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토 코우몬[水戸黄門]이 말했다.

그냥 생각난 것 2009. 10. 7. 00:02 Posted by 발해지랑

정치에 대해 말하길...
"남자끼리 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랑 할 때처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 말했다 합니다.
남자끼리 즉 anal을 통해서 하면 한쪽만 즐겁고 나머지 한쪽은 괴롭지만,
여자랑 하면 양쪽이 다 쾌락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니 정치는 위정자와 백성이 다 이로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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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을 보니 생각나는 이분.

앤 해서웨이(Anne Jacqueline Hathaway) / 영화배우
출생 1982년 11월 11일
신체 키173cm
팬카페
상세보기
 
"every woman should try it, otherwise they miss out on something amaz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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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만이 아니라는 군요. 미토 코우몬 어르신~

PS: 여담으로 토쿠가와 미츠쿠니[徳川 光圀]의 호칭 '미토 코우몬[水戸 黄門]'과 항문의 일본어 발음 '코우몬[肛門]'은 우연인지 일치한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 데와[出羽] 전역에서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의 군세와 싸운 하세도우 전투[長谷堂合戦]를 그린 '하세도우 전투 병풍[長谷堂合戦図屛風]에 그려져 있는 요시아키[義光]

 야마가타[山形] 성주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는 이웃나라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의 모친 요시히메[義姫]의 오빠이다. 혈통 자체가 우월한 몸매에 뛰어난 용모를 가졌던 듯 하다.[각주:1] 후에 칸파쿠[関白] 히데츠구[秀次]가 요시아키의 딸 코마히메[]의 용색에 반하여 오우슈우[奥州] 원정 때 쿄우토[京都]로 데려가 측실로 삼았다.

 각설하고, 요시아키의 활약은 16살 때 강도퇴치의 일화부터 시작된다.
 어느 날, 부친 요시모리[
義守]와 타카유[高湯] 온천[각주:2]에 휴식을 취하려 갔는데, 그날 밤 강도가 습격해 온 것이다. 이때 요시미츠는 '형형한 눈빛을 하고 마치 화살이 쏘아지듯이 뛰쳐나가 날카로운 칼질로' 단번에 강도 2명을 베어 부상을 입혔고, 이어서 그 중 가장 거대한 사나이에게 달려들어 쓰러뜨려 제압한 후 두 번 찔러 상대가 힘이 없음을 확인한 다음 목을 베어 칼끝에 꿰어서 높이 쳐들고는 우렁차게 함성을 질렀다 한다.

 부친 요시모리는 옆 나라 다테[伊達]의 비호(庇護) 하에 있었기에 젊은 날의 요시아키가 너무나 뛰어나고 용맹한 것에 불안을 느껴 요시아키의 폐적(廢嫡)하기로 결심하고 유폐시킨다. 물론 이는 다테 가문[伊達家]의 의사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모가미 가문의 자립을 목표로 하는 요시아키를 위험하다 여겨 부친인 요시모리에게 아들 요시아키 살해를 명령한 것이다. 유폐 중의 요시아키는 이런 다테 가문에서 독립을 기원하며 주변에 있던 절 릿샤쿠 사[立石寺]에서 소원성취를 빌었다. 요시아키 23~25살 즈음의 시기였다. 요시아키는 유배지에서 탈출하여, 부친 요시모리를 강제로 은거시킨 후 모가미 가문[最上家]의 후계자로 정해져 있던 동생 요시토키[義時]를 공격하여 자살하도록 만들었다[각주:3]. 이어서 1577년에는 다테 측에 붙어있던 텐도우 성[天童城]의 텐도우 요리사다[天童 頼貞]를 공격하였다[각주:4]. 다음 해에는 남쪽으로 공세의 방향을 돌려 카미노야마[] 성을 낙성시켰으며, 또다시 북쪽의 신죠우[新庄]로 향해 마무로[] 성을 점령하여 마침내 모가미 군[最上郡] 전체를 판도에 넣었다. 1582년에는 숙원이던 쇼우나이[] 지방으로 진출하였다.

 다다음 해인 1584년, 요시아키는 야치 성[谷地城]의 성주 시라토리 나가히사[白鳥 長久]를 모략을 이용해 야마가타 성으로 불러서는 살해하였다. 모략이야말로 요시아키의 진면목으로, 그는 힘으로 몰아 붙이는 타입의 무장이 아니었다.

 1587년, 요시아키는 쇼우나이에 침공하는데 이로 인해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와 험악한 관계에 빠진다. 마사무네가 쇼우나이 지방의 무토우 씨[武藤氏]의 부탁을 받아 중재(仲裁)에 나서자, 겉으로는 마사무네의 중재를 받는 척하며 방심시킨 후 불시에 대군을 이끌고 쇼우나이 지방으로 침공한 것이다. 요시아키는 마사무네에게 있어서는 모친 요시히메의 오빠이기에 외삼촌이다. 하지만 마사무네는 이 배신행위를 용서할 수 없었다. '체면이 깎였다. 이 원한을 붓으로 다 적기도 힘들다'고 말하며 마사무네는 격노하였다. 모가미와 다테 사이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사태로 번졌다. 그때 요시히메가 양국 군세가 대치하고 있는 곳에 가마를 타고 들어가 80일 동안 움직이지 않고 머물러 결국 양자의 충돌을 회피시켰다고 한다. 이때의 반감은 나중에까지 이어져, 후에 요시아키와 요시히메는 손을 잡고 마사무네 독살 미수사건으로 이어진다(다테 마사무네 항 참조)

한편 쇼우나이 지방은 강적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세력이 손을 뻗쳐왔다. 1587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전국에 영()을 내려 다이묘우[大名]들간의 사적인 싸움을 금지하였기에[각주:5], 다음 해 5월에는 모가미-우에스기 간의 항쟁을 멈추도록 명령하였다. 그런데 같은 해 10월에 우에스기 측의 혼죠우 시게나가[本庄 繁長]가 이를 무시하고 쇼우나이를 점령해 버린 것이다.

==========================================이하 역자 가필================================================

 1587년. 다테 가문의 종속하에 있던 오오사키 가문[大崎家]에서 내분이 일어나, 친 다테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던 오오사키 가문의 가신 우지이에 요시츠구[氏家 吉継]가 다테 마사무네에게 구원을 요청. 마침 다테 가문에게서 독립을 바라고 있던 오오사키 요시타카[大崎 義隆]는 분가 격[각주:6]인 모가미 가문의 요시아키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비슷한 시기 요시아키는 쇼우나이를 지배하고 있던 무토우 씨[武藤氏][각주:7]의 당주인 무토우 요시우지[武藤 義氏]를 모략으로 요시우지의 부하를 이용해서 살해. 요시우지의 뒤를 이은 요시오키[武藤 義興]는 우에스기 가문의 맹장 혼죠우 시게나가[本庄 繁長]의 아들인 요시카츠[武藤 義勝]를 양자로 받아 들임과 동시에 혼죠우와 그의 주군인 우에스기 가문의 힘을 빌어 영내를 안정시키려 한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이 쇼우나이 지방의 친 모가미 파의 호족들의 불안을 부채질하여 호족들은 일제히 봉기한다. 이를 호기로 본 요시아키는 쇼우나이에 침공. 요시오키를 살해하고 요시카츠를 에치고[越後]로 쫓아 보내어 일단 쇼우나이 지방을 손에 넣는다. 이때 오오사키 가문의 구원 요청이 도착한다.

 다테 마사무네는 오오사키 령으로 진격하나, 마사무네는 나카니이다 성[中新田城]를 공격 중 대패하여 중신 이즈미다 시게미츠[泉田 重光]를 인질로 바치고 겨우 궁지를 벗어나지만, 오오사키 령에 원군으로 온 모가미 요시아키의 군세와 나카야마[中山]란 곳에서 대치하게 된다. 또한 이 패배는 오우슈우 전역에 소문이 퍼져 반 마사무네 파의 다이묘우[大名]들이 일제히 마사무네 영토를 침공하기 시작하여 위기에 빠진다.

 한편 오오사키 령에 도착하여 마사무네의 군세와 대치하고 있던 요시아키에게도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에치고로 도망쳤던 무토우 요시카츠가 지 애비인 혼죠우 시게나가와 함께, 요시아키가 마사무네와 싸우는 틈을 타 쇼우나이로 진격. 쇼우나이의 모가미 측 호족들을 물리치고 쇼우나이를 탈환하고 여세를 몰아 모가미 령으로 침공한다.

 서로 적들에게 침공 당하였지만 대치하고 있어 움직일 수 없었던 마사무네와 요시아키는 마사무네의 모친이며 요시아키의 여동생인 요시히메가 이 대치하는 곳에 가마를 타고 와 화해를 종용. 서로 다방면에 적들을 두고 있던 양측은 화해를 하게 된다.

======================================이상 역자 가필====================================================

 요시아키는 분노하여 히데요시에게 호소하였으나[각주:8],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는 이미 히데요시와 면식을 튼 사이였으며 더구나 히데요시 측근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도 친한 사이였다. 소송은 우에스기 측이 월등히 유리했다. 요시아키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통하여 자신의 정당함을 호소했지만 결국 소송에 졌다[각주:9]. 이후 요시아키는 히데요시의 비위에 맞추기 위해서 이에야스를 통해 매[] 등을 헌상했지만, 히데요시의 태도는 냉담하여 요시아키가 쿄우토로 인사를 올리러 간다고 하여도 '그럴 필요는 없소'하며 거부하였다.

 요시아키는 더욱더 이에야스를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히데요시의 오다와라[小田原] 정벌 때 요시아키는, 히데요시가 "조금 더 늦었다면 여기가 위험했을 것이야"라고 하며 목을 툭툭 친 다테 마사무네보다도 더 늦게 오다와라에 당도하였지만[각주:10], 이때도 이에야스가 중간에서 잘 주선해 준 덕분에 무사할 수 있어 이에야스에게 고마운 마음을 크게 갖게 되었다.

 이후 요시아키는 자기 가문의 안전을 위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였다. 히데요시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측근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에게 편지를 보내, "히데요시님을 섬기는 것이 일생의 소원이었습니다"라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였고, 오다와라 정벌을 끝낸 후 우츠노미야[宇都宮]에 온 히데요시의 처소에 처자식을 몽땅 데리고 출사하여 히데요시를 흡족하게 만들었다.

 1591년. 토요토미노 히데츠구, 토쿠가와 이에야스 등 15만의 대군이 난부[南部]의 쿠노헤 마사자네[ ]를 정벌하기 위해 오우슈우[奥州]로 왔을 때도 요시아키는 중앙의 실력자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머리를 굴렸다. 이에야스에게는 둘째 이에치카[家親][각주:11]를 가신으로 삼아달라고 부탁하였다. 일종의 인질제공이다. 이에야스에게 있어선 다이묘우[大名]의 자식을 가신으로 한 최초의 사례였기에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히데츠구가 요시아키의 딸 코마히메[]에게 눈독을 들인 것도 이때이다. 쿠노헤 정벌을 마치고 쿄우토로 돌아가던 도중 야마가타 성에 들린 히데츠구를 요시아키는 성대히 영접하며, 그 시중으로 아직 12살인 딸 코마히메를 내보냈다. 히데츠구는 그녀의 미모에 빠져 요시아키에게 청하여 쿄우토로 데려가 시첩으로 만든 것이다. 마사무네의 숙부 다테 시게자네[伊達 ]는 이를 '만천하의 비웃음거리'라고 자신의 일기에서 비난하였다.

 히데츠구의 측실이 된 코마히메는 이름도 '오이마노츠보네[お]'로 불리게 되지만, 히데츠구의 실각사건 때 산죠우 강변[河原]에서 참수당하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더구나 요시아키에게도 히데츠구 모반사건의 불똥이 튀어 한때는 쥬라쿠테이[楽第]에 감금당하는 신세가 된다.

 히데요시 사후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쟁[]에서는 당연히 이에야스 측에 서 야마가타로 진군하는 우에스기의 지장(智將)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의 군세와 싸웠다. 정강을 자랑하는 나오에 군단이기에 고전을 면치 못하였지만, 세키가하라에서 동군의 승전보가 전해져 구사일생한다.

 그러나 요시아키의 너무나도 자기 가문 안전을 위해 머리를 굴린 결과가 반대의 결과로 나온다. 요시아키는 이에야스의 마음에 들기 위해 토쿠가와 가문의 가신이 되어있던 둘째 이에치카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장남 요시야스[義康]를 살해하게 되는데, 요시아키가 죽은 뒤 이로인해 가문이 흔들려 이에치카의 아들 요시토시[義俊]의 대[각주:12]에 모가미 가문의 야마가타 번은 소멸하게 된다[각주:13].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
1546년생. 데와[
出羽] 야마가타[山形] 성주. 아시카가 씨[足利氏]의 일족 시바 카네요리[斯波 兼頼][각주:14]의 후손으로 요시아키는 11대째. 임진왜란 때는 히젠[肥前] 나고야 성[名護屋城]에서 이에야스[家康]와 함께 주둔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야마가타 57만석이 된다. 1614년 1월 18일 죽었다. 69세.

  1. 요시히메도 한 미모로 유명했다 한다. [본문으로]
  2. 현재는 자오우 온천[蔵王温泉]으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동시대의 군기물 혹은 다테 가문의 기록에도 요시아키의 동생 요시토키의 기록이 없기에(요시토키의 이름이 처음으로 거론되는 것은 18세기 들어서라고 한다) 요시아키가 동생을 공격하여 자살하게 만든 것은 의문시 되고 있다. [본문으로]
  4. 점령은 못하고 요리사다의 딸을 요시아키의 측실로 삼는 것으로 화해. 그러나 1582년 요시아키의 삼남 이에치카[清水 義親 - 모가미 씨의 일족 시미즈[清水] 가문을 상속]를 낳고 죽어 텐도우 가문과의 동맹이 끊기게 된다. [본문으로]
  5. 이 전인 1585년에 큐우슈우[九州]지방을, 1587년에는 칸토우[関東]와 오우슈우[奥州]에 각각 선포하였다. 이것을 선포함으로써 어긴 시마즈 가문[島津家]와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할 수 있는 대의명분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본문으로]
  6. 오오사키와 모가미 가문의 선조는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오우슈우 칸레이[奥州管領] 시바 이에카네[斯波 家兼]이다. 이에카네의 큰아들인 타다모치[大崎 直持]가 오오사키[大崎] 지방을 영유하며 '오우슈우 탄다이[奥州探題]'가 되었으며, 둘째아들인 카네요리[最上 兼頼]를 데와[出羽] 모가미 군[最上郡]에 파견하여 '우슈우 탄다이[羽州探題]'로 만들었다. [본문으로]
  7. 코에이[光栄]의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다이호우지 씨[大宝寺氏]로 표현된다. [본문으로]
  8. 히데요시의 사투금지령은 1587년 12월. 혼죠우 시게나가가 침공한 것은 1588년에 들어서이기에. [본문으로]
  9. 여담으로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은 이때 얻은 쇼우나이 지방과 나중에 이봉된 아이즈[会津]가 모가미 가문의 영지로 인해 분단된 상황이었기에, 세키가하라 전쟁 때 모가미 영토를 침공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그에 따른 실패로 120만석에서 30만석으로 줄어들게 된다. [본문으로]
  10. 부친 요시모리[最上 義守]의 장례식 때문에 늦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1. 당시 이에치카의 나이 10살로, 성인식 후 이에야스[家康]의 이름글자 중 뒷글자 '야스[康]'가 아닌 앞글자 '이에[家]'를 받은 것을 보면 나름 괜찮은 대우를 받았던 듯. 후에 2대 야마가타[山形] 번주가 되지만 3년만에 죽어 후에 후계자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본문으로]
  12. 요시아키의 넷째 아들 야마노베 요시타다[山野辺 義忠]와의 다툼 끝에. 요시토시의 그릇이나 능력에 의문을 품은 가로들이 야마노베 요시타다 옹립을 꾀하였다. [본문으로]
  13. 그후 모가미 가문은 오우미[近江]에 1만석으로 멸봉 당하나 9년 뒤 요시토시가 병으로 죽자 남겨진 아이(요시토모[義智])가 너무 어려(당시 2살) 영지는 반인 5000석으로 줄어, 다이묘우[大名]가 아닌 다이묘우 급 직신[交代寄合]이 된다. 사족으로 에도 시대 쇼우군 가문[将軍家]의 일족을 제외하곤 최대급(57만석)의 삭탈관직[改易]. [본문으로]
  14. 모가미 카네요리[最上 兼頼]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넷북 쓸 만 한가요?

내 이야기 2009. 9. 19. 06:08 Posted by 발해지랑
제 컴퓨터가 오늘 내일 합니다.
언제 꺼질지 모를 정도라 - 가만히 앉아서도 스릴만점!!...인 기분을 맛보고 있습죠.

그래서...컴을 하나 장만하려 하는데 매일 돈 없어 허덕이는 이 궁상스런 인생.
그러던 차에 눈에 들어온 "와이브로에 가입하심 넷북 꽁짜로 드림"이라는 광고.

기종은 에버라텍 버디 hs-102s라는데...

혹시 와이브로 혹은 넷북 쓰시는 분 있음 좀 가르쳐 주세요.
와이브로는 어느 정도의 속도나 되나요?
넷북은 쓸 만 한가요?
삼보 믿을 만 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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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츠가루 타메노부[
津軽 為信]는 난부 씨[南部氏]의 밑에 있다가 반항하며 독립하였기에, 후세에 이르러서도 히로사키 번[弘前藩]과 난부 모리오카 번[南部 盛岡藩]이 있던 곳의 사람들끼리는 지역감정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이곳에 가서 볼 수 있는 곳의 살색이 히로사키 번, 그 오른 편 밝은 자주색이 난부 모리오카 번(링크)

 난부 측이 말하길,
 "츠가루의 선조 타메노부[
為信]는 원래 난부 노부나오[南部 信直]의 부하인 주제에 모반을 일으켜 츠가루 지역을 훔친 것이며, 운 좋게 재빨리 당시의 천하인(天下人)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영토를 인정받은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백성, 아이, 부녀자에 이르기까지 츠가루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다"는 것이 번[
]의 풍습으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츠가루 측의 반론의 증거로 내세우는 것이 자신들의 화려한 족보이다.
 "츠가루 씨의 선조는 후지와라노 카마타리[
藤原 鎌足][각주:1]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자손 사다이진[左大臣] 우오나[魚名][각주:2]의 13대 후손 히데히사[秀久]가 부친인 친쥬후쇼우군[鎮守府将軍][각주:3] 모토히라[基衡][각주:4]의 명령에 의해 이루마 군[入澗郡] 토사 성[十三城[각주:5]]에 있으면서 츠가루 6개군(郡)을 영유하였다. 이 히데히사의 자손이 바로 후리와라노 타메노부[藤原 為信]인 것이다"

 또한 다섯 셋케[摂家][각주:6]의 필두 코노에 가문[近衛家]과도 혈연적으로 이어져 있다고도 한다. 코노에 히사미치[近衛 尚通]가 츠가루에 왔을 때, 모리노부[盛信]의 딸과 인연을 맺어 낳게 한 것이 타메노부의 조부[祖父]인 마사노부[政信]라고 한다. 이 인연으로 인해 타메노부는 후에 코노에 사키히사[近衛 前久]의 양자가 되었으며, 사키히사의 아들 노부타다[信尹]에게서 모란꽃의 문장[각주:7]을 허락 받았다고 한다.

 이런 화려한 족보를 내세우며 츠가루는 원래부터 선조의 땅이었기에 그것을 되찾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렇기에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각주:8]가 편찬한 '한칸후[藩翰譜]'[각주:9]에 '우쿄우다이부[右京大夫] 후지와라노 타메노부는 대대로 난부 가문의 가신으로 츠가루 지역에 살았다' 고 적혀있는 것에 대해서도 츠가루 번은 이의를 제기했다.

 이런 난부-츠가루간 지역감정의 뿌리는 1491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타메노부의 선조 오오우라 미츠노부[大浦 光信]부터 3대 위가 전부 난부 씨의 모살 당해 살해되었다. 죽을 때도 미츠노부는 사무친 복수심으로, "갑옷으로 몸을 두르고, 큰 칼과 작은 칼 두 자루와 함께 난부 령을 향해서 묻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고 한다.
 미츠노부의 유지(
有志)는 대대로 이어져 후손인 타메노부에 이르러 드디어 실행에 옮기게 되는데, 타메노부는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대대적인 예행연습을 행했다. 이와키 산[岩木山]의 산록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횃불로 민가를 불태우며, 실탄을 발사하는 식의 실전을 방불케 하는 연습이었다.

 준비가 갖추어졌다고 생각한 타메노부는 쿠노헤[]와의 험악한 분위기로 인한 난부 가문이 혼란스런 틈을 타 불시에 반기를 들어 우선 노부나오의 친아비인 이시카와 타카노부[石川 高信]의 거성 이시카와 성[石川城]을 공략[각주:10]. 이어서 와토쿠 성[], 다이코우지 성[大光寺城]을 점령해 갔다.

 1590년 3월. 타메노부는 난부 가문의 보호를 받고 있던 나미오카 씨[浪岡氏]를 급습하여 나미오카 씨의 영토를 손안에 넣었다. 난부 노부나오[南部 信直]가 탈환하기 위해서 쿠노헤 마사자네[ ] 이하 십 여명의 부장[部將]들에게 출진을 명했지만 모두 출진을 거부하였다.

 타메노부는 민첩한 행동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즈음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중인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참진(參陣)하라는 명령을 받자, 곧바로 행동을 개시하여 근신 18명만을 이끌고 오다와라[小田原]로 달려가 히데요시에게서 영토를 인정받는 문서를 받아냈다. 항쟁중인 현실이 어떻건 당장 히데요시에게서 공인을 받아 내자, 난부 씨도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이 타메노부의 용모에 대해서 사서(史書)는, 턱수염이 길어 가슴까지 흘러내렸기에 사람들은 타메노부를 '수염공(どの)'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민정가로서도 뛰어나 영내 개척에 온 힘을 다했으며, 옻나무 재배 등 산업개발에도 힘썼다고 전해지다.

[쓰가루 다메노부]
1550년생. 오오우라 타메노리[
大浦 ]의 양자. 1590년 히데요시에게서 무츠[] 츠가루[] 3만석을 인정 받았고 후에 4만5천석이 되었다. 세키가하라에서는 동군에 섰다. 1607년 12월 죽다. 58세.

  1. 후지와라 씨의 시조(始祖) [본문으로]
  2. 여제(女帝)인 코우켄 텐노우[孝謙天皇]의 병을 고치며 승승장구 출세한 괴승 도우쿄우[道鏡]를 코우켄 텐노우 사후 쫓아냈다. 여담으로 야사에 따르면 도우쿄우는 코우켄 텐노우와 그렇고 그런 사이로 도우쿄우의 거시기는 무릎만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일본 율령제 시대에 일본 북방 오랑캐[蝦夷]를 대비하려고 만든 주둔군 사령관. [본문으로]
  4.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 義経]와 관련 깊은 후지와라노 히데히라[藤原 秀衡]의 부친. 참고로 히데히라는 친쥬후쇼우군에 임관되었지만 그의 부친 즉 모토히라는 친쥬후쇼우군이 아니다. [본문으로]
  5. 링크된 곳은 쥬우산고 호수[十三湖]이지만 성은 그 근처에 있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6. 섭정[攝政], 칸파쿠[関白]에 임명 받을 수 있는 다섯 가문. 즉 코노에(近衛), 타카츠카사(鷹司), 쿠죠우(九条), 니죠우(二条), 이치죠우(一条)를 말한다. [본문으로]
  7. 가장 위에 있는 것이 코노에 가문의 문장. [본문으로]
  8. 에도시대 중기의 정치가 겸 학자 [본문으로]
  9. 에도 막부 6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츠나토요[徳川 綱豊]가 고우후[甲府] 번주(藩主)에 있을 때, 아라이 하쿠세키에게 명해 여러 다이묘우[大名] 337가(家)의 유래를 모아 계보를 만든 것 [본문으로]
  10. 이때 깡패들을 고용하여 이시카와 성 밑 마을에서 농성군 가족들을 약탈, 살해, 강간 등을 지시해서 농성군들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당시로써도 캐막장적으로 행했는지, 타메노부의 측근 누마타 스케미츠[沼田 祐光]는 '다음부턴 절대 이러지 마슈'라고 한마디 했을 정도며, 후에 타메노부가 히로사키 성[弘前城]을 축성할 때는 자신들이 그렇게 당하지 않으려고 여성들이 피할 수 있는 곳을 특별히 만들 정도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코코 샤넬을 보았습죠.

내 이야기 2009. 9. 1. 05:56 Posted by 발해지랑
코코샤넬
감독 안느 퐁텐 (2009 / 프랑스)
출연 오드리 토투, 알레산드로 니볼라, 베누아 포엘부르데, 마리 질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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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본 어느 프랑스 영화[각주:1]를 인상깊게 보아서 그래도 일년에 한번쯤은 프랑스 영화를 봅죠.
프랑스어의 동동동~거리는 억양이 좋아서 프랑스 영화는 끊을 수가 없더군요.
샤넬 향수를 너무도 좋아하다 보니[각주:2], 향수와는 상관 없지만 그냥 이름에 넘어갔습죠.
시놉시스만 보았을 때는 디자인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인 줄 알았습니다.
먼저 보신 분들의 영화평 같은 것은 보지도 않았습죠.
어련하면 오드리 토투가 나오는지도 몰랐습니다.

.
어쨌든 개인적인 평점은 별 다섯 개 중....에이~ 이런 영화에 별 줄까!!
.

그래도 이 영화는 쓸모가 있을 듯.

우선 남자랑 헤어지고 싶은 여성분.
보여 주고 나서 툴툴대는 남자에게 그것을 빌미로 눈이 낮다느니, 저런 사랑을 이해 못한다느니 하면서 구실을 찾으시길.

비슷한 면으로 남자분에게도 쓸모 있습니다.
건방진 놈 하나를 때리고 싶거나 또 만나고 싶지 않는 등의 대의명분이 필요할 때. 이 영화 보면 역시 툴툴댈테니(어쩌면 욕을 할 지도 모릅니다.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다며) 그걸 빌미로 싸움을 걸 수 있으실 겁니다.

반대로 이 영화를 여성과 보면 자신의 가치나 안목이 높아질 거라 생각하시는 분께...
꿈 깨십시오. 이 영화는 적어도 한국에서 통할 멜로는 아닙니다. 여성들에게도 통할 영화는 아닌 듯.

오히려 보면서 이 영화를 수입한 담당자의 안목이 걱정스럽더군요.

베스트 씬~
극초반 아역 장면. 역시 아이는 이쁩니다.

아쉬운 씬~
오드리 토투 얼굴을 클로즈 업해서 잡는 장면들. 개인적으로는 왕눈이 스타일의 아가씨들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저런 장면마다 깜짝깜짝 놀랐습니다.
  1. 늙은 놈팽이 아저씨와 젊고 아름다운 여자 이발사의 사랑이야기... 제목도 생각 안나지만, 지금 가진 이 행복을 놓칠까 두려워 먼저 자살하는 여자 이발사의 충격적인 정신상태가 찡~ 했었습죠. [본문으로]
  2. 예전 짝사랑하던 아이가 이것을 쓰고 다녀서인지, 이 향수를 맡으면 조건반사적으로 가슴이 아련해지더군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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