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의 분수령이 대전투의 승패를 배반이라는 행위로 결정짓게 한 인물 – 때문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는 ‘사상 최대의 배반자’라는 오명을 역사에 남기고 있다.

 히데아키는 히데요시[秀吉]의 부인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의 오빠 키노시타 이에사다[木下 家定]의 아들[각주:1]로 태어났지만, 히데요시 부부에게 자식이 없었기에 양자가 되어 키타노만도코로의 손에 키워졌다. 이 즈음에는 히데토시[秀俊]라는 이름을 썼다.

 1588년. 히데요시는 쥬라쿠테이[聚楽第]에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 天皇]의 행행(行幸)을 주청하여 성사시켰는데, 7살의 히데아키도 이 영광스런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이 즈음 히데아키는 히데요시의 후계자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각주:2] 하지만 다음 해인 1589년에 히데요시의 애첩 요도도노[淀殿]가 남자아이를 낳았다. 이때부터 히데아키의 운명은 어긋나기 시작한다.

 히데요시는 이 첫 아들에게 츠루마츠[鶴松]라는 이름이 지어주었다. 하지만 이 아이는 불과 3년을 살았을 뿐이었다. 히데요시는 츠루마츠 사망이라는 충격을 잊으려는 듯 조선 침략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히데아키도 또한 히데요시의 총애를 되찾은 듯이 보였다. 그러나 조선 침략이 한창이던 1593년, 요도도노는 또다시 남자아이(히데요리[秀頼])를 낳았기에 히데요시의 히데요리에 대한 눈먼 사랑이 시작되어, 우선 관백(関白)인 히데츠구[秀次]를 실각시켰다. 히데아키의 신분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는 히데요시의 의중을 헤아려, 히데아키를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양자로 들여보내는데 성공하였다.[각주:3]

 정유재란 때 히데아키는 일군의 대장으로 출진하였다.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의 농성으로 유명한 울산성(蔚山城)에 대규모 구원군을 이끌고 갔을 때의 일이었다. 도망치는 명나라 군사를 쫓아 총대장인 히데아키가 직접 창을 꼬나 쥐고 휘두르며 짐승을 쫓는 사냥꾼처럼 학살하고 다녔다고 한다. 대장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행위였다.

 다음 해인 1598년. 돌연 히데아키는 귀국 명령을 받았다. 히데아키는 득의만만한 얼굴로 히데요시에게 출두하였다. 필시 조선에서의 활약에 대한 칭찬해 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히데아키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것은 의외로 조선에서의 경거망동을 질타하는 히데요시의 노호였다. 히데요시는 “네 녀석과 같은 놈을 대장으로 삼다니 내 눈이 삐었구나”라고 까지 말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북부 큐우슈우[九州] 33만 6천 석을 삭감하여, 에치젠[越前] 15만석의 이봉이라는 가혹한 결정까지 내렸다.
 히데아키는 이 사태가 모두 군감(軍監)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참언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라고 골똘히 생각한 끝에 결론 내렸다. 하지만 지금은 뾰족한 수도 없었다.

 이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준 것이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였다. 온화한 얼굴로 히데아키의 불평을 들어주고서는, 히데요시에게도 가 히데요시의 분노가 풀리도록 노력하였다.

 1598년 8월. 히데요시가 죽었다. 이에야스의 조처로 감봉에 따른 이봉을 피한 히데아키의 처우도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해 흐지부지해졌다. 히데요시 사후 천하를 쥐고자 계획하고 있던 이에야스는 이러한 히데아키에게 은혜를 입힌 형태가 되었다.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히데아키가 배반한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의 결전 당일, 마츠오 산[松尾山]에 진을 치고 있던 히데아키는 시간이 흘러도 어느 편인지 확실히 나타내지를 않고 지켜만 보았다. 애간장이 탄 이에야스는 철포대에게 명령하여 히데아키의 배반을 재촉하는 철포를 쏘게 하였다. 이때서야 비로서 히데아키는 병사들을 움직여 서군의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부대를 공격한 것이다. 알려진 대로 이것이 세키가하라의 승패를 갈랐다.[각주:4]

세키가하라 포진도. 왼쪽 중간 마츠오 산[松尾山]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부대가 진을 치고 있다.

 싸움이 끝난 후 히데아키는 세키가하라 때 서군을 배반한 공적으로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에 51만석을 하사 받아 오카야마 성[岡山城]의 성주가 되었지만, 2년 뒤인 1602년에 21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계속 배반자라는 비난을 받아 정신이 병들었다던가,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망령에 괴롭힘을 받아 미쳤다는 등 여러 가지가 전해진다.

츠키오카 요시토시[月岡芳年]의 괴제백선상(魁題百撰相)에 나오는 금오중납언(金吾中納言) 히데아키[秀秋]에게 원령(怨霊)이 되어 나타난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1582년 오우미[近江] 나가하마 성[長浜城]의 성 밑 마을에서 태어났다. 1584년 히데요시[秀吉]의 양자가 된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5]에 출진. 이때 미노[美濃] 오오가키 성[大垣城]의 성주로 관직은 쇼우쇼우[少将]였다. 이어서 우코노에츄우죠우[右近衛中将], 산기[参議]
[각주:6] 겸 곤츄우나곤[権中納言]으로 이례적인 스피드로 승직하였다. 1594년에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양자가 되었다.

  1. 이에사다의 다섯 번째 아들. [본문으로]
  2. 이때 다른 거대 다이묘우[大大名]는 텐노우[天皇] 나아가서는 텐노우의 대리인인 히데요시에게 대들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였는데, 다이묘우들이 서약한 대상이 히데아키였다. [본문으로]
  3. 히데츠구의 실각이 나중(1595년)이며, 히데아키가 코바야카와 가문에 양자로 간 것은 1594년의 일. [본문으로]
  4. 지금까지는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 때 히데아키가 서군이었다는 시각이었으나(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기 전 히데아키가 동군이 지키고 있던 후시미 성[伏見城] 공격군의 총대장이었던 것도 있어), 근래에 들어서는 동군으로 참전했다는 시각도 있다. 정황증거로 마츠오 산에 진을 치고 있던 서군 이토우 모리마사[伊藤 盛正]를 쫓아내고 차지한 점, 이후 행해진 서군 군의(軍議)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점, 말단인 시마즈의 사츠마 병사들 역시 히데아키를 동군으로 보고 있었다는 점 등이 있다. 그런 동군으로 참가한 히데아키가 참전을 주저했던 것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내건 당근인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가 성인이 될 때까지 관백(関白)직과 킨키[近畿] 근방에 2개국 가증에 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5.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6. 1590~92년 사이의 관직이라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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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yuphy IV 2011.11.08 22: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니 금오중납언에서는 시바료타로선생이 따로 언급하진 않았었던듯 하지만 그래도 82년 출생설이 정설인가보네요. 82년생이라면 정유재란때 활동했을시 나이가 너무..라고 생각해보니 아사노가 도련님은 오다와라전역때 15살이었던걸 생각하면 꼭 그런것도 아닌것같고(...)

    거 그렇다곤 쳐도 21세에 사망이라 이래저래 설이 많긴 많나봅니다. 딱히 지병이 있었던것도 아니고 괴설이 나돌만도 하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1.08 23: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뭐 당시는 15살이면 일반적으로 데뷔전[初陣] 치를 나이인 것 같더군요.

      매사냥에 갔다 돌아 온 뒤 '기분이 안 좋아'라는 말 한 마디 뒤 자빠져 계속 자다가 한번 깨곤 사망... 당시도 이해하기 힘든 죽음 방식이었는지 농부에게 불알 채여서 죽었다는 소리까지 나왔나 봅니다.

  2.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11.12 09: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고밖엔 표현할 말이 없는 것 같습니다. 도요토미가의 황태자였으나 결국엔 도요토미가의 멸망을 이끄는 단초를 마련해준 인물이니 말입니다. 다만, 그 당시에는 이에야스 역시 히데요리를 위한다는 기치를 내걸었을테니 히데아키를 두고 도요토미를 배신했다는 비난은 안 주어졌을테니 그것 역시 극적인 요소군요.

    어쩌면 그의 급작스러운 죽음은 가타쿠라에 대한 상사병이 아닐런ㅈ..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1.12 17: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확실히 말씀대로 드라마틱한 삶을 산 것 같습니다. 히데아키는.

      카타쿠라라.. ^^
      하지만 카타쿠라의 몸도 마음도 이미 마사무네의 것... 애송이 히데아키가 오우슈우의 독안룡에게 情人을 빼앗기는 여러모로 힘들겠군요. 으익~ 상상만해도.. ㅋㅋ

    •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11.17 09: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잉? 마사무네와 시게나가가 그렇고 그런 사이였나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1.17 15: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오사카 공성전 때 시게나가에게 선봉을 명하면서 "너 말고 누구한테 시키겠니~♡"라면서 볼에 뽀뽀했다고 하더군요.

      카타쿠라 가문의 기록[片倉代々記]에 마사무네와 시게나가는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고 하네요.

  3. 2011.11.26 17: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912년 쿄우토[京都]의 다이토쿠 사[大徳寺]에 있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묘를 이장하게 되었을 때 미츠나리의 유골을 조사하였다.  
 조사에 따르면 미츠나리의 골격은 여성과 착각할 정도로 얇았다고 한다. 마치 히로사키 시[弘前市] 스기야마 가문[杉山家][각주:1]에 전해지는 미츠나리 초상화[각주:2]처럼, 섬세하고 여성적인 풍모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추측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체형의 사람은 고지식하며 비사교적, 유모어가 부족하고, 섬세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보통 자연이나 책 등을 사랑하는 지능형으로, 인간에 대해서는 냉담냉혹 한 편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이시다 미츠나리와 관련된 일화의 대부분에서 그런 특징을 옅볼 수 있다.

 미츠나리는 뛰어난 재치로 인해 히데요시를 섬기게 되었다.
 미츠나리의 출신지 오우미[近江] 사카타 군[坂田郡] 이시다 촌[石田村] 근처에 있는 절에 심부름하는 아이[寺小姓]로 있을 때의 일이다. 나이는 15~16 즈음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당시 오우미[近江] 나가하마 성[長浜城]의 성주로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가 매사냥을 하던 도중 목이 말라 이 절에 목을 축이러 온 것이다.
 미츠나리가 접대를 맡았다. 곧바로 차를 끓여 히데요시에게 권했다. 첫 번째로 내온  차는 커다란 찻잔에 미지근한 차를 7~80%를 담아서 내왔다. 히데요시는 맛있게 전부 마시고 난 뒤 한잔 더 바랐다. 미츠나리는 방금 전보다는 조금 뜨거운 차를 찻잔의 반 정도 담아서 내왔다. 히데요시는 이것도 다 마시고 난 뒤 한잔 더 바랐다. 미츠나리는 아주 뜨거운 차를 작은 찻잔에 조금만 담아 내온 것이다.
 히데요시는 미츠나리의 이런 재치가 맘에 들어 절의 주지에게 청하여 미츠나리를 데리고 와 곧바로 시동으로 삼았다. 이렇게 히데요시를 가까이서 모시게 된 미츠나리는 일이 있을 때마다 현명한 재능을 발휘하며 차츰 히데요시의 신임을 얻어갔다.[각주:3] [각주:4]

 이런 이야기도 전해진다.
 어느 날 히데요시가 미츠나리를 호출하여 지금까지의 공적에 대한 포상으로 500석을 가증(加增)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미츠나리는,
 “500석 대신에 우지[宇治], 요도[淀]의 양 천 기슭에 자라는 백성들이 맘대로 베고 있는 갈대의 예초권(刈草權)을 저에게 주신다면, 1만석에 상당하는 군역(軍役)을 부담하겠습니다”
 하고 청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이상하게 생각하였지만 미츠나리의 청을 허락하였다. 그러자 미츠나리는 양 천의 천기슭 수십 리 안에 있는 갈대를 베는 것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여 결국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고 한다.[각주:5] 

 미츠나리 의 이러한 이재(理財)의 재능도 히데요시는 맘에 들었다. 더구나 미츠나리의 경우 그런 재능을 사욕이 아닌 히데요시에 대한 멸사봉공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언제나 미츠나리는,
 “남을 섬기는 사람은 주인에게서 받은 봉록을 전부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남긴다는 것은 주인의 것을 훔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다 써버리고서 남에게 돈을 빌리는 것은 어리석은 자이다”
 고 단언하였다.

 이에 관한 일화로 용장(勇將)으로 이름 높은 시마 사콘[島 左近]을, 미츠나리는 자신의 봉록의 절반 가까이를 들여 가신으로 삼았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진다.[각주:6] 
 미츠나리는 뛰어난 무사에게 최고의 대우를 할 수 있도록 힘썼던 듯 하다. 그것도 히데요시에 대한 봉공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츠나리 자신의 주변은 실로 꾸밈이 없고 수수했다. 후에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패하여 거성인 사와야마 성[佐和山城]도 함락되었는데, 공격군의 병사가 성 안을 돌아보자 방은 모두 초벽(初壁)만 한 상태였으며, 바닥은 대부분 판자만 덧댄 채였다. 마당에 정원수(庭園樹)도 없었다고 한다.

 미츠나리의 근무태도도 굉장히 착실하였으며 다방면에 이르렀다. 밤중에 폭풍이 들이쳤을 때에는 다음 날 아침 6시에 이미 성의 파손상태를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즉 미츠나리는 이런 경우 철야를 해가며 성 안을 돌아보았던 것이다. 원래 이런 역할을 해야 할 담당관은 10시 즈음이나 되어서야 보고하러 오는 꼴이었다.

 이상과 같은 미츠나리의 근무태도는 결코 히데요시에게 아첨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자주 히데요시에게 격한 말투로 간언(諫言)하였다고 전해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미츠나리는 1585년 7월 히데요시가 관백(関白)에 임명되어 토요토미[豊臣]라는 성(姓)을 칭하게 되었을 때, 관백의 제대부(諸大夫) 12명[각주:7] 중 한 사람에 선정되어 종오위하(従五位下) 지부노쇼우유우[治部少輔]에 임명되었으며, 나중에는 토요토미 정권의 오봉행(五奉行)[각주:8] 중 한 사람으로 행정의 중책을 짊어지지만, 가지고 있는 재능과 능력으로 순식간에 No.1 실력자가 된다.

 미츠나리의 치적을 간단히 살펴보면, 히데요시가 중요시했던 사카이[堺]의 총독을 1586년부터 1588년까지 맡았으며,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각주:9] 때의 병참, 하카타[博多]의 부흥,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와의 외교절충에 힘 썼으며,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10], 히데요시의 오우슈우 정벌[奥州征伐][각주:11]에 출진, 그리고 두 번에 걸친 조선침략에서는 침략군의 운송과 병참, 무기 보급 등의 지휘를 취하였으며 감찰[軍監]까지 맡았다. 거기에 관백 히데츠구[秀次] 사건[각주:12], 태합검지[太閤検地][각주:13]에도 참여하는 등등 히데요시가 행한 중요정책 전반에 미츠나리는 중요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했기에 히데요시도,
 “나와 비교하여 손색이 없는 자는 미츠나리뿐”
 이라며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미츠나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히데요시 정권의 No.1 실력자였다.
 코우야 산[高野山]의 모쿠지키 상인[木食 上人]은,
 “미츠나리는 오봉행 중 제일인자인 듯이 행동하며, 조금이라도 거스른다면 해를 끼치는 사람이다”
 고 말했으며,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는,
 “태합의 고굉지신으로, 그 위세는 비견할 자가 없다”고 말하였고,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는 가신인 코다마 모토카네[児玉 元兼]가 가지고 있는 명도(名刀)를 미츠나리가 원하였는데, 제출이 늦어져[각주:14] 미츠나리의 기분이 상하면 큰일이라며 빨리 제출해 달라고 코다마 모토카네에게 부탁할 정도였다.  

 그러했기에 미츠나리는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을 대하는 태도가 거만하여 평판이 좋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미츠나리를 극도로 증오하는 무리가 있었다.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등 창 한 자루로 돌격하며 출세한 히데요시의 아이들, 즉 무공파 무장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미츠나리는 아무런 무공도 없는 주제에 히데요시의 맘에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잘난체하며 이런저런 지휘를 하는 건방진 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했기에 1598년 히데요시가 죽자, 오대로(五大老)[각주:15] 필두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천하제패의 야망을 들어내기 시작하자, 저 무공파 장수들은 미츠나리를  너무 증오한 나머지 적극적으로 이에야스와 손잡고 미츠나리 등 문치파와 격한 대립을 하게 되었다.

 다음 해인 1599년 3월, 문치파의 좌장적 존재였던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가 죽자, 무공파 칠장[각주:16]은 미츠나리를 습격하고자 하였다. 미츠나리는 이때 하필이면 이에야스에게로 도망쳐 난을 피할 수 있었는데[각주:17], 이런 모습에서 당시의 정치상화 속에서 고립된 미츠나리의 모습을 볼 수 있다[각주:18]. 이 사건으로 미츠나리는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으로 은거를 강요당해, 천하는 이에야스의 독무대가 되었다.

 1600년 세키가하라 결전[関ヶ原の戦い]은 대단원이었다. 대다수 토요토미 은고[豊臣恩顧][각주:19]의 다이묘우는 미츠나리가 내건 ‘토요토미 가문을 위해서’라는 대의명분만으로 더 이상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미츠나리의 중대한 오산이었다.

 미츠나리는 세키가하라에서 패하여 도망치다 잡혔다. 그 뒤에 몇 개의 일화가 전해진다.
 의복이 더러워져 있었기에 이에야스가 입던 옷을 주었을 때, 그것을 미츠나리에게로 가지고 온 자가,
 “이것은 우에사마[上様]가 하사하신 것”
 이라고 하자,
 “히데요리[秀頼]님 말고 우에사마는 따로 없을 터”
 라고 말하며 그 옷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잡힌 미츠나리를 내려다 보며 욕을 하였을 때,
 “무운 다하여 네 놈을 이러한 처지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구나”
 고 대답했다고 한다.

 10월 1일. 로구죠우 강변[六条河原]의 처형장에 끌려갈 때, 미츠나리는 너무도 목이  말라 경비하는 자에게 따스한 물을 달라고 하였다. 공교롭게도 당장 따스한 물을 구할 수 없어 경비무사는 대신으로 하라며 곶감을 주려고 하였다. 그러자 미츠나리는, 곶감이 가래병에 좋지 않다며 거절하였다. 경비무사는 지금 죽으러 가는 주제에 몸에 좋지 않다니 하면서 비웃었다. 미츠나리는 말했다.
 “큰 뜻을 품은 자는 목이 떨어지는 순간까지 목숨을 아껴 어떻게든 그 뜻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고.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1560년 오우미[近江] 사카타 군[坂田郡] 이시다 촌[石田村] 출생.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눈에 띄어 코우가[甲賀] 미나구치[水口] 성주가 되면서부터[각주:20] 출세하여 종오위하(従五位下) 지부노쇼우유우[治部少輔]가 되었고 오봉행(五奉行)의 한 명으로 선정된다. 1595년 오우미 사와야마[佐和山] 19만 4천석에 봉해졌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를 참모로 삼아 서군(西軍) 8만을 이끌고 싸우지만 패하여 사형당했다. 41세.

  1. 미츠나리의 둘째 아들 이시다 시게나리[石田 重成]가 히로사키 번[弘前藩]으로 도망간 뒤 시게나리의 아들 요시나리[吉成] 때부터 스기야마 씨[杉山氏]를 칭함. [본문으로]
  2. 위에 있는 초상화. [본문으로]
  3. 이 이야기는 에도 시대 작자미상의 일화 모음집 무장감장기(武将感状記)에 나오는 이야기이며, 미츠나리의 첫째 아들 시게이에[重家]가 기록한 것에 따르면 미츠나리는 18살 때 히데요시가 히메지[姫路]에서 츄우고쿠[中国] 방면을 담당했을 때부터 섬겼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사족으로 후세의 군기물 ‘이시다 군기[石田軍記]에는 히데요시가 미츠나리의 후장을 파려고 시동으로 들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5. 갈대는 지붕을 만드는데 쓰이거나, 물건을 가리는 발(簾)을 만드는데 쓰였기에 거의 필수품으로 여겨지던 것이라 한다. 이어지는 이야기로 미츠나리는 후에 이때 얻은 돈으로 화려한 무구를 몸에 걸치고 수백 기(騎)의 무사를 이끌고 와 히데요시를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 이야기는 에도 시대의 ‘고금무가성쇄기(古今武家盛衰記)’에 실린 글이라 한다. [본문으로]
  6. 미츠나리가 미나구치 성[水口城] 4만석일 때 2만석을 떼어 주었다고 하나, 미츠나리는 미나구치 성의 성주가 된 적이 없었으며, 시마 사콘은 미츠나리가 사와야마 성[佐和山城] 19만석의 영주일 때 얻었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본문으로]
  7. 나카무라 시키부쇼유유우 카즈우지[中村 式部少輔 一氏], 이코마 우타노카미 치카마사[生駒 雅楽頭 – 이 당시엔 마사카츠[政勝]라 하였음], 오노기 누이도노스케 시게카츠[小野木 縫殿助 重勝], 아마고 쿠나이쇼우유우 하루히사[尼子 宮内少輔 晴久], 이나바 효우고노스케[因幡 兵庫助], 츠게 사쿄우노스케[柘植 左京亮], 츠다 오오이노카미[津田 大炊頭], 후쿠시마 사에몬다이후 마사노리[福島 左衛門大夫 正則], 이시다 지부노쇼우유우 미츠나리[石田 治部少輔 三成], 오오타니 쿄우부우쇼우유우 요시츠구[大谷 刑部少輔 吉継], 후루타 효우부쇼우유우 시게츠네[古田 兵部少輔 重恒], 핫토리 우네메노카미[服部 采女正]. [본문으로]
  8. 주로 마에다 겐이[前田 玄以],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를 이름. [본문으로]
  9. 히데요시의 전쟁금지령[惣無事令]을 어긴 시마즈 가문[島津家]을 정벌하려 한 전쟁. 1587년 개전. [본문으로]
  10.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11. 1591년 1월의 오오사키-카사이의 난[大崎・葛西の乱]과 9월의 쿠노헤 마사자네의 난[九戸政実の乱]. [본문으로]
  12. 사실 미츠나리는 히데츠구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다.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에 미츠나리는 칸토우[関東] 사타케 령[佐竹領]의 검지(検知)하기 위해 출장간 상태였다. [본문으로]
  13. 일종의 토지조사. 정확한 수확량을 선출하여 세금과 부역할 양을 정하였다. [본문으로]
  14. 살생관백 히데츠구[秀次]도 이 칼을 노리고 있었기에, 모토카네는 어느 쪽을 주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기에 늦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15.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16. 일반적으로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를 말한다[関原始末記], [徳川実記]. 다만 그 인물 구성은 기록마다 틀려 '전국무장의 말년과 최후 - 토요토미 히데요시 편'에 잠깐 이름이 나온 이타자카 보쿠사이[板坂 卜斎]의 메모[板坂卜斎覚書]에는 이케다 테루마사가 빠지고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가 있으며, 미츠나리를 습격한 무장 일곱명에게 보낸 편지인 [윤3월5일자 이에야스의 편지(閏三月五日付家康書状)의 수신인은 이케다 테루마사, 카토우 요시아키가 빠지고 대신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 家正],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가 포함되어 있다. [본문으로]
  17. 실제로는 이런 적 없다. 오오사카[大坂]에서 공격받은 미츠나리는 사타케 요시노부[佐竹 義宣]나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도움으로 후시미 성[伏見城] 안에 있는 자신의 저택으로 피했고 여기서 농성했으며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와 연계하여 무공파 칠장 및 이에야스를 협격하려 하였다. 다만 동료였던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가 주저하는 사이 협격 모의는 실패하고, 이에야스와 화해를 하는 조건으로 책임을 지고 미츠나리는 봉행에서 물러나 은거를 하게 된다. [본문으로]
  18. 사실 이 사건은 미츠나리 하나만 노린 사건이 아니라, 봉행파 다수를 노린 사건이었으나 은거를 하며 봉행직에서 물러난 것은 미츠나리 한명 뿐이라, 후세에 미츠나리만 공격받은 양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9. 히데요시의 은혜를 입어 다이묘우가 된 무장들. [본문으로]
  20. 미츠나리가 미나구치 성주가 된 적은 없다. 시마 사콘[島 左近]을 등용할 때 미나구치 4만석 중 2만석을 떼어 주었다는 일화 때문에 퍼진 낭설로, 당시(1590) 미나구치의 성주는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 一氏]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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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8.19 15: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에도 시대를 거치며 음침하고 어두운 이미지의 미쓰나리 인간상이 부각되면서 악당의 이미지였습니다만, 요새는 가장 인기있는 인물 중 하나로 부각되더군요(전국무쌍, 전국바사라를 포함한 응용창작매체 포함). 역사는 돌고 도는 건가봅니다.

    개인적으론 어떤 일화보다도 요시쓰구와의 일화가 미쓰나리라는 인물을 제대로 나타내지 않는가 싶습니다. 소통하는 능력이 떨어졌던 인간성 좋은 사람 정도랄까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21 19: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히데요시가 에도시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인기가 있었기에, 그런 영웅 히데요시의 어두운 면을 대신 짊어질 사람이 필요했고, 그런 인간으로 적합했던 것이 신군(神君) 이에야스에게 끝까지 개긴 미츠나리. 뭐 미츠나리가 진정한 충신이라면 저 세상에서 히데요시의 방패막이가 된 자신을 자랑스러워 할지도 모르겠군요.

      사족으로....
      소슈 님은 제 블로그에 2000번째 리플을 다신 분이십니다. 축하드립니다. ^^

    •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8.22 15: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두번째 밀레니엄을 달성했다니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번째 영예도 제가 안았으면 좋겠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23 17: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앞으로도 오래오래 찾아주십시오. ^^

  2. 간스케 2011.08.23 19: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츠나리를 소인배로 보는 시각도 존재하는거 같더군요.
    물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진 않습니다만 예전에 그러한 글을 한번 접했을때 흥미로웠던 것은 사실인데...
    발해지랑님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들어보고 싶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27 12: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 그냥 미츠나리가 역사의 패배자이다 보니 이것저것 뒤집어 썼다는 느낌을 강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는데,

      "예전에 그러한 글을 한번 접했을때 흥미로웠던 것은 사실인데..."

      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혹시 그 글을 소개해 주셨음 감사드리겠습니다.

  3. ckyup 2011.08.24 00: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친구 머리가 그렇게 좋았다고 하던데.., 보통 우리나라의 경우 과거시험으로 잣대를 삼았는데 이당시 전국시대엔 어떤 특별한 제도나 시험이 있었나요? 우리가 흔히아는 이당시 특출난 사람들 간베에, 미츠나리, 마사노부 등등..., 전부 알려진 바로는 우연한 인연으로 등용되던데요.... 궁금하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27 12: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도나 그런 것은 없었고, 일반적으로 무사들이란 한 지역의 지배층이다 보니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의 행정적 소양은 갖추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능력을 가지고 평소에는 자신의 영지 혹은 맡겨진 영지의 행정을 담당(代官)하다가, 특별한 일(전쟁, 토목공사 등)이 생기면 상위의 무장(주군 혹은 요리오야[寄親])에게 담당관[奉行]에 임명되는 식이었습니다.(대충 간략하게는 이렇습니다)

      예를들어 쿠로다 칸베에의 경우 히메지[姫路]를 다스리는 작은 영주였다가, 그 위에 히데요시[秀吉]라는 인물이 오자 그 휘하에 속한 것입죠. 속한 상태에서 하리마[播磨] 지역에 있는 반노부나가 상태의 무사들을 회유 또는 동원령에 따라 히메지의 무사들을 이끌고 전장에 나서기는 했겠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히데요시의 참모 혹은 군사로 활약했는지는 미지수입니다.

      등용문제는 지배구조에 관한 문제라 간단히 쓰기가 어렵군요. (제가 가진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라 뭐라 잘 설명하기가 어렵군요. ^^;)

  4. 정동희 2011.08.31 14: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나우누리 신장동 시절에 닉네임으로 쓴 인물이었네요
    센코쿠의 중심인물 중 하나였고, 격이 좀 떨어지긴 했지만 이에야쓰와 대립한 큰 인물이었습니다
    위의 일화들을 보면 유능했지만 거만했다 라는 느낌인데
    사실 유능한 사람이 거만해지지 않기가 참 힘들죠
    그런 면에서 자신의 성질을 감추고 상대를 배려하는 능력이 많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31 20: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클에서는 사나다 유키무라를 쓰시더니.. 똥싸개 이에야스와 반대편에 서는 인물을 좋아하시나 보군요. ^^

      저는 이렇게도 생각합니다.
      유능한 미츠나리의 능력에 열폭한 사람들이 별걸 아닌 일에도 그의 행동을 거만하게 보고 그렇게 기록해 남겨놓았을지도 모른다고요.

    • 정동희 2011.09.01 16: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에야스... ㅋㅋ 희대의 두 영웅 밑에서 잘 굴러 먹었고 결국은 천하를 꿀꺽
      상황에 따라서는 마누라나 장남도 가차 없이 죽이고... 후흑술의 대가인데
      아무래도 정이 안가네요

    • 정동희 2011.09.01 16: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미츠나리 개인이 거만했고 아니고를 떠나서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는 위치였기 때문에 뭍 사람들의 질시를 받는 건 당연했다고 생각합니다
      미츠나리가 좀 더 사려가 깊었다면 어떻게든 그런 이미지를 불식시키도록 노력을 했어야 했겠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9.05 12: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것입니다만.... 질투 받는 것은 질투 하는 쪽의 인식이 변하기 전에는 받는 쪽이 아무리 노력해도 변함이 없는 것 같더군요.

  5. 정동희 2011.08.31 14: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미쓰나리의 거만함이나 독단이 이른바 무단파와의 갈등을 불러 결과적으로 토요토미를 멸망으로 몰아 넣은 원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구요
    토요토미 멸망의 가장 주요한 이유는 히데요시의 어처구니 없는 조일7년 전쟁의 휴유증 이라고
    개인적으로 단언합니다
    조일전쟁을 일으키지 않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정유재란만 일으키지 않았어도
    토요토미 정권이 그렇게 쉽게 망하진 않았을 겁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31 20: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토요토미 정권은 임란 후에도, 세키가하라 전쟁이 끝난 뒤에도 어느 정도 방귀는 뀔 수 있는 힘이 있었다고 하더군요(근래엔 이런 주장이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그런 토요토미 정권을 끝장낸 이에야스의 능력도 굉장히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 정동희 2011.09.01 16: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도시이에가 살았을 때 거병을 했다면,
      마시다 나가모리가 히데요시 직할지 재력만 미츠나리에게 지원 했다면
      뭐 그런 등 등 등의 설이 의미가 있겠습니까만은
      어쨌든 이에야쓰가 대단한 인물이라는 건 저도 동감입니다
      특히 여러 다이묘들한테 이러 저러한 도움 주고 편지 보내고 공작하고 하는 건 참
      정말 어지간히 오지랍 넓고 부지런한 노인네였어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9.05 12: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근래에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인지라 저도 깊숙히는 모릅니다만 세키가하라 이후에도 토요토미 정권의 힘은 이에야스의 칸토우 정권이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힘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러했기에 세키가하라 이후 15년이란 긴 시간을 들여 토요토미 정권의 힘을 깍으려 한 것 같습니다.

  6. Favicon of http://pray4abyss.egloos.com/ BlogIcon 로날드럭 2011.09.01 16: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은근히 말년 히데요시가 잘못한 일을 미쓰나리가 뒤집어 쓰는 면이 많은 것 같더라구요.
    근데 요즘은 미쓰나리가 이에야스는 물론이고 히데요시의 인기를 능가하고 있으니(....)

    눈팅은 오래 해왔는데 블로그에 글을 남기는 건 처음이네요.
    앞으로 자주 들리겠습니다(_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9.05 12: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말씀하신대로 요즘 서브컬처에서는 미츠나리의 인기가 히데요시를 뛰어넘은 듯 하더군요. 뭐 히데요시야 워낙 오래(2차 대전 이전부터) 빨아대서 진물이 빠졌던 것도 있는 듯 합니다만.

      앞으로도 자주 들려주시고 알려주실 일 있음 많이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

  7. ㅇㅇ 2015.07.03 07: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서군 총대장를 모우리 테루모토가 아닌 세키가하라에서 적극적으로 싸운 우키타 히데이에를 세웠다면 나은 결과가 나왔을 거 같네요.

    모우리 테루모토 정말 못난 놈, 일본판 유선(아두)이군요. 총대장이 오사카 성에 놀고 있다니...

    미츠나리 같은 편협한 놈이 총대장 대리역한다는 것 자체가 패배가 점쳐진거죠. 무공파의 이탈과 시마즈의 야습 진언 각하.
    원숭이 없으면 제 구실 못하는 놈.

  8. 마사무네 2017.03.14 15: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확히는 담에 좋지 않아서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자신이 반드시 이루어야하는 목표가 있고 그일을 반드시 이룰려고 하는자는 죽기 직전까지도 자신의 목숨을 아끼고 절대로 인생을 포기하지는 말아야 한다

 카니 사이조우[可児 才蔵]는 소위 전투의 프로페셔널로 센고쿠[戦国]의 세상을 유랑한 사나이이다. 7번 주군을 바꾸지 않으면 한 사람의 무장이라는 말할 수 없다 – 고 일컬어지는 센고쿠의 풍조가 바로 그의 인생이었다.

 미노[美濃]의 사이토우 타츠오키[斎藤 竜興]를 시작으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오다 노부타카[織田 信孝][각주:1], 하시바 히데츠구[羽柴 秀次][각주:2],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 주군을 바꾸가며 전전하였다. 이런 식이었기에 사이조우의 행동은 언제나 조직에서 벗어난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하시바 히데츠구[羽柴 秀次]를 섬기고 있을 즈음의 일이다.
 1584년
히데요시[秀吉]와 이에야스[家康]간에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가 일어나, 사이조우는 하시바 히데츠구의 선봉을 맡고 있었다.
 이 전투에서 선봉이었던 사이조우는 갑자기 최전선에서 철퇴를 하기 시작하여 히데츠구를 화나게 만들었다. 사이조우는,
 “오늘은 적이 대군이고 더구나 강력하기에 여기서는 일단 물러나야만 합니다. 무리하게 공격했다가는 대패로 이어질 겁니다.”
 하고 히데츠구를 설득하였지만 전투를 모르는 히데츠구는 펄펄 날뛰며 사이조우의 진언을 물리친 후 오로지 군사를 돌진시켰다. 사이조우도 또한 히데츠구의 무식과 무모함에 화가 나,
 “에이 좆병진!”
 라는 말을 내뱉고는 자신의 병사들을 이끌고 재빨리 철퇴했다고 한다.

 사이조우의 말대로 히데츠구는 참담한 패배를 당하여 히데츠구 자신도 겨우 목숨만 부지해서는 전장에서 도망치는 꼴이 되었다. 더구나 도망치던 도중 사이조우를 발견하고는 사이조우의 말을 빌려달라고 부탁하였지만, 사이조우는 단 한마디, “싫습니다.”라고 말하며 말에 채찍질하고는 도망가 버렸다.

 그 후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를 섬기고 있을 때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이 일어나, 사이조우는 ‘조릿대의 사이조우[笹の才蔵"]’라는 이명(異名)을 얻는 기발한 활약을 하게 된다.
 이야기는 여러 버전이 전해지는데 여기서는 그 중 하나를 소개하겠다.

 동서 양군의 결전이 시작되기 전날 미노[美濃] 세키가하라 근방 아카사카[赤坂]에 체진 중일 때의 일이다. 사이조우는 명령이 있을 때까지 돌격하지 말라는 말을 어기고 뛰쳐나가 서군의 용사 유하라 겐고로[湯原 源五郎]를 죽이고 와 후쿠시마 마사노리에게 질책을 받아 근신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그대로 얌전히 있을 사이조우가 아니었다.

 그 뒤 아카사카에 도착한 이에야스가 장수들을 소집하여 군의(軍議)를 연 뒤 후쿠시마 마사노리에게,
 “지금까지 취한 목들을 살펴 봅시다”
 라고 말하였기에 각 부대가 취한 서군 무사들의 목을 검사하게 되었다.
 사이조우가 가져 온 유하라의 목 차례가 되자 이에야스의 옆에 있던 마사노리는,
 “너는 이 단 하나의 목을 취하기 위해서 군령을 어긴 어리석은 놈이다”
 라고 사이조우를 질타하였다. 그러자 사이조우는 다음과 같이 변명을 하였다.
 “사실 근신중인 몸이기에 매일 슬며시 나가서 적과 싸웠고 그럴 때마다 투구를 쓴 목[兜首][각주:3]을 베었습니다. 그러나 근신 중이기에 그 목을 가지고 올 수가 없기에 그런 목들에는 콧구멍이나 귓구멍에 조릿대[笹]를 끼어 넣은 채 버리고 왔습니다. 그런 것들은 아마 젊은 무사들이 주워와 자신의 공적으로 하였을 거라 사료됩니다.”
 사이조우의 이런 말투에 마사노리는 열화와 같이 화를 내었지만, 어쨌든 사이조우의 말대로 조사해 보자 정말 조릿대가 꽂힌 목이 17개나 되었다고 한다. 이것에는 이에야스도 놀라,
 “오늘부터 ‘조릿대의 사이조우[笹の才蔵]’라는 이름을 쓰라”
 며 이명(異名)을 하사하여 이때부터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사이조우의 무예를 알려주는 일화로 장도[長太刀] 기술이 있다.
 젊었을 때부터 장도[長太刀]를 허리에 차고 다니며 즐겨 사용하였지만 늙자 체력적인 부담이 있었던 듯 이 장도[長太刀]를 종자(從者)에게 들게 하고 다녔는데, 어느 무사[각주:4]가 이것을 보고 놀리며,
 “이제는 칼도 들고 다니지 못할 정도로 늙으셨구랴. 그 정도라면 실력도 뻔하겠구먼”
 라고 말하자 사이조우는,
 “이거 참 부끄럽소. 하지만 실력이라면 그쪽이 보는 것만큼 늙진 않았소. 내 함 보여드리지”
 라며 재빨리 장도를 뽑아서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그 무사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사이조우는 젊었을 때부터 아타고 대권현[愛宕大権現][각주:5]을 믿었기에 항상 아타고의 신통력이 영효(靈效)로운 날[縁日]에 자신은 죽을 거라고 말하였는데, 그 말대로 1613년 음력 6월 24일[각주:6]에 몸을 깨끗이 하고, 갑주로 몸을 감싼 후 미첨도[薙刀]를 든 채 의자에 앉은 채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60세라고 한다.

가니 사이조[可児 才蔵]
미노[美濃] 혹은
오와리[尾張] 출신이라고 한다. 호우조우인 인에이[宝蔵院 胤栄]에게 창술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1. 노부나가[信長]의 셋째 아들. [본문으로]
  2. 살생관백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 [본문으로]
  3. 아시가루[足軽]나 무가봉공인(武家奉公人)은 머리 방어구로 주로 삿갓[陣笠]였지만, 무사 계급이 되면 투쿠[兜]를 썼기에 투구를 쓴 목은 더 높은 전공의 대상이 되었다. [본문으로]
  4. 카헤에[嘉兵衛]라는 후쿠시마 일족의 인물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5. 불의 신. [본문으로]
  6. 양력 8월 10일. 여담으로 블로그 주인장의 생일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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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yuphy IV 2011.04.09 23: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면 혁신에도 나오시는 분이군요. 어린 마음에 '17명밖에 못 베었는데 무력이 90대야..'라는 진삼국무쌍적인 사고로 보았는데 참 이런 일화가 있을줄이라고는...;;...

    여담이지만 생신이 저랑 가까우시군요ㅇㅇ.. 학생신분으론 8월 생일이니 좀 어정쩡한 면이 있더군요. 다 방학때라 이것 참..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4.10 01: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신장의 야망 시리즈에는 등장이 좀 늦은 편이었습죠.

      이 무장은 전략, 전술 레벨에서 노는 무장이 아니라 몸으로 부딪히는 곳에서 뛰는 무사더군요. 정말 1:1의 싸움에서라면 피하고 싶은 인물입니다.

      그래서 규피님의 생신을 기억하고 있습죠. ^^
      여담으로 저도 학생 때는 그게 참 아쉬웠어요. 학기 중이라면 선생에 따라서는 공책이나 연필을 받을 수 있었는데 방학 한 가운데다 보니..

  2. 효도롱 2012.04.26 06: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 일어 원문을 좀 보고싶은데 어디가서 찾을 수 있을까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4.26 09: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 『戦国武将100話』란 책은 1978년에 발간된 책으로 저도 일본에 있을 때 헌책방에서 구한지라, 국내에 이 책을 가진 다른 사람이 있을 거 같지는 않군요.

      혹시 어느 부분의 일본어 원문이 궁금하신가요?
      거기에 이 책은 일화 중심의 책이다 보니 사실적으로 다른 곳이 많은 책입니다. 굳이 일본어 원문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야마우치 카즈토요[山内 一豊]라고 하면 부인의 내조를 받은 에피소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카즈토요가 아직 이에몬[猪右衛門]이라는 이름으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던 하급무사였을 때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아즈치[安土]의 성 아래에 동국(東國)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말(馬)을 팔러 온 사람이 있었다. 오다 가문의 무사들은 누구나가 그 말을 보고 경탄하였지만 그런 만큼 비쌌기에 아무도 사질 못하였다. 카즈토요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기는커녕 자신과 부인 둘의 생활조차 근근한 처지였다.
 카즈토요는 한숨을 쉬면서 집에 돌아와서는,
 “가난하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로군. 저렇게 멋진 말이 있다면 노부나가님의 열병식 때 멋진 모습을 보여 드릴 수 있을텐데…”
 하고 혼잣말을 하였다.
 이를 곁에서 부인 치요[千代]가 듣고
있었다. 치요는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이내 그 말의 가격이 황금 10냥[각주:1]라는 것을 카즈토요에게 듣고서는,
 “그렇다면 이 돈으로 그 말을 사십시오”
 라고 말하며 화장대 밑에서 황금 10냥를 꺼내 카즈토요에게 주었다.
 카즈토요는 놀랐다. 지금껏 빈곤했는데 이런 큰 돈이 어디서 생긴 것이냐고 묻자 치요는,
 “이 돈은 제가 시집올 때 아버님에게 ‘평소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 너의 남편에게 아주 큰일이 생겼을 때만 사용하거라’하면서 주신 돈입니다. 열병식이라면 주군 노부나가님을 시작으로 많은 분들의 눈에 띌 좋은 기회겠지요. 어서 그 명마를 사시옵소서”
 라고 말하였다. 카즈토요는 매우 기뻐하며 곧바로 그 말을 사러 갔다.
 
얼마 후 쿄우토[京都]에서 열병식이 성대히 치러졌다. 그리고 카즈토요의 말은 당연히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노부나가도 경탄을 하여[각주:2], 이를 계기로 카즈토요는 출세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고 한다.[각주:3]

 이 에피소드는 에도시대[江戸時代] 중기에 기술된 몇몇 사료에 실려 있기에 시대성에서 본다면 ‘좋은 부인의 모범’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의 여성을 이러한 유교론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치요는 센고쿠의 여성이 보여주는 억척스러움과 강인한 정신을 겸비한 인물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덧붙여 치요의 내조에 대해서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카즈토요가 결혼하였을 때 카즈토요는
오우미[近江] 카라쿠니[唐国]에 400석[각주:4]영지를 얻었지만 빈곤하여 집에 도마조차 없어 치요는 되를 뒤집어 대신 사용하였다.[각주:5]
 또한 당시 카즈토요가
히데요시[秀吉]에게 배속되어 히데요시에게 축성의 감독을 명령 받았지만, 가난하여 인부들의 야식도 대접하지 못하자 치요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팔아 쌀을 사 와서 카즈토요의 면목을 세웠다고 한다.

 카즈토요는 히데요시의 휘하로 각지를 전전하였지만 특별한 전공을 세우지는 못했다. 그러나 용맹심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1573년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 토벌전 때 패주하는 아사쿠라의 군세를 추격하여 오다 군[織田軍]이 에치젠과 오우미[近江]의 국경에 있는 토네자카[刀根坂]에 이르렀다. 이때 아사쿠라 군의 후군[殿]에 미타자키 칸에몬[三段崎 勘右衛門]이라는 활을 잘 쏘는 무장이 있어, 오다 군은 그 활 때문에 쉽사리 진격을 못하고 있었다. 거기에 카즈토요가 창을 꼬나쥐고 단숨에 돌격하였다.
 진에몬은 자랑하는 활을 쏘았다. 화살은 정확히 카즈토요의 볼을 꿰뚫어 어금니까지 파고들었다. 그러나 카즈토요는 그대로 진에몬에게 달려들어 뒤엉켰고 아군의 도움으로 진에몬을 죽였다.

 어쨌든 카즈토요는 히데요시 아래서 순조롭게 출세하여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때의 공으로 카케가와 성[掛川城] 5만석의 성주로 봉해졌다. 카즈토요가 카케가와에 봉해진 것은 칸토우[関東]에 봉해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감시하며 만일의 경우가 있을 때는 이에야스를 방비하려는 히데요시의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카즈토요는 자신이 배속되어 있던 칸파쿠[関白] 히데츠구[秀次]가 난행을 이유로 할복을 명령 받은 다음부터는, 오히려 이에야스의 수완에 장래를 맡기려는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즉 카즈토요는 히데츠구 사건의 전말을 보고 히데요시 정권의 종말을 느끼게 된 것이다.

 1600년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토벌을 위한 이에야스의 군세 속에 카즈토요의 모습이 있었다.
 7월 24일
시모츠케[下野] 오야마[小山]에 이르렀을 때, 카즈토요에게 오오사카[大坂]에 있는 치요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다. 거기에는 오오사카 측의 봉행[奉行]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와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의 이름으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거병과 자기들 편에 참가를 요청하는 편지 한 통, 거기에 카즈토요에게 직접 보낸 편지에는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다해 주십시오, 제 몸은 걱정하지 마십시오’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카즈토요는 이 두 통의 들어간 상자의 봉인을 뜯지 않은 채 이에야스에게 제출하였다.
 사실 카즈토요는 이것과는 따로 또 한 통의 밀서를 치요에게서 받았던 것이다. 그것은 전령인 타나카 마고로쿠[田中 孫六]의 삿갓에 숨겨져 있던 것으로 치요의 의견이 담겨 있었다. 카즈토요는 다 읽은 뒤 곧바로 불살랐지만, 추측하건대 편지가 담긴 상자의 봉인을 풀지 말고 그대로 이에야스에게 제출을 권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곧바로 ‘오야마의 군의[小山の軍議]’가 열려, 이미 넘어가버린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한 마디[각주:6]로 ‘미츠나리 타도’가 결정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카즈토요는 중대한 발언을 하였다.
 “상경하는 군세를 위해서 도중에 있는 제 카케가와 성을 군량과 함께 전부 바치겠습니다. 거기에 인질도 바쳐 저에게 두 마음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하겠습니다”
 라는 것이었다.[각주:7] 
 토우카이도우[東海道]에 성을 가지고 있던 무장들도 전부 이에 따랐다고 한다.

 이로 인해 카즈토요의 공은 단번에 여러 무장들 중 눈에 띄게 되었다. 세키가하라 결전 때 카즈토요는 그다지 전공이 없었음[각주:8] 에도 이에야스는,
 “카즈토요가 오야마에서 한 말이 세키가하라 승리의 초석이 되었다”
 며, 영지배분 때 일약 토사[土佐] 전부인 24만석[각주:9][각주:10]을 주었던 것이다.

야마우치 가즈토요[山内一豊]
1545년 오와리[尾張] 출생. 1560년 미노[美濃] 마키무라 성[牧村城]의 성주 마키무라 마사토모[牧村 政倫], 이어서 오우미[近江] 세타 성[勢多城]의 성주인 야마오카 카게타카[山岡 景隆]를 섬겼다고 한다. 그 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히데요시[秀吉]에게 배속. 1584년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 종군하여 오우미 나가하마[長浜] 5000석에 봉해지고 1년 후 2만석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카케가와[掛川] 5만석에서 토사[土佐] 24만석이 주어졌다. 1605년 61세로 죽었다.

  1. 당시 보통 말은 1냥, 좋은 말은 5냥 정도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2. 노부나가가 경탄한 것은 말 때문이 아니다. 노부나가는 카즈토요가 치요가 건네 준 돈으로 말을 산 것을 듣고 말하길 “동국 제일(東国第一)이라는 말을 상인이, 천하에 오다 가문만이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이리도 먼 내 영지까지 끌고 와서 팔려 했는데도 아무도 사지 않았다면 안타까운 일이며 이는 노부나가의 부끄러움이기도 하다. 그러던 때 오랫동안 낭인이었다는 카즈토요가 가난했음에도 말을 샀다. 무사의 마음가짐은 이래야 함이다.”고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수상한 점이 많다. 당시 열병식이 열린 시기는 서력 1581년. 당시 카즈토요는 기록에 따라 다르다고는 하나 츄우고쿠[中国] 등에서의 활약으로 최대 2700석의 신분이었다. 당시 황금 10냥으로 대략 쌀을 140석 정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치요하고 카즈토요가 과소비하지 않는 한 살 수 있었단 이야기. 무엇보다 1581년 열병식 때 히데요시와 히데요시 휘하의 무장들 즉 카즈토요는 츄우고쿠[中国] 공략에 바빠 참가를 아예 못하였고, 노부나가 역시 참가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본문으로]
  4. 1573년 아사쿠라 침공전[朝倉攻め] 때 에치젠[越前]의 호걸 미타자키 칸에몬[三段崎 勘右衛門]을 부상 당하면서도 쓰러뜨린 공적으로. [본문으로]
  5. 링크는 당시의 것이 아니다. 링크의 것은 1806년 후지나미 신사[藤並神社]에 봉납된 모조품.실물은 2차대전 때의 공습에 불에 타 없어졌다고 한다. 크기는 종횡17cm * 17cm에 높이 8cm라고 한다. [본문으로]
  6. 대충 '나이 어린 히데요리가 이에야스 토벌을 명령 할리 없다. 이는 미츠나리가 사사로이 거병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7.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의 번안보[藩翰譜]에 따르면, 이에야스에게 성과 쌀을 바치는 것은 원래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의 아들이며 당시 하마마츠 성[浜松城]의 성주였던 호리오 타다우지[堀尾 忠氏]가 친했던 카즈토요에게 이야기했던 것을 카즈토요가 타다우지가 말하기 전에 말한 것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아이디어 도용이라 할 수 있다. 여담으로 도용 당한 타다우지는 카즈토요에게 “평소 성실한 당신과는 어울리지 않는군요”라면서 웃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당시 카즈토요의 부대는 난구우 산[南宮山]에 진을 친 모리 가문[毛利家]에 대한 대비책으로 전선 후방에 놓여 있었다. 결국 모우리 가문은 움직이지 않았고 그랬기에 카즈토요의 부대도 피 흘리지 않았다. [본문으로]
  9. 실제로는 9만 8000석. 나중엔 1605년 카즈토요가 제출한 영지 목록에 20만 2600석으로 이후 이것이 막부 공인이 됨. [본문으로]
  10. 24만석이 나온 숫자는, ‘쵸우소카베 영지조사장부[長宗我部地検帳]’에 토사[土佐]의 농작면적이 2만 4000정(町)으로 나와있는데 단순히 1반(反=1/10정(町))을 1석(石)으로 하여 24만석이 속설로 된 것으로, 1705년 번(藩)이나 다이묘우[大名], 하타모토[旗本] 등을 다룬 백과사전격인 '무감(武鑑)'부터 이렇게 나왔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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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3.21 18: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며칠 전 텐쇼대지진에 관해서 이도저도 아닌 글을 쓴 적이 있습지요.

    포커스는 우치가시마 가문에 맞추었지만 카즈토요도 만만치 않은 슬픔을 간직한 인물이라서 언제나 이 인물의 이름을 볼때마다 마음이 찡합니다.

    전혀 개연성없는 이야기지만 실용적인 카즈토요와 치요의 사고방식이 메이지를 이끈 도사번사들의 행동으로 나타난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나저나 야마노우치와 야마우치는 일본에서 모두 맞는 표현으로 사용되는 것이 맞습니까? '노'의 사용이 너무나도 말이 많아서 말이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3.21 19: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커헉...크롬은 역시 제 블로그와 상성이 안 맞는군요. 댓글 썼더니 이상한 글자나 나오고....--;

      사가미님의 블로그는 rss로 구독하고 있는데 1월달 이후로 없으시던데...딴 곳에 쓰신 것인가요??

      그쵸..단 하나 뿐인 딸이 죽었다고 하니...

      카즈토요가 쵸우소카베[長宗我部]의 토박이 가신들은 郷士, 외부에서 데리고 온 가신들을 上士로 나누어 에도시대 내내 차별했기에 그 불만이 쌓여서 도막(討幕)과 근황[勤皇] 사상으로 치달았다고 하더군요. 카즈토요도 화합의 정치(...어라 어느 나라에서 자주 듣는 이야기군요)를 하였다면 사카모토 료우마[坂本龍馬]라던가 타케이치 한페이타[武市半平太] 같은 이는 안 나왔을 지도 모릅죠.

      저도 그게 좀 그렇더군요.
      위키에는 '야마우치 카츠토요'라 되어 있더군요.

      에도시대 막부의 명으로 각 가문의 족보를 제출하게 해서 만든 寛政重修諸家譜에는 山内를 '야마우치'라고 쓰여 있다고 하네요.

      一豊도 여러 정황 증거로 보건데 '카츠토요'라고 합니다.

      다만 제가 가진 책들은 대부분이 '야마우치 카즈토요'로 되어 있으며, 공명의 갈림길 제작 시 NHK가 '一豊'를 야마우치 가문에 어떻게 불러야 하냐고 묻자, 널리 알려진 대로 해 주세요...라고 했다고 하니, 그냥 무난하게 '야마우치 카즈토요'로 괜찮지 않을까...하고 생각합니다.

    •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3.21 20: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곳에는 쓴다는걸 까먹었었군요. 졸작이지만 한번만 읽어주신다면 황공하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3.21 23: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잘 읽었습니다.

      사가미님처럼 직접 센고쿠 시대의 글을 쓰시는 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를 말하는데 있어 그의 부인인 호소카와 가라샤[細川 ガラシャ]를 빼놓을 수 없다.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셋째 딸로 이름은 타마[玉], 절세의 미녀였다. 타다오키는 이 가라샤에 관계된 일이라면 질투심이 특히 심했다고 한다.
 어느 날.
 정원사가 일을 하고 있을 때 우연히 지나가던 가라샤에게 계절이 어떠네 날씨가 어떠네하며 인사를 했다고 한다. 단지 그랬을 뿐이었는데도 타다오키는 이 정원사를 직접 칼을 뽑아 죽였다.

 부친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斎]에게 물려받은 재능으로 각종 예도[藝道]에도 뛰어났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아트 디자이너적인 재능이 풍부하였던 듯 자기 부인의 옷도 스스로 옷감을 고르고, 색이나 모양까지 디자인했다고 한다. 갑주(甲胄)나 갑옷에 걸쳐 입는 동의(胴衣), 큰칼[太刀]의 디자인 등도 직접 고안하였고, 다른 다이묘우[大名]에게서도 의뢰 받아 투구 등을 만들었다.
 어느 날 의뢰 받아 제작한 투구의 뿔을 진짜 물소의 뿔이 아닌 가벼운 오동나무로 만든 적이 있었다. 의뢰한 다이묘우가 완성품을 보고 이래서는 부러지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자, 타다오키는 “투구의 뿔이 부러질 정도로 활약하는 것이야말로 무사의 본분일 것이오”라고 화를 내며 말했다고 한다.

 질투 심한 격정(激情)인 성격이 플러스로 작용하여 전쟁터에서는 용감한 활약을 하였다.
 1577년 10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장남 노부타다[信忠]를 따라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의 속성 카타오카 성[片岡城]을 공격했을 때의 일이다. 15세에 선두에 서서 분전하여 수급을 베었지만, 이때 돌에 머리를 맞아 상처가 나 늙어서도 그 상처자국이 지워지질 않았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는 노부나가에게서 자필 표창장[感状][각주:1] 를 받았다.[각주:2]

 앞서 이야기한 것보다 전인 같은 해 3월의 사이가 정벌[雑賀征伐] 때는 자칫 목숨을 잃을 뻔했다. 혈기에 날뛰어 명성이 자자하던 사이가의 철포대에게 돌격하려 한 것이다. 적들이 총을 쏘고 난 간격에 맞추어 돌진하려다 부하가 막은 덕분에 탄환의 먹이가 되는 것을 피했다. 이때의 경험이 머리에 새겨졌는지 노년(老年)에 들어서도 자주 입에 담았다고 한다.

 

[호소카와 구요]

그런 용맹한 활약들이 노부나가를 흡족하게 하여 노부나가는 타다오키를 시동[小姓]으로 삼았다. 유명한 호소카와 가문[細川家]의 문장(家紋)이 구여(九曜)로 정해진 것도 이 즈음의 일이다.
 노부나가의 칼을 받들고 있던 타다오키가 그 칼의 칼자루에 새겨져 있던
구요의 장식에 반하여 곧바로 이를 자신이 입는 옷에 새겨 입자 이를 본 노부나가가 “멋진 문양이구나”고 칭찬한 것이 호소카와 가문의 문장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부친 유우사이[幽斎]까지 호소카와 가문의 문장은 오동나무[桐] 혹은 ‘원 안에 두 줄[二つ引両]'였지만 타다오키의 대가 되어 구요의 문장으로 바뀌었다.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아케치 미츠히데의 딸 타마(후의 가라샤)와 결혼한 것은 1578년의 일로 타다오키 16세였다.
 그러나 이 결혼이 1582년 호소카와 가문에 생각하지도 못했던 위기를 가져다 주게 된다. 이해의 6월 부인 가라샤의 부친 아케치 미츠히데가 혼노우 사[本能寺]에 머물던 주군 노부나가를 죽이고, 호소카와 부자에게 협력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그야말로 호소카와 가문은 운명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타다오키의 부친 유우사이는 노부나가를 죽인 미츠히데의 천하가 결코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여, 그때까지 친구였던 미츠히데의 권유를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아들인 타다오키와 함께 머리를 밀고 노부나가에 대한 조의를 표하였다[각주:3].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아케치 토벌전인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가 시작되자, 이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미츠히데의 영지인 탄바[丹波]에 침공, 성 2개를 공략하여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더구나 미츠히데의 딸인 가라샤를 탄고[丹後]의 미토노[味土野]의 산속에 유폐하여 미츠히데와 연을 끊었다는 것을 세상에 구체적으로 알린 것이다. 이렇게 노력한 것이 효과를 보아 호소카와 부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히데요시에게서 탄고 영유를 그대로 인정받는 서장을 얻었고 가라샤 부인의 유폐도 풀리게 되었다[각주:4].

 그 후 타다오키는 히데요시의 천하평정 전쟁에 참가하여 유우사이와 함께 히데요시 정권하에서 확고한 지위를 쌓아가지만 1595년에 큰 재난에 휩싸이게 된다. 관백(関白)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의 실각사건이 그것이다.
 히데츠구는 잔혹한 행동 때문에 할복을 명령 받고 그의 처첩, 가신들까지 살해당하거나 추방당하였는데, 그 중에 타다오키의 인척이 있었다. 타지마[但馬] 이즈시[出石]의 영주 마에노 나가야스[前野 長康]의 아들 나가시게[長重]의 부인이 타다오키의 장녀였던 것이다. 더구나 운 나쁘게도 타다오키는 히데츠구에게서 황금 100매를 빌리고 있었다. [각주:5] 그러한 일로 타다오키 역시 히데츠구의 일당이 아닌가 하는 혐의가 받게 된 것이다.

 타다오키는 곧바로 근신을 명령 받았다. 히데요시 측근의 말에 따르면, 오봉행(五奉行)[각주:6]의 의향은 타다오키를 할복시키려는 의향이라고 하였다.
 타다오키는 분노했다. 이는 평소부터 사이가 나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참언(讒言)에 의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호락호락 누명을 쓰고 죽을 바에는 미츠나리를 죽이고 후시미[伏見][각주:7]에 불을 질러 화려하게 끝을 장식하겠다”
 고까지 생각하였다. 아예 처자식을 죽이고 자신의 저택에 불을 지르려고 여러 준비를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러는 한편 열심히 변명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히데요시는 딸을 인질로 바칠 것, 히데츠구에게 빌린 황금 100매를 반납할 것을 조건으로 타다오키의 결백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너무도 갑작스런 일이라 타다츠구에게는 당장 황금 100매라는 거금이 없었다. 온갖 방법을 쓴 끝에 겨우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에게 빌려 반납할 수 있었다. 이때의 은의(恩義)로 인해 타다오키는 이에야스와 친교를 맺기 시작하여 히데요시가 죽은 뒤 혼란스런 정세 속에서 차츰 토쿠가와 측이라는 자세를 확실히 나타내게 된다.

 1598년 히데요시가 죽자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생전에 정한 법도를 계속해서 어겨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이시다 미츠나리 등 사대로(四大老), 오봉행(五奉行)들과 험악한 대립관계에 들어갔다.
 타다오키는 마에다 가문[前田家]과 인척관계였다. 적자 타다타카[忠隆]의 부인이 토시이에의 딸이었던 것이다. 타다오키는 이에야스에 대한 은의와 토시이에와의 인척관계 사이에 끼어 괴로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타다오키와 친한 토시이에의 장남 토시나가[利長]가 타다오키에게 놀랄만한 정보를 가져온 것이다.
 이시다 미츠나리의 이에야스 암살계획이었다. 타다오키는 기겁했다. 그것은 마에다 가문을 멸망에 이르게 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시나가를 설득하여 함께 토시이에를 만나 이에야스와의 화해를 권고하자, 토시이에는 오히려 바닥을 내려치고 격노하면서 이에야스의 약속위반을 하나하나씩 거론하였다. “이래서는 히데요리[秀頼]공에게 해가 될 뿐.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이에야스를 죽이고 말겠다!”고 외쳤다.
 타다오키는 필사적으로 설득하여 겨우 토시이에가 재고하게 만드는데 성공하였고, 토시이에는 타다오키에게 이에야스와 화해하는데 중개를 맡아달라고 하였다. 그 후 타다오키는 이에야스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이에야스도 깜짝 놀라며 ‘생명의 은인’이라고 말하며 감사했다고 한다.

 이러한 타다오키의 노력으로 인하여 양자는 화해하게 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토시이에가 죽자 타다오키를 포함한 무공파 장수들이 이시다 미츠나리 습격을 계획하여 미츠나리는 자신을 구해준 이에야스에게 은퇴 당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가 하면 이번엔 타다오키가 새빨간 누명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 마에다 토시나가와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가 공모하여 이에야스의 암살계획을 세웠고, 타다오키도 토시나가와 인척관계인 만큼 여기에 참가했다는 이야기였다.
 놀란 호소카와 가문에서는 곧바로 부친 유우사이와 타다오키가 다른 마음을 품지 않겠다는 맹약서를 이에야스에게 제출하였고, 이에야스의 요구대로 마에다 가문과의 인척관계를 끊고 에도[江戸]에 셋째 아들인 타다토시[忠利]를 인질로 보냈다[각주:8]. 즉 호소카와 가문은 이걸로 완전히 이에야스에게 복종을 맹세한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타다오키는 이에야스를 따라 아이즈 정벌[会津征伐][각주:9]에 참가하는데, 그가 출진한 사이 오오사카[大坂]의 저택에서 가라샤 부인이 자살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이시다 미츠나리 등은 거병하자 오오사카에 있던 동군(東軍) 무장들의 가족들을 인질로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잡아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가라샤 부인은 용감히 이를 거부하고 가노(家老)에게 자신을 찌르게 하여 마지막을 장식하고 화약에 불을 붙여 저택을 폭발시키게 만들었다. 기독교도였던 가라샤 부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했기에 그러한 수단을 취한 것이다.

 타다오키는 부친 유우사이에 뒤지지 않는 굴지의 다인(茶人)으로 또한 그런 방면의 서적을 많이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
1563년 나가오카 후지타카[長岡 藤孝=유우사이[幽斎]]의 아들로 태어났다. 통칭 요우이치로우[与一郎]. 호는 산사이[三斎]. 탄고[丹後] 미야즈[宮津] 성주. 임진왜란 때는 2년 동안 재진하였고, 진주성(晋州城) 공격에도 참가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부젠[豊前] 코쿠라[小倉]에 봉해졌다. 1632년 아들 타다토시[忠利] 때 히고[肥後] 55만석으로 전봉되었다. 센노리큐우[千 利休]에게 사사 받아 리큐우 칠철[利休七哲][각주:10]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1645년 12월 2일 죽었다. 83세.

  1. 현재 남아 있는 것 중에서는 노부나가의 거의 유일한 자필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특별한 일이었는지 전해준 호리 히데마사[堀 秀政]도 ‘이 표창장은 노부나가님이 직접 쓰신 거임’이라고 첨부한 편지에 쓸 정도였다. [본문으로]
  2. 표창장을 받은 이유는, 타다오키가 그의 동생 호소카와 오키모토[細川 興元]와 함께 카타오카 성을 가장 먼저 침입해 들어갔다[一番乗り]. [본문으로]
  3. 타다오키의 경우 노부나가에 심취해 있었던 듯, 죽을 때까지 매달(!) 노부나가의 제삿날을 잊지 않고 챙겼다 한다. [본문으로]
  4. 그러나 그녀는 이때 받은 타다오키에 대한 불신감으로 인하여, 기독교에 투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당시에는 이렇게 돈을 빌려주는 행위가 빌린 사람을 자기 부하로 만들거나 인식시키는 것이었다 한다. 히데요시의 동생 히데나가[秀長]도 다른 다이묘우들에게 돈을 마구 빌려주어 형인 히데요시를 화나게 한 적도 있다 한다. 즉 현대의 감각처럼 단지 돈을 빌려주고 빌렸다는 것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니다. 타다오키가 히데츠구와 주종관계를 맺었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본문으로]
  6.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마에다 겡이[前田 玄以],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를 지칭. [본문으로]
  7. 히데요시가 쥬라쿠다이[聚楽第]를 히데츠구에게 물려주고 은거해 있던 곳. [본문으로]
  8. 타다토시는 인질로 에도[江戸]에 가서 이에야스의 신임을 얻은 덕분에 후에 폐적된 첫째 형과 둘째 형을 제치고 타다오키의 세자가 된다. [본문으로]
  9. 불온한 움직임을 보여 상경하라고 명령을 내렸음에도, 불복하고 그렇게 꼬우면 현피뜨자는 편지까지 받자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정벌하려 감. [본문으로]
  10. 리큐우 휘하의 뛰어난 제자 일곱 명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후루타 시게테루[古田 重然], 시바야마 무네츠나[芝山 宗綱], 세타 마사타다[瀬田 正忠], 카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마키무라 토시사다[牧村 利貞]를 이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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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동희 2010.10.07 12: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국사에서 이래 저래 요리 조리 잘 빠져 나가서 성공한 인물 중 하나죠
    다다오끼는 전공도 많이 세우고, 큰 영지로 얻고, 오래 살기도 하고 재주도 많고
    암튼 여러가지로 다재 다능 했던 인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다다오끼의 성공은 대부분 그 아버지(후지타카)의 은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다다오끼야 말년에 뭐 지가 전국의 난세을 헤쳐 나온 불세출의 인물이라고 생각 했겠지만
    그래도 쇼군 업고 이찌노다니에서 빠져나와 노부나가를 의지하게 한 후지타카에 비할까 싶습니다
    이른바 양조택목(良鳥擇木)이 전국시대에서는 제 일의 덕목이라 생각하는데
    후지타카가 그걸 참 잘 했죠(그닥 비굴하지 않게)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0.07 12: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정동희님. ^^

      제가 가진 이미지도 비슷합니다.

      다만 세키가하라 즈음부터는 타다오키의 의견이 아비의 그것보다 더 중했던 듯 싶습니다.

      확실히 타다오키가 아비만 못한 듯 합니다만, 이런 무장의 일화를 소개하는 책들에 부자(父子) 이대가 한 꺼번에 실린 것을 보면 타다오키도 부친의 그늘에 가려지기만 할 정도는 아닌 듯 합니다.

      참 타다오키에 관해서 이 글도 함 보시길.

      http://blog.naver.com/nagoomo/140056207097

      타다오키의 성격을 잘 나타낸 것 같더군요.

  2. 정동희 2010.10.07 13: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소카와가 히데쓰꾸 실각에 얽혀서 그렇게 고생한 줄은 저도 처음 알았네요
    이에야스 암살 건은 이에야쓰가 충성 맹세 하라고 얽은 느낌이 드는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0.07 13: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 땐 그렇게 돈을 빌려 준 뒤 고리로 매달 이자를 받았다고 하더군요(예나 지금이나 돈으로 묶이면 아무래도 따를 수 밖에 없는지라). 히데츠구 실각에는 그런 고리대금에 관한 문제도 있었던 듯 합니다.

      아사노 나가마사와 토시나가, 타다츠구는 말씀하신대로 이에야스의 책략이었던 것 같습니다. 목표는 마에다 토시이에가 죽었다곤 해도 여전히 No.2였던 마에다 가문으로 흔들기 위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 정동희 2010.10.08 09: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사노나 마에다는 도요토미에 정말 큰 은혜를 입은
      가문인데요...
      그럼에도 그렇게 쉽게 이에야쓰에게 무릎을 꿇었으니
      솔직히 나머지 도요토미계 다이묘들이 이에야쓰에게 붙은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었나 싶네요
      결국 미쓰나리만 동분서주...
      요시쓰구는 친구 따라 저승 갔고
      모리, 우에스키는 나름 야심을 품다 망했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0.08 12: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래서 '대세'란 무서운 것 같습니다. 한번 휩쓸리면 다시 되돌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니까요.

  3. 정동희 2010.10.07 13: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다나베성 건은 저도 전에 읽어 봤는데요
    그걸 읽으면서도 역시 다다오끼는 좀 과격하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중에 뭐 조선 가서 고생도 하고 나름 집안의 우두머리가 되긴 했지만
    여러가지로 후지타카의 노련함에는 못 미치는 인물이 아닌가...
    그래도 뭐 결국 이에야쓰한테 고개 숙이고 잘 살았으니 성공한 인생이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0.07 13: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여담으로...

      헤우게모노[へうげもの]라는 후루타 오리베[古田 織部]가 주인공인 만화에서 타다오키는 후지타카의 1/10에도 못 미치는 인물로 그려지더군요. 뜬금없는 짓을 벌이다 아비에게 뒷목을 맞고 기절하여 끌려가는 역으로 나옵죠. ^^
      (참고로 후지타카는 그의 후손인 전 총리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 護煕]의 얼굴로 그려져 있습죠)

    • 정동희 2010.10.08 09: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호소카와 가문이 막말까지 아주 잘 살았죠
      사실 호소카와번은 무로마치 시대의 간레이 호소카와 하고는 상당히 먼~~~ 호소카와인데... 어쨌든 전국난세를 거쳐 명문 호소카와의 대표 주자가 됐으니 참...
      호소카와 총리가 기자 출신인데 특종을 그렇게 잘 잡았답니다 이유인 즉슨... 당시 경시총감인가 암튼 경찰 고위직이 호소카와 가문의 하급 무사 집안이었다네요
      (새 모이 주는 무사...)
      암튼 그래서 옛 주군가를 섬기는 마음으로 모리히로에게 특종을 많이 줬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0.08 12: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모리히로 총리의 기자시절 에피소드는 처음 듣는 이야기지만 재미있는 이야기군요. ^^

      요즘 한국에 그런 일이 있었음..
      '막부가 없어졌는데도 아직도 주종 운운하는 더러운 세상~'....했을지도.

  4. jane 2010.10.08 07: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타다오키 저 친구 그래도 전 그다지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저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 다재다능하고 성격도 불 같고 의외로 순정-_-파고...

  5. Gyuiphi IV 2010.10.08 11: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면 센덕후 열이 좀 식은 지금에 와서 다시 보자면 공과를 떠나서 이사람 성격 자체는 센고쿠에서나 먹힐만한 성격이지 지금 생각하면 막장에 다름아니다 싶긴 하더군요.

    뭐 교양인에 용맹했고 대세를 파악하는 눈도 뛰어났던건 재능이긴 합니다만 그 외의 부분에서(-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0.08 12: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뭐 시대가 다르다 보니.. ^^

      사족으로 시이나 타카시[椎名 高志]의 만화 "미스터 지팡구"에서 노부나가는 어느 상인을 베어 죽인 후 히데요시에게,
      "지금은 봉건시대고 나는 전제군주다. 틀렸음 '아~ 미안'하면 될 일이야"
      (정확하진 않지만 대충 이런 뜻이었을 듯)

      뭐 비슷한 일들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아랫사람을 죽이는 일들이. 지금과 비교하면 막장이지만 당시는 그것이 당연시 되던 시대였으니까요.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의 부하들은 수틀리면 칼 뽑아 칼질하는 나오마사[별명:人斬り兵部!!] 때문에 출사하기 전에 조상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설 정도였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니...비단 타다오키만 그랬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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