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쿠고[筑後] 야나가와 성[柳川城]의 성주 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 宗茂]는 용맹하고 정직한 성격이었다. 이러 성격 덕분에 나중에 기적적인 복귀를 할 수 있게 된다.

 무네시게는 큐우슈우[九州]의 강호인 오오토모 씨[大友氏]의 일족 타카하시 죠우운[高橋 紹運]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타치바나 도우세츠[立花 道雪]의 양자가 되었다.[각주:1] 이 도우세츠라는 인물은 오오토모 가문에서도 굴지의 명장이었다.

 무네시게는 이 도우세츠에게 스파르타 교육을 받으며 키워졌다.
 예를 들면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식사 중의 일이다. 도우세츠가 보자 무네시게는 생선의 뼈를 발라내며 입안에서도 뼈를 혀로 골라내서는 손으로 집어 상 위에 놓았다. 도우세츠는 천둥 같은 큰소리를 지르며 화냈다. 
 “계집애처럼 뼈를 골라내며 쳐먹다니. 머리부터 입에 넣어라. 뼈도 이빨로 으깨어 삼켜라. 타치바나 가문을 잇는다고 하는 녀석이 생선 뼈도 삼기지 못하다니 앞길도 훤하구나!”
 이렇게 성장한 무네시게이다.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그 용명(勇名)은 높아져만 갔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의 출진명령으로 인하여 전국에서 여러 다이묘우[大名]이 쿄우토[京都]로 상경하였다. 이때 히데요시[秀吉]는 일부러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불러 그 휘하에 있는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도 함께 호출하여 타치바나 무네시게와 대면하게 한 뒤,
 “동국(東国)에 그 누구보다 뛰어난 혼다 헤이하치[本多 平八], 그리고 서국무쌍의 타치바나 무네시게.”라고 하며 여러 다이묘우들 앞에서 소개했다고 한다.

 무네시게는 용맹함에 더하여 인정미도 넘쳤다고 한다.
 히데요시가 큐우슈우의 시마즈 가문을 정벌하기 위해 큐우슈우로 내려오자, 무네시게는 그런 토요토미 가문의 휘하 무장으로 어느 성을 공격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무네시게는 히데요시를 알현하게 될 일이 생겼는데, 그때 적의 성에 사자를 보내어,
 “태합[太閤] 전하를 알현하기 위해 잠시 휴전하고자 하오. 당신들이 지금 정전을 받아준다면 반드시 당신들을 위해 구명탄원하겠소.”
 라고 말하였기에, 성 측도 무네시게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맡겼다고 한다.
 무네시게가 알현하러 오자 히데요시는 굉장히 기뻐하며 명마(名馬)와 명도(名刀)까지 주며 대접하였지만, 무네시게가 성을 수비하는 자들을 살려달라고 하자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무네시게는 열심히 탄원하였다. 너무도 끈질기게 달라붙자 히데요시의 참모인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가 손으로 저리가라는 시늉까지 하며 쫓아내려 할 정도였다. 하지만 무네시게는 굴하지 않고,
 “그들을 살려주시지 않는다면 저도 역시 함께 죽여주십시오”
라고 힘주어 말했다.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무네시게가 이렇게까지 나오자 결국 받아들여 수성하던 자들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고 한다.

 도리를 지킨다는 점에서도 무네시게는 명쾌했다. 삿사 나리마사가 다스리기 시작한 히고[肥後]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무네시게도 동원되어 공적을 세웠는데, 히데요시는 이때의 공적에 대한 상으로 무네시게를 사위(四位) 지쥬우[侍従]에 임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무네시게는 이때,
 “생각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하오나, 주인 뻘인 오오토모 요시무네[大友義統 = 소우린[宗麟]의 아들, 분고[豊後] 후나이 성[府内城]의 성주]의 관위가 오위(五位)이기에, 관위로 주인을 뛰어넘는 것은 도리가 아니옵니다.”
고 하며 오위(五位)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히데요시의 의향에 따라 사위(四位)에 서임되었다.[각주:2]

 임진왜란 때 무네시게의 용맹함에 대해서도 명성이 높다. 조선 측에 “일본군의 맹장 타치바나”라 평판이 높을 정도였다.
 특히 경기도 벽제관(碧蹄館)에서는 명나라 군의 총대장 이여송(李如松)을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와 함께 격파하였다. 
 이때 일본군의 군감(軍監)이었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무네시게에게 한가지 제안을 하였다. 이렇게 발군의 무공을 세우더라도 히데요시[秀吉]에게는 총사령관인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공적으로 알려질 터이지만, 만약 나에게 부탁한다면  무네시게의 공적으로 히데요시에게 전달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무네시게는 쌀쌀맞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거참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는구려. 있는 그대로 태합 전하에게 전하는 것이 군감인 당신의 임무가 아니었습니까? 부탁하면 잘 말해주겠다니 그 무슨 소리입니까?”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에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할 정도로 권세를 부리던 미츠나리라 하더라도 굴함이 없는 강직함이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서군 측에 서 오우미[近江]의 쿄우고쿠 타카츠구[京極 高次]가 지키는 오오츠 성[大津城]을 공략하였지만, 주전장(主戰場)인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合戦]에서 서군은 참패하였다. 무네시게는 군을 되돌려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입성한 뒤 동군에 대한 철저항전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네시게는 할 수 없이 군을 재정비한 뒤 큐우슈우[九州] 야나가와[柳川]로 철수하였다.
 도중 역시 같은 서군에 서서 장렬한 적중돌파에 이은 철수를 감행한 사츠마[薩摩]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와 맞닥뜨리게 되었다.[각주:3] 
 타치바나 가문의 부대는 거의 손실이 없는 편인 것에 비해, 시마즈 가문의 부대는 참담한 모습의 패잔병으로 7~80명에 불과했다. 이를 보고 타치바나의 가신들 중에는, 
 “지금이야말로 아버님의 원수를!” 
 하고 은밀히 무네시게에게 권하는 자가 있었다. 무네시게의 친아비 타카하시 죠우운[高橋紹運]은 시마즈와의 전투에서 성을 함락당해 자해했기 때문이다.[각주:4]
 무네시게는 그 가신에게 용사가 할 짓이 아니라며 혼을 내고는, 시마즈와 함께 일심하여 큐우슈우로 향했다고 한다.[각주:5]
 나중에 시마즈에서는 이때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무네시게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에게 야나가와 성[柳川城]가 공격 당했을 때 원군을 보냈다.[각주:6]

 야나가와로 귀향한 뒤 큐우슈우에 있던 동군 측의 무장들과 싸웠지만 승산이 없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개성하였다. 무네시게가 성을 떠날 날이 되자, 영내의 백성 150여명 정도가 무네시게의 앞길을 막고,
 “치쿠고[筑後] 네 고을(四郡)의 백성들 모두 무네시게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칠 각오이오니, 부디 성으로 돌아가시옵소서”
하고 탄원한 것이다.
 무네시게는 백성들의 마음씀씀이에 감사한 뒤, 싸우지 않고 항복하는 것은 영민을 위해 개성하는 것임을 알리자, 백성들은 모두 엉엉 울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무네시게는 일개 낭인의 신분으로 전락하지만 기적적으로 컴백을 이루어낸다. 유랑하던 무네시게를 이에야스[家康]가 고용한 것이다. 처음엔 오우슈우[奥州] 타나쿠라[棚倉] 1만석이었지만, 차츰 승진하여 결국 옛 영지였던 치쿠고[筑後] 야나가와[柳川] 10만석[각주:7]의 성주로 복귀한 것이다. 무네시게의 인덕이 이에야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 宗茂]
1568년생. 무네토라[宗虎, 統虎], 시게토라[鎮虎], 마사나리[正成] 등 여러 번 이름을 바꾸었고 ‘무네시게[宗茂]’라고 한 것은 말년에 와서이다. 1587년 치쿠고[筑後]의 네 개 군(四郡)에 13만 2천 석을 하사 받아 야나가와 성[柳川城]의 성주가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서군에 속하였기에, 전쟁 후 치쿠고 영내에서 나베시마 카츠시게[鍋島 勝茂][각주:8]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등과 싸우나 항복. 1620년 재차 야나가와 성의 성주가 된다. 1642년 11월 25일 죽었다. 75세.    

  1. 타치바나 도우세츠의 딸이며 당시 여성으로는 드물게 타치바나 가문[立花家]의 가독을 잇고 있던 긴치요[立花誾千代]와 결혼해서. [본문으로]
  2. 히데요시의 큐우슈우 정벌이 끝난 다음 해인 1588년 당시, 큐우슈우[九州]에서 '지쥬우[侍従]'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오오토모 요시무네[大友義統], 류우조우지 마사이에[竜造寺政家], 타치바네 무네시게[立花宗茂] 단 4명 뿐이었다. 요시히로는 사츠마[薩摩], 요시무네는 분고[豊後], 마사이에는 히젠[肥前]이라는 각각 한 지역[国]의 주인[国主]이었으나, 무네시게는 치쿠고[筑後]의 절반 정도만을 소유함에도 지쥬우[侍従]가 되었다. 이는 무가관위(武家官位)로 다이묘우들의 서열을 만들려 하던 히데요시의 의향에 비추어보았을 때 오오토모 가문[大友家]의 휘하에 있던 무네시게를 히데요시가 얼마나 맘에 들어 했는지 알 수 있으리라. [본문으로]
  3. 1600년 9월 22일 오오사카 앞바다인 니시노미야 앞바다[西宮沖]에서 만났다고 한다. [본문으로]
  4. 그러나 실제로는 세키가하라 전후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가장 신경을 쓰고 있던 시마즈 가문[島津家]의 후계자 문제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인 며느리 카메쥬[亀寿]의 오오사카 탈출을 도운 것이 먼저 오오사카에 와 있던 타치바나 무네시게였다고 한다. 타치바나는 임진-정유재란 때 조선에서 함께 싸운 요시히로를 존경하고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여담으로 둘이 함께 츄우고쿠[中国] 스오우[周防]에 도착하였을 때, 무네시게는 요시히로의 배로 건너가 인사를 하였는데 둘은 만나자 마자 눈물을 흘리며 서로의 생존을 기뻐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6. 사실 시마즈 가문이 원군을 보낸 것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清正]가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영지를 공격하였기에 코니시 가문이 같은 서군이었던 시마즈 가문에 원병 요청에 따른 것. 오히려 시마즈 가문과 카토우 키요마사의 군이 대치 중일 때 먼저 항복한 타치바나 무네시게가 시마즈 가문에 편지를 써서 화해를 권고하였다. [본문으로]
  7. 정확히는 10만 9200석이라 한다. 참고로 세키가하라 전쟁 이전에는 13만 2000석. [본문으로]
  8.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 直茂]의 아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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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무명 2012.07.20 2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멋진 사람입니다! 분명히 장수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겠지요. 조선에 있어서는 적이었겠지마는, 대단한 장수인 것 같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7.20 22: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히데요시 뿐만 아니라 토쿠가와 삼대[徳川三代-이에야스, 히데타다, 이에미츠]에게 중용받은 것을 보면 확실히 인격적으로 남을 매료시키는 매력이 있었던 듯 합니다.

  2.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7 07: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사람 일생도 드라마로 만들면 인기 좀 끌겠는데요

  3. 도키치로 2018.05.09 11: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죽 일화도 있었으면 좋았을텐데요ㅎㅎ
    "물에 말아먹고싶으면 그리 먹을테니 다신 이러지마라"속사정도 모르는 무네시게...

 1581년 9월.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의 에치고[越後] 카스가야마 성[春日山城]에서 모우리 히데히로[毛利 秀広]라는 무장이 카게카츠의 측근 나오에 노부츠나[直江 信綱][각주:1]와 야마자키 슈우센[山崎 秀仙]을 습격하여 살해하였다. 모우리 히데히로는 ‘오타테의 난[御館の乱]’에서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이 둘을 원흉이라 생각하여 앙심을 품고 있었다.[각주:2]  
 카게카츠는 켄신[謙信] 때부터 우에스기 가문[上杉家] 집사(執事)의 가문인 나오에 노부츠나[直江 信綱]가 후계자도 없이 살해당했기에 나오에 가문이 끊기는 것을 안타까워 하며, 자신의 시동[小姓] 히구치 요로쿠[樋口 与六]에게 나오에 가문을 잇게 하였다. 이 히구치 요로쿠가 후에 우에스기 가문을 지탱하고 있다고 칭송 받는 명신(名臣) 나오에 야마시로노카미 카네츠구[直江 山城守 兼続]이다. 카게카츠의 시대에 우에스기 가문의 군정(軍政), 민정(民政)은 모두 이 나오에 카네츠구가 담당하였다.

 카네츠구는 키가 크고 용모도 뛰어났으며 말을 하는데 막힘이 없어 변설(辯舌)에도 능했다고 한다. 더구나 문학적인 소양도 갖추고 있었다. 에도 시대[江戸時代] 초기의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藤原 惺窩]도, 문무 양쪽에 뛰어난 인물로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와 함께 거론하였다.

 우에스기 가문이 임진왜란에 종군하였을 때, 카네츠구는 점령한 조선 성에 들어가면 반드시 서고(書庫)부터 찾았다고 한다. 지금 요네자와 시[米沢市]에 있는 일본의 국보 송판(宋版)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는 그때의 전리품이다.[각주:3]
또한 요네자와[米沢]로 옮긴 뒤에도 일반적으로 ‘나오에 판 문선[直江版文選]’이라 칭해지는 『오신주문선(五臣註文選)』을 출판. 성 밑에 있는 젠린 사[禅林寺=현재는 호우센 사[法泉寺]]’에 학문소 ‘젠린 문고[禅林文庫]’를 열었다.

 카네츠구는 뛰어난 시인이기도 했다.

봄 기러기가 날 닮았나. 내가 기러기와 닮았나. 낙양성의 화려함을 뒤로하고 돌아가네
春雁我に似たり 我雁に似たり 洛陽城裏花に背いて帰る[각주:4]
 라는 한시가 유명하다.

 카네츠구는 이렇게 학문적인 인간이면서도 의표를 찌르는 일화도 있다.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아이즈를 영유하고 있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산호우지 쇼우조우[三法寺 勝蔵][각주:5]라는 무사가 자신의 하인을 죽였다. 죽일 정도의 죄는 아니었던 듯 하인의 친척들이 화를 내며 죽은 하인을 살려내라고 소동을 일으켰다. 이를 들은 카네츠구는 백은(白銀) 20매로 합의를 보도록 하였지만, 하인의 친척들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더욱 큰소리를 쳤기에 카네츠구가 아무리 조정을 하려고 노력해도 “죽은 사람을 살려 내라”고 할 뿐으로 결말이 나지 않았다. 카네츠구는 결국 마음을 정해 판결을 내렸다.
 “어쩔 수 없구나. 그렇다면 내가 염라대왕에게 편지를 써 줄 테니 너희가 저승에 가서 그 하인을 데려오도록”
 라며 소동을 일으킨 자들[각주:6]을 저승으로 보내버렸다. 그리고서는 염라대왕과 저승사자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맞이하는 자를 보냈으니 부디 죽은 자를 살려서 돌려 보내 주십시오”
 라는 푯말을 세워 사람들에게 알렸다고 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사실 일리 없고 원래 중국에 있었던 이야기라고 하지만 민정가로서 유명했던 카네츠구와 연관시킨 것이 흥미롭다.[각주:7]

 또한 이런 일화도 전해진다.
 
히데요시[秀吉]가 아직 살아있을 때의 일로, 후시미 성[伏見城]에 여러 다이묘우[大名]가 모였을 때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가 품속에서 커다란 황금판을 꺼내어 모두에게 자랑하였다. 커다란 황금판이 신기했는지 다이묘우들은 모두 조심스레 손에 들고는 구경하였다. 그 말석에 카네츠구도 있었다. 카네츠구에게도 차례가 오자 카네츠구는 부채를 펴서는 그 황금판을 받고 마치 배드민턴 라켓으로 셔틀콕을 튕기듯이 통통 튀기며 살펴보았다.
 마사무네는 카네츠구가 배신(陪臣=다이묘우의 가신)이기에 다른 다이묘우들과는 달리 나름 겸손하게 행동하는 줄 알고,
 “직접 손으로 잡고 보아도 되네”
 라는 말을 건넸다. 그러자 카네츠구는,
 “제 손은 켄신 공[謙信公] 때부터 선봉장의 지휘봉을 쥔 손이외다.[각주:8] 저런 천한 물건을 손에 쥐면 손이 더러워지니 이렇게 부채에 올려서 보는 것이올시다.”
 라고 말하고는 부채로 탁 쳐서는 황금판을 마사무네 앞으로 보냈다고 한다.[각주:9]
 이 역시 사실이 아니지만, 카네츠구의 호방함을 말해줌과 동시에, 카네츠구가 배신이면서 다이묘우들 사이에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도 꿀림이 없는 위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카네츠구가 섬긴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은 켄신[謙信]이라는 영걸이 있었으며, 그의 자식[각주:10] 카게카츠[景勝]는 오대로(五大老)[각주:11] 중 한 명이다. 그리고 그 카게카츠의 중신인 카네츠구는 히데요시에게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인물’이라 평가 받았고[각주:12] [각주:13], 그렇기에 카게카츠가 아이즈[会津] 120만 석을 영유했을 때 히데요시의 특명으로 데와[出羽] 요네자와[米沢] 30만 석을 하사 받았다.[각주:14] 당시 30만 석 이상 영유하는 다이묘우[大名]는 이에야스[家康] 이하 11명, 히데요시가 직접 키운 무장인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는 25만석,[각주:15]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는 20만 석[각주:16]이었다.
 이렇듯 카네츠구는 배신(陪臣)의 신분이면서도 보통의 다이묘우가 가지지 못한 기량과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당당하게 다른 다이묘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진면목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발휘된다.

 1598년 8월 히데요시의 죽음으로부터 1년 동안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천하에 대한 야심을 명확히 드러냈고,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나오에 카네츠구는 차례로 아이즈로 귀국하였다. 아이즈 120만 석으로 이봉되어 아직 1년 반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고, 그 동안 히데요시의 조문을 위해 상경하거나 하여 아이즈 경영이 늦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쿄우[京]-오오사카[大坂]에는 아이즈의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카게카츠가 영내에 도로나 다리의 정비, 성의 수축과 낭인을 새로이 등용하고 있다. 거기에 아이즈 와카마츠[会津若松]의 교외인 코우자시하라 평원[神指原]에 새로이 성을 쌓고, 본성인 와카마츠 성[若松城]의 해자를 깊게 파는 등의 행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곧바로 모반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의심했다.

 1600년 4월. 이에야스는 카게카츠에게 상경을 재촉하는 사자를 보냈다. 동시에 나오에 카네츠구에게는 카네츠구와 친분이 있던 쇼우코쿠 사[相国寺]의 승 사이쇼우 죠우타이[西笑 承兌]에게 명령하여 카게카츠의 상경을 권하라고 하는 편지를 쓰게 하였다.
 카네츠구는 죠우타이에게 답서를 썼다. 카게카츠에게는 이미 허락을 맡은 상태였다. 이것이 후세에 ‘나오에 장[直江状]’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에야스에 대한 통렬한 도전장이다. 내용은 죠우타이[承兌]가 의심하며 거론한 항목 하나하나씩 반론한 것이기에 굉장히 장문이지만 요점을 말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선 상경 재촉에 대해서는, 신영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고 그나마 여러 사정으로 영지 경영할 시간이 없었다. 더 늦기 전에 지금 착수해야만 한다는 뜻을 밝힌 후 ‘이번에 또 다시 상경하라면 영지를 다스릴 틈도 없지 않은가?’라고 하였으며, 서약서를 제출하라는 것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썼으며 또다시 같은 것을 쓰더라도 효과가 있을 것 같지 않다’고 튕겼고, 전쟁 준비를 하는 것 같다는 것에 대해서는, ‘쿄우토 근방의 무사들은 차제구(茶諸具)를 모으겠지만 우리들 시골뜨기 무사들은 창이나 철포, 활과 화살을 모은다. 이는 그 지역의 풍속이니 쓸데없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소”라 하였다. 이는 반쯤 약올리는 생각으로 답했던 것이리라. 계속해서 말했다. “도로나 다리를 만드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자라면 당연한 일. 만약 역심을 품었다면 다른 나라와의 국경에 해자를 파고 길을 끊을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굉장히 도발적인 어구를 이어갔다.
 “역심이 없으면 상경하라니 이건 마치 아이들의 말투외다. 무엇보다 역심을 품었던 자가 실패해서 도망쳐 상경해서는 새로이 땅을 하사 받고 권세가(여기서는 이에야스를 지칭)와 인척관계를 맺으며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이러한 현 세태는 카게카츠의 마음과 맞지 않는다”고 한 뒤,
 “나이후 님[内府様=이에야스], 츄우나곤 님[中納言様=히데타다]께서 아이즈를 공격하러 오신다고 하는데 모든 것은 그때 해결합시다”고 끝을 맺었던 것이다.

 5월3일. 이 서장은 오오사카의 이에야스에게 전해졌는데, 이를 본 이에야스는, 
 “63살 내 평생 지금까지 이렇게 무례한 서장은 본 적이 없다”
 며 분노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정벌[上杉征伐]의 군을 일으켰는데, 이후의 경과는 지금까지 몇 번 언급했기에 생략하지만, 이에야스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거병 소식을 듣고 오야마의 진[小山の陣]에서 병을 되돌리자, 카네츠구는 언젠가 다시 이에야스와 싸우게 될 것이라며 그 전에 배후를 든든히 하기 위해 모가미 령[最上領]을 침공하지만 그러던 중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서군(西軍)의 패전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나오에 가네쓰구[直江 兼続]
1560년생.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의 고굉지신으로 히데요시[秀吉]에게도 인정받았다. 세키가하라 전쟁 후 우에스기 카게카츠는 카네츠구의 영지였던 데와[出羽] 요네자와[米沢]로 삭감되어 이봉되는데, 카네츠구는 계속해서 성과 성 밑 마을 조영을 담당했다. 1619년 12월 19일 에도[江戸]에서 죽었다. 60세.

  1. 나중에 카네츠구의 부인이 되는 오센노카타[お船の方]의 남편이었다. 나오에 가문에는 데릴사위로 들어와 나오에 카게츠나[直江 景綱]의 딸 오센노카타와 결혼하여 남자자식이 없었던 나오에 가문을 이었다. [본문으로]
  2. 모우리 히데히로는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사망 후 후계자 다툼인 오타테의 난[御館の乱]에서 처음엔 카게카츠의 반대편인 카게토라[景虎] 측이었으나 그를 배신하고 카게카츠 측으로 넘어와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동맹을 맺을 때는 카츠요리에게 사자로 파견되는 등의 활약을 하였다. 야마자키 슈우센은 유학(儒學)을 숭상하여 배신자인 히데히로에게 약속된 은상을 못 받게 하였다. 이에 분노한 히데히로는 야마자키 슈우센과 말다툼하다 살해하였고 그 옆에서 말리던 나오에 노부츠나도 함께 살해하였다. [본문으로]
  3. 송판(宋版)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는 원래 일본에 있었던 것으로, 소유주였던 일본의 승려 난카 겐코우[南化 玄興]에게 물려받은 것이고, 조선에서 가져간 것은 『송신언행록(宋臣言行錄)』 65권 20책,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90권, 『신편고금사문유취(新編古今事文類聚)』 221권, 『부석음주례주소(附釈音周礼註疏)』 42권, 『중용장구대전(中庸章句大全)』 4권, 『산곡시집(山谷詩集)』, 『오조명신언행록 전집(五朝名臣言行録前集)』 등이라 한다. [본문으로]
  4. 언제 지어졌는지는 모르나, 일반적으로 토요토미 정권의 수도였던 후시미[伏見]를 뒤로하고 아이즈[会津]로 향할 때 지어진 것이라 한다. 낙양성과 후시미를 엮은 것. [본문으로]
  5. 쇼우조우는 ‘카츠조우’라고도 읽는다 [본문으로]
  6. 죽은 하인의 형, 큰아비, 조카. [본문으로]
  7. 이 일화는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에 간행된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 권15[巻之十五] 나오에 카네츠구[直江兼続] 편에 실린 것으로, 원문에 따르면 푯말에는 케이쵸우 2년(慶長二年=1597년) 2월 7일이라고 쓰여있다고 한다. 즉 본문대로 카게카츠[景勝]가 아이즈[会津]를 영유하던 때가 아닌 아직 에치고[越後]에 머물 때이다. 카게카츠가 아이즈로 이봉되는 것은 1598년의 일 [본문으로]
  8. 에피소드 같은 일화 상이 아닌 실제로 카네츠구와 켄신이 만났을 가능성은 낮다. 더구나 켄신이 죽은 1578년 당시 카네츠구는 아직 19살. 지휘봉을 쥐기에는 너무도 어리 나이이다. [본문으로]
  9. 역시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에 나오는 일화. [본문으로]
  10. 양자. 켄신 누나의 아들. [본문으로]
  1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12. 메이지 시대에 간행 된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 에 따르면, 히데요시는 배신(陪臣)으로 나오에 카네츠구,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 호리 나오마사[堀直政]는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자들이라며 절찬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13. 한편 에도시대[江戸時代] 중기에 만들어진 사가 나베시마번[佐賀鍋島藩]의 번사(藩士)가 간행한 하가쿠레[葉隠]의 10권 145편에서 히데요시는 천하를 취하기 위해서는 대기(大氣), 용기(勇氣), 지혜(知慧)를 겸비해야 하는데, 현재 다이묘우[大名] 중에서는 그런 사람이 없지만, 배신(陪臣) 중에는 삼요소 중 두 개씩 가진 자가 세 명이 있다. 다만 나오에 카네츠구는 대기, 용기는 있지만 지혜가 부족하고,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대기와 지혜는 있지만 용기가 부족,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는 용기와 지혜가 있지만 대기가 없다고 하였다 한다. [본문으로]
  14.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를 에치고에서 아이즈 120만석으로 이봉할 때, 히데요시가 카네츠구에게 30만석을 주라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카네츠구가 카게카츠에게 하사 받은 것은 6만석(위키에 따르면 카네츠구 휘하 무장[与力]까지 포함하면 30만석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15. 카토우 키요마사는 히고[肥後]의 절반. 사실 카게카츠가 아이즈로 이봉한 1598년 당시에는 19만 5천 석. [본문으로]
  16.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오와리[尾張] 키요스[清洲]를 중심으로. 24만석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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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3.22 14: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 루리루리 2012.05.02 10: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최근 아이카와씨의 나오에 카네츠구의 책을 읽었는데,,
    말년에 카게가츠에게 버려졌다는 설이 있네요,,,
    드라마에서의 이미지로 최고의 군신관계라는 이미지가 강해서
    설마~라는 생각이 들지만요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5.06 00: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 늦어 죄송합니다. 요즘 정신이 없다 보니 글을 써 주신 것도 모르고 있었네요. 정말 죄송.

      아이카와라는 분의 견해는 흥미롭군요.
      괜찮으시다면 간단하게나마 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개인적으로는 '정말??'이라는 느낌이군요.
      이후에도 카네츠구의 파벌인 요이타구미与板組와 그의 부인 오센お船가 내정과 부인들 사교에서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그 수장인 카네츠구를 버릴 수 있을 거라고는 우선 생각하기 힘들군요.

      거기에 카네츠구는 죽자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까지 돈을 부쳐줄 정도로 에도 막부에도 파이프가 있는 사람인데 카게카츠가 무시할 순 없다고 역시 생각합니다.

  3. 루리루리 2012.05.09 12: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센과 카네츠구의 대우는 요네자와번으로 옮겨지고 많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센은 카네츠구의 사후 나오에가가 단절된 후에도 3000석의 화장료?(아마도 은거료라고 생각됩니다)를 받았다고 합니다.
    사다카츠로 바뀐후에도 이 화장료는 유지가 되어서
    센이 카게카츠의 측실 문제와 후사인 사다카츠 결정등 우에스기 집안사 문제를 진두지휘하였다는게 아닐까라는 가설도 있군요,,
    아마도 키쿠히메가 죽은뒤 센이 집안의 큰어른과 같은 존재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입니다.
    반면 카네츠구는 나오에가를 상속등 단시간의 출세와
    미츠나리와 같은 문공파와 무공파의 갈등이 우에스기 집안에도 잠재적으로 존재하다가
    요네자와 이봉후 그간의 갈등이 폭발하지 않았는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간에 스스로 나오에가를 단절시켰다는 것도 후대에 미화된 이야기가 아닐까라는 추측입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5.10 10: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장문의 댓글 감사합니다.

      말씀해 주신 아이카와라는 분의 글 만으로는 카네츠구가 백안시되었다고 말해주는 아무 것도 없네요.

      카네츠구는 죽기 5년전에 행해진 오오사카 농성전에서도 우에스기 가문의 총참모 적인 위치로 우에스기 군을 지휘했습니다. 물론 이때는 요네자와로 옮긴지도 꽤 된 상태였구요.

      후대에 미화된 이야기가 아닐까하는 추측도 그에 상응..아니 정설화 된 것을 뒤집기 위해서 지금까지 알려진 것 보다 2~3배나 많은 확고한 증거가 필요하니까요.

  4. 루리루리 2012.05.09 13: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카네츠구가 문헌상으로 등장하는 것도 정확히는 오타테의 난 이후이여서
    그전의 기록은 대부분 추측성 소설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마도 죠죠 마사시게와 권력 다툼후 승리한 카네츠구가 그간의 대내외적 사건을 전부 해결하였다는 가정아래 그의 공으로 돌린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다른쪽으로 흐르지만..
    책에서는 카게카츠도 역사상의 승리자여서 당연스럽게 우에스기 카게카츠라고 부르지만
    켄신은 카케토라를 관동관령으로 나가오계의 수장으로는 카게카츠를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그예로 켄신 사후부터 카게카츠가 우에스기성을 사용합니다..
    호죠,도쿠가와도 카게카츠를 나가오라고 부르구요,,
    히데요시와의 동맹후 자연스럽게 우에스기성을 인정받은 것 같습니다.
    카스가야마성의 혼마루를 사용하는 것도 카게토라구요 카게카츠는 외곽에 거주하였다고 합니다.
    제가 본 책이 100% 옳은건 아니지만 다른 입장으로 인물들을 바라보는 것도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5.10 10: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카네츠구가 오타테의 난에서 거의 활약이 없었던 것은 압니다만, 말씀해 주신 것들은 에도시대에 간행된 군기물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이군요.

      예를들어 카게토라를 우에스기 가문과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 카게카츠를 나가오 가문과 에치고의 슈고守護...
      오타테의 난이 일어나기 전에 켄신이나 주변 다이묘우의 서장 등 1차사료에서는 카게카츠만을 후계자로 여겼지, 카게토라를 후계자로 생각한 듯한 증거는 전무하다고 합니다.

      또한 호우죠우北条가 카게카츠를 우에스기로 칭하지 않은 것은 우에스기 가문=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라는 정치적 이유였다고 합니다. 호우죠우의 주영향력이 칸토우인데 다른 이를 칸토우칸레이라 부를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여담으로 엣소우 동맹越相同盟때 호우죠우 가문이 켄신을 칸토우칸레이로 인정한다는 구절이 들어갈 정도로 양 측에서는 예민한 문제엿으니까요.(이에야스도 그러했다면 이도 역시 오다 가문 휘하였던 토쿠가와 가문이, 오다와 싸우던 카게카츠를 낮추어 보려는 역시 정치적 의도가 있었고요. 이는 켄신과 대립한 가문이 자주 쓰던 행위였습니다. 타케다 가문 역시 그랬고요.).

      카스가야마 성에서 카게토라와 카게카츠의 사는 곳은 착각하신 듯. 카게카츠는 御中城様라 불릴 정도로 성의 중심부에 있었고, 카게토라는 정확하진 않지만 오히려 성 밖에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오타테의 난과 그것을 둘러싼 배경에 관해서는 작년(2011년)에 나온 이마후쿠 타다시今福匡의 「우에스기 카게토라-켄신의 후계자 자리를 노린 반주류파의 맹주上杉景虎―謙信後継を狙った反主流派の盟主」를 추천드립니다. 당시 1차사료를 중심으로 기술된 굉장히 좋은 책이더군요.

      다시 한번 장문의 댓글 감사드립니다.

  5. 소설이 열리는 나무 2012.07.02 14: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게까지 이에야스를 분노케 했는데도 어떻게 감봉정도로 끝날수 있는지 이해가 안가네요... 했던일만 살펴보면 세키가하라 이후 처형당한 이시다,안코쿠지,고니시에 전혀 뒤지지않아 보이는데?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7.20 21: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 굉장히 늦은 점 사과드립니다.

      우선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이 굉장한 명문이라는 점. - 전통을 중시하는 일본인들의 특성 상 명문가란 굉장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에야스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의 거병 소식을 들은 뒤 세키가하라로 향한 이에야스의 뒤따마 내지는 빈집털기를 하지 않은 점.

      또하나 들자면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종전 직후에는 자기 맘에 안 든다고 한 가문을 뽀갤 수 있을 정도의 위세는 아직 갖추지 있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신슈우 우에다 성[信州上田城]은 검은 판자벽[黒板壁]의 망루와 함께 사나다 가문[真田家]의 성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성의 역사를 보면 사나다 가문의 재성 기간은 마사유키[昌幸]와 그의 장남 노부유키[信之]를 합쳐도 40년에 불과하며[각주:1], 그 뒤를 이어 들어온 센고쿠 가문[仙石家][각주:2]은 85년이며[각주:3], 그 다음을 이은 마츠다이라 가문[松平家][각주:4]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까지 160년이라는 오랜 기간 이 성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덧붙여 이야기하자면 현재 남아있는 우에다 성[上田城]의 망루는 센고쿠 가문이 있을 때 세워진 것이다.

 이와 같이 우에다 성[上田城]과 사나다 가문[真田家]의 연결성은 역사적 시간상으로 보면 가장 짧지만, 사람들의 역사적 지식상에는 센고쿠 가문이나 마츠다이라 가문의 이름이 우에다 성과 연결되는 일은 굉장히 드물다. 즉 불운하게도 센고쿠 가문과 마츠다이라 가문은 사나다의 이름에 가려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 정도로 사나다와 우에다 성의 이름을 높인 사실은 어떤 것인가?

 사나다라는 명성만으로 보자면, 그것은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에서 「사나다 일본 제일의 무사[真田日本一の兵]」라며 칭송 받았던 유키무라[幸村]가 그 중심일 것이다. 그러나 유키무라의 명성은 우에다 성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으며, 유키무라의 부친이며 축성자인 마사유키가 이 성의 주역이다. 사실 사나다의 위명(威名)이라는 것도 마사유키가 쌓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후년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이 목전으로 다가왔을 때,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마사유키와 함께 서군 측에 섰기에, 전쟁이 끝난 후 키이[紀伊]의 쿠도야마[九度山]로 유배 당했던 사나다 유키무라가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입성하였는데, 그 소식이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에게 전해졌다. 이때 이에야스는 “아비냐 아들이냐?”라며 두 번이나 거듭해서 물었으며, 더구나 그때 문을 손으로 잡고 있었는데 그 문이 덜컹덜컹 소리를 낼 정도로 떨었다. 입성한 것이 유키무라라는 것을 알고 그제서야 떨림이 멈추었다고 한다. 이 즈음 마사유키는 이미 죽어 이 세상에는 없었지만, 이에야스는 ‘사나다’라는 이름만 듣고서도 혼란에 빠져 몸을 떨 정도였던 것 같다.

 상기의 일화가 사실인지 거짓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이에야스가 이리도 사나다 마사유키의 이름에 두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를 찾자면 이에야스는 두 번이나 우에다 성의 마사유키를 공격하여 두 번 다 격퇴 당했다는 사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사실이 이에야스에게는 사나다 마사유키와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는 패배자 근성에 가까운 심리상태로까지 발전하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사나다 가문은 마사유키의 부친 유키타카[幸隆] 때부터 옆 나라 카이[甲斐]의 주인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을 섬겼다. 마사유키는 유키타카의 셋째 아들로 코우후[甲府]에서 태어나, 소년일 즈음부터 신겐의 측근 시동[小姓]이 되었으며, 카이의 명문 무토우 가문[武藤家]을 이어, 무토우 키헤에[武藤 喜兵衛]라는 이름으로 신겐의 곁에서 활약하였다. 신겐은 그런 마사유키를,
 “무토우 키헤에와 소네 타쿠미[曽根 内匠][각주:5]는 내 양 눈과 같다”
 라 평했다. 이런 마사유키가 신겐의 외교, 군략(軍略), 전법을 배우지 않을 턱이 없다. 또한 부친 유키타카는 신겐 휘하의 모장(謨將)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런 부친의 지모도 마사유키에게 흐르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1582년. 주가(主家)인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가 오다 가문[織田家]에게 공격 당한 끝에 도망치다 텐모쿠 산[天目山]에서 죽자, 마사유키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따랐으며,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횡사하자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에 속하였고 이어서 토쿠가와[徳川] 그리고 우에스기[上杉] 식으로 주가(主家)를 바꾸어, 어떻게든 하나의 세력으로 열강들 사이에 존재감을 발휘해 갔는데, 이 수완은 주군 신겐, 부친 유키타카에게 물려받은 재능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히데요시[秀吉]도 이러한 마사유키를 ‘종잡을 수가 없어 얕잡아 볼 수 없는 자[表裏比興の者]’라고 평할 정도였다.

 어쨌든 이야기를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사유키와의 싸움으로 되돌리자.
 1584년. 마사유키는 이 즈음 이에야스에 속해있어, 이에야스는 적대관계였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 손을 잡고 있던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에 대항하기 위해 우에다 성[上田城]을 쌓았지만, 그 다음 해 이에야스가 호우죠우 우지마사[北条 氏政]와 화의(和議)를 맺으면서 사나다의 영지 코우즈케[上野] 누마타 지방[沼田地方]을 호우죠우 가문에 넘긴다는 방침을 정하고는 마사유키에게 통고하였다. 이에 대하여 마사유키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 누마타는 이에야스에게 받은 것이 아니오. 우리들의 힘으로 손에 넣은 것이외다.”
 며 거절하였다. 거기에 지금까지 적대하고 있던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손을 잡은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런 마사유키의 반항에 격노하며 토리이 모토타다[鳥居 元忠], 오오쿠보 타다요[大久保 忠世] 등에게 8000의 병력[각주:6] 을 거느리게 하여 우에다 성을 공격시켰다.
 대군을 자랑하는 토쿠가와 군[徳川軍]은 단번에 성 밑 마을을 돌파하여 성벽에 달라붙었다. 그러나 이것이 마사유키의 책략이며 바라던 바였던 것이다. 이때까지 유유히 바둑을 두고 있던 마사유키는 적을 충분히 끌어들였다고 판단하자 곧바로 명령을 내려, 성안에서 철포를 일제히 발사하게 하였다.
 토쿠가와 군은 대군인 만큼 한번 혼란에 빠지자 헤어나오질 못했다. 성 밑 마을에서 갈팡질팡 도망치는 토쿠가와 군을 목표로 이번엔 복병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공격하였다. 그야말로 토쿠가와 군은 총붕괴 상태가 되었다.
 토쿠가와 군은 결국 3개월에 걸쳐 우에다 성과 대치했지만, 토쿠가와 가문의 중신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 数正]가 히데요시에게로 망명하는 대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결국 다시 공격하지 못하고 병사를 물렸다.
 
이로 인해 사나다 마사유키의 무명(武名)은 천하로 퍼졌다.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에서 히데요시 조차 이기지 못했던 토쿠가와 군세를 작은 성 하나에 의지하여 패퇴시켰기 때문이다.

 사나다 마사유키가 다음으로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싸우게 되는 것은 이로부터 15년이 지난 1600년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였다. 잘 알려졌듯이 사나다 가문은 마사유키와 그의 둘째 아들 유키무라[幸村]가 서군(西軍)에 속하였고, 장남 노부유키[信之]가 동군(東軍)에 속하였다. 우에스기 정벌[上杉征伐][각주:7] 도중 노부유키와 헤어져 시모츠케[下野]에서 거성 우에다 성으로 돌아 온 마사유키-유키무라 부자는 여기서 나카센도우[中山道]를 거슬러 서상(西上)하려는 토쿠가와 군의 발을 묶고자 하였다.

 9월.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가 거느리는 3만8천이 코모로 성[小諸城]에 착진. 곧바로 우에다 성을 개성하라고 명령하였다. 마사유키는 순순히 알았다고 대답하였다. 머리까지 밀고는 공순(恭順)의 뜻을 나타냈다. 하지만 증거가 되는 서약서를 제출하는데 시간을 끌었다. 히데타다는 초조해하며 재촉하였다. 그러자 마사유키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사실은 농성 준비를 위해서 답변이 늦어졌습니다. 이제야 군량 반입도 끝나, 무기나 장비류도 제대로 갖추어졌으니 한번 싸워보자 합니다”
 히데타다는 분노하였다. 지금 여기서 단번에 물리쳐주마 - 하고 우에다 성을 공격하였다. 토쿠가와 군은 15년 전과 똑같은 전법을 취하여 그때와 똑같이 총격을 받고 복병에 당하는 등 전투를 주도하지 못하고 끌려 다니기만 했다. 히데타다는 이 우에다 공성에서 몇 일이나 소비하였지만 세키가하라로 서둘러야 했기에, 끝내 이루는 일 없이 샛길을 이용하여 전쟁터로 향했지만 결국 세키가하라 결전에는 시간을 맞추지 못하고 이에야스의 역정을 사게 된다.

 이렇게 사나다 마사유키의 이름은 두 번이나 토쿠가와 군을 쳐부순 사나이로 만천하에 그 무명(武名)을 떨치게 되지만, 불운하게도 세키가하라에서의 결전에서 서군은 패하였다. 
 이렇게 되면 다른 서군의 제장들처럼 참수죄에 처해질 터였지만, 동군에 속해있던 장남 노부유키가 필사적으로 조명탄원하였기에, 죽음만은 면하여 유키무라와 함께 코우야 산[高野山]으로 유배 당하게 되었다.
 
유배에 앞서 마사유키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나이후[内府=이에야스][각주:8]야말로 이러한 처지로 만들고 싶었는데…”
 하면서 눈물을 떨구었다고 한다.

 유배지의 마사유키에게는 노부유키를 시작으로 사나다 가문의 사람들은 일족이건 가신이건 예를 다하여, 편지도 끊임없이 주고 받았고 금전 등도 계속 보냈다. 그러나 마사유키는 유배당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16명의 가신이 따라붙었으며 다이묘우[大名]였을 때의 격식도 계속해서 유지하였다. 그랬던 만큼 드는 돈도 많았을 것이다. 마사유키는 자주 노부유키 등에게 돈을 보내라고 요청하였다.
 또한 언젠가 사면 받을 날이 올 거라 기대하여, 이에야스의 측근인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에게 활발히 청탁하거나 하였다. 이런 것을 보면 아무리 마사유키라도 늙어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1611년, 64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
1545년생. 두 명의 형 – 노부츠나[信綱], 마사테루[昌輝]가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전사하였기에 사나다 가문[真田家]의 당주가 된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9]에 종군하였을 때 히데요시[秀吉]가 여러 무장들 앞에서 마사유키에게 전략을 물어보는 등 영예(榮譽)와 면목을 세우게 된다. 장남 노부유키[信之]가 이에야스[家康]의 중신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둘째 유키무라[幸村]가 히데요시의 봉행(奉行)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의 딸과 결혼하여[각주:10] 토쿠가와 - 토요토미 양측과 연을 맺었다. 또한 마사유키의 부인은 우타 요리타다[宇田 頼忠]의 딸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부인과는 자매지간이었다. 

  1. 우에다 성 축성한 1583년~사나다 가문이 마츠시로[松代]로 이봉한 1622년까지. [본문으로]
  2. 만화 센고쿠로 유명한 센고쿠 히데히사[仙石 秀久]의 아들 센고쿠 타다마사[仙石 忠政]가 입봉. [본문으로]
  3. 1622년~ 1706년. [본문으로]
  4. 열여덟 마츠다이라[十八松平] 중 후지이 마츠다이라 가문[藤井松平家]. [본문으로]
  5. 타케다 24장[武田二十四将] 중 한명인 소네 마사타다[曽根 昌世]. [본문으로]
  6. 토쿠가와 막부가 대패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병력을 적게 기록하였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7.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여, 이에야스는 카게카츠에게 상경하라고 명령하나 카게카츠의 가로(家老)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의 편지에 빡쳐 정벌하러 간다. [본문으로]
  8. 당시 이에야스의 관직 나이다이진[内大臣]을 중국풍으로 부른 것. [본문으로]
  9.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10. 사위 유키무라와 장인 요시츠구의 나이차이가 최소 2 ~ 최대 11살 차이라 아마 조카나 친족의 여성을 양녀로 삼은 뒤 시집 보낸 듯,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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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2.02.23 09: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나다 가문의 인물들은 평하기가 참 어려운 것이 수많은 창작물에 의한 사랑과 관심을 받는 센고쿠시대의 아이돌급 인물들이기 때문이겠죠.

    신슈가 공략하기 어려운 지역이라는 생각은 자주 듭니다. 신겐도 무참히 박살난 것이 여러번이요, 도쿠가와도 신슈 전역을 통치한 적은 없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런데 이에야스는 본인이 마사유키에게 직접 패한 적은 없었는데 왜 마사유키에게 그토록 두려움을 느꼈던걸까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2.23 11: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에도 막부의 창시자를 부자이대에 걸쳐 괴롭혔다는 것이 인기의 비결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나노信濃는 아무래도 남북으로 길며 거기에 산악지방이다 보니 하나의 쿠니国치고는 다양한 세력들이 작게나마 많이 발전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생각합니다.
      거기에 시나노라는 지역이 무로마치 시대 때 좀 특수한 지역이었습니다. 쿄우토 무로마치 막부에서 보기에 라이벌인 칸토우 쿠보우関東公方의 영향권과 맞다은 곳이다 보니 다른 곳과는 다른 특혜나 명예가 좀 주어졌던 곳이더군요. 아무래도 그러다보니 다른 곳에서 시나노를 차지하는데 더 힘이 든 것 같습니다.

      상기의 일화 등은 에도시대 사나다 가문의 가신인 타케노우치 노리사다[竹内 軌定]가 지은 진무내전(真武内伝)이란 책에 실린 것으로,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조금 의문시됩지요. 이에야스가 실제로 두려움을 느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2.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7 07: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설 대전란에서 도쿠가와 잡는 장면 정말 재밌게봤는데 6편 이후로 번역이 안되니 너무 아쉽습니다.

 천하의 분수령이 대전투의 승패를 배반이라는 행위로 결정짓게 한 인물 – 때문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는 ‘사상 최대의 배반자’라는 오명을 역사에 남기고 있다.

 히데아키는 히데요시[秀吉]의 부인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의 오빠 키노시타 이에사다[木下 家定]의 아들[각주:1]로 태어났지만, 히데요시 부부에게 자식이 없었기에 양자가 되어 키타노만도코로의 손에 키워졌다. 이 즈음에는 히데토시[秀俊]라는 이름을 썼다.

 1588년. 히데요시는 쥬라쿠테이[聚楽第]에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 天皇]의 행행(行幸)을 주청하여 성사시켰는데, 7살의 히데아키도 이 영광스런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이 즈음 히데아키는 히데요시의 후계자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각주:2] 하지만 다음 해인 1589년에 히데요시의 애첩 요도도노[淀殿]가 남자아이를 낳았다. 이때부터 히데아키의 운명은 어긋나기 시작한다.

 히데요시는 이 첫 아들에게 츠루마츠[鶴松]라는 이름이 지어주었다. 하지만 이 아이는 불과 3년을 살았을 뿐이었다. 히데요시는 츠루마츠 사망이라는 충격을 잊으려는 듯 조선 침략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히데아키도 또한 히데요시의 총애를 되찾은 듯이 보였다. 그러나 조선 침략이 한창이던 1593년, 요도도노는 또다시 남자아이(히데요리[秀頼])를 낳았기에 히데요시의 히데요리에 대한 눈먼 사랑이 시작되어, 우선 관백(関白)인 히데츠구[秀次]를 실각시켰다. 히데아키의 신분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는 히데요시의 의중을 헤아려, 히데아키를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양자로 들여보내는데 성공하였다.[각주:3]

 정유재란 때 히데아키는 일군의 대장으로 출진하였다.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의 농성으로 유명한 울산성(蔚山城)에 대규모 구원군을 이끌고 갔을 때의 일이었다. 도망치는 명나라 군사를 쫓아 총대장인 히데아키가 직접 창을 꼬나 쥐고 휘두르며 짐승을 쫓는 사냥꾼처럼 학살하고 다녔다고 한다. 대장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행위였다.

 다음 해인 1598년. 돌연 히데아키는 귀국 명령을 받았다. 히데아키는 득의만만한 얼굴로 히데요시에게 출두하였다. 필시 조선에서의 활약에 대한 칭찬해 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히데아키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것은 의외로 조선에서의 경거망동을 질타하는 히데요시의 노호였다. 히데요시는 “네 녀석과 같은 놈을 대장으로 삼다니 내 눈이 삐었구나”라고 까지 말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북부 큐우슈우[九州] 33만 6천 석을 삭감하여, 에치젠[越前] 15만석의 이봉이라는 가혹한 결정까지 내렸다.
 히데아키는 이 사태가 모두 군감(軍監)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참언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라고 골똘히 생각한 끝에 결론 내렸다. 하지만 지금은 뾰족한 수도 없었다.

 이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준 것이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였다. 온화한 얼굴로 히데아키의 불평을 들어주고서는, 히데요시에게도 가 히데요시의 분노가 풀리도록 노력하였다.

 1598년 8월. 히데요시가 죽었다. 이에야스의 조처로 감봉에 따른 이봉을 피한 히데아키의 처우도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해 흐지부지해졌다. 히데요시 사후 천하를 쥐고자 계획하고 있던 이에야스는 이러한 히데아키에게 은혜를 입힌 형태가 되었다.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히데아키가 배반한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의 결전 당일, 마츠오 산[松尾山]에 진을 치고 있던 히데아키는 시간이 흘러도 어느 편인지 확실히 나타내지를 않고 지켜만 보았다. 애간장이 탄 이에야스는 철포대에게 명령하여 히데아키의 배반을 재촉하는 철포를 쏘게 하였다. 이때서야 비로서 히데아키는 병사들을 움직여 서군의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부대를 공격한 것이다. 알려진 대로 이것이 세키가하라의 승패를 갈랐다.[각주:4]

세키가하라 포진도. 왼쪽 중간 마츠오 산[松尾山]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부대가 진을 치고 있다.

 싸움이 끝난 후 히데아키는 세키가하라 때 서군을 배반한 공적으로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에 51만석을 하사 받아 오카야마 성[岡山城]의 성주가 되었지만, 2년 뒤인 1602년에 21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계속 배반자라는 비난을 받아 정신이 병들었다던가,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망령에 괴롭힘을 받아 미쳤다는 등 여러 가지가 전해진다.

츠키오카 요시토시[月岡芳年]의 괴제백선상(魁題百撰相)에 나오는 금오중납언(金吾中納言) 히데아키[秀秋]에게 원령(怨霊)이 되어 나타난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1582년 오우미[近江] 나가하마 성[長浜城]의 성 밑 마을에서 태어났다. 1584년 히데요시[秀吉]의 양자가 된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5]에 출진. 이때 미노[美濃] 오오가키 성[大垣城]의 성주로 관직은 쇼우쇼우[少将]였다. 이어서 우코노에츄우죠우[右近衛中将], 산기[参議]
[각주:6] 겸 곤츄우나곤[権中納言]으로 이례적인 스피드로 승직하였다. 1594년에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양자가 되었다.

  1. 이에사다의 다섯 번째 아들. [본문으로]
  2. 이때 다른 거대 다이묘우[大大名]는 텐노우[天皇] 나아가서는 텐노우의 대리인인 히데요시에게 대들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였는데, 다이묘우들이 서약한 대상이 히데아키였다. [본문으로]
  3. 히데츠구의 실각이 나중(1595년)이며, 히데아키가 코바야카와 가문에 양자로 간 것은 1594년의 일. [본문으로]
  4. 지금까지는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 때 히데아키가 서군이었다는 시각이었으나(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기 전 히데아키가 동군이 지키고 있던 후시미 성[伏見城] 공격군의 총대장이었던 것도 있어), 근래에 들어서는 동군으로 참전했다는 시각도 있다. 정황증거로 마츠오 산에 진을 치고 있던 서군 이토우 모리마사[伊藤 盛正]를 쫓아내고 차지한 점, 이후 행해진 서군 군의(軍議)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점, 말단인 시마즈의 사츠마 병사들 역시 히데아키를 동군으로 보고 있었다는 점 등이 있다. 그런 동군으로 참가한 히데아키가 참전을 주저했던 것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내건 당근인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가 성인이 될 때까지 관백(関白)직과 킨키[近畿] 근방에 2개국 가증에 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5.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6. 1590~92년 사이의 관직이라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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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yuphy IV 2011.11.08 22: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니 금오중납언에서는 시바료타로선생이 따로 언급하진 않았었던듯 하지만 그래도 82년 출생설이 정설인가보네요. 82년생이라면 정유재란때 활동했을시 나이가 너무..라고 생각해보니 아사노가 도련님은 오다와라전역때 15살이었던걸 생각하면 꼭 그런것도 아닌것같고(...)

    거 그렇다곤 쳐도 21세에 사망이라 이래저래 설이 많긴 많나봅니다. 딱히 지병이 있었던것도 아니고 괴설이 나돌만도 하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1.08 23: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뭐 당시는 15살이면 일반적으로 데뷔전[初陣] 치를 나이인 것 같더군요.

      매사냥에 갔다 돌아 온 뒤 '기분이 안 좋아'라는 말 한 마디 뒤 자빠져 계속 자다가 한번 깨곤 사망... 당시도 이해하기 힘든 죽음 방식이었는지 농부에게 불알 채여서 죽었다는 소리까지 나왔나 봅니다.

  2.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11.12 09: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고밖엔 표현할 말이 없는 것 같습니다. 도요토미가의 황태자였으나 결국엔 도요토미가의 멸망을 이끄는 단초를 마련해준 인물이니 말입니다. 다만, 그 당시에는 이에야스 역시 히데요리를 위한다는 기치를 내걸었을테니 히데아키를 두고 도요토미를 배신했다는 비난은 안 주어졌을테니 그것 역시 극적인 요소군요.

    어쩌면 그의 급작스러운 죽음은 가타쿠라에 대한 상사병이 아닐런ㅈ..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1.12 17: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확실히 말씀대로 드라마틱한 삶을 산 것 같습니다. 히데아키는.

      카타쿠라라.. ^^
      하지만 카타쿠라의 몸도 마음도 이미 마사무네의 것... 애송이 히데아키가 오우슈우의 독안룡에게 情人을 빼앗기는 여러모로 힘들겠군요. 으익~ 상상만해도.. ㅋㅋ

    •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11.17 09: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잉? 마사무네와 시게나가가 그렇고 그런 사이였나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1.17 15: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오사카 공성전 때 시게나가에게 선봉을 명하면서 "너 말고 누구한테 시키겠니~♡"라면서 볼에 뽀뽀했다고 하더군요.

      카타쿠라 가문의 기록[片倉代々記]에 마사무네와 시게나가는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고 하네요.

  3. 2011.11.26 17: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가 히데요시의 본진을 방문하는 그림.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 때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에 대한 평판은 굉장히 나빴다. ‘우인(愚人)’[각주:1], ‘영승(佞僧)’[각주:2], ‘요승(妖僧)’[각주:3] 등 최저의 표현으로 기록되어 비난 받았다.
 이는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 때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를 서군의 총수로 내세워 쓰라린 패전의 맛보게 만들었고, 그에 따라 120만석이었던 영지를 단번에 37만석으로 떨어뜨린 장본인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주로 모우리 가문[毛利家]가 퍼뜨린 악담인 듯 하다.

 우선 그에 대해선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안코쿠지 에케이라고 하면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횡사(橫死)와 히데요시[秀吉]의 천하제패를 예언한 통찰력이나 안목으로 유명하다.
 1573년. 당시 모우리[毛利]의 외교승이었던 에케이는 쇼우군[将軍]
요시아키[義昭]의 처우를 놓고 오다[織田]-모우리[毛利] 의 사이에 긴장상태가 일어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상경해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 절충을 거듭하고 있었다.
예언은 이 교섭이 끝난 뒤 돌아오는 길에 오카야마[岡山]에서 모우리 가문의 중신에게 보낸 보고서에, 에케이는 다음과 같이 썼다.

노부나가가 3~5년은 버틸 것입니다. 내년 즈음에는 공가(公家)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각주:4] 그러나 그 뒤 높은 곳에서 벌렁 자빠져 떨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토우키치로우[藤吉郎][각주:5]는 만만치 않게 뛰어난 사람입니다.
 에케이의 이 예언은 10년 뒤 현실이 되었다.[각주:6] 

 에케이의 출신성분에 대해서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듯 하지만, 아키[安芸] 카나야마 성[銀山城]의 성주 타케다 노부시게[武田 信重][각주:7]  핏줄이라 전해지며[각주:8] 아키[安芸]의 안코쿠 사[安国寺][각주:9] [각주:10]에 들어가 중이 되었으며, 이 절의 주지가 되었다.[각주:11] 이러는 사이 에케이의 스승인 에신[恵心]이 당시 외교승(外交僧)으로 모우리 가문[毛利家]과도 친했기에, 에케이도 모우리 가문의 외교승이 되었다.

 앞의 예언에서 10년. 에케이는 급격히 바빠졌다.[각주:12] 1582년 5월, 히데요시가 이끄는 대군이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을 포위하여, 당장이라도 오다-모우리 간에 대결전이 일어날지 모르는 정세가 된 것이다. 이때 에케이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를 대리하여 히데요시와 강화교섭에 나섰다. 히데요시는 타카마츠 성의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清水 宗治]의 할복을 강화의 조건[각주:13]으로 냈다.[각주:14] 에케이는 독단으로 이것을 받아들여 시미즈 무네하루를 설득하여 배를 가르게 만들었다.[각주:15] 

 얼마 뒤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대승을 거둔 히데요시는, 강화 때의 조건으로 내걸었던 모우리 가문의 영지 할양을 다시 꺼냈다. 그거도 만약 불복한다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위협적인 내용이었다.
 에케이는 다시 히데요시와 절충을 거듭했지만, 히데요시의 실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우리의 중신들 눈에는 에케이가 하는 일들이 모두 히데요시의 뜻을 대변하는 것으로만 보여, 나중에는 에케이를 “대갈이만 큰 땡중놈”이라고 욕하는 자까지 생겼다.
 이에 대해 에케이는 “지금은 사람의 외모나 모습으로 떠들 때가 아닙니다. 서로가 진심을 나눌 때입니다. 부디 저의 진심을 믿어주길 바랍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또한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은 모우리의 가문을 지키기 위함이며, 이것에 반대함은 천하의 정세에 어둡기 때문이다 – 라는 편지도 보냈다.[각주:16] 

 어쨌든 모우리 가문은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에케이도 이렇게 오랫동안 히데요시와 절충을 하는 동안 히데요시의 신뢰를 받아 승려인 채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각주:17]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의 항에서 언급했듯이, 세키가하라 결전에서 모우리 가문은 에케이와 킷카와 히로이에[吉川 広家][각주:18]의 대립[각주:19] [각주:20]으로 인하여 결국 아무 것도 못한 채 패배한 것이었다.[각주:21]

 에케이는 일단 전장에서 벗어났지만 쿄우토[京都]에서 잡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와 함께 참수되었다.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
아키[安芸] 안코쿠 사[安国寺]의 주지가 되어 모우리 가문[毛利家]의 사승(使僧)으로 활약, 후에 히데요시[秀吉]에게 이요[伊予] 와케 군[和気郡] 2만3천석을 하사 받았고 몇 년 뒤 6만석이 된다. 참수되었을 때는 63~4세라 한다.

  1. 오오타 규우이치[太田 牛一]의 케이쵸우기[慶長記], [본문으로]
  2. 아첨하고 얍삽한 중이란 뜻으로, 이와쿠니 킷카와 가문[岩国吉川家]의 가로(家老)인 카가와 마사노리[香川 正矩]가 저술한 인토쿠기[陰徳記]에 나오는 표현. 이 책은 주군인 킷카와 씨를 정당성을 주기 위해 각색한 티가 많이 난다고 한다. [본문으로]
  3. 1663년 아사노 히로시마 번[浅野広島藩]의 번 의사[藩医]인 쿠로카와 도우유우[黒川道祐]가 만든 지역 역사지인 게이비국군지[芸備国郡志] [본문으로]
  4. 실제로 노부나가는 다음 해인 1574년 종삼위(從三位) 산기[参議]가 되었다. [본문으로]
  5. 히데요시의 통칭 [본문으로]
  6. 저자는 이 예언을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가 일으킨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을 떠올린 듯 한데, 이는 결과론으로, 아마도 에케이는 노부나가의 부하가 반란을 일으킨다는 의미보다, 이 1573년 당시 노부나가의 권력기반이 강고하지 않다보니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였을 것이다. [본문으로]
  7. 노부시게는 다른 이름으로 ‘토모 노부시게[伴 信重]’라 하며, 아키 타케다[安芸武田家]의 당주인 카나야마 성주인 타케다 노부자네[武田 信実]의 사촌뻘이다. 사촌뻘이라 한 이유는, 노부자네가 와카사 타케다[若狭武田家]에서 아키 타케다 가문에 양자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어쨌든 에케이[恵瓊]가 아키 타케다 가문의 핏줄인 점은 맞는 듯 하다. 에케이의 증조할아버지인 타케다 모토시게[武田元繁]는 아키 타케다 가문의 당주였으며, 모토시게의 아들이자 에케이의 할아버지인 ‘토모 시게키요[伴繁清]’ 부터 토모 씨[伴氏]를 칭했다. [본문으로]
  8. 에케이의 출신을 알려주는 유일한 기록 ‘후도우인 유래기[不動院由来記]’에 따름. [본문으로]
  9. 안코쿠 사[安国寺]는 14세기 초반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를 세운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가 전란으로 죽은 사람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일본의 각 쿠니[国]에 세운 임제종(臨濟宗) 계열의 절이다. [본문으로]
  10. 아키[安芸]에 있는 안코쿠 사[安国寺]는 아키의 슈고[守護]였던 아키 타케다 가문[安芸武田家]의 위패를 보관하는 보제사(菩提寺)였기에, 아키 타케다의 피가 흐르는 에케이도 이런 연으로 이 절에 들어간 듯 하다. 여담으로 이 절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 후에 아키 지역에 들어 온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가 서군의 수괴가 주지였던 이 절을 임제종에서 진언종(真言宗)으로 바꾸고 절이름도 ‘후도우 원[不動院]’으로 바꾼다. 위의 주석에 에케이의 출신을 알려준다는 기록이 ‘후도우 원 유래기[不動院由来記]’인 이유를 아실 수 있으리라 [본문으로]
  11. 1569년. 쿄우토 오산[京都五山] 중 4위이며 임제종 총 본산인 토우후쿠 사[東福寺]의 도서관장인 장주(藏主) 겸임. [본문으로]
  12. 뭐 사실 이 이전에도 모우리 가문이 오오토모 가문[大友家], 우키타 가문[宇喜多家] 등과의 대결에서 외교절충이나 후방지원 등에 활약했다. 갑자기 바뻐진 것은 아니다. [본문으로]
  13.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쳐했던 모우리가 히데요시에게 화평을 청했고 이에 히데요시가 제시한 것이 ①모우리의 영지 중 5개 쿠니[国] 할양 ②인질제출 ③앞으로 개기지 않겠다는 기청문(起請文) 제출로. 무네하루의 할복을 조건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본문으로]
  14. 그러나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일어나, 히데요시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를 처벌하기 위해 상경하고자 하여 일시정전을 바라며 무네하루의 할복을 요구. 어차피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으로 낙성과 마찬가지였던 타카마츠 성의 성주 무네하루가 성의 병사들 목숨을 구하는 대신 할복하여 죽었다. [본문으로]
  15. …는 모우리 가문[毛利家]이 에케이 악인-무네하루 충신설을 만들기 위해 후세에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무네하루 할복에 에케이는 관여하지 않았으며, 에케이는 이 이후 모우리-히데요시 간의 화평교섭 때 참가하였을 뿐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16. 에케이의 끈질긴 교섭으로 본래 히데요시가 원했던 5개 쿠니[国] – 빗츄우[備中], 빈고[備後], 호우키[伯耆], 이즈모[出雲], 미마사카[美作] - 중 히데요시에게 비젠, 미마사카, 호우키의 세 개군(郡), 빗츄우의 동부를 할양하게 되지만, 대신 빈고[備後], 이즈모[出雲]와 호우키의 일부, 그리고 빗츄우의 서부를 지키게 된다. [본문으로]
  17. 에케이가 다이묘우[大名]였다는 것은 에도 시대의 편찬물에 쓰여졌을 뿐으로, 당시의 사료에는 안코쿠 사[安国寺]의 사령(寺領)으로 서국(西国)의 각 다이묘우 들의 영지에서 500~5000석씩 각출한 총 1만1500석이 주어졌다고 한다. 즉 에케이 개인이 아닌 절의 영지로 주어진 것이다. 거기에 만약 에케이가 다이묘우[大名]였다면, 히데요시 정권이 다른 다이묘우들에게 부과한 군역(軍役)처럼 군역을 부과받았겠지만, 에케이는 그것이 없었으며, 또한 영지 경영에 필수적인 가신단이 있어야 했지만, 역시 에케이에게는 가신단 또한 없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8. 모우리 양천[毛利両川] 중 하나이며, 모우리 모토나리[毛利元就]의 둘째 아들 킷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의 셋째 아들. [본문으로]
  19. 대립이 있었다는 것은 킷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가 세키가하라 전쟁이 지난 후에 비망록[覚書]으로 적어 놓은 것에 나오는 것으로, 내용은 모우리 가문이 서군에 붙게 된 것은 에케이의 말빨에 이은 독단에 이은 것이며, 나님(히로이에)는 말쌈하면서 까지 말렸지만 에케이가 듣지 않았다. - 는 식으로, 나쁜 것은 모두 에케이때문이라는 것과 그에 따라 모우리 가문과 킷카와 히로이에는 이에야스에게 개긴 적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내용을 날조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20. 후세의 편찬물이 아닌 당시의 서장 들을 살펴보는 한 히로이에와 에케이가 특별히 사이가 나쁘다거나 혹은 싸운 적은 없다. [본문으로]
  21. 사실 이는 서군 총사령관이면서도 양다리를 걸쳐 동군과도 부전조약을 맺은 모우리 테루모토[毛利輝元] 탓이 크다. 테루모토는 은거해 있던 미츠나리[三成]에게 에케이를 파견하여 반 이에야스 공작을 주도하였고, 한편으론 동군의 부사령관격이었던 쿠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와 친한 킷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에게 명령하여 동군과도 연락하며, 전투가 일어나기 전날에는 동군-모우리 가문간에 부전조약을 맺는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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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yuphi IV 2011.10.29 16: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면 어디서 굴러들어온지 모를 돌인데 굉장히 출세(...여담이지만 무려 코에이사 모리 모토나루전에서는 모토나리 사후 가입캐러로 대활약 하더군요)한 사람이라 궁금했었는데 이런 연유가 있었군요.

    상대적으로 같은 교토 로쿠죠가와라에서 참수된 두명에 비하면 격이 떨어지는...사람으로 생각했었는데 쓰신 글을 보니 그렇지만도 않았던것 같습니다. (그러고보면 아무튼간에 승려신분으로 1만석 이상을 받은 사람이 더 있던가요? 텐카이는 어땠으려나..)

    그러고보면 같이 로쿠죠가와라에서 이시다 미츠나리의 유골발굴때 보았던 포스팅인데, 同時に1本の「小づか」も発見されました。小づかとは打ち首にあった人を埋葬する時に首と銅をつなぐためのものです。라네요. 대충 잘린 목과 밑부분을 이어주기위한 것으로 해석하면 되려나요? 다른 참수된 사람들도 이렇게 묻는게 상례였는지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네요.. (어이쿠 고인께 실례되는 생각이나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0.30 03: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활동이나 업적 등을 보면 그 둘 보다 더하면 더했다고도 생각합니다.

      승려 신분으로 영지라...글쎄요..승려들은 寺領이라는 형식으로 받지 개인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보니...
      말씀하신 텐카이도 텐카이 개인이 받은 것은 모릅니다. 다만 그가 세운 칸에이 사[寛永寺, 쇼우군의 위패가 있고, 만약 막부와 쿄우토 조정과의 사이가 틀어질 경우 텐노우로 만들기 위해 황족의 인물을 주지로 받는 절]의 경우 최전성기 때 1만1790석을 소유했다고는 하지만, 이도 단계적으로 높아진 것이라...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무엇보다 참수형은 최고형이다 보니 유족들이 가져가 따로 모시는 것도 힘들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때때로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가령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경우는 목이 베인 뒤, 목은 효수된 뒤 이후를 알 수 없지만, 몸통은 기독교도들이 쿄우토[京都]의 기독교 사제관으로 몰래 가져와 묻었다고 합니다.(참수될 때 유키나가가 입었던 옷에 유언이 쓰여있다고 하더군요)

      여담으로 고승이었던 에케이의 유체를 따로 묻기 위해 '사이쇼우 죠우타이[西笑承兌]'가 운반의 허가를 구하자, 당시 쿄우토 책임자였던 오쿠다이라 노부마사[奥平信昌, 나가시노 전투의 계기가 된 나가시노 성을 지키던 인물]는 그런 허가를 받지 못했다며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후는 알 수가 없네요.

  2.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11.02 13: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느 시대나 그러한 인물들이 있는 법입니다만 16세기 일본의 인물들은 가깝게 느껴지면서 때론 이해할 수 없는 매력들이 있는데 안고쿠지 에케이 역시 그러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에케이가 뛰어난 외교능력을 가졌다고는 확신을 할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론 히데요시와 모리의 외교에서 에케이가 외교 책임자라고 보는 것보다 고바야카와가 그 역할을 수행했다고 보는 것이 더 옳다고 여겨집니다. 아무리 그가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모리 가문의 명운을 건 교섭에서 외교승을 중용한다는건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고 봐야겠지요. 그의 역할은 보좌로 봐야 맞는게 아닐런지.

    대 미쓰나리 외교도 데루모토와 깃카와를 비롯한 모리 혈족의 도마뱀 꼬리 자르기식의 처리로 인해 에케이가 모든 죄를 뒤집어쓴 것이라고 봐야 옳을 것 같습니다.

    말해놓고 보니 에케이가 참 불쌍하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1.03 07: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결제권이야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가지긴 했습지요. 다만 실무를 맡은 것이 에케이였습니다. 에케이는 쿄우토 오산[京都五山]의 인맥들을 활용하여 정보수집과 히데요시 측의 의중을 알아보는 한편, 히데요시 측의 실무진인 하치스카 마사카츠[蜂須賀 正勝],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와 조정에 힘썼다고 합니다. 오히려 모우리 가문 산요우[山陽] 방면 담당인 타카카게(뿐만 아니라 모우리 가문 거의 전부가)는 비젠, 빗츄우가 관할지였다 보니 반대하는 편이었습죠. 히데요시의 힘을 인지하지 못하고 양보할 수 없다며 반대만하는 모우리 가문의 면면들에게, 에케이는 술 마시고 술기운에 투정을 마구 부린 편지도 현재 남아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외교승이라는 것이 센고쿠 시대에서는 꽤나 널리 퍼졌던 시스템입니다. 세속적인 무가(武家)의 싸움에, 세속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고 여겨지던 승려는 중간에서 여러가지 조정을 맡곤 했습니다.

      가령 게임 상의 이야기입니다만, 신장의 야망에서 승려가 방문했을 때 외교적 선택(타세력의 침입시 강제적인 전투종결 및 단기간 부전합의, 포로를 반드시 데려 올 수 있음)에서 반드시 성공할 수 있는 것에는 당시의 그러한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테루모토는 그런 짓이 특기인 것 같더군요.
      후년의 일입니다만 토요토미 가문을 멸한 오오사카 공성전 때 테루모토는 토요토미 측에 줄을 대기 위해서 중신 나이토우 모토모리[内藤 元盛]를 사노 도우카[佐野 道可]라는 인물로 변신시켜 오오사카로 보내며, 모토모리에게 만약 실패했을 시에는 모토모리의 자손들을 보호하겠다고 하면서도, 종전 후 모토모리가 토쿠가와에게 잡혔을 때 모토모리는 모우리 가문과의 관여를 끝까지 부정하며 모우리 가문에 충성을 다하지만, 테루모토는 이에야스에게 혼날까봐 모토모리의 아들을 전부 죽입니다.

    •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11.03 15: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그런 뒷이야기가 있었군요. 그렇다면 에케이가 대 히데요시와의 외교 전반에 관여했다고 보는 것이 옳겠군요. 그렇다면 노부나가의 죽음을 알았을테인데 정보의 입수가 늦었다는 것이 되는지 궁금해지는군요.

      여하튼 어긋난 지식을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하사해주셔서 오늘도 새로운 정보를 얻고 가게 되는군요. 열심히 받아먹도록(?!) 하겠습니다.

      모토나리의 음험함을 가장 잘 이어받은 것이 데루모토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숙부인 다카카게보다도 더요.

  3.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7 07: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히데요시가 시즈카타케 전투 후 종전에 맺은 모리와의 강화를 무시하고 다시금 처음 강화를 맺을때의 요구사항을 들이댔다는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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