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즈 효우고노카미 요시히로[島津 兵庫頭 義弘]! 무운 다하여 여기서 배를 가른다. 일본의 무사들이여! 너희들이 내 목을 베었다고 나중에 자랑하지 말지어다”
1600년 9월13일. 사츠마[薩摩] 카모우[蒲生]에 있던 쵸우쥬인 세이쥰[長寿院 盛淳]은, 소수의 병력[각주:1]으로 서군(西軍)에 참가해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의 동원령에 응하여 요시히로의 저택이 있던 쵸우사[帳佐]와 자신이 다스리던 카모우[蒲生]의 무사 70여명을 이끌고 8월 3일 출발하여 9월 13일 이른 아침 세키가하라의 난구우산 산[南宮山] 근방에 도착. 아침.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휘하의 병사 1000명을 파견하여 마중. 길 양측에 도열해서는 앞을 지나가는 쵸우쥬인 세이쥰의 병사들에게 큰소리로, "오시는 동안 많은 고난이 있었을 텐데 이렇게 무사히 오시다니 정말 군신(軍神)이 따로 없소" 라 외쳤고, 마중 나왔던 미츠나리는 금으로 된 지휘부채[軍配]를 주며 쵸우쥬인 세이쥰[長寿院 盛淳]의 노고를 치하.
점심.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가 주둔해 있던 오오가키[大垣]에 도착. 요시히로 문밖으로 달려 나와, ”쵸우쥬[長寿]구나! 자네가 가장 먼저 와 줄거라 믿고 있었네.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어” 라 기뻐하며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하사 받았던 흰 봉황이 새겨진 진바오리[陣羽織][각주:2]를 하사.
이틀 뒤인 1600년 9월 15일.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시작.
서군(西軍)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시마즈 부대의 본영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그 너무도 빠른 서군의 붕괴에 요시히로는 아직 갑옷도 완전히 입지 않은 상태였다.[각주:3] 서군의 좌익 이시다, 우익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는 이미 무너져 전장에 남아있는 서군의 부대는 시마즈 부대 뿐이었다. 앞으로 어느 쪽으로 탈출할 지를 놓고 토론하였다. 그때 세이쥰이 들어왔다. ”이때가 되어서도 한가롭게 말싸움이나 하고 있을텐가? 말로 다툼하는 대신 무공으로 다투고 싶은 사람은 나와 함께 여기에 남아 마지막 무명을 높이세”
막료들이 이러고 있는 동안 요시히로는 할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거기에 조카인 시마즈 토요히사[島津 豊久][각주:4]가 와, “이제 정해진 천운(天運)을 바꿀 순 없습니다. 살아 장수를 누리는 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희는 여기서 싸우다 죽으려 하니, 그 사이 큰아버지는 가신들을 이끌고 사츠마[薩摩]로 돌아가십시오.” 그래도 요시히로는 듣지 않았다. “큰아버지의 몸에 시마즈 가문의 운명이 걸려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옵소서” 라고 외치자 그제서야 요시히로는 일어섰다.
그 대화를 보고 있던 세이쥰은 요시히로와 토요히사의 말이 끝나자 재빨리 요시히로의 갑주 쪽으로 가 자신의 무구를 벗은 후 요시히로의 것을 서둘러 입었다. 그것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알고 있기에 요시히로는 아무 말 없이 대신 세이쥰이 벗은 무구를 입었다. 이로 인해 세이쥰은 도착했을 때 요시히로에게 받은 진바오리와 요시히로의 무구, 거기에 미츠나리가 준 황금 지휘부채로 인해 오히려 요시히로보다 더욱 화려한 모습이 되었다.
역할이 정해졌다. 토요히사는 시마즈 요시히로를 호위하며 탈출하기로, 세이쥰은 본진이었던 곳에 남아 요시히로의 영무자[影武者]가 되기로.
요시히로가 부하에게 물었다. “어느 쪽 적의 기세가 가장 왕성한가?” 부하가 답했다. “동쪽에 있는 적이 가장 기세 등등합니다.” 부하의 보고를 받고 요시히로는 말했다. “그렇다면 그 기세를 향해 돌파할 것. 돌파하지 못하면 효우고 뉴우도우[兵庫入道][각주:5]는 할복할 뿐!” 부하들이 합창하듯이 답했다. “말씀하신 두 명령. 받자와 메시겠습니다”
떠나는 토요히사에게 세이쥰이 다가가 말했다. “이것으로 금생에서는 더 만나지 못할테니 지금 인사를 올립니다” 토요히사는 말했다. “오늘은 아군이 약하기에 무공을 세우긴 힘들 것 같군요” 둘은 미소를 지으며 헤어졌다.
남겨진 쵸우쥬인 세이쥰 부대 200~300에 동군(東軍) 부대 700이 돌진해 왔다. 처음엔 본진에 적들이 난입하기 전에 철포로 물리쳤다. 두 번째는 난전이 되었다. 시마즈 부대의 암구호는 ‘자이[ざい]’였는데, 하필 상대도 ‘자이[ざい]’였다[각주:6]. 같은 편끼리 죽고 죽이기도 하였다. 개중에는 두려워 본진 뒤편에 파 두었던 해자[垓字]로 도망치는 자들도 있었다. 세이쥰은 노하여 외쳤다. “사츠마까지는 500리나 된다. 설사 도망치더라도 멀어서 가기나 하겠나? 거기에 도망치는 놈은 얼굴 다 알려졌을테니 앞으로의 굴욕을 어떻게 감당하려 하나!” 몇몇이 해자에서 기어나와, “잠시 동안이라도 미련을 가졌던 것이 정말 창피하옵니다.” 라 말했다.
난전이 된 두 번째 적의 파도을 제압한 세이쥰이 부하들에게 물었다. “주군은 어디까지 가셨나?” 부하들은 모두 입 맞추어, “적진을 돌파하였습니다. 이제는 아주 멀리 가셨을 것입니다.” “축하할 일이구나. 이제 내가 주군의 영무자[影武者]로 죽는 일만 남았군”
적의 3차 돌격에서 세이쥰은 죽었다고 한다. “시마즈 효우고노카미[島津 兵庫頭] 죽으려고 환장했으니 올테면 와라” 라 외치며 돌진하다 무수한 적의 창에 몸이 꿰뚫린 후 힘 다해,
“시마즈 효우고노카미 요시히로! 무운 다하여 여기서 배를 가른다. 일본의 무사들이여! 너희들이 내 목을 베었다고 나중에 자랑하지 말지어다”[각주:7]
외친 후 배를 열십자로 가르고 머리를 북쪽으로 향해 죽었다.
그때까지 남아 있던 283명은 그 모습을 보고 돌진하여 살아남아 도망친 자는 50명이라고 한다.
시마즈 토요히사[島津 豊久]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고 한다. 퇴각전 중 그가 타고 있던 말만 나타났다고 한다. 토요히사를 죽였는지 아니면 그가 죽어있을 때 갑주만을 벗겨 전공품으로 삼았는지 알 수 없지만, 토요히사가 입던 갑옷는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양자 후쿠시마 마사유키[福島 正之]의 부대에 꼽사리 끼었던 낭인[浪人] 카사하라 토우자에몬[笠原 藤左衛門]이 가져가 그의 자손이 대대로 소유했다고 한다. 후에 소문을 들은 토요히사의 6대손이 찾아가 살피자, 갑옷에는 창에 꿰뚫린 자욱이 두 군데 있었다고 한다.
쵸우쥬인 세이쥰[長寿院 盛淳] 1548년~1600년. 盛淳을 일본 위키피디아의 해당항목이나 일본 일반 웹에서는 ‘모리아츠’라고 읽으나 세이쥰은 승려에, 그의 스승이 ‘다이죠우인 세이큐우[大乗院 盛久]’였기에, 스승의 이름자 하나를 물려 받았을 터이니 ‘세이쥰’이라 읽어야 할 듯. 어렸을 적부터 불문에 들어갔다.[각주:8] 처음 입문한 곳은 시마즈 가문[島津家]이 기도를 올리는 사원인 다이죠우인[大乗院]. 그 후 키이[紀伊]의 네고로 사[根来寺], 코우야[高野]에서 수행 후 사츠마[薩摩]로 돌아와 안요우 원[安養院]의 주지가 되었다. 그 후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의 부름으로 환속하여 시마즈 가문의 국정에 참가. 후에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의 휘하 가로가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요시히로의 동원령에 호응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가하였다 요시히로의 영무자(影武者)가 되어 전사. 향년 53세.
약 200명 이하. 여담으로 1600년 8월 토요토미 정권이 정한 시마즈의 재경 주둔병(在京駐鈍兵)은 7000명이야 했다. [본문으로]
뉴우도우[入道]는 불문에 입도한 사람에 붙는 말. 요시히로는 히데요시가 죽자 그의 명복을 빈다며 중이 된 상태였다. – 단 머리는 밀지 않았던 듯 당시 몇몇 종군기에는 머리 묶는 끈에 대한 묘사가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당시 전투방식으로, 무사들끼리 대치하면 우선 자기 부대의 암구호를 대어, 상대방도 맞으면 다른 적을 찾아 나서고, 다르면 싸우는 식이었다. [본문으로]
내가 스스로 죽었는데도 나를 죽이고 내 목을 베었다고 무공을 자랑하지 말라는 말. [본문으로]
이에 대해선 그의 부친 하타케야마 요리쿠니[畠山 頼国]가 “우리 집안은 원래 아시카가 쇼우군[足利将軍]의 중신이었지만 시대를 잘못 만나 서국의 벽지(사츠마[薩摩])에 오게 되었다. 내 자손을 미천하게 키우고 싶지 않으니 불문에 보내고 싶다”고 하여 불문에 보냈다는 설이 있다…카더라. [본문으로]
1913년 9월 29일 밤.
벨기에에서 영국으로 향하던 배에서 한 사람의 독일인이 사라졌다. 자신의 발명품이 세상에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좌절과 인간관계, 빚 문제와 같은 스트레스로 바다에 뛰어들었을 거라 추측된다. 그러나 그의 발명이 타국의 손에 건네지는 것을 막고자 독일 정보기관이 살해했다고 추리하는 사람도 있다.
발명가 루돌프 디젤. 그의 발명품이라는 것은 새삼 말할 것도 없이 디젤 엔진이다.
확실히 디젤의 엔진은 그가 죽은 다음 해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 U보트에 사용되어 그 우수성을 알렸기에, 그의 조국 독일은 디젤 엔진의 기술이 가상적국 영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두려워했다고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독일정부가 암살하려고 할 정도로 루돌프 디젤의 발명을 높게 평가했다면 그가 스트레스 받을 정도로 몰리지 않았을 것이며 일부러 외국까지 자신의 발명품을 팔러 갈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역시 암살설은 근거가 부족하다.(디젤 암살설은 경향 신문의 이 기사를 참조)
디젤의 죽음(향년 55세)은 너무 빨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71살에 죽은 부친만큼 살았다면 자신의 발명품이 잠수함이나 기관차, 자동차나 비행기에 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디젤의 엔진은 그의 사후 20여 년 지나자 전차에도 실리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디젤 엔진을 전차에 채용한 것은 조국 독일이 아니었다. 그것을 실현시킨 것은 그의 조국과 싸우게 되는 소련이었으며, 먼 동양의 나라 일본이었다. 그의 모국 독일이 디젤 엔진을 사용한 제식 전차는 2차대전이 끝난 후인 레오파르트 1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디젤의 모국 독일은 어째서 디젤 엔진을 전차에 채용하지 않았는가? 이는 이외로 맹점을 찌른 의문일지도 모른다.
루돌프 크리스티안 칼 디젤(Rudolf Christian Karl Diesel)의 조부나 부친은 제본공(製本工)이었다. 부친 테오도르(Theodor) 때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프랑스로 이주하였다. 테오도르는 파리에서 독일상인의 딸 엘리세(Elise)와 만나 결혼해서 루돌프와 두 딸을 두었다.
디젤 일가는 1870년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외국인이라 추방된다(프랑스와 프로이센간의 전쟁이 원인). 루돌프는 가족과 떨어져 아우크스부르크의 친척집에 맡겨져 독일에서 교육을 받게 된다. 모국 독일에서 그는 엔지니어가 되는 꿈을 꾸며 우수한 성적으로 뮌헨 공과대학에 진학, 1880년에는 뮌헨 공과대학 사상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다.
처음에는 은사의 추천으로 냉장고 회사에 취직하였고 프랑스어를 할 수 있었기에 프랑스 지점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883년 파리에서 살던 독일여성 마르타(Martha Flasche)와 결혼. 이를 계기로 회사를 관두고 발명가, 기술 컨설턴트로 살아가는 길을 택한다. 디젤은 대학시절부터 효율이 좋은 내연기관 발명에 깊은 흥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내연기관의 이론적 근거는 1824년 프랑스의 니콜라 레오나르 사디 카르노가 발표하였다. 또한 독일의 니콜라우스 오토는 1876년에 카르노가 제시한 기관(4사이클 엔진)을 실제로 제작하였다. 1883년 독일의 고틀립 다임러와 빌헬름 마이바흐가 니콜라우스 오토의 엔진에 개량을 더하고 연료에는 가솔린을 채용하였다. 이것이 가솔린을 연료로 하는 엔진의 원형이 되었다.
그러나 니콜라우스 오토의 엔진은 14%의 열효율(발생한 전 에너지 중 유효하게 사용할 수 있는 비율)밖에 발휘하지 못하였고, 다임러의 엔진조차 효율 18~19%로 낮았다(가솔린을 연소시켜 얻을 수 있는 열에너지 중 80%이상을 버리는 엔진. 현대의 엔진 효율은 40%정도).
디젤이 제작한 엔진은 혼합기 대신에 공기만을 압축하여 거기에 연료를 내뿜어 연소시키는 구조였다. 단열압축하면 보일의 법칙과 샤를의 법칙에 따라 공기는 섭씨 수 백도의 고온이 되기에 적당한 타이밍에 연료를 내뿜는 것만으로도 점화기 없이 연소, 폭발이 일어난다. 이 때문에 디젤 엔진을 ‘압축점화기관’이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방식의 엔진은 디젤 이전부터 연구되었으나 실제로 제작에 성공한 것은 루돌프 디젤이 처음이었다. 그는 1893년에 ‘합리적 열기관의 이론과 설계’를 간행하였고, 같은 해 독일정부에서 특허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만족할 만한 엔진이 완성된 것은 1897년의 일이었다. 완성될 동안 그는 고압축비(高壓縮比)나 연료분사(고기압 하의 실린더에 연료를 넣기 위해서는 가솔린 엔진처럼 부압을 이용한 카브레터가 아니라 연료를 분사하는 장치가 필요했다. 이 인젝션이라도 부르는 장치가 디젤 엔진 개발의 가장 중요한 기술이었다)에 따른 기술적 문제 해결에 고심하였으며, 덤으로 특허소송에도 연루되었다.
디젤의 발명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아우크스부르크 기계제작소를 이끌고 있던 하인리히 폰 부츠(Heinrich von Buz)였다. 아우크스부르크 기계제작소는 원래 인쇄기계를 전문으로 하는 기계 메이커였지만, 디젤이 아우크스부르크 출신 제본공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면 일종의 동류의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우크스부르크 기계제작소는 1898년에 뉘르베르크 기계제작소와 합병하여 아우크스부르크 뉘른베르크 기계제작소(약칭 MAN)가 되는데, 흥미롭게도 디젤의 모친은 뉘른베르크 출신이었다.
MAN사(社)와 더불어 디젤을 지원한 것이 독일을 대표하는 철강, 병기 회사인 크룹(wiki_en)사(社)였다. 즉 디젤의 발명은 실용화 되기도 전부터 강력한 지원자를 얻었다는 것이 된다. 디젤은 엔진을 1900년 파리 박람회에 출품하여 최우수상을 받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디젤은 기업 경영감각이 떨어졌고 상업적인 재능도 없었다. 거기에 아직 디젤의 엔진은 신뢰성에도 문제가 있어 그다지 팔리지 않아 특허가 실효되는 1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연간 판매대수는 200~300대뿐이었다. 디젤은 이상가에 완고하였고 사교성이 없는 독불장군이었기에 1906년에는 MAN사(社)와 결별하고 자신이 만든 디젤사(社)에서도 쫓겨나게 된다. 거기에 더해 특허수입으로 부동산에 투기하여 거액의 빚을 지게 된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 소식불명이 된 만큼 자살이라는 추측이 자연스러웠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죽자 차츰 디젤 엔진 보급이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특허실효 후에 영국을 시작으로 한 각국이 독자적으로 디젤 엔진을 개량한 성과가 나타난 것이다.
이런 사정을 보아도 디젤 엔진 보급에 디젤 개인의 존재는 절대적 요건이 아니었고, 기술이 영국에 넘어가는 것을 두려워 한 독일 정보기관이 그를 암살하였다는 추측도 난센스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디젤 엔진의 장점
디젤 엔진의 장점 특히 가솔린 엔진(니콜라스 오토의 엔진)과 비교할 경우 장점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디젤 엔진의 장점은 다음 세가지가 있다.
(1). 열효율이 높다.
즉 같은 출력이라면 연료소비율이 낮다(연비가 좋다 = 항속거리가 길다).
디젤 엔진의 이론적인 열효율은 50%~60%나 된다. 가솔린 엔진으로는 기껏해야 40%정도일 것이다. 물론 이론대로의 열효율이 나올 순 없었지만, 실제로 디젤 엔진은 같은 양의 연료로 가솔린 엔진보다 1.5배 더 이동할 수 있었다.
(2). 경유 등 저가의 연료를 사용할 수 있기에 경제성이 높았다.
가솔린 엔진은 가솔린 밖에 쓸 수 없었지만 디젤 엔진은 연료의 융통성이 높아 가솔린은 물론 알코올도 쓸 수 있었다. 루돌프 디젤은 입도가 0.5mm 이하인 석탄가루를 연료로 할 생각까지 하였다(물론 실용화되지는 않았지만).
(3). 구조가 단순하고 튼튼하여 내구성이 높다.
디젤 엔진은 압축비가 20전후(통상기압의 20배)나 달하기에 처음부터 튼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루돌프 디젤이 실용화하기까지 많은 실패를 거듭했던 것도 엔진 부품을 튼튼하게 제작하고 결합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런 장점을 뒤집어 보면 디젤 엔진은 무겁고 부피가 커진다는 단점이 된다.
디젤 엔진을 전차에 채용할 경우 (1)열효율이 높다는 점은 이동거리 연장으로 이어진다. 즉 같은 양의 연료통 용적이라면 연료소비율 에 반비례하여 이동거리가 길어진다. 전차가 보병의 동반병기였을 즈음이라면 몰라도 전차가 집단으로 질주하게 되자 1회의 연료보급만으로 오래 가는 편이 좋았다.
(2)는 연료비의 저하는 물론이고 가솔린보다도 경유 쪽이 확보하기 쉽기에 전쟁 때도 쉽게 연료가 부족해지는 일은 가솔린에 비해 덜했다. 전쟁 때 가솔린은 항공기의 연료로 우선적으로 배당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점에서 경유라면 확보하기 쉽다.
또한 디젤 연료(경유)는 인화점이 높아 가솔린과 같이 폭발적으로 타오르는 일이 없다. 이 때문에 전차가 피탄 당했을 시의 생존성 향상으로 이어진다. T-34 등 소련 전차는 후부에 드럼통처럼 생긴 예비연료통을 외부에 대놓고 탑재하였다. 이는 디젤 연료였기에 가능한 것으로 만약 안에 가솔린이 들어있었다면 피해가 더 늘었을 것이다.
미국에서도 M4A2 셔먼이 GM의 디젤을 탑재하였지만 대부분은 무기대여법에 따라 소련으로 보내졌고, 미육군 자신들은 실전에서 사용하지 않았다.
2차대전 중 본격적으로 디젤 엔진을 전차에 탑재한 나라는 앞서 이야기 했듯이 소련과 일본이었다.
소련은 피아트제의 항공기용 디젤 엔진을 연구하여 V형 12기통의 BD-2를 개발. 1933년에 BT-5 쾌속전차(wike_en)에 탑재하여 테스트하였다. BD-2엔진은 V-2엔진으로 발전하여 1939년에는 표준엔진으로 제정. KV-1 중(重)전차, T-34 중(中)전차, 스탈린 중(重)전차 등에 탑재되었다. V-2 시리즈는 개량에 개량을 거듭하여 1970년대까지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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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가장 적극적이고 조직적으로 전차용 디젤 엔진을 개발한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가솔린 확보의 불안, 화재 위험 등을 고려하여 디젤 엔진 개발을 단행하였다. 또한 중국대륙에서의 작전 중 냉각용수 확보의 어려움(냉각수에는 칼슘 등 미네랄이 적은 물이어야 했다. 우물이나 강물은 부적절)이나 냉각계통이 얼어붙을 위험(극한의 중국 동북부에서 작전행동을 고려했기 때문) 등도 감안하여 1932년부터 공냉식 디젤 엔진 개발에 들어갔다. 세계적으로도 공냉식 디젤 엔진 모델이 없어 독자적인 개발이 되었지만, 우선 직열 6기통 4사이클 디젤 엔진이 1936년 제식 채용되어 89식 중전차(을형)에 탑재되었다. 이어서 일본은 동일 실린더의 조합을 바꾸어 각종 사이즈의 엔진을 만드는 – 모듈러 사상의 선구자와 같은 4사이클 디젤 엔진 개발에 착수했다.
통제 디젤(100식 엔진)(wiki_jp)이라 부르는 보아(내경)120mm, 스트로크 160mm의 배기량 1.8리터의 실린더를 1단위로 하고, 이것을 4본(직렬4기통)에서 최대 12본(V형 12기통)으로 조합함으로써 배기량 7.2리터에서 21.6리터의 디젤 엔진을 만드는 것이다. 최대 V형 12기통 과급기 내장 엔진의 최대출력은 300마력으로 공냉식 외에 수냉식도 있었다. 통제 엔진은 1식 중전차(치헤) 이후의 전차에 탑재되었다.
패전으로 인해 일단 일본은 병기개발에서 손을 떼지만 자위대의 발족과함께 전차 개발을 재개. 2차대전 후 첫 번째인 61식 전차에는 2차대전 때의 기술을 살려 공냉식 4사이클 디젤이 탑재되었다. 그 후에도 74식 전차(공냉 2사이클), 90식 전차(공냉 2사이클)에 디젤 엔진을 탑재하였다. 즉 일본은 반세기에 걸쳐 일관되게 전차용 디젤 엔진을 계속 추구한 것이다. 전차용 디젤 엔진은 2차 대전 이전부터 이후까지 기술을 계속 발전시켰던 일본의 병기개발사상 드문 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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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솔린 엔진을 채용한 독일
디젤 엔진의 원조 독일에서는 2차대전 중 전차에 가솔린 엔진을 계속 탑재했다.
디젤 엔진을 탑재한 시작전차라 하면 판터의 다임러 벤츠의 시작차(VK3002DB)에 동사(同社)의 디젤 엔진을 탑재하긴 했지만 저 시작차는 채용되지 않았다. 제식전차는 I호 전차 B형 이후 전부 마이바흐 사(社)의 가솔린 엔진을 탑재하였다. 마이바흐 사(社)는 비행선이나 철도차량용 디젤에서 실적이 있던 회사였던 만큼 독일이 디젤을 채용하지 않았던 것은 수수께끼다.
또한 디젤의 발명에 처음부터 관여했던 MAN 사(社)나 크룹 사(社)도 2차대전 중에 전차의 생산이나 설계에 관여하였다. MAN 사(社)나 크룹 사(社)에서 디젤 엔진을 탑재한 전차가 등장하여도 이상하지 않았음에도 실제로 전차에는 마이바흐 제의 엔진을 탑재한 것을 보면 이는 역시 독일육군의 기술정책이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또한 디젤 엔진이라 아울러 말하지만 잠수함, 기관차용과 자동차, 전차용은 설계 자체가 많이 달랐다. 잠수함이나 기관차용은 대형대중량으로 저회전인 소위 저속디젤이며, 자동차용과 전차용은 소형경량의 고속디젤이 요구되었다. MAN의 특기인 U보트 용 디젤 엔진 기술은 기관차에 적용할 수 있었지만 그 상태대로 차량용에는 전용할 수 없다.
디젤 엔진의 소형경량화에 공헌한 기술은 연료의 공기분사에서 무기분사로의 전환이었다.
디젤이 설계한 시작 엔진이나 1920년대까지의 실용 디젤 엔진은 대부분이 연료를 압축공기와 혼합하여 실린더 내에 분사하는 방식을 채용하였다(공기분사). 당시의 기술수준으로는 연료를 단독으로 깨끗한 안개 상태로 뿜어내는 노즐, 고압연료 펌프 등을 제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기압축기는 부피가 커 필연적으로 엔전 전체도 크고 무거워졌다.
1927년 독일의 로베르토 보슈 사(社)가 무기연료분사 펌프 개발에 성공한다. 덕분에 1930년대가 되자 차츰 무기분사 디젤 엔진이 보급되었다. 이와 함게 디젤 엔진의 신뢰성도 눈에 띄게 향상되어 갔다.
흥미롭게도 1930년대에는 열강들이 경쟁하듯 항공기용 디젤 엔진 개발에 분주하였다. 디젤 엔진은 가솔린 엔진보다도 필연적으로 무겁기에 항공기용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좋은 연비율과 내구성은 장거리용 항공기에게 있어서는 무게에 관한 문제를 고려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엔진이 무거워도 필요한 연료가 적다면 차감하여 엔진 중량이 무거워도 연료를 적게 실으니 가벼워 질 수 있는 가능성도 생긴다.
실제 디젤 엔진은 우선 1930년대에 비행선용으로 확고한 지위를 점할 수 있었다. 그 여세를 몰아 MAN, 다임러 벤츠, 피아트, 롤스로이스, 융커스(wike_en), 리카도 등 유명한 회사가 대형 항공기용 디젤 개발에 매진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실용의 영역에 달한 것은 융커스 사(社)의 유로204/205/207 시리즈가 유일했다.
융커스의 항공기용 디젤 엔진은 긴 기통의 양측에 크랭크 샤프트가 있어 두 개의 피스톤 사이엔 연소실을 형성하는 대향(對向) 피스톤이라는 특이한 형식을 채용하였다. 이 엔진은 종전 후 영국의 치프틴, 소련 T-64의 디젤 엔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석유를 갈구하며
지금은 디젤 엔진을 탑재한 승용차나 트럭이 널리 보급되어 있지만 독일이 전차 개발을 재개한 1920년 말 즈음은 디젤 엔진 차량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는 디젤 연료(경유)보다 가솔린을 구하기 쉬웠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에 침공한 독일 육군의 장갑부대는 길가에 있던 주유소에서 연료를 약탈하여 사용하였다. 경유라면 현지조달이 어려웠을 지도 모르지만 디젤 엔진이라면 가솔린을 연료로 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나폴레옹 전쟁 때라면 모르겠지만 근대적인 군대에서 연료나 식량을 현지조달 하겠다는 생각 따위 하지 않을 것이다. 연료를 최전선까지 보낼 수 있는 보급체재가 만들어지지 않는 한 전쟁은 시작할 수도 없다.
연료(석유자원) 확보에 관해서는 독일군 수뇌부보다도 히틀러 쪽이 확실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정권을 잡기 전인 1932년 6월 히틀러는 독일의 석유화학기업 I.G.파르벤(wike_en)과 손을 잡고 보호를 약속하였다.
I.G. 파르벤은 석탄을 원료로 하는 석탄액화연료를 개발하고 있었다.
석탄을 석유로 만드는 합성에는 프리드리히 베르기우스의 수소 첨가법(wike_en)과 석탄을 일단 수소와 일산화탄소로 분해해서 재합성하는 피셔 트로프슈 공법(wiki_en)이 있는데, 파르벤의 방법은 베르기우스의 수소 첨가법으로 이는 항공기용 가솔린을 합성하는데 적합했다.
히틀러는 강박관념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항상 석유자원 확보에 신경썼다. 그가 말하는 게르만 민족의 레벤스라움(생존권)에는 식량산지와 더불어 유전지대도 포함되어 있다. 루마니아를 동맹국에 끌어들여 플로이에슈티의 유전을 확보했으며, 1941년 소련침공 때는 장군들을 물리치고 주공을 카프카스의 유전지대로 돌렸다. 그는 장군들에게 “자네들은 전쟁의 경제적 측면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까지 말했다.
독일군은 카프카스 산맥 앞에 도달하여 바쿠의 유전지대가 보이는 곳까지 육박했지만, 기상악화와 보급선의 한계로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다.
프랑스 전선과는 정반대인 일이 러시아 전선에서 일어난다.
독일군은 소련군의 보급기지를 점령하지만 비축되어 있던 연료는 디젤 용의 경우로 독일군의 전차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942년 공세에서도 카프카스의 유전지대를 목표로 하였다. 바쿠 유전을 점령하면 독일은 그리도 바라던 석유자원을 손에 넣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소련의 전쟁유지 능력을 뺐어 패배로 몰아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은 점령한 유전을 복구하기 위한 석유기술여단까지 재빨리 편성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1942년 공세도 역시 기상악화와 보급선의 한계로 실패했다. 독일육군은 다시 연료부족으로 진격을 멈추었기에 공세에서 수세로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히틀러가 기대했던 I.G. 파르벤의 석탄액화연료는 1944년 초반에는 석유공급의 54%를 점할 정도가 되었고, 항공 가솔린은 92%나 석탄액화연료에서 만들어졌다. 아우슈비츠의 강제수용소 옆에 I.G. 파르벤의 석탄액화연료 고장이 건설되어 유대인 수용자들이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 연료생산에 종사했다. 독일의 석탄액화연료의 1/3은 이런 강제노동의 산물이었다.
연합국 공군은 1944년 5월부터 독일의 석탄액화연료 공장을 공격하였으며 또한 플로이에슈티의 유전을 폭격하였다. 독일의 석탄액화연료 생산은 곧바로 1/10이하로 떨어져 항공기는 날 수 없게 되었고 전차는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독일은 운명은 석탄액화연료와 함께 다한 것이다.
이제 여기서 서두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독일은 어째서 디젤 엔진을 전차에 탑재하지 않았을까?
여러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알 수 없다. 독일육군 수뇌부가 주로 유럽 안에서만 작전을 상정하였기에 연료 확보를 문제시 하지 않는 점도 있었을 것이다. 전차는 보병의 동반병기라는 개념을 계속 가지고 있어 그다지 긴 작전행동을 요구하지 않음 점도 있을 것이다. 당시의 디젤 엔진을 전차에 탑재하기에는 신뢰성이 떨어지는 점도 있었을 테지만 그 정도라면 독일의 기술력으로 해결할 수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그것을 하지 않았다.
물론 독일 전차가 디젤 엔진을 채용했다고 하더라도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석유생산의 근원을 파괴당하면 디젤 연료(경우)건 가솔린이건 부족하긴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디젤 엔진이라면 독일 전차의 이동거리가 좀 더 길어졌을 것이며 보급도 원활하지 않았을까? 연료부족으로 진격을 멈춘 몇몇 국면에서는 좀 더 유리하게 진행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루돌프 디젤의 모국 독일이 전차용 디젤 엔진을 개발하고자 하지 않았던 점은 기술사적으로 기묘한 일이라 할 수 있다.
2차대전 서적을 읽다가 삘받아서 번역하긴 했습니다만 제가 2차대전과 이런 기계에 관한 것은 무지에 가까우니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가차없이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를 말하는데 있어 그의 부인인 호소카와 가라샤[細川 ガラシャ]를 빼놓을 수 없다.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셋째 딸로 이름은 타마[玉], 절세의 미녀였다. 타다오키는 이 가라샤에 관계된 일이라면 질투심이 특히 심했다고 한다. 어느 날. 정원사가 일을 하고 있을 때 우연히 지나가던 가라샤에게 계절이 어떠네 날씨가 어떠네하며 인사를 했다고 한다. 단지 그랬을 뿐이었는데도 타다오키는 이 정원사를 직접 칼을 뽑아 죽였다.
부친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斎]에게 물려받은 재능으로 각종 예도[藝道]에도 뛰어났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아트 디자이너적인 재능이 풍부하였던 듯 자기 부인의 옷도 스스로 옷감을 고르고, 색이나 모양까지 디자인했다고 한다. 갑주(甲胄)나 갑옷에 걸쳐 입는 동의(胴衣), 큰칼[太刀]의 디자인 등도 직접 고안하였고, 다른 다이묘우[大名]에게서도 의뢰 받아 투구 등을 만들었다. 어느 날 의뢰 받아 제작한 투구의 뿔을 진짜 물소의 뿔이 아닌 가벼운 오동나무로 만든 적이 있었다. 의뢰한 다이묘우가 완성품을 보고 이래서는 부러지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자, 타다오키는 “투구의 뿔이 부러질 정도로 활약하는 것이야말로 무사의 본분일 것이오”라고 화를 내며 말했다고 한다.
질투 심한 격정(激情)인 성격이 플러스로 작용하여 전쟁터에서는 용감한 활약을 하였다. 1577년 10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장남 노부타다[信忠]를 따라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의 속성 카타오카 성[片岡城]을 공격했을 때의 일이다. 15세에 선두에 서서 분전하여 수급을 베었지만, 이때 돌에 머리를 맞아 상처가 나 늙어서도 그 상처자국이 지워지질 않았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는 노부나가에게서 자필 표창장[感状][각주:1] 를 받았다.[각주:2]
앞서 이야기한 것보다 전인 같은 해 3월의 사이가 정벌[雑賀征伐] 때는 자칫 목숨을 잃을 뻔했다. 혈기에 날뛰어 명성이 자자하던 사이가의 철포대에게 돌격하려 한 것이다. 적들이 총을 쏘고 난 간격에 맞추어 돌진하려다 부하가 막은 덕분에 탄환의 먹이가 되는 것을 피했다. 이때의 경험이 머리에 새겨졌는지 노년(老年)에 들어서도 자주 입에 담았다고 한다.
[호소카와 구요]
그런 용맹한 활약들이 노부나가를 흡족하게 하여 노부나가는 타다오키를 시동[小姓]으로 삼았다. 유명한 호소카와 가문[細川家]의 문장(家紋)이 구여(九曜)로 정해진 것도 이 즈음의 일이다.
노부나가의 칼을 받들고 있던 타다오키가 그 칼의 칼자루에 새겨져 있던 구요의 장식에 반하여 곧바로 이를 자신이 입는 옷에 새겨 입자 이를 본 노부나가가 “멋진 문양이구나”고 칭찬한 것이 호소카와 가문의 문장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부친 유우사이[幽斎]까지 호소카와 가문의 문장은 오동나무[桐] 혹은 ‘원 안에 두 줄[二つ引両]'였지만 타다오키의 대가 되어 구요의 문장으로 바뀌었다.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아케치 미츠히데의 딸 타마(후의 가라샤)와 결혼한 것은 1578년의 일로 타다오키 16세였다. 그러나 이 결혼이 1582년 호소카와 가문에 생각하지도 못했던 위기를 가져다 주게 된다. 이해의 6월 부인 가라샤의 부친 아케치 미츠히데가 혼노우 사[本能寺]에 머물던 주군 노부나가를 죽이고, 호소카와 부자에게 협력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그야말로 호소카와 가문은 운명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타다오키의 부친 유우사이는 노부나가를 죽인 미츠히데의 천하가 결코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여, 그때까지 친구였던 미츠히데의 권유를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아들인 타다오키와 함께 머리를 밀고 노부나가에 대한 조의를 표하였다[각주:3].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아케치 토벌전인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가 시작되자, 이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미츠히데의 영지인 탄바[丹波]에 침공, 성 2개를 공략하여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더구나 미츠히데의 딸인 가라샤를 탄고[丹後]의 미토노[味土野]의 산속에 유폐하여 미츠히데와 연을 끊었다는 것을 세상에 구체적으로 알린 것이다. 이렇게 노력한 것이 효과를 보아 호소카와 부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히데요시에게서 탄고 영유를 그대로 인정받는 서장을 얻었고 가라샤 부인의 유폐도 풀리게 되었다[각주:4].
그 후 타다오키는 히데요시의 천하평정 전쟁에 참가하여 유우사이와 함께 히데요시 정권하에서 확고한 지위를 쌓아가지만 1595년에 큰 재난에 휩싸이게 된다. 관백(関白)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의 실각사건이 그것이다. 히데츠구는 잔혹한 행동 때문에 할복을 명령 받고 그의 처첩, 가신들까지 살해당하거나 추방당하였는데, 그 중에 타다오키의 인척이 있었다. 타지마[但馬] 이즈시[出石]의 영주 마에노 나가야스[前野 長康]의 아들 나가시게[長重]의 부인이 타다오키의 장녀였던 것이다. 더구나 운 나쁘게도 타다오키는 히데츠구에게서 황금 100매를 빌리고 있었다. [각주:5] 그러한 일로 타다오키 역시 히데츠구의 일당이 아닌가 하는 혐의가 받게 된 것이다.
타다오키는 곧바로 근신을 명령 받았다. 히데요시 측근의 말에 따르면, 오봉행(五奉行)[각주:6]의 의향은 타다오키를 할복시키려는 의향이라고 하였다. 타다오키는 분노했다. 이는 평소부터 사이가 나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참언(讒言)에 의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호락호락 누명을 쓰고 죽을 바에는 미츠나리를 죽이고 후시미[伏見][각주:7]에 불을 질러 화려하게 끝을 장식하겠다” 고까지 생각하였다. 아예 처자식을 죽이고 자신의 저택에 불을 지르려고 여러 준비를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러는 한편 열심히 변명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히데요시는 딸을 인질로 바칠 것, 히데츠구에게 빌린 황금 100매를 반납할 것을 조건으로 타다오키의 결백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너무도 갑작스런 일이라 타다츠구에게는 당장 황금 100매라는 거금이 없었다. 온갖 방법을 쓴 끝에 겨우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에게 빌려 반납할 수 있었다. 이때의 은의(恩義)로 인해 타다오키는 이에야스와 친교를 맺기 시작하여 히데요시가 죽은 뒤 혼란스런 정세 속에서 차츰 토쿠가와 측이라는 자세를 확실히 나타내게 된다.
1598년 히데요시가 죽자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생전에 정한 법도를 계속해서 어겨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이시다 미츠나리 등 사대로(四大老), 오봉행(五奉行)들과 험악한 대립관계에 들어갔다. 타다오키는 마에다 가문[前田家]과 인척관계였다. 적자 타다타카[忠隆]의 부인이 토시이에의 딸이었던 것이다. 타다오키는 이에야스에 대한 은의와 토시이에와의 인척관계 사이에 끼어 괴로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타다오키와 친한 토시이에의 장남 토시나가[利長]가 타다오키에게 놀랄만한 정보를 가져온 것이다. 이시다 미츠나리의 이에야스 암살계획이었다. 타다오키는 기겁했다. 그것은 마에다 가문을 멸망에 이르게 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시나가를 설득하여 함께 토시이에를 만나 이에야스와의 화해를 권고하자, 토시이에는 오히려 바닥을 내려치고 격노하면서 이에야스의 약속위반을 하나하나씩 거론하였다. “이래서는 히데요리[秀頼]공에게 해가 될 뿐.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이에야스를 죽이고 말겠다!”고 외쳤다. 타다오키는 필사적으로 설득하여 겨우 토시이에가 재고하게 만드는데 성공하였고, 토시이에는 타다오키에게 이에야스와 화해하는데 중개를 맡아달라고 하였다. 그 후 타다오키는 이에야스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이에야스도 깜짝 놀라며 ‘생명의 은인’이라고 말하며 감사했다고 한다.
이러한 타다오키의 노력으로 인하여 양자는 화해하게 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토시이에가 죽자 타다오키를 포함한 무공파 장수들이 이시다 미츠나리 습격을 계획하여 미츠나리는 자신을 구해준 이에야스에게 은퇴 당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가 하면 이번엔 타다오키가 새빨간 누명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 마에다 토시나가와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가 공모하여 이에야스의 암살계획을 세웠고, 타다오키도 토시나가와 인척관계인 만큼 여기에 참가했다는 이야기였다.
놀란 호소카와 가문에서는 곧바로 부친 유우사이와 타다오키가 다른 마음을 품지 않겠다는 맹약서를 이에야스에게 제출하였고, 이에야스의 요구대로 마에다 가문과의 인척관계를 끊고 에도[江戸]에 셋째 아들인 타다토시[忠利]를 인질로 보냈다[각주:8]. 즉 호소카와 가문은 이걸로 완전히 이에야스에게 복종을 맹세한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타다오키는 이에야스를 따라 아이즈 정벌[会津征伐][각주:9]에 참가하는데, 그가 출진한 사이 오오사카[大坂]의 저택에서 가라샤 부인이 자살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이시다 미츠나리 등은 거병하자 오오사카에 있던 동군(東軍) 무장들의 가족들을 인질로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잡아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가라샤 부인은 용감히 이를 거부하고 가노(家老)에게 자신을 찌르게 하여 마지막을 장식하고 화약에 불을 붙여 저택을 폭발시키게 만들었다. 기독교도였던 가라샤 부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했기에 그러한 수단을 취한 것이다.
타다오키는 부친 유우사이에 뒤지지 않는 굴지의 다인(茶人)으로 또한 그런 방면의 서적을 많이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 1563년 나가오카 후지타카[長岡 藤孝=유우사이[幽斎]]의 아들로 태어났다. 통칭 요우이치로우[与一郎]. 호는 산사이[三斎]. 탄고[丹後] 미야즈[宮津] 성주. 임진왜란 때는 2년 동안 재진하였고, 진주성(晋州城) 공격에도 참가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부젠[豊前] 코쿠라[小倉]에 봉해졌다. 1632년 아들 타다토시[忠利] 때 히고[肥後] 55만석으로 전봉되었다. 센노리큐우[千 利休]에게 사사 받아 리큐우 칠철[利休七哲][각주:10]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1645년 12월 2일 죽었다. 83세.
현재 남아 있는 것 중에서는 노부나가의 거의 유일한 자필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특별한 일이었는지 전해준 호리 히데마사[堀 秀政]도 ‘이 표창장은 노부나가님이 직접 쓰신 거임’이라고 첨부한 편지에 쓸 정도였다. [본문으로]
표창장을 받은 이유는, 타다오키가 그의 동생 호소카와 오키모토[細川 興元]와 함께 카타오카 성을 가장 먼저 침입해 들어갔다[一番乗り]. [본문으로]
타다오키의 경우 노부나가에 심취해 있었던 듯, 죽을 때까지 매달(!) 노부나가의 제삿날을 잊지 않고 챙겼다 한다. [본문으로]
그러나 그녀는 이때 받은 타다오키에 대한 불신감으로 인하여, 기독교에 투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당시에는 이렇게 돈을 빌려주는 행위가 빌린 사람을 자기 부하로 만들거나 인식시키는 것이었다 한다. 히데요시의 동생 히데나가[秀長]도 다른 다이묘우들에게 돈을 마구 빌려주어 형인 히데요시를 화나게 한 적도 있다 한다. 즉 현대의 감각처럼 단지 돈을 빌려주고 빌렸다는 것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니다. 타다오키가 히데츠구와 주종관계를 맺었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본문으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마에다 겡이[前田 玄以],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를 지칭. [본문으로]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의 정신구조인 ‘하극상(下剋上)’이 “아래(下)가 위(上)를 이긴다(剋)”는 주종역전이라는 것을 본 작품에서도 거듭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무가사회(武家社会)의 주종관계(主従関係)란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리고 그 관계가 어떻게 변해갔는가? - 정신적인 면에 주안을 두며 살펴보자.
중세의 주종관계의 큰 특징 중 하나가 주인을 바꿀 수 있다는 점에 있었다. 맘에 안 들면 주인을 바꾸면 되는 것이다.
‘카니 사이조우 요시나가[可児 才蔵 吉長 - 1554년~1613년]’는 그 대표적인 무사라 할 수 있다. 그의 과거을 살펴보면 엄청나다. 사이토우 타츠오키[斉藤 龍興][각주:1],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오다 노부타카[織田 信孝][각주:2],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 삿사 나리마사[佐々 成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로 주군을 바꾸었다. 센고쿠의 시대를 질주한 사나이로서 떳떳한 인생이었을 것이다. 카니 사이조우에게 “아래가 위를 먹어 치운다”는 것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위를 존중하지 않는 정신구조는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종관계가 어떻게 가능하였을까?
막부(幕府)를 연 ‘쇼우군[将軍]’은 휘하에 가신(家臣)을 두었다. 이를 고케닌[御家人]이라 한다. 이 고케닌은 쇼우군에 충성을 맹세하는 대신에 ‘지두(地頭-じとう)에 임명 받았다. 이는 어느 일정한 지역의 지배권을 인정받는 것이다. 이 지배권을 침해 당할 때에는 쇼우군이 나서서 권리를 부활시켜 주었다. 이것이 ‘본령안도(本領安堵)’. 쇼우군에게서 받은 ‘어은(御恩)’이다.
대신 고케닌은 쇼우군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것이 ‘봉공(奉公)’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출진하였다. 목숨을 바쳐 자기 영지[本領]를 안도 받으려 노력하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주종관계 즉 ‘어은(御恩)과 봉공(奉公)’은 어디까지나 상호계약이었다는 것이다. 쇼우군이 ‘어은’을 해주지 않는다면 ‘봉공’할 필요는 없었다. 정신적인 ‘절대복종’이 아니라 ‘give and take’에 가까웠던 것이다. 카니 사이조우라면 ‘어은’을 받지 못했기에 당신에게는 ‘봉공’할 수 없습니다 – 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정신을 가졌던 고케닌은 발생 당시 숫자가 얼마큰 있었을까?
1185년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가 요시츠네[義経]를 토벌하기 위해 모은 15개 쿠니[国]의 고케닌은 2096명이었다고 한다. 즉 ‘무사(武士)’는 1 쿠니[国] 당 130여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외로 적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즈음의 전투가 대군을 이끌고 자신의 경제력(병력동원력)을 과시하며, 실제의 전투는 일기토[一騎打ち]에 의한 것이었기에 전투의 스페셜리스트는 그렇게까지 필요하지 않았던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더 말하자면 병기가 되는 철(鉄)이 귀중품이었기에 일반병사들에게까지 병기가 충분히 전해지지 않았던 것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은 무사의 본거지라고도 할 수 있는 동국(東国)에서 이 숫자인 것이다. 이외로 무사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서서히 소빙하기가 무가사회(武家社会)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다.
1230년, 여름에 이상기온이 찾아왔다. 6월9일에 무사시[武蔵] 카네코 장[金子荘]과 미노[美濃] 마키타 장[蒔田荘]에 눈이 내렸다. 이 보고를 받은 카마쿠라 막부[鎌倉幕府]는 동요했다. 이상기온은 곧바로 벼농사의 괴멸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어서 7월에 들어서자 여러 지역에 서리가 내렸다.
‘이본탑사장첩(異本塔寺長帳)[각주:3]’에 따르면 “일본 전국이 겨울과 같아 매우 추웠다”는 상태였던 것이다. 쿄우토[京都]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아사자가 속출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확실히 비상사태였다. 이때 막부는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할 장치를 만들었다. 이즈[伊豆]와 스루가[駿河] 지역의 예를 살펴보자. 막부가 보증하니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빌려주도록 도소우[土倉]에 명령하였다. 만약 백성이 쌀을 변상하지 못하더라도 막부가 대신해서 변상한다는 것이었다. ‘아즈마카가미[吾妻鏡]’에 따르면 이 연도에 덕정령(徳政令)을 취한 다음에도 약 9000여 석의 비축미를 방출했다고 한다.
이렇게 몇 백 년 정도 이어진 것이다. 비축미도 바닥을 보였다. 막부는 점점 체력을 잃었고 그에 따라 군사력도 저하되었다. 이젠 ‘본령안도(本領安堵)’같은 것을 할 때가 아니었다. 막부의 승인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막부가 아무리 ‘본령안도’를 하더라도 기근으로 인해 마을 자체가 없어질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막부의 권위는 점점 떨어졌다. 그렇게 점차 일본인의 정신구조에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구제정책덕분에 도움을 받았다”는 감사의 마음에서, “또 쌀을 달라고”라는 억지스런 요구로, 나중에는 “어째서 막부는 도와주지 않는 것이냐!?”라는 원망으로 생각이 바뀌어 간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총촌(惣村)=센고쿠(戦国)의 마을’이 출현하게 된다. 이 마을은 ‘어은(御恩)과 봉공(奉公)’이라는 주종관계를 몰랐다. 원래 고케닌[御家人]과는 혈연관계도 아니었다. 새로운 ‘자칭’ 무사(武士)’가 태어났다. 그들이 바로 ‘코쿠진[国人]’이며 ‘재지령주(在地領主)’로 그야말로 쿄우토의 귀족들과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미천한 자들이었다. 최대로도 하나의 쿠니[国]당 130명밖에 없었던 과거의 무사계급이 센고쿠 시대에 볼 수 있는 대군단을 편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향에 쐐기를 박듯이 1450년대의 ‘오우닌의 난[応仁の乱]’으로 인하여 막부의 통치능력 결여가 명확히 드러났다.
이제 더 이상 ‘‘어은(御恩)과 봉공(奉公)’은 없었다. 즉 ‘위(上)’는 없었다. 새로운 무사단이 ‘아래(下)’라고 한다면 통치능력이 없는 막부, 슈고[守護] 등 ‘위’를 물리치려는 사상이 발생하는 것도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하극상의 행동규범이 없었다면 센고쿠 시대를 살아서 헤쳐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오케하자마 전기[桶狭間戦記]’ 3권속에서 ‘오다 야마토노카미 노부토모[織田 大和守 信友]’[각주:4]가 “신하를 지키지 않는 주인은 주군이 아니다!!”라고 외치며 오와리 슈고[尾張守護] 시바 요시무네[斯波 義統]를 쓰러뜨린 것은 센고쿠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손에 넣은 ‘서바이벌 방식’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