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서당님께 바치는 조공.

내 이야기 2009. 4. 5. 03:15 Posted by 발해지랑

많이 늦어져서 정말 죄송합니다.
요즘 악마의 사이트에 홀리는 바람에….

제 분수도 모르고 감히 추천을 한다는 것이  이 분들께 죄송스럽기도 합니다만…
저한테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시는 분들입니다.
(댓글 하나 안 단 곳이 대부분입니다만… ^^) 
 

Mr술탄-샤™.

갑옷이라면 이 곳.

 

Periskop

2차대전사라면 바로 이 분.
이 분이 주인장으로 계신 포럼은 2차대전에 관한 한 국내 최고.


 耿君(경군)

 일본사의 이것저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고어핀드님.

칼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곰PD님.

각양각색의 전쟁에 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길 잃은 어린 양님.

2차대전과 해방 전후사에 관해서 피가 되고 뼈가 되는 포스팅을 많이 하십니다.

 

번동아제님.

한반도와 주변 군사사라면 이 블로그.

 

볼리바르

글을 많이 쓰지 않는 다는 점이 조금 아쉬운 분. 
이 분이 위키와 소설을 결합하셔서 쓰신 글은 꼭 한 번 보시길.
지금보다 앞이 더욱 기대가 되는 분.

 

슈타인호프님.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곳.

 

아케치님.

일본 센고쿠 시대에 관심이 있다면 피할 수 없는 분.
또한 근래 관련 포스팅을 안 하신다는 점이 많이 아쉬운 분.

 

이준님.

솔직히… 이준..까지가 성함이신지 ‘이준님’이 풀네임이신지 항상 궁금하지만…
방송, 소설, 기서, 양서, 근현대사에 관해서 재미있게 글을 쓰십니다.

 

파파울프

해전사에 관해서 재미있게 쓰십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하고 기발한 역사 관련 포스트도 좋습죠.

 

초록불

환독을 몰아내기 위한 필수 블로그(물론 그 외에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실 저도 한 때 환빠였던지라 치유하는데 많은 덕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학생

유럽의 큼지막한 전사를 배울 수 있는 곳입죠. 거기다 꾸준하고 부지런하시다는 점이 또한 좋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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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모반한 사람으로서도 유명하지만 다인(茶人)으로서도 일류인 인물이었다. 무라시게가 소장하고 있던 이도챠완(井茶碗)은 '아라키 코우라이(荒木高麗)'라 불리며 명물을 기록한 여러 장부에 실린 천하의 명물이었다. 무라시게에게서 이에야스(家康)의 손으로 옮겨졌고 그 후 오와리 토쿠가와 가문(尾張川家)[각주:1]에 전해져 지금도 토쿠가와 미술관(川美術館)에 보존되어있다.

 소년시대의 무라시게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소년 무라시게는 힘이 대단히 셌다고 한다. 부친 요시무라(義村)를 태운 바둑판의 양 다리를 잡고 들어 올려서는 방을 세 바퀴 돌았다고 한다. 겨우 12살 때의 일이다[각주:2].

 처음엔 쇼우군(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의 가신[각주:3]이었지만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 藤孝=유우사이(幽))와 함께 노부나가의 휘하로 들어가 뛰어난 활약을 발휘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秀) 등의 다이묘우(大名)도 무라시게에게 배속되어 있었다.

 무라시게의 모반은 1578년에 뜬금없이 일어났다. 노부나가에게 적대하고 있던 츄우고쿠(中)의 모우리 씨(毛利氏)로 배를 갈아탄 것이다. 당시 무라시게는 셋츠(津) 방면군 사령관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으며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타키가와 카즈마스(川 一益), 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 등과 어깨를 견줄 정도의 위세를 가지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무라시게의 뜬금없는 모반에 노부나가는 "무엇이 부족하여 그러는가?"라고 놀랐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뭐든 말하라"고 하면서 "반역하려는 뜻을 버리고 인질로 모친을 바치도록"하고 설득의 사자(使者)를 보냈다. 사자로 보내진 것은 아케치 미츠히데[각주:4], 마츠이 유우칸(松井 友閑)[각주:5], 만미 센치요(万見 千千代)[각주:6]였다. 히데요시도 이타미(伊丹)에 있는 무라시게의 거성(居城)으로 가서 뜻을 거두도록 재촉했다. 쿠로다 칸베에(田 官兵衛=죠스이(如水))가 설득하러 갔다가 포로로 잡힌 것은 이 때의 일이다.

 모반의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아라키 가문의 가신이 노부나가의 적인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에 쌀을 밀매한 것[각주:7]이 밝혀졌기 때문이라고도 하며, 또는 아케치 미츠히데의 참언에 의한 것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필시 진짜 원인은 노부나가의 잔인하고 폭군적인 성격을 무라시게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단은 모반에 대한 것을 해명하기 위해서 노부나가에게 가려고 했지만 가노(家老)[각주:8]들이 "잠깐 동안은 용서하시겠지만 의심 많은 분이기에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라는 충고를 들은 것도 있어, 무라시게는 더 이상 오다 가문에서는 살아갈 길이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무라시게가 소장하고 있던 청자(靑磁)로 된 꽃병(花甁)이 모반의 원인이라고 한다. 노부나가가 꼭 갖고 싶다고 하는 것을 무라시게가 거절하였기 때문에 노부나가는 삐졌다고 한다.

 승산이 있던 모반이 아니었다. 무라시게도 그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노부나가가 무라시게의 휘하인 타카야마 우콘, 나카가와 키요히데를 등돌리게 해서는 양도(糧道)를 끊자 무라시게는 별다른 저항도 하지 않고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각주:9]. 이런 사정을 "처자식, 형제를 버리고 자기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것은 그야말로 전대미문"이라고 사서는 기록하고 있는데, 그는 처자식과 일족을 이타미 성(伊丹城)에 남겨둔 채 종자(從者) 5~6명만을 데리고 탈출한 것이다. 일단 아마가사키 성(尼ヶ崎城)으로 피신[각주:10]한 무라시게는 이후 하나쿠마 성(花城)[각주:11]에 갔다가 여기서 빙고(備後)로 가서 모우리 씨에게 보호를 청했다.

 무라시게에 대한 노부나가의 증오는 지독했다.
 그에 대한 보복은 이타미 성에 남겨진 무라시게의 처자에게 향해졌다. 21살의 미녀로 와카(和歌)가 뛰어났다는 무라시게의 부인을 시작으로 여관(女官) 등 122명을 십자가에 매달아 창으로 찔러 죽였다. 그때의 비명소리는 '하늘에도 소리가 닿았다'고 할 정도였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또한 여자 하인, 무라시게 부하의 어린 자식(
若党) 등 510여명을 네 채의 작은 집에 가두어서는 불을 질러 태워 죽였다고 한다.

 후에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자 친교가 있던 히데요시의 부름을 받아 다인(茶人)으로 섬기며 일생을 마쳤다.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
셋츠(摂津) 출신. 오다 노부나가(
織田 信長)를 섬기며 셋츠 이타미 성(伊丹城) 성주가 되었다.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공략에 임하고 있었지만 모우리(毛利)-혼간지와 내통하여 모반을 일으키지만 실패. 후에 머리를 밀고 뉴우도우 도우훈(入道道糞)이라 자칭하였다. 1586년 죽었다. 52세.

  1. 에도 바쿠후(江戸幕府)의 쇼우군(将軍)의 후사가 끊겼을 때 쇼우군을 만들 수 있는 가문인 어삼가(御三家)의 필두. 단 에도 시대를 통해서 쇼우군을 배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본문으로]
  2. 밥 많이 처먹는 아들에게 아비가 한 마디 하자 "무사는 힘이 쎄야 합니다"라 말하곤 그 증거랍시며로 저렇게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정확히는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의 셋츠슈고(摂津守護)인 이케다 카츠마사(池田 勝正)의 가신. [본문으로]
  4. 그의 딸은 무라시게의 적남 무라츠구(荒木 村次)의 부인이었다. 참고로 이 부인은 이때 이혼하여 미츠히데의 중신 히데미츠(明智 秀満)와 재혼. [본문으로]
  5. 마츠이 유우칸은 사카이(堺)에서 노부나가의 대리인이었으며 또한 당시 노부나가의 차제구 수집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기에 다도에 밝은 무라시게와는 친분이 깊었다고 생각된다. [본문으로]
  6. 당시 노부나가 최측근 시동. 노부나가 뿐만 아니라 노부타다(信忠)에게도 신뢰 받고 있었다. 이 사람이 죽은 뒤에 그 포지션을 이어받은 것이 모리 란마루. [본문으로]
  7. 정확히는 무라시게 휘하에 있던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清秀)의 가신이 그랬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이 말은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이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9. 1년 가까이 버텼지만 무라시게를 궁지로 몰아 넣은 타카야마 우콘, 나카가와 키요히데가 노부나가에게 돌아섰기에 성을 버리게 된다. 참고로 상기의 만미 센치요(万見 千千代)는 이타미 성을 공격하다 전사. [본문으로]
  10. 이 성은 무라시게의 적남 무라츠구(荒木 村次)의 거성. 참고로 이때 마지막으로 노부나가는 무라시게에게 아마가사키와 하나쿠마를 내놓고 항복하라고 하였으나 이마저도 거절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11. 이때도 싸우기는 하였다. 성을 공략한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의 활약은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를 쫓아낼 때 쓴 노부나가의 서장에도 언급될 정도로 인상적이었던 듯. [본문으로]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는 아비인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에게 자랑했다.

 "나이후[内府]가 제 손을 잡고는 엄청 고마워하더군요. 하긴 뭐 제가 없었음 나이후가 졌을 테니까요. 킨고[金吾]만 하더라도 제가~" 나불나불 블라블라 페라페라..

 그 말을 들은 아비는 잠시 아들을 쏘아보곤 한 마디 하였다.

 "그래 어느 손을 잡고 고마워 하더냐?"

 "오른손이었습니다"

 "그 때 니 왼손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

 오늘 이 사진을 보고 생각난 에피소드.

ps:


사이고우 테루히코[西郷 輝彦]씨와 악수를 나누었을 때..
일본 사람들은 저런 식의 악수가 익숙치 않은 듯..
사이고우 씨와 함께 있던 분이
"악수가 특이하네"
라고 말하자, 사이고우씨..
왼손으로 칼을 빼내어 베는 시늉을 하며
"이럴 지도 모르니까"
라는 말을 듣고 납득.
.
.
....근데
한국인도 칼을 차고 다닌 시절이 있었으면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는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양대 중신이었다. 히데요시가 이 두 사람을 닮고 싶다며 하시바(羽柴)라는 성을 자칭할 정도였다.

 나가히데는 성실했지만 완고했다. 그에 대해서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노부나가가 오우미(近江)의 아자이 나가마사(
井 長政)를 멸망시켰을 즈음, 조정에 주청하여 휘하 부하장수들에게 관위를 수여했다. 히데요시는 치쿠젠노카미(筑前守)가 되었으며 아케치 미츠히데는 휴우가노카미(日向守), 시바타 카츠이에는 슈리노스케(修理亮), 타키가와 카즈마스(川 一益す)가 사콘쇼우겐(左近監),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가 셋츠노카미(摂津守)가 되었다. 나가히데에게는 에치젠노카미(越前守)가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가히데는 '지금의 고로우사에몬(五郎左衛門)으로 충분합니다'라 우기며 듣지 않아 결국 노부나가도 포기했다고 한다. 이러한 융통성 없는 일면이 나가히데에게는 있어 시류에 완전히 순응하지 못했던 말년의 비극을 낳게 된다.

목면 토우키치, 쌀 고로사, 돌격하라는 시바타에, 후퇴전의 사쿠마[각주:1]
木綿藤吉米五郎左かれ柴田に、退佐久間
 노부나가 전성기 때 항간에서 유행한 노래(小唄)인데, '목면 토우키치'는 키노시타 토우키치로우(木下 藤吉郎)[각주:2]를 지칭하여 부지런한 사람을 의미하고, '쌀 고로사'는 나가히데의 특징을 쌀로 표현한 것이다. 종횡무진하며 기책(奇策)을 발휘하는 화려함은 없지만 반드시 필요하며 견실한 그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에서 초고속 출세를 하여 태두하자 시바타 카츠이에는 거센 적의를 불태우지만 나가히데는 오히려 히데요시를 옹호하는 입장에 섰다. 노부나가 사후의 분쟁에서도 나가히데는 히데요시 측에 섰다.
 1582년 6월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노부나가가 죽자 히데요시는 질풍과 같은 기세로 츄우고쿠(中
)에서 동진하여 아케치 미츠히데를 물리쳤는데 이때 노부나가에게 명령 받아 시코쿠(四)를 정벌하기 위한 준비로 셋츠() 스미요시(住吉)의 포구에 있던 나가히데는 히데요시의 군과 합류하여 아케치군에게 대항했다.
 노부나가 사후 시바타 카츠이에-하시바 히데요시의 주도권 다툼으로 유명한 키요스 회의(
清洲会議)에서도 나가히데는 히데요시를 위해 힘써 히데요시와 함께 노부나가의 적손 산포우시(三法師)[각주:3]를 오다 가문의 후계자로 내세웠다.

 나가히데의 운명에 미묘하게 금이 나기 시작한 것은 히데요시가 시즈가타케(賤ヶ岳)에서 시바타 카츠이에를 물리치고 그를 키타노쇼우(北ノ庄)에서 죽이며 천하인으로서 첫발을 내디디면서부터이다.
 겉으로 보기에 니와 가문은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다. 야마자키 전투(
山崎合戦)[각주:4]와카사(若)와 오우미(近江) 북부를, 시즈가타케(賤ヶ岳) 후에는 에치젠(越前)과 카가(加賀)의 2개 군(郡)을 합하여 실로 123만석이라는 거대한 영지(領地)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가히데는 히데요시의 휘하 장수로 전락했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자신보다 격이 낮았던 히데요시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욱이 나가히데의 가슴을 무겁게 하는 사태가 일어난다.
 히데요시는 카츠이에를 멸한 후 오다 가문의 삼남 노부타카(
信孝)를 자해시켰고[각주:5], 코마키-나카구테(小牧長久手)에서는 차남인 노부카츠(信雄)를 공격한 것이다. 오다 가문이야말로 나가히데의 주가(主家)였다. 그런 주가의 자식을 죽이고 공격하는 히데요시의 횡포에 참을 수 없었으며, 그렇게까지 해가며 노부나가 사후의 천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히데요시에게 환멸을 느꼈다. 그렇다고 해서 카츠이에처럼 히데요시를 철저히 증오하며 싸우지도 못했으며,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처럼 능숙하게 시류에 타 추종하지도 못했다.

 나가히데는 에치젠(越前) 후츄우(府中)의 거성(居城)에 틀어박힌 채 울적한 나날을 보내었고 몇 번에 걸친 히데요시의 초대에도 응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1585년 4월 16일, 병상에서 자결한 것이다.
 그 자결할 때의 이야기가 기괴하다. 사서에 따르면 '가령 어떠한 병이건 내 목숨을 앗아가려고 한다면 그야말로 적이다. 어떻게 해서든 그 적을 물리치마'라고 말하며 스스로 배를 갈라 손을 집어 넣고는 뭔가를 꺼냈다. 매의 부리와 같은 형태를 한 덩어리였다. 나가히데는 이 이물질을 반드시 히데요시에게 보내라고 한 뒤 죽었다고 한다.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
1535년생. 오다 가문을 대대로 섬겨온 가문 출신. 오우미(
近江) 사와야마(佐和山)의 성주가 되었고 노부나가 사후 히데요시와 동맹을 맺고 카츠이에를 쓰러뜨려 에치젠(越前) 등 123만석을 받았다. 51살에 자해.

  1. 차례 순으로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를 말한다. [본문으로]
  2.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가 되기 전에 쓰던 이름. [본문으로]
  3. 노부나가의 후계자인 적자 노부타다(信忠)의 아들로 후에 오다 히데노부(織田 秀信) [본문으로]
  4. 히데요시가 아케치 미츠히데를 물리친 전투. [본문으로]
  5. 어차피 비슷한 것이겠지만 굳이 말하자면 오다 가문의 당주 '격'이 된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가 자해시킴. [본문으로]

 타키가와 카즈마스(川 一益)는 전성기의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휘하에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무장이었다. 군사적 능력이 특히 뛰어나 '나아갈 때도 타키가와, 물러날 때도 타키가와(進むも川、退くも川)'라 일컬어져 전쟁터에서 가장 용맹함을 필요로 하는 선봉이나 그 이상으로 어려운 철퇴시의 방어군 대장을 항상 맡았다.

 혼노우(本能)사(寺)의 변이 그때까지 상승기류를 타고 있던 카즈마스의 운명을 바꾸었다. 이 즈음 카즈마스는 코우슈우 평정(甲州平定)[각주:1]칸토우(東) 마야바시(厩橋)에 진주하여 그곳 경영에 힘쓰고 있었다.
노부나가가 죽었다는 소식은 10일이나 걸려 카즈마사에게 전해졌지만 그 소식에 곧바로 아케치 토벌군을 일으킬 수 있는 정세가 아니었다. 코우즈케(上野)를 점령하고 있다고는 해도 주변은 모두 적지로 더구나 강대한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우죠우 씨(北
氏)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카즈마스는 변보를 들었을 때 이를 막료에게 전했다. 더구나 부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점령지역인 코우즈케의 지역무사(地侍)들에게도 숨기지 않고 이야기한 것이다. 같은 소식을 부하들에게 엄중히 함구령을 내린 히데요시와는 대조적이다. 거기에 카즈마스는 인질마저 지역무사들에게 돌려보냈다. 코우즈케의 무사들은 이에 감격하여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하신다'고 말하며 상경하려는 카즈마스를 따라 힘을 보태겠다고까지 말하였다.

 코우즈케 세력의 협력은 얻었지만 타키가와군의 상경은 참담했다. 처음엔 코우즈케의 군사들을 이끌고 코우즈케-무사시(武)의 접경인 칸나가와(神流川) 강에서 호우죠우군과 싸워 한번은 이겼지만 두 번째 전투에서는 대패하여 간신히 시나노(信濃) 코모로(小諸)로 도망쳐서는 키소(木)를 거쳐 겨우 본거지인 이세(伊勢)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또한 질풍과 같은 기세로 군을 되돌려 곧바로 아케치 미츠히데를 물리친 히데요시와는 크게 다른 점이다.

 각설하고, 노부나가 사후 혼란기의 판단이 그의 운명을 그르쳤다. 오다 가문의 부대장으로서는 유능하였지만 그 오다 가문이라는 우산이 치워지자 정치적 판단이라는 것이 중요한 요소로 떠올랐다. 카즈마스에게는 그것이 결여되어 있었다. 단지 오다 가문에서 자신보다 상석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시바타 카츠이에 측에 선 것이다.
 시바타 공략에 앞서서 히데요시는 카즈마스의 거성(居城) 이세(伊勢) 나가시마 성(
長島城)을 공격했다. 6만의 대군으로 성에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겠다는 듯한 맹렬한 공세에도 끝까지 버텼지만 정작 시즈가타케에서 시바타 군이 패하자 성을 열고 항복하였다.

 히데요시에게 항복하여 목숨을 건졌지만 카즈마스의 투지는 사라져 예전 그토록 절찬 받던 용장의 모습은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히데요시가 토쿠가와 이에야스(
徳川 家康)와 싸운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い)에서 카즈마스는 히데요시 휘하로 출진하였지만 왕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추태를 보이고 만다. 토쿠가와 측의 오와리(尾張) 카니에 성(蟹江城) 성주 마에다 타네토시(前田 種利[각주:2])에게 유리한 조건을 내걸어 무혈점령한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이에야스와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노부나가의 차남)에게 공격 당하자 곧바로 항복한다.

 이에야스는 자신을 배신한 마에다 타네토시의 목을 바치라고 하며, 이에 응하면 카즈마스의 목숨은 살려준다고 하였다. 이에야스의 조건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사의 수치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을 카즈마스는 승복한 것이다.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비겁자의 낙인은 피할 수 없었다.

 카즈마스는 당시 병에 걸려 남이 부축해 주어야만 움직일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병이 허탈한 그의 마음을 더욱 약하게 했을 것이다. 말년엔 히데요시에게 얼마 되지 않는 땅을 받아 자신의 불운을 한탄하다 세상을 떠났다.

[다키가와 가즈마스(滝川 一益)]
1525년생. 오우미(近江) 코우가(甲賀) 출신으로 낭인 생활을 하던 중 노부나가(信長)의 눈에 띄어 그를 섬겼다. 1574년 이세(伊勢) 나가시마(長島) 농민반란군(一揆)을 평정한 후 나가시마 성주가 되었다. 1583년 카츠이에(勝家)와 동맹을 맺고 히데요시(秀吉)와 싸우다 패했다.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い) 후 에치젠(越前) 오오노(大野)에 은퇴해 살다 1586년 죽었다. 62세.

  1. 타케다 카츠요리를 멸한 전쟁. [본문으로]
  2.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첫째딸 코우(幸)의 남편인 마에다 나가타네(前田 長種)의 부친. 계보상 거슬러 올라가면 이 타네토시 쪽이 토시이에의 가문보다 격이 높다고 한다(즉 토시이에 가문이 방계)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