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에피소드 마지막과 이어지는 음악이 절묘.
요건 좀 긴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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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economy.hankooki.com/lpage/economy/200912/e2009121318055597490.htm
https://m.sedaily.com/NewsView/1HR58NY109
에 실린 글을 보면서….
☞ 한문에 링크 걸린 곳은 일본어 위키로 점프합니다.
☞ 칸안에 굵은 글씨는 본문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주신구라(忠臣藏).' 연말연시면 으레 일본의 TV에 등장하는 특집극 소재다. 내용은 주군을 잃은 사무라이 47인의 복수극.
적어도 신문처럼 영향력이 있으면 표기법을 따라주었으면 좋겠습니다. 1국립국어원의 일본어 표기법에 따라 ‘ちゅうしんぐら’이니 ‘주신구라’로 해야 하지요.
풀네임을 따지자면 ‘충신 오오이시 쿠라노스케[忠臣 大石 内蔵助]’이니 [충신 쿠라]이라고 하는 편이 좋을 듯도 싶으나, 역시 문학 작품의 고유 명사이니 [주신구라]인 편도 좋을 듯.
시골의 다이묘(영주) 아사노가 수도인 에도에서 다른 다이묘인 기라에게 상처를 입혔다.' 아사노가 분개한 이유는 술수에 빠져 격식과 예법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게 돼 위신을 잃었다고 판단했기 때문. 아사노는 술책을 꾸민 기라의 얼굴에 칼자국을 남겨 무사로서 위신을 세웠으나 '할복' 명령을 받았다. 쇼군 앞에서 칼을 뽑았다는 이유에서다.
1701년에 반슈우 아코우 번[播州 赤穂藩] 5만석의 영주 아사노 타쿠미노카미[ 2浅野 内匠頭]가 키라 코우즈케노스케[ 3吉良 上野介]에게 상처를 입힌 것은 맞습니다만, 키라는 다이묘우[大名]가 아닙니다.
키라는 막부 직신 즉 하타모토[旗本]로 그의 영지는 다이묘우의 기준인 1만석에 미치지 못합니다.
가문 대대로 미카와[三河] 키라[吉良]라는 곳에 4200석, 그에 더하여 직책이 코우케키모이리[高家肝煎]였기에 봉급으로 2000석을 더하여 총 6200석의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말이 길어졌는데 한마디로 다이묘우가 아니었단 말입죠. 4
참고로 코우케[高家]란 막부(幕府]의 예식(禮式) 담당으로, 쇼우군[将軍]의 대리인이 되어 쿄우토[京都] 조정에 사자로 파견되거나, 반대로 쿄우토 조정에서 칙사가 왔을 시에는 칙사를 접대하는 향응역의 지휘와 지도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그 지휘와 지도 아래서 조정의 칙사들을 접대하는 직책으로 향응역[饗応役]이 있었습니다. 향응역에는 보통 5만석 전후의 토자마 다이묘우[外様大名]가 임명되었습니다. 5
지도를 하는 키라 코우즈케노스케[吉良 上野介]와 그 지도를 받는 아코우 번주 아사노 타쿠미노카미[浅野 内匠頭]는 서로 반목했다고 합니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키라가 원했던 아코우 번의 염전기법을 알려주지 않았다던가, 당시 코우케가 향응역을 지도하면 사례금을 받는 것이 통례였지만 아사노가 키라에게 준 사례금이 겁나게 적었다거나, 성질 급하고 한번 폭발하면 가슴에 통증이 생기는 병을 가진 아사노의 성질이 더러워서라던가…. 어쨌든 먼저 아사노의 뒷따마를 깐 것은 키라라고 합니다. 6
이야기나 연극의 세계에서는 저 불화로 키라가 아사노를 괴롭혔다고 합니다.
칙사를 맞이하는 방의 병풍을 화려한 것으로 하면 안 된다고 키라가 말했기에 아코우 번은 수묵화로 된 병풍을 준비했더니 나중에는 이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쪽을 준다거나, 예복으로 다이몬[大紋]이라는 복장을 해야 하는데 키라는 나가카미시모[長裃]를 입고 나오라고 해서 쪽을 준다거나, 준비해야 할 요리도 반대로 알려주고, 타타미[畳]도 교체해야 하는데 알려주지 않았다던가…하는 이야기들이 나와 그럴 때마다 아코우 번사들이 임기응변으로 그런 난관을 헤쳐나가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만…
실제로 아사노 타쿠미노카미와 아코우 번은 이 일이 일어나기 18년 전인 1682년에 조선통신사 향응역에 임명된 적이 있었으며, 이번 칙사 향응역에 앞서서도 5년 전 칙사 향응역이었던 아사노 타쿠미노카미의 마누라의 친정 미요시 번[三次藩]의 기록도 조사했으며, 바로 전년 향응역이었던 시바타 번[新発田藩]의 기록도 살폈다 하기에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고 합니다. 어디까지나 이야기 속에서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한 장치겠지요.
서울경제의 편집위원께서는 쇼우군[将軍] 앞에서 칼을 뽑았다고 하는데, 물론 아닙니다. 칼을 뽑은 장소는 외측 복도로 벽에 소나무가 그려져 있다고 해서 ‘마츠노오오로우카[松の大廊下]’라 불리는 복도에서 입니다. 성안에서 칼을 뽑는 것도 물론 금지입니다.
어쨌든, 키라는 이 복도에서 막부 루스이[留守居]들을 총괄하는 오오루스이[大留守居] 카지카와 요소베에[ 7梶川 与惣兵衛]와 이야기 하던 중, 아사노 타쿠미노카미가 키라의 등뒤로 다가와 “여태까지의 원한 잊지 않았겠지!”라며 차고 있던 예식용 칼[殿中差]로 한 번 휘두르지만 헛스윙, 그 외치는 소리에 뒤돌아 본 키라의 이마 한가운데에 약 11cm, 그 상처에 놀라 도망가는 키라의 등 오른쪽 견갑골에 18cm 정도의 상처를 남기고, 곁에 있던 카지카와 요소베에에게 제압당합니다.
사건을 일으킨 당시만 해도 무사의 위신 세웠다기 보다는 ‘미친놈 별지랄 다하는구나’라는 인식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아사노가 칼 들고 설치며 자기를 공격하는데도 성안이라는 장소를 분별한 키라는 무죄석방 되었습니다. 싸움을 하면 양쪽이 다 벌을 받던 무가의 관습법 ‘다툼 시 쌍방 처벌[喧嘩両成敗]’에 어긋났기에 약간의 동요가 있었습니다만, 조사 결과, 때와 장소를 분별치 못하고 원한이 있었기에 칼질 했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젊은 영주 아사노와 장소 분별한 늙은 키라와의 차이는 그 후의 처분에서도 나타납니다. 아사노는 당일 할복 & 번 폐쇄, 키라는 무죄석방.
아사노가 죽자 로닌(浪人·떠돌이 무사)이 될 처지인 가신 300여명이 모였다. 우두머리 격인 오이시는 '당장 기라를 치자'는 사무라이들을 만류하고 은거에 들어갔다. 적의 감시에서 벗어나고 끝까지 함께 갈 동지를 가려내기 위해서다.
저 300명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군요....This is Akou!?
에도[江戸]에서의 급변이 아코우 성[赤穂城]에 전해지자, 필두 가로 오오이시 쿠라노스케[大石 内蔵助]는 아코우 영내에 있던 번사(藩士) 200여명을 성안에 모이게 하여 농성을 할 것인지, 개성을 할 것인지를 협의하게 됩니다. 막부가 번 폐쇄를 명했으니 따르는 것이 순리였지만, 아코우 번사들에게는 자신들의 주군이 할복하고 번까지 폐쇄 당했는데도, 키라는 무죄 석방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다툼 시 쌍방 처벌[喧嘩両成敗]’였으니까요. 관습법으로요.
막부 역시 행여라도 아코우 번이 개길까 싶어 수성사[収城使]의 정사로 5만3000석의 타츠노 번[竜野藩]의 번주 와키사카 아와지노카미[ 8脇坂 淡路守], 부사로 2만 3000석의 아시모리 번[足守藩]의 번주 키노시타 히고노카미[木下 肥後守]의 병사 4500여명이 아코우 성을 향하였고, 주변 오카야마 번[岡山藩]은 600명을 번경에 배치하는 것을 시작으로, 히메지[姫路], 톳토리[鳥取], 바다 건너 시코쿠[四国]의 마루가메[丸亀], 토쿠시마[徳島] 번도 만일을 대비하여 경계 병력을 준비시켰습니다.
당연 비둘기파와 매파가 생겼습니다.
비둘기파는 성을 넘기고 막부의 명에 순순히 따르자는 파였고, 매파는 이대로 물러나서는 너무 억울하니 농성하며 키라의 처벌도 상소하고자 했습니다. 5만석 영주의 성으로는 너무도 방어력이 뛰어나고 훌륭한 편이었던 아코우 성[赤穂城]을 내세워 농성하자는 것이었죠.
그리고 어느 시대건 비둘기파는 비겁한 놈들이 되고 매파는 지조와 절개의 사나이가 되는 법.
비둘기파의 수장이던 차석 가로 겸 번 재정담당 오오노 쿠로베에[大野 九郎兵衛]는 매파의 협박과 욕설에 견디지 못하고 밤중에 튀게 됩니다. 얼마나 급했는지 손녀를 놓고 도망갈 정도였습죠.
매파도 둘로 나뉘는데 매파 중 강경파는 아시가루 부대장[足軽頭] 하라 소우에몬[原 惣右衛門] 등 다수로 그들은 농성하다 죽자고 주장. 매파 중에서도 온건파는 필두 가로 오오이시 쿠라노스케를 중심으로 우선 성은 내주더라도 막부에게 할복한 아사노 타쿠미노카미의 동생 아사노 다이가쿠[ 9浅野 大学]를 새로운 번주로 삼아 가문을 재흥과 동시에 키라에게도 벌을 내려달라는 청원을 하자는 쪽이었죠.
…이야기가 길어지니 어쨌든 성을 내주게 됩니다. 오오이시는 끝까지 농성하자던 강경파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후일을 위한 혈판 서약서를 쓰게 하였습니다. 그 혈판 서약서를 쓰며 아사노 가문 재흥을 맹세했던 자들 중 끈이 있는 자들은 그런 끈을 의지하여 흩어지고, 능력 있는 자들은 능력을 살려 제 갈 길들을 갑니다. 능력 없고 빽이 없어 남겨진 쭉정이들은, 번주를 죽게 만들고 자기는 살아남은 키라를 당장 죽이자는 파와 막부의 최종판결을 기다리자는 파로 나뉘게 됩니다. 오오이시는 막부에게 청원했던 아사노 다이가쿠의 번주 취임과 아코우 아사노 가문 재흥을 기다립니다만…. 막부의 최종판결은 아사노 다이가쿠의 영구 칩거였습니다.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자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키라에 대한 복수뿐이었습니다. 10
오이시가 고른 47명은 '주군과 의리를 저버린 자'라는 수모 속에서 시간을 기다렸다. 군자금을 마련하려 행상에 나서고 가족을 버렸다. 어떤 로닌은 여동생을 원수인 기라에게 하녀 겸 첩으로 바쳤다.
47이란 숫자는 키라 저택에 쳐들어 간 숫자로 쳐들어 가기 전만 해도 몇 명이 더 있었습니다. 가령 ‘여동생을 원수인 기라에게 하녀 겸 첩으로 바쳤다’는 낭인은 가장 마지막에 탈맹한 모우리 코헤이타[ 11毛利 小平太]를 말하는 것으로, 그가 여동생을 하녀 겸 첩으로 바쳤다는 것은 후세의 창작입니다 12. 모우리 코헤이타가 키라의 저택에 직접 들어가 하인으로 일하며 가장 정확한 정보를 가져다 주었기에 후세의 작가가 그런 식으로 창작을 하였나 봅니다. 13
복수에 성공한 로닌들은 쇼균의 할복 명령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영원히 살아 있다.
이 복수극에 성공한 로우시[浪士]들은 막부에 자수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처분을 두고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츠나요시[徳川 綱吉]는 고민하게 됩니다.
시간을 두었다가 나중에 살려주자는 막부의 평정소, 그러나 평정소의 보고를 받은 노중[老中] 14들의 결론은 조직폭력배같은 놈들이니 15 참수를 하자고 주장 16, 이 상반된 의견에 곤혹해진 츠나요시의 최측근 야나기사와 요시야스[ 17柳沢 吉保]는 자신의 브레인 오규우 소라이[荻生 徂徠]에게 의견을 묻자, 그들의 명분을 인정해주는 명예로운 할복. 야나기사와 요시야스는 오규우 소라이의 의견이 가장 타당하다고 여기고 쇼우군 츠나요시에게 여쭙니다. 18
츠나요시는 그럼에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다음 해 2월 1일 신년 인사를 하러 온 우에노[上野] 칸에이 사[寛永寺]의 코우벤 법친왕[公弁法親王]에게 의견을 묻자, 그들은 이미 목적을 달성했으며 충신인 그들은 목숨을 살려주더라도 다른 주군을 모시지 못할 것. 그러니 지금 그들에게 명예 있는 죽음을 언도하면 그 이름을 영원히 남길 수 있다 – 고 츠나요시에게 말하여 할복이 결정됩니다. 그리고 법친왕의 말대로 그들은 이후 충성의 대명사로 일본인에게 영원히 남습죠. 또한 연말연시가 되면 어느 방송국 중 하나는 반드시 저 츄우신쿠라[忠臣蔵]에 관한 드라마를 방영하지요.
호전적 일본과 집요하게 기술을 개발하고 시장을 개척하는 일본기업에도 '주신구라'라는 공통의 인자가 담겨 있다.
이 말은 사족인 것 같습니다. 저도 사족을 달아보자면, 전투국가 한국은 집요하게 기술 개발과 시장 개척을 안 한답니까? 그럼 우리 기업에도 ‘주신구라’의 인자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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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가 들어선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즈음, 가신들을 이끌고 말에 올라 에도[江戸]의 대로를 가로지르는 히고[肥後] 54만석의 다이묘우[大名] 카토우 키요마사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에도 시민들 사이에 화제를 되었다.
키요마사는 신장이 6척을 가볍게 넘고 1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 얼굴에 입이나 턱 주위에는 수염이 무성하게 덮인 대장부였다. 허리에는 1m7cm의 큰 칼[大刀]을 차고, 어깨높이가 180cm 넘는 괴물같이 거대한 말에 올라타 있었다 한다. 무엇보다 당시의 말은 어깨높이 120cm가 보통이었다. 2
사람들은 그런 키요마사에게서 고(故) 타이코우[太閤] 히데요시[秀吉]의 직속 장수, 무공이 뛰어나 ‘칠본창 3’이라는 이명을 얻은 무장, 임진왜란 시 일본의 맹장에 걸맞은 보습이라 보고 나중에는 유행가까지 만들었다.
江戸のもがりにさわりはすとも、よけて通しゃれ帝釈栗毛
키요마사는 센고쿠[戦国] 무장 중에서도 일화가 많은 사람인데, 특히 조선에서 호랑이 퇴치는 널리 알려져 있다. 십문자 창을 휘둘러 호랑이의 숨을 끊었는데 그때 호랑이는 창의 한쪽 날을 물어서 뜯었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에도 시대 말기의 창작으로 처음 실린 책에서 키요마사는 철포를 쏘아 호랑이를 잡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키요마사의 통칭은 토라노스케[虎之助]로 범 호(虎)자가 들어간다. 4
키요마사는 히데요시와 같은 오와리[尾張] 나카무라[中村] 태생이라고 하며, 전하는 바에 따르면 키요마사의 모친은 히데요시의 모친(오오만도코로[大政所])과 사촌지간이라고 한다. 그런 연으로 키요마사는 어릴 적에 당시 5나가하마 성[長浜城]의 성주였던 히데요시에게 맡겨졌다. 이때부터 문자 그대로 히데요시가 직접 키운 가신으로서의 키요마사 생애가 시작되는 것이다.
히데요시 자신도 노부나가[信長]가 아니었다면 출세할 수 없었을 정도로 미천하였기에, 친척이나 히데요시 가문을 대대로 섬긴 가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기에 키요마사와 같이 조금이라도 핏줄이 닿는 사람을 교육시켜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려 하였다. 그런 만큼 키요마사의 출세도 빨랐다.
1576년 15살 성인식이 있던 해에 170석을 받았으며, 1581년 6월 20살에 6톳토리 성[鳥取城] 공성전에서 데뷔전[初陣]을 치르게 되는데 키요마사는 정찰 나갔다가 공을 세웠고, 이후 히데요시를 따라 각지를 전전.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칠본창(七本槍)라 일컬어지는 전공을 세워 일약 3000석이 주어진다. 지위도 철포 150정, 히데요시가 파견하는 무사[与力] 20명을 휘하에 둔 중급 장교[物頭]로 승진하였다. 이 정도되면 당당한 무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례적인 출세에는 히데요시의 덕도 있었겠지만 그 이상으로 키요마사 자신이 무장으로서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7
그 후도 키요마사는 히데요시를 따라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役], 큐우슈우 정벌전[九州の役] 등에 참전하여 1588년에는 일거에 히고[肥後] 절반이 주어져 드디어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나머지 반을 하사 받은 것이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이다.
1592년 조선 침략에서 키요마사는 코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선봉에 임명되어 서로 경쟁해 가며 파죽지세로 진격하였지만, 곧바로 의병(義兵)이 일어나고 명나라가 원군을 파병하자 전황이 악화되었다. 거기에 전쟁정책에 관해 대륙정복론자인 키요마사와 화평론자인 코니시 유키나가 사이에는 자연스레 반목이 생겨, 결국에는 작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원래 둘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소위 무공파와 문치파로 대립하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키요마사의 신상에 위기가 생긴다. 8
조선에 가 4년째인 1595년.
갑자기 히데요시에게서 귀국을 명령 받은 것이다. 그것이 히데요시의 분노를 나타내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귀국명령은 일본군의 감찰[軍監]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이 작성한 키요마사의 행동보고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시다의 보고는 전부 키요마사의 방자한 말과 행동을 비난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명령에 따라 키요마사는 후시미[伏見]로 돌아왔지만, 히데요시는 면담을 허용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키요마사는 다섯 행정관[五奉行] 중 한 명인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에게 히데요시의 화를 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하지만 나가모리는 미츠나리와 화해하기만을 권할 뿐이었다. 이렇게 되자 키요마사는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냐며,
“하치만[八幡]도 굽어 살피소서, 지부[治部] 9놈과 평생 화해 따위 하지 않겠소. 그 놈은 조선에서 한 번도 싸우지 않은 주제 10에 남의 뒤따마만 까며 끌어내리려고만 하는 더러운 놈이다. 아무리 소인이 타이코우[太閤 11]에게 용서를 받지 못하고 배를 가르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지부 놈과는 화해는 하지 않겠소.” 12
하며 분노하였다고 한다.
키요마사의 근신생활은 반년 정도 이어졌다. 그러던 1596년 7월. 킨키[近畿] 지방에 큰 지진이 일어났다 . 속설에 따르면 키요마사는 근신 중인 자신의 처지도 잊고 수하 200여를 이끌고 후시미 성에 와서 히데요시를 보호하며 성을 수비하였다. 이것을 안 히데요시도 노여움을 풀고 키요마사의 죄를 용서했다고 한다 13. 후세 연극 등에서 ‘지진 카토우[地震 加藤]'라 불리게 되는 명장면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키요마사의 명성은 한층 더 높아지게 되었다. 14
1597년. 조선으로 재침공. 즉 정유재란이 시작되자 키요마사는 또다시 출정하여 이 해의 막바지에 가장 치열하고 처참한 전투를 치르게 된다. 유명한 울산성(蔚山城) 농성전이다.
엄동의 12월. 4만4천이라는 명나라 대군의 포위 속에서도 키요마사는 철저항전 하였다. 성 안의 식량은 이미 바닥을 들어내고 있었다. 더구나 명의 전법은 장기 포위전[兵糧攻め]이었다. 성 안에 있던 오오코우치 히데모토[大河内 秀元] 15는, 16
“매일 행전(行纏)이 흘러 내렸다. 처음엔 고쳐 맸지만 나중에 뭔가 이상하여 행전을 떼어 보자 다리에 살이 하나도 없이 뼈와 가죽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17
고 기록하였고, 명나라 기록에도 - 일본군은 종이를 먹고 오줌으로 갈증을 해소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듯이 성 안 일본 병사들은 굶주림과 추위로 인해 동상에 걸리는 사람, 얼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이러한 지옥 속에서 키요마사도 죽음을 각오했는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 등 여러 장수들에게 보낸 편지에,
“만약 낙성된다면 이런 모습들을 타이코우[太閤] 님에게 보고해 주길 바란다”
고 썼다. 모우리[毛利], 나베시마[鍋島], 쿠로다[黒田] 등 여러 장수의 구원이 제시간에 도착하여 조선과 명의 군사들은 포위를 풀고 철퇴하였다.
고군(孤軍)이면서 항전을 계속한 키요마사에게 적인 명나라 측도,
“오랑캐[酋] 중에서는 가장 사납고 굳세다”
“재능은 유키나가보다 몇 배나 뛰어나다”
며 절찬하였다.
1598년 8월. 히데요시가 죽어 길었던 조선에서의 싸움도 끝났다. 키요마사에게 남겨진 것은 두 번에 걸친 전쟁 중에 한층 더 깊어진 이시다 미츠나리, 코니시 유키나가 등에 대한 증오뿐이었다. 이런 키요마사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이시다 미츠나리의 편을 들 이유가 없었다.
키요마사는 큐우슈우[九州]에서 동군 측에 서서 싸워, 코니시 유키나가의 거성 우토 성[宇土城]과 속성 야츠시로 성[八代城]을 공략. 전쟁 후 히고[肥後] 전부를 하사 받았다. 천하의 명성 18쿠마모토 성[熊本城]의 축성에 임한 것은 다음 해인 1601년이었다.
토쿠가와의 시대에 들어서도 키요마사의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없었던 듯, 토요토미 가문 존속을 위해, 1611년 히데요리[秀頼]를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대면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후 쿠마모토로 돌아가던 도중 병에 걸려 귀성한 뒤 얼마 지나 죽었다. 그 죽음이 너무도 급작스러웠기에 독살설도 유포되었다고 한다.
[가토 기요마사(加藤 清正)]
1562년 오와리[尾張] 에치 군[愛智郡] 나카무라[中村]에서 태어났다.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合戦] 후 오우미[近江], 야마시로[山城], 카와치[河内]에 조금씩 3000석을 하사 받았다.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에 종군하여 히고[肥後]의 반인 25만석을 영유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동군에 속하여 히고 54만석을 하사 받았다. 축성, 치수, 간척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였다. 1611년 6월 24일 죽었다. 51세.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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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정리를 위해서. ...그러게 말입니다..
4.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에 붙잡혀 오지 않던 센고쿠 천정기 7권이 드디어 왔습니다.
아~ 역시 재미있습니다. 구할 수 없어 못 읽는 분들에게 "약오르지~롱~"하고 싶어질 정도로 재미있습니다. 우하하~
5. 우분투를 깔다 실패했습니다. 인스톨까지는 시켰는데 리부팅하니 부트 이미지가 없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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