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이 가문[酒井家]은 토쿠가와 가문[徳川家]과 혈연관계인 명문가이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로부터 거슬러 올라가길 7~8대 전의 일이다. ‘토쿠아미[徳阿弥]’라는 이름의 행각승(行脚僧)이 미카와[三河]
서쪽 사카이 향[坂井鄕]에
흘러 들어와 마을 촌장[庄屋]의 신세를 지다 어느덧 그
집의 사위가 되어 아이를 만들었다. 이 아이가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1.
이 토쿠아미가 사카이 향을 떠나, 이번엔 역시 미카와[三河]의 마츠다이라 향[松平郷] 촌장[庄屋]의 사위가 되어 역시 아이를 만든 것이다. 이것이 이에야스의 조상이라 전해지고 있다.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이지만 어쨌든 사카이 가문과 마츠다이라 가문(후에 토쿠가와 가문)은 밀접한 관계였다. 타다츠구의 부인도 이에야스의 숙모2이다.
토쿠가와 가문 후다이[譜代] 중에서도 최상급의 문벌이었다. 타다츠구 역시 이에야스가 어렸을 때부터 가로(家老)의 지위로 내정을 총괄하고, 전투에 나서면 선봉을 담당하는 등 중책을 맡았다.
1564년. 이에야스는 잇코우잇키[一向一揆]3를 평정하며 동부 미카와로 진출,
이마가와 씨[今川氏]의 중요거점 요시다 성[吉田城]을
함락시켰다. 타다츠구의 노력으로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타다츠구는 이 공으로 인해 미카와 동부의 지배를 일임 받으며 요시다 성주가 되었다. 토쿠가와 가문의 가신
중에서는 처음으로 성주에 임명된 것이다4.
1567년에 행해진 가신단 편성을 보아도, 타다츠구는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 数正]와 더불어 '선봉군 대장[惣先手侍大将]'이라는 지위5로, '이에야스 직속군 선봉대장[旗本先手侍大将]'인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사카기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보다 상위에 있었다.6
그랬던 것이 – 1590년, 이에야스가 칸토우[関東]의
주인이 되었을 때 지위가 역전되었다. 타다츠구는 이 시기 이미 은거하여 가독(家督)을 아들인 이에츠구[家次]에게 물려준 상태였지만, 사카이
가문은 시모우사[下総]
우스이[臼井]에
3만석밖에 하사 받지 못했던 것이다. 타다츠구보다도 아래에 있던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는 12만석.
혼다 타다카츠,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각각 10만석에 봉해졌다. 타다츠구는 참을 수 없었다. 명문가인 사카이 가문이 신참인 이이 가문[井伊家]보다 아래에 놓인 것이다. 타다츠구는 마음을 정하고 이에야스를 만나 자기 자식 이에츠구에게 가증(加增)을 부탁하였다.
“너도 니 자식이 소중한가?”
뜬금없는 이에야스의 말이었다. 처음에 타다츠구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머리를 들자, 이에야스는 꾸짖는 듯한
눈빛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타다츠구는 그제서야 그 뜻을 알았다.
‘그때를 말하는 것이다’
1579년. 이에야스의 부인 츠키야마도노[築山殿]와 적자 노부야스[信康]가 노부나가[信長]의 명령에 따라 살해 당한 사건을 말이다. 그때 노부나가에게 그 둘의 살해를 직접 명령 받은 것이 다름아닌 이 타다츠구였던 것이다. 어째서 노부나가에게 노부야스의 무죄를 주장하고 조명(助命)을 탄원하지 않았던 것인가? – 이에야스는 그 통한을… 여태껏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타다츠구는 다음에 이을 말을 찾지 못하였다.
이 사카이 타다츠구에게는 의외의 일면을 가지고 있었다. '새우잡기[海老すくい]'라는 춤을 추게 하면 누구보다 뛰어난 춤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1575년,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 싸운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 전날 밤. 토쿠가와 진영의 사기는 가라앉아있었다.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이 죽어 현재 없다고는
하여도, 상대는 이름 높은 코우슈우
군단[甲州軍團]이었다. 너무도 강적이었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무언가 떠올려 타다츠구를 불렀다.
“’새우잡기 춤’을 추어 주지 않겠는가?”
여러 장수들이 모여들었다. 타다츠구의 춤이 시작되자 그 절묘한 손동작, 몸동작에 모두 순식간에 빠져들어, 그 자리는
웃음의 도가니가 되었다. 이걸로 코우슈우의 병사들에 대한 공포심은 단번에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칸토우[関東]의 패자(覇者) 호우죠우 우지마사[北条 氏政]와의 주연(酒宴)에서도 이것을 추어, 너무나도 뛰어남에
우지마사는 사다무네[貞宗]의 명도(名刀)를 타다츠구에게 주었다 한다.
[사카이 다다쓰구(酒井 忠次)]
1527년 미카와[三河]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사에몬노죠우 타다치카[左衛門尉 忠親]’. 토쿠가와
사천왕(徳川四天王7] 중 한 명.
1586년 히데요시[秀吉]에게 재경료(在京料8) 천석을 얻고
종사위하(從四位下) 사에몬노카미[左衛門督]에 취임. 1588년에 은거, 1596년에 죽었다.
- 이때 아들을 둘 낳아, 첫째의 가문이 대대로 사에몬노죠우[左衛門尉]를 관도명(官途名)으로 하였기에 ‘사에몬노죠 가문[左衛門尉家]’이라고 하였으며, 둘째의 가문은 우타노카미[雅楽頭]를 관도명으로 하였기에 ‘우타노카미 가문[雅楽頭家]라고 한다. 타다츠구는 '사에몬노죠 가문' 출신. [본문으로]
- 이에야스의 조부 마츠다이라 키요야스[松平 清康]의 딸로, 이에야스의 부친 히로타다[広忠]의 배다른 여동생. [본문으로]
- 혼간지[本願寺] 문도들을 바탕으로 한 그 지역 무사, 농민들의 반란. [본문으로]
- 정확히는 사카이 가문 중 우타노카미 가문[雅楽頭家] 출신인 사카이 마사치카[酒井 正親]가 1561년 니시오 성[西尾城]의 성주에 임명 받은 것이 첫 번째. 타다츠구가 요시다 성주에 임명 받은 것은 1564년. [본문으로]
- 미카와[三河]를 동서로 나누어 서부의 이시카와 카즈마사, 동부의 사카이 타다츠구가 각각 휘하에 속하는 마츠다이라 일족, 호족 등을 통솔하였다. [본문으로]
- 한국 국군의 편제로 비교하자면, 타다츠구는 군단장, 타다카츠나 야스마사는 대대장급. [본문으로]
-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등 네 명을 일컬음. [본문으로]
- 쿄우토[京都]에 머물면서 생활하라고 주는 땅.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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