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재미있는 일이 많다.

내 이야기 2008. 9. 6. 02:02 Posted by 발해지랑

< 그래도 프라이버시를 위해서 아이디는 지웠다

찍어 놓았으니 나중에 경찰에 신고했을 시에 편함.>

방금 받은 쪽지...

어떤분은 일빠라고 하고...

어떤분은 국수주의자라고 하고...

더구나 저 분은 '증거자료'라고 하시는데 무엇을 가지고 증거자료라고 하시는 것인지...

링크를 가져온 것도 아니고, 누구의 논문을 인용한 것도 아닌데...

어디에 증거자료를 가지고 오셨는지?

더군다나 자주 가는지 사커라인을 언급..

자기가 다니는 곳의 이름을그렇게 더럽히면 기분이 좋으신지?

거기서 찌질하다는 말을 들을 것 같지는 않은지?

거기 분들도 님만큼 찌질하다고 생각하시는지?

괜히 좋게 말했다가 받은 쪽지 보고 포스팅~


참고로 쪽지 보낸 사람과 저 댓글은 문자는 동일하고 뒤에 숫자만 다름.


.....요즘 댓글광고도 많은데 익명댓글을 막을 때가 되었나 보군.

  적자 노부야스[信康]의 죽음은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가 말년이 되어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거론할 정도로 슬픈 사건이었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입으로 노부야스에게 죽음을 명령했던 것이다.

 미카와(三河) 지방의 사람들도,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이 정도의 주군은 앞으로 나오기 힘들지"

 라 하며 그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노부야스를 자해(自害)로 몰아넣은 것은 역사상 유명한 '츠키야마도노 사건[築山殿事件]'에 의해서였다. 진상은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다.

 1579 7 16. 이 날 이에야스는 가신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와 오쿠다이라 노부마사[平 信昌]를 오우미[近江] 아즈치(安土)성(城)으로 파견하였다. 노부나가[信長]에게 좋은 말을 헌상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노부나가는 사카이 타다츠구에게 노부야스의 자해를 요구했다고 한다.

 이유는 노부야스가 생모 츠키야마도노와 함께 카이[甲斐] 타케다[武田] 측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노부야스의 부인이며 노부나가의 딸인 토쿠히메[徳姫]가 은밀히 그에 대한 것을 부친 노부나가에게 일러바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야스의 부인 츠키야마도노는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에게 인질로 잡혀있던 시대에 결혼한 부인으로, 그녀는 출신이 이마가와의 일족 세키구치 교우부노쇼우 치카나가[口 刑部少輔 親永]의 딸이었기에 콧대가 굉장히 높았다고 한다.

 어떤 사서에서는 츠키야마도노를 히스테리성의 여성이었다고 하며, 이에야스는 그 엄청난 질투심에 넌더리가 나 토오토우미[遠江] 하마마츠[浜松]로 거성(居城)을 옮겼을 때, 데려가지 않고 노부야스의 오카자키 성[岡崎城]에 남겨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카이[甲斐]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 내통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쩌다가 츠키야마도노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카이[甲斐]에서 온 중국인 의사에게 진찰받던 중 그와 관계를 맺었고, 나중에는 이 의사를 매개로 해서는 타케다 카츠요리와 내통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즉 노부나가-이에야스를 물리칠 방도를 카츠요리와 함께 꾀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신빙성은 거의 없다.

 

 진상은 노부나가가 노부야스를 두려워 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노부나가는 노부야스라는 존재가 장래 오다 가문에 불행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느낀 것은 아닐까? 노부야스와 자신의 적자 노부타다[信忠]를 비교해 보면, 무장으로서의 능력은 노부야사가 월등했다. 오다 가문은 이 노부야스에게 멸망 당하는 것이 아닐까? 불안의 싹은 일찌감치 뽑아 두는 것이 좋다 고 판단한 것은 아닐까?

 

 노부야스는 17살 때 이미 그 능력을 나타내고 있다.

 1575년 토쿠가와 군이 토오토우미[遠江]에서 타케다 카츠요리의 군과 싸웠을 때의 일이다.

 카츠요리의 대군을 피하여 퇴각을 하려고 하였을 때, 노부야스는 나서서 신가리[殿]를 맡았다. 아군 퇴각의 무사안전을 위해 최후미에 위치하며 적의 추격을 막는 임무로, 역전의 무장이라도 극히 어렵다는 큰 임무이다.

 더구나 이때 타케다 군은 10만의 대군이었다[각주:1]. 하지만 노부야스의 말은 기특했다.

 장래에 있을 큰일을 위해서 지금은 연습을 해 두고 싶습니다.”

 이리하여 어린 나이로 타케다의 대군과 대치하며, 적이 오오이가와 강[大井川]을 건너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후에 세키가하라[ヶ原] 결전 시, 이에야스는 정말 나이 먹어서도 열심히 일해야 한다니. 아들이 있었다면 이렇게 피곤할 것도 없었을 텐데하고 용감한 노부야스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노부야스는 또한 육친에 대한 애정도 깊었다. 바로 다음 동생인 오기마루[於義丸-후에 히데야스[秀康]]가 정식으로 이에야스의 자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노부야스의 힘이 컸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오기마루에 대한 애정이 없어 좀처럼 자신의 아들로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노부야스는 직접 오카자키 성[岡崎城]으로 3살 먹은 오기마루를 데려가 여러 노력을 기울여 이에야스와 만나게 하였다. 이에야스도 노부야스의 열의에 져, 오기마루를 자신의 아이라고 승인했던 것이다.

 

 그러한 반면 노부야스에게는 포학한 이야기도 전해내려 오고 있다.

 춤을 좋아하여 자주 그런 무리들을 초대하였는데, 어느 날 옷이 맘에 들지 않고 더구나 춤 실력도 떨어지는 여자아이가 눈에 띄었다. 노부야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그 아이를 활로 쏴서 죽여버렸다고 한다.

 매사냥의 결과가 신통찮은 것을 만난 승려 탓으로 하여, 그 승려의 목에 끈을 묶어 말에 매달아 질질 끌고 다니다가 죽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각주:2]


 1579 8 29.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명령에 따라 우선 츠키야마도노를 토오토우미[遠江] 토미츠카[塚]에서 살해했다.

 이에야스로서는 오다 노부나가의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 명령에 거역하는 것은 곧바로 토쿠가와 가문의 멸망을 의미했다. 자신의 힘은 아직 노부나가에 비해 미약했기에 자기 가문 보전을 위해서는 부인과 적자의 목숨도 뺏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 해의 9 15.

 노부야스에게 할복을 명하는 이에야스의 사자가 토오토우미[遠江] 후타마타 성[二俣城]에 도착했다.

 아마가타 야마시로(天方 山城)와 핫토리 한조우(服部 半) 두 사람이었다.

 노부야스는 자신에게는 죄가 없음을 확실히 말했다.

 아버지에게 모반을 일으키려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나 부친의 명령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이 당시 가부장 권력의 절대성이라는 것이었다.

 노부야스는 조용히 핫토리 한조우에게 자신의 카이샤쿠[介錯][각주:3]를 명했다.

 한조우는 흘러 넘치는 눈물을 멈출 수 없어 그 임무를 맡을 수 없었다.

 아마가타 야마시로로 대신하였다.

 카이샤쿠의 칼이 번뜩이며, 여기에 21살의 생명이 불행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마츠다이라 노부야스(松平 信康)]

1559이에야스[家康]의 첫째 아들로 태어난다. 처음엔 모친 츠키야마도노[築山殿]와 함께 순푸[駿府]에 있었지만,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에서 독립함에 따라,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의 인질이 된다. 1567년 오카자키[岡崎]로 와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딸 토쿠히메[徳姫]와 결혼하고 오카자키 성주가 되지만, 노부나가에게 자해를 명령 받는다.

이 글은 거의 전체가 사실과 다른 글입니다. 필히 밑에 트랙백과 함께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1. 타케다 가문의 동원력은 무리를 해도 3만정도로 10만 가까이 동원하기에는 무리다. [본문으로]
  2. 승려는 불살이라는 부처의 가르침을 전하기에, 승려 주변에 있는 생물은 죽지 않는다는 미신이 있었다. 사냥 결과가 신통치 않다며 툴툴대는 노부야스를 부하가 달래려고 말했다가 지나가던 승려가 그 짜증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배를 가르고 있는 사람의 고통을 없애주어야 했기에, 믿을 만한 사람에 더해 단번에 목을 자를 수 있는 무예가 출중한 사람이 맡았다. [본문으로]

천국에서의 메시지

내 이야기 2008. 8. 20. 00:00 Posted by 발해지랑
NOA님의 블로그에 갔다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름을 써 넣고, 성별, 생년월일을 고른 후 천국에서의 메시지(天国からのメッセージ)라는 버튼을 누르면, '천국'에서 메시지가 온다고 한다(해보는 곳).

그래서 해 보았다.

2008年の僕へ。
元気ですか?2008年ごろの自分のことを懐かしく思い出します。
僕は76歳で、つまり西暦2051年に、ちょっとした病気が原因で生涯を終えます。
思えばいろんな事があったけれど、我ながらなかなか良い人生でした。

だたひとつだけ過去の自分に、つまり今のあなたに伝えておきたい事があります。
それは 2010年の秋のこと、僕はイタリアのミラノへ出かけることになります。
今にして思えば、それは人生の分岐点でした。 細心の注意をはらってください。

最後にひと言、76年間生きてみて思ったのは「ダイエットなんてするもんじゃない」ってこと。
といっても、今のあなたには判らないかな。

では、また。
残された人生を思う存分味わってください。

20008년의 나에게.
잘 지내슈? 2008년 즈음의 내가 그립구먼.
나는 76살, 즉 2051년에 조그만 병이 원인이 되어 죽는다네.
생각해 보면 여러가지 일이 있었고, 내 인생이지만 꽤 괜찮은 인생이었지.

단지 한 가지만 과거의 나에게, 즉 지금의 너에게 전해주고 싶은 일이 있다네.
그건 2010년 가을의 일이었지. 나는 이탈리아 밀라노에 가게 된다네.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그것은 인생의 분기점이었지.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76년간 살아 보고 생각한 것은, [다이어트는 할 만한 것이 아녀!]라는 것...
...이라고 말을 하여도, 지금의 자네에게는 알 수 없겠지.
그럼 또 보세.
남은 인생 맘껏 즐기시게.

...라고 나왔군...
...근데 내가 이탈리아 밀라노에 갈 확률은, 현 대통령께서 전임 대통령같이 자기 고향(오오사카 말고 포항)에서 방문객들과 이야기 나눌 확률보다 적으며, 또한 나와 다이어트...에서 이미 에러(항상 듣는 말이...살 좀 쪄라~...일 정도).

ps; 한글로 이름을 써 넣으면 1966년에 죽는 것으로 나온다... 태어나기도 전에 사망인가?

 사시모노[指物]라는 것은 무사(武士)가 전쟁터에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자 등에 매다는 작은 깃발을 말한다. 그 사시모노에 토리이 스네에몬[鳥居 右衛門]의 모습을 그리게 한 사람이 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의 부하 오치아이 사헤이지 미치히사[落合 左兵次 道久]였다. 그는 실제로 자신의 눈으로 처형당한 스네에몬을 보고 사시모노의 그림으로 처형대 위의 처참한 모습의 스네에몬을 그린 것이었다.

 이 사시모노는 대대로 오치아이 가문의 자손에게 전해졌고, 현재 토우쿄우 대학[東京大学] 사료 편찬소에 보존되어 있다.[각주:1]

 그럴 정도로 토리이 스네에몬의 용기는 센고쿠[戦国]의 사람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준 것이었다.

 

 1575 4.

 토쿠가와 측의 나가시노 성[長篠城]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있었다. 남은 군량은 불과 4~5. 성은 25천의 타케다 군에게 물샐틈없이 포위당해 있었다. 남아있는 계책도 없어 이제는 성안에 있는 병사 모두가 뛰쳐나가 옥쇄하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었다.

 

 나가시노 성주 오쿠다이라 노부마사[平 信昌][각주:2]는 당시 24. 예전에는 부친 사다요시[貞能]와 함께 타케다 씨[武田氏]에 속해있었지만, 신겐[信玄]이 죽은 후 토쿠가와 측으로 말을 갈아탔다.

 오쿠다이라 부자의 배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가 군사를 일으킨 것이 이 싸움의 시작이었다.

 오쿠다이라 노부마사의 배후에는 토쿠가와-오다 연합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군세가 제 시간에 맞추어 와주기만 한다면…'

 그때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이 위기를 버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쨌든 이에야스에게 이 어려운 상태를 하루라도 빨리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 타케다 군의 엄중한 포위를 뚫고 사자를 보내야 했다.

 처음에 성주 노부마사는 오쿠다이라 지자에몬[平 次左衛門]이라는 수영을 잘하는 자에게 명령을 내리려 하였었다. 그런데 지자에몬은 거부했다. 성안에서 탈출한 다음에 만약 성이 함락당하기라도 한다면, 자신은 후세에까지 도망자의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다른 자들도 그러한 이유로 사자의 임무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노부마사는 결심했다. 자기 한 사람 배를 갈라 개성한다면 가신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그 각오를 성병 모두에게 털어놓았다. 토리이 스네에몬이 자원한 것은 이 때였다. 이때 스네에몬 36.


 스네에몬이 성을 빠져나온 것은 14일 밤이었다. 운 좋게 가랑비가 내리는 어두운 밤이었다. 그럼에도 물샐틈없이 포위하고 있는 타케다 군의 눈을 피해 빠져 나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화장실의 하수구를 이용하였다. 암벽을 내려오면 칸사가와 천[川]이었다. 천바닥으로 잠수하였다. 강 건너편에 닿아 올라서자 방울 달린 줄이 장치되어 있었다. 조심스레 그것을 잘랐다

 

 다음 날인 15일 새벽.

 간보우도우게 고개[鴈峰峠]에 한 줄기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다. 탈출 성공 시에 피우기로 했던 약속한 신호였다.

 그 후로는 모든 것이 착착 진행되었다. 이에야스와도 만났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도 만날 수 있었다.

 

 16.

 간보우도우게 고개에서 두 번째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다. 구원 결정의 신호였다.

 스네에몬은 구원의 군세가 온다는 것을 성의 모두에게 자신의 입으로 전하고 싶었다. 노부나가는 위험하게 타케다의 포위진을 돌파하면서까지 성에 돌아갈 필요는 없다. 오다 군과 동행하라고 말해 주었지만, 그것을 뿌리치고 또다시 적지에 잠입한 것이었다.

 스네에몬은 나가시노 성()의 건너편인 시노바노[篠場野]라는 곳까지 도착했다. 이제 성은 눈 앞이었다.

 

 그러나 피어오르는 연기를 의심하였는지 타케다 측의 경계는 한층 더 삼엄해져 있었다. ()을 두르고, 바리케이트[鹿垣]를 설치하여 바닥에는 모래까지 뿌려 발자국까지 확인하려 하였다.

 스네에몬은 이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머뭇거리게 되었고 거동이 수상한 자라 하여 타케다 측에 잡혀버렸다. 타케타바[竹束][각주:3]를 든 타케다의 아시가루[]로 변장하였다가 각반의 형태가 다른 다는 것을 검문 받아 잡혔다고도 한다.

 

 어쨌든 카츠요리 앞으로 잡혀온 스네에몬은 숨기지 않고 밀사의 임무를 진술하였다.

 이때 카츠요리[頼]는 오히려 스네에몬을 칭찬하였다고 한다. 가신으로 맞이하여 중하게 쓰겠다는 말까지 하였다. 그리고 하나의 임무를 명하였다.

 나가시노 성[長篠城]의 정면에 처형대를 세우고 거기에 묶인 스네에몬이 성안의 병사들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 노부나가의 원군은 오지 않는다. 이젠 성문을 열고 항복하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다.

 고 말하라는 것이었다. 스네에몬은 이 명령을 받아들였다.

 목숨만 구해주신다면 어떤 일이건 하겠습니다. 더군다나 땅까지 주신다니 이보다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처형대가 높이 세워졌다. 기둥에 묶인 스네에몬에게 초여름의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눈 앞의 나가시노 성벽에 많은 동료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타케다의 군사들도 숨을 죽이고 처형대 위에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스네에몬의 입이 열렸다. 큰 목소리였다.

 노부나가님은 이미 오카자키[岡崎]에 와 있으시다. 이에야스님도 노다[野田]까지 군을 진출시키셨다~”

 카츠요리를 시작으로 타케다의 군사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다. 그러나 스네에몬의 목소리는 한번 더 나가시노 벌판에 울려 퍼졌던 것이다.

 성안의 모두들~ 반드시 3일안에 원군이 온다!”

 타케다 측에 혼란이 일어났다. 병사들이 처형대로 달려갔다. 몇 자루나 되는 창이 스네에몬의 몸을 찔러 반대편으로 뚫고 나왔다.

 

 1575 5 21.

 타케다 카츠요리의 25천의 대군은 오다-토쿠가와 연합군에게 나가시노 성밖의 시타라가하라[原]에서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 전투에서 타케다 군은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 昌景], 바바 노부하루[馬場 信春], 사나다 노부츠나[ 信綱] 등 신겐 때부터 활약해온 용장들을 다수 잃었으며, 카츠요리 자신도 겨우 도망쳤다.

 

[토리이 스네에몬(鳥居 右衛門)]

오쿠다이라 노부마사[ 信昌]의 부하로 미카와[三河] 이치다[市田]에서 태어나 이름을 카츠아키[勝商]라 하였다고 한다. 나가시노 성터 부근의 스네에몬 처형장터에는 석비가 서있다.

  1. 위에 있는 그림을 말한다. [본문으로]
  2. 이때는 아직 사다마사[貞昌]. 후에 노부나가[信長]에게 이름글자 ‘노부[信]’를 하사 받은 다음부터 노부마사[信昌]라는 이름을 쓴다. [본문으로]
  3. 철포 탄환을 막기 위해 대나무를 묶은 것. [본문으로]

<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일본판 >

 후쿠이(福井)()에서 아스와가와(足羽川)()을 내륙 쪽으로 10km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에치젠 평야(越前平野)가 끝나면서 산맥이 주위를 둘러싼 작은 골짜기의 마을로 들어간다. 거기가 이치죠우다니(). 지금은 한적한 농촌이지만, 센고쿠(戦国) 시대에 이곳은 에치젠 일국을 지배했던 아사쿠라(朝倉)()의 본거지였다. 근년[각주:1]이 되어 이 지역은 갑자기 주목 받았다. 아사쿠라 씨()의 저택이 발굴 조사되어 거의 그 전모가 확실히 드러난 것이다. 이로 인해 센고쿠다이묘우(戦国大名)의 생활 실태라는 것이 생생히 떠오르게 되었다.

 저택의 유적 전체가 탄 흙과 재로 구성된 층으로 덮여 주춧돌이나 정원석(庭園石)의 겉은 타고 금이 가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1573 8월 아사쿠라 가문이 괴멸될 때 이치죠우다니()는 큰 불에 휩싸여 소실(燒失)되었다는 기록을 뒷받침함과 동시에 그 종언(終焉)의 무시무시했었음을 유적은 말해주고 있다.


 센고쿠 시대. 이치죠우다니는 ‘호쿠리쿠(北陸)의 쿄우토(京都)’라고 불리어질 정도로 화려한 성 밑 마을(城下町)이었다. 여기에는 전란으로 혼란스러운 쿄우토를 피해온 상급 귀족(公卿)이나 문화인들이 모여있었다. 우다이진(右大臣) 산죠우 킨요리([각주:2])나 다이나곤(大納言) 아스카이 마사츠나(飛鳥井 正綱)가 와있었으며, 렌가(連歌)의 제1인자 소우기(宗祇), 소우쵸우(宗長)의 사제(師弟)도 방문했었다. 당대 제일의 국학(国学) 키요하라 노부카타( 宣賢)도 초대받았다.

 그 중에서도 거물은 아시카가 쇼우군(足利 ) 요시테루(義輝)의 동생 요시아키(義秋)였다. 요시아키는 1567 11월에 이치죠우다니(一乗)를 찾아왔다. 2년 전에 형 요시테루가 미요시(三好)-마츠나가(松永) 일당에게 습격 받아 죽은 다음부터 바쿠후(幕府) 재건의 뜻을 세우고는 요시카게의 힘을 빌리려 찾아온 것이었다.

 요시카게는 이 귀공자의 방문을 크게 기뻐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온 정성을 다하였고 일부러 안요우지(安養寺) 저택을 신축해서는 시가(詩歌) 모임, 눈구경 잔치, 꽃구경 잔치를 열었다. 쿄우토(京都)에서 칸파쿠() 니죠우 하루요시(二条 晴良)를 초빙해서 성인식까지 치러주었다. 이때 요시아키()를 요시아키()로 개명하였다.


 하지만 요시아키는 환영해주는 잔치보다 요시카게의 무력(武力)을 원했다. 아사쿠라의 힘을 빌려 쿄우토(京都)에 올라가 쇼우군() ()을 잇고자 했던 것이다. 요시카게에게 있어서도 천하를 바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을 터였다. 이 모처럼의 찬스를 요시카게는 허사로 만들었다. 우유부단한 태도를 일관하여 요시아키의 실망을 사고 말은 것이다. 얄궂게도 이후 요시아키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의지하였다. 노부나가는 이 기회를 잡자마자 요시아키를 내세워 쿄우토에 올라가 쇼우군의 명성을 빌려 실질적으로는 자신이 천하의 패자(覇者)가 된 것이다.


 요시카게는 무장()이라기 보다는 문화인의 색체가 강했다.

 그는 1548년에 16살의 나이로 아사쿠라 가문의 당주가 되었지만 군정(軍政)도 내정(內政)도 숙부인 노리카게()에게 맡겼다. 노리카게는 불문에 들어가 소우테키(宗滴)라는 호()를 칭하게 되는데 그는 일대의 걸물이었다. 아사쿠라 가문의 기둥이 되어 활약하며 주변에 무명(武名)을 떨쳤지만, 1555카가(加賀)의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3])와의 싸움 도중 안타깝게도 병으로 전쟁터의 진영(陣營)에서 죽었다. 79살의 고령이었다고 한다. 아사쿠라 가문의 토대(土臺)가 무너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일대손실이었다.


 요시카게는 문약(文弱)으로 내달렸을 뿐만 아니라 여성관계도 화려했다. 첫 번째 부인은 일찌감치 죽었지만, 두 번째 부인은 코노에(近衛) 가문의 딸로 [미모가 견줄 이 없다(容色無雙)]는 절세의 미녀였다고 한다. 세번째 부인은 코사이쇼우노츠보네(小宰相局)라고 하며 두 딸을 낳았다.

 가장 요시카게의 마음을 빼앗았던 이가 네 번째 부인이었다. 사이토우 효우부쇼우유우(藤 兵部少輔)의 딸로, 코쇼우쇼우(小少)라고 불렸다. 미녀에다가 말까지 잘하였기에 요시카게는 그녀가 하자는 대로만 하였다고 한다. 아사쿠라 가문의 멸망은 그녀의 교언영색(巧言令色)이 원인이 되었다고 일컬어질 정도이다.


 요시아키를 쇼우군에 앉힌 노부나가는 요시아키의 이름으로 요시카게에게 상경하라는 친서를 보냈다. 요시카게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것은 노부나가에 대한 선전포고를 의미했다. 1570 4, 노부나가가 에치젠에 3만여의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들어갔다. 오우미(近江)에 가까운 전선기지인 테즈츠야마(手筒山)성(城)이 하루 만에 낙성되어 성병 1400이 죽었다. 계속해서 오다 군()은 츠루가(敦賀)카네가사키(崎)성(城)으로 몰려들었다. 다행히도 이때의 위기는 아자이 나가마사( 長政)의 도움으로 피할 수 있었다. 예전부터 동맹을 맺고 있던 아자이 군()이 노부나가의 배후를 공격, 그들을 놀라게 해서는 도망치게 한 것이다.


 이로부터 2개월 뒤, 아네가와(姉川) 천(川)에서 아사쿠라-아자이 연합군 2만과 오다-토쿠가와() 연합군 35천이 격전을 전개하여, 아사쿠라-아자이는 패했다. 이때 요시카게는 출진하지 않고 일족인 카게타케(景健)가 지휘하였다.


 3년 후인 1573년은 아사쿠라 가문에게 있어서 운명적인 해가 되었다.

 아자이 씨()오다니(小谷)성(城)이 오다 군의 맹공격을 받고 있다는 소식에 어쩔 수 없이 요시카게는 뭉기적대고 있던 엉덩이를 들어 출격한 것이다. 따르는 군세는 15천이었다. 그러나 왕년의 위세가 없었으며 전년도부터 오다 측의 모략의 손길이 뻗쳤기에 이미 마에바 요시츠구(前波 吉), 토미타 나가시게(富田 長繁) 등의 유력 무장이 오다 측으로 돌아선 상태였다. 거기에 막 출격할 때가 되어서 일족인 아사쿠라 카게아키라(朝倉 景鏡)가 병이 걸렸다는 이유로 출진을 거부하였으며, 미조에 나가야스(溝江 長逸)도 역시 출진을 거부한 것이다. 요시카게의 약화된 통제력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지경이었다.


 아사쿠라 군은 오다니 성()에 도착하긴 하였지만, 오다 측의 활발한 모략의 손길이 계속 뻗쳐와 가신들이 계속해서 배신하였다. 요시카게는 도착한 지 3일만에 에치젠으로 도망쳤다. 본거지인 이치죠우다니()도 결코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패주해 온 요시카게에게 병에 걸려 자리에 누워있을 터인 카게아키라가 출두한 것이다. 충성스런 표정으로 오오노(大野)로 옮기라고 진언했다. 요시카게가 오오노의 도우운(洞雲)사(寺)로 옮기자, 또다시 카게아키라에게서 도우운 사()는 제 거성 이누야마(犬山)()에서 떨어져 있으니, 로쿠보우(六坊)의 켄쇼우(賢松)()로 이동해 주십시오라는 연락이 왔다.


 카게아키라의 덫이었다.

 요시카게가 켄쇼우 사()로 옮기자, 카게아키라의 군사들이 몰려와 포위한 것이다.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요시카게는, “네놈들 부자(父子)의 생명은 필시 3년 안에 끊어질 것이다[각주:4]고 저주를 퍼붓고는 자해(自害)했다.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

1533년 에치젠(越前) 이치죠우다니()에서 태어나 16살에 가독(家督)을 이었다. 처음엔 노부카게(延景)’라 하였지만, 쇼우군() 요시테루(義輝)의 이름 글자를 하사 받아 요시카게(義景)’로 개명. 노신 아사쿠라 소우테키(朝倉 宗滴)가 죽은 후는 무위를 떨치지 못하고 아네가와(姉川) 전투에서 패배, 3년 후에 멸망하였다. 41.

  1. 참고로 이 책은 1978년에 발행된 책. [본문으로]
  2. 스에 타카후사(陶 隆房)의 모반으로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 義隆)와 함께 죽은,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장인이다. [본문으로]
  3. 혼간지(本願寺)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해당 지역 내 반란군. [본문으로]
  4. 카게아키라는 다음 년도 1574년에 잇코우잇키 군에 공격받아 전사.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