벳쇼 나가하루(別所 長治)가 지키는 하리마(播磨) 미키 성(三木城)은 ‘미키의 말려 죽이기, 톳토리(鳥取)의 굶겨 죽이기[각주:1]’라 일컬어지며 그 농성전의 참혹함으로 유명하다.

 성주 나가하루의 초상화가 효우고 켄(兵庫県) 미키 시(三木市)의 호우카이 사(法界寺)에 전해내려 오고 있다. 카노우 히데노부(狩野 秀信)가 그린 것이라고 하는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갸름한 그 얼굴은 명문가의 다이묘우(大名)다운 품격이 있다. 무장이라기 보다는 상급귀족(公卿)과 같은 인상이다. 이 얼굴과 마찬가지로 깔끔한 마지막, 좋은 품성이 미키 성의 지옥도(地獄圖) 속에서는 하나의 위로가 되었다.

 나가하루는 미키 성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자신의 의지로 센고쿠 난세를 개척하려는 욕망은 없었다. 나가하루를 대신하여 미키 성을 사실상 움직이고 있던 것이 숙부인 미키 야마시로노카미 요시스케(三木 山城守 賀相)였다. 야마시로노카미는 오다 측 하리마 공략 총사령관인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에게 적대적이었는데 그 이유는 히데요시가 신발 담당에서 출세한 천한 자라고 경멸하였기 때문이다. 이 야마시로노카미의 반감이 벳쇼 가(別所家) 멸망의 원인이 된 것이다.

 1578년 히데요시는 츄우고쿠(中国) 공략의 대군을 일으키는데 앞서 벳쇼 나가하루에게 선봉을 명하였다. 야마시로노카미는 불만이었다. 벳쇼 일족을 최전선으로 몰아세워 자멸시킬 꿍꿍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21살의 나가하루에게 전략전술 같은 것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야마시로노카미가 말하는 데로 따랐다. 야마시로노카미는 군사적 득실보다 명문의 자긍심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출신이 천한 히데요시의 아래로 들어가 그의 지령에 따라 선봉에 서는 것은 벳쇼 가문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반기를 든 미키 성을 히데요시는 2년에 걸쳐 공격하였다. 특기인 식량공격이었다. 미키 성과 아카시(明石)의 우오즈미(魚住)를 잇는 선상에 50~60개의 요새를 쌓아 그 사이에 초소를 두고 해자(垓子), 목책, 바리케이트(逆茂木)를 물샐틈없이 둘러쳐 파리도 빠져 나오지 못할 정도로 한 것이다.

 농성 1년째. 미키 성은 벌써 저장했던 식량이 바닥을 들어내어 이대로 농성이 계속 되면 전원 아사(餓死)할 것이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결전을 벌여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 1579년 2월 결국 2500 여의 성병이 하나가 되어 성밖으로 돌격했다. 결과는 처참한 패배로 끝났다. 굶주림에 쇠약해진 미키 군은 거의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것이었다. 소수의 인원만이 간신히 도망쳐 이후는 성문을 꽉 걸어 잠그고 안에 틀어박혀버렸다.

 이 해의 9월이 되자 모우리 씨(毛利氏)는 배를 준비하여 미키 성 구원의 식량 수송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도 히데요시 군에게 요격당하여 실패로 끝났다. 식량 수송의 희망은 완전히 끊긴 것이다. 성안에는 더 이상 한 톨의 쌀도 없었다. 쥐를 잡아먹고 타던 말을 먹었으며 잡초를 씹기 시작했다. 성안에 틀어박힌 농민 아시가루(足軽)부터 풀썩풀썩 쓰러져갔다. 겨우 살아있는 사람은 해골 같았다. 걷는 것이 겨우 였다. 완전히 전투능력을 상실하였다.

 벳쇼 나가하루는 결국 개성을 결심하였다. 이 종전 처리에 있어서 나가하루의 미련없는 태도가 미키 성과 나가하루의 이름을 후세에 남기게 된다. 히데요시에게 보낸 항복서장에는 나가하루, 동생인 토모유키(友之)와 숙부 야마시로노카미 요시스케 세 명이 배를 가르겠다고 쓰며 ‘그러니 성안의 사졸의 목숨을 구해주신다면 나가하루에게 있어 이번 생의 기쁨이옵니다’고 그 심정을 밝혔다.

 벳쇼 일족 최후의 날이 왔다. 나가하루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목욕을 하고 몸에 향을 배이게 하고는 우선 3살의 어린 자식과 부인을 죽이고 그 후 동생 토모유키와 함께 복도로 나와 좌우로 앉아서는 잇따라 배를 갈라 죽었다고 한다. 이때 나가하루 23세. 토모유키 21살이었다.[각주:2]

[벳쇼 나가하루(別所 長冶)]
벳쇼 씨(別所氏)는 아카마츠 씨(赤松氏)의 일족인 명문으로, 대대로 동 하리마(播磨)의 슈고(守護)였다. 나가하루는 13살에 미키(三木) 성주가 되었다. 1580년 1월 미키 성 함락과 함께 자인(自刃).

  1. 三木の干し殺し, 鳥取の飢え殺し [본문으로]
  2. 숙부인 요시스케는 목이 깨끗하게 노부나가에게 건네지는 것을 거부하여 성에 불을 질러 재로 만들겠다고 하는 것이 성의 병사들의 분노를 사, 결국 자신의 자택에서 병사들에게 둘러 쌓여 자살했다고 한다. 그 목은 그의 바램과는 반대로 노부나가에게 보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이러면 안 되는 거 알지만...

그냥 생각난 것 2009. 1. 1. 16:29 Posted by 발해지랑
이 기사를 읽자 마자 생각나는...


2009년 첫 포스트는 역시 변명으로...

내 이야기 2009. 1. 1. 16:18 Posted by 발해지랑
지금까지 대충이나마 쓴 것...

요도도노, 그 아들 5편.
벳쇼 나가하루.
킷카와 츠네이에.
시미즈 무네하루.
노땅뿐인 페예노르트.
.
.
올리기까지 교정과 말이 되게 고치기, 링크 달기....가 남았는데 이런 것들이 제일 시간을 잡아 먹는 것이라...
어쨌든 목표는 저 중 세 개정도는 오늘 중으로 올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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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략으로 점철된 센고쿠 시대라 하여도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정도의 음모가는 드물다.

 그가 어렸을 적의 에피소드로 이런 것이 있다.
 나오이에는 백치와 같았다 한다. 동생 타다이에[忠家]는 똑똑했기에, 모두 형인 나오이에를 바보취급하고 동생을 칭찬하였다. 단 한 명 우라가미 가문[浦上家][각주:1]의 가로인 잇칸 노인[一閑老人]만이 "그렇지 않다. 나오이에는 마음 속 깊이 큰 뜻을 품고 있기에 보통 사람이 아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나오이에는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일부러 바보 흉내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동생 타다이에는 나오이에가 죽자, "형만큼이나 무서운 인물은 없었다. 날 귀여워해주었지만 형과 만날 때는 반드시 옷 안에 사슬갑옷[鎖帷子]을 입고 조심하였다"하고 술회하였다.

 
 대충 나오이에 모략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선 주군인 우라가미 무네카게[浦上 宗景]를 국외 추방한 후 그의 영지(領地)를 빼앗았다. 거기에 미마사카[美作], 빗츄우[備中]의 실력자 미무라 이에치카[三村 家親]를 철포로 암살, 그와 친하다는 이유로 장인 나카야마 노부마사[中山 信正]를 독살하였다. 이때 장인의 유언을 위작하여 그의 땅을 손에 넣었다. 고토우 미마사카노카미[後藤 美作守]에게는 자신의 딸을 시집 보낸 후 독살하였고, 이 직후 매형인 타니카와 히사타카[谷川 久隆]도 같은 수단으로 죽였다. 이렇게 악랄한 수단으로 결국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와 빗츄우[備中] 일부를 수중에 넣은 것이다.

 1577년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츄우고쿠[国] 공략이 시작되어 모우리 가문[毛利家]와의 사이에서 치열한 항쟁이 전개되자 나오이에의 정절 없는 기회주의자적인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항상 이기는 편에 붙는다. 그러기 위해서 어느 쪽이 이겨도 상관없도록 손을 쓴다"
 
이것이 그의 모토였다.

 1577년 12월 나오이에의 가신 코우즈키 쥬로우[上月 十郎]가 지키던 코우즈키 성[上月城]이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함락당하자 곧바로 오다 노부타다[織田 信忠 – 노부나가의 적자]에게 "앞으로 오다 측에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와 동시에 예전과 마찬가지로 모우리 가문과도 끈을 놓지 않아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를 설득하여 코우즈키 성 탈환을 꾀했다. 거기에 교활하게도 이 전투에는 병을 칭하며 출진하지 않고 승리 소식을 듣자 그제서야 기어나와 킷카와-코바야카와 양 진영에 인사를 한 것이다.

 나오이에의 계략은 이로 끝나지 않았다. 모우리의 두 장수에게 "쿄우토[京都]로 진격하신다면 제가 선봉이 되겠습니다. 또한 귀국하신다면 제 영내(領內)에 잔치를 열겠으니 꼭 참석해 주시길"고 하였다.

 이 뒤편에는 나오이에의 무서운 간계가 숨어있었다.

 쿄우토로 진격한다면 그대로 따라가겠지만, 만약 돌아가게 된다면 성안에 초대하여 그 자리에서 두 장수를 죽이고 그 목을 들고 오다 측으로 배신하겠다는 계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계략은 모우리 측에게 그 내막이 알려져 버렸다. 킷카와 모토하루는 더 이상 나오이에를 신용하지 않게 되었다. 
 
 이 이후 그는 오다 측으로 넘어갈 결심을 굳히고 인질로 세자 하치로우(후의 히데이에[秀家])를 히데요시에게 보냈다.

 1581년 11월 나오이에는 병상에 누웠고 다시 일어설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자, 히데요시를 한번 보고 싶다고 부탁을 하였다. 나오이에 최후의 연기였다. 머리맡에 있는 히데요시에게 임종이 가깝다는 것을 고한 후,

 "인질로 받친 하치로우를 생각하면 하루 종일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부디 하치로우의 뒤를 잘 돌보아 주셨으면 해서…"

 하고 애원했다. 인정에 약한 히데요시는 다 죽어가는 나오이에의 탄원에 넘어가 그의 유언을 지켜 히데이에(하치로우)를 유자(猶子)[각주:2]로 키워 후에 오대로(五大老)까지 만들어 주었다.

 여담으로 일설에 따르면 나오이에의 병은 매독으로 남 앞에 나설 수 없을 정도로 추하게 부었다고 한다.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

비젠[備前]의 슈고[守護] 아카마츠 씨[赤松氏]의 슈고다이[守護代] 우라가미 무네카게[浦上 宗景]의 가신이었지만 모우리 가문[毛利家]의 지원으로 주군을 멸하고, 이어서 미마사카[美作]를 공략하여 모우리 씨의 휘하가 되었지만,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은 히데요시[秀吉]가 츄우고쿠[国]에 진출하자 오다[織田] 측에 붙었다. 1582년 2월 오카야마 성[岡山城]에서 병으로 죽었다. 53세였다고 한다.

  1. 당시 우키타 가문[宇喜多家]의 주가. [본문으로]
  2. 양자와 비슷하나, 성까지 따를 필요는 없는 부자관계. [본문으로]

야마나카 시카노스케[山中 鹿之助]라고 하면 2차대전이 일어나기 전만 하더라도 이야기꾼들의 무용담(講談)은 물론 교과서에까지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렸을 정도로 유명하다. 산 끝에 걸린 초승달을 올려다보며,
 "나에게
칠난팔고(七難八苦)을 주소서"
 라고 비는 장면이다. 주군 가문의 부활을 위해서 동분서주하며 노력하는 모습이 2차대전 이전 충군애국을 위한 정신교육에 딱 알맞은 소재였던 것이다.
 그의 인생드라마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은 주군인 아마고 가문[尼子家] 부활을 위해서 싸우는 – 그 집요한 게릴라 활동에 있을 것이다.

 시카노스케의 무용전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아마고 가문이 멸망하여 순례자의 모습으로 여러 지역을 유랑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오우미[近江]의
반바쥬쿠[番場宿]라는 곳에서 어느 노승의 친절로 암자에서 머물게 되었다. 2~3일 지났을 즈음 십여 명의 건장한 무사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들어와서는 식사를 내놓으라고 하였다. 보기에 식사만 하고 얌전히 돌아갈 듯한 쌍판이 아니었다. 시카노스케가 마당에 있던 큰 바위를 가볍게 들어올리고는 "어서 꺼지지 못할까!"하고 소리치자 무사들은 두려움을 느끼고 물러났다.
 하지만 그 날 밤. 그 무사들이 습격해왔다. 그들은 산적, 도적들이었던 것이다. 시카노스케는 재빨리 노승과 동자승을 숨기고는 정면으로 들어오는 자는 함정에 빠뜨리고, 창문에서 들어오는 자는 창문 아래 몸을 숨기고 있다가 한 사람씩 사로잡았다. 이렇게 해서 별 어려움 없이 14명의 도적을 잡았지만, 노승의 말을 듣고 생명을 살려주자 두목 같은 남자가,
 "제가 도둑질하기 백여 번,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하길 칠십여 번에 이르지만 이렇게 당한 적은 처음이외다"
 고 말하며 적어도 존명이라도 말해달라 하였다 한다.

 시카노스케의 파란만장한 삶의 막이 오른 것은 1566년 아마고 씨[尼子氏] 멸망부터였다. 한때 츄우고쿠[中国] 11개 쿠니[国]의 영토를 가지고 패권을 세웠던 아마고 씨도, 신흥 세력인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군에게 패하여 멸망해 버린 것이다. 한때는 이 모우리 씨[毛利氏]도 아마고 가문의 휘하였다.
 이 1566년에 아마고의 본거지 이즈모[出雲]
토다 성[富田城]이 함락당하자 당주 아마고 요시히사[尼子 義久]와 그 동생 토모히사[倫久], 히데히사[秀久] 세 명은 포로의 몸이 되어 모우리의 근거지 아키[安芸]로 끌려갔다.

 이때부터 야마나카 시카노스케나 타치하라 히사츠나[立原 久綱] 등의 활약이 시작된다. 은밀히 쿄우토[京都]에 올라가 토우후쿠 사[東福寺]를 방문하였다. 거기에는 중이 되어 있는 아마고의 혈통이 있었다. 최후의 당주 요시히사의 부친 하루히사[晴久]의 숙부[각주:1]의 아들이었다. 시카노스케들은 그를 환속시켜 '아마고 마고시로우 카츠히사[尼子 孫四勝久]'라는 이름을 쓰게 하였다.

 카츠히사를 대장으로 옹립한 일당 200여명은 타지마[但馬]로 내려가 해적 나사 니혼노스케[奈佐 日本之助]의 배로 오키[岐]로 건너가 이곳의 사사키 타메키요[佐為清]의 협력으로 대망의 옛 영토 이즈모[出雲]의 흙을 밟게 된 것이다. 옛 주인의 입국에 이즈모는 들끓었다. 각지에 숨어있던 아마고 낭인 3000여명이 곧바로 달려와 그들의 세력은 1개월 안에 이즈모의 반을 석권하였다. 이와미[石見], 호우키[伯耆]에서도 줄을 대는 자가 속출했다. 본거지 토다 성을 되찾으면 옛 영광을 다시 한번 재현할 수가 있었다.
 그 토다 성에도 모우리의 군사는 불과 300명의 병사밖에 없었다. 아마고는 6000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함락시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모처럼의 기회가 무너졌다. 토다 성의 수비장수 아마노 타카시게[天野 隆重]가 계략을 쓴 것이다.
 "깨끗하게 성을 넘기고 싶다. 그러나 한번도 싸우지 않고 넘기는 것은 무사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 그러니 일전을 벌이는 척을 하고 넘기겠으니 군세를 이끌고 오시길"
 아마고 측은 이 사자(使者)의 편지로 기세 등등해졌다. 완전히 안심을 하고 2000의 병사를 보냈다. 하지만 산 중턱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활과 총탄이 날아들었다. 아마고 측은 예상 못했던 습격을 받아 혼란에 빠졌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번엔 성병 300이 밀고 내려와 아마고 측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게 된 것이다.

 시카노스케는 1570년 모우리 가문의 이즈모 총공격에 잡히는 몸이 되었다. 여기에서도 그의 집요함을 볼 수 있다. 참수에 처해질 운명이었지만, 모우리를 위해서 일하겠다고 하여 목숨을 건졌다. 모우리를 위해서 시코쿠[四国] 정벌의 선봉을 자처까지 하였다. 그런 것들은 전부 살아남아 또다시 아마고 부활의 기회를 잡기 위한 연기였다. 그리고 시카노스케는 화장실을 이용하여 모우리 진영에서 탈출하였다. 게릴라 활동가다운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몸을 숨기며 미마사카[美作]를 거쳐 쿄우토로 갔다. 이번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의지하였다. 당시 노부나가는 혼간지[本願寺]와 손잡고 있는 모우리 측과 적대하고 있었다. 다시 쿄우토에 모인 시카노스케 일행의 아마고 잔당은 츄우고쿠 담당인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휘하로 들어가 하리마[播磨]로 갔다. 타지마[但馬]의 코우즈키 성[上月城]를 함락시키자 히데요시는 아마고 카츠히사의 바램대로 이 성을 지키게 하였다. 히데요시를 따라 이즈모로 진격하여 옛 영토를 회복하는 것도 그리 먼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 믿는 아마고 일당은 피가 끓었다.

 바로 그때 모우리 측이 대군을 이끌고 코우즈키 성을 포위하였던 것이다.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의 군세[각주:2]를 선봉으로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군세가 몰려와 아마고 섬멸을 노린 것이다. 모우리 군세는 보급로를 완전히 끊어버렸다.

 의지할 것은 히데요시의 원군이었다. 성안의 식량은 바닥을 들어내고 있었다. 탈주병도 계속 생겼다. 쿠마미가와 강[熊見川]을 사이에 두고 타카쿠라야마 산[高倉山]에 진을 친 히데요시 군밖에 의지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모우리 군세 2만이 유리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에는 히데요시도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결국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작전변경이 하달되었다. 코우즈키 성에서 물러나라는 것이었다. 아마고 일당은 버림을 받은 것이다.

 그리하여 코우즈키 성은 모우리에게 항복하였다. 당주 카츠히사는 자결, 시카노스케 등 60여 명은 빗츄우[備中]로 보내졌다. 시카노스케는 도중 몇 번이나 탈출을 시도하였지만 이루지 못하고 결국 빗츄우로 들어서는 아이[阿井]의 나루터에서 살해당했다.
 모토하루, 타카카게는 시카노스케를 부하로 삼으려 했던 것 같지만 모우리의 당주 테루모토(
輝元)의 뜻으로 살해당했다고 한다.

[야마나카 시카노스케(山中 鹿之助)]
1545년생. 아마고 하루히사[尼子 晴久]를 섬기며 미마사카[美作] 2만석에 봉해져 가로(家老)의 지위에 있었다. 아마고 멸망 후는 카츠히사[勝久]를 옹립하여 싸움을 거듭하였지만 1578년 7월 17일 살해당했다. 34세.

  1. 아마고 가문[尼子家] 최강의 전투집단이었던 신구우 당[新宮党]의 당수 아마고 쿠니히사[尼子 国久]. [본문으로]
  2. 나오이에는 병을 칭하여 동생 타다이에[忠家]를 대신 출진시켰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