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고 쓰네히사[尼子 ]

154111 13일 병사(病死) 84

1458~1541

처음엔 이즈모[出雲] 슈고다이[守護代][각주:1]. 갓산토다 성[月山富田城]을 탈취한 후 이나바[因幡] 이서(以西)산인[山陰] 각지를 공략하여 아마고 씨() 전성기를 수립했다. 후에 손자 하루히사[晴久]가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 義隆],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와 대립하여 모토나리의 아키[安芸] 요시다 성[吉田]을 공격하지만 실패. 직후에 죽었다.








세 아들의 말로


 아마고 츠네히사에게는 마사히사[政久], 쿠니히사[国久], 오키히사[興久]라는 세 아들이 있었다.


 장남인 마사히사는 1516 8월. 히가시아요우[東阿用]의 사쿠라이 소우테키[桜井 宗的]를 공략하던 중 죽었다.
 전투 중에 죽은 것이 아니고 한 밤중에 망루에 올라가 피리를 불고 있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총사령관이 피리를 불다가 목에 화살을 맞아 죽었다는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 아니다. 장남은 그렇게 죽었다.[각주:2]


 둘째인 쿠니히사는 아마고 군()의 최정예부대인 신구우 당[新宮党][각주:3]을 이끌던 전투의 스페셜리스트였다.
 그러나 독불장군으로 주변과 다툼이 끊이지 않았기에 츠네히사가 죽은 후 조카인 하루히사[
晴久][각주:4]알력이 생겨 하루히사에게 죽음을 당했다. 츠네히사는 장남 마사히사가 죽은 뒤 둘째인 쿠니히사에게 가독을 물려줄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아비의 눈으로 보아도 일족의 두령으로 삼기에는 불안했다.


 셋째인 오키히사는 엔야[塩谷]라는 지역에 3천관(貫)의 땅을 하사받아 이 땅을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영지(領地)가 너무 적다고 투정부리기 시작하여 하라테 군[
原手郡] 700백관을 더 달라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아비인 츠네히사에게 반란을 일으키지만 패배하여 장인인 야마노우치 나오미치[山内 直通]가 지키는 빙고[備後] 카부토야마 성[甲山城]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2년 뒤에 자신의 미래를 자책하였는지 자살했다. 38세였다.


11(州)[각주:5]의 영주(領主)


 츠네히사는 84세에 죽었기에 센고쿠[戦国] 무장 중에선 장수한 편에 속한다.
 이즈모 슈고다이는 대대로 갓산토다 성()을 거성(居城)으로 삼고 있었으며, 일시 여기에서 쫓겨났던 츠네히사는 실력으로 슈고다이의 직책을 되찾아 이즈모 전역에 세력을 뻗쳤다. 그의 실력과 전투 방식은 굉장히 뛰어나 이즈모의 호족들을 계속해서 제압하여 자기 세력으로 편입시켰다.


 이즈모를 제패하자 이어오키[隠岐], 호우키[伯耆], 이나바[因幡]로 진출하였고 이와미[石見], 빙고[備後], 빗츄우[備中],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 아키[安芸], 하리마[播磨]영유(領有)하기에 이르렀다. 후에 모우리 모토나리에게 전부 빼앗기지만 츠네히사의 이런 파죽지세는 놀라울 따름이다. 호우죠우 소우운[北条 早雲]사이토우 도우산[斎藤 道三]이라도 지배한 나라[国]의 수에 있어서 츠네히사에겐 미치지 못했다.


 1537년. 츠네히사는 80세였다.
 장남 마사히사의 아들 하루히사는 24세가 되어 있었다. 츠네히사가 손에 넣은 11개국 중에서 빗츄우[備中], 미마사카[美作], 하리마[播磨]는 하루히사가 원정하여 전과를 올린 부분도 있었기에 하루히사의 실력은 그럭저럭 인정받고 있었다. 1537년 츠네히사는 은퇴하여 손자인 하루히사에게 가독을 물려주었다. 아마고 씨()의 흥망사(興亡史)에 있어서 이 시점이 가장 전성기였으며 빛나고 있었다.


 츠네히사는 동생인 요시카츠[義勝 – ‘시모츠케노카미 히사유키[下野守 久幸]라고도 한다]를 하루히사의 후견인으로 삼았다. 츠네히사는 누구보다도 이 동생인 요시카츠를 신뢰하였으며, 장남 마사히사가 죽었을 때 동생 요시카츠에게 가독을 물려주려고 했을 정도였기에 둘째 쿠니히사, 셋째 오키히사가 이런 아비의 마음을 읽고 불만이 생겨 이후의 행동에 영향을 끼쳤다는 말도 있다.


원정 대패 후의 죽음


 1539. 하루히사는 친척이나 중신(重臣)을 모아서,
 모우리 모토나리의 본거지인 아키[安芸] 요시다[吉田]의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을 공격하려 하는데 모두 어떻게들 생각하나?”

 하고 물었다. 츠네히사는 82세로 이때는 이미 병상(病床)에 누워있었기에 군의(軍議)의 자리엔 없었다. 단순한 노쇠(老衰)인지, 중풍(中風)과 같은 중병이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코오리야마로 공격'에 관해서 참가한 사람 중 가장 격()이 높다고 할 수 있는 츠네히사의 동생 요시카츠가,

 “좀 더 지켜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모토나리는 뛰어난 영걸이기에 그리 쉽게 이길 수 없습니다"
 며 반대하였다.


 그러나 하루히사는 듣지 않았고 아키[安芸] 요시다로 원정을 결정했다. 병상의 츠네히사는 요시카츠에게 이 회의의 결과를 듣고,

 “성급해서는 안 된다. 하루히사가 생각을 돌릴 수 있게 잘 말해주길 바란다
 고 말했지만, 하루히사는 역시 듣지 않았다.


 1540 9월 말.
 하루히사는 3만의 군세를 이끌고 아키(安芸) 요시다로 원정을 떠났다. 코오리야마 성을 포위한 아마고의 군세는 연전연패하였고, 다음 해인 1541 1월에도 대패(大敗)하여 도망치기에 이르렀다. 요시카츠를 시작으로 많은 전사자(戰死者)가 생겼을 뿐만 아니라, 아마고 휘하 13명의 유력무장이 오오우치 요시타카[
大内 義隆](모우리와 동맹)에게로 도망쳤다. 이 배반은 아마고에게 있어선 뼈아팠다.


 츠네히사가 이 결과를 듣고 어떠한 생각을 가졌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해의 11 13일에 갓산토다 성에서 죽었다.

  1.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지방장관(地方長官)인 슈고[守護]의 대리인(代理人). 보통 슈고는 쿄우[京]에 머물면서 막부의 정치에 관여하였고, 여러 지역을 가진 슈고일 경우 그 지역에 가지 않은 채 가신 혹은 친척에게 대신 그 지역을 통치시켰는데 그런 사람을 슈고다이[守護代]라 하였다. [본문으로]
  2. 이 글의 필자는 문약한 이미지를 강조하려는 인상이 있지만 역사상 마사히데는 아버지를 도와 아마고 씨의 전성기를 이끈 문무겸비의 무장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갓산토다성의 북쪽 기슭에 있는 ‘신구우[新宮]’라는 골짜기에 본거지가 있었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본문으로]
  4. 마사히사의 아들. [본문으로]
  5. 일본 지방단위인 국[国]의 다른 표현. [본문으로]

무라카미 다케요시[村上 武吉]

1604 8 22일 병사 72.

1533년 즈음(??) ~ 1604.

노시마[能島] 무라카미 씨[村上氏] 5대 당주. 가독(家督) 종가(宗家)에게서 가독을 빼앗았다. 세토 내해[瀬戸內海]의 수군(水軍)을 이끌었다. 이츠쿠시마 전투[厳島の戦い]에서는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편에 서 스에 하루카타[陶 晴賢]와 싸웠고 후에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지배 하에 들어가 치쿠젠[筑前], 부젠[豊前]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도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를 도왔다.








노시마[能島] 퇴거[退去]


 무라카미 타케요시가 선조 대대로 내려오던 수군성(水軍城) 노시마를 뒤로 하고 아키[安芸] 타케하라[竹原]로 자리를 옮긴 것은 1585년 가을이었다.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가 모우리 공략(빗츄우[備中] 원정)시에 3번에 걸쳐 항복을 권했지만 이에 따르지 않았고, 모우리 씨[毛利氏]가 히데요시에게 굴복한 뒤에도 히데요시의 사이카[
] 공략 요청에 응하지 않았으며, 1585 6시코쿠[] 정벌에도 협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자 히데요시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에게 명령하여 그를 본거지에서 쫓아낸 한 것이다.


 노시마[能島]는 쿠루시마[來島] 해협의 무시[務司], 나카토[中途]의 두 성()과 함께 노시마 무라카미 씨[能島村上]세토 내해를 항행하는 선박에게 세키제니[関銭 통행세]를 징수하기 위한 바다의 세관(稅關)이었기에, 이곳을 잃었다는 것은 해적중(海賊衆[각주:1])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된다는 의미가 되었다.


 더구나 3년 후인 1588 7 8일.
 히데요시는 해적 금지령을 발포하여 타케요시 부자(父子)가 이 금지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둘을 죽이려고 하였다. 다행히 이때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와 히데요시의 복심(腹心)인 토다 카츠타카[
田 勝隆]의 주선으로 사형은 면하게 되지만, 그 대신 아키[安芸] 타케하라에서도 쫓겨나 아카마가세키[赤間 시모노세키[]]부터 동쪽 - 즉 세토 내해에서의 거주를 금지 당한다.


 타케요시는 어쩔 수 없이 이요[伊予]에서 치쿠젠[筑前]으로 전봉()을 명 받은 타카카게를 따라 치쿠젠[筑前] 나지마[名島]로 거처를 옮겼고, 곧이어 부젠[豊前] 미노시마[箕島]로 이주 당한다. 부젠[豊前] 미노시마는 히데요시의 복심인 쿠로다 칸베에 요시타카[黑田 官兵衛 孝高]의 영지(領地) 위험 분자 타케요시를 칸베에의 감시하에 두고자 하는 히데요시의 노림 수였다.


 1591년.

 히데요시는 분로쿠의 역[の役[각주:2]]을 앞두고 타케요시를 나가토[長門] 오오츠 군[大津郡]으로 이주 시켰다. 이 곳은 모우리 씨[毛利氏]의 영지로 주어진 석고(石高) 1만석이라고 하지만, 예전에 본거지였던 세토 내해와는 멀리 떨어진 한국 동해(東海)측의 벽지(僻地)였다. 이럴 정도로 히데요시는 무라카미 타케요시라는 존재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재기(再起)를 꿈꾼 야망(野望)


 타케요시가 나가토 오오츠 군에서 아키[安芸] 타케하라로 돌아 온 것이 1598년 가을. 이해 8 18일에 타이코우[太閤] 히데요시가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타카카게는 그 전해인 6 12일 미하라 성[三原城]에서 병으로 죽었기 아키[安芸] 타케하라는 모우리 테루모토의 영지가 되어 있었다.


 이때 타케하라의 친카이잔 성[海山城]에서 살고 있던 타케요시는 아들인 모토요시[元吉]와 함께 이요[伊予] 노시마로 복귀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세토 내해 중앙부의 지배권을 회복하여 예전의 영광을 되찾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천하 형세는 그런 타케요시의 바램과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갔다. 히데요시의 죽음에 의해 생긴 절호의 기회를 모우리 테루모토가 놓쳤고, 그의 우유부단으로 인하여 천하는 수군을 적대시(敵對視)하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의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1600년 여름.
 천하를 판가름하는 전투를 눈 앞에 두고 타케요시의 몸은 장시간 잠들고 있었던 바다 무사의 피가 들끓어 오르고 있었다. 그의 계획은 무라카미 수군의 온 힘을 다해서 오오사카 만[大坂灣]으로 출동. 오오사카 만()에서 이세 만[伊勢灣]에 걸친 해역을 봉쇄해서 동군을 견제하고, 예전의 라이벌이었던 쿠키[九鬼] 수군[각주:3]과 협력하면서 서군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군의 총수(總帥) 모우리 테루모토는 그런 무라카미 수군에게 이요[伊予] 마사키 성[松前城] 공략을 명했다. 그 때문에 무라카미 수군 세력은 둘로 나뉘어 오오사카로의 출동은 빗츄우[備中] 카사오카[笠岡]의 무라카미 카게히로[[각주:4]]과 타케요시의 둘째 아들 카게치카[景親]가 담당하고, 타케요시 자신은 장남인 모토요시나 인노시마[因島] 무라카미 수군의 무라카미 요시타다[村上 吉忠] 등을 이끌고 이요[伊予] 미츠카하마[三津浜]로 출동한 것이다.


고난 속에서 죽다.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다.
 오오사카로 출동한 수군 부대는 거의 기대했던 만큼의 성과를 올렸지만, 이요[伊予]에 상륙한 무라카미 수군의 육전대(陸戰隊)는 부대장이며 타케요시의 장남 모토요시를 포함하여 후루미츠[古三津]에서 전멸 당하였다. 항복한다고 속임수를 쓴 적의 야습에 당한 것이었다.

우치노뉴우[內入] 겐세이 사[元正寺]에 있는 타케요시의 묘(墓).

 때문에 타케요시는 세키가하라[ヶ原]의 패배에 따라 영지(領地) 대부분을 잃은 모우리 씨를 따라, 스오우오오시마[周防大島]로 떠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주한 곳은 스오우오오시마 동부의 우치노뉴우[]였다. 한 때 일본 최강의 해상군단(海上軍團) 총수(總帥)로 천하인(天下人) 히데요시에게조차 공포심을 안겼던 바다의 효장()도 지금은 불과 120명의 부하를 거느린 늙은이에 지나지 않았다.

 패사(敗死)한 장남 모토요시의 뒤를 이은 것은 불과 7살의 손자 모토타케[元武], 둘째 아들 카게치카가 자신의 부하 300명을 이끌고 모토타케를 보좌했지만, 모우리 씨에게 하사받은 영지는 다 합쳐서 3000여 석에 지나지 않았기에, 농부가 되어 밭을 가는 것 말고는 생활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에 절망한 부하들은 계속해서 새로 취직할 자리를 찾아 섬을 떠났다.


 이런 고난 속에서 타케요시가 노시마의 바다를 추억하며 죽은 것은 1604 8 22.

향년 72(79세라는 설도 있다)였다.

  1. 일반적인 해적질을 목적으로 하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바다의 용병집단이라는 성격이 강했다. [본문으로]
  2. 임진왜란을 말함. [본문으로]
  3. 과거 모우리 가문[毛利家]과 오다 가문[織田家]이 다툴 때, 오오사카의 혼간 사[石山本願寺]에 병량을 반입시키기 위해 싸운 키즈 강 입구 전투[木津川口の戦い]에서 싸웠던 사이이다. 여담으로 두 차례 수전이 일어났는데, 1차는 무라카미 수군의 승리. 2차는 철갑선을 앞세운 쿠키 수군의 승리. [본문으로]
  4. 타케요시의 사촌. [본문으로]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1624년 7월 13일 병사(病死) 64세.

1561년 ~ 1624년.
어렸을 때부터 히데요시를 섬겼고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각주:1]]에서는 칠본창(七本槍[각주:2]) 필두(筆頭)로 이름을 드높였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는 동군(東軍)에 속하여 승리. 아키[安芸], 빙고[備後]를 하사받지만, 막부(幕府)에 의심 받아 히로시마 성[広島城] 무단 개수(改修)를 이유로 시나노[信濃] 카와나카지마[川中島]로 감봉(滅封)당했다.





마사노리의 인물상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각주:3]]가 쓴 [번한보(藩翰譜)[각주:4]]에 따르면 마사노리는,
'몹시 사납고 거칠어 사람 죽이는 것을 벌레를 죽이는 것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던가, '악행을 일삼아 아키, 빙고의 토민(土民) 등 모두 학정에 괴로워하여 맘 편할 날이 없었다'고 혹평을 하고 있다.
 확실히 그는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성격이기에 영민(領民)이나 가신(家臣) 중 겉으로는 뺀질 대면서 뒤로는 부정을 저지르는 사람이나 명령을 어기는 사람에게는 용서 없이 귀나 코를 베는 등 잔혹한 형벌로 다스렸다.

 하지만 그가 영내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세심하고, 공정한 토지조사[検地[각주:5]]와 토산품의 개발, 상업 무역의 진흥 등에 굉장히 적극적이었다. 또한 그가 개명(開明)적인 것은 히로시마 성(城) 아래에 기독교 교회를 설립하여 가신이나 영민중에 입신, 세례하는 사람이 매년 천명 가까이 이르렀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당시 마사노리는 예수회 선교사들 사이에서 굉장히 평판이 좋았다. 1609~10년의 [일본 예수회연보]에는,

우리 성교(聖敎)를 보호하는 신도(信徒)가 아닌 제후 중 제일은 아키, 빙고 양국(兩国)의 영주(領主)인 후쿠시마 타이후[大夫]님이다. 그는 예전부터 우리들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올해는 한층 더 명확히 그 뜻을 보이고 있다]
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자기 영토의 항구에 스페인, 포르투갈의 상선을 입항시켜 해외무역을 활발히 하려는 타산(打算)에서 생겨난 결과겠지만, 그가 개명적이며 상업활동에 열심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카이에키[改易[각주:6]]와 히로시마 성(城) 명도(明渡)

 1619년 6월 2일.
 바쿠후가 갑자기 마사노리를 카이에키한 것은 그가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각주:7]]를 어기고 수해(水害)를 입은 히로시마 성(城)을 무단으로 고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구실로 속으로는 그가 옛 토요토미[豊臣]의 유신(遺臣)이었다는 것이 바쿠후의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히고[肥後] 쿠마모토[熊本]의 카토우 가문[加藤家]처럼 진심으로 토쿠가와 가문에 공손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한 어차피 카이에키를 벗어날 순 없었을 것이다. 주목할만한 점은 카이에키가 전해졌을 때 취한 마사노리의 태도와 히로시마 성(城) 명도 때 가신들의 대응이다.

 1619년 6월 2일.
 마사노리는 카이에키를 전하는 사자(使者)에게 절을 하며,
 “내리신 말씀은 알겠습니다. 오오고쇼[大御所[각주:8]]가 살아계시다면 마사노리도 할 말이 있지만, 당대(當代[각주:9])에게는 이제 와서 할 말도 없습니다”
 라고 답했다고 한다.

 또한 마사노리의 가신들은 히로시마 성(城) 접수를 하기 위해 온 여러 장수들에게,
 “이 성은 주군 마사노리가 지키라고 명령받은 성이니 아무리 쇼우군[将軍]의 명령이라 하여도 건넬 수는 없소. 억지로라도 건네 받으려면 창으로 뺏어보시길”
 이라 말하며 농성(籠城)하다 죽을 각오를 선명히 하였다.

 그 때문에 접수사(接收使)는 에도[江戸]에 억류되어 있던 마사노리에게 이 뜻을 전하여 마사노리가 직접 쓴 편지[각주:10]를 얻어 겨우 개성(開城)을 승낙시켰다고 한다. 더구나 성을 건넬 때도 흐트러짐 없었고, 넓은 마루에는 혈판(血判)으로 된 농성을 맹세하는 무사 2000여명의 이름이 적힌 종이가 붙어있어 그 각오가 단단했는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성을 건넨 후 그러한 가신들은 모두 다른 다이묘들에게 초대되어 임관될 수 있었다고 하니, 마사노리가 평소부터 얼마나 가신들에게 존경 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

이봉(移封)후의 선정(善政)

 히로시마 49만 8천석에서 감봉 당한 마사노리는 시나노 카와나카지마 2만석과 에치고[越後] 우오누마 군[魚沼郡] 2만 5천석[각주:11]을 합한 4만 5천석이 주어졌다.

 1619년 7월.
 근신(近臣) 30여명을 이끌고 임지로 향하여 타카이노 촌[高井野村]에서 1624년 7월까지 6년 정도 지냈다. 죽은 것은 1624년 7월 13일. 향년 64세였다.

 마사노리는 이 곳에 오자마자 영내(領內)를 순시하며, 당시까지 햇볕이 잘 들거나 그늘이 어느 정도 드는지 또는 물길이 좋고 나쁜 것만으로 연공을 차등 부과하고 있던 농지에 생산력이 좋고 나쁨까지 고려한 새로운 토지조사[検地]를 실시하여 농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또한 오부세[小布施]의 하천 개수 공사를 하여 지금도 '타이후[大夫]의 천냥 둑[千両堤]이라는 사적이 남아있다. 즉 현재 오부세 정[小布施町] 우에하라[上原]에 있는 천냥 둑은 여기를 지나던 마츠가와 강[松川]이 몇 갈래로 나뉘어 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히던 것에 둑을 쌓아 흐름을 바뀌게 하여 피해를 없앤 둑이다.

 마사노리의 4만 5천석은 아들 타다카츠가 죽자 그의 우오누마 군(郡) 2만 5천석을 바쿠후에 반상하였고, 남은 카와나카지마 2만석도 그가 죽은 후 몰수당했다.

 '토쿠가와짓키[徳川実紀][각주:12]]에 따르면, 마사노리가 죽은 후 가신이 바쿠후의 검시관이 도착하기도 전에 유골을 화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째서 검시관을 기다리지 못했는지 그 죽음이 자살이라는 설도 있어 그의 마지막은 수수께끼이다.

  1. 1583년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와의 싸움. [본문으로]
  2. 시즈가타케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사.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3. 에도시대 중기의 정치가 겸 학자. [본문으로]
  4. 6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츠나토요[徳川 綱豊]가 고우후[甲府] 번주(藩主)였을 때, 아라이 하쿠세키에게 명해 여러 다이묘우[大名] 337개 가문의 유래를 모아 계보를 만든 것. [본문으로]
  5. 정확한 수확량을 측정하여 세금을 낼 양을 정함. [본문으로]
  6.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줄임. [본문으로]
  7. 에도 막부가 다이묘우[大名]나 토쿠가와 가문의 가신 등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법. [본문으로]
  8.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를 말함. [본문으로]
  9. 2대 토쿠가와 히데타다[德川 秀忠]를 말함 [본문으로]
  10. "활을 보라. 적이 있을 때는 중요하게 쓰이지만, 평화로운 시대가 되면 보자기에 쌓여 창고에 보관된다. 나는 활이다. 지금은 치세(治世)이니 카와나카지마[川中島]라는 창고에 보관되어 지는 것이다"...라고 했다 한다. [본문으로]
  11. 이 곳은 아들 타다카츠(忠勝)의 것 [본문으로]
  12. 토쿠가와 바쿠후의 공식 기록서. 조선왕조실록 같은 것이다. [본문으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 隆景]

1597 6 12일 병사(病死) 65


1533~ 1597.
모우리 모토나리
[毛利 元就]의 셋째 아들.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와 함께 모토나리, 테루모토[輝元]를 보좌. 히데요시[秀吉]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을 포위하자 교섭에 임했다. 분로쿠의 역[[각주:1]] 때는 조선에 출병. 벽제관[碧蹄館]의 싸움에서 명()나라 군과 싸워 이겼다. 토요토미[豊臣] 정권에서는 오대로(五大老)의 한 사람이었다.[각주:2]









모우리 가의 안녕을 지탱하는 인물


 권모술수로 가득 찬 센고쿠[戦国]시대에 죽을 때까지 모우리 종가(宗家)의 안녕을 생각하며 부친 모토나리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킨 것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뿐이었다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형 킷카와 모토하루와 함께 조카인 테루모토를 보좌한 명참모이기도 했다.


그의 생애는 크게 나누어 다음 셋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1) 코바야카와 가문을 상속하여 부친 모우리 모토나리 아래서 부사령관으로 활약했던 시기.

(2) 모토나리가 죽은 후 둘째 형인 모토하루와 함께 모우리의 중진(重鎭)으로 활약했던 시기.

(3)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를 섬기며 토요토미 정권의 정치가로 활약했던 시기.


 1582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츄우고쿠 대반전[大返[각주:3]]때는 히데요시 군을 추격하지 말자고 모우리 군에선 단 혼자서 주장하여 히데요시의 신뢰를 얻어 이로인해 후에 토요토미 정권의 중신(重臣)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1592년.

 분로쿠의 역에서는 6군의 사령관으로 1만여의 장병을 이끌고 활약했다.

 특히 벽제관의 전투에서는 이 여송(李 如松)장군이 이끄는 명()군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염전기운이 만연하여 의기소침해 있던 일본군의 사기를 높인 의미는 크다. 킷카와 모토하루가 걸핏하면 성급해졌던 것에 비해 타카카게는 형에 뒤지지 않는 용맹함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론 상황을 멀리 내다보는 주도면밀함까지 겸비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1595 8월.

 치쿠젠[筑前]의 나지마[名島]로 돌아와 있던 타카카게는, 후계자가 없던 모우리 테루모토에게 자신의 외조카인 하시바 히데토시(羽柴 秀俊 = 후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를 모우리 가문의 후계자로 앉히려고 하는 히데요시의 의도를 저지하여, 모우리 종가의 피를 지키기 위해 대신 히데아키를 자신의 양자로 맞이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히데요시에게 은거를 신청한 타카카게는 그 신청이 받아들여지자 코바야카와 씨의 본거지인 빙고[備後] 미하라[三原]에 은거하였다. 히데요시가 3만여석의 은거료(隱居料[각주:4])를 하사하여 타카카게의 공로를 치하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영내 정치(領內 政治)와 교양(敎養)


 루이스 프로이스는 그의 저서 [일본사(日本史)]에서 타카카게를,

사려 깊은 생각을 가지고 지역을 평온히 다스렸기에 일본에서는 드물게도 그 지역에는 오랜 기간 시끄러운 일이나 반란이 없다
라고 기록하고 있듯이 타카카게가 영내 통치에 선정(善政)을 베풀고 있었다는 것은 외국인의 눈에도 특필할 만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595 11월.

 미하라로 온 타카카게는 우선 은거할 성()으로 미하라 성()의 개수(改修)와 성 밑 마을(城下町)의 정비를 행했다.

 붓츠우 사[]의 재건 공사에서는손이 많이 가긴 하겠지만 앞을 내다봐서라며 절을 세울 땅의 선정부터 건축공사까지 세세히 지시를 내렸다. 또한 교량(橋梁)공사에 있어서도 건축 용재는 오래된 배를 재이용하는 쪽이 내구성이 높다고 하여 세토[瀬戸]와 온도[]에 계류되어 있던 아타케 선[安宅]을 모으도록 지시를 내렸다. 이렇듯 민정의 세세한 곳까지 신경을 쏟았다.


 말년의 타카카게는 무라사키노[紫野]의 다이토쿠[]의 오우바이 원[]의 암주(庵主)인 교쿠센 소우슈우[玉仙宗秀]에게 사사(師事)받으며 참선(參禪)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독실한 선종(禪宗)의 신자로 오우바이 원()을 시작으로 미하라의 베이산[米山[각주:5]], 쿄우신 사[], 다이젠 사[大善], 치쿠젠 하카타[博多]의 쇼우후쿠 사[聖福] 타카카게가 정재(淨財)를 한 곳은 여러 곳에 이른다.

 또한, 유학(儒學)을 좋아한 타카카게는 치쿠젠 나지마에 나지마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의 육성에 힘쓰는 등 문무 양쪽에 주목할 점이 많다.


타카카게의 죽음

베이산 사[米山寺]에 있는 타카카게의 묘(미하루 시[三原市]


 1597년 봄 즈음 부터 아프기 시작한 타카카게는 히데요시의 세번에 걸친 상경 요청에 대해서도 병 조리를 이유로 나중에 찾아 뵙겠다며 연기를 요청했다. 죽기 직전에는 코다마 나리히데[玉 就英]가독 상속이 아무 문제없이 행해지도록 테루모토에게 부탁했다.


 이것을 최후의 업무로 같은 해 6 12. 65세의 생애를 마쳤다.

 타카카게의 죽음은 정말 갑작스러운 일이었던 듯 유언도 남기질 못했다.

 [마치 자기에게 죽음이 갑자기 찾아온 듯이 앙천했다] 테루모토는 그 죽음에 놀라 모우리 가문의 대들보를 잃은 슬픔과 앞으로의 의지할 데 없는 불안함을 절절히 기록했다.


  3년 뒤에 일어난 세키가하라[ヶ原]의 전투에서 서군(西軍)의 총사령관으로 추대 받았으면서도 택해야 할 길을 잘못 택해, 영지 대부분을 잃은 것을 보면 타카카게의 죽음이 얼마나 모우리 씨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손실이었는가를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 임진왜란을 말함. [본문으로]
  2. 타카카게가 죽은 후에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본문으로]
  3. 노부나가[信長]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반란으로 인해 살해당한 혼노우 사[本能寺]의 변 때 통상보다 더 빨리 철수한 것을 이름. [본문으로]
  4. 은거한 사람에게 주는 쌀 또는 그 만큼의 이익이 나는 영지 [본문으로]
  5. 코바야카와 가문의 묘나 위패가 있는 곳 [본문으로]
미즈노 가쓰나리[水野 勝成]

1651 3 15일 병사 88.

 

1565 ~ 1651.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를 섬기지만 이에야스의 휘하를 떠나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 쿠로다 나가마사[田 長政] 등을 섬긴다. 1598년에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에 복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오오가키 성[大垣城] 공략에 참가. 오오사카 여름 전투[大坂 夏の陣]에서는 고토우 마타베에[後藤 又兵衛] 등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카츠나리[勝成]라는 인물

 

 미즈노 카츠나리의 부친인 소우베에 타다시게[兵衛 忠重]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모친인 오다이[於大]의 동생이다. 따라서 카츠나리는 이에야스와는 외사촌지간이다.

 카츠나리는 토우쥬로우[藤十郎]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청년시대에 부친 타다시게와 싸우고 집을 나가 15년 간에 걸친 방랑 끝에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를 목전에 앞두고 그제서야 이에야스의 주선으로 부친 타다시게와 화해를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7 23 부친 이즈미노카미 타다시게[和泉守 忠重]미카와[三河]의 치리후[池鯉鮒]에서 카가노에 야하치로우[加賀江 弥八郎]에게 죽음을 당했기에 가문을 이어 미카와 카리야[刈谷] 3만석의 영주가 되었다.

 

 그 뒤 오오가키 성 공략, 오오사카 겨울의 싸움[大坂 冬の陣], 오오사카 여름 전투[大坂 夏の陣]에서 무공[각주:1]을 세워 1615 7 19일에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郡山] 6만석의 성주가 되었고, 이어서 4년 후인 1619 7 15 빈고[備後]-아키[安芸] 49 8천석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카이에키[改易][각주:2]로 인해 공석이 된 빈고 후쿠야마[福山] 의 영주가 되었다. 영지(領地)는 빙고 국[] 남부(南部) 7개() 빗츄우[備中] 오다 군[小田郡], 시츠키 군[後月郡]을 합쳐 10만석이었다.

 

 이후 미즈노 카츠나리는 후쿠야마에 새로운 성을 쌓고 성 밑 마을[城下町]의 형성 및 영지 경영에 힘 썼다.

 가독(家督)을 장남 카츠토시[俊]에게 물려준 것은 1639년 윤 11 16일로 이때 휴우가노카미 카츠나리[日向守 勝成] 76, 미마사카노카미 카츠토시[美作守 勝俊] 42세였다.

 

시마바라[島原] 출진

 

 카츠나리가 마지막으로 전쟁터로 나간 것은 그가 독전관[軍監][각주:3]이 되어 시마바라 농민 반란을 토벌하러 출진했을 때이다.

 

 막부(幕府)의 명령을 받아 아들 미마사카노카미 카츠토시, 손자 이오리[伊織][각주:4] 이하 총 6344명의 장병을 이끌고 빈고 토모노츠[津]를 출항한 것은 1638 2 8일이었다.

 

 2 23히젠[肥前] 아리마[有馬]에 도착. 다음 날 24일에는 군사회의에 출석하여,

 이제와서 뭘 맘 편히 회의 같은 것을 하는가? 곧바로 군을 움직여 무조건 공격해서 성을 함락시켜야만 한다!”

 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그 때문에 여러 장수들은 26일을 총공격의 날로 정하였지만 하필이면 그 날 밤부터 비가 내려 26일 정오까지 계속 내렸기에 실제로 공격을 개시한 것은 다음 날인 27일이 되었다.

 

 이 때 오니휴우가[鬼日向][각주:5] 카츠나리가 이끄는 빈고의 군세는 나베시마 카츠시게[鍋島 勝茂][각주:6]의 사가[佐賀]의 군세와 치열한 선봉 다툼을 하여 미즈노 가의 전사자는 106, 부상자는 382명이었다고 한다.

 

 농민군이 농성하는 하라 성[城]27일과 28 양일간에 걸친 총공격으로 인해 함락되었는데 막부(幕府)의 전사자 1127, 부상자 7800명인데 비해, 3 2일 참수된 농민군의 목은 남녀 합쳐 3만7000명이었다.

 임무를 끝낸 카츠나리가 히젠 시마바라의 코우지로 항[神代港]항에서 뱃길로 빈고 토모노츠로 귀환한 것은 3 18일이었다.

 

영지 개발에 힘 쓴 여생(餘生)

 

 1639 9 9일.

 카츠나리는 에도 성[江戶城]에서 쇼우군[軍] 이에미츠[家光]알현하면서, 노령으로 인해 은거한다는 뜻을 밝혀 허락을 받은 후 다음해인 1640 1 3일에 마지막으로 이에미츠를 알현한 뒤 빈고 후쿠야마로 돌아왔다.

 

 원래대로라면 은거한 몸이기에 남들처럼 글이나 그림, 골동품 수집에 몰두했겠지만 그의 머리 속에는 시마바라 농민 반란군들의 참수당한 불쌍한 모습만이 남아있었다.

 기독교 반란이라고 하지만 실은 영주의 가렴주구로 인해 생긴 실정(失政)의 희생양이었다.

 실제로 걷어 들일 수 있는 것이 4만석에 지나지 않는 영토임에도 시마바라의 영주 마츠쿠라씨[松倉氏][각주:7] 막부에 10만석이라고 보고하였고 또한 바쿠후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여러 공사를 자청하여[각주:8] 생긴 재정적인 구멍을 농민들에게서 긁어 모았기 때문에 이러한 큰 난리가 난 것이다.

후쿠야마 시[福山市]에 있는 카츠나리의 묘(墓).

 

 그리하여 카츠나리는 정치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영지 개발과 산업 발달에 의한 백성 생활의 향상'임을 깨닫고 남은 여생을 하천의 치수공사와 신전(新田) 조성에 받쳤다.

 그는 이런 영지 개발에 가노(家老)[각주:9]인 코바 효우자에몬[木場 兵左衛門]과 나카야마 게키[中山 外記], 칸야 지부[神谷 冶部] 등의 유능한 부하를 행정관으로 발탁함과 동시에 스스로도 진두지휘하였고 공사를 할 때는 각 마을에서 매일 2000~3000명이나 농민을 동원하여 그들에게 하루 쌀 2.7Kg씩 인건비를 지급했다.

 

 이 사업은 카츠나리가 죽은 후에도 계속되어 그가 빈고에 들어왔을 때인 1619년에 10만석이었던 것그 후 79년이 지난 1698년 미즈노 가이 카이에키[각주:10] 당했을 때는 1323백석으로 증가하였다.

 은거 후 소우큐우[宗休]라는 호()를 칭한 카츠나리가 이 세상을 떠난 것은 1651 3 15.

 향년 88세였다.

  1. 여담으로 이 당시 카츠나리의 아들 카츠토시의 진영에는 미야모토 무사시[宮本 武蔵]가 속해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줄임. 마사노리의 경우는 시나노[信濃] 카와나카지마[川中島] 4만 5천석으로 줄었다. [본문으로]
  3. 군사(軍事)를 감독하는 직책 또는 사람. [본문으로]
  4. 후에 3대 번주(藩主)가 되는 카츠사다[勝貞] [본문으로]
  5. 용맹과감한 무장 혹은 남들이 세우지 못한 공적을 올린 맹장의 이름 또는 관도명[官途名 - 미카와노카미[三河守]나 휴우가노키미 같은 것[日向守]] 앞에 오니[鬼]라는 글자가 붙었다. [본문으로]
  6.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 直茂]의 적자. [본문으로]
  7. 선대(先代)는 츠츠이 가문[筒井家]의 우콘사콘[右近左近] 중 우콘인 마츠쿠라 시게노부[松倉 重信]....사족으로 사콘은 시마 사콘[島 左近]. [본문으로]
  8. 영지의 수입에 맞게 부역이 내려졌는데 시마바라번은 배 이상 부역을 자청했다. [본문으로]
  9. 번의 수상(首相) 격인 인물. [본문으로]
  10. 5대 번주 카츠미네[勝岑]가 2살의 나이로 죽어 후계자 단절로 인한 것이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