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에 외눈으로 그리지 말고 양눈으로 그리라고 했다고 한다.
1974년 10월.
338년 만에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의 유체가 햇볕을 쬐었다. 센다이 시[仙台市] 즈이호우 전[瑞鳳殿] 터에 있던 묘의 석실이 발굴된 것이다. 백골화되어 있긴 하여도 거의 완전한 상태로 이장되어 있었다. 골격으로 추정하면 마사무네는 보통 몸집에 보통 키로 코가 높았으며 이외로 상냥한 얼굴을 한 현대적인 생김새였다고 한다. 그것은 저 권모술수의 화신과도 같은 센고쿠의 맹장이 가진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외눈이었는지 어땠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곳에 가면 유골로 복원한 다테 마사무네의 얼굴을 볼 수 있다(가장 하단))
마사무네라 하면 '독안룡[独眼竜]'이라는 이명[異名]으로 더 유명하다. 5살 즈음 앓은 천연두로 인하여 오른쪽 눈이 멀었다고 한다. 소년시대의 그는 자신의 추한 용모 때문에 극단적인 콤플렉스에 빠져 우물쭈물하고 자기비하가 심한 꼬꼬마였다. 마사무네 다음으로 태어난 '지쿠마루[竺丸]'가 수려한 외모에 똑똑하고 외향적인 성격이었기에 더 비교당하여 친어미에게조차 미움을 받았다.
마사무네의 어렸을 적 이름[幼名]은 '본텐마루[梵天丸]'였다. 모친은 같은 지역인 오우슈우[奥州]의 호족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의 여동생으로 '요시히메[義姫]'라 하였다. 이 모친은 추하고 어두운 본텐마루를 싫어하고 동생인 지쿠마루를 편애하였다. 남편 테루무네[輝宗]에게 몇 번이나 본텐마루를 폐하고 지쿠마루를 후계자로 삼으라고 하였다. 나중에는 친정 오빠인 모가미 요시아키와 짜고 마사무네를 독살까지 하려고 하였다. 친어미에게까지 미움 받았기에 본텐마루는 한층 더 열등감의 포로가 되어 성격도 삐뚤어졌음에 틀림이 없다.
그런 마사무네를 구한 것이 젊고 혈기왕성한 교육담당 '카타쿠라 코쥬우로우[片倉
小十郎]'였다. 후에 다테 가문[伊達家]를 짊어지고 있다는 평판을 받으며 중신[重臣]이 된 인물이다. 카타쿠라는 마사무네가 천하의 영웅이 될 인물이라며 계속 격려하였다.
또 한 사람. 본텐마루의 강력한 지지자가 있었다. 부친 테루무네였다. 11살의 본텐마루에게 성인식을 치르게 하였을 때 '마사무네'란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이 이름은 다테 가문 9대 당주 다이젠노다이부[大膳大夫] 마사무네의 이름이었다. 문무에 뛰어나 다테 가문을 융성으로 이끈 영광스런 이름이었다. 이것을 보아도 부친 테루무네가 얼마나 본텐마루에게 기대하였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테루무네는 1584년 41살의 나이에 가독[家督]을 마사무네에게 물려주었다. 과감한 은퇴였다. 무엇보다 부인 요시히메를 중심으로 지쿠마루를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테루무네는 은거를 선언함과 동시에 요시히메와 지쿠마루를 데리고 모가미 가문과의 국경 가까이에 있는 코마츠 성[小松城]으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다테 가문의 본거지는 데와[出羽] 요네자와[米沢]에 있었다.
1584년 당시 중앙 정세는 센고쿠[戦国] 군웅할거의 시대가 끝나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뒤를 이어받은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 의해 천하통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토우호쿠[東北] 지방은 여전히 모가미, 다테, 오오사키[大崎], 소우마[相馬], 아시나[芦名], 니카이도우[二階堂], 타무라[田村] 등 여러 호족들이 서로 다투고 있었다.
그런 정세 속에 오오우치 비젠[大内
備前]이라는 소호족이 다테 가문을 방문하였다. 예전엔 다테 가문에 속해있었지만 지금은 아이즈[会津]의 아시나 가문이나 히타치[常陸]의 사타케 가문[佐竹家]과 친분을 나누고 있는 인물로, 마사무네의 가독상속을 축하하러 인사를 올리러 온 것이다. 요네자와에 저택까지 세워 충성을 맹세했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아시나의 첩자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분노한 마사무네는 흑막 아시나 토벌을 결심하였다. 또한 가문에 자신의 권위를 확립시키고 싶었다. 1585년 8월, 다테의 군세는 오오우치 비젠이 지키는 오데모리 성[小手森城]을 습격하였다. 아시나나 니혼마츠[二本松]의 하타케야마 요시츠구[畠山
義継]가 오오우치 편을 들고 있어 고전하였다. 하지만 마사무네는 오오우치의 군세가 기세를 타고 성 밖으로 나온 그 순간을 민감히 캐치했다. 단번에 수 많은 총격을 쏟아 부었고, 다시 성안으로 도망가려는 오오우치의 군세에게 모든 총포를 집중시켰다. 성 측은 무너졌다. 대장 오오우치 비젠도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마사무네가 오데모리 성을 공략한 뒤 행한 처치가 참혹했다. 항복한 노약남녀 800여명을 남김없이 학살한 것이다. 다테 마사무네의 공포를 확실히 각인시키기 위해서였다.
그 후 오오우치와 손잡았던 니혼마츠의 하타케야마 요시츠구가 다테 가문에 엄청난 재앙, 마사무네의 생애에 있어서 최대의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항복하여 용서받은 요시츠구가 그 감사에 대한 인사를 드린다는 핑계로 미야모리 성[宮森城]의 테루무네를 만나러 왔을 때의 일이다. 이날 1585년 10월 8일, 마사무네는 매사냥을 하러 나가있었다. 마사무네가 없는 틈에 생긴 사건이었다.
테루무네와 회견이 끝나자 요시츠구는 돌아가기 위해서 성문으로 향했다. 성문까지 가는 길은 대나무 울타리가 양쪽에 늘어선 좁은 길이었다. 그 좁은 길을 요시츠구의 가로[家老] 3명이 앞장서고 그 뒤를 요시츠구, 테루무네, 테루무네의 부하들이 뒤를 이었다.
대나무 울타리 밖으로 나왔을 때 요시츠구와 가로 3명이 테루무네를 향해서 땅에 손을 대고 절을 하였다. 그 순간이었다. 요시츠구가 벌떡 일어나 갑자기 테루무네를 붙잡고 칼을 빼 들어 테루무네의 목에 갖다 대었다. 다테 가문의 가신들은 놀라 노성을 지르긴 하였지만 결국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테루무네를 인질로 잡은 요시츠구 일행은 유유히 걸어가 말을 타고 자신의 영지 니혼마츠를 향해서 도망쳤다.
사태를 듣고 달려온 마사무네의 눈에 요시츠구에게 잡힌 부친의 모습이 비추어졌다. 여기서 부친을 적에게 빼앗기면 다테 가문의 패배였다. 그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 .
마사무네의 명령에 철포가 불을 뿜었다. 요시츠구는 이때 테루무네를 찔러 죽이고 자신도 배를 갈라 죽었다고 한다. 마사무네는 하타케야마 일행 50여명을 남김없이 죽이고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요시츠구의 시체를 난자하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길가에 세워 모욕 주었다.
이렇게 19살의 마사무네는 이후 가문에서 완전한 독재권력을 쌓아 23살인 1589년에는 아이즈 4개 군[郡], 센도우[仙道] 7개 군[郡]을 정복하여 광대한 영토를 손에 넣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음 해인 1590년, 다테 가문에 있어서 두 번째인 더구나 중대한 위기가 닥친다.
당시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는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우죠우 가문[北条家]를 공략하기 위해 대군을 일으켰다. 마사무네에게도 참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호우죠우와 히데요시를 저울로 재고 있던 마사무네는 즉답을 피했다. 거기에 운 나쁘게도 히데요시에게 속한 아시나 가문을 공격하여 히데요시의 힐문을 받고 있었다. 히데요시가 분노할 것이라는 것은 안 봐도 뻔했다. 오다와라에 가면 살해당할지도 몰랐다. 이제 취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 사[死] 속에서 생[生]을 찾는다.
이것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마사무네의 오다와라 참전은 결정되었지만, 출발 바로 전날 친모인 요시히메가 마사무네를 독살하려 한 사건이 일어났다. 해독제를 복용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사건은 동생 코지로우(小次郎=지쿠마루)를 편애하여 옹립을 꾀한 모친의 음모였다. 마사무네는 후환을 끊기 위해 동생을 자신의 손으로 칼로 찔러 죽였다. 그날 밤, 모친은 친정인 모가미 가문으로 도망쳤다.
어쨌든 마사무네는 히데요시를 알현함에 앞서 장례식 때 쓰는 끈으로 머리를 묶고 갑주 위에 흰 마[麻]로 된 겉옷[陣羽織]이라는 사자[死者]의 복장으로 참진하였다. 마사무네의 목숨을 건 연출이었다. 거기에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나 히데요시의 비서실장 격인 야쿠인 젠소우[施薬院
全宗]에게 사자[使者]를 보내 히데요시의 마음을 풀게 부탁하였다. 효과가 있었는지 용서받아 새로 점령한 아시나의 영지는 몰수당했지만 70여만석은 안도[安堵]되었다.
그 후 마사무네는 또다시 히데요시의 힐문을 받게 된다. 근린에서 카사이-오오사키 반란[葛西・大崎一揆]을 뒤에서 선동했다는 죄상이다. 이때도 마사무네는 사자[死者]의 복장을 몸에 걸치고 거기에 더해 금박 입힌 십자가를 행렬의 맨 앞에 세우고 히데요시를 만나러 갔다. 반란을 선동했다는 증거서류의 사인[花押]이 거짓이라고 주장하여 겨우 위기를 벗어났다고 한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의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동군에 속하였고 이해(1600년) 12월부터 센다이[仙台]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다음 해 4월에 그곳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마사무네는 기독교에 흥미를 느껴 1613년에는 가신 하세쿠라 츠네나가[支倉
常長]를 저 먼 이국 로마에 파견하여 교황에게 오우슈우 왕[奥州王] 마사무네의 국서를 헌상하고, 선교사 파견과 에스파냐와의 통상[通商] 알선을 의뢰하였다.
정치적인 모략으로 가득 찬 효웅이었지만 시인적인 재능도 발군이어서 한시[漢詩] 30수, 와카[和歌] 275수를 남겼다. 소년시대의 암울했던 일상이 그의 문학적 교양을 키웠을 것이다.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
1567년생. 1584년 데와[出羽] 요네자와[米沢] 성주. 1591년 이와테사와 성[岩手沢城] 51만석. 1592년 임진왜란에도 출진.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동군에 속하여 우에스기 군[上杉軍]과 싸웠다. 1636년 5월 24일 죽었다. 70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