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서의 메시지

내 이야기 2008. 8. 20. 00:00 Posted by 발해지랑
NOA님의 블로그에 갔다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름을 써 넣고, 성별, 생년월일을 고른 후 천국에서의 메시지(天国からのメッセージ)라는 버튼을 누르면, '천국'에서 메시지가 온다고 한다(해보는 곳).

그래서 해 보았다.

2008年の僕へ。
元気ですか?2008年ごろの自分のことを懐かしく思い出します。
僕は76歳で、つまり西暦2051年に、ちょっとした病気が原因で生涯を終えます。
思えばいろんな事があったけれど、我ながらなかなか良い人生でした。

だたひとつだけ過去の自分に、つまり今のあなたに伝えておきたい事があります。
それは 2010年の秋のこと、僕はイタリアのミラノへ出かけることになります。
今にして思えば、それは人生の分岐点でした。 細心の注意をはらってください。

最後にひと言、76年間生きてみて思ったのは「ダイエットなんてするもんじゃない」ってこと。
といっても、今のあなたには判らないかな。

では、また。
残された人生を思う存分味わってください。

20008년의 나에게.
잘 지내슈? 2008년 즈음의 내가 그립구먼.
나는 76살, 즉 2051년에 조그만 병이 원인이 되어 죽는다네.
생각해 보면 여러가지 일이 있었고, 내 인생이지만 꽤 괜찮은 인생이었지.

단지 한 가지만 과거의 나에게, 즉 지금의 너에게 전해주고 싶은 일이 있다네.
그건 2010년 가을의 일이었지. 나는 이탈리아 밀라노에 가게 된다네.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그것은 인생의 분기점이었지.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76년간 살아 보고 생각한 것은, [다이어트는 할 만한 것이 아녀!]라는 것...
...이라고 말을 하여도, 지금의 자네에게는 알 수 없겠지.
그럼 또 보세.
남은 인생 맘껏 즐기시게.

...라고 나왔군...
...근데 내가 이탈리아 밀라노에 갈 확률은, 현 대통령께서 전임 대통령같이 자기 고향(오오사카 말고 포항)에서 방문객들과 이야기 나눌 확률보다 적으며, 또한 나와 다이어트...에서 이미 에러(항상 듣는 말이...살 좀 쪄라~...일 정도).

ps; 한글로 이름을 써 넣으면 1966년에 죽는 것으로 나온다... 태어나기도 전에 사망인가?

 사시모노[指物]라는 것은 무사(武士)가 전쟁터에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자 등에 매다는 작은 깃발을 말한다. 그 사시모노에 토리이 스네에몬[鳥居 右衛門]의 모습을 그리게 한 사람이 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의 부하 오치아이 사헤이지 미치히사[落合 左兵次 道久]였다. 그는 실제로 자신의 눈으로 처형당한 스네에몬을 보고 사시모노의 그림으로 처형대 위의 처참한 모습의 스네에몬을 그린 것이었다.

 이 사시모노는 대대로 오치아이 가문의 자손에게 전해졌고, 현재 토우쿄우 대학[東京大学] 사료 편찬소에 보존되어 있다.[각주:1]

 그럴 정도로 토리이 스네에몬의 용기는 센고쿠[戦国]의 사람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준 것이었다.

 

 1575 4.

 토쿠가와 측의 나가시노 성[長篠城]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있었다. 남은 군량은 불과 4~5. 성은 25천의 타케다 군에게 물샐틈없이 포위당해 있었다. 남아있는 계책도 없어 이제는 성안에 있는 병사 모두가 뛰쳐나가 옥쇄하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었다.

 

 나가시노 성주 오쿠다이라 노부마사[平 信昌][각주:2]는 당시 24. 예전에는 부친 사다요시[貞能]와 함께 타케다 씨[武田氏]에 속해있었지만, 신겐[信玄]이 죽은 후 토쿠가와 측으로 말을 갈아탔다.

 오쿠다이라 부자의 배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가 군사를 일으킨 것이 이 싸움의 시작이었다.

 오쿠다이라 노부마사의 배후에는 토쿠가와-오다 연합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군세가 제 시간에 맞추어 와주기만 한다면…'

 그때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이 위기를 버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쨌든 이에야스에게 이 어려운 상태를 하루라도 빨리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 타케다 군의 엄중한 포위를 뚫고 사자를 보내야 했다.

 처음에 성주 노부마사는 오쿠다이라 지자에몬[平 次左衛門]이라는 수영을 잘하는 자에게 명령을 내리려 하였었다. 그런데 지자에몬은 거부했다. 성안에서 탈출한 다음에 만약 성이 함락당하기라도 한다면, 자신은 후세에까지 도망자의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다른 자들도 그러한 이유로 사자의 임무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노부마사는 결심했다. 자기 한 사람 배를 갈라 개성한다면 가신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그 각오를 성병 모두에게 털어놓았다. 토리이 스네에몬이 자원한 것은 이 때였다. 이때 스네에몬 36.


 스네에몬이 성을 빠져나온 것은 14일 밤이었다. 운 좋게 가랑비가 내리는 어두운 밤이었다. 그럼에도 물샐틈없이 포위하고 있는 타케다 군의 눈을 피해 빠져 나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화장실의 하수구를 이용하였다. 암벽을 내려오면 칸사가와 천[川]이었다. 천바닥으로 잠수하였다. 강 건너편에 닿아 올라서자 방울 달린 줄이 장치되어 있었다. 조심스레 그것을 잘랐다

 

 다음 날인 15일 새벽.

 간보우도우게 고개[鴈峰峠]에 한 줄기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다. 탈출 성공 시에 피우기로 했던 약속한 신호였다.

 그 후로는 모든 것이 착착 진행되었다. 이에야스와도 만났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도 만날 수 있었다.

 

 16.

 간보우도우게 고개에서 두 번째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다. 구원 결정의 신호였다.

 스네에몬은 구원의 군세가 온다는 것을 성의 모두에게 자신의 입으로 전하고 싶었다. 노부나가는 위험하게 타케다의 포위진을 돌파하면서까지 성에 돌아갈 필요는 없다. 오다 군과 동행하라고 말해 주었지만, 그것을 뿌리치고 또다시 적지에 잠입한 것이었다.

 스네에몬은 나가시노 성()의 건너편인 시노바노[篠場野]라는 곳까지 도착했다. 이제 성은 눈 앞이었다.

 

 그러나 피어오르는 연기를 의심하였는지 타케다 측의 경계는 한층 더 삼엄해져 있었다. ()을 두르고, 바리케이트[鹿垣]를 설치하여 바닥에는 모래까지 뿌려 발자국까지 확인하려 하였다.

 스네에몬은 이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머뭇거리게 되었고 거동이 수상한 자라 하여 타케다 측에 잡혀버렸다. 타케타바[竹束][각주:3]를 든 타케다의 아시가루[]로 변장하였다가 각반의 형태가 다른 다는 것을 검문 받아 잡혔다고도 한다.

 

 어쨌든 카츠요리 앞으로 잡혀온 스네에몬은 숨기지 않고 밀사의 임무를 진술하였다.

 이때 카츠요리[頼]는 오히려 스네에몬을 칭찬하였다고 한다. 가신으로 맞이하여 중하게 쓰겠다는 말까지 하였다. 그리고 하나의 임무를 명하였다.

 나가시노 성[長篠城]의 정면에 처형대를 세우고 거기에 묶인 스네에몬이 성안의 병사들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 노부나가의 원군은 오지 않는다. 이젠 성문을 열고 항복하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다.

 고 말하라는 것이었다. 스네에몬은 이 명령을 받아들였다.

 목숨만 구해주신다면 어떤 일이건 하겠습니다. 더군다나 땅까지 주신다니 이보다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처형대가 높이 세워졌다. 기둥에 묶인 스네에몬에게 초여름의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눈 앞의 나가시노 성벽에 많은 동료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타케다의 군사들도 숨을 죽이고 처형대 위에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스네에몬의 입이 열렸다. 큰 목소리였다.

 노부나가님은 이미 오카자키[岡崎]에 와 있으시다. 이에야스님도 노다[野田]까지 군을 진출시키셨다~”

 카츠요리를 시작으로 타케다의 군사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다. 그러나 스네에몬의 목소리는 한번 더 나가시노 벌판에 울려 퍼졌던 것이다.

 성안의 모두들~ 반드시 3일안에 원군이 온다!”

 타케다 측에 혼란이 일어났다. 병사들이 처형대로 달려갔다. 몇 자루나 되는 창이 스네에몬의 몸을 찔러 반대편으로 뚫고 나왔다.

 

 1575 5 21.

 타케다 카츠요리의 25천의 대군은 오다-토쿠가와 연합군에게 나가시노 성밖의 시타라가하라[原]에서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 전투에서 타케다 군은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 昌景], 바바 노부하루[馬場 信春], 사나다 노부츠나[ 信綱] 등 신겐 때부터 활약해온 용장들을 다수 잃었으며, 카츠요리 자신도 겨우 도망쳤다.

 

[토리이 스네에몬(鳥居 右衛門)]

오쿠다이라 노부마사[ 信昌]의 부하로 미카와[三河] 이치다[市田]에서 태어나 이름을 카츠아키[勝商]라 하였다고 한다. 나가시노 성터 부근의 스네에몬 처형장터에는 석비가 서있다.

  1. 위에 있는 그림을 말한다. [본문으로]
  2. 이때는 아직 사다마사[貞昌]. 후에 노부나가[信長]에게 이름글자 ‘노부[信]’를 하사 받은 다음부터 노부마사[信昌]라는 이름을 쓴다. [본문으로]
  3. 철포 탄환을 막기 위해 대나무를 묶은 것. [본문으로]

<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일본판 >

 후쿠이(福井)()에서 아스와가와(足羽川)()을 내륙 쪽으로 10km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에치젠 평야(越前平野)가 끝나면서 산맥이 주위를 둘러싼 작은 골짜기의 마을로 들어간다. 거기가 이치죠우다니(). 지금은 한적한 농촌이지만, 센고쿠(戦国) 시대에 이곳은 에치젠 일국을 지배했던 아사쿠라(朝倉)()의 본거지였다. 근년[각주:1]이 되어 이 지역은 갑자기 주목 받았다. 아사쿠라 씨()의 저택이 발굴 조사되어 거의 그 전모가 확실히 드러난 것이다. 이로 인해 센고쿠다이묘우(戦国大名)의 생활 실태라는 것이 생생히 떠오르게 되었다.

 저택의 유적 전체가 탄 흙과 재로 구성된 층으로 덮여 주춧돌이나 정원석(庭園石)의 겉은 타고 금이 가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1573 8월 아사쿠라 가문이 괴멸될 때 이치죠우다니()는 큰 불에 휩싸여 소실(燒失)되었다는 기록을 뒷받침함과 동시에 그 종언(終焉)의 무시무시했었음을 유적은 말해주고 있다.


 센고쿠 시대. 이치죠우다니는 ‘호쿠리쿠(北陸)의 쿄우토(京都)’라고 불리어질 정도로 화려한 성 밑 마을(城下町)이었다. 여기에는 전란으로 혼란스러운 쿄우토를 피해온 상급 귀족(公卿)이나 문화인들이 모여있었다. 우다이진(右大臣) 산죠우 킨요리([각주:2])나 다이나곤(大納言) 아스카이 마사츠나(飛鳥井 正綱)가 와있었으며, 렌가(連歌)의 제1인자 소우기(宗祇), 소우쵸우(宗長)의 사제(師弟)도 방문했었다. 당대 제일의 국학(国学) 키요하라 노부카타( 宣賢)도 초대받았다.

 그 중에서도 거물은 아시카가 쇼우군(足利 ) 요시테루(義輝)의 동생 요시아키(義秋)였다. 요시아키는 1567 11월에 이치죠우다니(一乗)를 찾아왔다. 2년 전에 형 요시테루가 미요시(三好)-마츠나가(松永) 일당에게 습격 받아 죽은 다음부터 바쿠후(幕府) 재건의 뜻을 세우고는 요시카게의 힘을 빌리려 찾아온 것이었다.

 요시카게는 이 귀공자의 방문을 크게 기뻐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온 정성을 다하였고 일부러 안요우지(安養寺) 저택을 신축해서는 시가(詩歌) 모임, 눈구경 잔치, 꽃구경 잔치를 열었다. 쿄우토(京都)에서 칸파쿠() 니죠우 하루요시(二条 晴良)를 초빙해서 성인식까지 치러주었다. 이때 요시아키()를 요시아키()로 개명하였다.


 하지만 요시아키는 환영해주는 잔치보다 요시카게의 무력(武力)을 원했다. 아사쿠라의 힘을 빌려 쿄우토(京都)에 올라가 쇼우군() ()을 잇고자 했던 것이다. 요시카게에게 있어서도 천하를 바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을 터였다. 이 모처럼의 찬스를 요시카게는 허사로 만들었다. 우유부단한 태도를 일관하여 요시아키의 실망을 사고 말은 것이다. 얄궂게도 이후 요시아키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의지하였다. 노부나가는 이 기회를 잡자마자 요시아키를 내세워 쿄우토에 올라가 쇼우군의 명성을 빌려 실질적으로는 자신이 천하의 패자(覇者)가 된 것이다.


 요시카게는 무장()이라기 보다는 문화인의 색체가 강했다.

 그는 1548년에 16살의 나이로 아사쿠라 가문의 당주가 되었지만 군정(軍政)도 내정(內政)도 숙부인 노리카게()에게 맡겼다. 노리카게는 불문에 들어가 소우테키(宗滴)라는 호()를 칭하게 되는데 그는 일대의 걸물이었다. 아사쿠라 가문의 기둥이 되어 활약하며 주변에 무명(武名)을 떨쳤지만, 1555카가(加賀)의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3])와의 싸움 도중 안타깝게도 병으로 전쟁터의 진영(陣營)에서 죽었다. 79살의 고령이었다고 한다. 아사쿠라 가문의 토대(土臺)가 무너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일대손실이었다.


 요시카게는 문약(文弱)으로 내달렸을 뿐만 아니라 여성관계도 화려했다. 첫 번째 부인은 일찌감치 죽었지만, 두 번째 부인은 코노에(近衛) 가문의 딸로 [미모가 견줄 이 없다(容色無雙)]는 절세의 미녀였다고 한다. 세번째 부인은 코사이쇼우노츠보네(小宰相局)라고 하며 두 딸을 낳았다.

 가장 요시카게의 마음을 빼앗았던 이가 네 번째 부인이었다. 사이토우 효우부쇼우유우(藤 兵部少輔)의 딸로, 코쇼우쇼우(小少)라고 불렸다. 미녀에다가 말까지 잘하였기에 요시카게는 그녀가 하자는 대로만 하였다고 한다. 아사쿠라 가문의 멸망은 그녀의 교언영색(巧言令色)이 원인이 되었다고 일컬어질 정도이다.


 요시아키를 쇼우군에 앉힌 노부나가는 요시아키의 이름으로 요시카게에게 상경하라는 친서를 보냈다. 요시카게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것은 노부나가에 대한 선전포고를 의미했다. 1570 4, 노부나가가 에치젠에 3만여의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들어갔다. 오우미(近江)에 가까운 전선기지인 테즈츠야마(手筒山)성(城)이 하루 만에 낙성되어 성병 1400이 죽었다. 계속해서 오다 군()은 츠루가(敦賀)카네가사키(崎)성(城)으로 몰려들었다. 다행히도 이때의 위기는 아자이 나가마사( 長政)의 도움으로 피할 수 있었다. 예전부터 동맹을 맺고 있던 아자이 군()이 노부나가의 배후를 공격, 그들을 놀라게 해서는 도망치게 한 것이다.


 이로부터 2개월 뒤, 아네가와(姉川) 천(川)에서 아사쿠라-아자이 연합군 2만과 오다-토쿠가와() 연합군 35천이 격전을 전개하여, 아사쿠라-아자이는 패했다. 이때 요시카게는 출진하지 않고 일족인 카게타케(景健)가 지휘하였다.


 3년 후인 1573년은 아사쿠라 가문에게 있어서 운명적인 해가 되었다.

 아자이 씨()오다니(小谷)성(城)이 오다 군의 맹공격을 받고 있다는 소식에 어쩔 수 없이 요시카게는 뭉기적대고 있던 엉덩이를 들어 출격한 것이다. 따르는 군세는 15천이었다. 그러나 왕년의 위세가 없었으며 전년도부터 오다 측의 모략의 손길이 뻗쳤기에 이미 마에바 요시츠구(前波 吉), 토미타 나가시게(富田 長繁) 등의 유력 무장이 오다 측으로 돌아선 상태였다. 거기에 막 출격할 때가 되어서 일족인 아사쿠라 카게아키라(朝倉 景鏡)가 병이 걸렸다는 이유로 출진을 거부하였으며, 미조에 나가야스(溝江 長逸)도 역시 출진을 거부한 것이다. 요시카게의 약화된 통제력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지경이었다.


 아사쿠라 군은 오다니 성()에 도착하긴 하였지만, 오다 측의 활발한 모략의 손길이 계속 뻗쳐와 가신들이 계속해서 배신하였다. 요시카게는 도착한 지 3일만에 에치젠으로 도망쳤다. 본거지인 이치죠우다니()도 결코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패주해 온 요시카게에게 병에 걸려 자리에 누워있을 터인 카게아키라가 출두한 것이다. 충성스런 표정으로 오오노(大野)로 옮기라고 진언했다. 요시카게가 오오노의 도우운(洞雲)사(寺)로 옮기자, 또다시 카게아키라에게서 도우운 사()는 제 거성 이누야마(犬山)()에서 떨어져 있으니, 로쿠보우(六坊)의 켄쇼우(賢松)()로 이동해 주십시오라는 연락이 왔다.


 카게아키라의 덫이었다.

 요시카게가 켄쇼우 사()로 옮기자, 카게아키라의 군사들이 몰려와 포위한 것이다.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요시카게는, “네놈들 부자(父子)의 생명은 필시 3년 안에 끊어질 것이다[각주:4]고 저주를 퍼붓고는 자해(自害)했다.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

1533년 에치젠(越前) 이치죠우다니()에서 태어나 16살에 가독(家督)을 이었다. 처음엔 노부카게(延景)’라 하였지만, 쇼우군() 요시테루(義輝)의 이름 글자를 하사 받아 요시카게(義景)’로 개명. 노신 아사쿠라 소우테키(朝倉 宗滴)가 죽은 후는 무위를 떨치지 못하고 아네가와(姉川) 전투에서 패배, 3년 후에 멸망하였다. 41.

  1. 참고로 이 책은 1978년에 발행된 책. [본문으로]
  2. 스에 타카후사(陶 隆房)의 모반으로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 義隆)와 함께 죽은,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장인이다. [본문으로]
  3. 혼간지(本願寺)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해당 지역 내 반란군. [본문으로]
  4. 카게아키라는 다음 년도 1574년에 잇코우잇키 군에 공격받아 전사. [본문으로]

 센고쿠라는 시대의 무서움을 말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1574년의 설날, 기후(岐阜)성(城)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정월 잔치를 연 자리였다. 중신들과 종속 다이묘우(大名)들이 물러간 뒤 친위대(馬廻) 장수들만의 술자리가 되었을 때, 노부나가는 검은 상자 세 개를 가지고 오게 하였다. 누군가가이번에는 어떤 안주인 것입니까?”하고 묻자, 노부나가는이 세상에 진귀한 안주다라고 말했다.

 노부나가가 꺼낸 내용물을 보고 자리는 일순 정적에 휩싸였다.

 아름다운 금은으로 채색되어 있지만, 인간의 두개골인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거기에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 아사쿠라 사쿄우다이부 요시카게[朝倉 左京大夫 義景]

. 아자이 시모츠케[井 下野(=히사마사(久政)]

. 아자이 비젠[井 備前(=나가마사(長政))

 바로 전년도에 노부나가에게 쓰러진 자들의 두개골이었던 것이다.

 

 부자가 함께 사람들 앞에 두개골이 내보이게 된 아자이 가문은 오우미(近江)의 명문가였다.

 비와코(琵琶湖) 호수의 북부에 그들의 거성 오다니(小谷)성(城)이 있었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동쪽으로는 산기슭을 둘러싼 거대한 연못이 천연의 해자(垓子)를 이루고 있었다. 거기에 남쪽에도 커다란 늪이 있었다. 지키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고 공격하기에 역시 이보다 더 어려울 수 없는 성이었다.

 

 오다니 성()이라고 하면 아자이 나가마사의 부인 [오이치노카타()]가 유명하다. 이곳에 시집온 다음부터 [오다니노카타(小谷)]가 된다. 노부나가의 여동생이라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시집을 온 것은 나가마사 20, 오이치가 18살 때였다. 평판이 자자했던 미모의 여성이었다. 나가마사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들은 각각 화려한 생애를 보내게 된다. 장녀는 요도기미(淀君[각주:1])가 되었으며, 차녀는 쿄우고쿠 타카츠구(京極 高次)의 부인, 삼녀는 토쿠가와 2대 쇼우군() 히데타다(秀忠)의 부인이 된다.

 

 아자이 나가마사의 불행은 범용한 부친을 둔 것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조부인 스케마사(亮政)는 기량이 뛰어난 무장이었지만 그 뒤를 이은 히사마사는 놀고 즐기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가신들의 신망도 적었다. 스케마사가 죽자 이 히사마사는 아자이 가문의 원로 격인 오오하시 히데모토(大橋 秀元)를 강제로 할복시켜 버렸다. 나가마사와도 의견이 맞지 않았다. 어렸을 적의 나가마사는 부친의 분노를 사서 일년 정도 오다니의 키요미즈다니(水谷)에 있는 묘우오우(明王)()에 감금당한 적이 있다.

 

 결혼 문제로도 충돌했다.

 나가마사 15살 때였다. 상대는 오우미(近江) 칸논지(音寺)성(城)의 성주 사사키 요시카타( 義賢[각주:2])의 노신 히라이 이가노카미(平井 伊賀守)의 딸이었다. 히라이 씨()는 사사키의 일족이라고는 하여도 그 가신에 불과하였다. 나가마사로서는 사사키 가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오우미 명문의 긍지가 있었다[각주:3]. 아무리 부친의 권유라고는 하여도 승복하기 힘들었다. 그는 이 결혼 이야기를 확실히 거부했던 것이다[각주:4]. 부친 히사마사는 화를 내었지만 가중의 신망은 이미 젊은 주군 나가마사에게 모이고 있었다. 히사마사는 이 다음 해에 가신들의 청원으로 은거 당하게 된다.

 

 여기서 언급해 두어야 할 것이 아자이 가문 비극의 원인은 조부 스케마사 대부터 이어져 왔던 에치젠(越前) 아사쿠라 가문과의 친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와 당시의 아사쿠라 가문의 당주 요시카게는 사이가 나빠 천하포무(天下布武)를 목표로 하는 노부나가가 두 번이나 상경을 재촉했는데도 불구하고 요시카게는 이를 계속 거절한 것이다. 이는 노부나가에 대한 도전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때 요시카게는 동맹자인 아자이 나가마사에게 밀사를 보내 자신들과 함께 움직일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나가마사는 괴로운 입장에 놓였다.

 노부나가는 마누라의 오빠였다. 그렇다고 해서 조부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아사쿠라와의 친분을 버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가마사는 노부나가에게 자신에게 아무 말도 없이 무단으로 아사쿠라를 공격하지 않도록 약속시켰다.

 

 하지만 1570 4.

 노부나가는 대군을 일으켜 에치젠 침공을 시작하였다.

 이때 나가마사의 결단이 아자이 가문의 명운을 가르게 되었다. 아자이 가문은 노부나가의 침략을 보고 마누라의 오빠라는 노부나가와의 관계보다, 50년에 걸친 아사쿠라 가문과의 교분을 우선시한 것이다. 보수적인 부친 히사마사의 의견이 강했던 것이다.

 

 오다 측에서는 아자이가 공격해 올 턱이 없다고 믿고 에치젠에 진공하였던 것이지만 거기에 갑자기 등뒤에 있던 아자이 군이 공격해 온 것이다. 오다 군은 완전히 퇴로가 가로막힌 꼴이 되었다. 괴멸의 위기였다. 오다 군은 간신히 비와고(琵琶湖) 호수 서쪽 산맥으로 우회하여 퇴각했다.

 이 결단으로 인해 아자이 가문은 노부나가를 완전히 적으로 돌려버리게 된다. 파죽지세와도 같은 신흥세력을 버리고 늙은 대국 아사쿠라 가문과 운명을 함께하고자 결의한 것이다.

 

 1573 8.

 오다 군은 재차 에치젠(越前)에 침공하여 별 힘 안들이고 아사쿠라 군을 괴멸시키고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로쿠보우(六坊) 켄쇼우(賢松)()에 몰아넣어 자살하게 만들었다.

 오다니 성()의 아자이 가문은 이젠 완전히 고립되었다. 압도적 우세에 선 오다 군은 이번에야말로 아자이의 숨통을 끊어놓고자 성 밑 마을(城下町)을 오다 군의 군사들로 메운 것이었다.

 곧바로 토라고젠야마(虎御前山) 산이 오다 측의 공격을 받았다. 이곳은 오다니 성()을 지키는 요해(要害)의 땅으로 아자이의 병사 482명은 끝까지 오다 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남은 것은 아자이의 본거지 오다니 성()만이 남게 되었다.

 오다의 대군은 슬금슬금 성을 포위하여 파리가 드나들 틈도 만들지 않았다. 이제 오다니 낙성은 시간의 문제였다. 여기까지 이르자 노부나가는 후와 카와치노카미(不破 河)를 사자로 보내어 아자이 나가마사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얌전히 성을 건네고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면, 야마토(大和)() 전체를 준다고 까지 말하였다. 그러나 나가마사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오다니 성() 최후가 다가오자 나가마사는 장졸 700여명을 모이게 한 후 자신의 위패를 내보이며 각오를 단단히 했다. 이 다음날인 8 27, 오다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나가마사는 낙성이 되기 전에 오이치노카타와 딸 셋을 노부나가에게 보내었고, 부친 히사마사가 28일에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자, 성에 불을 지르고 배를 갈라 죽었다. 29세의 젊은 나이였다.

 

 아자이 부자의 목은 쿄우토(京都)로 보내져,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목과 함께 옥문에 내걸렸다.

 

[아자이 나가마사( 長政)]

1545년 히사마사(久政)의 아들로 태어난다. 처음엔신쿠로(新九朗)’라고 하였다. 오우미(近江) 오다니(小谷) 성주.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여동생 오이치노카타(お市の方)에게 장가간 것으로 유명. 롯카쿠 요시카타(六角 義賢)를 물리치고, 쿠츠키(朽木)()를 거느리며 오우미(近江)의 대부분을 영유(領有)한다. 처음엔 오다 씨()와 사이가 좋았지만,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와의 맹약으로 인하여, 노부나가의 에치젠(越前) 침공 때는 아사쿠라 측에 서서 노부나가와 싸웠다. 1570년 아네가와의 전투(姉川の戦い)에서 오다-토쿠가와 연합군에 대패. 1573년 거성 오다니를 노부나가에 공격받아 패사(敗死).

  1.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를 낳는 히데요시의 측실. 키미(君)는 에도 시대 유곽에 있던 여성의 끝에 붙이던 것으로, 그녀를 낮추려는 의도가 이어진 것으로, 당시에 여성을 부를 때는 그냥 '도노(殿)(ex;요도도노)’나 ‘노(の)’ 다음에 ‘카타(方)’(ex;요도노카타=淀の方)를 붙였다. [본문으로]
  2. 롯카쿠 요사카타(六角 義賢)를 말한다 [본문으로]
  3. 아자이 씨(氏)는 지역 호족 출신으로, 사사키의 분가인 쿄우고쿠(京極)씨(氏)의 부하에 지나지 않아 그다지 격이 높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사키 즉 롯카쿠 씨(氏)는 무가로써는 최상격의 가문이었다. [본문으로]
  4. 실은 결혼식만 치른 후 이혼 [본문으로]

한국(나름 '중도우익' 인지라 작년만 해도 '대한민국'이라는 호칭을 주로 썼지만, 요즘에야 뭐..)은 독도로 나라가 흔들리고, 이런 기사("동해 일본해 아닌 한국해"<리아 노보스티>)로 승전가를 울리고 있을 때, 일본은 다음 날 17일에 이렇게 역습을 하였다.

< http://www.mofa.go.jp/mofaj/shin/index.html>

저 붉은 칸을 클릭하면 다음과 같은 화면으로 이동한다.

< http://www.mofa.go.jp/mofaj/area/nihonkai_k/russia/index.html>

저 화면에서 '개요(概要)'와 '본문(本文)'을 해석하였다.

* 地図リスト(PDF) -> 지도 리스트(PDF)는 차후 번역하겠다.

개요(概要)

< http://www.mofa.go.jp/mofaj/area/nihonkai_k/russia/gaiyo.html >

日本海呼称問題(ロシアにおける調査):

일본해 호칭 문제(러시아에서의 조사) : 개요


외무성(外務省) 2006 11월부터 2007 2월에 걸쳐 러시아에 위치하고 있는 도서관, 고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 17세기부터 19세기의 지도에서, 일본해 해역의 명칭이 어떻게 표기되어 있는가에 대해서 조사하였다.

그 결과, 조사한 고지서 51점 중, 일본해 해역에 어떤 명칭이건 쓰여 있는 지도 40점 중 72.5%에 해당하는 29점이 일본해(日本海)라 표기되어 있는 것이 명확해졌다. 또한 일본이 쇄국을 펼치고 있었던 시대에 발행된 지도 27점 중 63%에 해당하는 17점이 일본해라 표기되어 있는 것이 명확해져, 지금까지 미국, 영국, 프랑스에서 실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해라는 명칭이 우리가 쇄국을 펼치고 있기에 국제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던 19세기 초반부터 서구에서는 정착되어 왔다는 것이라는 것이 새삼 확인되었다.

(: 한국은 [일본해의 명칭이 지배적이 된 것은 20세기 초반 일본의 제국주의, 식민지주의의 결과이다]고 주장하며, 그 근거의 하나로써 한국측의 독자적인 조사에 따라, 러시아 국립 도서관, 러시아 국립 고문서 보관소 및 러시아 국립 해군성 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는 18세기부터 19세기에 작성된 고지서 19점을 조사한 결과로써, 52.6%에 해당하는 10점이 [한국해(韓国海] [동해(東海)] , 한국과 관련된 명칭이 표기되어 있으며, 일본해라고 표기된 고지서는 15.8%에 해당되는 3점밖에 없다고 하고 있다.)

본문(本文)

<http://www.mofa.go.jp/mofaj/area/nihonkai_k/russia/honbun.html>

日本海呼称問題(ロシアにおける調査

일본해 호칭 문제(러시아에서의 조사)


* 외무성은 2006 11월부터 2007 2월에 걸쳐서 러시아에 있는 도서관, 고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 17세기부터 19세기의 지도에서, 일본해 해역의 명칭이 어떻게 표기되어 있는가에 대해서 조사를 행했다. 이는 [일본해라는 명칭은 우리나라가 쇄국을 펼치고 있기에 국제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던 19세기부터 유럽에 이미 정착되어 왔던 것이다]는 우리나라의 주장을 재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러시아 국립 도서관, 러시아 국립 고문서 보관소(모스크바), 러시아 국가 도서관(구 시도린(??) 국립 도서관) 및 러시아 국립 해군성 문서보관소(상트페테르부르크) 4개소에서 조사했다).

* 한편 한국측은 예전부터 [일본해라는 명칭이 지배적이 된 것은 20세기 전반 일본의 제국주의, 식민지주의의 결과이다] [19세기의 중기부터 말기까지는 동해와 일본해 두 명칭이 세계 지도에 쌍방이 평범하게 사용되어 왔다]고 주장해 왔다. 한국측은 그 근거로써 독자적으로 행한 러시아에서의 고지도 조사를 들고 있으며, 그 조사에 의하면 한국은 러시아의 공립 도서관 및 고문서 보관소가 소유하고 있는 지도 중 19점에 대해서 조사를 행한 결과, 한국에 관련된 것은 10(Sea of Korea(7), East Sea(1), Eastern Ocean(1), Gulf of Korea(1))이며, 일본에 관련된 것(Sea of Japan) 3장뿐이었다고 한다()

: [East Sea in Old Western Maps with Emphasis on the 17~18th Centuries] The Society for East Sea, The Korean Overseas Information Service 출판(2004)에서


1. 조사 목적


(1) 우리나라는 일본해라는 호칭이 그 해역에 국제적으로 확립된 유일한 것이라는 것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으며, 그 주요한 논거로써 이하의 세 가지를 들고 있다.

(A) 일본해라는 호칭은 현재 국제적으로 확립되어 있다는 것.

(B)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일본해라는 명칭이 19세기 초반부터 유럽의 지도에 정착되어 왔다는 것.

(C) 지리적 명명법을 보더라도 일본해라는 명칭은 타당하다는 것.

(2) 이 중 상기의 (B)의 역사적 관점에 대해서는, 국토지리원의 연구자 2명이 유럽에서 발행된 200점 이상의 고지도를 조사한 결과, 18세기 말기부터 이 해역에는 [중국해(中国海], [동양해(東洋海], [조선해(朝鮮海], 일본해 등 다양한 명칭이 사용되고 있었지만, 19세기 초반부터 유럽의 지도를 중심으로 일본해의 명칭이 다른 것을 압도하며 사용된 사실이 확인되었다(1). 또한 외무성이 행한 대영도서관 및 케임브리지 대학 소장 고지도 조사나 프랑스 국립 도서관 소장 지도 조사에 있어서도 같은 사실이 확인되었다(2). 유럽에서 발행된 지도 중에서 19세기 초반부터 일본해의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반에 걸쳐 프랑스, 영국, 러시아 등의 탐험가가 일본해 주변을 탐험하여, 일본해가 일본열도로 인해 태평양과 떨어져 있다는 지리적 형상이 명확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으며, 이 생각은 많은 연구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또한 일본 주장의 정당성을 더욱 검증하기 위해서, 풍부한 지도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미의회 도서관에서, 1300년부터 1900년에 발행된 지도들에 일본해라는 호칭이 정착되어 있는지 어떤지에 대해서 조사를 행해, 일본해역에 어떤 명칭이든 호칭이 기재되어 있는 지도 1435점 중 77.4%에 해당하는 1110점의 지도가 일본해라는 표기를 쓰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어,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에 있어서도 앞서 말한 듯이 영국, 프랑스의 결과와 같은 사실이 확인되었다(3).


1: 외무성 작성의 [일본해] 팜플렛 참조(링크: 일본어)

2: 외무성 홈페이지 [대영도서관 케임브리지 대학이 소장하고 있는 지도에 관한 조사] [프랑스 국립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지도에 관한 조사] 참조(링크: 일본어)

3: 외무성 홈페이지 [미의회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지도에 관한 조사]참조(링크: 일본어)


(3) 외무성은 이 주장의 정당성을 더욱 검증하기 위해서, 앞서 말한 미, , 프랑스의 조사에 이어 이번에는 러시아에서 조사를 행해, 특히 19세기에 발행된 지도 중에서 일본해의 호칭이 정착되어 있는지 어떤지에 대해서 다시 확인하고자 했다.

(4) 또한 이 조사의 배경에는 [‘일본해라는 명칭이 지배적이 된 것은 20세기 전반 일본의 제국주의, 식민지주의의 결과이다] [19세기 중기부터 말기까지는 [동해] [일본해] 양쪽의 명칭이 세계지도에서 평범하게 사용되고 있었다]는 한국측의 주장이 있다. 한국은 상기의 주장을 하는 근거의 하나로써 한국측 독자적인 조사에 따라 러시아 국립 도서관, 러시아 국립 고문서 보관소 및 러시아 국립 해군성 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는 18세기부터 19세기에 제작된 고지도 19점을 조사한 결과, 52.6%에 해당하는 10점이 [한국해] [동해]등 한국과 관련된 명칭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일본해라고 표기된 고지도는 15.8%에 해당하는 3점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2. 조사 개요.


(1) 본 조사는 주러시아 일본대사관을 통해서 실시했다. 동 대사관은 러시아 및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이하 4곳의 러시아 도서관 및 고문서 보관소에서 지도의 연구를 행했다.

l 러시아 국립 도서관(모스크바)

l 러시아 국립 고문서 보관소(모스크바)

l 러시아 국가 도서관(상트페테르부르크)

l 러시아 국립 해군성 문서보관소(상트페테르부르크)

(2) 우선 처음에 러시아 국립 도서관에서, 일본해 해역이 기재되어 있는 지도 300점 중에서 19세기 이전에 출판된 92점의 지도 리스트를 작성했다.

(3) 상기 리스트를 기준으로, 조사할 수 있는 허가가 내려진 상기 4곳의 도서관 및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 지도 중 촬영, 복사 등이 허용된 지도 중에서 무작위로 고른 51점을 이번 조사 대상으로 했다(정해진 기간 내에 조사해야 했기에 모든 것을 조사할 수는 없었기 때문.)


3. 조사 결과


(1) 조사한 총 지도 수: 51.

(다른 도서관 또는 고문서에서 중복된 지도는 포함하지 않았다)

(2) 연대별(1630~1899년까지)

(A) 16세기: 0

(B) 17세기: 2(3.92%)

(C) 18세기: 13(25.49%)

(D) 19세기: 36(70.59%)

(3)호칭 별

조사한 지도의 호칭 별 일람

당해 해역의 명칭

1601~1700

1701~1800

1801~1867

1868~1900

지도수

비율

일본해

 

2

15

12

29

72.5%

조선해

 

5

2

1

8

20.0%

조선해협

 

 

1

 

1

2.5%

동해

 

1

 

 

1

2.5%

중국해

 

1

 

 

1

2.5%

(표기없음)

2

4

5

 

11

 

(합계)

2

13

23

13

51

 

 

* 각 공문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지도 중 중복되는 것을 제외한 것

 

(4) 조사기관별

 

조사기관별 조사한 지도 일람

N

기관명

일본해 해역이 들어간 지도수

복사할 수 있었던 지도수

1

러시아 국립 도서관

(모스크바)

42

37

2

러시아 국가 도서관

(상트페테르부르크)

41

11

3

러시아 국립 해군성 문서보관소(상트페테르부르크)

45

1

4

러시아 국립 고문서 보관소

(모스크바)

14

2

5

러시아 제국 외교 고문서 보관소(모스크바)

조사 불허

-

6

국립 지리학협회 고문서 보관소(상트페테르부르크)

조사 불허

-

 

: 4개소의 보관소에서, 일본해 해역이 기록된 17세기~19세기까지의 지도 142점을 확인. 그후 각 보관소에서 중복된 지도를 제외하면서, 정해진 기간 내에 조사 가능했던 지도(무작위 추출)은 전부 51.

 

4. 분석

 

(1) 1630년에서 1899년 사이에 러시아에서 발행되어, 이번에 조사할 수 있었던 지도 51점 중 일본해 해역에 어떤 명칭이건 호칭이 기재되어 있는 것은 전부 40점이었다. 그 중 72.5%에 해당하는 29점이 일본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2) 또한, 이들 40점의 지도 중 일본해 해역을 [조선해]라고 기재된 지도는 8(20.0%), [중국해], [조선해협], [동해]라 기재된 지도는 각각 1(2.5%)에 지나지 않았다.

 

(3) 또한 지도의 발행연대에 주목하면, 18세기까지 발행된 지도에서는 일본해 해역에 어떤 이름이건 호칭이 표기되어 있는 9점의 지도 중 5점에 [조선해]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으며, 그 외에 일본해(2), [중국해](1), [동해](1)의 명칭이 각각 사용되었지만, 19세기에 들어서자 일본해 해역에 어떤 이름이든 표기된 31점의 지도 중 27(87%)에 일본해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5. 결론

 

 이번 조사로 인해, 일본해의 명칭이 19세기에 들어서자 다른 명칭을 압도하며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 판명되어, 지금까지의 고지도 조사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가 쇄국을 펼치고 있었기에 국제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던 19세기 초반부터 일본해라는 표기가 정착되어 와 있었다는 것이 러시아에서의 고지도 조사에서도 확인되었다.

 

6. 한국측의 조사에 대한 비판적 검토

 

 본 조사를 기준으로, 한국 정부가 2002년에 같은 도서관에서 행한 같은 조사의 결과를 검토해 보면, 이하의 의문점을 지적할 수가 있다.

 

(1) 조사대상의 선정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한국측은 우리나라가 행한 조사 장소인 러시아 국립 도서관, 러시아 국립 고문서 보관소(모스크바), 러시아 국립 해군성 문서보관소(상트페테르부르크) 3개소에 보관되어 있는 18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서 합계 19점의 고지도를 이용하여 조사하였지만, 19점의 선정 기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도서관 등의 조사 허가 문제가 있다고는 하더라도, 일한의 조사 결과에 이렇게까지 큰 차이(특히 일본해라고 표기된 지도의 점 수 차이)가 있는데도, 한국측이 그 선정 기준을 공표하지 않고 있는 것은, 선례에 따라 보건대 한국측의 조사 결과에 의문이 남는다.

 

(2) 한국측은 20세기 초반의 고지도에 대해서 대부분 조사 결과를 공표하지 않았다.

 

 한국측은 [‘일본해라는 명칭이 지배적이 된 것은 20세기 초반 일본의 제국주의, 식민지주의의 결과이다]고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반의 지도에 대해서는 대부분 조사 결과를 공표하지 않고 있다.

 

(3) 한국측은 [동해]를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외의 명칭도 그 주장의 근거로 하고 있다.

 

 한국측은 [동해]를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해] [조선만(朝鮮灣)]까지 [한국과 관계가 있는 명칭]으로 하여 [동해]와 동일시해서는, 이들 전부를 합계한 수와 일본해 표기의 지도 수를 비교하여 조사 결과를 공표하고 있다. 이는 한국이 주장하는 [동해]가 한국측의 조사에 있어서조차 대부분의 고지도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地図リスト(PDF)

 

스트(PDF) -> 일본어 링크

 

참고로 우리 측 주장.

이지

 

* 연도는 일본의 연호인 헤이세이(平成)’로 쓰여 있으나, 서력으로 바꾸었다.

** 일본에서 쓰여진 글이기에, ‘일본해(日本海)’라는 명칭을 썼다.

*** 일본에서 쓰여진 글이기에, ‘우리나라는 일본을 지칭한다.

**** 일본에서 쓰여진 글이기에, ‘한일관계일한관계로 표기하였다.

***** 링크로 된 곳은 차후 번역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