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는 시즈가타케 칠본창[賤ヶ岳の七本槍[각주:1]]에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과 함께 이름을 올리고 있는 뛰어난 무용(武勇)의 장수이지만, 센고쿠[戦国] 무장 특유의 연극적 행동이나 허세가 없어 어렸을 때부터 노련(老鍊)한 느낌을 준다.

 반 단에몬[塙 団右衛門]이라고 하는 요시아키의 가신이 있었다. 그는 소위 호걸형 무사였기에 주종간에 다툼이 많았다. 어느 날 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 카토우 키요마사가, 저렇게나 유명하고 뛰어난 무사를 어째서 우대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러자 요시아키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화를 내었다고 한다. 보통 자기 부하의 무명(武名)이 높으면 기뻐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건만, 요시아키는 단에몬과 같은 스타 플레이어를 선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단에몬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 한 부대의 지휘관으로 출진했지만, 지휘관이라는 자신의 지위를 망각하고 필마단기로 돌격하여 가장 먼저 적진에 돌입하였으며(一番槍), 적의 목을 베어 오는(一番首) 수훈을 세웠다. 그러자 요시아키는,
 “네 녀석은 지휘관을 맡기엔 부족한 놈이다”
 고 차갑게 질책하여 단에몬을 화나게 하였다. 결국 단에몬은 요시아키에게서 떠났다[각주:2]. 즉 요시아키는 단에몬과 같은 스탠드플레이어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요시아키 자신도 떠들썩하게 남의 주목을 끄는 행동을 싫어하였다.

 요시아키가 얼마나 침착했는지를 알려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날, 요시아키의 부하들이 모닥불에 둘러앉아 장난 삼아 불에 달구어진 불쏘시개를  거꾸로 세워 나중에 온 사람이 그것을 쥐다 뜨거움에 놀라는 것을 보며 낄낄대고 있었다. 거기에 요시아키가 지나치게 되었다. 부하들은 만약 요시아키가 불쏘시개를 쥐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지만, 말하는 타이밍을 놓쳐 누구 하나 말하지 못하던 중 결국 요시아키가 아무 생각 없이 불쏘시개를 잡았다. 요시아키의 손에서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 올랐다. 하지만 요시아키는 태연히 그 불쏘시개로 땅바닥에 한 일(一)자를 그리고 잠시 떠들다 갔다고 한다. 더구나 나중에 어떠한 문책도 없었다 한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조선 침략의 본거지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에 여러 장수들이 주둔하고 있을 때였다. 조선에서 포획한 호랑이를 쇠사슬에 묶어 끌고 가던 중 호랑이가 그들을 뿌리치고 날뛰었다. 구경하던 다이묘우[大名]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 바빴지만, 그런 소동 속에서 요시아키 단 한 사람만이 벽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그리고 호랑이가 사라지자 그제서야 눈을 뜨며, “뭔 일 있었나?”하고 입을 열었다 한다.

 히데요시[秀吉]가 죽은 뒤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도 요시아키 한 사람만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를 정점으로 하는 문치파가 이에야스[家康] 타도를 획책하였고 키요마사, 마사노리 등 무공파가 미츠나리를 죽이고자 행동을 일으켜 일촉즉발의 긴박한 공기가 떠돌 때도 요시아키는 후시미[伏見]의 이에야스 저택을 방문하여,
 “세상이 소란스러운 듯 합니다만 이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지금까지 곁에 두고 있던 50기(騎) 중 20기를 제 본거지인 이요[伊予]로 돌려보냈습니다. 남은 인원은 이에야스님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바칠 생각입니다”
 고 말했다고 한다.

 전쟁터에서도 요시아키는 냉정침착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배신으로 인해 서군(西軍)이 패주하기 시작하자, 동군(東軍)은 앞다투어 가며 도망치는 적을 쫓아갔기에 진형이 흐트러져 각 무장의 본진을 지키는 방비가 부실해졌다. 하지만 요시아키의 부대만큼은 질서정연했다. 요시아키의 지시가 구석구석 잘 전해져 일사불란한 방비태세를 유지했다. 거기에 한술 더 떠 적이 패주하자 요시아키는 출진할 때 몸에 걸치고 있던 화려한 갑주를 재빨리 벗어버리고 평범한 갑주로 갈아입었다. 이는 결사의 각오를 한 적병이 적어도 대장만이라도 죽이고자 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 것이다. 나중에 이를 전해 들은 이에야스는,
 “사마노스케[左馬助=요시아키]는 정말 빈틈이 없구나”
 하고 감탄했다고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기 전초전인 기후 성[岐阜城] 공성전에서 승리하였을 때, 승리를 알리고자 칸토우[関東]의 이에야스에게 보고하기 위해 사자(使者)를 고르려 했으나 아무도 사자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이제 막 결전이 시작되려는 때에 사자가 되어 전쟁터에서 이탈해 버리면 공적 세울 기회를 잃기 때문이었다. 이 때 요시아키는 가신 한 명을 지목하여 그에게 머리를 숙이며,
 “칸토우에 사자를 보내는 것은 긴급을 요하는 일이며 이것 역시 공적이라 할 수 있다. 부디 가주지 않겠는가?”
 하며 간절히 부탁했다고 한다.

 역시 세키가하라 때의 일이다.
 요시아키 진영에 잠입한 닌쟈[忍者]가 잡혔을 때 요시아키는,
 “이자도 자기 주군의 명령에 죽음을 각오한 용사이다. 지금 여기서 이자를 죽여도 승패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며 목숨을 살려주었다고 한다. 요시아키는 적이라 하더라도 용사를 인정하는 도량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세키가하라에서의 공적으로 인하여 요시아키는 이요 마츠야마[松山] 20만석에서 아이즈[会津] 40만석의 가증되었지만 요시아키는 이것이 불만이었다고 한다.
 처음에 이에야스는 요시아키를 위해 50만석을 주려고 하였지만 이에야스의 모신(謀臣)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가 너무 많다며 막았다고 한다. 이를 들은 요시아키는 곧바로 마사노부에게 가서 이유가 뭐냐며 따졌다. 마사노부의 답변은 이러했다.
 “당신은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많은 은혜를 입은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너무나도 많은 봉토를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에게 받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결코 좋게 보지 않을 것입니다. 나중의 화근거리가 될 수도 있기에 그렇게 처리한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아무리 요시아키라도 이에는 반론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고 한다.[각주:3]

 이에야스는 죽을 때가 가까워지자 히데타다[秀忠]를 병상(病床)으로 불러 여러 다이묘우들에 관해 자신이 가진 인물평을 전해 주었는데 요시아키에 대해서는,
 “우직하고 의리 있는 자이기는 하지만 사사로운 일에도 신경을 곤두세워 불만을 표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으니 그런 부분을 잘 판단해서 처리하도록”
 하고 말하였으며 또한,
 “의리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의 부추김을 받는 다면 아무리 소심한 사람이라도 모반을 일으키는 법이다.”
 고 말하며 감시의 눈을 게을리 하지 말도록 말을 남겼다 한다.

 카토우 요시아키의 가문은 아들인 아키나리[明成] 때 아이즈 42만석을 몰수당하여 단절을 맛보게 된다.

[가토 요시아키(加藤 嘉明)]
1563년생. 통칭 마고로쿠[孫六], 사마노스케[左馬助]. 미카와[三河] 출신으로 일찍부터 히데요시[秀吉]를 섬기며 시즈카다케 칠본창[賤ヶ岳の七本槍]의 공으로 3000석을 하사 받았다. 1585년 아와지[淡路] 1만5천석, 조선침략에서는 수군(水軍)으로 참전. 1597년에는 거제도에서 조선 수군의 배를 탈취했다[각주:4].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이요 마츠야마 성[伊予松山城]를 축성. 후에 아이즈 42만석으로 이봉(移封). 1631년 9월 12일 죽었다. 69세.

  1. 1583 년 오우미[近江]에서 히데요시[秀吉]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2. 떠날 때 성문에 ‘결국 시골 좁은 천에 머물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를 높이 나는 갈매기 처럼 유유히 떠난다[野水江南遂に留まらず、高く飛ぶ 天地の一閑鷗]' – 즉 요시아키는 그릇이 작아서 대인배인 나님은 떠나마..라는 뜻일 것임. 아마... - 라는 시를 붙이고 갔기에, 이에 분노한 요시아키는 단에몬이 다른 가문에 취직 못하도록 타 다이묘우에게 편지를 돌렸다(이를 奉公構라고 한다). 그래서 단에몬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에 밑에 있었으나 얼마 안가 그곳에 있지 못하고 쿄우토[京都]에 가서 탁발승을 하다가 나중에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 때 오오사카 성에 입성하게 된다. [본문으로]
  3. 전후 처리과정에서 이에야스가 논공행상을 주도하게 된 배경에는 이에야스가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대리인과 후견인이라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즉 세키가하라 이후 동군이 영토를 하사 받은 것은 이에야스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 아닌 히데요리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다. [본문으로]
  4. 元凶(원균..이라고도 읽는다)의 칠천량 해전을 말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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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10.01.09 05: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면 카토우 요시아키의 멸봉당한 아들내미가 제법 비중 큰 보스격으로 나오는 만화도 있던 기억인데요.. 아이즈 40만석을 걸 가치가 있다던가...(내용은 안드로메다였던 기억입니다만;)

    아무튼 담력이 참 멋지군요(..근데 왜 저는 한편으론 뭔가 마초짓은 바보같다고 느껴지는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1.09 08: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야규우 쥬우베이[柳生 十兵衛]가 등장하는 와이쥬우엠 야규우인법첩[Y+M 柳生忍法帖]인 듯 하군요.

      http://ja.wikipedia.org/wiki/Y%E5%8D%81M_%E3%80%9C%E6%9F%B3%E7%94%9F%E5%BF%8D%E6%B3%95%E5%B8%96%E3%80%9C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유일한 딸인 치요히메[千代姫]를 아이즈의 시골 무사가 무시하는 쌍큼한 시작이 짱이었습죠.

      여담으로 호랑이 소동 때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는 호랑이와 눈싸움하였고 서로 노려보다 호랑이가 물러갔다고 합니다.(...풋~)

      시간과 문화가 다르다 보니 느껴지는 것도 천차만별이라 생각합니다.

  2.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0.01.09 11: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7본창 중에서 마사노리나 기요마사가 최정상급 스타고, 다케노리나 나가야스가 단역에 그치는 인기를 누린다면, 요시아키나 가쓰모토는 중간급 배우라는 생각이 듭니다.(말많고 탈많은 와키자카는 제외하겠습니다. 이순신 덕에 인기는 제대로 끌었으니)

    그나저나 아이즈는 정말 일본역사에 많은 이들이 오간 장소군요. 아시나, 다테, 우에스기, 가모, 가토 요시아키, 거기에 호시나 번까지 있었으니 .. 막말의 아이즈는 말할 필요도 없군요. 간토와 오슈 사이의 요충지라서 그런 면이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막부가 호시나번을 아이즈에 둔 까닭은 대 다테 방어선의 역할이 맞는지요?

    P.S : 발해지랑님께선 원균 명장론을 믿지 않으시는 듯 하군요 (낄낄) 원균이 용맹하다는 기록은 곳곳에서 튀어나오기는 한다만, 6년간의 모아온 전력을 한 번의 전투에서 모두 날려먹은 게 명장의 기준이 되는지는 의문입니다. 발해지랑님의 생각은 어떠신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1.09 15: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여담으로 일본 위키에 따르면 키요마사나 마사노리는 나머지 등등과 동급으로 취급 받는 것을 싫어했다고도 하더군요.

      그러게요. 그래서 아이즈라는 쿠니[国]도 아닌 일개 지역을 따로 태그로 지정하였습죠. 언젠가 함 능력되면 아이즈에 관해서도 함 쓰고 싶습니다.

      ps..에 관해서는...
      승패야 병가지상사다 보니 뭐라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국가존망의 시기에 동료를 참언하여 나락에 빠뜨린다거나, 국가존망의 시기에 사복을 채우고자 돈 받고 병사 제대시키거나, 충무공의 운주당이라는 참모부 건물에 가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여성들을 데려다 하렘을 만든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더군요.

    • 정동희 2010.01.11 11: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이즈가 확실히 요지는 요지였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기요마사나 마사노리는
      아무래도 다른 칠본창 멤버와는 달리 히데요시 쪽하고
      인척관계가 있어서 좀 다른 대접이었지 않는가 싶습니다

  3. 맹꽁이서당 2010.01.09 22: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7본창엔 센고쿠 히데히사는 없네요~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이쪽도 결국 막부시대에 단절당한 도요토미 가문 출신 인물이었군요.
    새해부터 좋은 지식 얻어갑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1.10 22: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시즈카다케 전투 당시 히데요시의 배후 중 가장 위험스러웠던 시코쿠[四国]의 쵸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 元親]에 대한 방비책으로 시코쿠에 파견나가 있었습니다.

      시바타 카츠이에(...정확히는 오다 노부타카[織田 信孝]) 측은 히데요시의 배후를 위협하는 의미로 모토치카에게 협력을 요청. 그에 응한 모토치카는 시코쿠의 히데요시 파인 소고우 마사야스[十河 存保]를 공략. 그러자 마사야스는 히데요시에게 원군 요청. 그래서 파견된 것이 히데히사였습죠.

      히데히사는 휘하 2000을 거느리고 시코쿠에 도하. 모토치카는 그 소식에 휘하의 카가와 노부카게[香川 信景]에게 5000을 주어 요격을 명령. 그 움직임을 캐치한 히사히데는 복병을 배치하여 카가와의 선봉대는 격파하나 깊숙히 추격하다 후속부대에 패배. 도망쳐 히케타[引田]라는 곳에서 머물다 기세를 타고 야습해 온 카가와의 군세에 대항도 못하고 도주. 도주할 때 부대 깃발까지 빼앗기는 굴욕도 맛보았다고 하는군요.(바로 시즈카다케 전투가 벌어지는 날과 같은 날이었다고 합니다[1583년 4월21일])

      이렇게 쓰면 히데히사가 조금 바보 같지만, 당시 가장 불온한 움직임을 펼치던 모토치카에게 대항하도록 파견한 점. 만약 모토치카의 그릇이 커, 과거 미요시 가문[三好家]이 그러했듯이 사카이[堺]에 상륙하여 쿄우토[京都]를 노리기라도 했으면 히데요시의 정권은 없었을 것이기에, 그런 것을 방비하기 위해 파견한 센고쿠 히데히사는 당시 히데요시가 그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었는지를 알려 준다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여담으로...히케타[引田]에서 패하여 도망친 센고쿠 히데히사는, 본거지 아와지[淡路] 근방 수역을 장악하였다는 공로로, (졌음에도 불구하고) 4개월 뒤에는 아와지[淡路] 스모토[洲本] 5만석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패했는데도 영지가 4000석에서 5만석이 늘어난 것을 보면 히데요시의 신뢰가 얼마나 컸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

      사족으로 한 가지 덧붙이자면...
      시즈가타케 칠본창[賤ヶ岳七本槍]은 아즈키자카 고개 칠본창[小豆坂七本槍]을 베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시즈가타케 전쟁이 히데요시 vs 카츠이에와 같이 보이는 것도 또한 실상도 그러하지만 그들이 각각 내세운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 vs 오다 노부타카[織田 信孝]의 싸움이기도 했습니다.(즉 오다 가문 내부의 싸움입죠)
      오다 가문에는 과거 미카와 아즈키자카 고개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군세를 격파한 적이 있었고, 거기서 대활약한 7명의 용사에게 아즈키자카 칠본창[小豆坂七本槍]이라 부르며 칭송했다 하니, 히데요시는 자신이 직접 키웠다는[子飼い] 무장 7명에게 저 칭호를 줌으로써, 무장들에게는 더욱 활약할 수 있는 동기부여와 발판을 마련해 줌과 동시에, 오다 가문 내부에서도 어느 정도 정치적 효과를 노리지 않았나? 하고 생각합니다.

      새해에도 찾아주시고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 정동희 2010.01.11 1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센코쿠 히데히사...
      게임상의 능력치는 참 거시기(?) 하게 나오는 인물인데
      역시 마지막이 중요한건가요?
      일찌감치 히데요시 막하에서 많은 무공을 세웠고,
      발해지랑님 말씀처럼 사랑도 많이 받았던 모양입니다
      다만 역시
      한 방면의 총책을 맡기에는 신중함이 많이 부족한
      인물이었죠
      돌격대장형 인간이랄까...

      암튼 그 뒤로 큐슈 원정 때, 시마즈씨 낚시걸이에 말려 들어서 대패해 도망치고, 가이에끼

      하지만 오다와라 원정 때, 백의종군(?)해서 다시 복귀

      세끼가하라때도 동국에 속해서 그 뒤로도 계속
      가문을 이었던 것 같네요(요건 좀 불확실)

      전국시대 격전의 전장을 수 없이 거치면서
      수 차례 패하고도 살아남은 몇 안되는 질긴 인물입니다

  4.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1.11 22: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동희님께//
    " 기요마사나 마사노리는
    아무래도 다른 칠본창 멤버와는 달리 히데요시 쪽하고
    인척관계가 있어서 좀 다른 대접이었지 않는가 싶습니다"

    => 그렇습니다. 키요마사는 조선침략의 최중요 후방 기지라 할 수 있는 히고를.
    마사노리는 토요토미 씨 발상의 지라고 할 수 있는 오와리를 영유한 것만 보아도 기타 등등과는 확실히 틀린 취급을 받은 것 같습니다.

    "센코쿠 히데히사...
    게임상의 능력치는 참 거시기(?) 하게 나오는 인물인데"

    => 확실히 게임 상에서 센고쿠는 절망입죠. ^^

    말씀대로 센고쿠는 선봉대 대장 정도가 한계인 인물인 것 같습니다.

    "국시대 격전의 전장을 수 없이 거치면서
    수 차례 패하고도 살아남은 몇 안되는 질긴 인물입니다"

    => 덕분에 우리는 매력적인 만화의 주인공을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정동희 2010.01.14 13: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사에서 가정만큼 무의미 한 건 없지만
      히데요시에게 가족이나 인척이 많았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하다 못해 동생 히데나가쪽이라도 좀 번성했으면 어땠을지
      가토나 후쿠시마 등도 싸움에만 능했지 정치, 외교에 약해서 히데나가 사후에는 미쓰나리등 젊은 관리들에게 너무 의존하지 않았나 싶네요(물론 그래도 다 지 하고 싶은 대로 했지만)

      센코쿠 히데히사 만화책은 저도 읽어 봤는데,
      고증도 잘 되있고, 재미도 있더군요
      센코쿠 같은 전국무장도 정말 드물지만
      굳이 비교를 하자면 도도 다카토라 같은 인물이
      역시 또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지 않았나 싶습니다

      일본 전국시대에서 보통 한 번의 패배나 반역,가이에끼
      은거는 거의 그 인물의 종막이 되기 마련인데
      위에 언급한 센코쿠나 도도가 보기 드믄 케이스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 밖에 또 누가 있을 까요... 앞 선 인물들 정도 까지는 아니지만 다치바나 무네시게 정도...
      찌질거리면서도 오래 버틴걸로 따지면
      롯카쿠 쇼테이 부자도 만만찮죠...

      이런 인물들도 나름 드라마 성은 있을 것 같은데... ㅋㅋ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1.15 23: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히데요시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조선이나 일본이나 불행이 더 길어졌겠죠. ...아마. 개인적으로 히데나가가 계속 살았다면 일본군이 조선에 진주해 있던 기간이 더욱 늘어나지 않았을지...

      키요마사나 마사노리도 내정면에서 뛰어난 것을 보면 히데요시가 오래 살았다면 나름 유능한 지방행정관으로 남았을 것 같기도 합니다.

      센고쿠 천정기라고...센고쿠 시즌2가 현재 일본에선 진행되고 있습죠. 시간 되시면 함 보시길. 신촌 북오프에 센고쿠 천정기가 있더군요...일본어 판이긴 합니다만. 재미있습니다. ^^ 전 지금까지 나온 것 다 가지고 있습죠. 원하시면 만날 때 들고 나가겠습니다. ^^

      아~ 다음에 등장할 인물이 토우도우 타카토라입니다.

      사족을 하나 붙이자면...롯카쿠가 찌질하시다고 하니 생각나는 것인데, 롯카쿠 가문은 대군이 몰려들었을 당시는 본거지를 버리고 코우가 산중으로 도망쳐 게릴라 활동하는 것이 롯카쿠 가문의 방어 전략이었던 것 같습니다.

      과거 1487년에 롯카쿠 타카요리[六角 高頼]는 아시카가 막부 9대 쇼우군 요시히사[足利 義尚]가 공격해 오자, 나중에 노부나가가 오우미에 진공했을 시 쇼우테이가 그러했듯이 코우가 산중으로 피신하여 게릴라 활동. 지친 막부군은 쇼우군이 진중에서 병으로 죽는 것도 있어 물러감으로써 싸움 종결.

      롯카쿠가 찌질했다기 보다는 노부나가가 너무 강했다고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찌질하면서도 오래 버틴 듯한 인상은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아들 우지자네가 아닐지... 무려 아비 원수 노부나가 앞에서 공놀이를 할 정도였으니..

      (절대 그럴 일 없겠지만) 이마가와 우지자네로 1년짜리 대하드라마를 만들어도 꽤 이야기 성이 있을 듯... 아비 요시모토에 아비 원수 노부나가, 본거지를 공격해 온 타케다 신겐에, 도망친 처갓댁 호우죠우 우지야스와 그 우지야스가 죽자 눈치 겁나게 주는 처남 우지마사. 도움을 청한 과거 자기네 집에서 더부살이 하던 토쿠가와 이에야스. 쿄우토에 가서도 당시 귀중한 기록가인 야마시나 토키츠구와도 교류. 말년엔 히데요시와도 교류. 드라마 하면 등장할 인물들이 정말 풍부한 것 같습니다.

  5. 정동희 2010.01.18 13: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센코쿠 천정기는 번역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일전쟁의 경과는... 참 예측하기가 어렵네요... 히데나가가 만약 총사령관급으로 왔다면
    조선측이 좀 더 힘들지 않았을까...

    롯카쿠는 본래 그런식의 게릴라전을 했군요... (이거 무슨 이가패도 아니고... 고가패인가...)

    우지자네는 찌질하긴 하지만 분명 얘기꺼리는 많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뭐 나름
    노부토라 앞세워서 미카와 침공도 하고, 호죠에 원군청해서 신겐한테도 좀 버티고
    뭐 아주 싸움질을 안한건 아니더군요

    암튼 능력을 떠나서 운도 없었던 인물로 보입니다...(살아남는 처세술은 대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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