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나가요시( 長可)

1584 4 9 전사 27

1558 ~ 1584.

미노(美濃) 카네야마(金山) 성주 모리 요시나리(森 可成)의 차남.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타케다(武田)() 공략 등에서 전공을 세워 [오니무사시(鬼武蔵)[각주:1]]라 불리었으나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의 전투에서 전사. 혼노우(本能)()의 변에서 전사한 노부나가의 코쇼우(小姓[각주:2])모리 란마루(蘭丸), 보우마루(坊丸), 리키마루(力丸)는 동생.









오니무사시(鬼武蔵)의 패사(敗死)


 모리 나가요시는 1570년에 오우미(近江) 우사야마(宇佐山)성에서 전사한 모리 요시나리(森 可成)의 차남이다. 형 요시타카(可隆)도 같은 해에 전사하는 바람에  불과 13세의 나이로 미노(美濃) 카네야마(金)성주가 되었다.

 1582년의 타케다(武田) 공략에서는 선봉대로 출진하여 활약. 북부 시나노(信濃)4군과 카이즈(海津)성을 하사 받았지만 혼노우(本能)()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죽자, 우에스기(上杉) 공략을 위한 에치고(越後)의 진중에서 퇴각하여 카네야마성으로 돌아왔다.


 1584년 3월 6일.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각주:3])이세(伊勢) 나가시마(長島)성에서 히데요시(秀吉)와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던 츠타 요시후유(津田 義冬) 3인을 자해시켜 히데요시와 대립할 뜻을 명확히 하였다. 또한 부하인 여러 장수들을 성에 모이게 한 후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 = 미노 오오가키(大垣)성주)), 모리 나가요시등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야스는 재빨리 구원에 응해 13일에는 키요스(淸須)성에 도착. 노부카츠와 회견하였다.


 한편 이케다 츠네오키, 모리 나가요시에 대해서는 히데요시도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해 설득 공작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츠네오키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젖형제[각주:4]이기도 하기에 오다 가문을 선택해야 하나, 한창 커가는 히데요시 측에 서야 하는가라는 선택의 기로에 가로놓였다.


 전쟁의 시작은 북부 이세에서 시작되었는데 히데요시는 미노 지방에 대해여 설득 공작을 계속함과 동시에 3 11일에는 미요시 히데츠구(三好 秀次[각주:5])를 대장으로 한 1 7천의 군세를 오우미(近江) 나가하라(永原)에 배치하여 미노 방면에 압박을 가했다.


 13일.

 결단에 몰린 츠네오키는 예전 자신의 성이기도 했던 노부카츠 쪽의 이누야마(犬山)성을 탈취하는 형태로 히데요시의 편임을 알렸다. 츠네오키의 사위이기도 한 모리 나가요시도 이것에 응하는 형태로 최전선인 하구로(羽黑) 하치만(八幡)산으로 진출했다. 한편 이에야스는 코마키(小牧)산에 올라, 17일에는 나가요시를 기습하여 이누야마로 패주시켰다.


 히데요시가 이누야마에 도착한 것은 27일이었다.

 히데요시는 더욱 전진하여 라쿠덴(樂田)에 본진을 두었으며 코마키산의 이에야스-노부카츠군과 대치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하여 츠네오키가 제안한 것이 별동대를 이끌고 이에야스의 본거지 미카와(三河)의 빈집을 터는 작전이었다. 이누야마성 탈취로 이미 전공을 세운 츠네오키가 새로이 도박을 할 필요는 없었으니 하치만 산에서 일패도지한 나가요시의 강한 희망에 위한 것이라도 한다.


 작전은 4 6일 밤중에 행해졌다.

 선봉은 이케다 츠네오키, 2번대는 모리 나가요시, 3번대는 호리 히데마사(堀 秀政), 4번대가 총대장인 미요시 히데츠구였다. 덧붙여 히데츠구도 츠네오키의 사위였다.

 이러한 움직임을 재빨리 탐지한 이에야스는 8 은밀히 주력을 이끌고 추격하여 9일 오전부터 각 부대를하나씩 각개 격파했다. 후속부대가 모두 무너져 이케다의 부대와 모리의 부대는 이에야스의 본대까지 달려든 총공격을 당하여 괴멸되었다. 나가요시는 철포에 미간을 뚫려 즉사.

 [오니무사시]의 허무한 최후였다. 향년은 27.


출진 전에 남긴 유언장.


 그러한 일이 있기 전인 3 26일. 나가요시는 유언장을 남겼다.


 1조와 2조는 차도구인 사와히메(沢姫)의 단지, 다이텐모쿠(台天目)를 히데요시에게 진상한다는 내용이다.

3조는 어머니가 히데요시에게 영지(領地)를 얻어 쿄우토(京都)에 살 것, (나가요시의 동생 센마루(千丸))는 계속해서 히데요시에게 머물 것을 권하고 있다.

  4조와 6조도 센과 관련한 것으로 자신의 뒤를 잇지 말 것을 명하며 카네야마(金山)성에는 능력과 충성심이 확실한 무사를 성주로 삼아 달라는 것을 히데요시에게 부탁하며 앞서 말한 것 이외의 목욕 도구나 도(), 와키자시(脇差[각주:6])는 센에게 준다고 하고 있다.

  5조에서는 여성들에게 정실의 친정이기도 한 오오가키(大垣 = 츠네오키의 성)로 피난할 것을 권하고 있다.


 유언장 말미에는 쿄우토의 혼아미(本阿弥)에게 맡겨놓은 와키자시를 센이 받을 것, 오코우(여동생인지 딸인지는 불명)는 쿄우토의 의사와 같은 쵸우닌(町人)에게 시집갈 것을 희망. 거듭 센이 모리 가문을 상속 받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만에 하나라도 히데요시까지 죽는 패배를 했을 경우 모두 불을 붙여 자살을 강요하는 점에서 전국 시대의 비장감이 흐른다.


 초반의 1조와 2조는 이 편지가 히데요시에게 보여졌을 것을 강하게 의식한 것이겠지만 가족과 관계된 부분은 거짓 없는 마음일 것이다. 나가요시가 자신의 부친이나 형제들처럼 피 냄새 끊기지 않는 센고쿠의 생활에서 가족이 벗어나길 바라는 부분에는 현대인들에도 공감할 것이다.


 나가요시가 죽은 뒤.

 사와히메의 단지는 히데요시의 것이 되어 같은 해(1584) 10 10일 다회(茶會)에서 피로되었다. 한편 아버지와 형 5(혼노우(本能)()의 변에서 전사한 란,보우,리키의 3형재는 센의 형)을 전쟁에서 잃은 센고쿠 시대의 [라이언 일병]인 센은 타다마사(忠政)라 이름 지어져 형의 바램과는 반대로 카네야마 성주가 되었지만, 그 후는 전란을 잘 헤쳐나가 미마사카(美作) 츠야마(津山) 번주(藩主 = 18 6천석)가 되어 1613년에 죽기까지 천수를 누렸다.

  1. 나가요시의 관도명이 무사시노카미(武蔵守)였으며, 가열찬 전장에서의 모습이 귀신과 같다 하여 이러한 별명이 붙었음. [본문으로]
  2. 비서관 역할을 하는 20살 이전의 무사를 말함. [본문으로]
  3.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 [본문으로]
  4. 노부나가는 핏덩이일 때 다른 여인들의 젖꼭지를 물을 뜯는 버릇이 있었으나 츠네오키 모친의 젖만은 얌전히 빨았다 한다. [본문으로]
  5. 살생관백.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가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기 전의 이름 [본문으로]
  6. 일본 무사가 차는 두 자루의 칼 중 작은 쪽을 말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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