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무라 스미타다[大村 純忠]

1587 4 17일 병사(病死) 55


스미타다의 사인[花押]

1533 ~ 1587.

히젠[肥前] 히노에 성[日野江城]의 성주(城主) 아리마 하루즈미[有馬 晴純]의 아들. 세례명 '바르톨로메오'. 서로 싸우던 양 가문의 화해(和解)를 위해서 오오무라 스미사키[大村 純前]의 양자가 된다. 또한 영내(領內)를 방문한 선교사(宣敎師)에게 세례를 받아 일본 최초의 기독교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일본 최초의 기독교 다이묘우[大名]

 

 오오무라 가문[大村家] 18대 당주인 스미타다는 1563년에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 중에서는 최초로 기독교도가 되었다.

 사실 스미타다는 히노에 성주인 아리마 하루즈미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가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 純伊][각주:1]의 딸이었다.

  17대 당주 스미사키에게는 타카아키[貴明]라는 서자(庶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친의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타케오 성[武雄城]의 고토우 씨[後藤氏]를 잇게 하고, 여동생이 낳은 아이를 일부러 양자로 맞이하여 후계자로 하였다. 이 때문에 오오무라 가의 가신들은 분열되어 오오무라 가문 아래에 있던 열 여덟 가문이 타카아키를 따랐다.

 

 이 타카아키를 시작으로 스미타다의 정실(正室) 부인 오엔[おえん]의 친정이며 이사하야[諫早]에 본거지를 둔 사이고우 씨[西氏], 히라도[戸]의 마츠라 씨[松浦氏] 등 주변 영주(領主)에게 공격 받는 등 다툼이 끊이질 않았다. 거기에 류우조우지 타카노부[造寺 隆信]의 위협에서 영지(領地)를 지키기 위해서 아들들을 인질로 받치는 등 말년에 이르러도 스미타다의 기반은 굉장히 약했다.

 

 이 약소국의 안정을 꾀하고자 스미타다는 외국과의 무역에서 활로를 찾으려 하였고, 1569년 포르투갈의 배를 요코세[横瀬] 포구에 입항시켰다. 또한 다음 해 31살이 된 스미타다는 이 곳에서 선교사 토레스(Cosme de Torres)에게 세례를 받고 돈 바르톨로메오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주변 호족 연합은 이런 오오무라 씨의 이권을 뺏고자 요코세 포구를 공격하고 불을 질러 없애고, 스미타다도 일시적으로 거성에서 쫓겨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스미타다는 예수회 선교사, 포르투갈 상인과 끊임없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것이 영토 안전으로 이어진 것이다.

 

 스미타다가 세례를 결의한 배경에는 포르투갈에게 기대어 부와 무기를 얻고자 하는 흑심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차츰 기독교에 대해서 순수한 신앙을 가지기 시작한다.

 

적은 인원으로 성을 지키다

 

 그러한 스미타다의 후반생을 말해주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스미타다에게는 4명의 측실(側室)이 있어 세자인 요시아키(善前)도 측실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일부일처제로 측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스미타다는 이를 무시하고 측실을 계속 두었다.

 한 편 정실 오엔은 남편이 측실을 두고 있는 것을 싫어했다. 그녀는 처음엔 기독교에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 스미타다가 세례를 받은 지 7년 후에 기독교의 교리에 받아들여 세례를 받았다.

 이 때 38살이 되어있던 스미타다는 오엔과 기독교의 서약에 따른 결혼식을 하였다. 이는 오엔의 희망에 따라, 처는 오엔 한 사람이며 측실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결혼식이었던 것이다. 즉 기독교의 교리를 스미타다가 완전히 받아들인 것을 의미한다.

 

 1573.

 스미타다는 주변 호족 연합에게 거성인 산죠우 성[三城城]까지 공격당하는 생애에서 가장 큰 위기에 빠진다. 이때 선교사는 어떠한 때라도 자살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스미타다는 자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자신의 목에 지니고 있던 로사리오를 선교사와 교환하였다. 여기서도 신앙을 선택한 스미타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스미타다는 과감히 성을 나와 돌격하는 등 적은 인원으로 성을 사수하여, '산죠우 칠기 농성[三城七騎籠もり]'[각주:2]이라 일컬어지는 승리를 거두었다.

 

 다음 해, 스미타다는 6만의 오오무라 영민(領民)봉헌하여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또한 1580년 오오무라를 방문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에게 나가사키[長崎]와 모기[茂木]의 땅을 예수회에 기증했다. 나가사키는 이후 세계로 열린 항구로써 각광을 받게 된다.

 

하늘로 날려진 작은 새

 

 말년.

 스미타다는 사가[佐賀]의 류우조우지 타카노부의 압박에 괴로워하다가 결국 세자인 요시아키를 사가에 인질로 보내게 된다. 요시아키가 인질이 된 2년 후, 동생 두 명도 인질로 보낼 수 밖에 없는 굴욕을 맛보게 된다. 강압적인 타카노부가 시마즈[島津]-아리마[有馬] 연합군과의 싸움에서 패해 전사함으로 인해 스미타다가 겨우 안도의 한 숨을 내쉰 것이 51살 때이다.

 

 히데요[秀吉]가 시마즈 토벌의 군을 큐우슈우[九州]로 보낸 것은 15873월이었다. 오오무라 씨는 이 때 히데요시를 따르게 되는데 스미타다는 종군(從軍)하지 않고 아들인 요시아키가 대신해서 출진했다. 왜냐면 이때 스미타다는 후두암폐결핵을 앓고 있어, 몸이 말라 뼈와 가죽만 남아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정신력은 신을 받아 들여 아름답게 빛났다고 기독교 사료는 말한다.

 

 스미타다는 의사가 하는 미신(迷信)에 바탕을 둔 치료를 원치 않았고, 신부에게 천당에 대해서 계속해서 들려주길 원했으며 그것을 들으면서 대단히 만족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사카구치[坂口]의 은거 저택에서 조용히 기도하면서 죽음을 기다리던 스미타다는 영내(領內)구류(拘留)되어 있던 포로 200명을 석방했다. 마지막으로 새장에 있던 새를 하늘로 날려 보낸 4 17일. 반년에 걸친 투병 생활 끝에 55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다.

 

 히데요시가 기독교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기 2개월 전의 일이었다.

  1. 나중에 양아비가 되는 스미사키의 부친. [본문으로]
  2. 1500명을 상대로 7명의 무장과 70명의 여자들로 성을 지켰다고 한다. [본문으로]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 直茂)

1618 6 3일 병사(病死) 81

1538 ~ 1618

의형[각주:1]류우조우지 타카노부(龍造寺 隆信)를 섬기며 활약하지만 타카노부가 전사한 후 그의 아들 마사이에(政家) 휘하에서 히젠(肥前)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된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를 섬기면서 기반을 다져 후의 사가 번(佐賀)의 기초를 쌓았다.







익을 때까지 기다린다.


 류우조우지 가문의 가독(家督)을 가신인 나베시마 카츠시게(勝茂)가 상속하여 명실공히 [나베시마 사가 번()]이 성립된 것은 1607년이다.

 카츠시게의 아비인 나오시게는 이 해에 현역에서 물러났다. 자식이 한 사람의 몫을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70세였다. 그 후 81세까지 산다.


 그의 일생은 [기다림]의 인생이었다.
 무리해서 덜 익은 과일을 따지 않고 [익어서 떨어지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천하의 권력자나 조직이 류우조우지 가의 상속을 나베시마 씨()가 이을 수 있게 인정하기까지 나오시게는 류우조우지 타카노부가 전사한 후에도 23년이란 시간 동안 기다렸다. 암묵적으로 타카노부의 후계자는 나베시마 나오시게라고 대부분의 류우조우지 가신들이 인정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나오시게는 타카노부가 전사한 책임을 진다는 이유로 치쿠고(筑後) 야나가와(
柳川)에 틀어박혀 버렸다.

 류우조우지 일문(一門)이나 나베시마 가신단(家臣團)을 시작으로 히젠(肥前), 치쿠젠(筑前)등의 호족들이 복귀하라고 사정에 사정을 하고 나서야 사가 성(佐賀)에 가까운 카마치 성(蒲池)으로 돌아왔다.


 그는 과정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하는 인간이었다.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셋으로……말이다.


오래 산다는 것


 은거 후의 일이다.

 나오시게가 어느 마을을 지날 때였다. 부하 중 하나가,

이 마을에는 90살이 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정도로 오래 산 노인이니 만나서 축하해 주시는 것이 어떠하온지요?”
 하고 권했다.

 그러자 나오시게는 차갑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굉장히 불쌍한 인간이군. 오래 살았기 때문에 여태까지 얼마나 많은 자식이나 손자, 친한 친구나 지인들과 이별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그 기분을 생각해 보게. 오래 살았다고 해서 그 노인에게 정말로 축하할 일인지를

 나이를 많이 먹는 것에 존귀함과 경하스러운 일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얼마나 의미 있는 인생을 보냈는가가 더 가치가 있다 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이를 먹어가자 [죽음]에 임하는 생각도 엄격해졌다.

 사가 성()개수(改修)가 끝날 즈음. 카츠시게(사가 초대 번주)가 부친인 나오시게에게 성 안내를 한 적이 있다. 안내를 받은 후 옆에 있던 측근에게 살짝 말했다.

 “카츠시게는 적이 공격해 왔을 경우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하고 있지만 여차했을 경우 배를 가를 장소를 잊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할복을 무사의 미학으로써가 아닌 매일매일 생활 속에서 필연적으로 맞이하는 종언(終焉) 중에 하나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늙은 무장의 유머러스한 경고였다.


나뭇잎 그늘의 꽃


 [나베시마 카가노카미 토요토미노 아손 나오시게(鍋島 加賀守 豊臣 朝臣 直茂)]

 나오시게가 살아 있을 때, 은거소에서 자기 자신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만든 석탑에 쓰인 문자이다.[각주:2]


 나오시게는 히데요시의 신뢰가 두터웠다. 나오시게의 주군이었던 류우조우지 타카노부를 히데요시가 평했을 때,

 “확실히 타카노부라는 사람은 명장임에 틀림이 없다. 왜냐면 나오시게에게 국정(國政)을 맡겼기 때문이다. 사람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있다

 라는 의미의 말을 할 정도였다.

 류우조우지 사가 번()을 대신하는 나베시마 사가 번()으로 현실 상의 이행을 처음으로 공인한 것도 히데요시였다. 당시의 히데요시는 이미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오오사카 성(大坂)을 쌓았고 칸파쿠()의 위치에 올랐으며 그의 거처인 쥬라쿠테이()로 고요우제이(後陽成) 텐노우(天皇)를 초대하는 등 권세의 절정기였다. 히데요시가 54, 나오시게가 50세일 때이다.


 이해(1589) 1월에 나오시게는 종오위하(從五位下) 카가노카미(加賀守)에 임명받았다. 물론 히데요시의 주청(奏請)에 의한 영진(榮進)이다. 이때 그 때까지의 이름인 [노부나리(信生)]에서 [나오시게(直茂)]로 고쳤다. [나베시마 카가노카미 토요토미노 아손 나오시게(鍋島 加賀守 豊臣 朝臣 直茂)]의 유래인 것이다.


 이 문구를 돌에 새겨 남기려고 그가 결심한 때 - 천하는 토쿠가와 2대 쇼우군() 히데타다(秀忠)가 다스릴 때였다. 은혜를 입은 고인(故人)에 대한 마음을 세키가하라(ヶ原) 때 실현시킬 수 없었지만 이제 나이라는 것이 그를 명경지수(明鏡止水)의 경지로 이끈 것이다. 그것은 또한,

나뭇잎 그늘에 떨어져 있는 꽃을 발견했을 때, 마음속에 그리던 당신을 만난 듯한 기분이더이다

れに りとどまれる のみぞ びし 心地する

라는 [하가쿠레([각주:3])]라는 책 이름의 유래라고 알려진 사이교우(西行[각주:4])의 시구() 그 자체가 지장(智將) 나베시마 나오시게 일생의 좌우명이었던 것일 지도 모른다.

  1. 류우조우지 타카노부의 어머니가 나오시게의 아버지와 재혼하였다. [본문으로]
  2. 여담으로...그가 죽은 후, 그의 모습을 그린 그림에는 “鍋島加賀守'藤原'朝臣直茂”로 ‘토요토미(豊臣)’라는 본성대신 '후지와라(藤原)'라는 본성이 붙어있는데, 나베시마 씨(氏)는 본디 우다 겐지(宇多 源氏) 사사키(佐々木)씨(氏)의 후예이기에, 제대로 하려면 “鍋島加賀守'源'朝臣直茂”라 해야 한다. 이리 된 데에는 바쿠후의 눈을 의식한 결과이겠지만 뭔가 착오가 있었던 듯 하다. [본문으로]
  3. 무사도라는 것은 죽는 것을 깨닫는 것(武士道と云ふは死ぬ事と見つけたり)’이라는 문구가 쓰여진 사가 번(藩)의 무사 교육서. [본문으로]
  4. 1118년 ~ 1190년. 승려, 시인(和歌). [본문으로]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 宗茂]

1642 11 25일 병사(病死) 76.

 

1569 ~ 1642.

오오토모 씨[大友氏]의 중신 타카하시 죠우운[高橋 紹運]의 아들. 타치바타 도우세츠[立花 道雪]의 양자가 되었고,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야나가와[柳川] 13만석을 하사받았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서군에 속했기 때문에 카이에키[改易][각주:1] 당했지만 후에 옛 영지(領地)를 회복. 이후는 막부(幕府)에 충성을 다했다.

 

 

 





야나가와-시마바라[島原]의 난

 

 1620 8 7일.

 치쿠고[筑後]의 영주 타나카 타다마사[田中 忠政][각주:2]가 에도()에서 병으로 죽었다.

 향년 36세. 세자가 없었고, 형인 야스마사[康正][각주:3]오우미[近江]로 이동, 배치되었기 때문에[각주:4], 치쿠고[筑後] 야나가와가 주인 없는 빈 땅이 되었고, 8 20일에는 나이토우 마사나가[ 政長] 등의 막부(幕府)의 사자(使者)들이 야나가와 성[柳川]을 접수하러 왔었다.

 그 후 후임 다이묘우[大名]가 임명되기까지 치쿠고[筑後]의 행정은  미노[美濃] 부교우[奉行][각주:5] 오카다 젠도우[岡田 善同] 붕고[豊後] 후나이[府内]의 영주인 타케나카 시게요시[竹中 重義]히젠[肥前]시마바라[島原]의 영주인 마츠쿠라 시게마사[松倉 重政]가 위임 받았다.

 

 6개월간의 대관(代官)[각주:6] 지배 시기인 1620년 가을에 연공() 징수가 있었다.

 1655년에 쓰여진 시모츠마 군[下妻郡] 나카지마 촌[中島村]의 쇼우야[庄屋][각주:7] 이치로우베에[兵衛]의 기록에 의하면, 

붕고[豊後]마츠쿠라 붕고노카미 시게마사[松倉 豊後守 重政]은 자신이 담당한 곳 백성들이 (세금 내기가) 힘들다고 하여도, 집에 강제로 들어가서는 가마니에 담긴 것은 뭐든 싹 쓸어갔으며,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노오도리[蓑踊り] – (미노[蓑]란 비를 피하기 위한 짚 같은 것으로 엮은 도롱이이다. '미노오도리'란 사람에게 그 도롱이를 입히고 풀지 못하도록 줄로 묶은 상태에서 불을 붙여 고통으로 날뛰는 것을 춤이라 표현한 것으로 고문의 일종이다. – 역자 주)를 하게 만들었다. 우네메[采女]- 타케나카 우메노카미 시게요시[竹中 采女正 重義] 과 쇼우겐[監]- 오카다 쇼우겐 젠도우[岡田 監 善同]의 담당지역은 별로 심하지 않았고 느슨한 편이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히젠[肥前] 시마바라 성주 마츠쿠라 시게마사가 지배하고 있던 대관 지역의 연공 징수는 가혹했으며, 미납한 백성에게는 도롱이를 씌우고 거기에 불을 붙여 '미노오도리'를 시켰다고 한다


 시마바라 성주는 1616년부터 1630년까지 마츠쿠라 시게마사가 재임. 그 후 1638 4 12일까지 아들인 시게츠구[重次]가 이었다.

 그 사이 1637년 가을부터 1638 2 28일까지 아마쿠사-시마바라의 난[天草島原の乱]의 난이 일어났다.

 발발 원인 중 하나로 번주(藩主)가 기독교 농민에게 '미노오도리' '모쿠바세메[木馬責め][각주:8]', '꼬챙이 꿰기[さし][각주:9]', '지옥맛보기[地獄責め][각주:10]' 등의 고문이 행해지는 식의 학정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 난이 발생되기 16년 전에 이미 마츠쿠라 시게마사는 '미노오도리'라는 잔인한 방식으로 가혹한 연공 징수를 거두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미노오도리'는 기독교도를 박해하기 위한 행위로 여겨졌지만, 원래는 연공 미납 농민에 대한 처벌 행위였다. 위정자()를 선택할 수 없는 농민들의 슬픔이 있었던 것이다.

 마츠쿠라 시게마사, 시게츠구 부자(父子)에 의한 대관 지배가 길어졌다면, 한 때 기독교 농민이 많았던 야나가와 영내(領內)에서 '야나가와-시마바라의 난'이 있어났을 지도 모른다.

 

야나가와 재 부임과 시마바라 출진(出陣)

 

 1620 11 27.

 쇼우군[軍] 히데타다[秀忠]는 타치바나 무네시게에게 예전에 그의 영지(領地)였던 야나가와의 영주가 될 것을 명했다.

 세키가하라[ヶ原]에서 서군에 섰기 때문에 영지를 몰수당했던 무네시게는 여러 지역을 방랑한 끝에 이에야스[家康]를 섬기었고 그 후 무츠[奥] 타나쿠라[棚倉] 3만석을 하사받았다. 야나가와에는 20년 만에 가보는 것이었다. 나이는 이제 54세가 되어 있었다.

 

 부인이나 가신 106명을 이끌고 타나쿠라를 출발. 에도에 들린 후, 쿄우토[京都]를 거쳐 오오사카에서 배로 세토 내해[瀬戸 内海]를 배로 타고 서행(西行). 코쿠라[小倉]에서 오래만에 치쿠고 로[筑後路]를 남하. 1621 2 28일에 야나가와 성[梁川城]에 입성하였다. 과거 야나가와 성에서 물러날 때는 이별을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렸던 영민(領民), 마츠쿠라 시게마사의 대관 지배에 고통을 받았던 농민들은 무네시게의 야나가와 부임을 기뻐하였다.

 

 그러나 번의 재정은 시작부터 적자였고, 1636년 시점에서 번의 채무금은 5100 칸메(貫目)에 달하였기에, 같은 해 막부에게 5만 냥(3150 칸메)을 빌렸다. 거기에 다음 해인 1637년에는 시마바라로 출진해야 함에 따라 500 칸메가 더 들었다.

 하지만 무네시게는 영민에게 '미노오도리'를 시키는 일 없이, 번사(藩士)[각주:11]의 땅을 거두어 들이고 봉급으로 대신하거나, 아리아케[有明] 해안의 간척을 추진하여 재원의 증가를 꾀했다.

 

 같은 해인 1637년 가을.

 아마쿠사, 시마바라에서 대규모 기독교-농민 반란이 발생했다.

 막부에게 출진을 명령받은 아들 타다시게[忠茂][각주:12] 11 16일에 에도를 출발. 12 6일에 야나가와에 도착.

 다음 7일에는 5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배로 시마바라로 출진했다.

 다음 해인 1638 1 1일에 3회째의 하라 성[城] 총공격에서 막부 군()의 총 사령관인 이타쿠라 시게마사[板倉 重昌]가 전사. 막부는 총 사령관으로 노중(老中)[각주:13] 마츠다이라 노부츠나[松平 信綱]를 파견. 무네시게도 1 13일에 에도를 출발, 2 7일에 시마바라에 도착하였다. 72살이라는 늙은 나이에 참전이었다.

 

 2 28.

 바쿠후 군의 총공격으로 하라 성은 낙성.

 무네시게는 일단 야나가와로 돌아온 뒤 다시 에도로 가서 쇼우군[軍] 이에미츠[家光]에게 보고하였다.

 

 다음 해인 1639 4 3.

 가독(家督)을 적자(嫡子)에게 타다시게에게 물려주고, 은거하여 '류우사이[斎]'라는 호를 칭했다. ()를 좋아하여, 다인(茶人)들과의 교류를 즐겼다.

 '류우사이 공의 말씀 기록[公御咄之]'이라는 29개조의 유훈을 남기고, 1642 11 25일. 시모가야[下谷]의 야나가와 번 저택에서 생애의 막을 내렸다. 76세였다.

  1.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삭감. [본문으로]
  2.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후 숨어있던 서군의 주모자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를 잡은 타나카 요시마사[田中 吉政]의 넷째 아들. [본문으로]
  3. 요시마사의 둘째 아들. 야나가와 번[柳川藩藩)의 지번(支藩) 후쿠시마(福島) 3만석의 번주(藩主). [본문으로]
  4. 이곳 저곳 분산된 곳을 합쳐 2만석. [본문으로]
  5. http://valhae.tistory.com/script/powerEditor/pages/%EC%97%90%EB%8F%84%20%EC%8B%9C%EB%8C%80%EC%97%90%20%EB%AF%B8%EB%85%B8[%E7%BE%8E%E6%BF%83]%EB%8A%94%20%EC%A0%84%EB%9E%B5%EC%A0%81%20%EC%9A%94%EC%B6%A9%EC%A7%80%EB%A1%9C%20%EC%9D%B8%EC%8B%9D%EB%90%98%EC%96%B4%20%EB%A7%89%EB%B6%80%EC%9D%98%20%EC%A7%81%ED%95%A0%EC%A7%80%EC%9D%B8%20%EC%B2%9C%EB%A0%B9(%E5%A4%A9%E9%A0%98)%EC%9D%B4%20%EB%A7%8E%EC%95%98%EA%B3%A0,%20%EA%B7%B8%EB%9F%B0%20%EC%A7%80%EC%97%AD%EC%9D%98%20%ED%96%89%EC%A0%95%EC%9D%84%20%EB%A7%A1%EC%95%98%EB%8B%A4. [본문으로]
  6. 영주를 대신하여 그 지역의 행정을 맡아 봄. [본문으로]
  7. 마을의 대표자 겸 세금 징수나 행정을 맡는 한편 마을 주민의 요청을 대변하기도 했다. [본문으로]
  8. 몸통이 삼각형으로 된 다리를 붙인 말 형태의 고문틀에, 양 다리에 돌을 매단 사람을 앉혀서 그 무게가 가랑이 사이에 집중되게 하여 고통을 주는 고문법, 현재는 SM플레이 등에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9. 왈라키아 공(公) 블라드 체페슈가 오스만투르크의 전쟁 포로들에게 행했다고 하는 그 고문. [본문으로]
  10. 유황이 들어간 뜨거운 물을 몸에 뿌리는 고문. [본문으로]
  11. 번에 소속된 무사. 지금으로 말하면 지방 공무원. [본문으로]
  12. 무네시게의 동생 타치바나 나오츠구[立花直次]의 넷째아들. 즉 양자. [본문으로]
  13. '로우쥬우'라고 읽는다. 에도 막부의 수상 격으로 4~5명이 1개월 당 한 명씩 돌아가면서 정무를 맡았으며, 중요한 일은 전원의 합의에 따라 결과를 도출했다. [본문으로]

류조지 다카노부(龍造寺 隆信)

1584 3 24일 전사(戰死) 56.

1529 ~ 1584.

류우조우지씨() 19당주(). 쇼우니()()를 물리치고 강대해져,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과 자주 다투었다. 히젠(肥前)을 평정한 후 치쿠고(筑後), 히고(肥後)에도 침공했다. 오오토모 씨()의 쇠퇴 후, 시마즈(島津)-아리마(有馬) 연합군과 [오키타(沖田) 외길()의 전투(沖田)]에서 패하여 죽었다.








출가(出家)환속(還俗)


 류우조우지 타카노부는 고속도로에서 역주행하는 자동차와 같은 인생을 보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더구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말년에 접어들어 가독(家督)을 물려주고 승복(僧服)을 입고서는 하루 종일 염불을 외며 평온한 죽음을 맞이하여 조용히 일생의 막을 내린다. 이러한 인생은 많은 사람들이 선망(羨望)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명(兒名)이 쵸우호우시마루(長法師丸)였던 타카노부는 7살의 나이에 출가했다. 현재의 초등생부터 고등학생 시대를 [엔게츠(円月)]라는 이름으로 절에서 보냈고 18살 때 환속했다. 인생에서 가장 학식이 몸에 붙는 나이다.
거기서 고승(高僧)이 되기 위해 불문(佛門)의 길을 일생 걸었다면 특필할 만한 인생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50세를 넘어서부터 교만(驕慢), 잔인(), 비도(非道), 주색(酒色)에 빠짐 이라는 비난의 문구(文句)가 그를 표현하는 말이 되었다.


여생의 유무(有無)


 류우조우지 가 중흥(中興)의 시조로 숭상받는 타카노부의 증조부 이에카네(家兼)는 막 태어난 타카노부를 보자마자 [영리]하다고 느꼈다. [구족(九族)극락왕생할 수 있을 정도의 공덕을 쌓을 것]을 바라며 그를 출가 시켰다고 한다.


 그랬던 증조부가 이번엔 죽음을 앞두고,
 
그 애는 대기(器)이니 반드시 류우조우지 가문을 크게 만들 수 있는 인물이다. 환속시키거라

 라는 유언을 남겼다. 본인의 의사는 상관 없었다.


 거기에 19살의 나이로 무라나카(村中) 류우조우지 가의 미망인과 결혼을 하게 되어(宗)의 당주가 되었다. 즉 부설되어 있는 레일 위를 달렸을 뿐이다. 타카노부가 가독을 적남(嫡男) 마사이에(政家)에게 물려주고 은거를 시작한 것은 1580년으로 52세의 나이였다.

 사가(佐賀)()에서 남쪽 약 2Km정도 떨어진 수코 성(須古)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자신의 힘으로 6년 전에 히라이 씨(平井)에게서 빼앗은 성이었다.

 다섯 주() – 히젠(肥前), 치쿠고(筑後), 히고(肥後)의 반치쿠젠(筑前) 아홉 군(), 부젠(豊前) 세 군() – 의 태수로 경외(敬畏)받으며 여생을 수코성()이 있는 시라이시(白石) 평야에서 보낼 예정이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그의 향년은 56.
 
표면상의 은거 생활은 5년이다. 보통 사람의 노후로 본다면 그럭저럭 괜찮은 시간이지만 타카노부의 최후는 전쟁터에서 적에게 죽음을 당한 것이다. 1584 3월이었다.


 공격 당하는 성을 관으로 삼아 죽은 것은 아니다.
 
출진 하지 말아달라는 충신들을 뿌리치고 성을 출발. 시마바라(島原) 반도(半島) 군세를 진출시켜, 시마즈-아리마 연합군을 상대로 한 전투였다. 더구나 주군을 안전 지대로 이동시키려 하는 가신들의 진언을 무시했던 결과로써 패하여 죽은 것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몸에 신경을 쓰지 않은 결과 - 비대해진 몸으로 여섯 명이 메는 가마를 타고 지휘를 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위풍당당한 총대장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던 듯하다.

 낮은 언덕에 본진을 설치하고 의자에 앉아서 전황이 불리하다는 소식이 전해져 와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역시 센고쿠 시대에 큐우슈우(九州)에서 시마즈, 오오토모(大友)씨와 3강을 이룰 정도의 강심장이었다.


 그러나 후방의 소란을 아군 병졸들의 싸움이라고 착각을 한 것을 보면 그의 운은 여기서 끝이었다고 할 수 있다.


타카노부의 최후


 눈 앞에 갑자기 나타난 적장을 보고 나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을 수 밖에 없게 된 타카노부는 인생의 마침표를 찍을 때가 왔음을 깨달음과 동시에 어렸을 때의 쌓은 학식이 되살아났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적장에게 대장의 목을 베는 작법을 아느냐고 물었다. 뜬금없는 말에 적장이 대답을 주저하자 타카노부가 말했다고 한다.


 “홍로(紅爐[각주:1]) 위에 내린 눈 한 송이


 활활 타오르는 화로 위에 떨어진 눈 한 송이가 눈깜짝할 새에 사라져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죽을 때가 되어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저 세상의 염라대왕은 엄격했다.

 자아 도취를 용서치 않았다. 폭주 끝에 죽음은 비참했다.

 타카노부의 목이 사츠마(薩摩) ()에서 치쿠고(筑後)의 에노키()의 나루터까지 보내져 왔다. 돌려줄 테니 여기까지 받으러 오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타카노부의 한 팔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던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 直茂)는 그 목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타카노부의 체면을 손상시킨다는 이유였다.

 그의 목은 히고(肥後) 타카세()의 간교우(願行)()로 보내졌다.


=======================이하 역자 가필======================================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패배한 장수의 목은 재수가 없으니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한다.

(1)당시 타카노부의 분노를 사서 삐져있었던 나베시마 나오시게였기에 그런 말을 했다는것.

(2)목을 건네고 받을 때 시마즈의 사자에게 자신들의 약점을 알리지 않기 위함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타카노부의 목은 위의 이야기 외에, 타카노부에게 원한이 깊었던 어느 호족의 미망인[각주:2]에게 전해져 복수의 대상이 되었다는 이야기와 결국 역시 재수없다고 여긴 시마즈 쪽이 그냥 강물에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1.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져 붉게 달거진 화로. [본문으로]
  2. 아카호시 가문(赤星家)의 미망인. 타카노부는 인질로 와 있던 그녀의 14살난 손자와 8살난 손녀를 십자가에 메달아 찔러 죽였다. [본문으로]
마쓰라 시게노부[松浦 信]

1614 5 26일 병사(病死) 66

 

1549 ~ 1614.

부친 타카노부[隆信]와 함께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큐우슈우[九州] 정벌군을 따랐으며, 조선의 역[朝鮮役][각주:1]에서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의 수군 부대로 출진.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동군에 속하여 영지(領地)히라도[戸]이키[岐] 등도 영유(領有)하며 초대 히라도[平戸藩] 번주(藩主)가 되었다.





 

 

 

적남(嫡男)의 갑작스런 죽음

 

 히젠[肥前] 히라도 번주 마츠라 시게노부는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의 다음 해인 1601년에 53세에 은거하여, 적남(嫡男) 히사노부[久信]에게 히라도 번()을 잇게 한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 쉴 수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쟁때 시게노부는 아들 히사노부를 쿄우토[京都] 후시미 성[伏見城]을 수비하도록 출진시켰지만, 정작 자신은 현해탄에 배를 띄어놓고서는 거의 마지막까지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각주:2], 전쟁이 끝난 뒤 토쿠가와 가문[家]에게서 어떠한 처벌을 받을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각주:3]

 

 그러나, 사태는 급변하여 1602년 가을 갑자기 후시미[伏見]의 마츠라 저택에서 번주 히사노부가 급사(急死) 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시게노부의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이 히사노부의 급사에 관하여 번의 기록인 『가세전(家世伝)』에는, '후시미(伏見)에서 치질에 걸려 8 29일 죽다. 향년 32'라고 쓰여져 있으며 또한 다른 가보(家譜)에는 '할복'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주저하면서 어느 쪽에 붙을지 망설이던 부친 시게노부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토쿠가와 가문에 대한 충심을 표현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또는 며느리이며 히사노부의 부인 쇼우토우인[松東院]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부인은 마츠라 씨[松浦氏]와 오오무라 씨[大村氏]가 서로 다투었던 시기에 양 가문의 화해를 하기 위해서 마츠라 가에 시집 온 기독교 다이묘우[大名]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 純忠]의 딸로 이름은 소노였다.

 소노는 이미 세례를 받았으며(세례명: 도나 메시아), 시집올 때 배교(背敎)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었다.

 부인이 된 쇼우토우인은 첫째 아들을 비밀리에 세례 받게 하였고, 히사노부의 세례마저 준비하고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렇게 열심인 모습은 곧바로 선교사들간에 널리 알려져,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의 부인 가라샤 타마코[ガラシャ 玉子][각주:4]와 함께 칭송받았다. 또한 시아버지인 시게노부의 계속된 개종 요구에도 신을 버리는 것 보다 천 번의 죽음을 택하겠습니다라고 저항하며 신앙을 지켰다고 한다.『프로이스의 일본사[フロイスの日本史]』

 

 이러한 사정이 번주 히사노부의 할복에 영향을 끼친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시게노부는 히사노부가 죽은 다음 해인 1603년 손자인 타카노부[隆信]를 데리고 순푸[駿府]로 가서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를 알현하고나서야 3대 번주로 인정을 받아 겨우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거성[居城] 카메오카 성[城] 불타오르다.

 

 3대 번주 타카노부의 뒤를 봐주면서 주로 남만무역(南蠻貿易)[각주:5]에 전념했다.

 이미 부친 타카노부[隆信][각주:6] 때부터 '하비에르'나 '루이스 프로이스'를 히라도에 초대하는 등 무역 기반을 닦아 놓고 있었다.

 

 그런 노력 덕분에 1609년에 네덜란드의 배가 처음으로 히라도에 입항.

 1613년에는 영국 배도 입항하여 성 밑 마을[城下町]상관(商館)을 설치하였다.

 특히 네덜란드는 일본 무역의 거점이 1641년에 나가사키[長崎][각주:7]로 이전되기 전까지 30여 년간 히라도에서 사키카타 쵸우[崎方町]부두(埠頭)를 만들고 상관이나 주택을 계속 세워가며 동양 무역의 일대 거점으로 삼았다.

 이 즈음 히라도에는 남만인(南蠻人)[각주:8]들에 더해 수 많은 상인들이 모였기에 서국(西国)[각주:9] 제일의 상업 도시가 되어 번영의 극을 달했다.

 

 그러나 1613 10 3일 밤.

 시게노부는 갑자기 자기 손으로 1599년에 새로 축성한 거성 카메오카 성[亀岡城][각주:10]에 불을 질러 무너뜨렸고, 다음 해인 5 26일에 의사 타케노 소우후우[武野 宗楓]의 간병을 받는 중 66세의 생애의 막을 내렸다고 한다.『가세전[家世伝]』

 

 이 사건은 자살한 아들 히사노부의 망령에 괴로워하다 미쳤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사건의 진상(眞相)은 무역 이익을 독점하던 것과 나아지지 않고 있던 기독교 금지령에 있지 않았을까?

 혹독한 기독교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히라도 번[平戸藩]에는 이키츠키[生月] 등 영내(領內)의 섬들에 많은 신도들이 숨어있었고, 쇼우토우인과 그 주변 인물들은 여전히 신앙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이에야스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어 히라도 번 계속해서 압력을 받았을 것임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시게노부는 남만무역의 유지와 기독교 개종의 유예(猶豫)를 조건으로 거성을 불에 태워 없애고 자신의 생명을 바쳤던 것이다.

 

 하극상의 센고쿠 시대부터 근세 초기의 혼란기까지 살아 남은 마츠라 시게노부.

 기독교 덕분에 철포(), 오오츠츠[大筒][각주:11]나 막대한 무역 이익을 손에 넣어 히젠[肥前] 서부(西部)의 패권을 쥘 수 있었지만, 그 기독교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이나 가신, 히라도의 상징이었던 카메오카 성[亀岡城]까지 잃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이쿄우 사[最教寺]에 있는 시게노부의 묘 - 히라도 시[平戸市]


  1. 임진, 정유의 난을 말함. [본문으로]
  2. 마지막에 동군에 서게 됨. [본문으로]
  3. 가독 상속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우선 용서를 받았다고 볼 수 있었기 때문. [본문으로]
  4. 가라샤는 세례명, 타마코는 이름. [본문으로]
  5. 유럽 국가들과의 무역을 말함. [본문으로]
  6. 시게노부의 손자와 부친의 이름이 똑같이 타카노부(隆信)이다. [본문으로]
  7. 에도 시대에는 네덜란드만이 나가사키에서 일본과 무역을 할 수 있었다. [본문으로]
  8. 유럽인들을 말함. [본문으로]
  9. 쿄우토[京都]를 기준으로 서쪽 지역을 지칭. [본문으로]
  10. 보통 히라도 성[平戸城]으로 불린다. [본문으로]
  11. 대포를 말한다고 하지만, 구경이 큰 철포를 지칭하기도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