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

1602 10 18일 병사(病死) 21

1582~1602.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각주:1]의 오빠인 키노시타 이에사다[木下 家定]의 아들. 처음은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이어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양자가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에서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가 승리할 수 있도록 서군을 배신하여 빈고[備後], 빗츄우[備中], 미마사카[美作] 50만석 다이묘우[大名]가 되지만 곧 젊은 나이에 죽었다.









역사를 바꾼 선택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이름을 단번에 알린 것은 다름 아닌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 하지만 히데아키는 그 2년 뒤인 21살의 나이에 죽어버렸다. 따라서 히데아키에게 있어서 말년은 그 2년간이라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투 전날 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를 서로 자기 진영에 끌어들이기 위한 모략 싸움이 활발히 펼쳐졌다. 하지만 결전 당일인 9 15, 히데아키는 고민 끝에 아군인 서군을 배반하고 동군에 내응을 결심하여 머물고 있던 마츠오 산[松尾山]을 내려와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의 진영을 급습한 것이다. 히데아키의 배반에 당황한 서군의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은 연달아 무너져 결국 서군이 괴멸된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이 전투로 인해서 동군의 총대장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패권(覇權)이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에 직접적인 승리의 요인은 히데아키의 결단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10 15일 논공행상에서 히데아키는 큐우슈우[九州]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에서 서군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영지였던 비젠[備前], 미마사카 57만석으로 가증(加增) 이봉(移封)되어 오카야마 성[岡山城] 거성으로 삼았다.


 하지만 비젠의 오카야마 성으로 옮겼을 즈음부터 히데아키의 운명은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히데아키는 예전보다 더 술을 즐기기 시작하였고 그것도 날이 갈수록 더 마시게 되어, 쿄우토[京都]에서 죽은 타이코우[太閤] 히데요시를 공양하며 여생을 보내고 있던 양어머니 키타노만도코로를 걱정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히데아키는 1582년 키타노만도코로의 오빠인 키노시타 이에사다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나 3살 때 히데요시 부부의 양자가 되어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후계자로 길러졌다.

 히데요시 부부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히데아키는 당대 제일의 문화인으로 알려진 쇼우고인 도우쵸우[聖護院 道澄]에게 글자를 배우거나 와카[和歌] 그리고 케마리[蹴鞠][각주:2]를 할 때의 손 움직임, 축이 되는 발의 움직임 등도 단번에 습득할 정도로 똑똑한 소년이었기에 기대를 받았다고도 한다.


 하지만 1593년에 히데요시에게 자신의 피를 이은 히데요리[]가 태어나자 히데아키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양자가 되었다. 이것은 히데아키가 토요토미 가문의 후계자 후보에서 제외된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히데아키를 친족으로 중히 여겨 1597년 조선 재출병[각주:3] 때에는 총대장으로 파견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코바야카와 가문에 양자로 보낸 히데아키를 불쌍히 여긴 히데요시는 살아 생전에 히데아키가 바라는 것이 있으면 내가 말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어떠한 것이건 들어주길 바란다고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보낸 히데아키 자필(自筆) 돈 차용증.


매사냥 직후의 급사(急死)


 1602년 초두에 히데아키는 이름을 히데아키라[秀詮]로 개명하였다.

 이는 전년에 일어난 - 히데아키에게 간언(諫言)한 스기하라 키이노카미 시게마사[杉原 紀伊守 重政]를 죽인 사건이나, 숙노(宿老)인 이나바 마사나리[稲葉 正成][각주:4]를 쫓아 낸 사건 등 가문 내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고 새롭게 나아가겠다는 의미에서 개명했다고 생각한다.


 그 즈음 히데아키는 쿄우토[京都]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던 고모 겸 양어머니인 키타노만도코로에게 자주 편지를 보냈고 어떤 때는 황금 50(500)이라는 거금을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빌리기도 했다. 사용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여러 사건이 일어나는 등 혼란 속에서 술에 빠져 평판이 좋지 못한 히데아키를 키타노만도코로는 죽은 히데요시와의 약속을 지키면서 마지막까지 뒤를 돌봐준 것이라 생각된다.


 히데아키가 죽은 것은 키타노만도코로에게서 거금을 빌린 불과 반년 후인 10 18일. 향년 21살이었다.

 사인(死因)에는 여러 설이 있어 확실치 않지만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에서 동서 양군의 내응 공작에 마지막까지 고민한 끝에 결국 아군을 배신한 행위를 부끄러워하여 양심의 가책과 주위의 비난에 견딜 수 없어 미쳐 죽었다고도 한다.


 죽기 직전인 10 15일.

 매사냥을 하러 나갔던 히데아키는 해가 저물어서 성으로 돌아왔지만 기분이 좋지 않다고 말한 채 눕자마자 인사불성이 되었다. 다음 날에는 숨이 중간에 멈추기도 하여 놀란 측근들이 쿄우토[京都]에 파발을 보내기도 했다. 17일에 잠깐 눈을 떴지만 다음 날 새벽에 죽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히데아키가 죽기 3일 전인 15일에 형인 키노시타 토시사다[木下 俊定]도 급사하였기에 그 죽음에는 이상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1. 히데요시의 정실(正室) 네네[寧々]를 말함. [본문으로]
  2. 과거 일본에서 행해진 축구의 리프팅과 같은 경기. 여러 명이서 사슴 가죽으로 된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발등으로 서로 주고 받는 경기. [본문으로]
  3. 정유재란을 이름. [본문으로]
  4. 아직 이 때의 성은 하야시[林]였다. 코바야카와 가문을 떠난 후 미노[美濃] 이나바 시게미치[稲葉 重通 – 이나바 잇테츠[一鉄]의 서장자(庶長子)]의 사위가 되어 성을 ‘이나바’로 바꾸었다. 여담으로 이때 결혼한 것이 후에 카스가노츠보네[春日局 – 3대 쇼우군[将軍] 이에미츠[家光]의 유모]이다. [본문으로]

우키타 히데이에[宇喜田 秀家]

1655 11 20일 병사 84.

1572~1655.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 적자(嫡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섬기며 천하통일에 공헌. 분로쿠의 역[文禄の役][각주:1] 케이쵸우의 역[慶長の役][각주:2] 공을 세워 오대로(五大老)[각주:3] 사람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에서는 서군의 주력이었다. 그러나 패하여 사츠마[薩摩] 도망 가지만 후에 잡혀서 하치죠우지마[八丈島] 섬으 유배당했다.









영광에서 좌절로


 우키타 나오이에는 센고쿠[戦国] 효웅(梟雄)으로 공포의 대상이었 우키타 나오이에의 세자(世子), 1572년에 비젠[備前] 오카야마 성[岡山城]에서 태어났다.
 시대는
신흥세력인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선봉으로 하리마[播磨]로 진출해 온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세력과 츄우고쿠[中国]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가 패권을 놓고 싸우던 시기였기에, 그 사이에 낀 우키타 씨()는 어느 쪽에 붙을지 고민 하던 때였다. 결과적으론 히데요시 쪽에 붙게 되어 히데이에는 불과 10살의 나이로 히데요시를 후견인 삼아 가독(家督)을 상속하게 되었다.

 히데요시의 이름 중 한 글자를 얻어서 지은 '히데이에[秀家]'라는 이름이 나타내듯이 그의 일생은 토요토미 씨()의 번영과 함께 했다고 할 수 있다.


 연표(年表)처럼 그의 영달 과정을 적어보면,

  1. 1585(13). 시코쿠[国]의 쵸우소카베 씨[長宗我部氏]와의 전쟁에서 데뷔 전을 장식했다.

  2. 1587(15). 큐우슈우[九州]의 시마즈 씨[島津氏]와의 전쟁에 종군하였고 그 싸움이 끝난 후에는 종삼위(從三位) 산기[参議]에 서임(敍任).

  3. 1589년(17세). 카가[加賀] 카나자와 성[金沢城]의 성주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넷째 딸로 어려서부터 히데요시의 양녀가 되어 있던 고우히메[豪姫]와 결혼.

  4. 1594(22). 분로쿠의 침공[각주:4] 때. 6군의 주장(主將)으로 바다를 건너 벽제관의 싸움에서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등과 함께 명나라의 장수 이 여송군을 대파하였다. 이 때의 공적으로 곤츄우나곤[権中納言]에 서임.

 식으로 항상 토요토미 정권을 지탱하는 중신으로 활약하여, 히데요시에게 오대로(五大老)의 한 사람으로 임명받았을 때는 아직 26세의 청년 다이묘우였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있듯이 히데이에의 영광은 지속되지 않았다.


 1600 9월.
 미노[美濃]
세키가하라[ヶ原]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히데이에는 당연히 서군(西軍)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1 6천 여라는 최대의 군세를 이끌고 참전하였다.
 방관을 하던 장수들이 많은 서군에서 그가 싸우는 모습은 단연 돋보였다. 그러나 서군이 패배함에 따라 히데이에는 명예나 지위를 모두 잃게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쟁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은 히데이에는 미노[美濃] 카스카와[粕川] 골짜기에서 이틀간 떠돈 끝에 패잔병을 노리는 노부시[野武士][각주:5] 무리에게 포위 당하지만, 두목인 야노 고로우자에몬[矢野 左衛門]은 히데이에의 인품에 반하여 반대로 히데이에 일행을 자기 집에 숨겨주었다. 그리고 우키타 가의 가보(家寶)이며 히데이에가 차고 다니던 쿠니츠구[次]의 긴 칼[太刀]을 고로우자에몬이 토쿠가와 쪽에 바쳐서 히데이에가 죽었다고 위장했다고 한다.


 이렇게 엄중한 탐색을 피하면서 시간을 번 일행은 고난의 도피행 끝에 오오사카의 우키타 가저택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처()인 고우히메와의 재회를 기뻐할 틈도 없이 히데이에 일행은 사츠마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를 의지하여 도망쳤다.


종언의 땅, 하치죠우지마 섬으로 유배


 히데이에 주종(主從) 오오스미[大隈] 키모츠키 군[肝属郡] 타루미[垂水]의 호족인 히라노 씨[平野氏]의 집에 숨겨졌다.


 그 후 1603 9월.
 시마즈 타다츠네[島津 忠恒][각주:6]
마에다 토시나가[前田 利長][각주:7]의 조명탄원(助命嘆願) 덕분에 사형을 면한 히데이에는 스루가[駿河] 쿠노우 산[久能山]에 유폐(幽閉)되었, 그 후 3년 뒤인 1606 4 적자(嫡子)인 히데타카[秀高], 가신(家臣) 12명과 함께 하치죠우지마 섬으로 유배되었다.

 이 당시 히데이에 34세.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큐우후쿠[休福]'란 호()를 칭하고 있었는데 이 때는 자신의 파란만장한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한때 50만석 넘게 영유[각주:8]하고 있던 비젠[備前] 태수(太守)였기에 섬에서의 생활은 힘들었음에 틀림이 없다. 섬의 대관[代官][각주:9]인 키쿠치 사콘[菊池 左近]에게 식량을 빌려달라고 요청한 적도 있었다. 처() 고우히메의 친정 마에다 가문에서는 1614 이후 1년 터울로 생활물자가 보내졌다고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여 섬사람들에게 보리 빌리지 못하면 생활할 없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패군의 장수가 되었을 죽음을 선택했다면 이러한 고생도 맛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데이에가 유배생활을 50년이나 계속할 있었던 것은, 산다는 자체에 의미를 두고 담담히 살고자 하는 인생철학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655
11 24일. 84세로 사거(死去)했다.

하치죠우지마 섬[八丈島]에 있는 히데이에의 묘.

  1. 임진왜란. [본문으로]
  2. 정유재란. [본문으로]
  3.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4. 임진왜란을 말함. [본문으로]
  5. 무장 농민집단. [본문으로]
  6. 요시히로의 셋째 아들로 사츠마번[薩摩藩]의 초대 번주(藩主). [본문으로]
  7. 토시이에[利家]의 첫째 아들로 히데이에의 부인 고우히메[豪姫]의 오빠. 카가 번[加賀藩] 초대 번주. [본문으로]
  8. 약 54만 7천석. [본문으로]
  9. 섬의 지방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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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토미가(家)의 사람들

일본서적 번역 2007. 6. 24. 08:58 Posted by 발해지랑


카테고리 "豊臣家의 사람들"의 책표지..

매주 월요일에 업데이트 하기로 했지만...

현 상태에서 그래도 꽤 많이 번역한 편이지만...

주석다는 것이 넘 귀찮아서 올리지 않고 있음.

혼간지 켄뇨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7. 6. 23. 23:16 Posted by 발해지랑

혼간지 겐뇨(本願寺 顕如)

1592 11 24일 병사 49

1543~1592.

쟁토진종(爭土[각주:1]) 혼간 사(本願)의 승() - 이하 혼간지로 통일 -. 11세 종주(宗主)가 되어 혼간지를 세습하였다. 이시야마(石山) 혼간지에서 물러나길 원하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충돌. 후에 키이(紀伊)() 사기노모리(鷺森)로 물러났다. 12세 쿄우뇨(教如)와 의절한 것이 후에 혼간사()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노부나가와의 10년전쟁


 [켄뇨(顕如)]는 법명(法名)으로 이미나([각주:2])는 코우사(光佐) 일반적으로는 [혼간지 켄뇨(本願寺 顕如)]라 불리고 있다. 혼간지 10세인 쇼우뇨(証如)의 첫째 아들로 13살에 제 11세가 되어 종주가 되었다.


 1559
년. 오오기마치(正親町) 텐노우(天皇)의 즉위 비용을 헌상하여 승정(僧正[각주:3])이 되어 몬제키(門跡[각주:4] )에 준하게 되었다. 뇨슌니(如春尼) - 그녀의 언니는 타케다 신겐(武田信玄)의 부인 와 결혼하여 쿄우뇨(教如)나 쥰뇨(准如) 등의 아이들을 얻었다.


 1570년. 오오사카(大坂) 이시야마에 있는 혼간지에서 퇴거(退去)를 요구하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든 이후 10년에 걸친 싸움에 도전하여 자주 노부나가를 고난에 빠뜨렸다. 켄뇨는 노부나가와 대립하는 동안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 아자이 나가마사(長政),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 모우리 씨(毛利)와 동맹을 맺고 또한 각 지역의 문도(門徒)들을 동원하여 노부나가와 대결하였다. 그러나 타케다 신겐이나 아자이 나가마사 등의 죽음으로 인하여 동맹은 와해되었으며 각지의 문도 집단도 괴멸. 거기에 이시야마 혼간사()가 포위당하기에 이르르자 1580 3월에 오오기마치(正親町) 텐노우(天皇)의 칙명에 따라 노부나가와 화해하고 다음 달인 4월 키이(紀伊)의 사기노모리(鷺森)로 거처를 옮긴다.


 이때 철저항전을 주장하는 첫째 아들인 쿄우뇨와 대립하여 부자(父子) 관계를 의절했다. 이 의절이 중신이나 문도 사이의 대립을 낳아 후에 혼간지가 동서로 분열되는 원인이 되었다.


혼간지 재흥(再興)과 발병


 노부나가가 죽은 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켄뇨에게 접근하여 문도 집단의 회유(懷柔)를 꾀했다. 히데요시는 우선 켄뇨를 이즈미(和泉) 카이즈카(貝塚)로 옮긴 후 키이의 사이카(雑賀)()을 공략하여 혼간사지 세력이 강한 땅을 빼앗았다.


 이시야마 혼간사()가 있던 곳에 오오사카 성()을 쌓은 히데요시는 텐마(天満)에 절터를 주어 혼간지를 재흥시켰다. 켄뇨와 그의 부인인 뇨슌니는 히데요시나 키타만도코로(北政所[각주:5])에게 때때로 다회(茶會)에 초대받는 등 친교를 맺었다.
 텐마의 혼간사
() 예전과 같이 슈고(守護)의 힘이 미치지 않는 등
[각주:6]의 특권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며 히데요시 정권의 지배 아래 놓여졌다. 켄뇨도 히데요시 권력의 비호(庇護) 아래 들어가는 감으로써 혼간사()의 존립을 꾀하려 했던 것이다. 히데요시는 종교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서 1591년에 혼간지를 쿄우토(京都)의 호리카와(堀川) 로쿠죠우(六条)로 옮겨가도록 명령했다. 1년 후 현재의 니시혼간지(西本願寺)의 땅에 건립되었다.


 그 동안 켄뇨는 자주 병에 걸려 아리마(有馬)의 온천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그 병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절에 대한 사무를 보는데 지장은 없었던 듯하다.


혼간사(), 동서(東西)로 나뉘다.


 1592 11 20일.
 켄뇨는 새벽 수행을 끝내고
불전 청소를 끝낸 후에 갑자기 쓰러졌다. 본사(本寺) 이전에 따른 마음의 피로가 쌓였던 것일까? 병명은 [중풍]이었다.


 켄뇨와 친했던 쿠교우(公卿)인 야마시나 토키츠구(山科 言継)의 일기 [토키츠구 경기(言繼卿記)]에는,

11 20일. 몬제키[각주:7]. ()시에 큰 중풍에 걸리다. 즉시 여러 명의(名醫)를 불러 치료하게 했지만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회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발병한지 4일 후인 24일. 명의들의 치료도 보람 없이 [()시에 죽다](言繼卿記)고 쓰여있는 것을 보면 점심 지나서 죽은 듯하다. 향년 49.


 12세 종주의 자리에는 장자(長子)인 쿄우뇨가 계승하지만 곧이어 뇨슌니가 '켄뇨는 셋째인 쥰뇨를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양도장(讓渡狀)을 히데요시에게 제출함에 따라 사태는 급변하였다. 그 결과 히데요시의 판정에 따라 쿄우뇨는 은거의 몸이 되었고 17살인 쥰뇨가 혼간지의 법주 자리를 잇게 되었다.


 이 판정에 불만을 품은 쿄우뇨와 문도들은 세키가하라(ヶ原) 전투 후에 권력을 장악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에게 접근하여 그 비호 아래서 카라스마루(烏丸) 로쿠죠우(六条)에 절(현재의 히가시혼간(東本願寺))를 건립하게 된다.


 켄뇨는 혼간사()의 분열을 우려하여 쿄우뇨와 화해했지만 이시야마 혼간사()의 퇴거를 둘러싼 싸움은 켄뇨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은 후에 교단을 둘로 나뉘는 대립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사기노모리(鷺森)에 있는 니시혼간사(西本願)사(寺)별원(別院)[和歌山市]>
  1. 한 번이라도 진실된 마음으로 염불을 외우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여,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던 하층민이나 농민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함. [본문으로]
  2. 실제 이름. 그러나 실제 이름은 영적인 것이라 하여 생전에는 부르지 않았다. [본문으로]
  3. 일본 승위승관(僧位僧官)의 관리 중 하나. [본문으로]
  4. 황족 혹은 귀족이 출가한 절 또는 주지를 말한다. [본문으로]
  5. 히데요시의 정부인. [본문으로]
  6. 즉 세금이나 부역에 종사하지 않아도 되었다. 수호불입(守護不入)이라 한다. [본문으로]
  7. 켄뇨를 이름. 이 당시 몬제키에 준하는 위치를 점하고 있었기에 이 때부터 몬제키는 혼간사의 주지를 이르는 속칭이기도 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