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산 책...

내 이야기 2009. 4. 12. 15:54 Posted by 발해지랑
원래 따로 따로 해야했지만...

3월 26일 교보문고를 산 책과 몇 일전 북오프에서 산 책들..

3월 26일 교보문고에서 산 책.

굿바이 게으름

굿바이 게으름

50%할인과 제목에 낚인 책.
뭐 읽어서 나쁠 것은 없지만...간단히 요약하면
"지금하는 것 관두고 당장  니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 하시게"
여담으로...이 책을 읽고 나면서 부터...즉 3월말부터 제 포스팅이 급격히 늦어졌습니다. 이 책에 쓰인대로 하다보니까 그랬냐고요? 설마요...반은 그렇습니다... '그래! 내 인생에 대한 것을 우선 고민해 보자구~'하면서 포스팅이 늦어지게 된 것입니다.

유혹하는 글쓰기

유혹하는 글쓰기

요 몇 주전 영화 '미스트'를 이제서야 보고서 스티븐 킹에 뻑이 가 산 책...
뭐 글솜씨도 늘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평소 생각하다 보니 읽게 되었습죠.
반은 글쓴이의 자서전이옵고, 반은 글쓴이가 생각하는 창작론...이 쓰여있습니다.
읽고 득 보았다는 느낌을 주는 책. 은근슬쩍 추천.

임진난의 기록

임진난의 기록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서 임진왜란이 관련된 챕터 69~80를 따로 발췌한 책.
프로이스의 글을 빼면 정말 허접한 책.

역자들은 포르투갈어 원본을 번역했으며, 이외에도 일본에서 출판된 여러 일본어 번역본과 기타 국내 자료들을 참고해 이 한국어파 번역본을 집필했다. - 임진난의 기록, 루이스 프로이스가 본 임진왜란, 역자 서문 p18
이라고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일본어 번역판 가져다 번역하고 포르투갈어판은 철자만 조사한 듯합니다.
~는~는, ~을~를(~は~は、~を~を) 식으로 일본어체가 그대로 살아있습죠.

거기다 각 챕터 마지막에 주석을 달아서(개인적으로 그 페이지 내에 주석이 실리는 것을 좋아함), 자주 책장을 넘겨야하는 귀찮음을 강요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주석에 틀린 점이 많다는 점. 공부 좀 하고 주석 달지 그러셨어요~
대표적인 것 하나만...(무가관위를 이해 못해 태수를 역임했다는 것까지 까자면...전 게을러서 무리)
임진란에 관련된 나고야(名護屋)는 나고야(名古屋)하고 다른 곳입니다.

나고야(名古屋,  Nangoya[각주:1])좁은 뜻으로는 아이치현(愛知県)의 중심도시인 나고야시(名古屋市)를 칭하지만 보다 넓은 지명의 주쿄권(中京圏)이라고 말할 수 있다. 히젠(肥前)의 항구. - 임진난의 기록, 루이스 프로이스가 본 임진왜란, 용어풀이 p176
포인트는 주쿄권히젠....

더구나 이 책...가격(14000) 높이기 위해서 종이질 캡 좋고(얼어죽을!!), 하드커버(썅~)
이번 달 산 책 중 가장 후회함.

대당제국 신역사군상 시리즈 18

중국사에서도 손 꼽히는 제국인 대당 역사 300년을 170페이지 안에 넣은 책.
당연히 수박 겉 핥기라는 표현도 과분하고 수박이 약 37미터 앞에 있다...는 것만 알려주는 책.


요 몇 일전 북오프에서 산 책

츠카사 시노부 오야붕과 타카야마 키요시 남바투의 6대 야마구치구미(9800원)
司忍組長と高山清司若頭の六代目山口組

-> 엠블렘 테이크냐고요? 나오긴 합니다만 그 만화의 무대는 스미요시카이(住吉会)일 겁니다.

기동전사 건담 일년전쟁 전사 상권(14700원)
機動戦士ガンダム 一年戦争全史、上

기동전사 건담 일년전쟁사(상)

-> 네! 바로 그 책입니다. 예전에 사지 못한 것을 후회하다가 있길레 덥썩~입니다.(윗 사진은 한글판)
잠깐 훝어 보았지만 가상의 이야기를 현실로 만들려는 노력에 눈물이 앞을 가리더군요.

역사군상 시리즈 71 닌쟈와 인술 - 어둠에 숨은 이능자의 허와 실(10500원)
歴史群像 忍者と忍術 - 闇に潜んだ異能者の虚と実

-> 솔직히 닌쟈 안 좋아합니다. 왜 샀냐고요? 역사군상 모으다 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결정판] 도설 센고쿠 합전집(13300원)
[決定版] 図説・戦国合戦集

-> 이런 것은 있으면 좋다고 생각했기에... 역사군상 시리즈 앞부분 전투 일러스트 모음집.

메이지 텐노우 - 막말 메이지 격동의 군상(14000원)
明治天皇-幕末明治激動の群像

->막말유신기는 에조 공화국(蝦夷共和国) 이후 손을 뗀 상태이기에 그다지 관심 없었지만, 다메엣찌님에게 질 수 없다 보니 덥썩... 만약 다메엣찌님을 몰랐으면 사지 않아도 좋았을 책.

헤우게모노 1~5권(1,2,3권은 4200원. 4,5권은 3500원)
へうげもの

->이번 북오프를 찾은 진정한 이유. 현재 8권까지 나왔다지만 5권만 있길레 전부 쓸어 왔음.
후루타 오리베(古田 織部)가 주인공인 만화입니다.

이번에 북오프에서 산 책 중 읽은 것은 헤우게모노 4권까지...나머지는 손도 못 대고 있습죠.

  1. 포루투갈어 판에는 이리 쓰여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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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죠스이(如水)는 호(號)이며 이름은 요시타카[孝高], 통칭을 칸베에[官兵衛]라고 한다.
 히데요시[秀吉]는 이 칸베에의 지략을 굉장히 두려워했다고 한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이미 천하인이 된 히데요시가 측근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쩌다 보니 히데요시가 죽은 뒤 누가 천하인이 되느냐로 화제가 옮겨졌다. 측근들은 한결같이 '오대로 중 한 사람이 아닐까?'고 하였다. 히데요시는 머리를 저으며 "그렇지가 않네. 저 쿠로다 칸베에 말고는 생각할 수 없지"라고 말했다. 모두 이상히 여겼다. 칸베에는 기껏해야 부젠[豊前] 12만석의 다이묘우[大名]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히데요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노부나가[
信長]가 급사한 이래 자신은 아케치[明智] 정벌[각주:1]을 시작으로 여러 전투를 경험하였다. 전투에 임하여 아무리 고심해도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는 문제가 생겨 이를 칸베에에게 상담하면 그 답은 자신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과 똑같았다. 오히려 칸베에 쪽이 훨씬 의표를 찌른 작전을 세웠다. –고.
 또한 히데요시는 "세상에 두려운 자가 둘 있으니 토쿠가와 이에야스[
川 家康]와 쿠로다이다. 토쿠가와는 그래도 온화한 사람이지만 쿠로다는 뭐라 말할 수 없이 알 수 없는 자이다."라고도 말했다 한다.

 칸베에가 센고쿠의 무대 전면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은 히데요시와 만나면서부터이다. 히데요시가 츄우고쿠[中国] 모우리[毛利] 공략을 위해 하리마[播磨]로 병사를 이끌고 왔을 때부터이다. 그때까지 칸베에는 하리마의 시골 다이묘우[大名]에 속한 가로(家老)에 불과하였다. 주군은 고챠쿠 성[御着城]의 성주인 코데라 마사모토[小寺 政職]라 하였다.
 1577년 10월 히데요시가 모우리 정벌의 사령관으로 하리마에 왔을 때 칸베에는 자신의 거성(居城)인 히메지 성[
路城]를 바치고 자신은 히메지 성의 두 번째 성곽(二の丸)으로 옮겨 살았다[각주:2]. 히데요시는 이 해의 7월 칸베에에게 보낸 편지에 '자네는 내 동생 코이치로우[小一=히데나가[秀長]]만큼이나 편한 사람일세'라고 까지 적었다. 칸베에의 기량에 느끼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이 때 이후 칸베에는 타케나카 한베에[竹中 半兵衛]와 함께 히데요시 참모의 한 사람이 되었다.

 칸베에의 노력으로 인해 하리마의 대부분은 오다 측에 붙게 되지만, 1578년 3월 하리마 최대의 호족 미키 성(三木城)의 벳쇼 나가하루[別所 長治]가 모우리 쪽으로 돌아서자 다른 호족들도 이에 동조하였다. 칸베에의 주군인 코데라 씨에게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흘렀다. 거기에 또 생각도 못했던 사태가 일어난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하리마에 구원하러 올 예정이었던 오다 가문의 유력 무장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가 갑자기 반기를 치켜세웠던 것이다. 노부나가조차 벙찌기만 할 뿐인 급변이었다.

 여기서 칸베에는 친구이기도 한 무라시게를 설득하기 위해서 단신으로 무라시게가 있는 이타미 성[伊丹城]에 입성하였다. 하지만 무라시게에게는 오다 쪽으로 돌아갈 생각이 아예 없었다. 사자(使者)인 칸베에도 원래대로라면 살해당할 처지였지만 무라시게와 오랜 기간 친교를 맺어왔고 또한 종교가 같은 천주교였기에 살해당하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참혹한 포로 생활이 시작되었다. 

 습한 시궁창 같은 감옥이었다. 가려움을 일으키는 피부병이 머리 부분을 잠식하였으며[각주:3] 다리의 근육이 떨어지고 피부병 때문에 오른쪽 무릎이 썩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반년도 버티지 못했겠지만 칸베에의 생명력은 여기서 1년을 버틸 정도로 강했다. 낙성으로 인하여 구출되기는 하였지만 이 감옥생활로 인하여 죠스이는 오른쪽 다리의 자유를 잃었다. 또한 이 때 무라시게와 뜻을 같이한 코데라 씨는 히데요시에게 성에서 쫓겨났다. 칸베에가 코데라 성(姓)을 버리고[각주:4] 원래의 쿠로다[田]로 돌아온 것은 이때부터이다.

 1582년 6월 2일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었다. 죠스이는 이때 히데요시를 따라 모우리 가문[毛利家]의 최전선기지인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의 수공(水攻)에 참전하고 있었다. 흉보가 그 진영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정신이 나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동요하고 있던 히데요시의 귓가에 "지금이야말로 히데요시님이 천하를 잡을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이옵니다"하고 칸베에는 속삭인 것이다.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한 정세판단이었다. 히데요시는 이 때 이후 칸베에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으며 히데요시 정권의 최대 공로자임에도 불구하고 히데요시가 칸베에에게 하사한 것은 부젠[豊前] 나카츠[中津] 12만석밖에 안 되었다.

 죠스이가 가슴 속에 숨기고 있던 천하에 대한 야망을 잠시나마 비친 것은 후에 천하를 나누는 싸움이라는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 때였다.
 당시 적자(
嫡子)인 나가마사[長政]는 이에야스의 부사령관 격으로 세키가하라에서 싸웠는데, 그 사이 죠스이는 전격적인 움직임으로 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 붕고[豊後] 등 큐우슈우[九州] 북-중부의 서군 세력을 물리치고 그 지역을 손에 넣은 것이다. 휘하의 주력병사들을 나가마사가 세키가하라로 거느리고 갔기에 죠스이에게는 소수의 병사밖에 없었다. 하지만 죠스이는 백성, 낭인을 긁어 모아 용병군단을 조직하였다. 금은을 방 안에 산더미같이 쌓아서 지원자들을 모았다고 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쿠로다 군은 동군 토쿠가와 쪽이라고 깃발을 선명히 하고 있음에도, 죠스이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 이에야스[家康] 양 쪽을 저울에 메달며 수상쩍은 행동을 보였다는 말이 있다. 미츠나리에게서 협력을 요청하는 밀사가 왔을 때, "큐우슈우[九州] 중 7개 쿠니[国]를 준다면 – "하고 서군에 설 듯한 척을 하였다.

 본심은 이러했다. 토쿠가와와 이시다가 싸우고 있는 틈을 타 큐우슈우를 제압하고 양군이 싸우다 지쳤을 때를 봐서 단번에 중앙으로 진출, 천하를 손에 넣으려고 한 가공할 야망이었다. 하지만 세키가하라의 승패는 허무하게 결정이 나 토쿠가와가 이겼다.

 예상이 빗나간 데에 대한 애석함 때문인지 세키가하라 전쟁 후 죠스이는 아들인 나가마사가 토쿠가와 세력의 중심이 되어 뛰어난 활약을 보인 것을 알자 "이 천하의 얼간이 같은 놈"하고 투덜대었다고 한다.

 이 귀모(鬼謀)의 사나이는 죽을 때까지도 연기를 펼쳤다. 임종의 때가 다가오자 이유도 없이 중신들을 욕하며 쪽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도가 지나쳐 나가마사가 한마디 하자 "이는 너를 위해 서란다. 중신들의 마음이 나에게서 떠나 빨리 나가마사의 대가 되었으면 하고 생각하게 만들기 위함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구로다 조스이(田 如水)]
1546년 하리마[播磨] 히메지[
路]에서 태어났다. 처음엔 코데라 마사모토[小寺 政職]를 섬겼지만 히데요시[秀吉]의 츄우고쿠([中国] 공략 때부터 히데요시의 모신(謀臣)이 되었다. 1580년 하리마 내에 1만석이 주어졌고, 1585년에는 야마자키[山崎] 성주가 되었으며, 1588년에는 부젠[豊前] 나카츠(中津) 12만 5천석이 되었다. 경건한 천주교도로 세례명을 '돈 시메온(Don Simeon)'이라고 하였다. 1604년 59세에 죽었다.

  1.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치기 위한 츄우고쿠 대반전[中国大返し]에 이은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를 말한다. [본문으로]
  2. 나머지 일족은 부친(쿠로다 모토타카[黒田 職隆]의 은거성인 코우노야마 성[国府山城]으로 보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이로 인해 瘡頭라는 별명이 생겼다. 우리식 표현으로 하면 '곰보'가 되겠지만, '瘡'라는 글자는 매독의 속칭이기도 하기에 그가 매독에 걸렸다는 말이 생긴 것 같다. [본문으로]
  4. 이때까지만 해도 '코데라 요시타카[小寺 孝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본문으로]

맹꽁이서당님께 바치는 조공.

내 이야기 2009. 4. 5. 03:15 Posted by 발해지랑

많이 늦어져서 정말 죄송합니다.
요즘 악마의 사이트에 홀리는 바람에….

제 분수도 모르고 감히 추천을 한다는 것이  이 분들께 죄송스럽기도 합니다만…
저한테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시는 분들입니다.
(댓글 하나 안 단 곳이 대부분입니다만… ^^) 
 

Mr술탄-샤™.

갑옷이라면 이 곳.

 

Periskop

2차대전사라면 바로 이 분.
이 분이 주인장으로 계신 포럼은 2차대전에 관한 한 국내 최고.


 耿君(경군)

 일본사의 이것저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고어핀드님.

칼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곰PD님.

각양각색의 전쟁에 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길 잃은 어린 양님.

2차대전과 해방 전후사에 관해서 피가 되고 뼈가 되는 포스팅을 많이 하십니다.

 

번동아제님.

한반도와 주변 군사사라면 이 블로그.

 

볼리바르

글을 많이 쓰지 않는 다는 점이 조금 아쉬운 분. 
이 분이 위키와 소설을 결합하셔서 쓰신 글은 꼭 한 번 보시길.
지금보다 앞이 더욱 기대가 되는 분.

 

슈타인호프님.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곳.

 

아케치님.

일본 센고쿠 시대에 관심이 있다면 피할 수 없는 분.
또한 근래 관련 포스팅을 안 하신다는 점이 많이 아쉬운 분.

 

이준님.

솔직히… 이준..까지가 성함이신지 ‘이준님’이 풀네임이신지 항상 궁금하지만…
방송, 소설, 기서, 양서, 근현대사에 관해서 재미있게 글을 쓰십니다.

 

파파울프

해전사에 관해서 재미있게 쓰십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하고 기발한 역사 관련 포스트도 좋습죠.

 

초록불

환독을 몰아내기 위한 필수 블로그(물론 그 외에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실 저도 한 때 환빠였던지라 치유하는데 많은 덕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학생

유럽의 큼지막한 전사를 배울 수 있는 곳입죠. 거기다 꾸준하고 부지런하시다는 점이 또한 좋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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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모반한 사람으로서도 유명하지만 다인(茶人)으로서도 일류인 인물이었다. 무라시게가 소장하고 있던 이도챠완(井茶碗)은 '아라키 코우라이(荒木高麗)'라 불리며 명물을 기록한 여러 장부에 실린 천하의 명물이었다. 무라시게에게서 이에야스(家康)의 손으로 옮겨졌고 그 후 오와리 토쿠가와 가문(尾張川家)[각주:1]에 전해져 지금도 토쿠가와 미술관(川美術館)에 보존되어있다.

 소년시대의 무라시게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소년 무라시게는 힘이 대단히 셌다고 한다. 부친 요시무라(義村)를 태운 바둑판의 양 다리를 잡고 들어 올려서는 방을 세 바퀴 돌았다고 한다. 겨우 12살 때의 일이다[각주:2].

 처음엔 쇼우군(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의 가신[각주:3]이었지만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 藤孝=유우사이(幽))와 함께 노부나가의 휘하로 들어가 뛰어난 활약을 발휘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秀) 등의 다이묘우(大名)도 무라시게에게 배속되어 있었다.

 무라시게의 모반은 1578년에 뜬금없이 일어났다. 노부나가에게 적대하고 있던 츄우고쿠(中)의 모우리 씨(毛利氏)로 배를 갈아탄 것이다. 당시 무라시게는 셋츠(津) 방면군 사령관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으며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타키가와 카즈마스(川 一益), 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 등과 어깨를 견줄 정도의 위세를 가지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무라시게의 뜬금없는 모반에 노부나가는 "무엇이 부족하여 그러는가?"라고 놀랐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뭐든 말하라"고 하면서 "반역하려는 뜻을 버리고 인질로 모친을 바치도록"하고 설득의 사자(使者)를 보냈다. 사자로 보내진 것은 아케치 미츠히데[각주:4], 마츠이 유우칸(松井 友閑)[각주:5], 만미 센치요(万見 千千代)[각주:6]였다. 히데요시도 이타미(伊丹)에 있는 무라시게의 거성(居城)으로 가서 뜻을 거두도록 재촉했다. 쿠로다 칸베에(田 官兵衛=죠스이(如水))가 설득하러 갔다가 포로로 잡힌 것은 이 때의 일이다.

 모반의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아라키 가문의 가신이 노부나가의 적인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에 쌀을 밀매한 것[각주:7]이 밝혀졌기 때문이라고도 하며, 또는 아케치 미츠히데의 참언에 의한 것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필시 진짜 원인은 노부나가의 잔인하고 폭군적인 성격을 무라시게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단은 모반에 대한 것을 해명하기 위해서 노부나가에게 가려고 했지만 가노(家老)[각주:8]들이 "잠깐 동안은 용서하시겠지만 의심 많은 분이기에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라는 충고를 들은 것도 있어, 무라시게는 더 이상 오다 가문에서는 살아갈 길이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무라시게가 소장하고 있던 청자(靑磁)로 된 꽃병(花甁)이 모반의 원인이라고 한다. 노부나가가 꼭 갖고 싶다고 하는 것을 무라시게가 거절하였기 때문에 노부나가는 삐졌다고 한다.

 승산이 있던 모반이 아니었다. 무라시게도 그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노부나가가 무라시게의 휘하인 타카야마 우콘, 나카가와 키요히데를 등돌리게 해서는 양도(糧道)를 끊자 무라시게는 별다른 저항도 하지 않고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각주:9]. 이런 사정을 "처자식, 형제를 버리고 자기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것은 그야말로 전대미문"이라고 사서는 기록하고 있는데, 그는 처자식과 일족을 이타미 성(伊丹城)에 남겨둔 채 종자(從者) 5~6명만을 데리고 탈출한 것이다. 일단 아마가사키 성(尼ヶ崎城)으로 피신[각주:10]한 무라시게는 이후 하나쿠마 성(花城)[각주:11]에 갔다가 여기서 빙고(備後)로 가서 모우리 씨에게 보호를 청했다.

 무라시게에 대한 노부나가의 증오는 지독했다.
 그에 대한 보복은 이타미 성에 남겨진 무라시게의 처자에게 향해졌다. 21살의 미녀로 와카(和歌)가 뛰어났다는 무라시게의 부인을 시작으로 여관(女官) 등 122명을 십자가에 매달아 창으로 찔러 죽였다. 그때의 비명소리는 '하늘에도 소리가 닿았다'고 할 정도였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또한 여자 하인, 무라시게 부하의 어린 자식(
若党) 등 510여명을 네 채의 작은 집에 가두어서는 불을 질러 태워 죽였다고 한다.

 후에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자 친교가 있던 히데요시의 부름을 받아 다인(茶人)으로 섬기며 일생을 마쳤다.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
셋츠(摂津) 출신. 오다 노부나가(
織田 信長)를 섬기며 셋츠 이타미 성(伊丹城) 성주가 되었다.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공략에 임하고 있었지만 모우리(毛利)-혼간지와 내통하여 모반을 일으키지만 실패. 후에 머리를 밀고 뉴우도우 도우훈(入道道糞)이라 자칭하였다. 1586년 죽었다. 52세.

  1. 에도 바쿠후(江戸幕府)의 쇼우군(将軍)의 후사가 끊겼을 때 쇼우군을 만들 수 있는 가문인 어삼가(御三家)의 필두. 단 에도 시대를 통해서 쇼우군을 배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본문으로]
  2. 밥 많이 처먹는 아들에게 아비가 한 마디 하자 "무사는 힘이 쎄야 합니다"라 말하곤 그 증거랍시며로 저렇게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정확히는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의 셋츠슈고(摂津守護)인 이케다 카츠마사(池田 勝正)의 가신. [본문으로]
  4. 그의 딸은 무라시게의 적남 무라츠구(荒木 村次)의 부인이었다. 참고로 이 부인은 이때 이혼하여 미츠히데의 중신 히데미츠(明智 秀満)와 재혼. [본문으로]
  5. 마츠이 유우칸은 사카이(堺)에서 노부나가의 대리인이었으며 또한 당시 노부나가의 차제구 수집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기에 다도에 밝은 무라시게와는 친분이 깊었다고 생각된다. [본문으로]
  6. 당시 노부나가 최측근 시동. 노부나가 뿐만 아니라 노부타다(信忠)에게도 신뢰 받고 있었다. 이 사람이 죽은 뒤에 그 포지션을 이어받은 것이 모리 란마루. [본문으로]
  7. 정확히는 무라시게 휘하에 있던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清秀)의 가신이 그랬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이 말은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이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9. 1년 가까이 버텼지만 무라시게를 궁지로 몰아 넣은 타카야마 우콘, 나카가와 키요히데가 노부나가에게 돌아섰기에 성을 버리게 된다. 참고로 상기의 만미 센치요(万見 千千代)는 이타미 성을 공격하다 전사. [본문으로]
  10. 이 성은 무라시게의 적남 무라츠구(荒木 村次)의 거성. 참고로 이때 마지막으로 노부나가는 무라시게에게 아마가사키와 하나쿠마를 내놓고 항복하라고 하였으나 이마저도 거절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11. 이때도 싸우기는 하였다. 성을 공략한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의 활약은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를 쫓아낼 때 쓴 노부나가의 서장에도 언급될 정도로 인상적이었던 듯. [본문으로]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는 아비인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에게 자랑했다.

 "나이후[内府]가 제 손을 잡고는 엄청 고마워하더군요. 하긴 뭐 제가 없었음 나이후가 졌을 테니까요. 킨고[金吾]만 하더라도 제가~" 나불나불 블라블라 페라페라..

 그 말을 들은 아비는 잠시 아들을 쏘아보곤 한 마디 하였다.

 "그래 어느 손을 잡고 고마워 하더냐?"

 "오른손이었습니다"

 "그 때 니 왼손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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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이 사진을 보고 생각난 에피소드.

ps:


사이고우 테루히코[西郷 輝彦]씨와 악수를 나누었을 때..
일본 사람들은 저런 식의 악수가 익숙치 않은 듯..
사이고우 씨와 함께 있던 분이
"악수가 특이하네"
라고 말하자, 사이고우씨..
왼손으로 칼을 빼내어 베는 시늉을 하며
"이럴 지도 모르니까"
라는 말을 듣고 납득.
.
.
....근데
한국인도 칼을 차고 다닌 시절이 있었으면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