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는 이름을 후지타카(藤孝)라고 한다. 센고쿠 무장 중에서는 최고의 지식인이라고 단정지어도 좋다. 고전(古典)을 산죠우니시 사네에다(三西 枝)와 쿠죠우 타네미치(九 種道)에게 배워 고금전수(古今授), 중세 시학(歌) 등을 집대성하였다.

 태어나 자란 환경이 좋았다. 모친은 역사상 굴지의 석학 키요하라 노부카타(原 宣賢)의 딸로, 표면적인 부친으로는 미츠부치 하루카즈(三淵 晴員)로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12대 쇼우군(軍)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 義晴)라고 한다. 쇼우군이 코노에 히사미치(近衛 尚通)의 딸과 결혼하게 되었기에 이미 요시하루의 애를 배고 있던 모친은 미츠부치 가문에 하사된 것이다.

 후지타카는 미츠부치 가문(三淵家)에서 태어났지만 호소카와 가문(細川家)의 양자가 된다[각주:1]. 자란 것은 모친의 친정 키요하라 가문으로 거기서 후년의 와카(和歌), 문학적 소양 등을 기초를 길렀을 터인데 달리 이런 이야기도 전해진다.

 후지타카가 시에 눈을 뜬 것은 어느 전투에서 함께 있던 무사가 옛 시(古歌)를 읊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적을 쫓다가 도중에 놓쳐서 포기하고 돌아오려고 할 때에 이 무사가,

당신은 아직 멀리 안 갔을 거요 내 옷깃에,
눈물도 아직 식지 않았으니
君はまだ遠くは行かじ我袖の、
も未だ冷かならねば
라는 옛 시를 읊으며 적이 타다 버린 말을 조사한 것이다. 안장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다. 이 무사는 적이 아직 멀리 도망치지 못한 증거라고 후지타카에게 가르쳐주었다. 그 말을 듣고 더 추격해서 적병의 모습을 발견하여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후지타카는 시에 뜻을 두었고 후에 결국 달인의 영역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후지타카가 처음으로 섬긴 주군은 13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후지(足利 義藤[각주:2]=후에 요시테루(義輝)이다. 13살 때였다. 아시카가 바쿠후의 쇠망기로 1554년에는 쇼우군 요시테루 자신이 미요시 쵸우케이(三好 長慶)에게 쫓겨나 오우미(近江) 쿠츠키(朽木)로 도망쳤다. 이때 후지타카도 그를 따르며 쓴맛을 맛보았다. 이 쿠츠키 계곡(朽木谷)에서 후지타카는 책을 읽기 위한 등불을 밝힐 기름이 없어 가까운 신사(神社)의 등불에서 기름을 훔쳤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568년 이 요시테루가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와 미요시 일당에게 살해당했을 때는 영지(領地)인 야마시로(山城) 쇼우류우지 성(勝寺城)에 있었기에 난을 피할 수 있었다. 이 때가 32살이었다. 이때부터 고난의 유랑생활이 시작되었다. 요시테루의 동생으로 나라(奈良) 코우후쿠(興福)사(寺) 이치죠우(一)원(院)의 몬제키(門跡)였던 카구케이(慶=후에 요시아키(義昭))를 옹립하여 쇼우군의 자리에 앉히기 위한 후원자를 찾기 위해 여러 다이묘우(大名) 사이를 돌아다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만나 요시아키를 15대 쇼우군 자리에 앉히는 것에 성공한다. 이때 후지타카는 노부나가에게 야마시로 나가오카(長岡)를 하사 받아 성(姓)을 '나가오카'로 바꾸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후지타카는 쇼우군 요시아키에게 불신감을 품기 시작한다. 노부나가의 괴뢰에 지나지 않는 쇼우군 자리가 불만인 요시아키는 은밀히 반오다(反織田) 세력과 손을 잡았고 결국에는 모반까지 계획하게 된 것이다. 이 시점에서 후지타카의 날카로운 정치적 감이 빛난다. '요시아키는 망하고 천하는 노부나가의 것이 된다' - 후지타카는 그리 확신하여 요시아키가 모반을 꾀한다는 사실을 예전 함께 요시아키를 섬겼고 지금은 양다리로 노부나가까지 모시고 있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에게 전하여 노부나가 측에 선다는 것을 명확히 하였다.

 1582년 혼노우(本能)사(寺)의 변이 일어났을 때도 이 정치적 감이 빛을 발한다.
 그는 아케치 미츠히데가 노부나가를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미츠히데의 능력으로는 천하를 유지시킬 수 없을 거라 판단하였다. 이 때문에 평생의 친구인 미츠히데의 요청을 거부한다. 이때 미츠히데의 딸 타마(たま=가라샤(ガラシャ))를 부인으로 둔 아들 타다오키(忠興)에게,
 "나는 노부나가의 은혜를 입어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은 머리를 밀고 노부나가의 명복을 빌고자 한다. 그러나 너는 미츠히데와 사위-장인이라는 사이. 아케치에게 가는 것도 안 가는 것도 너의 마음대로 하여라"
 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결국 타다오키도 부친과 마찬가지로 머리를 밀고 노부나가에 대한 조의를 표해 미츠히데의 요청을 물리쳤다.

 머리를 민 후지타카는 가독을 타다오키에게 물려주고 자신 본래의 문화인적인 특질을 발휘하게 된다. 유우사이(幽)라는 호는 이 시점에서의 것이다. 히데요시의 시마즈(島津) 정벌에 종군하였을 때 유우사이는 항복한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를 위해 따스한 온정을 베풀었다.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바쳐진 요시히사의 딸 카메쥬(亀寿)를 유우사이가 노력하여 가족들에게 돌려보낸 것이다. 유우사이와 요시히사가 귀여운 딸에 관한 시를 지어 서로 받고 보낸다는 소식을 들은 히데요시가 그 모습에 감동하여 카메쥬를 인질인 신분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히데요시의 황금시대. 고전파 지식인으로서 유우사이는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1588년 4월. 히데요시는 새로 지은 쥬라쿠테이(聚
第)에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의 행행(行幸)을 기획하였는데 이는 전년도의 키타노 대다회(北野大茶)와 마찬가지로 토요토미 정권의 여러 다이묘우들에 대한 거대 정치 이벤트였다. 유우사이는 이때 와카(和歌)의 자리에서 조정의 예법에 맞추어 예식을 거행하고 대표로서 와카 몇 수를 헌상하는 등 고전의 교양 없이는 불가능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이런 행사를 화려하게 장식하려는 경향이 있었지만 유우사이 자신은 그런 화려함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평소 그는 어디까지나 옛 전통에 따라 의상 같은 것도 검은색 일색이었다고 한다.

 유우사이의 고전에 대한 조예는 전쟁에서도 그 가치를 발휘한다.
 천하가 둘로 나뉜 세키가하라(
ヶ原) 때의 일이다. 아들인 타다오키는 이에야스를 따라 칸토우(東)로 내려가 있었기에 아들을 대신해서 탄고(丹後) 타나베 성(田城)에서 농성전을 치르게 된다. 후쿠치야마(福知山)성주 오노기 누이노스케(小野木 縫殿助)를 시작으로 한 1만5천여의 서군이 포위한 타나베 성에는 불과 500여의 수비병밖에 없어 낙성은 시간문제라 여겨졌다. 유우사이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이때 조정에서 유우사이가 죽게 됨으로써 옛 것들이 끊기는 것을 안타까워해 유우사이에게 개성을 권한 것이다. 하지만 유우사이는 이를 정중히 거절. 다만 고금전수의 기록들이 재로 변하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기에 이들 전부를 텐노우(天皇)의 동생 하치죠우노미야 토모히토(八宮 智仁)에게 보내고자 하였다. 조정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텐노우의 칙령으로 서군에게 타나베 성의 포위를 풀게 하였고 대신 유우사이는 탄바(丹波) 카메야마 성(山城)으로 옮기게 만들었다.

 말년의 유우사이는 쿄우토 닌나(仁和)사() 주변에서 조용히 살았다고 한다.

[호소카와 유사이(細川 幽斎)]
1534년생. 호소카와 모토츠네(細川 元常)의 양자가 된다. 효우부다이후(兵部大輔)에 서임받았다. 처음엔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에 속해있었지만 1573년 오다 노부나가로 말을 갈아타 1580년 탄고(丹後)를 하사 받았다. 혼노우(本能)사(寺)의 변 후에 가문을 타다오키(忠興)에게 물려주었고 1589년 타다오키의 영지(領地)와는 별도로 미야즈 성(宮津城) 4만석을 받는다. 1610년 8월 20일 77살로 죽었다.

  1. 유우사이의 부친 미츠부치 하루카즈는 호소카와 가문의 서류 이즈미 슈고가문(和泉守護家) 출신으로, 하루카즈의 모친의 친정인 미츠부치 가문에 아들이 끊겼기에 양자로 들어갔으며, 유우사이는 다시 후계자가 없던 큰아버지 호소카와 모토츠네(細川 元常)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본문으로]
  2.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 '藤'孝)의 '후지'는 이 요시테루의 전 이름의 글자를 하사받은 것(一字拝領)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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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2.04 13: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코킨텐슈 그러니 처음 산죠니시 사네에다를 봤을때, 에? 산죠 니시사네에다 아닌가?..로 착각했던 추억이 떠오르는군요; 산죠니시라는 성이 따로 있을줄이야(;)

    닌나지는 쿄토에 갔을때 스쳐 지나갔었습니다만.. 하긴, 쿄토의 버스 정류소는 죄다 절이름 투성이니(;) 뒤집어 생각하면 그만큼 역사적으로 공부할만한 사적이 많다는 증거이겠죠. (이름 있는 유적만 가더라도 이틀씩이나 걸리는 쿄토니;) 개인적으로는 아쉽습니다만 뭐 나고야가 싸니; 음, 아시가루는 싼맛에 쓰는 것 처럼 역시 싼게 좋은게죠(머엉;)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27 20: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 성 읽기 어렵죠... 위키는 그런 면에서 정말 좋습니다.

      일본 개그맨 하나와의 "SAGA"라는 노래를 보면 사가현(佐賀県) 지역은 버스정류장이 "**씨 집 앞"...이라고 하더군요...^^

      천하인을 둘이나 배출한 지역!!!
      어디든 근성만 있으면 됩니다. 멋진 근성 발휘를 기대하겠습니다.

  2. 朴先生 2009.04.13 19: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건덕후는 아니지만 왠지... 古今傳授어택을 시전하는 호소카와 유우사이의 모습이
    G건담의 도몬이 샤이닝 핑거를 쓸 때의 모습과 오버랩되는군요

    "나의 고전이 빛나며 울부짓는다! 포위를 풀라고 찬란하게 외친다! 必殺!! 고오그으으음저어언수우우우어태에에엑!!!"

    결론은... 아무튼 이래서 인문학이 완전히 쓸모없진 않나보다라는 겁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4.08 11: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야~ 건담G무투전을 아시면 훌륭한 건덕후십니다.
      (저는 아무로 팬이라 아무로 나오는 건담만 보고 그 이후는 아예 무시하는 편입죠)

      예전에 소문으론 저 성우가 용산인지에 나타나 저 대사를 외치자 덕후들이 따라 외쳤다는 전설이 있던데...

      유우사이야 잘 하니까 그랬겠죠... 어중간 했으면 그냥 戰死!...였지 않을까요.

 눈치보기의 대명사 '호라가토우게 고개[洞ヶ峠]'라는 에피소드[각주:1]로 유명한 쥰케이[順慶]는 원래 불문(佛門) 출신이다. 유식론(唯識論 – 법상종(法相宗)의 중요한 경전))에 정통하고 와카[和歌]나 다도(茶道)에도 능한 문화인이었다.

 언제나 성성이의 가죽을 테두리로 한 두건을 쓰고, 금으로 수를 놓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부적주머니를 비스듬히 어깨에 걸치고 전쟁터로 향했다고 한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야마토[大和] 코우후쿠 사[興福寺]의 승병대장을 맡아온 호족이었다. 야마토에는 츠츠이 가문 외에도 오치[越智], 토이치[十市], 와카오[若尾] 등의 승병대장이 있어 츠츠이를 포함하여 '사인방(四人衆)'이라 일컬어졌는데 츠츠이의 세력이 가장 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비호아래 야마토[大和]를 지배하게 된다.

 '호라가토우게 고개'라는 에피소드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오다 노부나가를 쓰러뜨린 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 야마자키[山崎]에서 싸웠을 때 생긴 말이다. 일반적으로 유포된 이야기에는 이때 츠츠이 쥰케이가 호라가토우게 고개에 올라가 아케치와 하시바의 싸움을 방관하다가 하시바 측이 명백히 유리해진 것을 확인하고 난 뒤 그제서야 아케치를 공격했다는 내용이다. 진상은 이것과 꽤나 다르다. 호라가토우게 고개에 오른 것은 아케치 미츠히데 쪽이었던 것이다.

 아케치 미츠히데가 노부나가에게 모반을 일으킨 것은 1582년 6월 2일이었다.
 노부나가에게 히데요시의
츄우고쿠[中
国] 공략에 원군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은 직후의 거병이었다. 이 당시 쥰케이는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등과 함께 미츠히데 휘하 다이묘우[大名]로 츄우고쿠로 출진하기 위해 거성(居城) 야마토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에서 출진하여 쿄우토[京都]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 도중 혼노우사의 변보를 접한 것이다.

 쥰케이의 입장은 미묘했다. 단순한 아케치 휘하 다이묘우가 아니었다. 친족관계였던 것이다. 미츠히데의 넷째 아들은 쥰케이의 양자로 들어와 있었다[각주:2]. 거기에 미츠히데는 츠츠이 가문[筒井家]의 은인이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에게 빼앗겼던 야마토의 츠츠이 가문 영지(領地)를, 노부나가가 마츠나가를 정벌한 후에 미츠히데가 잘 말해주어서 영지(領地)를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각주:3]

 그런 것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고 있던 쥰케이는 당초 미츠히데가 모반을 일으키자 미츠히데 측에 붙어있었다. 오다 노부타카[織田 信孝 – 노부나가의 셋째]의 출병요청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고, 야마시로[山城] 마키노시마[槇島] 성주 이도 요시히로[井戸 良弘][각주:4]와 함께 병사의 일부를 떼내어 아케치의 오우미[近江] 평정에 참가시켰다. 그러나 쥰케이 자신은 코오리야마 성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이 시점부터 쥰케이의 행동은 미묘하게 변해간다. 미츠히데의 요청을 받고 카와치[河内]에 출진할 예정이었던 것을 취소시키고 더구나 성 안에 식량을 쌓기 시작한 것이다.
'히데요시가 미츠히데를 벌하기 위해서 산요우
[山陽]를 맹렬히 올라오고 있다 – '
 쥰케이에게는 이미 이 정보가 들어간 듯 했다.

 6월 10일.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상경한 히데요시의 군세는 이제 쿄우토의 코앞이라고 할 수 있는 효우고
[兵庫][각주:5]까지 와 있었다. 미츠히데는 이 너무도 빠른 움직임에 앙천했다. 이제 인기가 떨어진 아케치 세력은 1만 수천밖에 없었다. 쥰케이의 가세가 절실했다.

 미츠히데는 쿄우토를 나와 야마자키 하치만[山崎八幡]에 있는 구릉의 일각인 호라가토우게 고개에 진을 쳤다. 이 고개는 눈 아래로 쿄우토-오오사카[大坂] 간의 평야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요충지였다. 야마토 코오리야마까지는 약 20여km. 미츠히데는 "가세하지 않으면 코오리야마를 공격하겠다"고까지 말하여 쥰케이에게 엄포를 놓았지만 쥰케이는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다.
 미츠히데는 계속 기다렸지만 이때 쥰케이는 이미 히데요시와 서약서를 교환한 상태였던 것이다. 쥰케이의 조심스러움은 그래도 여전히 눈치를 보는 태도를 유지하게 만들어 14일이 되어 그제서야 코오리야마 성을 나온 것이다. 이때 미츠히데는 이미 오구루스[
小栗栖] 마을에서 그곳 백성들에게 살해당한 뒤였다.

 쥰케이는 1천의 병사를 이끌고 타이고[醍醐]에 있는 히데요시의 진영으로 가서 승리를 축하하였다. 히데요시는 그렇게 눈치를 본 태도를 책망하였지만 그대로 용서했다고 한다. 쥰케이는 이때 히데요시의 마음을 풀기 위해서 츠츠이즈츠[筒井筒]라는 이름 높은 고려차완(高麗茶碗)을 헌상하였다고 한다.

[쓰쓰이 준케이(筒井 順慶)]
1549년 생. 대대로 코우후쿠 사[
興福寺]의 중도(衆徒)로, 환속한 후에 후지시로우 후지마사[藤四郎 藤政]라는 이름을 칭했다. 1559년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에게 츠츠이 성[筒井城]에서 쫓겨나지만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도움으로 영지(領地)를 회복하고 야마토[大和]를 영유하게 된다. 1584년 죽었다. 36세.

  1. 관용어로 "洞ヶ峠を決め込む"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기회를 엿보다"는 뜻이다. [본문으로]
  2. 그런 이야기가 오고 갔다고 하나[호소카와 가문 기록[細川家記]] 결국 실현까진 이르지 못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야마토[大和]는 무로마치 시대에도 막부가 슈고[守護]를 두지 않았던 유일한 곳으로, 이곳은 코우후쿠 사[興福寺]의 왕국이라고 할 정도로 코우후쿠 사의 영향력이 굉장히 강한 곳이었다. 노부나가도 처음엔 자신이 키웠다고 할 인재 중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던 반 나오마사[塙 直政]에게 야마토를 지배하게 하나, 나오마사가 전사하자, 야마토에서 가장 세력이 크고 노부나가를 성심성의껏 섬기던 코우후쿠 사의 승병 출신인 쥰케이를 야마토의 지배자로 임명한 것이다. 이는 노부나가의 판단이었지 결코 미츠히데 덕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본문으로]
  4. 그는 부인은 쥰케이의 딸이다. [본문으로]
  5. 코우베[神戸]의 옛 이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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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1.31 17: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게 살아남으려 애썼건만 아버지처럼 암으로 요절했고 아들대엔 카이에키 당했으니 뭐..-_-; 인생무상이라지만 참 덧없는 일인가 싶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2.01 13: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래도 짧지만 굵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 격전지 킨키에서 그 눈 높다는 노부나가의 신임으로 나라 하나 소유했을 정도면 뭐... 그럭저럭 괜찮았던 듯 싶습니다.

 

 히데미츠(秀)가 역사의 표면에 얼굴을 내미는 것은 1582년 6월 13일 한밤 중에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가 오구루스(小栗栖)에서 그 지역 백성의 손에 살해당한 시점에서이다.

 히데미츠와 미츠히데는 유랑시절부터 함께 고생한 사이로 같은 아케치의 일족이었다. 부인은 미츠히데의 딸로 그녀는 처음에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의 아들 무라야스(村安)에게 시집갔었지만 무라시게가 노부나가에게 반역하였기에 친정으로 돌아와 히데미츠와 재혼하였다.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의 부인 호소카와 가라샤(細川 ガラシャ)는 그녀의 동생이다.
 히데미츠는 아케치 가문의 중신 No.1이라 할 수 있는 지위로 미츠히데가 탄바(丹波) 카메야마 성(
山城)에 봉해졌을 때는 후쿠치야마 성(福知山城)의 성주가 되었다.

 히데미츠가 미츠히데 패사 소식을 들은 것은 미츠히데를 구원하고자 아즈치(安土)에서 쿄우토(京都)를 향해 달려가던 도중이었다. 히데미츠는 급거 말을 돌려 아케치의 수비병력이 지키는 사카모토 성(坂本城)으로 향했다.
말에 채찍질하며 가도를 내달리는 히데미츠의 뇌리에 악몽과 같이 개전 전날 밤이 떠올랐다.

 카메야마 성에서 처음으로 미츠히데가 본심을 밝힌 것이다.
 노부나가에 대한 모반 -.
 희미하게 예감은 하고 있었지만 미츠히데의 입으로 그것을 직접 듣자 전율하였다. 이미 다섯 명의 중신들에게 그 본심을 밝힌 상태라고 한다. 이제는 일각의 여유도 없었다. 히데미츠는 미츠히데에게 서둘러 결단을 굳히라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혼자서 가슴에 묻어두고 있어도 하늘이 알고 땅이 알며 사람이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더구나 다섯 명에게 말한 이상 곧바로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이제는 오로지 결단만 있을 뿐"
 - 미츠히데는 아와즈(粟津)에서 오오츠(大津)로 향해서 말을 달리게 하였다. 사카모토는 오오츠의 건너편 비와고(琵琶湖) 호수의 서안에 있었다.

 하지만 벌써 히데요시(秀吉)의 군세가 가는 길에 자리잡고 있었다. 하시바 군(羽柴軍)의 선봉 호리 히데마사(堀 秀政)였다. 소수의 히데미츠 군세는 호리의 대군에게 대항하다 중과부적으로 패했다. 사카모토로 향하는 육로는 완전히 차단되었다. 히데미츠는 어떻게라도 사카모토 성에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미츠히데에게 부탁 받은 책무가 있었다.

 그의 눈 앞에 가득 찬 비와고(琵琶湖)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호수를 건너면 사카모토에 갈 수 있다'
 그야말로 말도 되지 않는 착상이었다. 이것이 히데미츠의 이름을 역사에 새기게 되는 '호수 건너기(湖水渡り)'가 된다.

 이때 히데요시의 군세는 호숫가에 늘어서서 그 폭거에 "멍청한 짓이군. 빠져 뒤질 뿐이지"하고 비웃었다고 한다. 호숫가에 선 히데미츠의 모습은 - 흰 바탕에 카노우 에이토쿠(狩野 永)가 구름과 용을 그려놓은 화려한 겉옷(羽織)에 큰 U자형 장식물을 붙인 투구를 쓰고서 타고 있는 말은 덩치가 크고 몸통은 다갈색에 갈기와 꼬리, 네 굽이 검은 색으로, 명마로 이름이 높았다.

 과거 사카모토에 있었던 히데미츠는 오오츠에서 카라사키(唐崎)에 이르기까지 깊고 얕음을 숙지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건널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히데요시 군의 비웃음을 뒤로하고 히데미츠는 멋지게 비와고(琵琶湖) 호수를 건넌 것이다. 카라사키의 모래사장에 올라 사카모토의 바로 앞인 쥬오우 당(十王堂)에 도착하자 말을 그 당에 매놓고는 '아케치 사마노스케를 호수에서 건널 수 있게 한 말'이라는 팻말을 써서는 모가지에 걸쳐두었다고 한다.

 사카모토 성에 들어선 히데미츠는 이제는 여기까지라고 각오하여 쿠니유키(行)의 칼, 요시미츠(吉光)의 작은 칼(脇差), 키도우(虛堂[각주:1])의 글들을 이불에 감싸서는 포위한 적에게 던져버렸다. 천하의 이름있는 보물을 재로 만들기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후 주성(天守)에 올라 미츠히데의 가족과 자신의 가족을 찔러 죽이는 책무를 다하고 화약에 불을 붙인 후 배를 열 십자로 갈라 죽었다.

[아케치 히데미츠(明智 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가로(家老). 처음엔 미야케 야헤이지(三宅 弥平次)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사마노스케 미츠하루(左馬助 光春)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1582년 사카모토 성(坂本城)에서 자인.

  1. 1185~1269. 중국 남송시대의 승려. 일본에 중국식 차제구(茶諸具)를 도입한 '난포우 쇼우묘우(南浦 紹明)'가 송나라에 유학했을 시의 스승. 그래서인지 그의 글들은 다회(茶會)의 자리를 장식할 때 인기를 끌었다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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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본다충승 2009.02.05 02: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진의 금성무... 히데미츠와 뭔 상관이지? 생각 중에 떠오르는 그 게임... 유명한 퇴깽이 갑옷의 주인 되시는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2.05 12: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사옵니다. 바로 그것을 노린 것입죠...
      설사 따로 그림이 있더라도(찾아 볼 생각도 안 했지만 말입죠) 금성무로 할 생각이었습죠.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모반에는 아마도 그의 성격적인 면이 하나의 요소로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노부나가(信長)는 그의 중후한 체하는 얼굴이 들지 않았다. 이마에 새겨진 듯한 교양이 눈에 거슬렸다. 히데요시(秀吉)처럼 자신의 몸을 낮추어 귀여움 받으려는 재주가 없었다.

 노부나가와 미츠히데의 관계를 상징하는 듯한 이야기가 있다.
 술 자리에서 노부나가가 엄청나게 거대한 큰 잔을 내와 여기에 술을 가득 붓고는 미츠히데에게 마시라고 하였다. 미츠히데가 도저히 안 되겠다고 하자 노부나가는 갑자기 칼을 번득이며 "술을 마실 수 없다면 이거를 목에 처넣어주마"하고 미츠히데의 얼굴 앞으로 겨누었다. 어쩔 수 없이 미츠히데가 큰 잔을 비우자 노부나가는 "역시 목숨은 아쉬운가 보군"하고 비웃었다고 한다.

 코우슈우(甲州) 정벌 때였다.
 시나노(信濃) 스와 군(諏訪郡)에 있는 어느 절에 본진을 두었을 때 미츠히데가, "정말로 경사스러운 일이옵니다. 우리들의 뼈를 깎는 듯한 오랜 노력이 이제야 결실을 맺어 스와 군에 있는 모두가 우리 편이 되겠다고 알려왔습니다" 하고 노부나가에게 축하의 말을 올렸다. 그 뽐내는 듯한 얼굴이 노부나가의 역린을 건드렸다. "메야? 네 놈의 어디 뼈가 깎였고 무슨 공을 세웠다고 하는게냐? 자기 혼자서만 분골쇄신한 것처럼 말하는 그 말투가 맘에 안 든다" 라고 외치며 아랫자리에 있는 미츠히데에게 거침없이 다가가 돌연 미츠히데의 머리를 난간에 뭉개며 "이 대머리녀석!"하고 심하게 팼던 것이다. 미츠히데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의 굴욕에 실로 분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고 한다.[각주:1]

 성격적으로는 맞지 않았지만 노부나가는 미츠히데의 재능을 인정하고 있었다. 미츠히데에게는 우선 오다 가문(織田家)의 다른 무장들에게는 없는 외교관적인 특질이 있었다. 장수로서의 기량도 뛰어나 전략, 포술, 행정, 축성 등 그 재능은 다방면에 걸쳐 넘칠 듯하였다. 노부나가는 신참자인 미츠히데를 예가 볼 수 없을 정도로 중용하여 출세시켰다. 1571년 히에이잔 섬멸(比叡山討) 후 오우미(近江) 남부의 시가 군(滋賀郡)을 하사하고 사카모토 성(坂本城)의 성주로 임명한 것이다. 거의 10만석에 달하는 봉록이었다. 이 시기 아직 히데요시조차 영지(領地)가 없는 야전부대장에 지나지 않았다. 성격적으로는 맘에 들지 않았지만 미츠히데의 우수한 능력을 높이 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츠히데의 마음은 서서히 노부나가에게 멀어지기 시작했다. 사람을 도구로밖에 보지 않고 쓸모가 없어지면 냉혹히 버리는 그런 노부나가의 방식에 견딜 수 없게 되었다.
 1578년에 이런 일이 있었다. 미츠히데의 동료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가 돌연 노부나가에게 모반을 일으킨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패한 무라시게는 홀로 츄우고쿠(中
)로 도망쳤는데 그 일족에 대한 노부나가의 처리가 너무도 잔혹했다. 122명의 여성을 십자가에 매달아 창으로 찔러 죽이고 가신 512명을 해안가에 있는 집 네 곳에 가두어 불을 질러 태워 죽였다.

 노부나가의 이런 가혹함을 미츠히데 자신도 맛보았다.
 1578년 탄바(丹波) 야카미 성(八上城) 하타노 히데하루(波多野 秀治)를 설득하기 위해 미츠히데는 자신의 모친을 인질로 보내어 항복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이런 고심에 찬 미츠히데의 인질작전을 아무렇지도 않게 뭉갰다. 아즈치(安土)로 데려간 하타노 형제를 십자가에 매달아 창으로 찔러 죽여버린 것이다. 약속을 어긴 것에 분노한 야카미 성은 보복으로 인질인 미츠히데의 모친을 죽였다.[각주:2]

 그리고 천하를 진동시킨 1582년이 왔다.
 미츠히데는 이 해의 5월 15일 아즈치 성을 방문한 토쿠가와 이에야스(
川 家康)를 접대하는 직책에 임명 받았다. 당시 미츠히데는 전투에 종사하지 않고 휴가 중이었던 것이다. 이 당시 오다 가문은 5개의 군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 하시바 히데요시, 타키가와 카즈마스(川 一益) 그리고 아케치 미츠히데가 각각의 사령관이었다. 미츠히데는 15일~17일까지 이에야스의 접대에 임했지만 17일에 빗츄우(備中)에 있던 히데요시에게서 원군을 요청하는 소식이 노부나가에게 전해졌다. 히데요시는 타카마츠 성(高松城)을 한창 수공으로 밀어붙이던 중에 모우리(毛利)의 대군이 타카마츠 성을 구원하러 몰려들었던 것이다.

 노부나가는 지금이야말로 모우리와 자웅을 정할 때라 여기고 직접 출진하고자 하였다. 여러 장수들에게 동원령이 내려졌다. 미츠히데는 그 구원군의 선봉이었다. 지휘하에 들어온 다이묘우(大名)는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츠츠이 쥰케이(筒井 順慶),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들이었다.
 이때 미츠히데의 심경은 복잡했다. 츄우고쿠 공략은 말하자면 히데요시가 메인이며 나중에 달려가는 자신은 그 보조적인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설사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오로지 히데요시의 명성만 높여주기만 할 뿐이 아닌가?

 그런 마음의 동요에 더욱 박차를 가한 것이 노부나가의 명령이었다. 빗츄우 출진을 명령 받은 직후에 노부나가의 사자가 와,
"이즈모(出雲), 이와미(石見)를 새로이 하사하시며 대신 탄바(丹波), 오우미(近江)의 영지(領地)를 거두신다고 하십니다"
 고 전한 것이다. 지금 가진 영지(領地)를 몰수하고 대신 적국의 영지를 준다는 것이다. 영지 몰수나 마찬가지인 명령이었다. 이때 미츠히데의 뇌리에 예전 노부나가에게 추방당한 오다 가문의 중신 하야시 미치카츠(林 通勝)나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나에게도 그런 일이 닥칠 줄은……"

 5월 26일.
 거성(居城) 탄바 카메야마 성(
山城)에 입성한 미츠히데는 다음 날인 27일 아타고야마(愛宕山) 산에 올라 기도를 하고 신전 앞에서 2~3번 제비를 뽑으며 길흉을 쟀다고 한다. 후세의 사가들은 이때 대체적으로 그가 모반 결의를 굳혔다고 보고 있다.

 날이 밝아 28일.
 아타고야마 산에서 렌가(連歌) 모임이 개최되었다. 당대 렌가계 제일인자인 사토무라 쇼우하(里村
紹巴), 사토무라 쇼우시츠(里村 昌叱)가 열석하였다. 곧이어 모임이 시작되어 발구(發口)를 미츠히데가 읊었다.

때는 지금 하늘이 내리는 5월 비려나
時はいま、天が下しる五月かな

 쇼우하는 깜짝 놀랐다.
 '때는 지금'은 결의를 의미하며, '때(토키)'에는 또한 미츠히데의 출신인 미노(美濃)의 '토키' 씨(土岐氏)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이 내리는(天が下しる)'은 '천하를 다스린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토키(아케치)가 천하를 통치할 때가 온 것이다' – 쇼우하는 이렇게 해석하여 전율한 것이다.
 렌가 모임은 이틀간에 걸쳐 행해졌는데 미츠히데는 자리에서 간식으로 나온 대나무 잎에 싸서 찐 떡인 쫑즈(粽)를 잎도 벗기지 않고 그냥 입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카메야마 성으로 돌아온 미츠히데는 가장 신뢰하는 아케치 사마노스케 히데미츠(明智 左馬助 秀)를 침실로 불러 모기장 안으로 불러들여서는 모반할 뜻을 밝혔다.

 미츠히데가 츄우고쿠 공략을 위해 전군을 지휘하여 카메야마 성을 출발한 것은 6월 1일 오후 6시였다.
 전군 쿄우토(京都)로 향했다. 이 시점에서 미츠히데는 아직 장병들에게 본심을 밝히지 않았다. 쿄우토에서 노부나가 앞에서 열병식을 치른다고 속였다. 전군이 쿄우토 근교 카츠라가와(桂川) 강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전투준비의 명령이 전군에게 하달되었다.
 "말의 재갈을 풀고 보병인 자는 새로운 짚신으로 갈아 신으라. 철포를 소지한 자는 화승을 1척5촌으로 자른 다섯 줄에 불을 붙여 꺼지지 않게 꺼꾸로 들고 있으라"
 이렇게 세부적인 명령은 전쟁터에서만 행해지는 것이었다. 전군은 처음으로 미츠히데의 결의를 알게 되었다.

 쿄우토(京都)에 돌입한 아케치 군세가 혼노우(本能)사(寺)에 있던 노부나가를 죽인 것은 다음 날 새벽이었다. 그러나 모반으로 세워진 아케치의 천하는 이어지는 일 없이 10일 후의 야마자키 전투(山崎合)에서 상경한 히데요시에게 패함으로써 무너졌다.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1528년 생. 미노(美濃) 토키 씨(土岐氏)의 지족이라고 한다. 전반생이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를 섬겼다는 말이 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가신이 된 것은 중년이 지나서인 것 같다.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
)와 함께 쇼우군(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노부나가에게 알선하여 공적을 인정받았다. 1570년 오우미(近江) 사카모토(坂本) 성주가 되어 탄바(丹波) 경영을 일임 받았다. 1575년 코레토우(惟任)라는 성(姓)과 휴우가노카미(日向守)를 제수 받았다. 1582년 6월 2일 혼노우(本能)사(寺)에서 주군 노부나가를 죽였지만 야마자키(山崎)에서 히데요시(秀吉)에게 패하여 도주 중 오구루스(小栗栖)에 이르렀을 때 그 지역 백성에게 살해당했다.

이전 번역글.

2008/01/29 -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 아케치 미츠히데

  1. 이때의 일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루이스 프로이스는 미츠히데가 노부나가에게 발길질 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적고 있다. [본문으로]
  2. 회본태공기(絵本太功記)의 창작이라 여겨지고 있다. 야카미 성은 긴 포위에 지친 성 수비병들이 성주인 하타노 형제를 잡아다 받쳤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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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맹꽁이서당 2009.01.28 12: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아케치의 차례가 왔네요. (다들 그렇겠지만 소설 [대망]으로) 처음 전국시대 관련 이야기를 접했을 때 너무 어이없이 패사한 것을 아쉬워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좀더 분전했으면... --a
    만화 [센고쿠]에서 묘사되는 아케치는 매력적이긴 하지만, 이런 역사 관련 글에서 보이는 '소심' 이미지와는 꽤나 동떨어진 것 같아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그나저나 북박스가 만화사업을 접는다는 말이 있던데, 안그래도 센고쿠 후속 단행본이 나오지 않아 불안하기도 하군요..
    아참, 발해지랑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1.28 14: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대의명분에 이은 대세는 그래서 무서운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큰일을 하는 사람들은 대의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엄청 고심하는 것이겠고.

      특히나 미츠히데같은 경우 노부나가가 그렇게나 키워주었는데 배신했다는 점이 忠이란 개념이 희박했던 동시대 사람들의 눈에도 마땅치 않게 보였나 봅니다.

      개인적으로는 쿠도우 카즈야 & 이케가미 료우이치의 "信長"에 나오는 미츠히데의 이미지가 제 머리 속에 있는 이미지입니다.
      루이스 프로이스가 "일본사"에서 그를 평한...
      '배신이나 밀회를 좋아한다', '인내력이 풍부', '계략과 책략의 달인'...이라는 점을 그 만화에서는 잘 살렸더군요.

      센고쿠 한국 발매 정지라...
      참 그건 아쉽군요. 괜찮은 만화였는데 말입죠.
      한국 발매된 것은 다 모았는데, 그 이후 것은 일본판을 구해야되겠군요.(뭐 그건 그거대로 노모(?? ^^;)인지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올 한 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2. 뻘군 2010.07.19 19: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한창 늦은 뒷북 덧글이네요^^
    생뚱맞지만 미쓰히데가 노부나가가 아니라 이에야스의 휘하에 들어갔다면 어땠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적어도 기질상으로 계속 충돌하는것으로 보이는 노부나가보다 이에야스는 나름 죽이 잘 맞지 않았을까..
    이에야스도 만만치 않은 너구리지만요^^(겉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하지만 미쓰히데가 노부나가보다 한단계 아래인 히데요시 밑에서의 출정에 반발해(+그외 잡다한 이유들) 혼노지의 변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도 있다는걸 보면 노부나가보다 아래인(겉으로는 동맹자이긴 하지만) 이에야스에게 가지 않았을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구요...

 센고쿠(戦国) 무장 중에서 시미즈 무네하루(清水 宗治)만큼이나 무사다운 화려한 의식 속에서 마지막을 장식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는 츄우고쿠(中国) 모우리(毛利) 공략에 임하여 우선 모우리 세력권의 최전선에 있는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의 시미즈 무네하루를 오다(織田) 측으로 배신하도록 꾀했다. 노부나가(信長)의 서약서에 자신도 편지를 써서는 하치스카 마사카츠(蜂須賀 正勝)와 쿠로다 요시타카(黒田 孝高)를 무네하루에게 사자로 보냈다. 노부나가의 서약서에는 빗츄우(備中), 빙고(備後) 2개국(国)을 항복의 조건으로 준다는 것이었다.

 무네하루는 곧바로 이 서약서와 편지를 모우리의 당주 테루모토(輝元)에게 받쳤고 히데요시에 대한 답신에는 “테루모토가 나를 신뢰하여 국경의 땅을 맡겼기에 그 믿음에 어긋나는 짓을 할 수는 없소이다”고 정중히 거절하였다고 한다. 2개국이라는 맛있는 떡밥에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무네하루에게는 모우리에게 빚이 있었다. 예전에 아들 사이타로우(才太郎)가 적에게 유괴당하였을 때 테루모토나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 덕분에 아들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센고쿠 난세에 있어서는 진귀한 의리의 무장이었다.

 역사상 유명한 타카마츠 성 공격은 1582년에 시작되었다.
 히데요시는 4월 4일에 2만의 대군을 이끌고 우키타 씨(宇喜多氏)의 본거지 오카야마 성(岡山城)에 입성하였다. 타카마츠 성은 이 오카야마 성에서 12km정도 떨어진 지점인 키비 평야(吉備平野)의 거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외교로 타카마츠 성을 항복시키는 것에 실패하였는데 그렇다고 이것을 힘으로 뺏기에도 어려웠다. 성안의 사기가 왕성하였으며 성은 요해였다. 작고 높은 성 주변에는 말의 발도 빠질 듯한 진창 깊은 밭으로 연못이나 늪이 많았다. 그 속에는 불과 말 한 마리 지날 수 있을 정도의 외길밖에 없었다. 함락시키는데 필시 2년은 걸릴 것이다.

 히데요시는 본영 류우오우산 산(竜王山)에서 타카마츠 성을 멀리 바라보며 이 성의 공략법에 대해 생각하였는데 그 결과 이 천하의 지혜꾸러미 속에서 나온 것은 [수공(水攻)]이라는 획기적인 전술이었다. 즉 타카마츠 성의 서쪽에 흐르는 아시모리가와 강(足守川)를 막아, 그 지점에서 성의 동쪽 이시이야마 산(石井山)의 남쪽기슭 카와즈가하나(蛙ヶ鼻)까지 약 4km에 걸쳐 제방을 쌓아 성을 이 인조호수 안에 수몰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공성이라기 보다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거대한 토목공사 계획이었다(부대 배치 및 알기 쉽게 나온 그림이 있는 곳)

 제방의 규모는 높이 7m, 밑바닥 폭이 20m나 되어 그 위는 도로가 있어 이 도로의 폭은 약 10m였다. 히데요시는 이를 단기간에 완성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히데요시는 10여일 만에 완성시킨 것이다. 그야말로 기적으로 ‘천재적인 토목건축가’라는 말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는 신속함이었다. 흙은 가마니로 옮기는 방법을 취하여, 그 가마니 한 개당 무려 돈 100문과 쌀 한 되를 준다는 조건을 내건 것이다. 당연하게도 비젠(備前), 빗츄우(備中) 일대의 사람들은 이 짭잘한 돈벌이에 달려들었다. 이야기는 엄청난 전파력으로 각지에 전해져 흙 가마니를 쌓은 백성들의 수레가 타카마츠로 쇄도하였다. 히데요시에게 행운이며 타카마츠 성에게 있어 불행인 것은 때마침 장마의 계절이었기에 완성된 이 인조호수에 엄청난 비가 쏟아져 볼 때마다 수량이 늘어갔다. 호수 한 가운데 덩그러니 뜨이게 된 타카마츠 성은 3일째에 성의 일층까지 물에 잠겼다.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형제를 중심으로 한 모우리의 대군이 타카마츠 성을 구원하러 도착해 있었지만 이 인조호수를 둘러싼 하시바 히데요시의 대포위망에는 손을 쓸 수가 없었다. 화해 협상밖에 방법이 없었다. 모우리 씨의 외교승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가 히데요시의 본진으로 파견되었다. 모우리가 제시한 조건은 빗츄우 등 5개국을 할양할 테니 타카마츠 성의 모든 장병을 구해달라는 것이었다. 모우리 씨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였다. 히데요시는 이를 거부했다. 히데요시의 조건은 5개국 할양 외에 ‘타카마츠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의 할복’이라는 것이었다.

 일시 화평교섭은 좌초되었지만 안코쿠지 에케이가 성주 무네하루를 설득하여 양해를 구했다. 조건 수락의 서장이 히데요시의 진영에 도착한 것은 6월 2일이었다. [4일에 할복]이라고 정해졌다. 히데요시는 크게 기뻐하며 타카마츠 성으로 술과 안주를 보냈다. 이 2일 새벽에 실은 쿄우토(京都)에서 대사건이 일어나있었다. 혼노우(本能)사(寺)의 변이었다. 히데요시 쪽으로 그 급보를 가진 밀사가 도착한 것이 3일 심야. 히데요시는 앙천했다. 어쨌든 이 사실은 철저하게 감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모우리 측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화평교섭의 와해는커녕 고립된 히데요시는 곧바로 적의 맹공을 받게 된다.

 4일.
 무네하루의 자인이 행해지는 날이었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입장에 급격한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은 채 평온히 자리잡고 있었다. 작은 배가 타카마츠 성에서 배를 저으며 나왔다. 배 위에는 죽은 사람이 입는 흰 옷의 무네하루가 있었다. 죽음을 확인하는 사람이 탄 배의 앞에 오자 무네하루는 그 역을 맡은 호리오 모스케(堀尾 茂助[각주:1])와 조용히 마지막 잔을 기울이고는 흰 부채를 펼쳐 쿠세마이(曲舞) ‘세이간지(誓願寺[각주:2])’를 추었다. 적과 아군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펼쳐지는 화려한 죽음의 의식이었다. 무네하루가 배를 가르자 등뒤에서 칼날이 번쩍거리며 목이 떨어졌다. 동승하고 있던 형 겟세이(月清) 이하 따르던 자들도 계속해서 무네하루의 뒤를 따랐다.

무네하루 사세구(辭世句),

이제야 이승을 떠나는 무사의
이름을 타카마츠의 이끼에 새겨두고
浮世をば今こそわたれ武士の
名を高松の苔に残して

 히데요시는 이 이후 곧바로 행동을 일으켜 후에 히데요시의 대반전(大返し)이라 일컬어지는 초인적인 속도로 쿄우토(京都)로 올라가 야마자키 전투(山崎合戦)에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친 것이었다.

[시미즈 무네하루(水 宗治)]
1537년생. 처음엔 빗츄우(備中) 시미즈 성(清水城)의 성주. 후에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에 속해 타카마츠 성(高松城) 성주 이시카와 히사타카(石川 久孝)의 딸과 결혼하여 타카마츠 성주가 되었다. 1582년 타카마츠 성에서 자인(自刃).

속영웅백인일수(続英雄百人一首)에 그려진 시미즈 무네하루

  1.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를 말한다. [본문으로]
  2. 헤이안 시대 중기의 시인으로 남녀 관계없이 1~2위를 다투던 여류 시인 ‘이즈미 시키부(和泉式部)’의 영혼이 가무(歌舞)의 보살이 되어 성불한 기쁨을 나타내는 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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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2.26 19: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부나가의 죽음을 모리 측에서 알고 있었더라면 시미즈 무네하루가 죽지 않아도 됐을텐데 참 안타까운 장수 하나가 비명에 갔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2.27 20: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여담입니다만...전해지는 이야기로는 킷카와 모토하루인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인지가 오다의 침공에 앞서 그 지역 무장들에게 충성 서약서를 쓰게 하였는데, 참가했던 모우리의 직신들은 큰 소리를 치며 호기롭게 썼으나 토자마(外様)인 무네하루만은 행동으로 보여 줄 것이지 기껏 종이 서약이 무슨 소리냐며 쓰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후에... 큰 소리 치던 녀석들은 히데요시에게 항복...끝까지 버틴 놈은 무네하루 뿐....뭐...그런 것입죠..네.

  2. 유우 2009.11.09 05: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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