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우조우지 타카노부(造寺 隆信)의 풍모를 전해주는 기록이 있다. 사츠마(薩摩)의 시마즈(島津), 시마바라(島原)의 아리마(有馬) 연합군과 싸워 패사(敗死)했을 당시의 모습을 포르투갈의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기록하였다.
 [타카노부는 너무 뚱뚱해 말에도 타지 못하였기에 6명이 메는 가마에서 지휘하였다]
 주색에 빠진 말년의 타카노부를 생생히 전해주는 기록이다.

 처음에 타카노부는 절에서 생활하였다. 류우조우지 가문과 인연이 깊은 호우린 원(淋院)에 들어가 '엔게츠(円月)' 혹은 '츄우나곤(中納言)'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승려답지 않게 호방하며 거칠고 난폭한 소년이었다고 한다.
 엔게츠가 17살 때 류우조우지 가문에 생각하지도 못했던 불행이 찾아온다.
 1545년 1월에 조부 이에즈미(家純), 부친 치카이에(周家)를 시작으로 한 숙부 등 일족의 주요한 면면들이 아야베(綾部) 성주 바바 요리치카(馬場
周)의 모략으로 인해 한꺼번에 살해당한 것이다. 그때 90세가 넘는 증조부 이에카네(家兼)가 바바 요리치카를 물리쳐 복수했지만 그 다음해의 봄,
 "츄우나곤(타카노부)는 남다른 기개와 그릇을 가지고 있다. 류우조우지 가문을 재흥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그 아이일 것이다. 츄우나곤을 환속시켜라"
 라는 유언을 남기고 93세의 나이로 죽었다.

 류우조우지 가문은 사가 성(佐賀城)에 종가인 '무라나카 류우조우지(村中 造寺)'와 분가인 '미즈가에 류우조우지( 竜造寺)'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타카노부는 분가 출생이었다. 증조부의 유언에 따라 환속하여 타네노부(胤信)라는 이름을 칭한 타카노부는 종가의 당주 타네미츠(胤栄)가 죽자 그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종가의 후계자가 되었으며 그 2년 뒤에는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 )의 이름 글자 하나를 하사 받아 타카노부()로 이름을 고쳤다.

 1551년 그 오오우치 요시타카가 가신 스에 타카후사( 隆房)에게 살해당하자 타카노부의 주변도 소란스러워 진다. 여러 호족들과의 항쟁이 끊이질 않았지만 이들을 전부 정복하였으며, 1559년에는 큐우슈우(九州)의 명문 쇼우니 토키히사(少弐 時尚[각주:1])를 물리쳐 무명을 높였다. 그 후인 1570년 8월에는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이 대군을 이끌고 타카노부의 본거지 사가 성에 육박하는 큰 위기에 빠지지만 타카노부의 외사촌[각주:2]이며 동생이기도 한[각주:3] 모신(謀臣)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 直茂)의 활약으로 간신히 낙성은 면했다.[각주:4]

 그 전투에서의 일이다.
 오오토모 측에서 타카노부의 어떤 중신에게,
 "타카노부를 배신하고 우리 쪽으로 온다면 무엇을 바라건 다 해주겠다"
 는 편지가 화살에 엮여 날라왔다. 이 중신은 평소 타카노부와 사이가 안 좋았던 가신이었다. 그 편지가 타카노부에게 전해지자,
 "우리의 결속을 무너뜨리려는 오오토모의 책략이다"
 고 하며 그 편지를 펴 볼 생각도 안하고 버렸다고 한다.

 1580년 오오토모 휘하의 벳키 아키츠라(戸次 鑑連=타치바나 도우세츠(立花 道雪))와 화의를 맺었을 때도 타카노부는 호방한 태도를 보여준다.
 벳키 측에서 큰칼(
太刀), 말, 술과 안주를 가지고 온 사자(使者)가 오자 마침 식사 중이던 타카노부는,
 "마침 잘 되었군. 그 술을 이리 다오"
 라고 한 것이다. 측근은 예부터 적이 보내온 술은 마시지 않는 것이 통례이며 어쩌면 독이 들어있을 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였지만 타카노부는,
 "아키츠라는 당대의 명장. 그런 더러운 수를 쓸 사나이가 아니다"
 고 말하며 밥그릇에 술을 세 번 따라 마신 뒤,
 "이 잔을 아키츠라에게 주마"
 하고는 사자의 발 앞으로 던졌다. 사자는 그 호쾌한 태도에 압도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1580년 가독을 적자 마사이에(政家)에게 물려준 뒤부터 주색에 빠진 타카노부는 정신이 황폐해지기 시작하여 류우조우지 가문에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딸의 남편을 속여서 죽이거나[각주:5]어린 인질을 십자가에 메달아 찔러 죽이거나 하는[각주:6] 등의 행태에 휘하 장수들의 마음도 떠나기 시작한다.

 1584년 3월. 타카노부에게 최후의 시간이 온다. 시마바라 반도의 모리타케()에서 시마즈-아리마 연합군과 싸워 무턱대고 돌격만 하다가 패하여 죽은 것이다.
 시마즈의 용사 카와카미 사쿄우노스케(
川上 左京亮)에게 목이 잘렸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 비참하게도 그 수급을 류우조우지 가문에 전해졌을 때,
 "재수없는 머리통은 우리도 필요 없다"
 며 아군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국경 부근의 간고우 사(
願行寺)로 보냈다고 한다.

[류조지 다카노부(竜造寺 隆信)]
1529년생. 히젠(
肥前) 사가(佐賀) 성주. 한때는 5개 지역()[각주:7]과 두 개의 섬(島)[각주:8]. 1584년 3월 시마즈(島津), 아리마(有馬) 연합군과 시마바라(島原)에서 싸우다 패하여 죽었다. 56세.

  1. 후에 후유히사(冬尚) [본문으로]
  2. 나오시게의 모친은 타카노부의 숙모. [본문으로]
  3. 타카노부의 모친이 나베시마 가문과의 끈을 강화하기 위해서 48살의 나이로 홀아비가 된 나오시게의 아비에게 멋대로 시집갔다. [본문으로]
  4. 이마야마 전투(今山の戦い). 오오토모 6만 vs 류우조우지 5000. 류우조우지 군은 사가 성(佐賀城)에서 농성. 오오토모 군의 허술한 틈을 눈치챈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야습하여 승리한 전투. 그러나 전술적인 작은 승리에 불과하여 이후 류우조우지는 오오토모에 화의를 청하여 그 휘하로 들어간다. [본문으로]
  5. 카마치 시게나미(蒲池 鎮漣). 증조부 이에카네와 함께 도망친 곳이었으며, 그 후에도 분가출신이기에 류우조우지 종가의 가신들에게 추방당했던 타카노부는 카마치 가문의 신세를 지며 그 군사를 빌려 다시 당주에 앉을 수 있었으나 카마치의 영지인 야나가와(柳川)가 너무 탐났고 시마즈로 접근하며 독립심 강한 사위를 놀러 오라고 꼬셔서 살해. [본문으로]
  6. 아카호시 무네이에(赤星 統家)의 14살짜리 적자와 8살짜리 딸. 무네이에는 이때의 원한으로 타카노부가 패사하는 '오키타(沖田) 외길(畷)의 전투(沖田畷の戦い)'에서 시마즈 측의 선봉 중앙에서 활약하였다. [본문으로]
  7. 히젠(肥前), 히고(肥後) 반, 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 부젠(豊前) 일부 [본문으로]
  8. 이키노시마(壱岐島)와 츠시마(対馬) [본문으로]

그냥 보충

일본사 이것저것 2009. 6. 6. 06:12 Posted by 발해지랑
한국에도 ´큰 人物´ 나올 때 됐다

글 중에서 하단에...
국면을 좌지우지한인물은 ‘사쓰마’의‘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오쿠보 도시미치’(大勾保利道),그리고 막부 측의‘가쓰카이슈(勝海州)의세 사람이었다.
음....카츠 카이슈우[勝 海舟]가 마지막에나 등장해서 에도 성을 무혈개성에 얼굴을 비추기는 하지만 국면을 좌지우지한 인물까지는 아니지 않을까요? 어련하면 그의 제자로 여겨지는 사카모토 료우마[坂本 龍馬]가 구상했다고 하는 조각론[각주:1]에도 카츠의 이름은 없을 정도로 존재가 희미하답니다.

‘사이고’는 일찍이 자살하고, ‘오쿠보’는 젊은 나이에 암살되었다. ‘이등’은 우리의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으로 일본은 일찌감치 통일되고, 서구화 근대화의 길을 질주하여 오늘날의 대국이 되었다
사이고우 타카모리[西郷 隆盛]는 지 뜻대로 되지 않자 무작정 낙향해서 '사학교당'이라는 파벌을 만들고는 결국 반란을 일으켰지만('おはんたちがその気なら、おいの身体は差し上げもんそ[각주:2]라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얼간이같은 짓[각주:3]으로 캐삽질하다가 패하고 닥돌하다 총 맞고 '이제는 여기까진가~'하고 배 가른 것.

오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 利通]가 49살에 죽은 것이 젊은 나이였는지 어땠는지는 느끼는 사람마다 다르니 그렇다 치고, 오오쿠보가 개혁하다가 보수꼴통들(당시 일본식으로 보자면)에게 암살당했는지는 아신다면 쓰신 글하고 안 맞지 않을까?

그냥 급한 땜질 포스팅~
  1. 바쿠후 최후의 쇼우군 토쿠가와 요시노부(徳川 慶喜)가 정권을 조정에 되돌려 준 '대정봉환'에 감격하여 차후 정권의 중추(内大臣)에 요시노부를 앉힌 내각..비슷한 것. [본문으로]
  2. 반란을 일으키기 앞서 부하들에게 회의를 시키다 무개추가 반란에 이르르자. "니들이 그런 생각이라면 내 몸을 받치마"... [본문으로]
  3. 쿠마모토 성의 타니 타테키[谷 干城]한테 자기가 성을 비우고 자기 편이 되라고 명령내리면 정부를 배신하고 자기한테 올 줄 알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폭풍 속에서 빛나야 해~

동영상 2009. 6. 3. 18:13 Posted by 발해지랑


仕草がやばいくらいにカワユス!
...
그러고 보니 1년전쟁 다룬 것 중에서는 유일하게 안 본 듯.
(무엇보다 건담이 여러 대 나오면 안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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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세계의 열차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풍경 소개 프로그램. 한국에서도 케이블 티비에서 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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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년 동안 계속 되고 있는 코미디 프로그램 ダウンタウンのガキの使いやあらへんで!!

ちびりまる子ちゃん(지린 마루코짱)
=> 장수 만화 꼬마 마루코짱

とっとこハメ太郎(.......)
=> 축생 햄스터가 나오는 만화 とっとこハム太郎

調教ラブストーリー (조교 러브스토리)
=> 한때 엄청난 인기를 끈 드라마 동경 러브스토리

オパイレーツ・オブ・カリビアン
=> 캐러비안의 해적(パイレーツ・オブ・カリビアン)...おっぱい

ヌード・オブ・ザ・リング(누드 오브 더 링)
=> 반지의 제왕

한국이나 일본이나 작명 센스는 거기서 거기
다 아시는 당신은 저와 동급!!
....개인적으로 역사를 좋아하는 지라 "見ろ肛門"의 센스에는 뒤집어졌음.

밑에는 한국거


 한때 큐우슈우[九州] 6개 지역[国]에서 위세를 떨친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은 기독교 다이묘우(大名)로도 유명하다.
 일본에 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파하여 당시
야마구치[山口]에 머물고 있던 프란시스코 하비에르를 자기 영지(領地)인 붕고[豊後]의 후나이[府
=현 오오이타 시[大分市]]로 초대하여 회견하였다. 소우린 22살 때였다. 이때부터 이 젊은 붕고의 주인은 이국(異國)의 종교에 흠뻑 빠져들기 시작한다.
"…(전략)내가 생각하기에 지금 들은 이 가르침보다 고귀한 말씀은 없었다. 또한 이 가르침보다 도리에 맞는 가르침 역시 없을 것이다"
 이때는 이렇게 고백하였지만 사실 당시만 해도 아직 기독교에 입신하지 않았다. 그 대신 붕고 영내(領內)에 포교를 허용하였으며 후나이[府
内]에 교회를 세워 한때 소우린의 영지(領地)는 일본 기독교 활동의 근거지가 될 정도였다. 한센병 환자를 수용하는 병원까지 지었다.

 한편 청년 소우린은 믿음직한 기독교 보호자이기는 하였지만 호전적이고 빠굴을 굉장히 좋아하는 센고쿠 무장이기도 하였다. 1553년에는 가신의 부인 중에 미모로 유명한 여성을 강제로 빼앗아 첩으로 삼았기 때문에 부인을 빼앗긴 핫토리 우쿄우노스케[服部 右京助]를 시작으로 한 이치마다 아키스케[一万田 鑑相], 무네카타 아키히사[宗像 鑑久] 등의 중신들이 모반을 일으켰다[각주:1]. 그외에도 소우린은 친족이나 가신들의 부인에게 손을 댔다.

 가독을 상속할 때 피비린내 나는 가문 내란이 일어났다.
 소우린의 부친 요시아키[
義鑑]가 난폭한 소우린[각주:2]을 미워하여 총애하던 측실과의 사이에서 낳은 시오이치마루[塩一丸]를 후계자로 삼으려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장자상속을 주장하는 두 중신[각주:3]이 1550년 2월 10일 밤에 오오토모 저택의 2층에서 자고 있던 요시아키를 습격하여 시오이치마루와 그 어미를 죽인 것이다. 세상에서는 이를 '이층의 붕괴[二階崩れ]'라고 한다.[각주:4]

 소우린은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해를 끼치려는 자가 있으면 육친이라 하더라도 용서치 않았다.
 1554
히고[肥後]의 키쿠치 요시타케[菊池 義武][각주:5]가 붕고[豊後]를 노렸다는 이유로 나오이리 군[直入郡] 키하라[木原]로 불러들여서[각주:6] 살해하였다. 요시타케는 소우린의 숙부였다. 이 숙부의 수급을 검사할 때 소우린은 "오오토모 가문을 노린 괘씸한 놈"이라며 채찍을 휘둘러 그 목을 마구 쳤다고 한다.

 1559년부터 1570년 동안 오오토모의 기세는 하늘 높은 줄 몰랐다. 그 사이에 쿄우토[京都] 다이토쿠 사[大徳寺]의 고승 이운 화상[惟雲和尙]을 초대하여 그에게 사사 받아 머리를 밀고 불문에 들어가 '즈이호우 소우린[瑞峯宗麟]'이라는 법호(法號)를 얻었다. 여전히 소우린은 기독교도가 아니었다.

 1571년 소우린은 아시카가 쇼우군[足利軍]에게서 '큐우슈우 탄다이[九州探題]'에 임명 받아 부젠[豊前], 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 붕고[豊後], 히젠[肥前]의 6개 지역을 영유(領有)하는 거대 다이묘우가 되었다. 당시 후나이[府内]에 있던 선교사도 "일본 최대의 영주 중 한 명"이라며 소우린의 위세를 전해주고 있다.

 큐우슈우[九州]에 남은 곳이라고는 명문 시마즈 씨[島津氏]가 영유(領有)하는 휴우가[日向]의 일부, 사츠마[薩摩], 오오스미[隈] 3개 지역이었다. 그 시마즈 씨가 큐우슈우[九州] 제패를 목표로 북상하여 소우린의 이웃 나라인 휴우가[日向]에 침입하였다.

 이해 즉 1578년 49세의 소우린은 불교의 법의(法衣)를 벗고 세례를 받아 '프란시스코'[각주:7]라는 세례명을 받는다. 다년간 그의 입신을 거부해 왔던 부인을 버리고 새로운 부인을 맞이하여 입신한 것이었다. 신앙도 철저하여 영내(領內)에 있던 신사(神社), 사원(寺院)을 계속해서 불태워 파괴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우린의 기독교 개종과 동시에 오오토모 가문의 운명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 1578년에 4만 대군으로 휴우가[日向]에 진출한 오오토모 군[
大友軍]은 시마즈 군[島津軍]이 선두에 내세운 '하치만 대보살[八幡大菩薩]'의 깃발에 위압당해 전군이 붕괴되어 패주하였다. 사상자 2만에 달하는 참패였다. 이것이 유명한 휴우가[日向] 미미가와 전투[耳川の合戦]이다.

 이후 오오토모 왕국은 급속히 쇠퇴하여 1587년 소우린은 실의 속에 이 세상을 떠났다.

[오토모 소린(大友 宗麟)]
1530년생. 이름은 요시시게[
義鑑], 세례명은 프란시스코. 붕고[豊後] 우스키[臼杵] 성주. 1582년 오오무라[大村], 아리마[有馬] 등과 함께 일본 최초로 유럽의 로마 교황에게 사절(使節)을 파견하였다. 1587년 5월에 죽었다. 58세.

  1. 실은 오오우치 가문[大内家]에 후계자로 보낸 동생 오오우치 요시나가[大内 義長]가 큐우슈우에 있던 오오우치 가문 영지에 손을 썼고 그에 동조하여 상기의 세 명이 반란을 일으켰다 진압당했다. 부인을 취한 것은 그 후의 일. 참고로 이치마다 아키스케의 부인도 취했다. [본문으로]
  2. 소우린이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소우린을 폐적하고 시오이치마루 옹립을 주도적으로 꾀한 이리다 치카자네[入田 親誠='이리다'는 '뉴우타'라고도 읽는다]는 소우린의 후견인 & 스승이었다...지만 여기엔 또 히고[肥後]의 영지를 둘러싼 오오토모 가문 내의 파벌 싸움도 섞여 있었다. [본문으로]
  3. 소우린을 폐적하기 위해 요시아키는 네 명의 중신과 협의하였지만 네 명 다 반대. 그래서 요시아키는 네 명중 두 명을 살해하자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두 명이 난을 일으켰다. [본문으로]
  4. 침입한 중신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참살. 요시아키는 이때 입은 상처로 이틀 후 사망. [본문으로]
  5. 소우린의 부친 요시아키가 히고의 명문가인 키쿠치 가문을 빼앗기 위해 키쿠치 가문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자신의 동생(즉 소우린에게는 숙부가 됨)을 양자로 들여보냈지만 독립심과 야망, 멍멍이 같은 성격에 비해 능력이 딸려 결국 키쿠치 가문의 가신들에게 추방. [본문으로]
  6. 갈 곳이 없는 차에 소우린이 보호해 준다는 명목으로 초대하였다. [본문으로]
  7. Dom Francisco.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