다고 한다. 더구나 나중에 어떠한 문책도 없었다 한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조선 침략의 본거지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에 여러 장수들이 주둔하고 있을 때였다. 조선에서 포획한 호랑이를 쇠사슬에 묶어 끌고 가던 중 호랑이가 그들을 뿌리치고 날뛰었다. 구경하던 다이묘우[大名]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 바빴지만, 그런 소동 속에서 요시아키 단 한 사람만이 벽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그리고 호랑이가 사라지자 그제서야 눈을 뜨며, “뭔 일 있었나?”하고 입을 열었다 한다.

 히데요시[秀吉]가 죽은 뒤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도 요시아키 한 사람만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를 정점으로 하는 문치파가 이에야스[家康] 타도를 획책하였고 키요마사, 마사노리 등 무공파가 미츠나리를 죽이고자 행동을 일으켜 일촉즉발의 긴박한 공기가 떠돌 때도 요시아키는 후시미[伏見]의 이에야스 저택을 방문하여,
 “세상이 소란스러운 듯 합니다만 이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지금까지 곁에 두고 있던 50기(騎) 중 20기를 제 본거지인 이요[伊予]로 돌려보냈습니다. 남은 인원은 이에야스님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바칠 생각입니다”
 고 말했다고 한다.

 전쟁터에서도 요시아키는 냉정침착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배신으로 인해 서군(西軍)이 패주하기 시작하자, 동군(東軍)은 앞다투어 가며 도망치는 적을 쫓아갔기에 진형이 흐트러져 각 무장의 본진을 지키는 방비가 부실해졌다. 하지만 요시아키의 부대만큼은 질서정연했다. 요시아키의 지시가 구석구석 잘 전해져 일사불란한 방비태세를 유지했다. 거기에 한술 더 떠 적이 패주하자 요시아키는 출진할 때 몸에 걸치고 있던 화려한 갑주를 재빨리 벗어버리고 평범한 갑주로 갈아입었다. 이는 결사의 각오를 한 적병이 적어도 대장만이라도 죽이고자 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 것이다. 나중에 이를 전해 들은 이에야스는,
 “사마노스케[左馬助=요시아키]는 정말 빈틈이 없구나”
 하고 감탄했다고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기 전초전인 기후 성[岐阜城] 공성전에서 승리하였을 때, 승리를 알리고자 칸토우[関東]의 이에야스에게 보고하기 위해 사자(使者)를 고르려 했으나 아무도 사자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이제 막 결전이 시작되려는 때에 사자가 되어 전쟁터에서 이탈해 버리면 공적 세울 기회를 잃기 때문이었다. 이 때 요시아키는 가신 한 명을 지목하여 그에게 머리를 숙이며,
 “칸토우에 사자를 보내는 것은 긴급을 요하는 일이며 이것 역시 공적이라 할 수 있다. 부디 가주지 않겠는가?”
 하며 간절히 부탁했다고 한다.

 역시 세키가하라 때의 일이다.
 요시아키 진영에 잠입한 닌쟈[忍者]가 잡혔을 때 요시아키는,
 “이자도 자기 주군의 명령에 죽음을 각오한 용사이다. 지금 여기서 이자를 죽여도 승패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며 목숨을 살려주었다고 한다. 요시아키는 적이라 하더라도 용사를 인정하는 도량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세키가하라에서의 공적으로 인하여 요시아키는 이요 마츠야마[松山] 20만석에서 아이즈[会津] 40만석의 가증되었지만 요시아키는 이것이 불만이었다고 한다.
 처음에 이에야스는 요시아키를 위해 50만석을 주려고 하였지만 이에야스의 모신(謀臣)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가 너무 많다며 막았다고 한다. 이를 들은 요시아키는 곧바로 마사노부에게 가서 이유가 뭐냐며 따졌다. 마사노부의 답변은 이러했다.
 “당신은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많은 은혜를 입은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너무나도 많은 봉토를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에게 받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결코 좋게 보지 않을 것입니다. 나중의 화근거리가 될 수도 있기에 그렇게 처리한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아무리 요시아키라도 이에는 반론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고 한다.[각주:3]

 이에야스는 죽을 때가 가까워지자 히데타다[秀忠]를 병상(病床)으로 불러 여러 다이묘우들에 관해 자신이 가진 인물평을 전해 주었는데 요시아키에 대해서는,
 “우직하고 의리 있는 자이기는 하지만 사사로운 일에도 신경을 곤두세워 불만을 표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으니 그런 부분을 잘 판단해서 처리하도록”
 하고 말하였으며 또한,
 “의리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의 부추김을 받는 다면 아무리 소심한 사람이라도 모반을 일으키는 법이다.”
 고 말하며 감시의 눈을 게을리 하지 말도록 말을 남겼다 한다.

 카토우 요시아키의 가문은 아들인 아키나리[明成] 때 아이즈 42만석을 몰수당하여 단절을 맛보게 된다.

[가토 요시아키(加藤 嘉明)]
1563년생. 통칭 마고로쿠[孫六], 사마노스케[左馬助]. 미카와[三河] 출신으로 일찍부터 히데요시[秀吉]를 섬기며 시즈카다케 칠본창[賤ヶ岳の七本槍]의 공으로 3000석을 하사 받았다. 1585년 아와지[淡路] 1만5천석, 조선침략에서는 수군(水軍)으로 참전. 1597년에는 거제도에서 조선 수군의 배를 탈취했다[각주:4].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이요 마츠야마 성[伊予松山城]를 축성. 후에 아이즈 42만석으로 이봉(移封). 1631년 9월 12일 죽었다. 69세.

  1. 1583 년 오우미[近江]에서 히데요시[秀吉]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2. 떠날 때 성문에 ‘결국 시골 좁은 천에 머물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를 높이 나는 갈매기 처럼 유유히 떠난다[野水江南遂に留まらず、高く飛ぶ 天地の一閑鷗]' – 즉 요시아키는 그릇이 작아서 대인배인 나님은 떠나마..라는 뜻일 것임. 아마... - 라는 시를 붙이고 갔기에, 이에 분노한 요시아키는 단에몬이 다른 가문에 취직 못하도록 타 다이묘우에게 편지를 돌렸다(이를 奉公構라고 한다). 그래서 단에몬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에 밑에 있었으나 얼마 안가 그곳에 있지 못하고 쿄우토[京都]에 가서 탁발승을 하다가 나중에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 때 오오사카 성에 입성하게 된다. [본문으로]
  3. 전후 처리과정에서 이에야스가 논공행상을 주도하게 된 배경에는 이에야스가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대리인과 후견인이라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즉 세키가하라 이후 동군이 영토를 하사 받은 것은 이에야스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 아닌 히데요리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다. [본문으로]
  4. 元凶(원균..이라고도 읽는다)의 칠천량 해전을 말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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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10.01.09 05: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면 카토우 요시아키의 멸봉당한 아들내미가 제법 비중 큰 보스격으로 나오는 만화도 있던 기억인데요.. 아이즈 40만석을 걸 가치가 있다던가...(내용은 안드로메다였던 기억입니다만;)

    아무튼 담력이 참 멋지군요(..근데 왜 저는 한편으론 뭔가 마초짓은 바보같다고 느껴지는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1.09 08: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야규우 쥬우베이[柳生 十兵衛]가 등장하는 와이쥬우엠 야규우인법첩[Y+M 柳生忍法帖]인 듯 하군요.

      http://ja.wikipedia.org/wiki/Y%E5%8D%81M_%E3%80%9C%E6%9F%B3%E7%94%9F%E5%BF%8D%E6%B3%95%E5%B8%96%E3%80%9C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유일한 딸인 치요히메[千代姫]를 아이즈의 시골 무사가 무시하는 쌍큼한 시작이 짱이었습죠.

      여담으로 호랑이 소동 때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는 호랑이와 눈싸움하였고 서로 노려보다 호랑이가 물러갔다고 합니다.(...풋~)

      시간과 문화가 다르다 보니 느껴지는 것도 천차만별이라 생각합니다.

  2.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0.01.09 11: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7본창 중에서 마사노리나 기요마사가 최정상급 스타고, 다케노리나 나가야스가 단역에 그치는 인기를 누린다면, 요시아키나 가쓰모토는 중간급 배우라는 생각이 듭니다.(말많고 탈많은 와키자카는 제외하겠습니다. 이순신 덕에 인기는 제대로 끌었으니)

    그나저나 아이즈는 정말 일본역사에 많은 이들이 오간 장소군요. 아시나, 다테, 우에스기, 가모, 가토 요시아키, 거기에 호시나 번까지 있었으니 .. 막말의 아이즈는 말할 필요도 없군요. 간토와 오슈 사이의 요충지라서 그런 면이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막부가 호시나번을 아이즈에 둔 까닭은 대 다테 방어선의 역할이 맞는지요?

    P.S : 발해지랑님께선 원균 명장론을 믿지 않으시는 듯 하군요 (낄낄) 원균이 용맹하다는 기록은 곳곳에서 튀어나오기는 한다만, 6년간의 모아온 전력을 한 번의 전투에서 모두 날려먹은 게 명장의 기준이 되는지는 의문입니다. 발해지랑님의 생각은 어떠신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1.09 15: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여담으로 일본 위키에 따르면 키요마사나 마사노리는 나머지 등등과 동급으로 취급 받는 것을 싫어했다고도 하더군요.

      그러게요. 그래서 아이즈라는 쿠니[国]도 아닌 일개 지역을 따로 태그로 지정하였습죠. 언젠가 함 능력되면 아이즈에 관해서도 함 쓰고 싶습니다.

      ps..에 관해서는...
      승패야 병가지상사다 보니 뭐라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국가존망의 시기에 동료를 참언하여 나락에 빠뜨린다거나, 국가존망의 시기에 사복을 채우고자 돈 받고 병사 제대시키거나, 충무공의 운주당이라는 참모부 건물에 가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여성들을 데려다 하렘을 만든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더군요.

    • 정동희 2010.01.11 11: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이즈가 확실히 요지는 요지였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기요마사나 마사노리는
      아무래도 다른 칠본창 멤버와는 달리 히데요시 쪽하고
      인척관계가 있어서 좀 다른 대접이었지 않는가 싶습니다

  3. 맹꽁이서당 2010.01.09 22: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7본창엔 센고쿠 히데히사는 없네요~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이쪽도 결국 막부시대에 단절당한 도요토미 가문 출신 인물이었군요.
    새해부터 좋은 지식 얻어갑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1.10 22: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시즈카다케 전투 당시 히데요시의 배후 중 가장 위험스러웠던 시코쿠[四国]의 쵸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 元親]에 대한 방비책으로 시코쿠에 파견나가 있었습니다.

      시바타 카츠이에(...정확히는 오다 노부타카[織田 信孝]) 측은 히데요시의 배후를 위협하는 의미로 모토치카에게 협력을 요청. 그에 응한 모토치카는 시코쿠의 히데요시 파인 소고우 마사야스[十河 存保]를 공략. 그러자 마사야스는 히데요시에게 원군 요청. 그래서 파견된 것이 히데히사였습죠.

      히데히사는 휘하 2000을 거느리고 시코쿠에 도하. 모토치카는 그 소식에 휘하의 카가와 노부카게[香川 信景]에게 5000을 주어 요격을 명령. 그 움직임을 캐치한 히사히데는 복병을 배치하여 카가와의 선봉대는 격파하나 깊숙히 추격하다 후속부대에 패배. 도망쳐 히케타[引田]라는 곳에서 머물다 기세를 타고 야습해 온 카가와의 군세에 대항도 못하고 도주. 도주할 때 부대 깃발까지 빼앗기는 굴욕도 맛보았다고 하는군요.(바로 시즈카다케 전투가 벌어지는 날과 같은 날이었다고 합니다[1583년 4월21일])

      이렇게 쓰면 히데히사가 조금 바보 같지만, 당시 가장 불온한 움직임을 펼치던 모토치카에게 대항하도록 파견한 점. 만약 모토치카의 그릇이 커, 과거 미요시 가문[三好家]이 그러했듯이 사카이[堺]에 상륙하여 쿄우토[京都]를 노리기라도 했으면 히데요시의 정권은 없었을 것이기에, 그런 것을 방비하기 위해 파견한 센고쿠 히데히사는 당시 히데요시가 그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었는지를 알려 준다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여담으로...히케타[引田]에서 패하여 도망친 센고쿠 히데히사는, 본거지 아와지[淡路] 근방 수역을 장악하였다는 공로로, (졌음에도 불구하고) 4개월 뒤에는 아와지[淡路] 스모토[洲本] 5만석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패했는데도 영지가 4000석에서 5만석이 늘어난 것을 보면 히데요시의 신뢰가 얼마나 컸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

      사족으로 한 가지 덧붙이자면...
      시즈가타케 칠본창[賤ヶ岳七本槍]은 아즈키자카 고개 칠본창[小豆坂七本槍]을 베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시즈가타케 전쟁이 히데요시 vs 카츠이에와 같이 보이는 것도 또한 실상도 그러하지만 그들이 각각 내세운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 vs 오다 노부타카[織田 信孝]의 싸움이기도 했습니다.(즉 오다 가문 내부의 싸움입죠)
      오다 가문에는 과거 미카와 아즈키자카 고개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군세를 격파한 적이 있었고, 거기서 대활약한 7명의 용사에게 아즈키자카 칠본창[小豆坂七本槍]이라 부르며 칭송했다 하니, 히데요시는 자신이 직접 키웠다는[子飼い] 무장 7명에게 저 칭호를 줌으로써, 무장들에게는 더욱 활약할 수 있는 동기부여와 발판을 마련해 줌과 동시에, 오다 가문 내부에서도 어느 정도 정치적 효과를 노리지 않았나? 하고 생각합니다.

      새해에도 찾아주시고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 정동희 2010.01.11 1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센코쿠 히데히사...
      게임상의 능력치는 참 거시기(?) 하게 나오는 인물인데
      역시 마지막이 중요한건가요?
      일찌감치 히데요시 막하에서 많은 무공을 세웠고,
      발해지랑님 말씀처럼 사랑도 많이 받았던 모양입니다
      다만 역시
      한 방면의 총책을 맡기에는 신중함이 많이 부족한
      인물이었죠
      돌격대장형 인간이랄까...

      암튼 그 뒤로 큐슈 원정 때, 시마즈씨 낚시걸이에 말려 들어서 대패해 도망치고, 가이에끼

      하지만 오다와라 원정 때, 백의종군(?)해서 다시 복귀

      세끼가하라때도 동국에 속해서 그 뒤로도 계속
      가문을 이었던 것 같네요(요건 좀 불확실)

      전국시대 격전의 전장을 수 없이 거치면서
      수 차례 패하고도 살아남은 몇 안되는 질긴 인물입니다

  4.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1.11 22: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동희님께//
    " 기요마사나 마사노리는
    아무래도 다른 칠본창 멤버와는 달리 히데요시 쪽하고
    인척관계가 있어서 좀 다른 대접이었지 않는가 싶습니다"

    => 그렇습니다. 키요마사는 조선침략의 최중요 후방 기지라 할 수 있는 히고를.
    마사노리는 토요토미 씨 발상의 지라고 할 수 있는 오와리를 영유한 것만 보아도 기타 등등과는 확실히 틀린 취급을 받은 것 같습니다.

    "센코쿠 히데히사...
    게임상의 능력치는 참 거시기(?) 하게 나오는 인물인데"

    => 확실히 게임 상에서 센고쿠는 절망입죠. ^^

    말씀대로 센고쿠는 선봉대 대장 정도가 한계인 인물인 것 같습니다.

    "국시대 격전의 전장을 수 없이 거치면서
    수 차례 패하고도 살아남은 몇 안되는 질긴 인물입니다"

    => 덕분에 우리는 매력적인 만화의 주인공을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정동희 2010.01.14 13: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사에서 가정만큼 무의미 한 건 없지만
      히데요시에게 가족이나 인척이 많았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하다 못해 동생 히데나가쪽이라도 좀 번성했으면 어땠을지
      가토나 후쿠시마 등도 싸움에만 능했지 정치, 외교에 약해서 히데나가 사후에는 미쓰나리등 젊은 관리들에게 너무 의존하지 않았나 싶네요(물론 그래도 다 지 하고 싶은 대로 했지만)

      센코쿠 히데히사 만화책은 저도 읽어 봤는데,
      고증도 잘 되있고, 재미도 있더군요
      센코쿠 같은 전국무장도 정말 드물지만
      굳이 비교를 하자면 도도 다카토라 같은 인물이
      역시 또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지 않았나 싶습니다

      일본 전국시대에서 보통 한 번의 패배나 반역,가이에끼
      은거는 거의 그 인물의 종막이 되기 마련인데
      위에 언급한 센코쿠나 도도가 보기 드믄 케이스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 밖에 또 누가 있을 까요... 앞 선 인물들 정도 까지는 아니지만 다치바나 무네시게 정도...
      찌질거리면서도 오래 버틴걸로 따지면
      롯카쿠 쇼테이 부자도 만만찮죠...

      이런 인물들도 나름 드라마 성은 있을 것 같은데... ㅋㅋ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1.15 23: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히데요시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조선이나 일본이나 불행이 더 길어졌겠죠. ...아마. 개인적으로 히데나가가 계속 살았다면 일본군이 조선에 진주해 있던 기간이 더욱 늘어나지 않았을지...

      키요마사나 마사노리도 내정면에서 뛰어난 것을 보면 히데요시가 오래 살았다면 나름 유능한 지방행정관으로 남았을 것 같기도 합니다.

      센고쿠 천정기라고...센고쿠 시즌2가 현재 일본에선 진행되고 있습죠. 시간 되시면 함 보시길. 신촌 북오프에 센고쿠 천정기가 있더군요...일본어 판이긴 합니다만. 재미있습니다. ^^ 전 지금까지 나온 것 다 가지고 있습죠. 원하시면 만날 때 들고 나가겠습니다. ^^

      아~ 다음에 등장할 인물이 토우도우 타카토라입니다.

      사족을 하나 붙이자면...롯카쿠가 찌질하시다고 하니 생각나는 것인데, 롯카쿠 가문은 대군이 몰려들었을 당시는 본거지를 버리고 코우가 산중으로 도망쳐 게릴라 활동하는 것이 롯카쿠 가문의 방어 전략이었던 것 같습니다.

      과거 1487년에 롯카쿠 타카요리[六角 高頼]는 아시카가 막부 9대 쇼우군 요시히사[足利 義尚]가 공격해 오자, 나중에 노부나가가 오우미에 진공했을 시 쇼우테이가 그러했듯이 코우가 산중으로 피신하여 게릴라 활동. 지친 막부군은 쇼우군이 진중에서 병으로 죽는 것도 있어 물러감으로써 싸움 종결.

      롯카쿠가 찌질했다기 보다는 노부나가가 너무 강했다고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찌질하면서도 오래 버틴 듯한 인상은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아들 우지자네가 아닐지... 무려 아비 원수 노부나가 앞에서 공놀이를 할 정도였으니..

      (절대 그럴 일 없겠지만) 이마가와 우지자네로 1년짜리 대하드라마를 만들어도 꽤 이야기 성이 있을 듯... 아비 요시모토에 아비 원수 노부나가, 본거지를 공격해 온 타케다 신겐에, 도망친 처갓댁 호우죠우 우지야스와 그 우지야스가 죽자 눈치 겁나게 주는 처남 우지마사. 도움을 청한 과거 자기네 집에서 더부살이 하던 토쿠가와 이에야스. 쿄우토에 가서도 당시 귀중한 기록가인 야마시나 토키츠구와도 교류. 말년엔 히데요시와도 교류. 드라마 하면 등장할 인물들이 정말 풍부한 것 같습니다.

  5. 정동희 2010.01.18 13: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센코쿠 천정기는 번역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일전쟁의 경과는... 참 예측하기가 어렵네요... 히데나가가 만약 총사령관급으로 왔다면
    조선측이 좀 더 힘들지 않았을까...

    롯카쿠는 본래 그런식의 게릴라전을 했군요... (이거 무슨 이가패도 아니고... 고가패인가...)

    우지자네는 찌질하긴 하지만 분명 얘기꺼리는 많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뭐 나름
    노부토라 앞세워서 미카와 침공도 하고, 호죠에 원군청해서 신겐한테도 좀 버티고
    뭐 아주 싸움질을 안한건 아니더군요

    암튼 능력을 떠나서 운도 없었던 인물로 보입니다...(살아남는 처세술은 대단)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키운 무장들[秀吉の子飼い] 중에서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와 함께 쌍벽으로 일컬어지는 무장이다. 둘 다 맹장(猛將)으로 유명한 것에 더해, 히데요시를 섬기게 된 방식과 토쿠가와 정권하에서 멸문하게 되는 운명 등 둘은 비슷한 경력을 걸었다. 단지 키요마사 쪽은 아들 타다히로[忠広] 때 삭탈관직 당하지만, 양쪽 다 토요토미 은고의 토자마 다이묘우[外様大名[각주:1]]였기에 막부(幕府)가 판 함정에 빠지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키요마사와 같은 오와리[尾張] 출신이다. 나이도 마사노리가 한 살 연상 혹은 동갑이라고 한다. 히데요시와는 아비 측의 연으로 어렸을 적부터 히데요시를 섬겼다고 한다. 마사노리가 나무통 직공의 아들로 부친이 히데요시의 아비와 아비 다른 형제라고 하지만 속설이기에 확증은 없다.

 어쨌든 그 즈음에 이치마츠[市松]라 불렸던 마사노리는 츄우고쿠[中国] 공략군의 사령관으로 하리마[播磨]의 히메지 성[姫路城]를 본거지로 하였던 히데요시를 섬기게 되었다.
 히데요시도 또한 모친 쪽 연으로 데려온 카토우 토라노스케[加藤 虎之助 = 키요마사]와 마찬가지로, 이 이치마츠를 자신의 팔다리로 만들기 위해 곁에 두고 가르쳤다. 마사노리는 히데요시의 기대대로 용맹한 무장의 재능을 보이게 된다.

 1578년 하리마 미키 성[三木城] 공략 때 18살의 나이로 데뷔하여 공적을 세웠고, 그 후에도 톳토리 성[鳥取城],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각주:2]]에서 공을 세워 명성을 높여갔으며, 1583년의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는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의 용장 하이고우 이에요시[拝郷 家嘉]를 쓰러뜨려 소위 ‘칠본창(七本槍[각주:3])’이라 용명을 얻는 수훈을 세워, 상으로 혼자서만 5000석을 하사 받아, 칠본창 중 다른 멤버들이 3000석이었던 것과 비교해 보면 그가 세운 공적이 다른 멤버들을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알 수 있다.

 그 후에도 마사노리는 히데요리를 따라 각지를 전전. 임진왜란 때도 조선에 출진했지만 1594년에는 귀국하여, 다음 해인 1595년 히데요시에게 칸파쿠[関白] 히데츠구[秀次]가 코우야 산[高野山]에서 할복을 명령 받았을 때 검시관에 임명되었다. 전쟁터의 마사노리는 용맹함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한편으로 인정이 깊은 성격이기도 했다. 특히 은혜를 입은 토요토미 가문에 대한 감정이 남달랐다. 히데요시의 애미 오오만도코로[大政所]가 병에 걸렸을 때는 잠도 자지 않고 간호했다고 하며, 히데츠구가 배를 갈랐을 때는 그 가엾은 운명에 눈물을 흘렸다고도 한다.

 그 후 마사노리는 히데츠구의 영지였던 오와리 키요스[清須] 24만석으로 가증(加增) 받았는데, 이때 마사노리는 어렸을 적에 자신을 귀여워 해주던 지모쿠 사[甚目寺]라는 절의 늙은 비구니를 찾아, 예전 은혜를 갖는다며 먹을 것을 계속 보냈다. 더구나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히로시마[広島]로 옮기게 되자, 새로 오와리의 영주가 되는 마츠다이라 타다요시[松平 忠吉[각주:4]]의 가로(家老)에게 자신을 대신해서 종래대로 늙은 비구니를 보살펴 달라고 부탁한 후 떠났다 한다.

 인정가(人情家)이기도 한 마사노리는 그런 만큼 격정가(激情家)이기도 했다.
 히로시마로 옮겼을 때의 이야기로, 어느 날 측근 중 하나에게 잘못한 것이 있어 이에 화가 난 마사노리는 이 측근을 굶겨 죽이고자 성 한 켠에 가두어 놓고 식사반입을 금지시켰다. 시간이 흘러 마사노리가 그 측근의 생사를 살펴보자 어찌된 일인지 이전과 변함이 없었다. 마사노리는 누가 먹을 것을 가져다 주었냐고 열화와 같이 화내며 규명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다도의 자리에서 시중드는 중[茶坊主]이, 자기가 그러했다며 그 측근은 예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었기에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측근이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억지로 먹였다고 하며, 측근을 대신해서 자기가 벌을 받겠다고 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마사노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라며 중은 물론 유폐했던 측근까지 죄를 용서하였다.

 이러한 마사노리의 격정은 토요토미 정권의 행정관[奉行]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문치파에 대한 격렬한 증오로도 나타나 세키가하라에서 동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600년. 마사노리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따라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토벌군에 종군하였는데, 이시다 미츠나리 거병 소식에 따라 열린 대책회의인 ‘오야마 군의[小山軍議]’가 열렸을 때의 일이다.
 이에야스는 이미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나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 등 유력 다이묘우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는 하였어도, 진중에 있던 다이묘우들 대부분은 토요토미 가문에게 은의를 느끼는 다이묘우였으며 게다가 오오사카[大坂]에 처자를 두고 있었다. 히데요리[秀頼]의 명령을 바탕으로 한 미츠나리의 거병이었기에 다이묘우들이 동요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이렇게 말했다.
 “미츠나리와 한편이 되더라도 결코 원망하지 않겠소. 즉각 오오사카니 돌아가시길.”
 자리에 있던 다이묘우들은 이것저것 재보고 눈치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벌떡 일어나더니,
 “미츠나리의 거병은 히데요리 공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하지만 불과 8살의 어린 주군께서 그러한 생각을 하실 리가 없소. 즉 미츠나리 놈의 잔꾀일터.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이 마사노리는 나이후[内府=이에야스]와 함께 할 생각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이 마사노리의 말에 힘을 얻었는지 다른 다이묘우들도 잇따라 이에야스에 협력하겠다고 나섰다. 죽은 히데요시의 은혜를 가장 많이 입고 또한 히데요시의 아들인 히데요리를 생각함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도 강한 마사노리가 이시다 미츠나리를 너무 증오한 나머지 이미 천하에 대한 야심을 품고 있던 이에야스의 앞길을 크게 넓혀준 것이다.

 세키가하라 결전에서도 마사노리는 최전선에서 전투의 시작을 알렸고 맹렬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였기에 승리한 동군에서 가장 큰 전공을 세운 무장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것을 마사노리는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는지 전투 직후 어느 사건을 너무도 강인하게 해결하고자 하여 마사노리의 앞날에 중대한 화근을 남기게 된다.

 세키가하라에서 승리를 거둔 후 마사노리는 쿄우토[京都] 치안을 담당하게 되었고, 그러던 중 연락할 일이 있어 사자(使者)인 사쿠마 카에몬[佐久間 加右衛門]를 쿄우토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히노오카[日ノ岡]의 검문소를 점거하여 왕래하던 사람들을 조사하고 있던 토쿠가와의 직속 신하[旗本] 이나 즈쇼노카미[伊奈 図書頭] 휘하의 부하들과 말싸움을 하다가 이나의 부하들에게 사쿠마는 몽둥이에 맞고 쫓겨나 버린 것이다. 사쿠마는 마사노리에게 돌아와 사정을 보고하고 난 뒤, 마사노리의 허락을 받고 배를 갈라 자결하였다. 마사노리는 이때,
 “반드시 이나 즈쇼의 목을 자네의 무덤으로 가져오겠네”
 라고 눈물을 흘리며 사쿠마의 자결을 허락했다고 한다.
 마사노리는 이에야스에게 사쿠마의 목을 보내고선, 이나 즈쇼의 목을 달라며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를 통해 이에야스에게 재촉하면서 토쿠가와 측의 어떠한 타협안도 거부하여 결국 이나 즈쇼의 배를 가르게 하였다.

 어쨌든 마사노리는 세키가하라에서의 전공으로 아키[安芸], 빙고[備後] 2개 지역 49만8천2백석이라는 큰 영지를 얻게 되지만 이 단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시세가 변한 것을 깨닫지 못하였고, 이에야스가 막부를 연 뒤에도 오오사카의 토요토미 가문에 충성을 맹세하여, 1608년에 히데요리가 천연두를 앓았을 때는 급거 히로시마에서 오오사카로 달려가 막부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간호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이 일어나지만, 마사노리는 겨울과 여름 양 전투에서 에도 성 잔류[留守居]를 명령 받았기에 전쟁터에는 나가지 않았다. 물론 토요토미 가문을 소중히 여기는 마사노리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막부의 처치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토요토미 측이 은밀히 마사노리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마사노리는,
 “이에야스는 야전이 특기로 공성전은 잘하지 못한다. 오오사카 성[大坂城]은 돌아가신 타이코우[太閤] 전하[각주:5]가 세우신 천하제일의 성이니 이를 굳게 지키면 낙성되는 일은 없을 것”
 이라고 사자(使者)에게 말했다고 한다. 또한 오오사카에 있는 후쿠시마 가문[福島家]의 비축미(備蓄米)도 맘대로 쓰라고 했다 한다. 직접 도움을 줄 수는 없지만 내심 히데요리[秀頼]를 위하고자 했던 것이다.

 오오사카 공성전으로 토요토미 가문은 멸망하여 토쿠가와 정권의 기반이 강고히 다져지자, 토요토미 가문과 끈이 강했던 다이묘우들에 대하여 매서운 숙청정책이 시작되었다.
 1617년 마사노리는 법도(法度)에 따라 홍수로 파손된 히로시마 성[広島城] 보수공사를 해도 되는지 막부에 요청하여, 노중(老中)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각주:6]]에게,
 “뭐 조금 정도 보수하는 것이라면 괜찮겠죠”
 라는 구두 언약을 믿고서 정식 서류를 제출하지 않은 채 보수공사를 시작하였지만, 결국 이것을 ‘모반의 징조’라는 생트집에 잡혀, 1619년 시나노[信濃] 카와나카지마[川中島] 4만5천석[각주:7]으로 감봉되었다.

 더구나 마사노리가 죽었을 때 막부의 검시관을 기다리지 않고 그 유체를 화장하였다는 이유로 후쿠시마 가문은 모든 영지를 몰수당하였다.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1561년 오와리[尾張] 키요스[清須]에서 태어났다.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5000석을 하사 받았으며, 1585년 이요[伊予] 이마바리[今治]에 10만석, 1595년 오와리 키요스 24만석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공적을 세워 히로시마 49만8천200석이 되었지만, 1619년 실각, 4만5천석으로 시나노[信濃] 카와나카지마[川中島]로 감봉. 1624년 죽었다. 64세.

  1.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이후 토쿠가와 가문의 부하가 된 다이묘우. [본문으로]
  2.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을 일으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죽인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와 히데요시가 싸운 전투. [본문으로]
  3. 1583 년 오우미[近江]에서 히데요시[秀吉]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4.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넷째 아들. [본문으로]
  5. 히데요시를 말한다. [본문으로]
  6.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의 아들. [본문으로]
  7. 이 중 에치고[越後] 우오누마 군[魚沼郡] 2만 5천석은 아들 타다카츠[忠勝]의 영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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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동희 2009.12.28 10: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싸움에는 능했지만 정치에는 서툴렀다고 해야 할까요
    인생 후반기에 너구리 영감에게 철저히 이용만 당하고...
    사기꾼한테 사기 당하면서도 난 사기당한게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순진남이랄까

  2.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09.12.28 10: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센고쿠 시대에 어울리는 인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바보처럼 인정에 휘둘리는가 하면 때때로는 어느 쪽이 득실이 있는가를 파악하는 능력도 뛰어났으니까요.(아무리 미쓰나리가 미워도 서군이 압승을 거둘 상황이었으면 서군으로 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마사노리의 성품상 동군에 잔류해서 자폭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도요토미 가문이 불꽃처럼 번졌다가 사라진 것처럼 키워낸 이들도 불꽃처럼 사라지는 걸 보면 역사란 재미있습니다.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사람들이 빚어내는 이야기라서 그런 것이겠지요.

    P.S : 加藤 嘉明는 가토 요시아키가 맞는 건가요, 요시아키라가 맞는 건가요? 요새는 아사이가 '아자이'로 바뀌었다가 다시 어느 학자가 아사이가 맞다고 하기도 하고. 아직도 논란인 山內가 야마우치/야마노우치가 맞는가 논쟁도 있고. 사람들이 만드는 일은 정말 알 수 없습니다 (..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8 14: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땠을까요... 이시다에게 과연 넘어왔을지...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 것 같아서, 이 인간은 좀 조심스럽군요.

      두번 째 문단은 좋은 말씀이십니다.

      ps;저도 보는 책마다 달라 헷갈리더군요. 일단은 양 쪽 다 괜찮지 않을까요? ^^; 일본 사람들 이름 읽는 것은 정말 힘듭니다.

    • 정동희 2009.12.28 15: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쎄 뭐...
      전에 일본사 강의 들을 때,
      왜 겐페이 시대에는 성뒤에 노를 붙였습니까
      (ex : 후지와라노, 다이라노, 미나모토노 )
      라고 교수한테 물어 보니
      당시에는 개인의 이름보다 어느 집안 출신이냐를 중시해서
      그렇게 불렀다(뭐 그 이후에는 안그랬나 마는...)
      좀 캐 물으니 정확한 사유는 안나오더군요 딱히 언제부터 그랬다 라는 것도 없고

      또 일본 사람들은 대충 한자나 가나로 이름 적고 자기가 부르고 싶은대로 부른다네요 어느정도 규칙은 있지만 그게 꼭 그렇지는 않는다는...

      아사이나 아자이, 야마우치나 야마노우치
      뭐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너무 지엽적인거 가지고 이게 맞다 저게 맞다
      굳이 따질 필요가 있나 싶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8 21: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동희님께//
      조금 이야기가 샙니다만 순서상 ^^

      후지와라 -> 우에스기[上杉], 사토우[佐藤]
      타이라 -> 호우죠우[北条], 치바[千葉], 오다[織田]??
      미나모토 -> 아시카가[足利], 닛타[新田]...
      로 나뉘어 지듯이, 후지와라, 타이라, 미나모토를 저는 우리나라의 김씨, 이씨, 박씨... 등등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거기에 가령 저같은 경우 함창 김씨 이니, 일본식으로 이름을 쓴다면 '함창 태진'....이 되지 않을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

      후지와라나 겐지, 헤이시가 각각 안 쓰이게 되는 상황 등을 살펴 보면 나올 것도 같습니다(헤이시가 太政大臣을 한 다음 멸문한 다음 '타이라'라고 칭하지 않았다거나, 겐지가 将軍을 한 뒤 '미나모토'를 직접 칭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식으로 뭔가 법칙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야~ 법칙은 있습니다.(가령 지금도 이름으로 쓸 수 없는 한자가 있다고 하네요)

      그리고 그 사람이 원하는 식으로 불러 주는 것이 올바르다 생각합니다.
      가령 야마우치 카즈토요[山内 一豊]는 당시에 서로간의 편지나 족보 등에 '야마우치 카츠토요'라고 되어 있다고 하니, 그렇게 불러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면서도 저는 입에 배었는지 '야마노우치 카즈토요'라고 하지만요)

  3. Gyuphi IV 2009.12.28 22: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뭔가 이 사람은.. 뭐 결과론적인 말입니다만 중요한 순간의 어리석은 선택의 반복으로 인생 쫑낸 것 같이 느껴지더군요. 명줄이라도 카토 키요마사처럼 짧았어도 이렇게나 당대에 망가지진 않았을것을.. 역시 바보라서 별 걱정도 생각도 없어서 오래 산건가 싶기도 싶기도 하고 말이죠-_-;;

    그런데 정말이지 오사카성 말입니다만.. 뭐 지금의 공구리 보수 이전의 규모는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만, 후쿠시마 마사노리 말 마따나 오사카측이 선택에 전연 미스 없이, 굳게 지키고 있었다면 낙성당하지 않았으려나요, 해자를 메운다는게 정말이지 일반적인 상상 이상의 도쿠가와가에게 전술적 이득을 안겨준 행위였던가, 싶네요. (라곤 해도 나고야성 가보면 그 해자도 참 깊다 생각드는데 당시 규모의 오사카성이었다면..)

    후세인이란 그러고보니 참 편한듯 합니다. 이정도 세월이 지나면 그 당대의 고민따윈 크게 의식않고 막 말해도 잡아가는 사람도 없으니까요(아, 이건 참 역사에 흥미있는 사람들의 특권@.@)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30 00: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한 곳을 정하면 무작정 그 방향으로만 냅다 뛰는 성격이 아닐지... 왠지 저에겐 그렇게 느껴지더군요.

      전쟁과 성 쪽은 제가 좀 딸리는 편이라 말하기 뭐합니다만, 토쿠가와 쪽의 오오사카 성이 이시가키[石垣]가 더 높고 텐슈[天守]도 크고 높으며, 성 면적 자체도 조금 더 커졌더군요. 그렇게 만든 놈이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라고 하던데, 직접 오오사카 공성전에 참가한 놈이었던 만큼, 뭔가 허술한 점을 찾았기에 히데요시와는 다른 형태의 성을 만들었다고도 생각합니다.(뭐 대포가 쓰인 것도 있었고 말입니다)

      그쵸. 당시에 그 사람 앞에서 대놓고 이야기 했다간 斬り捨て御免이었을테니까요. ^^;

  4. 맹꽁이서당 2010.01.01 20: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두번째 분 (상?장안) 님의 두번째 문단에 공감이 가네요.
    (근데 도요토미 덕택에 출세한 인물 들 중에서도, 도요토미 본가나 가토, 후쿠시마 와는 달리 에도 막부 시대에도 건재했던 가문도 있을 법한데... 잘 기억이 나지 않네요)

    하여튼 올 한해도 좋은 글 잘 읽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1.02 00: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사가미 나가야스[相模 長安]'라고 호칭하고 있습니다만.. 그러고 보니 어떻게 읽어야 하나요? 사가미님 ^^

      호소카와 가문[細川家]가 우선 떠오르는군요. 토요토미 덕택에 출세한 가문으로. 뭐 마에다 가문[前田家]도 100만석 이상 얻어 떵떵거리며 살았고, 아사노 가문[浅野家]이라던가, 하치스카 가문[蜂須賀家], 야마우치 가문[山内家]도 그 범주에 포함될 듯.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저 역시 올 한 해 잘 부탁드립니다. ^^

    •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0.01.08 08: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가미 나가야스로 읽는 것이 맞습니다.
      저같은 소인에게 관심을 가져주시니 감사할 따름. (헤헤)

 만약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가 만약 이에야스[家康]의 아들이라는 자리에 있지 아니했다면, 어엿한 센고쿠[戦国]의 영웅으로 한자리를 차지하며 찬란한 업적을 남겼을 것이다. 뛰어난 자질을 가졌으면서도 그 핏줄로 인하여 결국 아무것도 행하지 못하고 일생을 끝마쳐 버린 것이다.

 히데야스의 자질을 말해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히데야스가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 67만석이라는 큰 영지에 봉해졌을 때,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가 방문해서는,
 “만약 천하에 이변이 일어났을 시에 소인은 당신과 함께 하겠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누구의 눈으로 보건 동생인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보다 히데야스의 기량이 뛰어나 보였던 듯 하다. 아비 이에야스조차 히데야스를 두려워 했던 듯한 흔적이 있다.

 세키가하라[関ヶ原] 결전 때, 이에야스는 히데야스를 결전에 참가시키지 않으려고 아이즈[会津]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봉쇄하는 임무를 주며 우츠노미야 성[宇都宮城]을 지키게 한 것은, 행여 히데야스가 세키가하라에서 전공이라도 세워 쇼우군 히데타다를 능가하면 큰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각주:1]. 히데야스라면 이런 혼란을 틈타 천하를 취할법한 실력을 가졌다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히데야스의 생모는 이름을 오만[お万]이라고 하며 미카와[三河] 치리후[池鯉鮒[각주:2]]에 있던 신사에 근무하던 신관[각주:3]의 딸이었다고 한다[각주:4]. 이에야스의 정실 츠키야마도노[築山殿]의 시녀였던 것을 이에야스가 미카와 오카자키 성[岡崎城]의 목욕탕에서 손을 대어 히데야스를 낳게 했다고 한다. 오만이 임신한 것을 알아챈 츠키야마도노는 질투를 증오로 바꾸어 오만의 옷을 모두 벗겨 나무에 매달아 채찍질했다고 한다.[각주:5] [각주:6] [각주:7]
 이런 과정을 거쳐 태어난 히데야스는 그 용모가
동자개[ギギ – 매기와 비슷하게 생긴 물고기]와 닮았다 하여 ‘오기마루[於義丸]’ 라고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야스가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을 혼다 사쿠사에몬 시게츠구[本多 作左衛門 重次]나 이에야스의 적자 노부야스[信康]가 꾀를 내어 대면시켜 결국엔 이에야스가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오기마루에 대한 이에야스의 애정은 박했다. 그리고 히데야스가 태어난 지 5년이 지나 이에야스의 애첩 오아이노카타[お愛の方]에게서 히데타다[秀忠], 타다요시[忠吉]가 태어나자 한층 더 히데야스의 존재감은 엷어져 갔다.

 11살 때, 오기마루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양자가 되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이에야스가 바친 인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히데야스의 호탕한 기질을 사랑했다. 이름을 자신의 ‘히데[秀]’와 이에야스의 ‘야스[康]’를 따 ‘히데야스[秀康]’로 지은 것도, 거기에 칸토우[関東]의 명족(名族) 유우키 씨[結城氏[각주:8]]를 계승하게 한 것도 히데요시의 깊은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의 큐우슈우 정벌전[九州の役] 때, 히데야스가 후방에 있어 공을 세우지 못한 아쉬움에 눈물 흘린 것을 보고,
삿사 나리마사[佐々 成正]가 히데요시에게,
 “역시 토쿠가와 님의 기풍을 물려받으신 듯”
 하고 말하자 히데요시가,
 “그렇지 않네. 히데야스는 이제 내 아들이니 무(武)에 관해서는 이 히데요시를 닮은 것일세”
 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히데요시가 히데야스에게 얼마나 깊은 애정을 가졌었는지를 전해주는 이야기이다.

 또한 이러한 일도 있었다. 히데야스가 16살 때의 일이라 하는데, 히데야스가 후시미[伏見]에 있는 승마장에서 말을 타고 있을 때, 승마장 관리인이 경주라도 하려는 듯이 히데야스의 옆으로 달려와 말머리를 나란히 한 것이다. 히데야스는 그 무례에 분노하며 단칼에 베어 죽여버렸다. 관리인의 죽음에 승마장에 있던 관리인의 동료들이 살기를 띠며 히데요시에게 히데야스를 벌 주라고 간청하였지만 히데요시는 오히려,
 “내 아들에게 무례를 범한 승마장 관리인이야말로 죽어 당연하다”
 고 말하며 히데야스의 호방함을 칭찬했다고 한다.

 그 히데요시가 죽은 뒤,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응어리져 있던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 무공파 장수들과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문치파 관료들의 알력이 표면화 되었다. 결국 카토우 등이 이시다 미츠나리 습격을 꾀함에 이르자 미츠나리는 어쩔 수 없이 이에야스에게 보호를 청하였고 그 후 목숨을 건지는 대신 사와야마[佐和山]에 은거 당하게 된다. 사와야마로 향하는 미츠나리의 안전을 위해서 이에야스는 히데야스에게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와 함께 호위를 맡도록 지시하였다. 히데야스는 그때 병사[足軽]들에게는 철포의 화승에 불을 붙인 채 경계하면서 행군하도록 하였으며[각주:9], 무사들에게도 갑주를 두르게 하여 완전 무장한 채로 행군하는[각주:10] 등 히데야스는 철저한 경계태세를 유지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히데야스는 에치젠[越前] 후쿠이[福井[각주:11]]로 이봉(移封)되어 마츠다이라 성[松平姓]를 칭하였는데[각주:12], 1605년 히데타다가 쇼우군[将軍]이 되자 히데야스는 쇼우군의 형님이었기에 히데야스의 에치젠 가문은 “제도 밖의 에치젠 가문[制外の越前家]’이라고도 일컬어지며 남다른 대우를 받게 되었다.
 히데야스가 에도[江戸]에 올 일이 있을 때에는 쇼우군 히데타다가 일부러 시나가와[品川]까지 마중 나왔고, 시나가와에서 에도로 향하는 길에서 히데타다는 자신의 가마를 히데야스보다 아랫자리에 위치하도록 했을 정도였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히데야스의 행렬이 에도로 가기 위해서
우스이 고개[碓氷峠]]의 관문소[関所]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이때 에치젠 가문은 철포 100정을 휴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정도 에도로 들여서는 안 되는 것이 천하의 법도였다. 당연히 관문소의 하급 관리들은 철포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를 보고 히데야스가 말했다.
 “그것은 토자마 다이묘우[外様大名[각주:13]]에게나 적용되는 법도일 것이다. 내가 에치젠 츄우나곤 히데야스[越前 中納言 秀康]임을 알고 막는 것인가?”
 히데야스가 이렇게 말하자 관문소의 하급 관리들은, 츄우나곤이건 다이나곤[大納言]이건 법도는 법도올시다. 통과시킬 수는 없소 하며 말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시팔시팔댔다. 히데야스는 격노했다.
 “관문소의 법을 지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욕설들과 츄우나곤 다이나곤하며 운운대는 것은 용서할 수 없도다”
 라고 말한 뒤, 부하들을 향해서,
 “저 놈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죽여버려!”
 하고 명령한 것이다.
  에치젠 가문의 무사들은 일제히 창을 꼬나 쥐고 칼을 칼집에서 뽑았다. 하급 관리들은 놀라 모두 도망쳤다.
 이것이 에도에 전해지자 히데타다는,
 “관리들이 도망친 것은 분별 있는 행동이도다. 아무리 관리들이 죽더라도 함부로 츄우나곤(히데야스)에게 벌을 내릴 수는 없는 법”
 이라 말하며 불문에 부쳤다고 한다.

 히데야스의 마음 속에 배다른 동생 히데타다가 쇼우군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 있더라도 무리가 아니었다. 어느 날, 후시미[伏見]에서 오쿠니[阿国]를 불러 그 춤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오쿠니의 춤을 보면서 히데야스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천하에는 수천 만의 여성이 있겠지만 이 오쿠니를 천하 제일의 여인이라 한다. 하지만 나는 천하 제일의 남자가 될 수 없으니 여자인 오쿠니에게조차 이르질 못하는구나. 이 어찌 분하지 않단 말인가”
 하고 말했다 한다.

 히데야스는 동생 히데타다가 쇼우군이 된지 2년 후에 3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유키 히데야스(結城秀康)]
1574년
미카와[三河]에서 태어났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둘째 아들. 1584년 코마키-나카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戦い]의 강화 교섭 후 인질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양자가 되었고, 1590년 시모우사[下総]의 명문가 유우키 가문[結城家]의 양자가 되어 10만 1천석을 상속.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마츠다이라 성[松平姓]으로 복귀하여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 67만석에 봉해졌다. 1607년 죽었다.

  1. 우에스기 정벌을 앞두고 세키가하라로 향하게 되는 오야마 평정[小山の評定] 후 약 1개월 간은 히데타다가 우츠노미야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후 히데타다는 후방의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를 정벌하러 떠나고 대신해서 그제서야 그 임무를 맡게 된 것이 히데야스이다. 그 사이 미노[美濃]의 기후 성[岐阜城]이 너무도 단기간에 함락되어 상황이 변화되자 히데타다는 급히 세키가하라로 향하게 된다....한줄 요약하면 히데야스가 공 세울 것을 두려워 하여 처음부터 우츠노미야에 남긴 것은 아니다. [본문으로]
  2. 현 치류우 시[知立市]. 당시 연못[池]에 잉어[鯉]와 붕어[鮒]가 많이 살아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3. 신사(神社)의 말단 사무를 보는 직책인 샤닌[社人]이었다 한다. [본문으로]
  4. 나가미 시마노카미 요시히데[永見 志摩守 吉英]의 딸. 혹은 셋츠[摂津]의 의사인 무라타 이치쿠[村田 意竹]의 딸(또한 나가미 시마노카미가 나중에 셋츠로 가서 무라타 이치쿠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5. 그렇게 매달린 오만을 혼다 시게츠구[本多 重次]가 구해서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낳게 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6. 또는 오만이 매질을 맞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친척인 혼다 한에몬[本多 半右衛門]의 집으로 도망갔으며, 한에몬은 시게츠구에게 이런 일을 보고하여 시게츠구가 양육을 담당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7. 에치젠 가문의 가전[越前家伝]에 따르면 –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이에야스의 명령을 거역하고 혼다 한에몬[本多 半右衛門]의 큰엄마(伯母)에게 와서 도망치겠다고 하자 한에몬의 큰엄마는 성으로 돌아가라고 했으나, 오만은 돌아가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말했다 한다. 이 한에몬의 큰엄마는 과거 이에야스가 어렸을 때 시중 들던 여성이라 한다. 한에몬의 큰엄마 다음 날 입성하여 이에야스를 만나 오만에 대해 보고하였지만 이에야스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 그냥 한에몬 큰엄마 집에서 머물다 30일 뒤 쌍둥이를 낳았다 한다. 한 명은 곧바로 죽었으며 나머지 한 명이 히데야스라고 한다....(여담으로 쌍둥이 중 하나가 죽지 않고 나가미 사다치카[永見 貞愛]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당시는 동물이나 한꺼번에 여럿 낳지 사람은 한 명씩만 낳기에 쌍둥이는 사람 취급을 안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이에야스의 할머니부터 9대 쇼우군 이에시게[家重]의 생모에 이르기까지 에도 막부의 역대 쇼우군의 생모, 정실, 애첩, 측실 및 유모를 기록함과 동시에 그녀들의 출신 가문들을 기록한 [옥여기(玉輿記)]에 따르면, 유우키 가문은 카마쿠라 막부[鎌倉幕府] 초대 쇼우군[将軍]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의 셋째 아들인 유우키 토모미츠[結城 朝光]를 시조로 하며 - 공인된 요리토모의 아들은 2대 쇼우군 요리이에[頼家], 3대 쇼우군 사네토모[実朝]로 두 명뿐. - 히데야스의 양아버지가 되는 유우키 하루토모[結城 晴朝]는 토모미츠의 19대손이라 한다. 참고로 유우키 토모미츠는 그 어미가 요리토모의 씨를 품은 상태로 요리토모가 오가와 토모미츠[小山 朝光]에게 하사하였고 그 후 태어난 것이 유우키 토모미츠라 한다....근데 이걸 믿으면 질 확률이 높다. [본문으로]
  9. 오발의 위험과 화승을 아끼기 위해서 막 전투가 벌어지기 전이 아니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본문으로]
  10. 갑옷과 투구 무게도 무시할 수 없는 터라 행군 시에는 상체 갑옷과 투구를 따로 챙겨서 이동하였다. [본문으로]
  11. 이때까지는 아직 키타노쇼우[北ノ庄]. 후쿠이[福居]로 이름이 바뀌는 것은 에치젠 마츠다이라 가문 3대이며 히데야스의 차남인 마츠다이라 타다마사[松平 忠昌] 때. 키타노쇼우[北ノ庄]의 키타[北]가 패배(敗北)와 글자가 같아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후에 후쿠이[福井]로 발음은 같지만 한자가 바뀌게 된다. [본문으로]
  12. 위키에 따르면 확실히 마츠다이라 성을 썼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한다. [본문으로]
  13. 세키가하라 이후 토쿠가와 가문을 섬긴 가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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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09.12.06 08: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인은 매독이 가장 유력하지요?

    본디 성정이 색을 밝혔는지 혹은 삶에 대한 불만이 그 쪽으로 향했는지 (개인적으로는 후자) 모르겠으나 뛰어난 재능이 센고쿠 시대에 발휘되지 않은 것은 애석한 일입니다. 아, 물론 발휘되면 히데야스의 손에 수많은 목숨이 이슬처럼 사라질테니 오히려 인류애적 차원에서는 잘된 일인가요.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그런데 마쓰다이라 가문은 장남에게 있게 했지만 유키 가문은 4남에게 상속시켰던게 맞는가요? 벌써부터 까먹으면 안되는데.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06 09: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런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죠....
      히데야스의 얼굴에는 츠키야마의 증오가 서려 있어서 이에야스는 그것을 볼 때마다 꺼림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스님(텐카이[天海]라고 하지만 텐카이가 이에야스와 만나는 것은 빨라야 1590년인지라...)에게 그것을 없애는 기도를 부탁하자, 효험이 있었는지 그 증오가 떨어지긴 했지만 대신 얼굴에서 고름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더 정나미가 떨어진 이에야스는 히데야스를 히데요시에게 양자(...라 쓰고 '인질'이라 읽는다고 합니다)로 보냈다고 합니다.(1584년)

      상기의 이야기에서는 이에야스가 매독균을 보유하고 있었는 듯 하고 히데야스는 모친의 태내에 있을 때부터 매독균에 감염된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쵸. 난세의 재능이라야 결국 사람 죽이는 것으로 이어지는지라.... 그래도 자질(뭐! 패왕의 자질을 가졌다고!? - by 삼국전투기 4권 장수가 조조를 평하며)과 성망을 갖추었으면서도 결국 반란 일으키지 않은 것만은 평가해야 할 듯.

      다섯째 아들 나오모토[直基]라고 하는데 바로 위에 넷째가 일찍 죽었으니 넷째라 해도 무방할지도...

      전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닌지라 그럴 땐 위키를 자주 이용합죠. ^^

  2. 나라 2009.12.07 12: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우키 히데야스가 실제로 기량을 보인 적이 있나요? 기량을 펼친 적이 없다면 있는지 없는지 아는 건 불가능할텐데..
    물론 히데타다에 비한다면야...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08 03: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니체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하더군요.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에피소드 3개만 들으면 그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고...

      뭐 머리 짱 좋은 니체니 할 수 있는 말일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사람이라도 대여섯개 이상의 에피소드를 통해 그 인물의 그릇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3. Asura 2010.01.10 14: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시다 미츠나리가 '이에야스의 씨라고 믿겨지지 않는다'면서 좋아했던 유키 히데야스군요.
    '그' 미츠나리가 좋아했다면.. 분명 재능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얼굴이 동자개 닮았든, 고름이 뚝뚝 떨어졌든, 상대가 미츠나리라면 납득이 가네요..(업병(한센병유력)을 앓은 오타니 요시츠구와 친하게지냈던 인물).

    이사람에 대해서는 유곽에 들락날락하다가 스스로 코를 잘랐다는 애기도 있던데.

    저는, 이시다 미츠나리에게 받은 마사무네를 '이시다 마사무네'라 명명하고 평생 아꼈다는 에피소드가 제일 좋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1.10 21: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쩌면 말씀하신 대로일지도 모릅니다.
      (후세에 전해진 미츠나리에 대한 잘못된 인상이 워낙 많아, 있던 사실도 없애다는 것이 많은 것을 보면 더 많은 이야기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코를요? 으~ 끔찍하군요.(전 처음 들어봅니다만... ^^; )

  4. shiroyume 2012.02.13 15: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생각보다 재밌네요. ^^

 

 에도 시대[江戸時代], 오우미[近江] 히코네 번[彦根藩] 이이 가문[井伊家]은 대대로 대로(大老[각주:1])를 배출하는 후다이 다이묘우[譜代大名[각주:2]] 필두의 가격(家格)으로 유명했다. 막말(幕末) 즈음, 안세이의 대옥[安政の大獄[각주:3]]과 사쿠라다 문밖의 변[桜田門外の変[각주:4]]으로 잘 알려진 이이 카몬노카미 나오스케[井伊 掃部頭 直弼]가 이 가문 출신이다.

 센고쿠[戦国] 시대, 이이 가문은 ‘이이의 적비대[井伊の赤備え]’라는 호칭으로 용명을 떨친 용맹무쌍한 전투집단이었다.  이이 가문의 깃발, 표식, 장병의 갑주는 물론 마갑(馬甲)에 이르기까지 모두 붉은 색으로 통일, 그 붉게 타오르는 듯한 붉은 무리가 전쟁터를 질주한 것이다. 이 집단을 처음으로 이이 가문에 도입한 것이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였다.

 적비대는 원래 타케다 가문[武田家]의 것으로 나오마사는 이를 모방한 것이다. 즉 1582년 텐모쿠잔[天目山] 산에서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가 죽은 뒤, 이에야스[家康]는 타케다의 유신(遺臣)들을 나오마사의 가신단에 편입시켰다. 나오마사는 새로 타케다의 유신들을 포함한 가신단을 편성하면서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 휘하에서 용명(勇名)을 떨쳤던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 昌景]의 군단이 적비대였다는 것을 참고로 한 것이다. 그간의 사정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코우슈우 군[甲州[각주:5]軍]의 명성은 천하를 진동시켰었다. 누구나가 이 타케다의 유신들을 원했다. 그런 타케다의 유신들이 이이 가문에 배속되게 된 데에는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가, “젊고 신참인 나오마사의 기를 살려 주기 위해 그의 휘하로 배속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하고 이에야스에게 진언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반 정도는 자신에게 배속해 달라고 부탁하며, 만약 들어주지 않을 경우엔 나오마사와 결투를 벌이겠다고까지 거친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타다츠구는 가당치 않다는 듯이 이렇게 답했다.
 “원래 주군께서 나에게 배속시켜 주신다는 것을 내 멋대로 나오마사에게 배속시킨 것이다. 만약 자꾸 네놈이 툴툴거리면 네놈 일족을 모두 꼬챙이에 꿰어버릴 테다”
 이 완고한 타다츠구의 태도로 인해 타케다 유신단은 이이 가문 배속이 결정된 것이다.

 나오마사는 토쿠가와 사천왕 중 한 명으로 꼽힐 정도인 무공파(武功派)이지만 사천왕의 다른 멤버들인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들 처럼 조상 대대로 토쿠가와 가문을 섬긴 것이 아니라 나오마사의 대가 되어서 처음으로 토쿠가와를 섬긴 신참이었다.
 이에야스를 섬기기 전까지 이이 가문은 대대로 토오토우미[遠江]의 이이노야[井伊谷]라는 곳에서 살며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에 속해 있었지만, 부친 히고노카미 나오치카[肥後守 直親]가 누명을 쓰고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에게 살해당하자 나오마사는 도망쳐 친족의 손에 키워지던 중 이에야스가 나오마사를 발견하여 자신의 가신으로 삼았다. 이 이례적인 발탁과 그 후 이에야스의 지나친 총애로 인하여 나오마사는 이에야스 남색(男色) 상대가 아닐까? 하는 시각도 있다. 어쨌든 신참이었지만 나오마사에 대한 이에야스의 신뢰는 두터워 토쿠가와 가문에서의 지위를 높여 갔으며, 나오마사도 또한 충실한 가신으로서 견마지로를 다하며 자신 스스로도 후다이[譜代[각주:6]]라 여기고 있었다.

 후년 히데요시[秀吉]와 만나러 이에야스가 상경하게 되는데, 그 동안 오오만도코로[大政所[각주:7]]를 이에야스의 성에 인질로 보내었다. 이에야스가 살아서 돌아옴으로써 오오만도코로의 인질 역할은 끝나 그녀를 반환하게 되었다. 이때 나오마사가 호위하는 역할을 맡아 히데요시에게로 향했다. 히데요시는 나오마사의 빈틈없는 호위에 기뻐하며 공을 치하. 다음 날 나오마사를 위한 향응의 자리를 만들어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 数正]에게, “자네는 요전까지만 해도 나오마사와 동료였으니 함께 참석하게”라며 동석시켰다. 이시카와 카즈마사는 이에야스의 고굉지신이었지만 히데요시로 말을 갈아탄 인물이었다. 카즈마사를 본 나오마사는 참석해 있던 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이 카즈마사는 우리 주군인 토쿠가와를 조상 대대로 섬겨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군을 배신하고 전하(히데요시)에게로 도망친 겁쟁이이기에 졸자는 동석하고 싶지 않습니다”고 말하여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나오마사의 후다이[譜代] 의식을 강조한 일화이다.

 이어서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の役[각주:8]] 때의 일이다. 장기전으로 인해 장병들의 마음이 피폐해지는 일이 없도록, 히데요시는 쿄우토[京都]나 사카이[堺]의 상인들을 자유로이 드나들게 하여 장병들이 술잔치나 춤, 노래도 자유롭게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등 활발한 진중 위안을 행했다. 나중에는 자신의 측실 요도도노[淀殿]까지 쿄우토에서 불러들였고, 여러 다이묘우에게도 그들의 처첩을 부르도록 권했다. 전쟁이라기 보다는 축제와 같은 떠들썩함이었다. 이러한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나오마사는 한 가지 꾀함이 있었다. 빠질대로 빠진 히데요시는 불과 14~15명의 호위만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나오마사는 슬며시 이에야스에게로 가서,
 “주군. 지금이야말로 천하를 손에 넣을 절호의 기회입니다. 히데요시의 목을 취하기는 아주 쉽사옵니다”
 야심만만한 나오마사의 헌책이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천명에 어긋나는 행동을 일으켜선 안 된다. 모름지기 세상 일은 하늘이 내려주신 것에 따라야 한다. 이것을 명심하도록”
 하고 엄격하게 나오마사를 꾸짖으며, 어떤 일이건 성취될 때에는 때의 추세라는 것이 있음을 가르쳤다고 한다.

 1600년 세키가하라[関ヶ原] 결전 때, 나오마사는 동군의 선봉으로 출진하였다.
 9월 15일 결전 당일 새벽. 나오마사는 흰 갑옷을 입고 짙은 안개 속에 말을 채찍질하며 스스로 정찰을 나가 낌새를 엿보다 전투가 시작되자, 말 재갈을 쥐고 있던 부하가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싸우다 전사하면 운명일 뿐”
 이라며 적진으로 돌입했다고 한다.
 또한 아군인 동군 선봉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부하 장수 카니 사이조우[可児 才蔵]가 막아 서자[각주:9], 정찰을 나간다고 속여 계속 앞으로 전진했다고도 한다.

 이 결전도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를 배반케 한 동군이 서군을 총붕괴로 몰아넣었지만, 그때 패잔병 500여기를 이끈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가 동군 진영을 스치며 쏜살같이 질주하여 퇴각하였다.
 나오마사의 이이 군은 곧바로 이를 추격, 시마즈의 후군[殿] 시마즈 토요히사[島津 豊久]를 전사시켰지만, 난전 속에 선두에서 질주하고 있던 나오마사는 시마즈 군의 저격에 오른 팔을 맞아 부상 당해 낙마하였다.[각주:10] [각주:11] [각주:12]

 이때의 상처로 나오마사의 오른 팔은 더 이상 쓸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세키가하라 전쟁 다다음 해인 1602년 7월 나오마사는 거성(居城)인 사와야마[佐和山]에서 죽었다.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1561년 토오토우미[遠江]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만치요[万千代]. 이에야스[家康]를 섬겼으며 1582년 이에야스코우슈우[甲州] 경영에 공적을 세웠다. 1584년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合戦]에 종군. 1588년 텐노우[天皇]가 쥬라쿠테이[聚楽第]에 행차했을 때 히데요시[秀吉]의 알선으로 종오위하(従五位下) 지쥬우[侍従]가 되었다[각주:13]. 배신(陪臣[각주:14])으로서는 파격의 대우였다. 1590년 이에야스의 칸토우[関東] 이봉(移封)으로 인해 코우즈케[上野] 미노와 성[箕輪城] 12만석에 봉해졌고, 후에 오우미[近江] 사와야마 성[佐和山城] 18만석으로 가증되었다. 1602년 42세에 죽었다.

  1. 중요 정책 결정을 할 때, 혹은 다대한 공이 있는 원로 대신을 위한 비상임 막부 최고위직...여담으로 채널 J에서 방영 중인 NHK대하드라마 아츠히메[篤姫]에서는 '특별 정무대신'으로 번역되어 나온다. [본문으로]
  2. 주로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이전부터 토쿠가와 가문[徳川家]를 섬겼던 가문이나, 쇼우군[将軍]이 새로 다이묘우[大名]로 만들어 준 가문. 막부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본문으로]
  3. 안세이[安政]는 당시 일본의 연호. 1858(안세이 5년[安政五年])~1860년 나오스케가 살해당할 때 까지 일어난 옥사. 당시의 대로(大老) 이이 나오스케[井伊 直弼]가 쿄우토[京都] 조정의 허락을 받지 않고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을 무단 조인하고, 나오스케 주도로 14대 쇼우군[将軍]이 키슈우[紀州]의 토쿠가와 이에모치[徳川 家茂]로 결정되자, 그에 반대하던 사람들을 탄압한 사건. 덕분에 나오스케는 자신의 정적들을 단번에 몰아낼 수 있었다. [본문으로]
  4. 안세이의 대옥에서 나오스케의 정적 중 중심적 존재인 미토 번은 번주의 은거, 전 번주의 장기 칩거, 가로들의 할복 등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그에 불만을 품은 미토 번사 17인과 사츠마 번사 아리무라 지자에몬[有村 次左衛門]이 에도 성[江戸城] 사쿠라다 문[桜田門] 앞에서 등성 중이던 이이 나오스케를 습격하여 살해한 사건. 여담으로 나오스케의 목을 자른 것은 주도한 미토 번사가 아니라 사츠마에서 혼자서 참가한 아리무라였다 . [본문으로]
  5. 카이[甲斐]를 달리 이리 부른다. [본문으로]
  6. 주가(主家)를 조상대대로 섬기는 가문 [본문으로]
  7. 히데요시의 애미 [본문으로]
  8. 히데요시가 호우죠우 가문[北条家]를 멸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 [본문으로]
  9. 선봉은 무가의 명예였기에 함부로 내주려 하지 않았다. [본문으로]
  10. 시마즈 요시히로의 전투기인 [유신공관원합전기(惟新公関原御合戦記)]에는 이리 쓰여 있다 한다. [본문으로]
  11.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가한 시마즈 가문의 병사 쵸우사 히코사에몬[帖佐 彦左衛門]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나오마사는 서군이 패주한 후 아직 움직이기 전의 시마즈 군에 병사들을 데리고 와서 큰소리로, “무엇들을 하고 있나? 요시히로를 죽여라!”라고 외쳤을 때 카와카미 타다에[川上 忠兄] 휘하의 카시와기 겐토우[柏木 源藤]가 앞으로 나아가 철포를 쏘아 나오마사를 맞추자 나오마사의 병사들은 자신들의 대장이 맞은 것에 놀라 동요하는 동안 시마즈 군은 퇴각을 시작했다고 한다.[旧記雑録後編 三] [본문으로]
  12. 덧붙여 이이 가문의 사료 [井伊家慶長記]에 따르면 카시와기 겐토우[柏木 源藤]가 쏜 총탄은 갑옷 오른 쪽 옆구리에 맞았지만 갑옷이 튼튼했기에 튕겨서 오른 팔에 맞았다고 한다. 나오마사는 이 충격에 창을 떨군 후 말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13. 효우부쇼우유우[兵部少輔] 겸임. 이때 혼다 타다카츠나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무가(武家)가 관직을 얻었다는 의미인 쇼다이부[諸大夫]인데 비해, 나오마사는 지쥬우[侍従]가 되어 쿠게[公家]가 되었다. 이는 당시부터 나오마사가 토쿠가와 가문 필두의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14. 원래는 중국에서 제후의 신하가 천자에게 자신을 부를 때를 지칭한 일인칭 대명사라고 한다. 그 뜻이 이어져 일본에서는 신하의 신하를 지칭할 때 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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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라 2009.11.18 23: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야마가타 마사카게가 아닌지..^^;

    나오마사가 신참이라니. 꽤 놀라운 걸요?

    문득 궁금한 게 하나. 쿠게가 되는 기준이 뭔가요? 아무리 살펴봐도 잘 모르겠더라구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8 23: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고쳤습니다. 꼼꼼히 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신참치고는 후세의 영향이 막강 & 유명한 것 같습니다.

      당상가(堂上家)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지쥬우[侍従]라는 관직이 종오위하(従五位下) 임에도 불구하고 궁정[内裏]에 입궐이 가능하였으며, 그런 궁정 입궐 가능한 자격을 당상(堂上)이라 하였고, 궁궐 입궐 자격이 없던 사람이 생긴 것을 쿠게나리[公家成]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12시부터 티스토리가 점검 들어간다고 급하게 쓰는군요. 내일 다시 정리하여 쓰겠습니다.

  2. 나라 2009.11.19 11: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뭘요! 좋은 글 올려주시는 발해지랑님께 언제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언젠가 발해지랑님께서 자주 틀리는 맞춤법을 지적해서 올릴까 생각하는데 괜찮으신가요..^^;

    저는 일본어 실력이 바닥이라, 듣는 것과 말하는 건 그럭저럭 하는데 그외엔 전혀.

    당상가가 된다는 듯이었군요.. 종오위하 관직 중 시중이 입궐 가능한진 몰랐습니다.
    승전 가능한 지위는 어느 정도인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20 11: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웃!! 미리미리 말씀해주세요~ 있었음. ^^;

      원칙적으로는 종삼위[従三位]이상은 입궐이 가능했던 듯 싶습니다.(산기[参議]의 경우 사위[四位]라도 의정관이라는 위치 상 입궐이 가능했다 합니다).

      나중에 원정(院政)가 확립되면서 좀 복잡해 진 것 같습니다....이런 쪽은 아직 제 안에서 정리되지 않아서 뭐라 말씀 드릴 수 없군요.

      지쥬우[侍従]는 역할 자체가 텐노우 곁에서 시중드는 것이다 보니 특별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일본은 환관이 없다보니 그런 조선이나 중국의 환관들이 하는 일 중 일부를 지쥬우가 했던 것 같습니다)

  3.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09.11.19 17: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이 나오마사가 당대에 손꼽힐만한 미남이었던 건 사실인 듯 하나, 당대에 손꼽힐만한 잔인성을 지녔다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에야스의 명령을 너무 '외골수'로 받아들인 게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이런 말 하기는 조금 낯부끄럽지만 (?) 나오마사가 너구리의 남색 상대라는 말도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닌 듯 합니다. 워낙 초고속 승진을 한데다가 요지 중의 요지인 히코네에 둘 정도였으면 나오마사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깊었는지 알 듯 합니다. ( 에헴 ) 원래 사랑하는 사이일 수록 더 믿음이 돈독해지는 법이니깐 말입니다 ㅎㅎ

    다만, 나오마사나 사위인 다다요시가 세키가하라 이후 너무 급하게 죽은 감이 없지 않네요. 이 쪽 관련 음모론은 없으려나요? ㅎㅎ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20 11: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쵸... 이이 가문 휘하에 있던 사람들은 아침에 나올 때 미리 조상들에게 인사를 했다고 하더군요.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신참에게 그렇게까지 우대를 한 이유를 댄다면 굉장히 유력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후장파기는... 다만 다른 예가 없다는 것이 저에게는 쪼금 이해가 안가긴 합니다.

      이이 가문은 쿄우토 슈고[京都守護]였다는 말이 있더군요. 그래서 이이 가문 하급 가신이라도 말을 키워야 했었다 합니다. 쿄우토에 만일의 사태가 일어났을 시는 즉시 이동할 수 있도록...그러나 사쿠라다 문 밖의 변[桜田門外の変]에서 이이 나오스케가 살해 당하면서 막의 눈 밖에 나, 그 대신해서 설치된 것이 신선조의 상위 조직으로 유명한 쿄우토 슈고쇼쿠[京都守護職]라고 합니다.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타다요시와 나오마사는 친번(親藩)과 후다이[譜代]에서 각각 워낙 막중한 임무를 띈 중요 인물들이라 오히려 그들이 죽은 것이 막부에게 큰 손해였다고 생각합니다.

  4. shiroyume 2009.11.19 20: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후손이 그 유명한 막말의 이이 나오스케지요. 어찌보면 어울리는 최후. 거기다 이 이이 가문은 메이지 정부 이후에도 시장까지 하는 인물이 나오죠. 역시 중간보스 가문?
    말년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네요. 자기는 죽도록 싸워봐야 20만석 가량이었는데 철부지 어린애들한테 자기 아들이라고 50만석 얹어줬는걸 보면 화가 끌어오르지 않았을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20 11: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말년엔 젊었을 때의 날카로움이 빠져 뭐든 허허~ 하고 미소짓는 중년이었다고 합니다.

      말년의 에피소드로, 자기가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코쇼우[小姓]가 나오마사의 과자를 몰래 집어 먹었는데, 그걸 문 틈으로 보면서도 "어찌할고~어찌할고~"하면서 웃었다고 하더군요.

      어떤 기분을 가졌는지 모르겠지만, 오와리 번[尾張藩] 자체가 나오마사의 사위 타다요시[松平 忠吉]가 죽으면서 생긴 중요한 빈 공간을 급격히 메워야 했기에, 별다른 불만은 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5.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11.20 17: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뻘플이지만....
    천도에서 토라마사, 마사카게, 나오마사만 적비를 갖고 있던가... 암튼 맞으면 무섭더군요;;;

  6. 맹꽁이서당 2009.11.20 22: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이 인물이 어디서 공을 많이 세웠길래 도쿠가와가 가신 중 거의 으뜸 자리를 차지했는지 항상 궁금했습니다. 대망에서도 그렇고 이 글 요약에서도 사실상의 첫 출전은 코마키-나가쿠테 전쟁 같은데, 그 이후 세키가하라까지 도쿠가와 가문이 전력으로 응한 전쟁은 거의 없지 않나요? 호죠가 정벌도 전투 보다는 병력 수로 압도한 경우라고 생각하구요.

    대망에서는 나오마사 첫 등장 씬에서 이에야스 첫사랑 여인의 친척 아이라고 묘사했던데, 남색설은 별로 반기지 않기에 차라리 그런 소설적 구성을 믿고 싶어지기도 하네요.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24 06: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마도... 노부나가 사후 공백지가 된 시나노[信濃], 카이[甲斐]를 두고 호우죠우 가문[北条家]과 싸울 때 전권대사가 되어 휴전 & 동맹을 성립시킨 공이 무지 큰 듯 합니다. 요다 노부시게[依田 信蕃]나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의 후방 교란이 있었다 하나 총체적으로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호우죠우와의 교섭에서 이에야스가 바라던 결과를 낼 수 있었던 공이 큰 듯 합니다.

      첫 출진은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 토오토우미[遠江] 시바하라[芝原]에서 일어난 전투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공을 세웠다고 하는데.... - 패하여 이에야스와 몇 명들과 도망치던 중 허술한 식사를 하던 중 혼자서 먹지 않는 나오마사를 반찬투정 부린다고 생각한 이에야스가, '니도 먹어라'...라고 하자, 나오마사는 '남들이 식사하는 동안 보초를 서겠습니다. 행여 적이 오면 모두 도망가는 동안 목숨을 바쳐 모두 피할 시간을 벌겠습니다'...라고 하여 이에야스를 감동시켰다고 하더군요.

      개인적으로 이에야스-나오마사 그렇고 그런 관계는 좀 믿기 힘들더군요. ^^

  7. 보통사람 2009.11.26 1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니 시마즈가문이 역전의 용사들을 많이 잡았네요...

    오오토모 소린 - 규슈전체의 60%를 영유하던 군웅.
    시마즈가문의 침공을 받은 이토가문을 구원하러 8만의 군사를 일으켰으나
    계략에 빠져 대패하고 겨우 도망침. 많은 인재들이 전사했고 패배가 알려지자
    오오토모가문의 많은 가신들이 류조지, 아키츠키 등과 내통하며 반란을 꾀하는등
    적지않은 후유증...

    류조지 타카노부 - 히젠의 곰이라 불린 군웅. 아리마 가문을 치기위해 군사를 일으켰으나
    아리마 가문을 구원하러 온 시마즈군의 계략에 걸려 대패하고 전사.
    류조지가문의 많은 맹장들이 타카노부를 지키다 같이 전사.

    다카하시 쇼운 - 오오토모의 가신으로 5만의 시마즈군에 7백명은 군사를 이끌고 농성 끝에 전사

    초소카베 노부치카 - 아버지 모토치카, 소고 가문과 함께 규슈정벌에 참여했다가 대패. 아버지를
    먼저 후퇴시킨뒤 후위를 막다가 전사.

    이순신 - 노량에서 후퇴하는 적군을 추격하던 중 시마즈군의 철포사격에 전사.

    이이 나오마사 - 세키가하라에서 후퇴하는 시마즈군을 추격하다가 총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26 13: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오토모 이하의 사람들은 노부나가가 살해 당하지 않았음 그냥저냥 살았을지도...(노부치카는 미묘)

      노부나가가 살아있을 당시,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은 코노에 사키히사[近衛 前久]의 중재로 오오토모-시마즈 간에 화평이 성립되었다고 하더군요.

      임진왜란 같은 노부나가의 조선 침략이 있었겠지만...역사의 if가 어떻게 흘러갈지...

  8. 2009.12.01 07: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9. 2009.12.02 06: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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