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에게는 평생에 걸쳐 결코 잊지 못할 억울한 일이 하나 있다.
 "마왕"이라 불리며 공포의 대명사 였던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명령에 따라 아들인 노부야스[信康]와 마누라 츠키야마도노[築山殿]를 자신의 입으로 사형선고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동맹자의 명령이라고는 해도 자신의 손으로 마누라와 아들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 이에야스에게도 엄청난 고뇌가 뒤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 '노부나가의 명령에 따른 노부야스, 츠키야마 살해사건'은 어딘가 이상하다.
 우선 사건의 개략을 살펴보자.


 1560년 5월.
 오다 노부나가는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오케하자마[桶狭間]에서 물리쳤다. 그리고 3년 뒤 천하통일을 목표로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는다. 동맹의 증거로써 노부나가의 딸 토쿠히메[徳姫]와 이에야스의 아들 노부야스의 결혼이 성립된다.

 그리고 1570년.
 이에야스는 그때까지 거성이었던 오카자키 성[岡崎城]을 아들 부부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새로이 지은 하마마츠 성[浜松城]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10년 정도 흐르자... 이에야스의 처 츠키야마도노가 등장하여 쓸데없는 참견을 한다. 아들 노부야스 부부는 금슬이 좋아 사이에 딸 두 명을 두고 있었지만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토쿠가와 가문의 장래를 걱정한 츠키야마가 노부야스에게 미녀를 보낸다. 노부야스는 그 미녀에게 빠졌을 뿐만 아니라 오카자키 성 밑 마을에서 유행하던 풍류춤[風流踊り]에도 흠뻑 빠져버린다.
 거기에 츠키야마도노도 타케다[武田] 측의 스파이 겐케이[減敬]를 통해서 타케다 측과 내통할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츠키야마도노의 모친은 노부나가가 죽인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여동생이다. 노부나가에게는 처음부터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던 것이다.
 이런 것을 보고 그 때까지 무시 받고 있던 토쿠히메의 역습이 시작되었다(이번에는 노부야스의 부인 토쿠히메의 등장인 것이다). 토쿠히메는 지금까지의 사정을 편지에 적어 그것을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를 통해서 애비 노부나가에게 보냈다. 편지는 12개조로 되어 있어 그 중의 2~3개를 거론해 보면,

-. 요즘 오카자키 성 밑 마을에는 춤이 유행하고 있는데 노부야스는 그 춤에 빠졌을 뿐만 아니고 춤 실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활로 싸 죽였다.
-. 노부야스는 토쿠히메에게 딸려 온 시녀 코지쥬우[小侍從]를 자주 고자질한다고 입을 찢어 죽였다.
-. 츠키야마도노는 타케다의 스파이 겐케이라는 의사와 밀통하고 있으며 오다 토쿠가와 가문과 오다 가문을 망하게 해달라며 부탁하고 있다.
 이 편지를 읽은 노부나가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사실관계를 사카이 타다츠구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사카이 타다츠구는,
 "12개 중 10개는 사실이옵니다"
 며 인정해 버린 것이다. 노부나가는 노발대발했다. 화를 냄과 동시에 이것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노부나가에게 는 적자로 노부타다[信忠]가 있다. 그러나 기량이 노부야스보다 훨씬 떨어지기에 내심 장래를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부타다와 노부야스의 시대가 된다면 노부타다는 노부야스의 쨉도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호기로 삼아 노부야스를 죽인다면.... 이라고 생각하여, 이에야스에게 노부야스와 츠키야마도노의 사형을 명했다.

 이에야스는 앙천했다. 그러나 이에야스에게 있어 시국이 어려운 이 때에 노부나가와의 동맹을 깰 수도 없어 눈물을 삼켜가며 부인 츠키야마를 죽이고, 다음에 아들 노부야스의 배를 가르게 하였다.
이상이 사건의 개략이다.....

◎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에게 기대고 있었다?!

 이 사건은 거의 정사로 취급 받고 있으며, 이 사건을 근거로 만들어진 토쿠가와 이에야스 관련의 소설,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고뇌하는 이에야스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정말로 이상한 점이 많다. 그 이상한 점을 거론해 본다.

 우선, 이에야스에게 노부야스의 죽음을 명한 노부나가인데, 아무리 마왕이라 불리며 공포의 대명사라고는 하여도 이때 이에야스가 어쩌면 반항할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일까? 반항까지 안 가더라도, 부인과 아들의 죽음까지 명령하는 노부나가와는 더 이상 같이 못 해 먹겠다며 동맹을 파기해 올 것이라고 생각을 안 했을까??
 그랬다면 정말로 곤란한 것은 노부나가였을 터인 것이다. - 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당시 상황은 이에야스보다는 노부나가가 힘든 때였다.

 노부나가는 [천하포무(天下布武)]를 선언해, 무(武)의 의한 천하통일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에는 이에야스 이외에 모두 적들뿐이었다.
 그 때문에 에치고[越後]의 우에스키[上杉]에게는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를, 츄우고쿠[中国]의 모우리[毛利]에게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를, 탄바[丹波]에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이세[伊勢]에는 타키가와 가즈마스[滝川 一益] 등 장수들을 각지에 파견하고 있었다.

 이것 외에도 '나가시노 전투[長條合戦]'에서 타케다 측과 싸워 한번은 이겼다고는 하나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는 살아 남아 반격의 틈을 노리고 있었다. 거기에 에치젠[越前]의 잇코잇키[一向一揆]가 힘을 길려왔지, 칸토우[関東]에서도 호죠 우지마사[北条 氏政]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당시의 상황은 이렇게 노부나가의 주위가 모두 적 투성이로 기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에야스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있다. 당시 노부나가에게 적을 막는 것뿐만 아니라 내부를 다스리기에도 바빴다. 부하인 시바타 가츠이에와 하시바 히데요시의 불화를 시작으로, 우군으로 편입한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가 배반, 이어서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도 배반...이란 상태였다.
(상기는 세세히 따지면 오류가 있다. 그냥 대세가 그런 분위기였다…는 정도로 하자 – 역자 가필)

 노부나가에게 있어, 정말 기댈 수 있는 것은 이에야스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이에야스에 대해 딸이 푸념을 했다는 정도로 '처와 아들을 죽여라'며 잔인하고 위험한 명령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덧붙여 노부야스의 기량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면서 호기라 생각해 죽이라고 명령한 것도 이상하다. 딸인 토쿠히메의 말이 사실이라면, 노부야스는 춤에 빠진 얼간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백성을 죽이는 바보인 것이다. 기량을 두려워하기는커녕 그 정도라면 가만 놔두어도 자멸할 터이다.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타다는 그런 춤에 빠진 노부야스보다 바보였던 것일까?

 이에야스가 둘을 죽인 것은 역사적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 죽인 날짜도 이상한 것이다.
 위에서 적은 개략에서는 자세히 적지 않았지만, '둘을 죽여라'하고 노부나가가 명령한 것이 1579년 7월16일. 그리고 이에야스가 자객을 풀어 츠키야마도노를 죽인 것은 8월29일인데, 이 사이 한달 반이나 걸린 것이다. 시간이 너무 걸린 것은 아닐까?
 노부나가의 성격으로 본다면 말한 것은 곧바로 실행시켰어야 할 터이다. 더구나 그 이유가 [타케다와의 내통]이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한달 반 동안이나 그대로 놔두고 있었던 것일까??
 더불어 이 츠키야마도노와 노부야스를 한꺼번에 죽이지 않은 것도 이상한 점이다. 최종적으로 노부야스가 자인을 명령 받은 것은 츠키야마도노의 죽음에서 또 보름 정도 지난 9월 15일인 것이다.

◎ 이에야스에게 있어 처와 아들은 방해물이었다??!!

 어쨌든 이 사건에는 이상한 점이 많은데 이 [이상함]은 사건에서 노부나가를 빼버리면 부드럽게 연결되어 간다.
 처음부터 노부나가의 명령 따위는 없었다. 노부나가의 명령이라고 하는 것은 후세의 창작인 것...이라고 해 보는 것이다.

 노부나가가 명령했다......고 쓰여 있는 것은 [徳川実紀[각주:1]], [改正三河風土記[각주:2]], [武徳編年集成[각주:3]] 등 전부 후세의 것으로, 또한 이에야스를 신군(神君)으로 쓰고 있는 자기네들끼리의 것들뿐이다. 이에야스에게 불리한 것들은 쓰여 있지 않다.

 노부나가에게 명령 받았다는 것은 창작이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츠키야마도노와 노부야스는 이에야스 자신의 뜻으로 죽였다...... 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에야스 스스로 사랑하는 처와 귀여운 아들을 죽이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사실 이에야스는 더 이상 츠키야마도노와의 사랑 같은 것이 없었던 것이다.

 1570년.
 이에야스는 그때까지의 거성인 오카자키 성을 노부야스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신축한 하마마츠 성으로 옮겼다. 이때 츠키야마도노는 하마마츠로 가지 않고 노부야스와 함께 오카자키에 남아있었다. 이후 7년간 이에야스는 츠키야마도노와 별거 상태였던 것이다. 사랑이라고는 없었던 것이다.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여기에 있다.

 츠키야마도노와 노부야스는 이에야스의 영지(領地) 왼쪽 반인 오카자키 성을 근거지로 하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오른쪽 반인 하마마츠 성을 근거지로 하고 있었고....
 당시 노부야스는 21살로 이에야스는 36세. 가신들은 자연히 좌와 우로 나뉘어져 있었다. 결국,노부야스를 맹주로 하는 [오카자키 파]와 이에야스를 맹주로 하는[하마마츠 파]로 나뉘어져 있었던 것이다. 파벌이 생겼던 것이다.

 적으로부터의 공격보다도 내부 분열을 우려한 이에야스는 기선을 제압해 오카자키 파의 중심인물 츠키야마도노를 죽였다. 그리고 오카자키 파 면면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주요인물들을 확인해 내기 위해서였다.
 그런 뒤에 오카자키 파의 중핵인 노부야스에게 죽음을 명한 것이다. 귀여운 아들이라고 할 틈은 없었다. 파벌을 형성하여 영지를 둘로 나누려 했던 움직임이 있었던 것이기에, 귀여워했던 만큼 미움도 그 만큼 커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도 파벌항쟁 과정에서 아들 요시노부[義信]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며, 다테 마사무네[伊達 正宗]도 동생 코지로우[小次郎]를 참살하였다.

 덧붙여 주요인물로 확인된 [오카자키 세 행정관(岡崎三奉行)]인 고우리키 키요나가[高力 淸長], 혼다 시게츠구[本田 重次], 아마노 야스카게[天野 康景] 등의 가신은 오카자키 파에 속하였기에 사건 후 푸대접을 받았고, 오카자키 파의 필두가로(筆頭家老)였던 이시카와 가즈마사[石川 數正]는 참을 수 없어 토쿠가와 가문을 떠나 히데요시에게로 도망친 것이다.
(이 부분은 오버. 대부분 이후에도 중요한 일들을 맡았으며 카이에키나 푸대접 등에는 각각의 사정이 있었다. - 역자 가필)

 이에야스를 신군으로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자기들끼리의 책이었기에 이러한 이야기를 그대로 쓸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토쿠히메의 푸념, 노부나가의 잔인한 명령 등이 창작되어 눈물을 꾹 참으며 신군 이에야스는 사랑하는 처와 아들을...... 이 된 것이다.

 츠키야마와 노부야스의 살해는...... 이에야스 본인의 의사였던 것이다..

ps; 이 글은 1994년에 발간된 고토우 쥬이치[後藤 寿一]의 [뭔가 이상하잖아! 일본사(なんかヘンだぞ!日本史)]에 있던 것을 번역한 것입니다.예전에 하이텔 전클에 올렸던 것을 조금 손 봐서 올립니다. 조금 오버기가 있지만 그냥 그런 흐름이었다고 생각해 주시길... 세세하게 파고드면 양이 너무 많아져요~(그래서 그런 능력이 없어서 번역해서는 올리는 것입니다. --; )

  1. 에도 바쿠후의 공식 기록서. 19세기 전반 즈음 편찬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토쿠가와 가문의 역사를 기록. 19세기 전반 편찬. [본문으로]
  3. 이에야스의 전기. 18세기 중반에 작성. [본문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 주세요.

도쿄돔

문화예술>건축>각종 건축물>공공 건축물

1988년 3월 완공한 실내야구경기장으로, 일본 프로야구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홈구장이다. 도쿄도[東京都]에 있으며 수용인원은 5만 ...

출처 : 두산백과사전 EnCy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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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지금 보니 "카스미가세키에서 떨어지길 500인 수상 관저.."에서 미터가 빠졌군요.

500미터입니다. 몇 개도 눈에 띄지만, 귀찮아서 언젠가...

또한 중간에 두 장짜리는 클릭 & 확대로 보아 주시면 좋지 않냐고 생각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이색의 쇼우군[軍]이었다. 13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검술의 달인이었던 것이다. 츠카하라 보쿠덴[塚原卜伝]에게 비기 [히토츠노타치(太刀)]를 전수받았을 정도의 실력이었다.

 달리 생각하면, 전란 다발하던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으로써의 자기단련이었다. 1546년에 쇼우군[軍]이 되면서부터 요시테루에게는 하루라도 평온한 날이 없었던 것이다.

 

 요시테루 치세인 1546년부터 1565년에 이르는 20년간은 중세의 암흑기에서 근세의 여명기로 이어지는 과도기였다. 일본에 온 하비에르[각주:1]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파하였고, 노부나가[信長]가 오케하자마[間]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쓰러뜨린 것도 이 시기였다. 그 격동기의 고뇌를 요시테루는 혼자 짊어지고 있었다.

 

 어렸을 적 부친 요시하루[義晴]와 함께 전란의 쿄우[京]에서 피신하여 오우미[近江]에 있었던 요시테루는, 쇼우군[軍]이 되어 쿄우[]로 돌아와서도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 晴元] 미요시 쵸우케이[三好 長慶]의 다툼에 휘말려, 부평초[浮萍草]처럼 양 세력 사이를 떠도는 존재밖에 되지 않았기에 그 이후에도 몇 번이나 오우미로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되었. 그러나 결국 미요시 쵸우케이의 실력에 굴복하여 미요시 체제에 옹립되는 형태가 되었다. 이때가 1558 11.

 쿄우()로 돌아온 요시테루는 이것이 정말로 기뻤던 듯, 어소[御所][각주:2]의 마당에 서서는 밤하늘을 향해서 환호성을 올렸다고 한다.


 이 즈음, 그제서야 칸파쿠[白]였던 코노에 타네이에[近衛 稙家]의 딸과 결혼식을 올렸다. 모친인 케이쥬인[寿院]이 오랫동안 권해왔던 이야기였다. 요시테루의 마음에 안정이 생겼다는 것을 말해 준다.[각주:3]


 미요시 쵸우케이가 죽자, 요시테루는 지금이야말로 막부(幕府)의 실권을 회복할 좋은 기회라 생각하여, 붕고[豊後]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이나, 에치고[越後]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등 여러 다이묘우[大名]에게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쇼우군의 의도는 죽은 쵸우케이의 모신(謀臣)이며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아시카가 요시히데[足利 義栄][각주:4]를 새로이 쇼우군으로 세우려고 하는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가 간파하기에 이른다. 히사히데는 같은 쵸우케이의 가신이었던 미요시 삼인중[三好三人衆]과 상담한 후 선수를 쳐 요시테루의 어소(御所)를 습격하기로 한다.

 

 1565 5 19.

 때는 장마의 계절,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그 빗속을 마츠나가, 미요시 군세는 갓과 우비를 입고서, 키요미즈 사[寺]를 참배한다는 명목으로 쿄우[京]로 올라가고 있었다.

 히사히데는 밤이 되기 직전에 일부러 어느 소송(訴訟)에 대한 서장을 어소에 제출했다. 응답에 시간이 걸렸다. 그것이 노림수였다. 그 사이에 히사히데의 무리들은 어둠에 섞여 어소 안으로 잠입하여 마루나 복도 밑에 몸을 숨겼다.

 

 갑자기 함성이 울려 퍼졌다. 궐기의 신호였다. 어소에는 사무를 보는 몇몇 외에 사람이 없었다.

 사태가 명확해지자, 검호 쇼우군답게 각오를 정하여 금생의 이별 주연(酒宴)을 열었다. 호소카와 타카요시[細川 隆是]가 여관(女官)코소데[小袖]를 뒤집어 쓰고 춤을 추었다.

 이때 요시테루는, 그 코소데 위에 사세구(辭世)의 시를 적었다고 한다.

지금 내리는 비는 이슬인가 눈물인가,

내 이름을 알려라 구름 위에까지

五月雨は露かかほととぎす

わが名をあげて雲の上まで

 그때부터 요시테루의 활약은 눈부셔 몇 자루나 되는 칼을 마루에 꼽고서는 날이 무뎌지면 계속해서 바꾸어가며 달려드는 적을 마구 베어 쓰러뜨렸다.

 하지만 결국 다구리에는 장사가 없었다. 한 적병이 문틈에서 창으로 발을 걸어 넘어뜨리자 요시테루는 넘어졌다. 거기에 적병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장지문으로 몸을 누르고는 그 위에서 창으로 내리 찔렀다. 그때 불길이 한꺼번에 번져 요시테루의 목을 베지 못한 채, 건물은 화재로 무너져버렸다고 한다.(에이로쿠의 변[永禄の変])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

1536년생. 첫 이름은 요시후지[義藤]. 12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 義晴]의 아들. 1546년 아시카가 제 13대 쇼우군이 되었다.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 晴元]를 칸레이[管領=쇼우군의 보좌역]로 임명 하였지만, 호소카와 우지츠나[細川 氏綱], 미요시 쵸우케이[三好 長慶] 등이 이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켰고, 미요시 측이 승리를 거둠으로써 바쿠후의 실권은 쵸우케이가 쥐게 된다. 쵸우케이가 죽자 실권을 쥐고 있던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에게서 정권탈환을 기도하지만 히사히데 등에게 습격 받아 살해당했다. 1565년 당시 아직 30살이었다.
  1. 일본에서는 ‘자비에르[ザビエル]’ 로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2. 높은 귀인의 거처 겸 정무소. [본문으로]
  3. 여담으로 요시테루의 모친 ‘케이쥬인’은 장인인 ‘코노에 타네이에’의 여동생이다. 즉 요시테루는 외사촌과 결혼한 것이다. [본문으로]
  4. 아시카가 바쿠후 14대 쇼우군, 요시테루와는 할아버지가 같은 사촌지간. [본문으로]

로또...왠지 이월될 것만 같다.

그냥 생각난 것 2008. 6. 21. 19:59 Posted by 발해지랑
로또 추첨에 음모론자들의 이론대로 모종의 조작이 있다면, 오늘 로또는 또 이월될 것이다.

어제만 해도 이런 생각하지 않았는데, 모처에서 보니...
6월 10일 전후로 서울로 출동하였기에 포상으로 몇 일 휴가를 받았던 모 지방 전경들에게 귀대 명령이 떨어졌다고 한다.

원인은 필시 이것 때문이리라...

현재 한국 국민들의 눈을 모으는데 로또만한 것이 있을까?
보라~ 이 장대한 모습을!!
이번도 넘어가 다음 주까지 국민들의 마음과 생각을 전부 로또로 채우려고 할 것이다.

어디까지나 로또 추첨에 조작이 있다면 말이지만...
(...라고 하면서 나도 하긴 했다. 데헤~)

 

 우에스기 켄신의 그림이 야마가타(山県)() 요네자와()()우에스기 신사(上杉神社)에 있는데, 거기에 그려진 켄신은 오히려 온화한 인상이다[각주:1]. 그 귀신과 같이 가열찬 무장의 모습은 느낄 수 없다. 그러나 당시의 증언이 전해 내려온다. 켄신과 실제로 만났던 승려가,

 [날카로운 눈빛과 억센 표정을 하여 보는 이를 두렵게 하였다], 카와다 부젠(河田 豊前)이라는 사무라이와 닮았다 - 고 그 용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또한 에치고(越後)에서 켄신과 대면한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차남)의 사자 사사키 사다츠네(木 定)는 독경(讀經)을 끝내고 나온 켄신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타치(太刀)를 꽉 쥐고 서 있는 그 모습은 오오미네(大峰)의 고키(五鬼)[각주:2], 카츠라기타카마(葛城高天)의 대천구(大天狗)[각주:3]의 화신인가 싶어, 온 몸의 털이 전부 곤두서는 듯한 느낌이었다]

 

 켄신은 풍모뿐만 아니라 독특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진언밀교(眞言密敎)의 엄격한 계율을 지키고 여성은 절대 가까이 하는 일 없이 일생 불범(不犯)”이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켄신은 열렬한 불교신자였다. 관음대사(觀音大士[각주:4])에 대한 신앙심이 깊었던 생모 토라고젠(虎御前)의 영향이기도 하였으며, 어렸을 때 부친의 거성(居城)카스가야마(春日山)성(城) 밑에 있는 린센(林泉)()에 맡겨져 명승(名僧) 텐시츠코우이쿠(天室光育)를 스승으로 삼아 엄격한 계율의 나날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중이 되어 소우신(宗心)이라는 호()를 칭하며[각주:5], 카스가야마 성() 내에 비사문(毘沙門), 스와(諏訪), 고마(護摩) 등 세 채의 당()을 지었다.

 

 가혹하고 격렬한 전쟁터에서도 대일여래(大日如來)와 관음보살(觀音菩薩)의 목상 등을 가지고 다녔다. 그리고 전쟁터에 악업, 번뇌퇴산(煩惱退散)의 상징인 [()]의 군기를 휘날렸다. 어디까지나 우에스기의 군세는 [항마(降魔)의 군]이라고 켄신은 믿고 있었던 것이다.

 

 철저한 정신주의(精神主義)의 사람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정의와 질서가 그의 행동을 관철시키고 있었다. 배신, 배반 등이 일상다반사인 센고쿠의 시대에서는 희소가치가 있는 무장이었다. 그런 면에서 인간다운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과는 대조적이다.

 1564. 켄신이 에치고(越後) 이치노미야[각주:6](宮) 히코 (弥彦神社)에 봉납한 [타케다 하루노부의 악행에 대해서(武田晴信)]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기원문이 확실히 그 개성을 나타내고 있다.

 거기서는 자신의 싸움은 정의를 기반으로 하는 것임을 분명히 한 후, [친아비인 타케다 노부토라(武田信虎)를 추방해서는 길에서 걸식(乞食)하게 만들어 효()를 버렸다. 이것은 신불(神佛)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써서 신겐의 악행을 비판하였다.

 

 황실에 대한 존경과 숭배도 두터웠다.

 당시 텐노우(天皇) 가문은 빈곤의 극에 달하여 즉위식 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1553년 당시의 고나라(後奈良) 텐노우(天皇)를 알현했을 때,

 가문이 생긴 이래 가장 큰 행복. 성은이 하해와 같다

 고까지 말하며 감격하였다.

 

 여성을 싫어하는 도덕가라고 하면 히틀러와 같은 비인간성을 상상해버리기 쉽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지금도 태어난 지방인 에치고는 물론 이웃 지방인 시나노(信濃), 적측인 카이(甲斐)에서까지 인기가 높다. 그 중에서도 숙적 타케다 신겐에게 소금을 보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1568년 신겐이 스루가(駿河)에 침입했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이때 스루가의 이마가와 지자네(今川氏)와 사가미(相模)호우죠우 우지야스( 氏康)가 동맹하여 카이(甲斐)로 들어가는 소금을 국경에서 막아버린 것이다. 켄신에게도 에치고의 소금을 들여보내지 말라는 요청이 왔다.

 하지만 켄신은 신겐에게 편지를 보내어,

 [(=신겐)과 싸울 때는 활과 화살이지, 쌀과 소금으로 싸우겠는가?]

 라고 말하며 시나노로 소금을 보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진위는 보증할 수 없지만, 토우쿄우(東京) 국립박물관에는 신겐이 소금을 보내준 답례로써 보냈다고 하는 타치(太刀)가 전시[각주:7]되어 있다.

 

 또한 이런 이야기도 사서는 전해주고 있다.

 1573. 켄신 생애의 라이벌인 타케다 신겐이 죽었을 때의 일이다. 켄신은 본거지인 카스가야마 성()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 뜨스운 물에 밥 말아먹고 있던 중이었지만, 갑자기 젓가락을 놓더니 입 안에 있던 것을 뱉어내고는,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명장이 죽었구나. 영웅인걸이라는 것은 신겐이야말로 어울리는 것. 칸토우() 무사의 기둥이 쓰러졌다.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고 한탄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가중(家中)에 명하여 3일간 상()을 치르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혹은 이때 켄신은 - 이것은 신겐을 존경하는 의미가 아닌, 어디까지나 [무사의 신에 대한 예의로써 하는 것이다]라 말했다는 기록한 책도 있다.

 

 신겐의 죽음은 우에스기에게 있어서 타케다 공략을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이를 놓치지 않고 일거에 시나노로 쳐들어 가 타케다의 군세를 멸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노신(老臣)들은 그렇게 켄신에게 진언했다. 그러나 켄신은,

 젊은 카츠요리()가 이제 막 대를 이었는데 그걸 노리다니,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이다

 고 말하며 공격하지 않았다고 한다.

 

 켄신은 여인을 가까이하지는 않았지만 술은 사랑한 무장이었다. 지금도 우에스기 신사에 애용했던 큰 술잔이 있다. 술안주로는 매실장아찌(우메보시=梅干)를 좋아했다고 한다. 술을 너무 좋아한 것이 화근이 되어 뇌일혈(腦溢血)로 죽었다.

 

 켄신의 생애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숙적 신겐과의 일기토였다.

 1561 9 9일 한밤 중. 우에스기 군은 은밀히 대군을 움직여 치쿠마가와(千曲川) 강을 건너고 있었다. 사이죠산(妻女山)에 진을 치고 있던 켄신을 기습하고자 한 신겐의 작전을 간파한 켄신은, 타케다 군의 허를 찔러 산을 내려온 것이었다. 산정에는 여전히 지금도 야영하고 있다는 듯이 화톳불을 활활 태워두었다.

 

 우에스기 군이 도하작전을 끝내고 카와나카지마(川中島)에서 전투 태세에 들어간 것은 다음 10일 새벽이었다. 짙은 안개가 깔려있었다. 태양이 떠오르면서 서서히 안개가 겉혔다.

 카와나카지마의 중앙 하치만바라(八幡原) 들판에 진을 치고 있던 타케다의 본진에서는, 사이죠산 기습의 소식이 언제 도착하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안개 건너편에서 갑자기 우에스기의 대군이 나타난 것이다.

 켄신은 특기인 [쿠루마가카리(車懸) 전법]으로 노도와 같이 타케다 진영을 덮쳤다. 타케다의 군세는 필사적으로 방어하였지만 차츰 밀리게 되어 신겐의 본진도 위험해 졌다.

 마침내 우에스기 군은 신겐이 있는 곳을 발견하였다. 켄신은 돌격하였다. 십 수기와 함께 신겐의 본진을 목표로 질주한 것이다. 감색의 갑옷에, 금색의 투구를 색의 명주로 감싼 모습이었다. 신겐은 칼을 뽑을 틈도 없었다. 걸상에 앉아 있는 신겐에게 마상에 있던 켄신이 칼을 내리쳤다. 그것을 신겐은 지휘 부채(軍配)로 막았다. 켄신의 칼은 계속 신겐을 노렸다. 그때 마침 신겐의 근시(近侍)인 하라 오오스미노카미(原 大隅守)가 달려들어 켄신을 향해서 창을 찔렀지만 빗나가 말의 엉덩이를 맞추었다. 놀란 말을 켄신을 태운 채로 질주하여 신겐은 위험에서 목숨을 건졌다.

 이 제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는 타케다 측의 사상자 17000, 우에스기 측은 9000이라는 격전이었다고 한다.

 

 신겐 사후에 켄신의 전투로 유명한 것은 나나오(七尾)성(城) 공략일 것이다. 나나오 성()은 해발 300미터 높이의 험준한 곳에 있는 성이었다. 이를 켄신은 실로 40여 일을 소비하여 겨우 함락시킨 것이었다.

 이 여세를 몰아 켄신은 카가(加賀) 테토리가와(手取川) 천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5만 대군을 물리쳤다.

 [우에스기와 만나서는 오다도 명성에 먹칠하는 강, 달려드는 켄신에 날라 튀는 노부나가]

 (上杉に逢うては織田も名取川( 手取川 역자 ), はねる謙信逃るとぶ長( 信長 역자 ))

 라고 후세에 쿄우카(狂歌)가 만들어질 정도로, 오다의 군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에스기 켄신에게 참패를 당하게 된 것이다.

 

 켄신의 죽음은 불시에 찾아왔다.

 1578 3 9.

 칸토우 출진 준비가 모두 끝나있었다. 노토(能登), 엣츄우(越中), 카가(加賀)를 평정한 지금, 남은 화근은 칸토우 뿐이었다.

 화장실에 들어간 켄신은 갑자기 기절하여, 인사불성인 채로 4일간을 보낸 후 생애를 마쳤다. 49세였다.

 

 사세구()로는,

한 때의 영화는 한 잔의 술, 49년은 한 번 취한 것.

삶 모르고 죽음 또한 모른다. 달을 희롱하는 이 또한 꿈과 같도다

一期ノハ一盃ノ酒、四十九年ハ一ノ間、

生知ラズ死又知ラズ、月是又夢中ノ如シ

 라는 한시(漢詩)가 남아 있다.[각주:8]

 

[우에스기 겐신(上杉 謙信)]

1530 1 12. 에치고(越後) 슈고다이(守護代) 나가오 타메카게(長尾 )의 아들로 태어났다. 첫 이름은 카게토라(景虎), 후에 마사토라(政虎)[각주:9], 테루토라(輝虎)[각주:10]로 바꾸었다. 형 하루카게(晴景)나 일족 나가오 마사카게(長尾 政景[각주:11])와 싸웠지만, 슈고(守護) 우에스기 사다자네(上杉 定)의 중재로 슈고다이를 이어받고 에치고 카스가야마 성주가 되었다. 1552년 망명해 온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 憲政)에게서 우에스기(上杉)’라는 성()과 칸토우칸레이(管領)의 역직(役職)을 물려받았다. 타케다 신겐과의 카와나카지마 결전은 다섯 번에 이르렀다. 엣츄우(越中)를 평정하고 노토(能登), 카가(加賀)에 진공해서는 오다 노부나가와 대결하여 천하에 패()를 외치고자 하였지만 안타깝게도 1578년 병으로 쓰러졌다.

  1. 글 머리에 있는 그림. [본문으로]
  2. 오오미네(大峰)산(山)은 도를 닦는 슈겐도우(修験道)의 도를 닦는 곳으로 유명한 곳으로, 그런 사람들을 수호하는 신으로 고키(五鬼)가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다른 이름으로는 ‘카츠라기타카마보우(葛城高天坊)’라고도 한다. 일본 귀신인 천구(텐구=天狗) 중에서도 더욱 강력한 천구 한다. [본문으로]
  4. 대사(大士)는 보살(菩薩)의 존칭. 즉 관음보살(觀音普薩)을 말한다. [본문으로]
  5. 소우신이란 호를 칭하기 시작한 것은 1553년 켄신 나이 23살 때 처음으로 상경하였을 때 다이토쿠 사(大徳寺)의 텟슈우소우쿠(徹岫宗九)에게 사사받은 후에 쓴 법호이다. [본문으로]
  6. 그 지역(国)에서 가장 격이 높은 신사를 말함. [본문으로]
  7. ‘塩どめの太刀(소금막기의 칼)’이라는 이름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8. 죽기 한달 전에 만든 시라고 한다. [본문으로]
  9. 1560년에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의 직책과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山内上杉家)의 가독을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 憲政)에게 물려받을 때 노리마사에게 '마사(政)'를 하사받았다. [본문으로]
  10. 1561년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의 '테루(輝)'를 하사받았다. [본문으로]
  11. 켄신의 후계자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의 아비이며 켄신에게는 누나(仙桃院)의 남편 즉 매형이 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