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키운 무장들[秀吉の子飼い] 중에서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와 함께 쌍벽으로 일컬어지는 무장이다. 둘 다 맹장(猛將)으로 유명한 것에 더해, 히데요시를 섬기게 된 방식과 토쿠가와 정권하에서 멸문하게 되는 운명 등 둘은 비슷한 경력을 걸었다. 단지 키요마사 쪽은 아들 타다히로[忠広] 때 삭탈관직 당하지만, 양쪽 다 토요토미 은고의 토자마 다이묘우[外様大名[각주:1]]였기에 막부(幕府)가 판 함정에 빠지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키요마사와 같은 오와리[尾張] 출신이다. 나이도 마사노리가 한 살 연상 혹은 동갑이라고 한다. 히데요시와는 아비 측의 연으로 어렸을 적부터 히데요시를 섬겼다고 한다. 마사노리가 나무통 직공의 아들로 부친이 히데요시의 아비와 아비 다른 형제라고 하지만 속설이기에 확증은 없다.

 어쨌든 그 즈음에 이치마츠[市松]라 불렸던 마사노리는 츄우고쿠[中国] 공략군의 사령관으로 하리마[播磨]의 히메지 성[姫路城]를 본거지로 하였던 히데요시를 섬기게 되었다.
 히데요시도 또한 모친 쪽 연으로 데려온 카토우 토라노스케[加藤 虎之助 = 키요마사]와 마찬가지로, 이 이치마츠를 자신의 팔다리로 만들기 위해 곁에 두고 가르쳤다. 마사노리는 히데요시의 기대대로 용맹한 무장의 재능을 보이게 된다.

 1578년 하리마 미키 성[三木城] 공략 때 18살의 나이로 데뷔하여 공적을 세웠고, 그 후에도 톳토리 성[鳥取城],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각주:2]]에서 공을 세워 명성을 높여갔으며, 1583년의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는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의 용장 하이고우 이에요시[拝郷 家嘉]를 쓰러뜨려 소위 ‘칠본창(七本槍[각주:3])’이라 용명을 얻는 수훈을 세워, 상으로 혼자서만 5000석을 하사 받아, 칠본창 중 다른 멤버들이 3000석이었던 것과 비교해 보면 그가 세운 공적이 다른 멤버들을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알 수 있다.

 그 후에도 마사노리는 히데요리를 따라 각지를 전전. 임진왜란 때도 조선에 출진했지만 1594년에는 귀국하여, 다음 해인 1595년 히데요시에게 칸파쿠[関白] 히데츠구[秀次]가 코우야 산[高野山]에서 할복을 명령 받았을 때 검시관에 임명되었다. 전쟁터의 마사노리는 용맹함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한편으로 인정이 깊은 성격이기도 했다. 특히 은혜를 입은 토요토미 가문에 대한 감정이 남달랐다. 히데요시의 애미 오오만도코로[大政所]가 병에 걸렸을 때는 잠도 자지 않고 간호했다고 하며, 히데츠구가 배를 갈랐을 때는 그 가엾은 운명에 눈물을 흘렸다고도 한다.

 그 후 마사노리는 히데츠구의 영지였던 오와리 키요스[清須] 24만석으로 가증(加增) 받았는데, 이때 마사노리는 어렸을 적에 자신을 귀여워 해주던 지모쿠 사[甚目寺]라는 절의 늙은 비구니를 찾아, 예전 은혜를 갖는다며 먹을 것을 계속 보냈다. 더구나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히로시마[広島]로 옮기게 되자, 새로 오와리의 영주가 되는 마츠다이라 타다요시[松平 忠吉[각주:4]]의 가로(家老)에게 자신을 대신해서 종래대로 늙은 비구니를 보살펴 달라고 부탁한 후 떠났다 한다.

 인정가(人情家)이기도 한 마사노리는 그런 만큼 격정가(激情家)이기도 했다.
 히로시마로 옮겼을 때의 이야기로, 어느 날 측근 중 하나에게 잘못한 것이 있어 이에 화가 난 마사노리는 이 측근을 굶겨 죽이고자 성 한 켠에 가두어 놓고 식사반입을 금지시켰다. 시간이 흘러 마사노리가 그 측근의 생사를 살펴보자 어찌된 일인지 이전과 변함이 없었다. 마사노리는 누가 먹을 것을 가져다 주었냐고 열화와 같이 화내며 규명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다도의 자리에서 시중드는 중[茶坊主]이, 자기가 그러했다며 그 측근은 예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었기에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측근이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억지로 먹였다고 하며, 측근을 대신해서 자기가 벌을 받겠다고 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마사노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라며 중은 물론 유폐했던 측근까지 죄를 용서하였다.

 이러한 마사노리의 격정은 토요토미 정권의 행정관[奉行]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문치파에 대한 격렬한 증오로도 나타나 세키가하라에서 동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600년. 마사노리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따라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토벌군에 종군하였는데, 이시다 미츠나리 거병 소식에 따라 열린 대책회의인 ‘오야마 군의[小山軍議]’가 열렸을 때의 일이다.
 이에야스는 이미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나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 등 유력 다이묘우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는 하였어도, 진중에 있던 다이묘우들 대부분은 토요토미 가문에게 은의를 느끼는 다이묘우였으며 게다가 오오사카[大坂]에 처자를 두고 있었다. 히데요리[秀頼]의 명령을 바탕으로 한 미츠나리의 거병이었기에 다이묘우들이 동요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이렇게 말했다.
 “미츠나리와 한편이 되더라도 결코 원망하지 않겠소. 즉각 오오사카니 돌아가시길.”
 자리에 있던 다이묘우들은 이것저것 재보고 눈치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벌떡 일어나더니,
 “미츠나리의 거병은 히데요리 공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하지만 불과 8살의 어린 주군께서 그러한 생각을 하실 리가 없소. 즉 미츠나리 놈의 잔꾀일터.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이 마사노리는 나이후[内府=이에야스]와 함께 할 생각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이 마사노리의 말에 힘을 얻었는지 다른 다이묘우들도 잇따라 이에야스에 협력하겠다고 나섰다. 죽은 히데요시의 은혜를 가장 많이 입고 또한 히데요시의 아들인 히데요리를 생각함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도 강한 마사노리가 이시다 미츠나리를 너무 증오한 나머지 이미 천하에 대한 야심을 품고 있던 이에야스의 앞길을 크게 넓혀준 것이다.

 세키가하라 결전에서도 마사노리는 최전선에서 전투의 시작을 알렸고 맹렬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였기에 승리한 동군에서 가장 큰 전공을 세운 무장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것을 마사노리는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는지 전투 직후 어느 사건을 너무도 강인하게 해결하고자 하여 마사노리의 앞날에 중대한 화근을 남기게 된다.

 세키가하라에서 승리를 거둔 후 마사노리는 쿄우토[京都] 치안을 담당하게 되었고, 그러던 중 연락할 일이 있어 사자(使者)인 사쿠마 카에몬[佐久間 加右衛門]를 쿄우토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히노오카[日ノ岡]의 검문소를 점거하여 왕래하던 사람들을 조사하고 있던 토쿠가와의 직속 신하[旗本] 이나 즈쇼노카미[伊奈 図書頭] 휘하의 부하들과 말싸움을 하다가 이나의 부하들에게 사쿠마는 몽둥이에 맞고 쫓겨나 버린 것이다. 사쿠마는 마사노리에게 돌아와 사정을 보고하고 난 뒤, 마사노리의 허락을 받고 배를 갈라 자결하였다. 마사노리는 이때,
 “반드시 이나 즈쇼의 목을 자네의 무덤으로 가져오겠네”
 라고 눈물을 흘리며 사쿠마의 자결을 허락했다고 한다.
 마사노리는 이에야스에게 사쿠마의 목을 보내고선, 이나 즈쇼의 목을 달라며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를 통해 이에야스에게 재촉하면서 토쿠가와 측의 어떠한 타협안도 거부하여 결국 이나 즈쇼의 배를 가르게 하였다.

 어쨌든 마사노리는 세키가하라에서의 전공으로 아키[安芸], 빙고[備後] 2개 지역 49만8천2백석이라는 큰 영지를 얻게 되지만 이 단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시세가 변한 것을 깨닫지 못하였고, 이에야스가 막부를 연 뒤에도 오오사카의 토요토미 가문에 충성을 맹세하여, 1608년에 히데요리가 천연두를 앓았을 때는 급거 히로시마에서 오오사카로 달려가 막부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간호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이 일어나지만, 마사노리는 겨울과 여름 양 전투에서 에도 성 잔류[留守居]를 명령 받았기에 전쟁터에는 나가지 않았다. 물론 토요토미 가문을 소중히 여기는 마사노리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막부의 처치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토요토미 측이 은밀히 마사노리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마사노리는,
 “이에야스는 야전이 특기로 공성전은 잘하지 못한다. 오오사카 성[大坂城]은 돌아가신 타이코우[太閤] 전하[각주:5]가 세우신 천하제일의 성이니 이를 굳게 지키면 낙성되는 일은 없을 것”
 이라고 사자(使者)에게 말했다고 한다. 또한 오오사카에 있는 후쿠시마 가문[福島家]의 비축미(備蓄米)도 맘대로 쓰라고 했다 한다. 직접 도움을 줄 수는 없지만 내심 히데요리[秀頼]를 위하고자 했던 것이다.

 오오사카 공성전으로 토요토미 가문은 멸망하여 토쿠가와 정권의 기반이 강고히 다져지자, 토요토미 가문과 끈이 강했던 다이묘우들에 대하여 매서운 숙청정책이 시작되었다.
 1617년 마사노리는 법도(法度)에 따라 홍수로 파손된 히로시마 성[広島城] 보수공사를 해도 되는지 막부에 요청하여, 노중(老中)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각주:6]]에게,
 “뭐 조금 정도 보수하는 것이라면 괜찮겠죠”
 라는 구두 언약을 믿고서 정식 서류를 제출하지 않은 채 보수공사를 시작하였지만, 결국 이것을 ‘모반의 징조’라는 생트집에 잡혀, 1619년 시나노[信濃] 카와나카지마[川中島] 4만5천석[각주:7]으로 감봉되었다.

 더구나 마사노리가 죽었을 때 막부의 검시관을 기다리지 않고 그 유체를 화장하였다는 이유로 후쿠시마 가문은 모든 영지를 몰수당하였다.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1561년 오와리[尾張] 키요스[清須]에서 태어났다.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5000석을 하사 받았으며, 1585년 이요[伊予] 이마바리[今治]에 10만석, 1595년 오와리 키요스 24만석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공적을 세워 히로시마 49만8천200석이 되었지만, 1619년 실각, 4만5천석으로 시나노[信濃] 카와나카지마[川中島]로 감봉. 1624년 죽었다. 64세.

  1.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이후 토쿠가와 가문의 부하가 된 다이묘우. [본문으로]
  2.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을 일으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죽인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와 히데요시가 싸운 전투. [본문으로]
  3. 1583 년 오우미[近江]에서 히데요시[秀吉]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4.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넷째 아들. [본문으로]
  5. 히데요시를 말한다. [본문으로]
  6.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의 아들. [본문으로]
  7. 이 중 에치고[越後] 우오누마 군[魚沼郡] 2만 5천석은 아들 타다카츠[忠勝]의 영지.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정동희 2009.12.28 10: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싸움에는 능했지만 정치에는 서툴렀다고 해야 할까요
    인생 후반기에 너구리 영감에게 철저히 이용만 당하고...
    사기꾼한테 사기 당하면서도 난 사기당한게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순진남이랄까

  2.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09.12.28 10: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센고쿠 시대에 어울리는 인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바보처럼 인정에 휘둘리는가 하면 때때로는 어느 쪽이 득실이 있는가를 파악하는 능력도 뛰어났으니까요.(아무리 미쓰나리가 미워도 서군이 압승을 거둘 상황이었으면 서군으로 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마사노리의 성품상 동군에 잔류해서 자폭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도요토미 가문이 불꽃처럼 번졌다가 사라진 것처럼 키워낸 이들도 불꽃처럼 사라지는 걸 보면 역사란 재미있습니다.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사람들이 빚어내는 이야기라서 그런 것이겠지요.

    P.S : 加藤 嘉明는 가토 요시아키가 맞는 건가요, 요시아키라가 맞는 건가요? 요새는 아사이가 '아자이'로 바뀌었다가 다시 어느 학자가 아사이가 맞다고 하기도 하고. 아직도 논란인 山內가 야마우치/야마노우치가 맞는가 논쟁도 있고. 사람들이 만드는 일은 정말 알 수 없습니다 (..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8 14: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땠을까요... 이시다에게 과연 넘어왔을지...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 것 같아서, 이 인간은 좀 조심스럽군요.

      두번 째 문단은 좋은 말씀이십니다.

      ps;저도 보는 책마다 달라 헷갈리더군요. 일단은 양 쪽 다 괜찮지 않을까요? ^^; 일본 사람들 이름 읽는 것은 정말 힘듭니다.

    • 정동희 2009.12.28 15: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쎄 뭐...
      전에 일본사 강의 들을 때,
      왜 겐페이 시대에는 성뒤에 노를 붙였습니까
      (ex : 후지와라노, 다이라노, 미나모토노 )
      라고 교수한테 물어 보니
      당시에는 개인의 이름보다 어느 집안 출신이냐를 중시해서
      그렇게 불렀다(뭐 그 이후에는 안그랬나 마는...)
      좀 캐 물으니 정확한 사유는 안나오더군요 딱히 언제부터 그랬다 라는 것도 없고

      또 일본 사람들은 대충 한자나 가나로 이름 적고 자기가 부르고 싶은대로 부른다네요 어느정도 규칙은 있지만 그게 꼭 그렇지는 않는다는...

      아사이나 아자이, 야마우치나 야마노우치
      뭐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너무 지엽적인거 가지고 이게 맞다 저게 맞다
      굳이 따질 필요가 있나 싶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8 21: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동희님께//
      조금 이야기가 샙니다만 순서상 ^^

      후지와라 -> 우에스기[上杉], 사토우[佐藤]
      타이라 -> 호우죠우[北条], 치바[千葉], 오다[織田]??
      미나모토 -> 아시카가[足利], 닛타[新田]...
      로 나뉘어 지듯이, 후지와라, 타이라, 미나모토를 저는 우리나라의 김씨, 이씨, 박씨... 등등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거기에 가령 저같은 경우 함창 김씨 이니, 일본식으로 이름을 쓴다면 '함창 태진'....이 되지 않을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

      후지와라나 겐지, 헤이시가 각각 안 쓰이게 되는 상황 등을 살펴 보면 나올 것도 같습니다(헤이시가 太政大臣을 한 다음 멸문한 다음 '타이라'라고 칭하지 않았다거나, 겐지가 将軍을 한 뒤 '미나모토'를 직접 칭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식으로 뭔가 법칙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야~ 법칙은 있습니다.(가령 지금도 이름으로 쓸 수 없는 한자가 있다고 하네요)

      그리고 그 사람이 원하는 식으로 불러 주는 것이 올바르다 생각합니다.
      가령 야마우치 카즈토요[山内 一豊]는 당시에 서로간의 편지나 족보 등에 '야마우치 카츠토요'라고 되어 있다고 하니, 그렇게 불러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면서도 저는 입에 배었는지 '야마노우치 카즈토요'라고 하지만요)

  3. Gyuphi IV 2009.12.28 22: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뭔가 이 사람은.. 뭐 결과론적인 말입니다만 중요한 순간의 어리석은 선택의 반복으로 인생 쫑낸 것 같이 느껴지더군요. 명줄이라도 카토 키요마사처럼 짧았어도 이렇게나 당대에 망가지진 않았을것을.. 역시 바보라서 별 걱정도 생각도 없어서 오래 산건가 싶기도 싶기도 하고 말이죠-_-;;

    그런데 정말이지 오사카성 말입니다만.. 뭐 지금의 공구리 보수 이전의 규모는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만, 후쿠시마 마사노리 말 마따나 오사카측이 선택에 전연 미스 없이, 굳게 지키고 있었다면 낙성당하지 않았으려나요, 해자를 메운다는게 정말이지 일반적인 상상 이상의 도쿠가와가에게 전술적 이득을 안겨준 행위였던가, 싶네요. (라곤 해도 나고야성 가보면 그 해자도 참 깊다 생각드는데 당시 규모의 오사카성이었다면..)

    후세인이란 그러고보니 참 편한듯 합니다. 이정도 세월이 지나면 그 당대의 고민따윈 크게 의식않고 막 말해도 잡아가는 사람도 없으니까요(아, 이건 참 역사에 흥미있는 사람들의 특권@.@)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30 00: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한 곳을 정하면 무작정 그 방향으로만 냅다 뛰는 성격이 아닐지... 왠지 저에겐 그렇게 느껴지더군요.

      전쟁과 성 쪽은 제가 좀 딸리는 편이라 말하기 뭐합니다만, 토쿠가와 쪽의 오오사카 성이 이시가키[石垣]가 더 높고 텐슈[天守]도 크고 높으며, 성 면적 자체도 조금 더 커졌더군요. 그렇게 만든 놈이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라고 하던데, 직접 오오사카 공성전에 참가한 놈이었던 만큼, 뭔가 허술한 점을 찾았기에 히데요시와는 다른 형태의 성을 만들었다고도 생각합니다.(뭐 대포가 쓰인 것도 있었고 말입니다)

      그쵸. 당시에 그 사람 앞에서 대놓고 이야기 했다간 斬り捨て御免이었을테니까요. ^^;

  4. 맹꽁이서당 2010.01.01 20: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두번째 분 (상?장안) 님의 두번째 문단에 공감이 가네요.
    (근데 도요토미 덕택에 출세한 인물 들 중에서도, 도요토미 본가나 가토, 후쿠시마 와는 달리 에도 막부 시대에도 건재했던 가문도 있을 법한데... 잘 기억이 나지 않네요)

    하여튼 올 한해도 좋은 글 잘 읽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1.02 00: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사가미 나가야스[相模 長安]'라고 호칭하고 있습니다만.. 그러고 보니 어떻게 읽어야 하나요? 사가미님 ^^

      호소카와 가문[細川家]가 우선 떠오르는군요. 토요토미 덕택에 출세한 가문으로. 뭐 마에다 가문[前田家]도 100만석 이상 얻어 떵떵거리며 살았고, 아사노 가문[浅野家]이라던가, 하치스카 가문[蜂須賀家], 야마우치 가문[山内家]도 그 범주에 포함될 듯.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저 역시 올 한 해 잘 부탁드립니다. ^^

    •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0.01.08 08: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가미 나가야스로 읽는 것이 맞습니다.
      저같은 소인에게 관심을 가져주시니 감사할 따름. (헤헤)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