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고쿠 시대[戦国時代]의 정신구조인 ‘하극상(下剋上)’이 “아래(下)가 위(上)를 이긴다(剋)”는 주종역전이라는 것을 본 작품에서도 거듭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무가사회(武家社会)의 주종관계(主従関係)란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리고 그 관계가 어떻게 변해갔는가? - 정신적인 면에 주안을 두며 살펴보자.

 중세의 주종관계의 큰 특징 중 하나가 주인을 바꿀 수 있다는 점에 있었다. 맘에 안 들면 주인을 바꾸면 되는 것이다.
 카니 사이조우 요시나가[可児 才蔵 吉長 - 1554년~1613년]’는 그 대표적인 무사라 할 수 있다. 그의 과거을 살펴보면 엄청나다. 사이토우 타츠오키[斉藤 龍興][각주:1],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오다 노부타카[織田 信孝][각주:2],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 삿사 나리마사[佐々 成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로 주군을 바꾸었다. 센고쿠의 시대를 질주한 사나이로서 떳떳한 인생이었을 것이다. 카니 사이조우에게 “아래가 위를 먹어 치운다”는 것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위를 존중하지 않는 정신구조는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종관계가 어떻게 가능하였을까?
 막부(幕府)를 연 ‘쇼우군[将軍]’은 휘하에 가신(家臣)을 두었다. 이를
고케닌[御家人]이라 한다. 이 고케닌은 쇼우군에 충성을 맹세하는 대신에 ‘지두(地頭-じとう)에 임명 받았다. 이는 어느 일정한 지역의 지배권을 인정받는 것이다. 이 지배권을 침해 당할 때에는 쇼우군이 나서서 권리를 부활시켜 주었다. 이것이 ‘본령안도(本領安堵)’. 쇼우군에게서 받은 ‘어은(御恩)’이다.

 대신 고케닌은 쇼우군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것이 ‘봉공(奉公)’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출진하였다. 목숨을 바쳐 자기 영지[本領]를 안도 받으려 노력하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주종관계 즉 ‘어은(御恩)과 봉공(奉公)’은 어디까지나 상호계약이었다는 것이다. 쇼우군이 ‘어은’을 해주지 않는다면 ‘봉공’할 필요는 없었다. 정신적인 ‘절대복종’이 아니라 ‘give and take’에 가까웠던 것이다. 카니 사이조우라면 ‘어은’을 받지 못했기에 당신에게는 ‘봉공’할 수 없습니다 – 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정신을 가졌던 고케닌은 발생 당시 숫자가 얼마큰 있었을까?
 1185년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가 요시츠네[義経]를 토벌하기 위해 모은 15개 쿠니[国]의 고케닌은 2096명이었다고 한다. 즉 ‘무사(武士)’는 1 쿠니[国] 당 130여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외로 적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즈음의 전투가 대군을 이끌고 자신의 경제력(병력동원력)을 과시하며, 실제의 전투는 일기토[一騎打ち]에 의한 것이었기에 전투의 스페셜리스트는 그렇게까지 필요하지 않았던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더 말하자면 병기가 되는 철(鉄)이 귀중품이었기에 일반병사들에게까지 병기가 충분히 전해지지 않았던 것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은 무사의 본거지라고도 할 수 있는 동국(東国)에서 이 숫자인 것이다. 이외로 무사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서서히 소빙하기가 무가사회(武家社会)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다.
 1230년, 여름에 이상기온이 찾아왔다. 6월9일에
무사시[武蔵] 카네코 장[金子荘]과 미노[美濃] 마키타 장[蒔田荘]에 눈이 내렸다. 이 보고를 받은 카마쿠라 막부[鎌倉幕府]는 동요했다. 이상기온은 곧바로 벼농사의 괴멸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어서 7월에 들어서자 여러 지역에 서리가 내렸다.
 ‘이본탑사장첩(異本塔寺長帳)[각주:3]’에 따르면 “일본 전국이 겨울과 같아 매우 추웠다”는 상태였던 것이다. 쿄우토[京都]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아사자가 속출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확실히 비상사태였다. 이때 막부는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할 장치를 만들었다. 이즈[伊豆]와 스루가[駿河] 지역의 예를 살펴보자. 막부가 보증하니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빌려주도록 도소우[土倉]에 명령하였다. 만약 백성이 쌀을 변상하지 못하더라도 막부가 대신해서 변상한다는 것이었다. ‘아즈마카가미[吾妻鏡]’에 따르면 이 연도에 덕정령(徳政令)을 취한 다음에도 약 9000여 석의 비축미를 방출했다고 한다.

 이렇게 몇 백 년 정도 이어진 것이다. 비축미도 바닥을 보였다. 막부는 점점 체력을 잃었고 그에 따라 군사력도 저하되었다. 이젠 ‘본령안도(本領安堵)’같은 것을 할 때가 아니었다. 막부의 승인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막부가 아무리 ‘본령안도’를 하더라도 기근으로 인해 마을 자체가 없어질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막부의 권위는 점점 떨어졌다. 그렇게 점차 일본인의 정신구조에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구제정책덕분에 도움을 받았다”는 감사의 마음에서, “또 쌀을 달라고”라는 억지스런 요구로, 나중에는 “어째서 막부는 도와주지 않는 것이냐!?”라는 원망으로 생각이 바뀌어 간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총촌(惣村)=센고쿠(戦国)의 마을’이 출현하게 된다. 이 마을은 ‘어은(御恩)과 봉공(奉公)’이라는 주종관계를 몰랐다. 원래 고케닌[御家人]과는 혈연관계도 아니었다. 새로운 ‘자칭’ 무사(武士)’가 태어났다. 그들이 바로 ‘코쿠진[国人]’이며 ‘재지령주(在地領主)’로 그야말로 쿄우토의 귀족들과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미천한 자들이었다. 최대로도 하나의 쿠니[国]당 130명밖에 없었던 과거의 무사계급이 센고쿠 시대에 볼 수 있는 대군단을 편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향에 쐐기를 박듯이 1450년대의 ‘오우닌의 난[応仁の乱]’으로 인하여 막부의 통치능력 결여가 명확히 드러났다.

 이제 더 이상 ‘‘어은(御恩)과 봉공(奉公)’은 없었다. 즉 ‘위(上)’는 없었다. 새로운 무사단이 ‘아래(下)’라고 한다면 통치능력이 없는 막부, 슈고[守護] 등 ‘위’를 물리치려는 사상이 발생하는 것도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하극상의 행동규범이 없었다면 센고쿠 시대를 살아서 헤쳐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오케하자마 전기[桶狭間戦記]’ 3권속에서 ‘오다 야마토노카미 노부토모[織田 大和守 信友]’[각주:4]가 “신하를 지키지 않는 주인은 주군이 아니다!!”라고 외치며 오와리 슈고[尾張守護] 시바 요시무네[斯波 義統]를 쓰러뜨린 것은 센고쿠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손에 넣은 ‘서바이벌 방식’이 아니었을까?

키지마 유우이치로우[木島 雄一郎]

  1. 사이토우 도우산[斎藤 道三]의 손자. 미노[美濃]의 영유하다가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쫓겨난다. [본문으로]
  2.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셋째 아들. [본문으로]
  3. 주로 아이즈[会津] 지역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오와리[尾張] 하사군[下四郡]의 슈고마타다이[守護又代 - 슈고다이[守護代]의 대리]. 오다 노부나가의 가문[織田 信長]의 가문인 '단죠우노죠우 가문[弾正忠家]'의 주가(主家)였다. 1554년 시바 요시무네[斯波 義統]의 아들 시바 요시카네[斯波 義銀]가 가신들을 이끌고 낚시하러 간 사이에 슈고[守護] 시바 요시무네를 살해. [본문으로]

 중세사회는 소빙하기에 따른 한랭화가 진행된 기근 사회였다. 이러한 사회에서 과연 ‘금융’이라는 것이 발행할 수 있었을까? 우선 농민의 벼농사 경제 실태를 살펴 보자.
 농민들은 벼농사를 하기 위해 봄에 볍씨를 빌려 수확을 거둔 가을에 쌀로 반환하는 행위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것을
출거(出擧)라고 한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쌀’이라는 농작물은 마법과 같은 작물이다. 우선 쌀의 생산력은 모든 농작물 중에서도 최상위권이다. 쌀알 하나가 수확기에는 100~300알 정도의 낟알을 가진 이삭으로 자란다. 단순계산으로 생산효율은 100배에서 300배가 되는 것이다. 더구나 몇 년간은 보관도 할 수 있다. 창고에 넣어두면 비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볍씨의 이자율은 몇 퍼센트였을까?
 1459년 11월 2일에 제정된 '무로마치 막부법 추가법[室町幕府法追加法]' 260조에는 이자율이 정해져 있다.

전당물의 이자율에 대해. 옷…(중략)등은 5부이자로 한다. 쟁반, 향합, 차제구(茶諸具)…(중략) 미곡(米穀) 등은 6부이자로 할 것
 5부이자이기에 월리 5%에 연리 60%, 6부이자는 월리6%에 연리 72%이다. 더구나 중세의 관례로 이자는 원본의 2배까지밖에 인정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어느 농민이 1알의 볍씨를 빌려 100알의 수확을 거두었다고 하자. 쌀은 6부이자이기에 이자율은 72%. 따라서 2알로 갚는다. 5% 정도의 세(
조용조)로 5알. 수확량 중 경작한 농민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93알.
 간단히 변제할 수 있었다. 이것이 당시 농민의 감각이다. 이런 감각으로 말하면 연리 50%나 100%라고 하여도 꼭 폭리라고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의 금융업자를 ‘도소우[土倉]’라고 부른 것은 원래 쌀을 빌려주었던 것이 발단이기 때문이다. 그 쌀을 바탕으로 ‘쌀 금융’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발달한 것이다. 그러다가 보다 보존이 용이한 화폐와 병용되어 갔다.
 물론 ‘도소우’에는 큰 것이 있으면 작은 것도 있었다. 여기에 작은 도소우에 빌려주는 큰 도소우와 같은 존재가 생기는 것도 필연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가 쌀을 비축할 수 있는 신사(神社), 사원(寺院)도 금융활동을 행하였다. 여기에 센고쿠 시대[戦国時代]로 이어지는 금융의 원천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세의 농촌사회에 타격을 주는 소빙하기가 찾아온다. 끊이지 않는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해 ‘내일의 쌀’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궁핍한 농민들은 볍씨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쌀알을 먹어버리는 상황까지 내몰렸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아무리 생산효율이 높은 농작물이라도 심지 않으면 생기질 않는 것이다. 제로는 아무리 큰 수를 곱해도 제로인 것이다.

 더욱이 기근의 만성화로 화폐보다 식량 쪽이 귀중해졌다. 『잡병 이야기[雑兵物語]』’에 “갑옷을 팔아서도 주먹밥 하나와 교환할 것”이라는 서민의 감각은 당시의 농민이 가진 숨길 수 없는 심경이 아닐까?
 아무리 돈을 가지고 있어도 먹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기근 때는 아무리 돈을 주어도 쌀을 팔지 않았다는 사례는 수 없이 많다.

 그래서 ‘도소우’에는 쌀이 아니라 ‘화폐’가 쌓여 갔다. 그래서 도소우도 자기방위라고 할 수 있는 ‘폭주’를 시작한다. 앞서 본 무로마치 막부법 추가법에 다음과 같은 항목이 있다.

여러 도소우 이자율에 대해서. 근년 마구 방치된 채인 것에 안타까운 일이다. 고리에 대해서는 도소우 조합끼리 이자율을 정하여 엄밀히 지킬 것
 중세의 임차계약은 개별계약이었다. 즉 도소우들은 막부의 이자제한법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기근, 가뭄이 들 때마다 이자는 크게 오르고 내렸다. 하지만 이자의 근본이 되는 농작물(실물경제)의 생산효율이 오르지 않았는데도 이자가 오르거나 하면 갚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도소우 들은 ‘차용증 매매’라는 파생상품을 개발하였다. ‘오케하자마 전기’의 작품 속에서도 나오는데 ‘차용증’ 그 자체를 매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차용증은 매매될 때마다 가격이 올라갔다. 매매될 때마다 논밭이나 장원(荘園), 조합의 전매권이 더해졌다. 그렇게 토지나 전매권을 손에 넣어 부(富)를 축적해 간 것이다. 물론 그러다보니 궁핍한 농민들이 세상에 넘치게 되었다.

 그래서 행해진 것이 당시의 개인회생제도라 할 수 있는 ‘덕정령(徳政令)’이다.
 ‘채무면제=덕정력’은 선정(善政)인 듯이 쓰이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확실히 채무로 인하여 가난해진 농민이 이 정책덕분에 도움을 받은 것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빚이 늘기만 하는 불량채무자, 지급불능자를 많이 짊어지고 있었던 ‘도소우’는 아무런 부(富)도 창출하지 못했다. 빚을 갚다 극도로 가난해진 사람들은 굶어 죽거나,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남는 것은 경작하는 인간이 없어진 논밭뿐이었다.

 그렇게 되는 것보다 일단 채무자에게서 채무를 떼어주고 다시 일할 상태로 만들어 일하게 만드는 편이 경제효율로 따지면 더 좋은 것이다. 덕정령이라는 것을 그러한 의미로 다시 살펴보면, 오히려 채권자 즉 도소우[土倉]나 유력무사, 신사(神社), 사원(寺院)의 이익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센고쿠 시대[戦国時代]가 끝나 에도시대[江戸時代]에 들어서도 1622년의 법령에는, “이자는 서로 합의하에 정할 것”이라고 하여 당사자들간에 맘대로 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에도 막부[江戸幕府]는 1692년에 100문(文)당 월리 3부이자, 연리 3할7분5리까지 이자의 상한을 두었다(質屋作法御定書之事). 센고쿠 시대로부터 100년이 지나서야 겨우 이자는 제한된 것이다.

키지마 유우이치로우[木島雄一郎]

 이 시대의 사회를 인식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장원(荘園)'의 잔재인 '총촌(惣村=そうそん)' 즉 센고쿠[戦国]의 마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 道長]로 대표되는 쿠게 정치[公家政治]가 일본 전국에 '장원'이라는 작은 독립영토를 만들었다. 바로 연공(年貢)인 세(稅)를 면제받는 '사령(私領)'이다. 무사(武士)는 이 '장원=사령'을 경호하는 무장민(武装民)에서부터 출발한다.

 카마쿠라 시대[鎌倉時代]를 거쳐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에 들어서자 '슈고 직[守護職]'이 고정화되어 일부 씨족이 그 지역에서 강대해져 갔다. 그러자 '슈고 직'의 권력이 강대해져가는 것을 위험시하여 그것을 제한하기 위한 시스템이 생겨났다. 이것이 '슈고 불입권"[守護不入権]'이다.

 슈고 불입권의 주된 내용으로는 슈고에 대한 징세거부권(徵稅拒否權)과 경찰권의 획득이다. 총촌(惣村)은 막부(幕府)에 직접 납세한다는 명목으로 슈고에게 조세(이를 “단젠[段銭]”이라 하였다)를 거부하였고, 도둑과 같은 범죄자를 잡으려고 하더라도 슈고의 가신은 마을에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에서 마을사람들이 범인 포박하는 것을 기다린 후 인도받았다.

 막부에게서 이 권리를 얻은 마을은 '장원'에서 보다 자립성이 강한 '총촌=센고쿠의 마을'이 되어 갔다. 와카야마 현[和歌山県]의 어느 마을에서 발견된 1491년의 마을 규정에는 센고쿠 시대의 마을 자치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마을에 도둑이 생기면 현행범으로 처형할 것. 영주(領主)에게서 문책이 있을 시에는 마을이 책임지고 설명할 것

 현대인이 '센고쿠의 마을'을 연상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여기저기 산재한 '외국대사관'을 떠올리면 되지 않을까? 아니면 '주일미군기지'도 좋은 예이다.
 전국 각지에 있는 주일미군기지는 '일본'이 아니다. 일본의 통치시스템인 '도도부현(都道府県)'에서 격리되어 있는 어엿한 '미국'이다. 거기서 근무하는 군인 및 그 가족들을 미국인들이며, 세금을 미국에 납세하고, 죄를 지으면 기본적으로 미국 법률에 따라 심판 받는다. 일본의 행정단위인 도도부현에는 지방세의 '징수권'도 없으며 각 도도부현 경찰에 위한 '사법경찰권'도 없다. 이것이 '슈고 불입권'이다.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이 경우 '슈고'는 '도도부현 지사'이며, 막부가 '일본정부', 총촌이 '주일미군기지'가 된다. 즉 당시의 일본에는 '막부'라는 중앙정부하고만 연결된 총촌지배자 즉 호족들의 '주일호족기지'가 무수히 많았던 것이다. 그 안에서 농민들은 밭을 갈고 농작물을 자신들의 주인인 호족에게 납세하였다. '센고쿠의 마을'은 '슈고'에게 납세하지 않았다.

 이때 주의해야만 할 것이 '슈고 불입권'으로 인해 막부의 지배력이 약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래 이 권리는 '슈고'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주었기 때문에 막부가 인정한 제도이다. 이 '슈고 불입권'을 원했기에 '센고쿠의 마을'은 막부의 권위를 계속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표현을 쓰자면 '슈고'에게,

우리들은 막부에게서 슈고 불입권을 받은 곳이다. 그러니 연공을 바칠 수 없다
고 말하고 싶어서 막부의 권위를 인정하였던 것이다. 막부에서 파견된 ‘슈고’는 ‘센고쿠의 마을’을 통치하는 호족을 컨트롤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일본에 미증유의 기후변동 즉 ‘소빙하기(小氷河期)’가 찾아와 대기근이 민중을 습격하였다. 극단적 경제 정체 속에서 의지하던 막부는 경제적으로도 지리적으로도 먼 존재가 되었으며, 심각한 식량난 속에서는 믿을 만한 권력이 아니게 되었다. 무엇보다 막부를 이용하면서 득이 되는 것은 대의명분일 뿐 군사력이나 경제력은 모두 자신들이 해결하고 있었다.

 그러자 ‘총촌=센고쿠의 마을’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기 시작했다. 기근으로 흉작이 들었을 경우에는 옆 마을에 약탈하러 갔다. 그 옆 마을이 머릿수가 많고 강하면 즉 '다이묘우[大名]'라면 그 밑으로 들어갔다. 센고쿠의 마을 스스로가 어느 다이묘우에 붙을까를 판단하였다. 힘이 있는 호족은 많은 총촌을 집어삼키며 거대화하였고, 힘이 없으면 흡수되어 갔다. 슈고 직에 있던 가문이 강력하면 그대로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가 되었고, 가문빨이 없더라도 마을을 많이 흡수할 수 있었던 사람은 ‘힘 있는 자’가 되어 하극상(下克上)을 실현해 갔다. 이렇게 전국의 ‘총촌=주일호족기지’의 재편성이 행해진 것이다.

 '오케하자마 전기[桶狭間戦記]’의 작품 속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가 ‘이마가와 가나 목록 추가[今川仮名目録追加]’에서 거론한,

현재는 모든 것에 있어 막부의 권위에 의하지 않으며,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이 법률을 만들고 치안을 유지해 이 지역을 다스리고 있기에 슈고 불입권은 인정하지 않는다
고 선언한 것은 막부에게 임명 받은 슈고가 막부의 권위를 부정하는 아이러니함이었다.

 키지마 유우이치로우[木島 雄一郎]

 센고쿠 시대[戦国時代]는 좋은 주군을 찾아 여러 가문에 발길을 남기는 것이 일상다반사였기에, ‘7번 주군을 바꾸지 않으면 제대로 된 무사라고 할 수 없다’고 일컬어졌을 정도였다. 그런 의미에 전형적인 인물이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였다. 타카토라는 7번 주군을 바꾸었다.

 처음 오우미[近江] 아자이 가문[浅井家]을 섬긴 타카토라는 이때 아직 13살의 소년이었다. 그 당시 일화로 도망자를 처치한 이야기가 있다. 죄를 짓고 도주하다 어느 집에 숨어 들어가 저항하는 죄인을 처치하였는데, 이때 행한 타카토라의 모습에서 그의 인생 전반에 걸친 삶의 방식을 엿볼 수 있다. 부친과 형이 집 안에 들어가 죄인과 싸우자, 죄인은 틈을 엿보다 집 밖으로 도망쳤다. 타카토라는 문 근처 그늘에 숨어있다가 도망에 성공했다고 방심한 죄인을 불현듯이 덮쳐 처치하였다고 한다. 즉 정공법보다도 오히려 물밑 정치교섭에 뛰어난 타카토라의 특색을 엿볼 수 있다

 다음으로 타카토라는 아자이 가문이 아네가와[姉川]에서 오다[織田]-토쿠가와[徳川] 연합군에게 패하여 위세가 낮아지자, 17살에 낭인이 되어 같은 오우미의 아츠지 아와지노카미[阿閉 淡路守]를 섬겼고[각주:1], 그 다음으로 이소노 탄고노카미[磯野 丹後守]를 섬긴다. 둘 다 한 달 어쩌면 수개월 만에 각 가문에 한계를 느껴 오다 노부즈미[織田 信澄]의 가신이 되었지만[각주:2] 노부즈미도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 때 누명을 쓰고 살해당했다. 노부즈미의 부인이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딸이었기에 미츠히데 일당으로 오해 받아 살해당한 것이다[각주:3].

 다음으로 히데요시[秀吉]의 동생 하시바 히데나가[羽柴 秀長]를 섬기면서 2만석까지 출세. 그제서야 안정을 찾나 싶었더니 그 히데나가도 1591년에 죽었고, 다음으로 히데나가의 양자인 히데야스[秀保]를 섬기지만 히데야스 역시 몇 년 뒤 죽자, 아무리 타카토라라도 한때는 세상을 버리고 코우야 산[高野山]에 은거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아까워한 히데요시의 소환에 응하여 하산하여 이요[伊予] 7만석에 봉해졌다. 이렇게 타카토라는 여러 가문을 전전하다 히데요시 휘하에 속하게 된 것인데, 그러는 동안 눈에 뛸만한 무용담이 거의 없다. 타카토라는 창놀림보다는 원활한 인간관계를 추구함으로써 세상을 헤쳐나간 것이다.

 훗날의 일로 그가 부하를 얼마나 능숙히 썼는가에 대해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가신 중에 유녀(遊女)에 빠진 자와 도박에 미친 자가 있어 둘 다 재산을 모두 잃고 말았다. 타카토라는 유녀에 빠진 자를 좆병진이라며 영구추방하였지만, 도박에 미친 자에게는 100일간 근신과 급료 감봉에 그쳤다. 이 둘에 대한 처분에 차이가 생긴 것은 이러했다. 유녀에 빠져 무기까지 파는 놈은 앞길이 암담하지만, 도박에 미친 자는 남에게 이기려는 호승심이 있기에 무사로서는 아직 쓸만한 곳이 있다는 것이었다.[각주:4]

 또한 사표를 내고 떠나는 가신에게 타카토라는 그 무사를 초대하여 직접 차를 대접하고 차고 있던 칼을 주면서,
“새로 취직하는 곳에서 맘에 안 드는 일이 생기면 언제든 다시 돌아오게나”
라는 말을 항상 하였기에 일단 토우도우 가문[藤堂家]을 떠났더라도 다시 돌아와 예전 봉록을 그대로 받은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타카토라는 이름있는 무사를 자신의 가신으로 삼는 것에도 노력하였다. 센고쿠 시대에 탑 클래스 급의 무용을 자랑하던 와타나케 칸베에[渡辺 勘兵衛]를 2만석으로 데리고 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전쟁터에서는 무명잡배 100명보다도 명성이 자자한 와타나베 칸베에 쪽이 적에게 더 공포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이 타카토라의 생각이었다.

 타카토라의 이름이 갑자기 역사의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은 히데요시가 죽은 다음부터이다. 혼돈스러운 정세 속에서 타카토라는 그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주인 고르기를 행했다. 타카토라는 히데요시 사후의 천하인(天下人)을 이에야스[家康]로 보고 자주 친해지려고 접근하였으며[각주:5], 그러기 위해 이에야스와 대립하고 있던 사람들의 정보를 크건 작건 세세히 이에야스에게 보고하였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무리가 꾸미던 이에야스 타도 계획을 밀고 한 것도 타카토라였다. 선택 받은 이에야스는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가 죽어 히데요리[秀頼] 후견자로 사실상 No.1 실력자가 되자, 모반을 꾸몄다는 이유를 대며 마에다 토시나가[前田 利長=토시이에의 후계자]와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에게 인질을 바치게 만들었다.
 
이에야스가 이렇게 인질을 얻도록 만든 것이 타카토라였다. 자신도 나서서 동생 쿠라노스케 마사타카[蔵之助 正高]를 에도[江戸]에 보냈다. 곧이어 세키가하라[関ヶ原] 결전이 다가오자 타카토라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있어 중대한 역할을 맡게 된다.

 1600년.
 이시다 미츠나리가 거병했다는 소식에 이에야스는 아이즈[会津]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정벌 중이던 군사를 회군하였지만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등의 부대가 오와리[尾張] 키요스 성[清洲城]까지 진출하였는데도, 이에야스 자신은 에도 성[江戸城]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선견 부대의 장수들의 동향이 신경 쓰였던 것이다. 그들은 전부 토요토미 은고[豊臣恩顧] 다이묘우[大名]들이기에, 갑자기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에게 돌아설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타카토라의 무대 뒤 활약은 이때도 펼쳐지게 된다. 이에야스가 에도 성에서 대기하도록 진언한 것도 타카토라였으며, 키요스 성에 있으면서 다른 장수들의 동향을 시시각각 에도에 보고한 것도 타카토라였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러한 타카토라의 정보에 따라 안심하고 에도를 출발하였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9월 15일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동서(東西) 결전의 막이 올랐다. 여기서도 타카토라의 수면 하 공작이 빛을 발한다. 타카토라의 부대는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지휘아래서 서군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의 부대와 싸웠지만 차츰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배반이 형세를 역전시켰다. 마츠오 산[松尾山]에 진을 치고 있던 코바야카와 부대가 오오타니 부대의 옆구리를 찌른 것이다. 그리고 오오타니 부대에 속해 코바야카와를 대비하기 위해 배치했던 쿠츠키[朽木], 와키자카[脇坂], 오가와[小川], 아카자[赤座] 등의 약소 다이묘우마저 코바야카와에 동조하여 오오타니를 공격한 것이다. 이 약소 4명의 다이묘우가 배신하도록 사전에 공작한 것이 타카토라였던 것이다.
 이런 일련의 활약으로 인해 타카토라는 8만석에서 단번에 이요[伊予]의 반인 20만석으로 가증되었다.

 이에야스에 대한 타카토라의 헌신은 계속 이어졌다. 앞서 언급된 동생 마사타카[正高]에 이어, 1606년에는 다른 다이묘우들보다 앞서 처자식을 에도에 보냈을 뿐만 아니라, 휘하 가로[家老] 4명의 자제들까지도 에도에서 살게 만들었다.

 타카토라의 헌신적인 자세는 이에야스가 죽어서도 이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막부(幕府)에 대한 충성으로 닛코우[日光]에 이야야스 묘소 선정, 건물 설립 등에 조력하였으며, 에도 우에노[上野]에는 칸에이 사[寛永寺]가 세워졌을 때에는 지금도 남아있는 우에노 토우쇼우 궁[上野東照宮][각주:6]을  만들어 바쳤다.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1556년 오우미[近江] 아자이 군[浅井郡] 토우도우 향[藤堂郷]에서 태어났다[각주:7]. 아자이 가문[浅井家] 멸망 후 여러 가문을 전전하다가 1594년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섬겨 이요[伊予] 우와지마[宇和島]에 7만석. 1597년 제2차 조선침공[각주:8]에서는 수군(水軍)으로 출동.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이요[伊予]의 절반을 하사 받았으며, 오오사카 전쟁[大坂の役]에서 세운 공적으로 이가[伊賀], 이세[伊勢] 거기에 더해 시모우사[下総] 카토리 군[香取郡]을 합쳐 총 32만3900여석의 영지를 거느린다. 1616년 4월 17일 죽었다. 75세.

  1. 아자이 가문[浅井家]과 아츠지를 떠난 것은, 두번 다 성질을 참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다투다 칼을 뽑아 부상을 입혔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2. 오다 노부즈미[織田 信澄]는 이소노 탄고노카미의 양자였기에, 이소노가 노부나가에게 쫓겨난 뒤 그대로 노부즈미를 섬기게 아닌가 싶다. [본문으로]
  3. 노부즈미가 살해당하기 이전에 노부즈미와 결별하였다. 결별이유는 뭔가 맘에 안 들었기 때문이라고만 한다. [본문으로]
  4. 사족으로 만약 저였다면 둘 다 쫓아 냈을 것입니다. 도박이건 유녀건 앞뒤 가리지 못 하는 놈들이기에 앞길이 암담하긴 마찬가지. 오히려 도박이 더 맘에 안 듭니다. 주위에 도박에 미친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피하시길. [본문으로]
  5. 그 이전 히데요시의 정무소였던 쥬라쿠테이[聚楽第]의 이에야스 거처를 건축한 것이 타카토라로, 이때부터 친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6. 에도에 있던 토우도우 저택[藤堂藩邸]에 만들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7. 이누가미 군[犬上郡] 혹은 코우라 군[甲良郡] 출신이 더 유력하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정유재란. [본문으로]

근황-20100807

내 이야기 2010. 8. 7. 19:17 Posted by 발해지랑
1. 그동안 격조하여 대단히 실례했습니다.

약 반년간 제 주변에서 여러 일들이 벌어지다보니 신경을 못 쓰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잊지 않고 찾아와 주셔서 걱정해 주신 분들께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2. 헤르모드님의 세미나에 다녀왔'었'습니다.


간 김에 헤르모드(=고려대의 김시덕 박사님)님이 쓰신 '임진왜란 관련 일본문헌 해제'에 사인 받았습죠.

일 하는 곳은 분당이고 세미나가 열린 곳은 안암인지라 회사에서 3시에 조퇴하였습죠.
도착하니 4시 20분.... 너무 일찍 도착한 듯도 하여 뻘쭘했지만 40분 즈음 헤르모드님 등장하셔서 잠깐이나마 말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저와 동갑임에도 굉장한 동안에 미남이셨습니다.(...쳇~)

ps; 이 글은 7월 13일 즈음에 쓴 것임에도 이제야 올리게 되었군요. 지나간 일이긴 합니다만...자랑하고 싶어서요. ^^

3. 요즘 정말 덥지요?
잠깐만 밖을 걸어도 땀이 뚝뚝 떨어지더군요.
전 그것이 단지 더워서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웬걸~ 제가 살이 쪘더군요.
어쩐지 요즘 에스컬레이터를 타더라도 예전엔 걸어올라가고 내려오는 편이었습니다만, 피곤하고 힘들다는 이유로 멍하니 올라가는대로 내려가는대로 있거나, 거의 사무실이나 집에서 한자리에만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던 것이 컸나 봅니다.

4. 아울러 나이 먹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머리에도 흰머리가 눈에 띄고, 친구들은 탈모를 이야기합니다.
그러고 보니 몇 일전에 어떤 중학생 인듯한 여자분께서 저에게 자리를 다 양보하더군요.
아무리 제 입버릇이 "늙은 것이 혼미해서 그만..."이긴 합니다만.... 30 중반의 나이에 자리를 양보받다 보니 그저 참담할 뿐입니다.

하대리가 느끼는 감정의 약 8698163841배 정도 제가 더 참담했습니다.


5. 블로그는 비워두었습니다만... 그 동안 트위터나 페이스북은 좀 이용하였습죠.
제 트위터 http://twitter.com/valhae <- 1주일에 한 두번 정도는 트윗하고 있습죠.
제 페이스북 http://www.facebook.com/valhae <- 페이스북 게임 중 마피아워...를 하기 위해서 하고 있습죠. ^^;

6. 그 동안 업데이트 안 해서 다시 한번 사죄의 말씀 올립니다.
업데이트 안 하던 초반엔 정말 바뻐서 였고, 중반이후엔 리듬감이라고 할까...하튼 한번 쓰던 감각을 잊고 나니, 쓰더라도 여러모로 어렵더군요. 역시 리듬감은 중요합니다.

어쨌든 앞으론 1주일에 1번이라도 포스팅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 블로그를 잊지 않고 찾아와 주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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