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사이 한국을 강타한 요미우리 신문의 기사를 번역해 보았음...

 

출처http://www.yomiuri.co.jp/politics/news/20080714-OYT1T00501.htm

저자: 読売新聞

게재시간: 20087142234

 

 정부가 중학교 사회 교과서의 새로운 학습지도 요령해설서에 타케시마(竹島문제를 처음으로 명기한 것은타케시마의 소유에 관해서 지금까지의 교육이 불충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단지한국 측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어일한 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 염려되고 있다.

 

 타케시마 문제를 둘러싸고는, 2005 3나카야마 나리아키[中山 成彬] 문부과학상(당시)이 국회에서 "다음 번 학습지도 요령에서는 확실히 써야 할 것이다"고 답변하여이번 학습지도 요령의 개정 작업에서 검토가 되었다하지만 새로운 요령안의 발표시기가 올해 2월 한국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과 겹쳐문부과학성은 일한 관계에 대한 영향을 고려하여 기재를 미루었다이에 대해자민당 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생겼기 때문에문부과학성은 해설서에 명기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한국측은 민감하게 반응했다기술하는 것의 조정이 마무리에 다다른 이번 달 9이 대통령은 홋카이도우[北海道] 토우야코[洞爺湖] 서미트 회의장인 호텔에서 후쿠다[福田] 수상과 서서 이야기를 하였을 때우려의 뜻을 표명관계자에 따르면수상이 "타케시마를 쓸 수밖에 없다"고 알리자대통령은 "지금은 곤란하다기다리길 바란다"고 요구했다고 한다.

 

 일본 정부 내에서는 "한국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말해야 할 것은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수상의 의향을 따르면서표현에 대해서는 허용되는 만큼의 최대한 조정을 거듭했다.

 

 토카이"渡海" 문부상은 11수상관저에서 마치무라 관방장관을 방문하여, 2종류의 문안(文案)을 제시했다하나는 북방영토의 기술에 이어 [타케시마 등도 언급하여북방영토와 마찬가지로 우리 나라의 영토영역에 대해서 이해시키는 것도 필요하다]고 하는 A또 하나는 이것에 이어 [또한 타케시마에 대해서는 한국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고 한국의 주장을 기록한 B안이었다최종적으로는 13일 밤, A안의 전제를 [우리 나라와 한국과의 사이에서 타케시마를 둘러싸고 주장이 상반된다는 것 등도 언급]하는 것으로 결착되었다.

 

 자민당 내의 보수파 의원은 [우리 나라의 고유 영토]라는 표현을 미룬 것에 대한 불만이 나오고 있다나카가와 쇼우이치[中川 昭一] 전 정조회장은 14, [한국에 양보하여애매한 기술이 되어버렸다견해서에 쓰는 것이라면 고유의 영토라고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여정부의 대응을 비판했다.

 

 한국 측도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내세워일한관계가 좋은 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만큼일본 정부 내에서는 [명기하는 것은 당연하지만타이밍이 좋지 않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마치무라 장관은 14일 기자회견에서 [일한관계가 어긋나 버리면, (북한의 핵 문제를 둘러싼) 6개국 협의의 프로세스나납치문제를 포함한 일본-북한간의 여러 현안 해결에도 악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고 말하며일한 쌍방의 냉정한 대응을 호소했다.

 

ps; 기사의 분위기를 전하려고 하다보니 한일을 일한으로, 독도를 타케시마로 하였음. 이건 이해를...

ps2; 대충 한 것이니 세세하게 파고 들어가지 마시길...


 쿄우토(京都) 토우지(等持)원(院)에 현존하는 요시아키의 목상(木像)을 보면, 얼굴 아래쪽이 통통한 얼굴로 코가 크며 눈썹이 수려하고 콧수염이 아래로 쳐진 전형적인 귀족의 용모이다.


 진위를 보증할 수는 없지만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가 일으킨 [혼노우(本能)()의 변]의 흑막은 요시아키라는 것이다. 노부나가(信長)에게 추방되어 빙고(備後) 토모노우라()로 망명해 있던 요시아키가 예전 자신의 부하였던 미츠히데에게 비밀리에 지령을 내려 노부나가를 죽이게 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자신을 쇼우군으로 만들고 추방했던 노부나가에 대한 끝없는 증오가 느껴진다.


 요시아키의 노부나가에 대한 증오는 무시무시할 정도였지만 노부나가 덕분에 쇼우군이 되었을 때는 눈물까지 흘리며 기뻐하였다. 그랬을 뿐만 아니라 1569 4월에 요시아키의 새로운 거처 니죠우() 저택이 완성되어 그곳에 그 저택을 만들어 준 노부나가가 기후(岐阜)로 돌아간다는 작별 인사를 하러 온 돌아갈 때가 되자 문 밖까지 직접 배웅을 하고 노부나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서 있었다고 한다.


 요시아키는 12대 쇼우군 요시하루(義晴)의 둘째로 태어났지만, 처음에는 불문(佛門)에 들어가, 나라(奈良) 코우후쿠(興福)() 이치죠우()원(院)의 몬제키(門跡[각주:1])가 되어 카쿠케이()’라는 호로 불리고 있었다.

 그 조용한 불문의 생활이 - 요시테루(義輝=13대 쇼우군)가 미요시 삼인중(三好三人衆)마츠나가(松永) 무리에게 살해당하자 급격히 변하기 시작한다. 카쿠케이는 미요시-마츠나가 무리를 피하여 오우미(近江)의 와다 코레마사(和田 惟政), 칸논지(音寺)성(城)롯카쿠 요시카타(六角 義賢), 와카사()의 타케다 요시무네(武田 義統[각주:2]) 등을 의지하여 방랑하다가 에치젠(越前)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에게 갔을 때 겨우 안정을 되찾아, 여기서 환속(還俗)하여 요시아키()’라는 이름이 되었고, 곧이어 요시아키()’로 개명하였다.


 요시아키의 운명은 노부나가로 인해 크게 비약한다. 1568 7, 둘은 기후의 릿쇼우(立政)사(寺)에서 회견했다.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쇼우군으로 옹립함으로써 자신이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고자 하였다.

 요시아키를 옹립한 노부나가는 6만의 대군을 이끌고 상락(上洛)하여 미요시 세력을 쫓아버리고,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를 항복시켰다.


 드디어 요시아키는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에 임명된 것이다. 여러 지역을 유랑한 끝에 얻은 영광이었다. 요시아키는 이 때 노부나가에게 아시카가 가문의 문장인 [오동나무(桐)[각주:3]] [니히키료우(二引)[각주:4]]의 사용을 허락하였고, [아빠 오다 단죠우노죠우님(御父織田忠殿)[각주:5]]라는 명칭으로 쓴 직접 쓴 표창장()까지 보내었다. 얼마나 그의 기쁨이 컸던가를 알 수 있다.

 그 기쁨은 다음 해까지 이어진다. 다음 해(1569) 정월에 미요시 일당이 쇼우군의 거처인 혼코쿠()사(寺)를 습격하자 노부나가는 기후에서부터 눈 속을 삼일 만에 주파하여 미요시 군세를 쫓아낸 것이었다.

 거기에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위해서 니죠우()에 새로이 쇼우군 저택을 만들어 주었다. 손수 공사의 감독관이 되어 2만 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불과 1개월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쇼우군과 노부나가의 좋은 관계는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요시아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쇼우군이란 노부나가의 괴뢰(傀儡) 실권은 어디까지나 노부나가가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요시아키는 실권을 가지고 싶었다. 은밀히 에치젠의 아사쿠라(朝倉)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上杉), 카이(甲斐)의 타케다(武田)나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노부나가와 적대하는 세력과 연락을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부나가는 이 불온한 움직임에 민감히 반응했다. 1570년 정월, 상경한 노부나가는 쇼우군 요시아키에게 강한 태도로 나왔다. [전중 법도(殿中御掟)]를 정하여 쇼우군이 다른 여러 지역에 편지를 보낼 때에는 반드시 노부나가가 쓴 편지도 첨부하게 만든 것이었다. 이걸로 쇼우군의 정치 행동은 크게 제약 받게 되었다. 쇼우군이라는 것은 이름뿐인 존재였다.


 바야흐로 요시아키의 물밑 공작은 점점 심해졌다. 노부나가의 제약이 반대로 반발로 작용한 것이다.

 여러 지역의 다이묘우들에게 보내는 노부나가 타도의 밀서는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노부나가가 아자이()-아사쿠라 연합군과 싸우고, 이시야마 혼간지와 교전하며,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과 적대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도 요시아키가 배후에서 선동한 것과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다. 어쨌든 요시아키의 적대적 행동에 참을 수가 없게 된 노부나가는 신겐이 서상(西上)하기 직전인 1571 9, 요시아키에게 17개조에 이르는 강경한 의견서를 제출하였다.

  • 여러 지역에 밀서를 내려서는, 말() 같은 것을 달라고 해서는 안 된다.
  • 우리들(노부나가)과 사이가 안 좋아졌다며 재물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에 쿄우() 전체가 시끄럽다. 이렇게 니죠우()의 저택이 있는데 어디로 가시려는 것인가?
  • 노부나가와 친한 사람은 여관(女官)들마저도 잔인한 처벌을 하고 있다.
  • 소송을 노부나가가 청해도 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 다른 지역에서의 헌상품을 감추거나 쌀을 팔아 금으로 바꾸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이유로 그리 하시는 것인가?

 요시아키의 급소를 하나하나 찌르는 힐문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요시아키의 책모는 그치지 않았다. 그 시기 이러한 쇼우군의 행동에 정나미가 떨어진 중신(重臣)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 藤孝=유우사이())는 결국 요시아키를 버리고 노부나가의 신하로 들어간다.


 1573 2.

 요시아키는 결국 깃발을 선명히 하여 노부나가 타도의 병사를 일으켰다. 타케다 신겐이 미카타가하라(三方ヶ原)에서 토쿠가와()-오다(織田) 연합군을 대패시킨 것에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타케다와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군세로 노부나가를 포위 섬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시기를 잃고 있었다. 요시카가가 이미 포위 작전을 내팽개치고 에치젠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었다.

 요시아키는 이때 (西) 오우미(近江)이시야마(石山)에서 잇코우 종도(一向宗徒)들을 규합하여 거병하였다. 예전 형 요시테루(義輝)를 죽인 미요시, 마츠나가 등과도 손을 잡았다.


 하지만 결국 노부나가의 적은 아니었다.

 7. 야마시로(山城) 마키노시마(槇島)성(城)에서 농성하며 최후의 저항을 시도해보았지만 버티질 못하고 당시 2살의 아들 요시히로(義尋)를 인질로 바치고 항복하였다. 이로써 15대가 이어졌던 아시카가 바쿠후(幕府)는 사실상 끝을 고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

1537년 요시하루(義晴)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엔 외숙부 전() 칸파쿠(関白) 코노에 타네이에(近衛 稙家)의 유자(猶子)가 되어 나라(奈良) 이치죠우(一条)() 몬제키(門跡) 카쿠케이(覚慶)라는 이름으로 불문에 있었지만, 환속하여 요시아키(義秋)라 하고, 후에 요시아키(義昭)로 고친다. 처음엔 에치젠(越前)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의지하였지만, 결국 오다 노부나가에 옹립되어 제15대 아시카가 쇼우군이 된다. 노부나가와 사이가 틀어지자 쫓겨나 빙고(備後)로 도망쳤다. 머리를 깎고 쇼우잔 도우큐우(昌山 道休)라는 호를 칭하였고,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보호를 받으며 1만석을 하사 받는다. 1597년 죽다. 61.

  1. 몬제키는 황족이나 고급 쿠교우(公卿)가 잇는 절을 말하며, 이치죠우 원(院)은 코노에 가문의 영향력이 강한 곳으로 외숙부인 코노에 타네이에(近衛 稙家)의 유자(猶子)로 들어갔다. [본문으로]
  2. ‘요시즈미’라고도 읽는다. [본문으로]
  3. 이것은 원래 황실의 것으로 쇼우군 가문이 하사 받은 것을 다시 노부나가에게 허용한 것. [본문으로]
  4. 후타츠히키(二つ引)’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5. 사족으로 노부나가는 1534년생, 요시아키 1537년생. 세 살차이. [본문으로]

<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일본판 >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난세를 위해서 태어난 듯한 인간이다. 출신이 수수께끼이며 더불어 악역무도(惡逆無道)의 전형적인 인물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1570 4.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의 니죠우(二条) 어소(御所)에서 성대한 사루가쿠(猿楽)의 공연이 행해졌을 때였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에게 한 사람의 노장(老將)을 소개했다. 그것이 마츠나가 히사히데였다.

 이 분은 보통의 인간으로써는 절대 할 수 없는 짓을 세 번이나 하였지. 우선 주가(主家)인 미요시(三好) 가문을 멸망시킨 것, 다음으로는 쇼우군()을 살해하였고 거기에 나라(奈良)의 대불전(大佛殿)을 불태워 버렸다

 노부나가의 거리낌 없는 막말에 주변은 일순 긴장했다고 하는데 이 말에는 히사히데가 걸어온 길이 축약돼 있다.

 그러나 [분별(分別), 재각(才覺)은 남들보다 뛰어났으며 무용(武勇)은 무쌍(無雙)하며 또한 굉장히 욕심이 많았다]는 동시대 사람의 평도 있다.

 

 근세 성곽 건축의 선구자로써도 이름이 높다.

 1567년에 쌓은 나라(奈良)타몬야마(多聞山)성(城)은 외국인 선교사도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 정도로 웅장하고 화려했다. 근세 성곽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흰 벽에 주택 형식의 타몬야구라(多聞櫓[각주:1])는 히사히데의 타몬야마 성에서 처음 만들어졌기에 그런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성 안에는 아름다운 색으로 칠해진 벽화가 있는 호화로운 쇼인(書院[각주:2])도 있었다고 한다.

 

 히사히데의 주인 미요시 쵸우케이(三好 長慶)도 또한 난세의 인물로, 주가인 호소카와(細川) 가문을 하극상에 의해 제치고 올라서서는 쇼우군까지도 압도하는 실력자였는데 그 과정에서 음지에서 활약한 히사히데의 힘도 컸다. 이 시기에 쿄우토(京都) 행정관(奉行)으로써 힘을 기른 것이 나중에 도움이 되었다. 이 즈음 쵸우케이의 장남 요시오키(義興)가 병사하였는데 이는 히사히데의 독살에 의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 쵸우케이가 죽자 히사히데의 마음 속에 쇼우군() 타도의 음모가 싹을 틔었다. 미요시 삼인중(三好三人衆)이라 불리는 미요시 가문의 중신들에게 쇼우군 요시테루(義輝)가 미요시 가문 토벌을 꾀하고 있다고 하여 불안을 조장시켰다. 쵸우케이의 양자(養子) 요시츠구([각주:3])를 지키자는 것이, 히사히데가 미요시 삼인중에게 불어 넣은 대의명분이었다.

 이리하여 미요시-마츠나가의 군세는 1565 5 19일 쇼우군 어소를 습격한 것이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히사히데는 이 쇼우군 암살을 함께 했던 미요시 삼인중과 사이가 틀어지는 바람에 쫓겨나 사카이() 도망친다. 히사히데는 예전에 이곳의 대관(代官) 적이 있었으며, 이곳의 대표자들인 나야(納屋)()과도 교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히사히데는 사카이 나야중에 도움을 받아 재기할 있었고 곧이어 야마토(大和)에서 미요시의 군세를 쳐부수었다. 토우다이(東大)() 대불전을 불태운 것은 시기의 일이다.

 

 이로써 14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히데(足利 ) 후견인으로써 위세를 떨치게 되지만 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오다 노부나가로 인해 종지부가 찍힌다.

 다음 해인 1568.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입경한 것이다. 히사히데는 싸워보았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노부나가에게 항복한다. 그러나 히사히데는 속으로 계속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부나가가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공격에 애를 먹게 되자 히사히데는 갑자기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혼간지 측이 츄우고쿠() 모우리(毛利) 카이(甲斐) 타케다(武田), 에치고(越後) 우에스기(上杉)와도 연락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자 대놓고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것이다.

 히사히데는 거성(居城) 시기산(信貴山)()에서 병사를 일으켰다. 성도 일본 텐슈(天守) 시조라 일컬어지는 근세형의 성곽이었다.

 하지만 시대의 패자(覇者) 노부나가의 기세에는 대항하지 못하였고 노부나가 휘하의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 츠츠이 쥰케이(筒井 順慶)의 군세에 패배를 당한다.

 

 그 낙성에 관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에 빠져있던 노부나가가 탐내던 천하의 명기 [히라구모의 차 솥(平蜘蛛茶釜[각주:4]]을 손수 깨 부수고 성에 불을 질러 자인했다는 것과 또한 막 낙성이 되기 직전에 평소 앓고 있던 중풍때문에 머리에 뜸을 떴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렇게 되었는데도 또 목숨이 아까워서 그러냐는 부하에게 자인을 하게 되었을 때 행여라도 중풍이 발작되어 몸을 못 움직이는 것을 남들이 배 가르는 것이 두려워서 꾀병을 부린다고 할 것 같아 미리 방지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히사히데다운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일화이다.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

미요시 쵸우케이의 유우히츠(右筆[각주:5])에서 입신 출세하였다. 쵸우케이의 대리인으로써 쿄우토(京都)에 머물며 여러가지 일을 처리했다. 기독교의 교회를 파괴하였으며 토우다이(東大)()의 대불전을 불태웠다. 1577 9 10일 야마토 시기산 성()에서 자해.

  1. 링크는 후쿠오카(福岡)성(城)의 것. [본문으로]
  2. 무가(武家)에서는 손님 접대나 여러 행사를 치르는 건물을 지칭한다고 한다. [본문으로]
  3. 부친은 쵸우케이의 동생으로, 무용이 뛰어나 ‘오니소고우(鬼十河)’라는 이명을 가졌던 소고우 카즈나가(十河 一存)이다. [본문으로]
  4. 구모(蜘蛛)는 일본어로 거미를 말한다. 거미가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平) 모습이라 이런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5. 문서, 기록 담당관. [본문으로]

이 분은 무슨 생각을 하실까?

그냥 생각난 것 2008. 7. 4. 15:30 Posted by 발해지랑

[반기문 총장, 정부는 '국빈대우'…국회는 '어색한 영접']

라는 기사를 보니 떠오르는 영등포갑 국회의원이 하셨던 말씀

[전여옥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출마는 국제사회 조롱거리"]

찾다 보니 이에 대한 재미있는 기사...

[전여옥.홍준표,반기문 국빈방문에 착잡?]


반기문 사회,복지기관단체인

출생 1944.06.13 (충청북도 음성)

소속 외교통상부

.


홍준표 정치인

출생 1954.12.05 (경상남도 창녕)

소속 한나라당

.

전여옥 정치인

출생 1959.04.19 (서울특별시)

소속 한나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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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두번째 링크를 프리존 뉴스로 하고 싶었는데 프리존 뉴스는 링크가 안 되는 듯...
html로 들어가 링크시켰는데도 실패.

 미요시 쵸우케이는 당시의 쇼우군() 부자를 쿄우()에서 추방하는 등 킨키(近畿) No.1의 실력자로 올라섰지만 음모가(陰謀家)라기 보다는 오히려 섬세한 문화인(文化人)이었다.


 고전(古典)을 즐기고 와카(和歌)렌가(連歌)를 읊으며, 다인(茶人)들과 함께하는 풍아(風雅)한 면이 있었다. ()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다이린소우토우(大林宗套) 화상(和尙)에게 지도를 받았다. 특히 사카이()의 호상(豪商)들과는 다도(茶道)와 선()을 매개로 하여 강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에도 깊은 이해를 가졌다고 한다.


 렌가의 자리에서는 마치 신이 들린 듯이 굉장히 신비로운 태도로 일관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쥘부채(扇子)를 이용하거나 할 때도 예법에 한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왼손으로 거들어 오른손으로 조용히 펼치고 접어서 놓을 때는 원래 있던 곳에서 한치도 어긋나지 않게 놓았다고 한다. 범상치 않을 정도로 세세한 신경의 소유자였다.


 당시 가톨릭 포교자의 눈에는 일본의 지배층이 다음과 같이 비쳐졌다고 한다.

수도의 통치는 삼 인이 행한다.

1의 사람은 쿤보우사마(=쿠보우(公方),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라고 일컬어지는 일본 전국의 왕.

2의 사람은 미요신도노(=미요시 쵸우케이)’라고 하는 쿤보우사마의 신하.

3의 사람은 마스만가(=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라고 하는 미요신도노의 신하이다….

 이런 정도의 실력자이면서 쵸우케이는 관위(官位)를 바라지 않고 종사위(從四位) 슈리노다이부(修理大夫)에 머물렀으며 바쿠후(幕府)에서의 역직(役職)도 쇼우반슈우(相伴衆 바쿠후의 중신)에 만족했다고 한다.


 미요시 가문의 가계(家系)는 원래 아와(阿波) 슈고(守護) 호소카와 씨(細川)의 지배하에 있는 일개 토호(土豪)에 지나지 않았다. 증조부 유키나가(之長)의 대()부터 일약 쿄우토(京都)의 중앙 정계에 등장하는데, 이후 피로 점철된 3대의 역사였다. 3대는 전부 이불 위에서 죽지 못했다.


 부친 모토나가(元長)의 마지막은 무시무시하다.

 모토나가는 12대 쇼우군 요시하루(義晴[각주:1])를 받들고 있던 호소카와 타카쿠니(細川 高)에 대항하여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 晴元)와 함께 요시하루의 배다른 형제인 요시츠나(義維[각주:2])를 내세워 싸움을 계속하였지만 후에 하루모토에게 버림받아 사카이의 켄폰(本)사(寺)에서 자살을 강요 당했다. 이 때 모토나가는 너무도 분한 나머지 자기 손으로 장()을 끄집어 내어 천장에 던져 죽었다고 한다.
 
이 때 쵸우케이 불과 10. 은밀히 복수의 칼날을 가며 성인이 되었다.


 1542.
 
드디어 그 기회가 찾아온다.
시코쿠()에 내려가 아와지(淡路), 아와(阿波)의 병사들을 동원해서 다시 되돌아 와서는 키자와 나가마사( 長政)카와치()에서 죽이고 이어서 하루모토의 부하이며 같은 일족인 미요시 마사나가(三好 政長)셋츠()에서 전사시켰다.

(이에 대해서는 초코벌레님의 이 곳을 함 가보시길……

호소카와 미요시의 싸움(http://blog.naver.com/chocoworm/30006940287))


 쵸우케이의 무위(武威)는 이제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각지의 토호가 앞다투어 쵸우케이 밑으로 모여들었다. 쵸우케이의 킨키(近畿) 제압에 맞추어 시코쿠()에서는 동생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미요시 유키야스(之康[각주:3]), 소고우 카즈나가(十河 一存[각주:4]), 아다카(아타기) 후유야스(安宅 冬康)의 세 명이다.


 이 일족은 아와(阿波), 사누키()세토 내해(瀬戸内)에 세력을 확대했다.

 이리하여 미요시 가문의 하인이나 하인이라 할지라도 팔꿈치를 펴고 어깨를 흔들거리며 쿄우()의 대로를거들먹거리며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쵸우케이에게는 권력자로써의 비정함이 결여되어 있었다. 자신을 암살하려고 한 호소카와 하루모토를 용서하는 등 문화인적인 허술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허술함에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파고든다.

 1562. 적자 요시오키(義興)가 급사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독살이라고들 한다. 이 적자의 죽음을 시작으로 쵸우케이는 갑자기 소극적이 되어 히사히데의 참언(讒言)을 믿고 동생 후유야스까지 죽여버리고 만다. 그리고 얼마 후 쵸우케이도 죽었다.


 그 장례식 광경을 쿄우토(京都) 쇼우코쿠()사(寺)의 중 사이쇼우 쇼우(죠우)타이(西笑 承兌)가 그의 일기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목메어 울었고 한탄하며 슬퍼했다. 쵸우케이가 생전에 베푼 은혜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고 기록하였다.


[미요시 쵸우케이(三好 長慶)]

1522년생. 어렸을 때의 이름은 센쿠마마루(千熊丸-'치쿠마마루'라고도 읽는다), 후에 노리나가(範長). 칸레이(管領) 호소카와 하루모토의 집사(執事)가 되어, 이즈미(和泉), 카와치()를 대관(代官)이라는 형식으로 지배. 쿄우토(京都)의 병권을 잡자 그 세력은 킨키(近畿), 시코쿠() 8개국에 이르렀다. 1564년 죽었다. 43.


Ps; 長慶나가요시로 읽으나, 이 책은 존중해서 이름을 읽어주는 유우소쿠요미(有職)’쵸우케이로 쓰여있기에 계속 쵸우케이로 하였다.

  1. 검호 쇼우군 13대 요시테루의 부친. [본문으로]
  2. 그의 아들인 요시히데(義栄)는, 검호 13대 쇼우군 요시테루가 죽자 마츠나가 히사히데에게 옹립되어 14대 쇼우군이 된다. [본문으로]
  3. 요시카타(義賢)를 말한다. [본문으로]
  4. 카즈’나가’는 카즈’마사’라고도 읽는다고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