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토하루[元春]가 양자로 들어간 킷카와 가문[吉川家]은 아키[安芸]에서 보면 산인[山陰]측으로 붙어 있는 츄우고쿠[中国] 지방의 명문가로, 원래 아마고[尼子] 측의 무투파로 모우리 가문[毛利家]을 위협하던 존재였다. 모토나리[元就]는 이 킷카와 가문을 어떻게 해서든 자신 쪽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킷카와 가문은 모토나리의 부인 묘우큐우[妙玖]의 친정이었다. 그리고 모토나리 여동생이 킷카와 모토츠네[吉川 基経]의 부인이 되어 있는 이중으로 엮인 인척이었다. 모토나리는 부인 묘우큐우가 병으로 죽자 킷카와 탈취 공작을 개시. 킷카와 가문의 노신들을 꼬셔 가중을 분열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이제 30살을 넘었을 뿐인 당주 킷카와 오키츠네[吉川 興経]를 억지로 당주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는, 그의 아들 센호우시[千法師]를 제쳐 두고서 자신의 둘째 아들인 모토하루를 후계자에 앉혔다. 거기에 이 가문 강탈을 완벽한 것으로 하기 위해 오키츠네 부자를 살해한 것이다.

 모토하루는 색다른 에피소드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엄청난 추녀를 부인으로 했다는 이야기이다.
 모토하루가 결혼할 나이가 되었기에 부친 모토나리는 모토하루에게 중신을 보내어, 결혼에 적당한 여성이 있는가 하고 협의하게 하였다. 그러자 모토하루는, '제 휘하에 있는 쿠마가이 노부나오[熊谷 信直]의 딸과 결혼하고 싶다’고 답한 것이다.
 사자인 중신은 물론 그 보고를 받은 모토나리도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쿠마가이의 딸은 추녀로 유명하였기 때문이다. 모토나리는 설마 미녀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다시 확인해 보자 추녀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였다.
 “예부터 여색에 빠져 애써 얻은 명장의 칭호를 더럽힌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모두 미녀의 색향에 정신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모토하루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습니다. 거기에 또 하나 이유가 있습니다. 누구도 데려 가려 하지 않는 딸을 제 부인으로 하면 노부나오는 필시 기뻐할 것입니다. 전쟁터에서는 사력을 다해 활약해 줄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 모토하루의 말대로 노부나오의 딸과 결혼하자 노부나오는 전쟁터에서 굉장한 활약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맹장(猛將)의 이미지를 가진 모토하루 다운 이야기이다.

 처음 전쟁터에 나선 것은 11살 때였다고 한다.
 당시 모우리 가문은 아마고의 대군에 포위당하여 불과 3000여의 병사로 필사의 방어를 하고 있었다. 이때 불과 11살인 모토하루가 출진하고 싶다는 말을 꺼낸 것이다. 노신인 이노우에 모토카네[井上 元兼]가 넬슨 홀드까지 해가며 막았지만 모토하루는 결국 칼까지 뽑아들며 자기 뜻을 관철하여 끝내는 모토나리의 허락을 얻었던 것이다.

 모토하루는 주로 산인 지방 공략을 담당하였다.
 특히 아마고 씨와의 사투는 유명하여 아마고의 용장
야마나카 시카노스케[山中 鹿之助]가,
 “불구대천의 원수 킷카와 모토하루에게 한번만이라도 칼질 한번 먹이고 싶다”
 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성의 병사들을 굶어 죽이는 장기 포위 공격으로 톳토리 성[鳥取城]을 공략한 히데요시가 5만의 대군을 이끌고 호우키[伯耆] 국경으로 다가왔을 때, 그에 맞서는 모토하루의 병력은 6천에 불과하였다. 부하 장수 셋이 철병하지 않으면 참패를 당한다며 비장한 얼굴을 하고 모토하루에게 진언하러 왔다. 그때 모토하루는 곰 가죽 위에서 하품을 하면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세 명을 보자 ‘우선 마시게’라는 말을 하였다. 곧이어 누워 팔베개를 하고서는 그 상태로 코를 골며 잠에 푹 빠졌다. 세 부하 장수는 이런 호담함에 넋을 잃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를 물러났다. 모토하루는 이때 배후에 있던 다리를 무너뜨려 퇴로를 끊고서는 히데요시 군을 상대로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여 주었던 것이다. 이에는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손을 떼고 물러났다고 한다.

 동생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와는 달리 모토하루는 히데요시와 맞지 않았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세상이 되어 억지로 끌려 나가 큐우슈우[九州] 정벌에 출진했지만, 종군 중 등에 악성 종양이 생겨 부젠[豊前] 코쿠라 성[小倉城]에서 죽었다.

[깃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1530년 태어났다.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차남. 산인[山陰] 공략에 공을 세웠지만,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세상이 되자 그 휘하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하여 1584년에 은거하였다. 1586년 죽었다. 57세.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의 비극은 부친 신겐[信玄]이 너무나도 거대했던 것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신겐이 죽은 뒤 그 대단했던 다케다 가문[武田家]에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오직 신겐이라는 거인과의 끈으로 이어져 있던 노신(老臣)이나 숙장(宿將)들 사이에 어린 카츠요리[勝頼]를 얕보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신겐이 죽은 지 11일째에 카츠요리는 숙장들에게 '소홀함이 없도록 하겠다'는 기청문(起請文)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카츠요리에게는 초조함이 있었다. 빨리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어서 노신들의 콧대를 꺾고 싶었다.

 신겐은 “3년간 죽음을 숨겨라. 병사를 일으키지 말고 영토를 지켜라”하고 유언을 남겼지만, 카츠요리는 그것을 기다릴 수 없었다.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도발해왔기 때문이다. 타케다 측의 미카와[三河] 전선기지인 나가시노 성[長篠城]을 점거한 것이다. 이것을 보고 츠쿠데 성[作手城]의 오쿠다이라 노부마사[奥平 信昌][각주:1]가 토쿠가와 측으로 돌아서 버렸다. 격노한 카츠요리는 노부마사의 부인과 동생을 십자가에 메달아 옆구리를 찔러 죽였다.

 1575년. 이 오쿠다이라 노부마사가 나가시노 성주가 되었다. 이제 카츠요리는 이것을 묵과할 수 없었다. 노신들의 간언(諫言)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카츠요리가 정병 1만5천을 이끌고 나가시노를 향해서 코우후[甲府]를 출발한 것이 이 해의 4월 5일이었다.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타케다 군은 나가시노 성(城)을 포위하였지만 함락시키지 못하였고 그러던 중 오다-토쿠가와의 원군이 도착. 결전의 장소는 나가시노 성 밖의 시타라가하라[設楽原]로 옮겨졌다.

 노신들은 주저하였다.
 “결전을 피하고 우선은 병사를 거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카츠요리는 듣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오다-토쿠가와와의 결전을 정했다.

 1575년 5월 21일.
 이날 나가시노 성 밖의 시다라가하라에서 펼쳐진 전투는 일본역사상 획기적인 전투로써 너무나도 유명하다. 정예를 자랑하는 카이[甲斐]의 기마대가 출격했다. 아침안개 속에서 중앙대, 우익의 바바 노부후사[馬場 信房] 부대에서 함성이 일었다.

 선두가 오다-토쿠가와의 마방책(馬防柵)을 향하고 돌입하여 단번에 유린하고자 했던 그 순간 엄청난 굉음의 총성이 일었다.
 오다 군의 일제사격이었다. 일천 정의 총이 불을 뿜은 것이다. 카이[甲斐]의 인마(人馬)가 연달아 쓰러졌다. 보통이라면 이런 후 적과 아군이 뒤섞여 백병전으로 이어질 터였다. 그런 때야말로 카이의 기마 병단은 가공할 위력을 발휘한다. 최초의 사격으로 상처를 입지 않은 기마대가 개의치 않고 돌진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또다시 천 정의 총이 불을 뿜은 것이다. 아무리 용맹하다 하는 타케다 기마대도 이 새로운 전법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것은 노부나가가 고안한 전법이었다. 노부나가는 아시가루[足軽]의 철포집단 3천명을 3대로 나누어, 천 정씩 교대하며 쉴 틈 없이 일제사격을 반복하게 한 것이다. 당시 유효 사정거리는 기껏해야 100미터였는데, 노부나가는 카이[甲斐]의 군세를 마방책 앞으로 충분히 끌어들인 다음에 섬멸한 것이다.[각주:2]

 타케다 군은 도망. 사상자 1만여에 더해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 昌景], 바바 노부후사 등 유명한 무장들도 다수 전사하는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물러났다. 그야말로 멸망의 서곡이라고 할 수 있는 일전이었다.

 1582년에 오다 군의 진공이 시작되자 타케다에 속해있었던 장수들의 배반이 이어졌다. 특히 키소 요시마사[木曽 義昌]의 모반은 타케다 가문 붕괴에 박차를 가했다. 요시마사는 카츠요리의 여동생을 부인으로 두고 있는 소위 친족이었다. 그 외에도 타케다의 앞날이 어둡다 보고 적에게 달려가는 가신들이 속출하였다.

 결국 타케다 가문의 본거지 신푸 성[新府城] 최후의 날이 왔다.
 성에서 도망치는 초라한 카츠요리의 모습을 당시의 기록자는, [산길을 맨발로 걸었기에 발은 붉게 물드니, 도망자의 모습 애처롭도다.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 없으니….]라고 전하고 있다.

 1582년 3월 11일.
 카츠요리 일행은 불과 100여명. 무사는 그 중 43명이 되어 있었다. 후에후키가와[笛吹川] 천을 거슬러 올라 최후의 거점으로 정해두었던 텐모쿠잔[天目山] 산으로 향했다. 산허리의 협곡에 있는 마을 타노[田野]까지 갔지만, 여기도 안주의 땅은 아니었다. 다음날 수천의 오다 군이 함성을 지르며 공격해 왔다. 좁은 계곡은 눈뜰 수 없을 정도의 참상이 되었다.

 이때 츠치야 소우조우 마사츠네[土屋 惣蔵 昌恒]는 바위 뒤에 몸을 숨겨, 외길을 타고 공격해 오는 적병을 활로 쏘아 수십 명을 쓰러뜨렸으며, 다음에 칼을 쥐고 싸워 '소우조우 한 손 베기[惣蔵片手斬り][각주:3]'라는 용명(勇名)을 후세에 남겼다. 코미야마[小宮山], 아키야마[秋山] 등의 용사들도 달려드는 군세 속에서 칼춤을 추며 수십 명을 베었다.

 전멸은 이제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카츠요리의 아들 노부카츠[信勝]도 십문자[十文字] 창을 들고 눈부신 분전을 펼쳤지만 허벅지에 총탄을 맞아 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판단. 일족인 승려(僧侶)와 서로를 찌르는 식으로 자결했다고 한다.

 일족의 최후였다. 카츠요리는 부인[각주:4]에게 살아서 도망칠 것을 권했지만 부인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자신의 각오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렸다. 19살의 그녀는 법화경(法華經)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난 후 사세구(辭世句)를 읊은 뒤 자신의 가슴에 몸칼을 찔러 자결했다.

 카츠요리는 자결하는 여성 16명의 자살을 일행의 장로(長老)가 도와주는 것을 다 지켜보았다. 더 이상의 미련은 없었다. 카츠요리는 배를 가르고 자결했다.

[다케다 가쓰요리(武田 勝)]
1546년생. 신겐[信玄]의 넷째 아들로 1573년에 가독(家督)을 이었다. 미노[美濃]에 침공하였고, 토오토우미[遠江], 미카와[三河] 등에도 진출하지만, 나가시노[長篠]의 패전 이후 회복하지 못하였고, 텐모쿠잔[天目山] 산에서 오다 군[織田軍]과 싸우다 죽었다. 37세였다.

  1. 당시는 아직 사다마사[貞昌]. 나가시노 전투에서의 공적으로 노부나가[信長]에게 이름자 하나를 하사 받은 뒤에 ‘노부마사[信昌]’가 되었다. [본문으로]
  2. 이상의 이야기는 오제 호안[小瀬 甫庵]의 신쵸우키[信長記]에서 거론된 픽션으로 지금은 의문시되고 있다. [본문으로]
  3. 좁은 외길에서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덩굴을 한 손으로 잡고 한 손으로만 싸웠다고 해서 붙은 이름, ‘한 손 천명 베기[片手千人切り]’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4.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의 6번째 딸. [본문으로]

한나라당 강동갑 김충환 의원 관련

자막제작 2008. 11. 23. 01:52 Posted by 발해지랑



2008년 6월 2일 제작한 것.

한나라당 강동(갑) 국회 의원이신 김충환 의원의 블로그 내용,

(http://blog.naver.com/21kimcw/20051362511) <- 현재 비공개로 돌려져 있음(2008년 11월 23일 현재)

한국일보에 실린 내용,

(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0806/h2008060203122321980.htm)

을 종합해 보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삽질공국 - 오퍼레이션 탁신

자막제작 2008. 11. 23. 01:40 Posted by 발해지랑



2008년 5월경에 만든 것...
뭐 결국 틀린 예상이었지만, 그게 다행인 것이지

지긋지긋한 광고댓글

내 이야기 2008. 10. 4. 11:04 Posted by 발해지랑

저번 달 부터 광고댓글이 창궐하여 잠시 댓글을 비로그인 금지로 하였습니다.

이제는 괜찮나 싶어 어제 밤 12시 즈음부터 풀어 놓았더니, 단번에 4개의 광고댓글이...

네이버의 기술력은 광고댓글도 막지 못할 정도로 실력이 부족한 것일까요?

아니면 네이버 고위층의 자제가 추천인 제도로 용돈 벌려고 하는 것을 돕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현 정권에 프랜들리 하다는 네이버가 정권에 비판적인 포스팅을 하려는 사람들을 광고댓글 공세로 허탈하게 만들어 포스팅을 안하게 하려는계략인 것일까요?

아니면 네이버는 저작권 위반물 덩어리인 웹하드를 네이버 이용자들이이용하게 하고, 모 법무법인은 그것들을 신고해서 번 합의금을 네이버와 나누어 먹기로 한 밀약이라도 있는 것일까요?

어쨌든 다시 비로그인 댓글금지로 합니다.

다른 것은 참아도 광고댓글은 용서할 수 없는 성격이라서...

몇몇 분들에게는 정말 죄송합니다.

ps; 다른 블로그로 이전할까 또 고민하게 합니다.

이글루도 보면 자주 광고 댓글이 달리는 것 같고... 티스토리는 초대장이 없고... 누구 초대장 주실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