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

1615 5 28일 병사 60

1556~1615.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을 섬겼으며 '시즈가타케 칠본창[七本槍]'[각주:1] 중 한 사람이다.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후견역(後見役)이 되어 토쿠가와[德川] 측에 대한 연락창구가 되었지만, 오히려 내통자로 오해 받아 오오사카 성[大坂城]을 떠났다.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 후에 죽었다.







우직한 카츠모토


 카타기리 카츠모토는 16살 때부터 하시바 히데요시를 섬기기 시작했는데, 이런 카츠모토를 히데요시는 곁에 두고 길러 키워 가신(家臣)으로 삼았다.

 1583 4월 시즈가타케의 전투에서 '칠본창'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공을 세워 3000석을 받았다. 그러나 동료인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淸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과 비교하면 출세 가도에서 밀려나 히데요시 말년인 1595년이 되어서야 겨우 셋츠[摂津] 이바라키[茨木] 1만석의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그 전 해인 1594년에 히데요리를 보좌하는 신하로 선택되었다. 히데요리의 여러 신하들, 특히 측근을 감찰(監察)하는 지위였다.


 히데요시가 죽은 다다음해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이 시작되었다. 카츠모토는 히데요시가 죽은 후에도 오오사카 성에 입성해서는 히데요리 곁을 지키며 참전하지 않았다. 이에야스는 그런 우직함을 신뢰하여 1601년 카츠모토에게 야마토[大和] 헤구리 군[平郡郡] 18천석을 가증하여 히데요리의 가로(家老)로 임명하였다. 이때는 몰랐지만 후에 생각해보면 이것이 카츠모토에게 있어서 불행의 시작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곧이어 이에야스는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이 되어 에도[江戶]에 막부(幕府)를 열었고, 이 일로 인하여 토요토미 가문[豊臣家]과는 뭐든지 미묘한 문제가 많아지게 되었다. 특히 이에야스의 신임을 얻고 있던 카츠모토에 대하여 요도도노[淀殿][각주:2]를 필두로 한 오오사카 성내의 반토쿠가와파는 무엇이든 의심의 눈초리로 카츠모토를 보게 되었다. 토요토미-토쿠가와 양 가문의 중개자로써 쌍방의 관계를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부심하는 카츠모토는, 언제부턴가 오오사카 성내의 혼란과 이간을 꾀하는 이에야스의 교묘한 술책에 희롱당하게 되었다.


호우코우 사[方広寺] 종명(鐘銘) 사건


 1602 4월.

 이에야스는 카츠모토를 통해 히데요리 모자(母子)에게 쿄우토[京都] 호우코우 사[方広寺] 대불전(大佛殿)의 재건을 권유하였다. 히데요리도 요도도노도 죽은 히데요시의 공양과 토요토미 씨()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하여 이를 따랐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이에야스가 오오사카 성()에 저장되어 있는 막대한 금은을 쓰게 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카츠모토가 조영(造營) 책임자라는 큰 임무에 임명받았다. 그는 이에야스와 빈번한 연락을 통해 꼬투리 잡힐 일 없이 사업을 진행해갔다.


 호우코우 사() 대불전은 1614 4월에 준공.

 하지만 예정되어 있던 개안공양을 눈 앞에 두고 이에야스가 불만을 표했다. 종에 새겨진 '家安康' '칸토우[関東]를 저주하는 말'[각주:3]이고, [君臣豊樂子孫殷昌]이 토요토미의 번영만을 기원하는 말이라며 개안공양의 연기를 명령했다.

 카츠모토는 급히 순푸[駿府][각주:4]로 해명하기 위해서 향했다. 당초는 이 문제가 그렇게까지 심각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에야스는 카츠모토를 면회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를 통해 오오사카 성()이 어째서 많은 수의 낭인을 모집하고 있는지 힐문하였다. 그리고,

1. 히데요리가 에도로 온다.[각주:5]

2. 요도도노가 인질이 되어 에도에서 산다.

3. 히데요리가 오오사카 성()을 나와 다른 곳과 영지를 바꾼다.[각주:6]

 라는 어느 것이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을 요구해 왔다. 대불전 문제로 인하여 중대한 정치적 난제를 껴안게 된 카츠모토는 크게 놀랐다.


 한편 요도도노도 따로 이에야스에게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大蔵卿局][각주:7]와 쇼우에이니[正栄尼][각주:8]를 파견하였다. 이에야스는 이 둘에게 종명 문제 등 난제를 한 마디도 꺼내지 않고 환대하며 히데요리 모자의 안부에 신경 썼기에 당연하게도 오오사카로 돌아온 쌍방의 보고는 전혀 상반되는 것이 되었다. 이에야스의 교묘한 분열 책략은 멋지게 성공했다.

 오오사카 성내에는 '카츠모토는 칸토우[関東]에 알랑거리는 놈'이라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곧이어 그 목소리는 '배신자 카츠모토를 죽여야 한다'로 변했다.


충신인가 역(逆)인가


 히데요리와 요도도노의 신뢰를 잃은 지금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기에 카츠모토는 자신의 부하를 이끌고 오오사카 성()을 탈출하여 이바라키 성()으로 갔다. 이에야스는 이것을 칸토우[関東]에 대한 오오사카 측의 선전포고라 여기고 오오사카 정벌을 위해 여러 다이묘우[大名]에게 출동명령을 내렸다.


 1614 10 11일. 이에야스는 순푸를 출발하여 이로인해 '오오사카 겨울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된 이에야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음에 틀림이 없다.


 11 4일.

 쿄우토[京都]에 도착한 이에야스는 곧바로 카츠모토를 불러 오오사카 성() 공략에 대한 이야기 나누었다. 카츠모토에게는 원하지 않았던 바이며 어쩔 수 없던 선택이기도 했지만 이젠 더 이상 어찌할 수도 없었다. 오오사카 성내의 일이라면 누구보다도 카츠모토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협력을 바라는데 거부할 수도 없었다.


 12 16일.

 시작된 공성 측의 대포 공격 중 한 발이 요도도노가 거주하던 곳에 떨어졌다. 거기에 다음해 여름의 싸움 때 야마사토[山里]의 성곽에 있는 히데요리 일행의 소재를 확인하여 히데타다[秀忠]에게 고한 것도 카츠모토라고 한다.


 토요토미 가 멸망으로부터 20일 후.

 카츠모토는 쿄우토[京都]에서 병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진상은 깊은 죄와 자기 혐오에 빠져 자해(自害)를 했던 것이 아닐까?

  1. 시즈가타케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2. 히데요리의 생모. [본문으로]
  3. 이에야스[家康]의 이름을 안(安)자로 갈라놓았기 때문. [본문으로]
  4. 이에야스[家康]가 히데타다[秀忠]에게 쇼우군[将軍]직을 물려주고 은거하고 있던 곳. 말이 은거지 중요정책사항들은 대개 맡아서 하고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즉 막부의 지배하에 들어오라는 의미. [본문으로]
  6. 대략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郡山]가 유력 후보지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7. 오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의 모친으로 요도도노[淀殿]의 유모(乳母). [본문으로]
  8.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秀頼]의 유모(乳母)이며, 히데요리의 창술 스승 와타나베 타다스[渡辺糺]의 모친. [본문으로]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

1586 5 4일 병사(病死) 52.

생년불명[각주:1] ~ 1586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겨 셋츠() 아리오카(有岡)()의 성주(城主)가 되었다. 후에 모우리(毛利)(), 혼간지(本願寺)와 손을 잡고 모반을 일으키지만 실패하여 도망쳤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시대가 되자, 센노 소우에키(千 宗易)에게 다도(茶道)를 배워, [利休七哲[각주:2]]의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의 다인(茶人)이 되었다. (그림은 KOEI의 태합입지전V)






풍류의 자리에 있던 이외의 인물



 혼노우(本能)()의 변이 일어난 지 1 3개월 정도 지난 1583 9 16.

 아라키 무라시게는 죽은 오다 노부나가를 대신하여 쿄우토(京都)와 킨키(近畿)의 새로운 패자(覇者)가 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가 처음으로 개최한 [차 도구 전시회 = 御道具揃]에 참가하였다. 이미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道薰(도우쿤)]이라는 호를 칭하고 있었다. 참가한 면면(面面)을 보면,

구우나이쿄우(宮内卿) 호우인(法印[각주:3])[마츠이 유우칸(松井 友閑)]

소우에키(센노 리큐우 = 千 利休)

모즈야 소우안(万代屋 宗安)

텐노우지야(天王寺屋[츠다(津田)]소우규우(宗及)

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전부 노부나가의 풍류 취미와 관련된 스키샤(数奇者[각주:4])이며 사도우(茶頭[각주:5])였다.


더구나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케다 쇼우뉴우(勝入)[츠네오키(恒興)],

의사인 토쿠운켄(德雲軒)[야쿠인 젠소우(院 全宗)]

가 있었다. 츠네오키는 노부나가의 유형제(乳兄弟[각주:6])였으며, 토쿠운켄은 산몬(山門[각주:7])이나 조정에 연줄이 있는 승의(僧醫)였기에 둘 다 히데요시의 권력장악에 불가결한 사람들이었다.


 소우규우나 소우에키라는 당대 풍류의 세계를 둘로 나뉘고 있던 다도(茶道)의 거장들과 섞여 무라시게가 내 놓은 것은 [모모지리(桃尻)의 하나이레(花入[각주:8])], 못케이(牧溪)가 그린 걸개 그림인 [범귀회(帰絵)], [효우고(兵庫)의 오오츠보(大壷)] 어느 것이나 이름있는 명물이었다.


 주군(主君)의 복수전이 된 야마사키(山崎)의 싸움에서 이기고, 자기 입으로 일본 통치는 이제부터라고 한 시즈가타케(賤ヶ岳)의 싸움 및 키타노쇼우(北ノ庄)()의 싸움을 이겨 정청(政廳)으로 오오사카(大坂)()과 쿄우토(京都)에 저택을 짓기 시작한 히데요시의 면목을 살리기에 충분한 전시회가 되었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이상한 것은 이러한 장소에 어째서 무라시게가 있을 수 있었냐는 점이었다.


 무라시게라고 하면 1578 10월.

 혼간지(本願寺)에 딸을 인질로 보내어 법주(法主)인 켄뇨 코우사( 光佐)와 맹약을 맺고서는 주군인 노부나가에게 반역을 한 다이묘우(大名)가 아니었던가? 그 때문에 거성(居城)에서 쫓겨나 영지(領地)도 잃고 방랑의 몸이 되었던 인물이 아니었던가? 그런 무라시게가 하필이면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히데요시 밑에 있는 것은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확실히 무라시게는 셋츠의 이케다(池田)()의 부하에서 올라 온 토자마(外様[각주:9])의 신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셋츠의 국주(国主)로 발탁시켜 준 노부나가를 가장 중대한 국면에 배반하여 숙적인 혼간지(本願寺)와 모우리(毛利)()의 연합세력으로 달려간 반역자였기에 오다(織田)쪽에게 있어서는 용서할 수 없는 인물이었을 터였다.


다인(茶人)으로 여생을 보내다.


 당초 여러 방법으로 무라시게의 뜻을 돌릴 방법을 시도했던 노부나가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자 공격에 전념하였다.

 우선 무라시게에게 가담하고 있던 셋츠 타카츠키(高槻)()의 성주인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과 이바라키(茨木)()의 성주인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清秀)등을 귀순시킨 후에 무라시게의 거성(居城) 아리오카(有岡)를 포위하였다. 1578 11월부터 10개월간에 걸친 장기 포위전을 전개 하여 다음 해 1579 9 2 무라시게가 처자식을버려둔 채 아리오카성()을 탈출하여 아마가사키(尼崎)()으로 도망치자, 노부나가 군세는 아리오카성을 함락시켜 무라시게의 처자식과 친척 36명을 쿄우토(京都)의 로쿠죠(六条) 강변(河原)에서 처형하였고, 가신(家臣)의 처자식 120여명을 성 아래서 십자가 같은 곳에 매달아 창으로 찔러 죽였으며, 510여명을 역시 성 아래 4개의 집에 쳐 넣고 불을 질러 죽였다.[立入左京亮入道隆佐記].

 그 비참함엔 구경하던 사람도 눈물을 흘렸고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여서 부처가 이 세상을 창조한 이래로 이러한 일은 없었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한다.


 이런 학살이 일어날 즈음. 무라시게는 아마가사키(尼崎)()에서 하나구마(華熊)()으로 피난하였지만 여기도 1580 7월 초 즈음에 오다 세력에게 공격받아 낙성(落城)되자 모우리(毛利)()의 영토로 도망쳤다.자신의 처자식뿐만 아니라 친척, 가신의 처자식마저 참혹한 죽음을 당하는 와중에 거성(居城)이나 일족(一族), 가신을 계속해서 버려가며 도망친 무라시게의 목적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무라시게가 주가(主家)인 이케다(池田)()를 쓰러뜨리는 하극상(下剋上)으로 몸을 일으키긴 했지만 노부나가에게 반역을 일으킨 것은 참언(讒言)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시야마(石山)()[本願寺]을 포위하고 있던 아라키 무라시게의 부대에서 매일 밤마다 작은 배를 이용하여 성()안으로 쌀을 팔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자 노부나가에게 변명을 하려 했던 무라시게를 측근인 나카가와 키요히데가 만류하여 어쩔 수 없이 반역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자세한 사정을 안 노부나가의 적남(嫡男) 노부타다(信忠)나 히데요시들이 무라시게를 굉장히 불쌍히 여겼다고 한다. [寬政重修諸家譜]


 이 때문인지 혼노우(本能)()의 변 후 머물던 빙고(備後) 오노미치(尾道)에서 다인(茶人)인 츠다 소우규우(津田 宗及)에게 사람을 보내는 등 해서 히데요시에 대한 알선을 의뢰한 듯하다. 히데요시에게서 셋츠인지 이즈미(和泉)에 조그만 영지(領地)를 받았다고 전해지지만 주로 다도(茶道)를 통해 섬겼던 듯하다. 모우리(毛利)()와 관계 개선을 꾀하려 하던 히데요시에게 무라시게라는 존재가 필요했을 것이다.


 1586년에 사카이()에서 죽었다.

 후반생은 하극상으로 몸을 일으켰던 효웅(梟雄)의 이미지와는 먼 일개의 스키샤(数奇者)와 같은 최후였다.

  1. 위키피디아와 KOEI 태합입지전 평전에는 1535년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2. 리큐우(=宗易)에게 배운 제자들 중 뛰어난 일곱 제자. 문서에 따라 다르나 주로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후루타 시게테루(古田 重然), 시바야마 무네츠나(芝山 宗綱, 세타 마사타다(瀬田正忠), 카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마키무라 토시사다(牧村利貞)를 지칭함. 아라키 무라시게의 경우 오다 우라쿠사이(織田 有楽斎), 리큐우의 아들인 센노 도우안(千 道安)과 함께 십철(十哲)로 꼽힌다. [본문으로]
  3. 승정의 최고위. [본문으로]
  4. 풍류인(風流人)을 말하나 주로 다인(茶人)을 지칭한다. [본문으로]
  5. 다도(茶道)의 자리에서 리드하던 사람. [본문으로]
  6. 같은 여성의 젖을 먹고 자란 사이. 높은 집안의 아이는 모친의 젖이 아닌 다른 사람의 젖을 먹는 풍습이 있었는데, 노부나가는 유모의 유두를 물어 뜯는 버릇이 있었지만 츠네오키의 모친의 젖만은 얌전히 먹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7. 보통은 '절'을 뜻하나 여기서는 히에이산(比叡山) 엔략쿠(延暦)사(寺)를 말함. [본문으로]
  8. 다도할 때 꽃을 꽃아 놓는 도자기. [본문으로]
  9. 대대로 섬긴 가문 아닌 새로 부하가 된 가문. [본문으로]

도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

1591 1 22일 병사 51.

1540~1591.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이부제(異父第[각주:1]). 히데요시를 보좌하며 하리마(播磨) 공략전 등 여러 지역에서 활약. 혼노우(本能)()의 변 후에는 히메지(姫路)()에서 천하 통일을 도왔다. 키이(紀伊), 이즈미(和泉), 야마토(大和)를 영유(領有)하며 [야마토 다이나곤(大和 大納言)]으로 불리는 실력자였다.










히데요시를 지탱해 온 동생


  오다 가문(織田)에서 출세한 형 히데요시의 꼬임에 넘어가 억지로 사무라이가 된 '키노시타 코이치로우 히데나가(木下 小一郎 秀長)'. 하지만 형과 함께 전장(戰場)에서 활약하면서 형의 좋은 조언자, 보좌역이 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히데요시가 타지마(但馬)를 평정한 1581년.

 히데나가가 이즈시(出石)()에 입성하여 타지마를 통치하였으며 히데요시가 타지마, 하리마를 영유하자 1582년 히데나가가 히메지성으로 거처를 옮겨 그 지역의 경영에 힘썼다. 그리고 1585 히데요시와 함께 키이의 네고로(根来), 사이가(雑賀) 토벌에 참가하여 그 지역을 평정하자 히데요시에게서 키이, 이즈미 양 지역이 하사 받아 영지 경영을 위해서 와카야마(和歌山)에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의 시코쿠(四国)정벌에서는 병에 걸려 누워있던 히데요시를 대리하여 원정군을 지휘. 불과 50여일 만에 쵸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 元親)를 항복시키는 전공을 올렸다. 히데요시는 동생의 이런 생각하지도 못했던 전공을 기뻐하여 야마토, 이즈미, 키이의 3개국() 100만석의 영주로 임명하였고 거성(居城)으로 야마토 코오리야마(郡山)()이 주어졌다.


 히데나가는 히데요시를 닮아 인정미가 넘쳤고 거기에 온후하고 성실한 인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큐우슈우(九州) 원정 후인 1588 8월 종이위(従二位) 곤다이나곤(権大納言)에 서임 받으면서 부터는 야마토 다이나곤(大和 大納言)이라 불리며 [토요토미 가문 내에 관한 것은 소우에키(宗易 = 센노리큐우(千利休)]에게, 천하에 관한 일은 히데나가에게]라는 풍설이 돌 정도로 히데나가는 리큐우와 함께 히데요시의 양 팔이 되어 토요토미 정권을 뒤에서 지탱했다.


히데나가가 죽은 후, 갈팡질팡하는 히데요시


 1590 3월.

 히데요시는 쿄우토(京都)를 출발, 오다와라(小田原)를 토벌하기 위해 떠났다. 이 때 히데나가는 쿄우토(京都)에 있었는데 1월에 한 때 중태에 빠질 정도로 위중한 병에 걸려있었다. 히데요시는 걱정한 나머지 병상에 있는 히데나가를 세 번 병문안 한 후에야 출진하였고 이 병문안으로 안정을 찾았는지 히데나가의 병이 일단은 나아져, 4 15일에는 야마토 코오리야마에 귀성했다. 하지만 히데나가의 병은 회복되지 않고 재발하였다.


 10월 오다와라 토벌을 끝내고 쿄우토(京都)에 개선한 히데요시는 곧바로 야마토 코오리야마로 달려가 히데나가를 병문안 하였다. 그리고 나라(奈良)의 카스가(春日) 대사(大社)5천석을 기부하여 병이 낳게 해달라는 기도를 의뢰하였고 쿄우토(京都)로 돌아와서도 쿄우토(京都) 안팎의 여러 절과 신사에 병이 낫게 하는 기도를 하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바램도 허무하게 히데나가는 새해가 밝은 1591 1 22 야마토 코오리야마성에서 죽었다. 향년 51.

 장례는 히데요시가 주최하였고 1 29일에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보제(菩提[각주:2])사였던 다이토쿠(大徳)() 소우켄(総見)()에서 코케이 소우친(古渓 宗陳) 화상(和尙)을 도사(導師)로 초빙하여 성대하게 치렀다. 묘는 당초 성 아래인 미노야마(箕山)에 세워진 후 코케이 소우친 화상에 의해 보제소 타이코우(大光)()이 세워져 옮겨졌다.


 히데나가가 야마토 코오리야마성()에 있던 것은 6년여에 지나지 않지만 히데요시를 보좌하는 한편 코오리야마 성()을 크게 개축하면서 성 밑 마을(城下町)을 정비하였고, 옛날부터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절 등이 가진 무력을 해체하여 지역에 바탕을 둔 세력을 뿌리째 없애버리는 등 히데요시의 천하 통일에 이르는 길을 정비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히데나가의 죽음으로 인해, 히데요시는 가족 중에 좋은 조언자를 잃은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토요토미 정권의 장래에 불안한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센노리큐우에게 할복을 명하는 등 히데요시 말년의 폭주가 시작된 것이다.


코오리야마 토요토미가() 폐절(廢絶[각주:3])


 후계자를 낳지 못했던 히데나가는 히데요시와 히데나가의 누나로 칸파쿠(関白) 히데츠구의 생모인 토모의 셋째 아들 히데야스(秀保)를 양자로 삼았다. 후에 [야마토 츄우나곤(大和 中納言)]이라 불린 히데야스가 히데나가의 영지를 이은 것은 그의 나이 13살 때.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성질이 더럽고 나아지질 않았다]고 할 정도였으며 더구나 악성 치질에 걸려 고생하여 이 치질 요양을 위해서 야마토의 토츠카와(十津川) 온천에 간 1595 4 16 잘못해서 절벽에서 떨어져 추락사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히데요시는 히데야스의 죽음을 불길하게 여겨 코오리야마 토요토미가() 2 11년 만에 폐절해 버렸다.


 히데요시는 이후 야마토 코오리야마에 오봉행(五奉行) 중 한 명인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에게 20만석을 주고 배치하였지만, 세키가하라(ヶ原)의 싸움 후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 의해 영지를 몰수당했을 뿐만 아니라 야마토 코오리야마성()을 폐성하기로 결정하여 철저하게 부서졌다.


 또한 히데나가의 묘가 있는 타이코우(大光)()은 쿄우토(京都)의 다이토쿠(大徳)()로 옮겨졌는데, 이것은 이장한 타카토라(高虎)1576년에 20살의 나이로 히데나가를 시작으로 1595년 히데야스가 죽을 때까지 코오리야마 토요토미 가()를 섬겼기 때문이다.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에서 토요토미 가()가 멸망하면서부터 해가 갈수록 황폐해져 가는 히데나가의 묘를 보고 안타까웠던 타카토라는 토요토미 일족의 묘가 있는 쿄우토(京都)로 옮겼으며 히데나가는 지금도 다이토쿠사()의 타이코우원() 안에 있는 묘소에서 타카토라의 묘와 사이좋게 나란히 잠들고 있다.

  1. 아버지가 틀리고 어머니가 같은 형제 [본문으로]
  2. 사후(死後)의 명복을 빔 [본문으로]
  3. 가문을 없애고 끊기게 함 [본문으로]

도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1598 8 18일 병사 62

1536 ~ 1598.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을 섬기며, [스노마타 하룻밤 성(墨俣一夜城)[각주:1]]등의 공을 세웠다. 빗츄우(備中) 타카마츠(高松)() 공격 중에 혼노우(本能)()의 변을 듣자마자 츄우고쿠 대반전(中国大返[각주:2])를 감행하여 야마자키(山崎)의 싸움에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쓰러뜨렸다. 후에 쵸우소카베(長宗我部), 시마즈(島津), 호우죠우(北条)()를 항복시켜 천하를 통일하였다.







현실도피의 꽃구경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는 1598년 새해가 밝자 교착상태에 빠진 조선 전선(朝鮮 戰線[각주:3])우울함에서 도피라도 하듯이 [다이고의 꽃구경(醍醐花見)]의 장소가 되는 다이고(醍醐)()의 정비에 열중했다. 1년 전부터 기획한 꽃구경이었지만 어두운 현실에서 눈을 돌려 도피하기에는 다시 없는 기회인 듯 했다.

 말년의 히데요시는 고독한 위정자(爲政者)였다.


 히데요시 스스로 다이고사()로 가서 오우닌의 난(応仁の乱) 때 황폐해진 절의 여러 건물()을 계속해서 수복(修復)하고 정원을 새로 만드는 것에도 직접 힘을 쏟는 등 진두지휘(陣頭指揮)하였다. 마치 이 꽃구경 행사가 [마지막 잔치]가 될 것이라는 것을 히데요시 자신이 예지라도 한 것인지 굉장한 열의를 가지고 힘을 쏟았던 것이다.


 이렇게 준비의 만전을 기한 끝에 열린 3 15 [다이고의 꽃구경] 문자 그대로 호화찬란한 사상 최고의 꽃구경이 되었다.

 히데요시는 어린 히데요리()와 함께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각주:4]), 요도도노(淀殿[각주:5]), 마츠노마루도노(丸殿[각주:6]), 산노마루도노(丸殿[각주:7])등의 정실(正室), 측실(側室)들을 시작으로, 그녀들의 시녀들이나 여러 다이묘우(大名)의 부인들과 함께 만개한 벚나무 아래를 거닐며 하루 종일 꽃구경 잔치를 즐겼다. 늙은 히데요시에게 있어 화려한 옷을 입은 여인들 사이에서 즐기는 꽃구경은 현세를 잊고 도원경(桃源境)에서 노니는 심경이었음이 틀림 없다.


병에 걸린 히데요시


 꽃구경이 끝난 뒤에도 히데요시는 다이고사()에 들려 절 수복에 힘썼다. 여전히 어두운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도피하고픈 듯이.


 하지만 5 9.

 천하인(天下人)만이 소유할 수 있다고 하는 천하의 명석(名石 - 藤戸石) 히데요시의 손을 떠나 다이고사()로 옮겨져 산호우()()의 정원 정면 중앙에 놓여 졌을 때 히데요시는 후시미(伏見)()에서 병으로 누워 있었다.


 히데요시는 그 4일 전인 5 5일.

 갑자기 병에 걸려 그 날부터 투병 생활에 들어간다. 하지만 당초는 본인도 가볍게 생각하고 있던 병이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그 때문에 전국의 절과 신사(神社)들에게 쾌유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요청이 내려졌고 조정(朝廷)에서도 임시 카구라(神楽[각주:8])를 행하여 병마에서 헤어 나올 수 있게 하는 기도가 행해졌다. 하지만 기도의 효험은 나타나질 않았고 한 때는 인사불성에 빠졌다.


비통한 최후와 유언장


 히데요시도 죽음이 가까워진 것을 깨달은 듯 하다.

 7 15일.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에게 후계자인 히데요리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서약서(誓紙)를 제출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오대로(五大老), 오봉행(五奉行)을 정하여 당시 6살의 어린 히데요리를 위해 토요토미 정권 체제를 강화하는 등 죽을 때가 다 된 히데요시에게오직 히데요리의 미래만이 신경 쓰일 뿐이었다.


 그리고 8 5일.

 히데요시는 오대로에게 보낸 이승에서의 이별이라고 할 수 있는 유언장을 써서 계속해서 히데요리를 부탁하였다.

히데요리를 부탁합니다. 이것 말고는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습니다.

거듭거듭 히데요리를 부탁합니다. 다섯 분에게 부탁합니다.

막상 다섯 분에게 말씀드리고나니 이별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현세에 미련을 남긴 채 죽음을 맞이하고 있던 텐카비토(天下人) 히데요시의 비통한 마지막 말이었다.


 이리하여 히데요시는 그 해인 1598 8 18일 새벽. 후시미 성에서 생이 마감하였다. 향년 62.


 히데요시에게는 또한 사세구()가 있다.

이슬 떨어져 이슬처럼 사라지는 나의 생명이려나

무슨 일(또는 오오사카)이건 꿈 속의 꿈

 오대로에게 보낸 유언장처럼 아쉬움이 배어 나오는 서글픈 시이다.

 하지만 이 시는 히데요시의 예언이기도 했는지 히데요시는 토요토미 가문을 시작으로 토요토미 정권의 비극적인 결말까지 예견한 듯하다.


 히데요리는 히데요시가 그 후사를 부탁했던 오대로의 필두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에게 공격 당하여 토요토미 가문은는 멸망하였다. 거기에 히데요시가 쌓은 난공불락의 성이었던 오오사카 성()은 오오사카 여름의 전투에서 불에 타 없어졌으며 후시미 성()도 세키가하라(ヶ原)의 싸움에서 공격 받은 피해로 인하여 폐성(廢城)이 되어 없어졌다. 그리고 히데요시를 신으로 모신 호우고쿠(豊国) 신사(神社) 이에야스의 파괴 명령으로 인해 소멸되었다. 이리하여 히데요시 일대(一代)의 힘으로 쌓아 올린 토요토미 가 영광의 흔적은 이에야스에 의해 전부 이 세상에서 말살되어 그야말로 남가일몽(南柯一夢)처럼 허무하게 없어진 것이다.

  1. 스노마타에 하룻밤만에 성을 세웠다는 전설. [본문으로]
  2. 보통보다 더 빨리 철수한 것을 이름 [본문으로]
  3. 정유재란을 말함. [본문으로]
  4. 정실 네네(ねね). [본문으로]
  5. 히데요리의 친모(親母). [본문으로]
  6. 와카사 타케다(若狭 武田)씨(氏) 최후의 당주 타케다 모토아키(武田元明)의 부인. 타케다가 혼노(本能)사(寺)의 변 때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편을 들어 후에 할복. 이에 따라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었다. [본문으로]
  7. 오다 노부나가의 다섯 번째 딸. [본문으로]
  8. 신에 춤을 바치기 위해 추어진 가무(歌舞). [본문으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 三成]

1600 10 1일 참수 41

1560~1600.

어릴 때부터 히데요시[秀吉]를 가까이서 섬겼다.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에서는 오봉행(五奉行)중의 한 사람으로 문리파(文吏派) 다이묘우[大名]의 리더로 인식되었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 이에야스[家康] 타도를 꾀하여 미노[美濃] 세키가하라[ヶ原]에서 결전을 벌이지만 패배. 쿄우토[京都] 로쿠죠우 강변[六 河原]에서 참수당했다.









태합(太閤)의 넘버 원 총신(寵臣)


 어렸을 때부터 절에서 일했던[각주:1] 이시다 미츠나리가 권력의 정점에 선 것은, 태합 토요토미노 히데요시 아래서 봉행에 임명되어 오우미[近江] 사와야마[佐和山] 19 4천석(쿠라이리치[入地[각주:2]]를 포함하면 약 30만석)을 영유하면서 부터이다.

 히데요시는 말년에 정권 집행을 미츠나리에게 맡겼으며, 이런 미츠나리에게는 아무리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라도 미츠나리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고 한다.


 미츠나리의 권세가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1598 8 18 히데요시가 죽으면서부터이다.
[이타자카 보쿠사이 비망록(板坂)]에 따르면, 오대로(五大老)[각주:3]와 오봉행(五奉行)[각주:4] 제도는 이 해(1598) 7 13일에 정해졌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죽음을 예감하여 자신의 유언을 법규로 삼아 자신의 사후에도 토요토미 정권의 안정을 꾀하려 하였다. 히데요시의 뇌리에는 토요토미 가의 존속(存續밖에 없었다. 정권을 히데요리[秀頼]에게 물려주고 싶지만 히데요시는 자신이 죽은 뒤 천하를 거머쥐는 것은 이에야스라고 간파하고 있었다. 때문에 히데요리의 보좌를 맡은 코이데 히데마사[小出 秀政][각주:5]와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각주:6]에게는,

내 가문을 끊기게 하고 싶지 않으면 절대 이에야스에게 반항해서는 안 된다. 조심 또 조심스럽게 이에야스를 섬겨 히데요리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게 하여라. 그러면 우리 가문이 끊어지는 일은 없다.

 고 유언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는 한편 총애하는 신하인 이시다 미츠나리에게는 일시적이나마 정권을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에게 맡기지만, 히데요리가 성인이 되었을 때에는 히데요리가 물려받을 수 있도록 꾀하라고 히데마사와 카타모토와는 정반대의 명령을 내린 것이다.


타도 이에야스


 미츠나리는 융통성이 없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히데요시의 명령을 충실히 실행하려고 하였다.

 토시이에는 히데요시의 막역한 친구였기에 히데요시의 유언을 잘 지켰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야망은 천하를 잡는데 있었다. 곧바로 토오토미 가문을 멸하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미츠나리는 그런 이에야스의 행동에 제동을 걸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암살도 계획했지만 실패했다. 거기에 더 귀찮은 일이 생겼는데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 무공파(武功派)와 알력이 생긴 것이었다. 그들은 1599년 윤3 3 히데요리의 후견인이었던 마에다 토시이에가 병으로 죽는 것과 동시에 미츠나리를 습격했다. 이것을 중재한 것이 이에야스였다. 대신 미츠나리는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에 칩거 당하게 되었다.


 대로, 봉행 제도를 무시한 이에야스 독재 정치는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다.

 상경명령에 응하지 않던 같은 대로(大老직급인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치기 위한 아이즈 원정[津遠征]에 아무도 반대의 뜻을 표하지 않고 이에야스를 따라간 것도 이에야스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원정 뒤에는 미츠나리의 거병(擧兵)을 유도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했다.


곶감을 거절하다.


 이에야스가 자리를 비운틈을 노려 미츠나리는 거병하였다.

 맹우(盟友)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는 무모하다고 반대하였지만, 태합 히데요시에 대한 보은(報恩)이라는 말에 동의하였다. 이에야스의 유언 위반을 지탄하는 격문(檄文)을 여러 다이묘우[大名]에게 날리며 선전포고하였다.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이에야스였다. 토요토미 은고(恩顧[각주:7])의 토자마 다이묘우[外大名[각주:8]]를 거느리고 미츠나리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말머리를 서쪽으로 향했다. 미츠나리는 만전의 태세로 미노[美濃] 세키가하라[ヶ原]에 포진하여 동군(東軍)을 유격하려 하였다.


 1600 9 15일 이른 아침. 천하를 가름하는 최후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서군을 표방한 많은 무장들이 싸우지 않는 와중에서도 선전하였다. 그러나 미츠나리가 예측하지 못했던 사태가 일어났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등 다섯 무장[각주:9]이 싸움 중에 서군을 배신하고서는 공격해 왔다. 무방비의 등 뒤를 총에 맞은 것과 같이 충격과 혼란 속에서 서군은 완패하였다.


 미츠나리에게는 이에야스 타도의 대의(大義)가 있었다.

 울분을 삼키고 이부키[伊吹]산 속으로 도망쳤지만, 패배자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인정은 종이보다 얇은 법. 밀고에 의해 숨어있던 곳이 밝혀져 이에야스 앞에 잡혀왔다. 미츠나리의 행위를 문책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에야스 편에 선 무장 중에도 동정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미츠나리는 잡힌 몸이면서도 비굴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직했다. 창피한 행위는 아니었다고 후회하는 안색조차 띄우지 않았다.


 쿄우토[京都] 로쿠죠우 강변[六河原]의 형장으로 향할 때, 갈증을 느낀 미츠나리가 따스한 물을 원하자 경호하던 무사가 따스한 물은 없으니까 대신하라며 곶감을 권했다. 이에 미츠나리는 곶감은 담()에 나쁘다고 거절했다. 경호하던 무사들은 비웃었지만 "큰 뜻을 품고 있는 사람은 죽기 바로 직전까지 생명을 아끼는 법이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미츠나리가 포진했던 사사오 산[笹尾山](기후 현[岐阜県] 세키가하라 정[関ヶ原町])

  1. 당시엔 입을 줄이기 위해서 아이를 절에 맡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히데요시도 어렸을 땐 절에 맡겨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2. 히데요시의 직할령을 말하며, 미츠나리는 이 직할령의 대관(代官 – 주인을 대신하여 관리함)을 맡았다. [본문으로]
  3.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4. 일반적으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 마에다 겡이(前田 玄以) [본문으로]
  5. 히데마사의 부인은 히데요시의 모친 오오만도코로[大政所]의 동생. 즉 히데요시의 이모부. [본문으로]
  6. 시즈가타케[賤ヶ岳] 칠본창 중 한 명. [본문으로]
  7. 히데요시에게 은혜를 가지고 있거나 직접 히데요시가 키운 무장들 [본문으로]
  8. 직속 부하가 아닌 동맹격인 다이묘우 [본문으로]
  9. 이 중 넷은 히데아키의 배신을 대비하여 요시츠구가 배치한 무장들이었다. 이 중에는 한국에서'만' 명장 취급을 받는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도 있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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