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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모토나리[毛利 元就]
1571년 6월 14일 병사(病死) 75세
1497년 ~ 1571년.
아키[安芸]의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 원래는 지방 호족(国人)으로, 오오우치 씨[大内氏]를 신종(臣從)하였지만, 스에 타카후사[陶 隆房]를 이츠쿠시마[厳島]에서 물리치고 스오우[周防], 빗츄우[備中], 빙고[備後], 이와미[石見]를 평정(平定). 이즈모[出雲]의 아마고 씨[尼子氏]를 멸망시켜 츄우고쿠[中国] 지방 10개 국을 지배. 북부 큐우슈우[九州]에서 오오토모 씨[大友氏]와도 싸웠다.
진두(陣頭)에 선 노장(老將)
모우리 모토나리가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가독을 큰 아들인 타카모토[隆元]에게 물려주고 은거한 것은 오오우치 씨(氏)를 멸망시킨 1557년으로 그의 나이 60세일 때였다. 그 이후 모우리 가문[毛利家]의 문서에는 타카모토의 후견인이라는 입장으로 서명(署名)을 함께 쓰게 되었다.
그러나 들불처럼 영지를 넓혀가 아키[安芸], 빈고[備後],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의 4개 쿠니[国]의 맹주(盟主 1)가 된 모우리 일족이다. 그로 인해 타카모토에게는 자신이 그것을 지키기엔 부담이 크다며 아비 모토나리의 편안한 은퇴 생활을 허용할 턱이 없었다. 정신차려 보니 은거는 커녕 타카모토의 책략에 말려들어 그 후에도 여전히 진두에 서서 전장(戰場)을 내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모토나리의 은거 선언
이 상태로는 모우리 가문의 융성(隆盛)은 전적으로 자기 혼자만의 위업이라고 인식되어, 세간에는 가독을 이은 타카모토의 위엄이 서질 않게 된다. 상대 성을 탈취하는 데는 쿠니[国]와 구니[国]간에 정신적인 우열이 크게 좌우한다.
타카모토도 이제는 35살. 지금 모우리 가문 필요한 것은 외부에서 보는 타카모토의 두령(頭領)으로서의 위엄이다. 모토나리는 굴지의 지장(智將)으로 물러날 때를 판단할 수 있는 위대한 현자(賢者)이다. 물러날 때는 지금밖에 없다. 더군다나 조금씩 피로도 느끼기 시작했다. 아키[安芸] 사토우[佐東]에라도 은거시켜 달라는 말을 꺼내 보자[毛利家文書]
이제는 완전히 쉬고 싶다는 이야기는 카츠라 모토타다[桂 元忠]에서 타카모토에게 전해졌다.
타카모토는 깜짝 놀라, 그거야 말로 모우리 가문을 망하게 하는 길이라고 침을 튀기며 되받아 쳤다. 우선 문서로 동생들이며 모우리 양천[毛利 両川 2]인 킷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에게 모토나리 은거 반대 의사를 전하고 이어서 모토나리에게도 다음과 같이 반론했다.
“저(타카모토)에게 모우리 가문을 짊어질 만한 역량 따위 있을 턱이 없으며 아버지가 은거하신다면 저 또한 함께 은거하겠습니다. 아키[安芸]와 빈고[備後]만으로도 어깨가 무거운데 거기에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라면 더 이상 무리입니다. 부친이란 살아 있을 때는 자식의 뒤를 돌봐주어야만 하며,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저도 두령(頭領)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만약 될 수 있다면 저도 은거해서는 코우츠루마루[幸鶴丸=테루모토(輝元), 5살]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싶습니다[毛利家文書]"
그러나 모토나리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 타카모토의 애절한 바램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타카모토는 최후의 결의문을 보냈다.
“아버님이 그렇게까지 은거를 하시고자 한다면 저 타카모토는 한 가지 결심을 하겠습니다. 즉 제가 죽으면 아버님도 은거하여 편안히 살고 싶다는 말씀을 못 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버님이 은거하시지 않고 가문을 다시리실 테니 모우리 가문도 무너질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억지를 부렸다. 이렇게 되자 아무리 모토나리라도 은거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타카모토가 단순히 제멋대로인 아들이었는지, 부친을 뛰어 넘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결국 모토나리는 '마음은 은거, 몸은 현역'이라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은거 소동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 채 스에 씨[陶氏] 잔당(殘黨)을 진압. 그 후에도 쉴 틈 없이 이즈모[出雲], 이와미[石見], 빗츄우[備中], 분고[豊後], 부젠[豊前], 치쿠젠[筑前] 등에서 모우리 일족(一族)의 분전(奮戰)이 계속 되었다.
1563년 8월 3일.
타카모토는 모토나리에게 원군을 요청받아 이즈모[出雲]로 향했다. 도중에 빈고[備後]의 와치 사네하루[和智 誠春]의 융숭한 대접을 받은 것이 문제가 되었다. 타카모토는 그 날 밤부터 격심한 복통(腹痛)이 찾아와 다음 날 아침 죽었다(향년 41세).
모토나리는 와치 씨가 타카모토를 암살한 것이라 의심하여 6년이라는 세월을 들여 와치 씨와 관계가 있던 아카가와 모토야스[赤川 元保] 일족의 뿌리를 뽑고 결국에는 와치 사네하루를 죽였버렸다. 그러나 후에 아카가와의 무죄가 판명되어 모토나리는 크게 후회했다.
이제는 어린 손자인 테루모토[輝元]의 뒤를 돌봐주지 않으면 안 되어 은거는 꿈도 꿀 수 없게 되었다.
모우리의 안태(安泰)를 기원하며
이 즈음 사방에서 영토 침입의 위협이 있어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북으로는 이즈모[出雲]의 아마고 요시히사[尼子 義久] 3.
동으로는 비젠[備前]의 우라카미 무네카게[浦上 宗景].
서로는 분고[豊後]의 오오토모 요시시게[大友 義鎮] 4.
남으로는 이요[伊予] 노시마 수군[能島水軍]인 무라카미 타케요시[村上 武吉] 등이었다.
모토나리는 건강에 대해서는 남보다 배는 더 신경을 쓰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계속 이어지는 전쟁 속에서 1566년 결국 간헐적으로 발병하는 학질에 걸려, 재발이 계속 이어지던 1571년 6월 14일.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에서 죽었다.
향년 75세.
묘소(墓所)는 아키[安芸] 요시다[吉田]의 토우슌 사[洞春寺]터에 있는데, 진기하게도 야마구치 현[山口県] 슈우난 시[周南市] 미츠오[三丘]에 '모토나리 이빨 사당[元就歯廟]'이 있다.
이것은 미츠오 성주(城主)였던 모토나리의 7번째 아들인 아마노 모토마사[天野 元政]가 부적으로 가지고 있던 모토나리의 이빨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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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치 요시타카(大内 義隆)
1551년 9월 1일 자살 45세
요시오키(義興)의 아들. 츄우고쿠(中国)-큐우슈우(九州) 7개국의 슈고(守護 1). 히젠(肥前)으로 출병(出兵)하여 쇼우니(少弐)씨(氏)를 멸하고 대륙 무역을 장악했다. 갓산토다(月山富田)성(城) 공략 실패 후 귀족문화에 빠져 중신(重臣)들의 반감을 사, 스에 타카후사(陶 隆房)가 모반을 일으키자 도망 끝에 자살.
이즈모(出雲) 원정의 실패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 이와미(石見), 아키(安芸), 빙고(備後), 치쿠젠(筑前), 부젠(豊前) 등의 7개국의 슈고로써 영화를 누리며 영지(領地) 곳곳을 쿄우(京)의 우아함으로 치장한 오오우치 요시타카.
그의 '말년'은 센고쿠(戦国) 무장의 자리를 버리는 요인이 된 이즈모(出雲)의 아마고(尼子) 토벌이 실패로 끝났을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쿄우라기산(京羅木山) 산의 본진에서 갓산토다(月山富田)성(城)을 내려다 보며, 세자(世子)인 하루모치(晴持 2)에게 말했다.
“강적 아마고님은 철벽의 요새(要塞)나 지성(支城)을 가지고 계셨다. 그 아마고 십기(尼子 十旗 3), 아마고 십새(十塞 4)도 예전만 못하다. 내일은 함께 갓산토다(月山富田)를 취하자꾸나”
그러나 공격할 때마다 실패하여 미토야 히사스케(三刀屋 久扶), 미사와 타케키요(三沢 為清), 야마노우치 타카미치(山内 隆通), 혼죠우 츠네미츠(本城 常光), 킷카와 오키츠네(吉川 興経) 등의 이즈모(出雲) 호족들이 배반하였다.
1543년 5월 7일. 요시타카와 하루모치는 각각 따로 배를 타고 도주(逃走)하다가 하루모치가 탄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세자를 잃게 되었다.
무사(武士)와 귀족(公家) 사이에서
야마구치(山口)로 돌아와서는 소우기(宗祇 5)가 저택을 보고 영감을 얻어,
池はうみ こずえは夏のみ山かな
츠키야마 저택은 거대한 연못과 연못을 파면서 생긴 흙으로 쌓은 큰 산이 있었으며, 한 편이 80간(間 6)에 이르는 토담과 폭 3간 7의 해자(垓子)를 둘러쳐 현실에서 격리된 풍아(風雅)의 공간이었다.
츠키야마의 저택에는 귀족(公家)이나 문인(文人), 묵객(墨客)이 전란(戰亂)의 쿄우토(京都)를 피해 방문하였고 요시타카는 미남미녀에 둘러 쌓여 와카(和歌), 한시(漢詩), 렌가(連歌), 학문(學問), 신도(神道), 불교(佛敎), 유교(儒敎) 등에 몰두하는 문(文)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또한 전쟁도 벌였다.
이요(伊予)를 공격하였고 빙고(備後)도 손에 넣었다.
스오우(周防)의 스에 타카후사(陶隆房 = 晴賢), 나가토(長門)의 나이토우 오키모리(内藤 興盛), 아키(安芸)의 히로나카 타카카네(弘中 隆包), 이와미(石見)의 토이다 타카모리(問田 隆盛), 치쿠젠(筑前)의 스기 오키츠라(杉 興連), 부젠(豊前)의 스기 시게노리(杉 重矩) 등의 슈고다이(守護代 8)가 요시타카를 대신해서 오오우치씨(氏)를 지탱했다.
요시타카도 1548년에는 종이위(従二位).
쇼우군(将軍)직보다 관위가 더 높아 9, 헤이안(平安 10)시대라면 우다이진(右大臣)에 해당하는 관위였다.
그러나 무장에게도 영지(領地)가 아닌 관위로 상을 내렸기에 무장들은 불만이 많았다 11.
사치는 백성들의 무거운 세금으로 이어졌다. [오오우치 요시타카 기(大內義隆記)]에는 “전쟁에 대한 준비도 없고 백성을 소중히 여기는 것 조차 잊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오오우치 씨(氏)의 미래를 걱정한 명장(名將) 스에 타카후사는 끊임없이 요시타카에게 간언(諫言)하며 사태를 여기까지 이르게 한 원흉인 사가라 타케토우(相良武任)를 몇 번이고 추방했다. 그러나 결국 아무것도 변함이 없어 타카후사는 오오우치 가(家)나 백성을 위해서 요시타카의 추방을 결심할 수 밖에 없었다.
[타카후사 모반]의 소문은 차츰 퍼져나갔다.
그런 와중에서도 1551년 8월 26일 츠키야마의 저택에서는 코우와카(幸若 12)가 행해지고 있었다.
다음 날인 27일.
남색(男色)을 즐기던 요시타카는 과거 스에 타카후사와 즐겼던 생각에 잠기며 미남(美男)인 야스토미 겐나이(安富 源内)와 함께 마당에 있었다.
오후 8시.
[스에 타카후사의 대군! 야마구치를 향해서 와카야마(若山)성(城)을 출발]이라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오오우치의 군세(軍勢)는 6천.
그러나 스기 오키츠라(杉 興連) 이외의 슈고다이는 모두 스에 쪽으로 돌아섰다.
요시타카는 방어하기 쉽게 츠키야마의 저택에서 호우센(法泉)사(寺)로 옮겼지만, 다음 28일 아침이 되자 남아있는 병사는 500으로 줄어 있었다.
이곳에서 자살할까도 생각했지만 사랑하는 오사이노카타(おさいの方)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그 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적자(嫡子) 요시타카(義尊)와 함께 나가토(長門) 센자키(仙崎)로 도망쳤다. 거기에서 큐우슈우(九州)로 도망치려 작은 배에 올랐지만 바다가 거칠어졌기에 나가토(長門)의 타이네이(大寧)사(寺)로 돌아왔다.
자신을 따라 온 것은 레이제이 타카토요(冷泉 隆豊)를 포함한 불과 60여명.
스오우(周防)국(国)은 토우다이(東大)사(寺)의 장원(莊園)가 있었던 곳으로, 이 즈음 토우다이사(寺)에서는 [스에 오와리노카미 타카후사(陶 尾張守 隆房)가 마음을 고치길]과 요시타카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비는 엄숙한 기도회가 열렸다고 한다.(東大寺古文書 13)
말세(末世)의 수행자(修行者)
요시타카는 둔세(遁世)에 대하여 일찍부터 동경하여 젊어서부터 선(禪)에 심취해 있었다.
아키(安芸)의 카나야마(銀山)성(城)을 한창 공격하던 중에 - 가까운 곳에 고명한 선승(禪僧)인 지큐우(次休) 소우스(蔵主 14)의 옛 터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산 속 깊이 들어가 결국 발견하고서는 거기에 대가람(大伽藍)을 재건(再建)하려고 결심할 정도였다.
또한 이즈모(出雲) 원정이 한창일 때조차 쿄우토(京都)에서 요시다 카네이에(吉田 兼家)를 초청하여 요시다(吉田) 신도(神道)를 전수받았다.
요시타카는 물질적인 풍요로움은 허무하며 마음은 신불(神仏), 와카(和歌), 한시(漢詩), 유우소쿠(有職 15), 귀족(公家)의 놀이에 몰두했다. 이를 [大內義隆記]에서는 ‘말세의 수행자’라 평했으며 이는 센고쿠(戦国) 무장에게 필요한 시의심(猜疑心)과 공격성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요시타카는 타이네이사(寺) 13대 이세츠 케이쥬(異雪 慶姝)가
“죽음을 앞두고는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라는 가르침을 듣자 요시타카는,
“뭐가 어떻게 되든 좋습니다. 지금은 마음 속 하늘에 달이 보입니다”
고 답하여 이세츠(異雪)의 가르침을 깨달은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고 한다.
죽기 전에 남긴 시는,
부처가 세상을 구하려고 이 세상에 오는 것 또한 이와 같다
討つ人も討たるる人も諸共に如露如電、応作如是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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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나카 유키모리[山中 幸盛]
1578년 7월 17일 모살(謀殺) 34세
1545년 ~ 1578년.
보통 시카노스케[鹿之助]로 알려져 있다. 아마고 카츠히사[尼子 勝久 1]를 옹립하여, 모우리 씨[毛利氏]에게 멸망 당한 주가(主家)의 부흥을 위해서 분투(奮鬪).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츄우고쿠[中国] 평정군(平定軍)을 따르며 하리마[播磨] 코우즈키 성[上月城]을 수비하지만,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의 공격을 받아 항복. 빗츄우[備中] 아이[阿井]의 나루터에서 살해당했다.
아마고 잔당(殘黨)의 성
1577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모우리 씨(氏)가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했고, 10월이 되자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은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가 하리마[播磨]로 출진하였다.
하리마[播磨]의 코우즈키성(城)은 하리마[播磨],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의 국경 근처의 전략적 요충지로 히데요시는 이 성을 점령하여 이곳에 아마고 씨(氏)의 잔당인 야마나카 유키모리를 입성시켰다. 그 잔당의 맹주로 옹립되어 있던 사람은 쿄우토[京都]의 토우후쿠 사[東福寺]에 출가(出家)해 있던 아마고 카츠히사였다.
코우즈키 성(城)은 천연의 요해(要害)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듯한 성이 아니다. 지금 성터를 돌아 보아도 아무런 특징도 없이 산등성이가 이어진 낮은 산이다. 지키기에 어려운 성이다.
모우리의 숙적이었던 아마고 군(軍)을 모우리 진영에 대비하여 최전선에 배치하는 것은 당시로선 상식적인 작전이었지만 얄궂기도 했다. 아마고 쪽의 장수 중의 하나인 타치하라 히사츠나[立原 久綱]는 이 성에 입성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하며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유키모리는 여기서 싸우는 것에 의욕을 보였다.
다음 해 1578년 4월.
모우리는 3만의 군세(軍勢)를 이끌고 코우즈키 성(城)을 포위했다.
유키모리 등이 의지하고 있던 히데요시 군(軍)은 이 때 오다 측을 배신한 하리마[播磨] 미키 성[三木城]의 벳쇼 나가하루[別所 長治]를 공격하러 가 있있다.
유키모리에게서 급보를 받자마자 히데요시는 미키 성(城) 공격을 중지하고,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와 함께 코우즈키 성(城) 동쪽 2킬로 지점인 타카쿠라 산[高倉山]에 진(陣)을 세웠다. 그러나 모우리 군(軍)의 포위망은 두터워, 이것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모우리쪽은 보급로를 끊어 성을 아사(餓死)시키는 작전을 세워서는 확실히 포위망을 좁혔기에 코우즈키성(城)은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졌다.히데요시는 아마고의 구신(舊臣)인 카메이 코레노리[亀井 惟矩]를 성 안으로 잠입시켜,
“포위망의 약한 부분을 돌파하여 빠져 나올 수는 없는가?”
하고 전했다. 그러나 이미 성 안의 쌀은 다 떨어지고 굶주림에 괴로워하고 있던 성병(城兵)의 전의(戰意)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히데요시는 서둘러 노부나가를 만나 전황(戰況)을 보고하며 코우즈키 성이 얼마나 위험에 처했는지를 호소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코우즈키 성(城)을 포기하고, 미키 성(城) 공략에 집중하라”
는 명령을 내렸다.
코우즈키 성(城)은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히데요시는 하리마[播磨]로 돌아와서는 6월 26일, 타카쿠라 산(山)의 진을 치우고 철수했다.
아이(阿井) 나룻터의 참극(慘劇)
유키모리 등의 아마고 잔당은 자신들이 버려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태까지 모우리와 아마고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던 코우자이 모토미치[香西 元通]도 함께 농성(籠城)하고 있었다. 유키모리는 모우리의 진영(陣營)에 사자를 보내어,
“이번 사건의 원흉은 코우자이 모토미치이니까, 모토미치의 배를 가르게 하는 조건으로 항복하겠다”
는 뜻을 전했다. 하지만 모우리 측은 이 요청을 거부하고 우선 맹주인 아마고 카츠히사의 할복(割腹)을 요구했다.
유키모리는 8살 연하의 카츠히사에게 절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사죄하면서 자살을 권했다.
“무운이 다하여 이제는 여기까지 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더 이상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저도 여기서 함께 배를 갈라야만 합니다만 다년(多年)간의 원한을 풀기 위해서 조금 더 이 생명을 빌리고 싶습니다.”
카츠히사는 이 대답을 듣고 답했다.
“법의(法衣)를 두르고 이름도 없이 일생을 끝냈을 터인 몸이면서, 자네들의 충성으로 한 성(城)의 주인으로써 아마고의 깃발을 세워 싸울 수 있어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네. 후회나 원망은 없다. 아니, 후회라고 한다면 아마고의 부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7월 3일.
카츠히사는 시 한 수 남기고 죽음의 자리에 앉았다. 26세였다.
카츠히사의 형 우지히사[氏久], 코우자이 모토미치도 성 안에서 배를 갈랐다.
1578년 7월 5일.
코우즈키 성(城)은 항복하였고, 유키모리는 포로가 되어 빗츄우[備中] 마츠야마[松山]에 있는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의 본진으로 호송되게 되었다. 그러나 킷카와 모토하루는 도중에 목을 베라는 명령을 내렸다.
모우리 가문[毛利家]의 중신(重臣) 아마노 모토아키[天野 元明]의 가신(家臣)인 쿠리야 히코에몬[栗屋 彦右衛門], 야마카타 사부로베에[山県 三郎兵衛]의 감시를 받으며, 빗츄우[備中] 타카하시[高梁]에 흐르는 타카하시가와 강에 있는 아이(阿井)의 나룻터까지 왔다. 유키모리는 배를 기다리며 나룻터 한 구석에 있는 돌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그 때 등 뒤에서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유키모리가 알아채는 것과 동시에 암살자는 베어왔다.
순간 유키모리는 눈 앞의 강(川)으로 뛰어들었지만, 이미 암살자의 칼은 유키모리의 어깨에서 등까지 굉장히 깊은 상처를 만들고 있었다.
암살자로 선택된 사람은 카와무라 신자에몬[河村 新左衛門]으로 카와무라도 따라 뛰어들어 물 속에서 유키모리와 뒤엉켰다. 후쿠마 히코에몬[福間 彦右衛門], 미카미 아와지노카미[三上 淡路守]도 카와무라를 돕기 위해 달려 들어 유키모리를 뒤에서 잡고 눌러서 죽였다.
7월 17일.
초추(初秋)는 이름뿐인 무더운 날이었다고 한다.
34세의 생애(生涯)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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