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
1573
8 28
할복 29

1545 ~ 1573.

오우미(近江) 오다니(小谷) 성주(城主).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여동생인 오이치()를 처로 맞이하여 동맹을 맺지만, 맹우 아사쿠라(朝倉)()를 노부나가가 공격하였기 때문에 배반. 아사쿠라 요시카게(義景)와 함께 아네가와(姉川)의 전투를 벌이나 패배. 후에 오다니 성을 공격당하여 할복했다.






부인과 자식을 사랑하는 호북(湖北)의 용장(勇將)


 아자이 가문은(浅井)초대(初代) 스케마사(亮政)가 주가(主家)인 쿄우코쿠(京極)()를 하극상(下剋上)으로 밟고 올라 와 히사마사(久政), 나가마사로 3대가 이어져 소위 [호북의 패자(覇者)]가 되어있었다. 특히 나가마사는 조부의 기질을 이어 받아 뛰어난 무략(武略)을 발휘하여 가문의 기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1567년.

 오와리(尾張) 키요스(淸州) 성주 오다 노부나가의 동생 오이치를 처로 맞이하여 아자이 가()의 위세는 안정되게 되었다. 오이치와의 사이에 2 3녀를 두었고 이 행복이 영원이 이어질 것이라고 꿈꾸고 있었다.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받들어 상경(上京)할 때 나가마사는 망설임 없이 노부나가와 함께 롯카쿠(六角)()를 싸워 추방시켰다.


 하지만 나가마사는 노부나가의 이기적인 면을 꽤 뚫어 보지 못했다. 아니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부인이나 자식들을 너무 사랑하여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었을 것이다.노부나가는 나가마사의 사람 좋은 것을 이용하여 약속을 위반하였다.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 공격이었다.


노부나가와 갈라서다.


 나가마사는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을 때 - 에치젠의 아사쿠라씨()는 조부 스케마사의 시대부터 친밀한 관계이니 자신한테 알리지 않고 아사쿠라씨()를 공격하지 않는다. 만약 아사쿠라씨()를 공격할 때에는 사전에 나가마사의 이해를 구하도록 굳게 약속했다.

 그러나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은 노부나가를 싫어하여번히 쿄우()로 올라오도록 한 요청에도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다의 속성(属城)인 테즈츠(手筒), 카나가사키()를 빼앗아 버린 것이다. 노부나가는 격노하여 나가마사에게 통보하지 않고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의 원군과 함께 에치젠 공격을 감행했다. 1570 2월이었다.


 그야말로 오다군의 선봉이 아사쿠라의 본거지인 이치죠다니(一乗谷)를 포위하려 할 즈음 노부나가는 나가마사가 배반하여 요시카게에게 가담한 것을 알게 되었다. 옛 의리를 중요시 하는 부친 히사마사의 설득에 의한 것이었다고도 하지만 거기에는 나가마사의 논리가 있었으며 맹목적으로 노부나가를 섬길 수 없다는 오우미(近江) 무사의 의지도 있었을 것이다. 노부나가는 에치젠에서 철수를 명하고 쿄우()로 돌아갔다. 앞뒤로 협격 당하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사태는 같은 해 6월의 아네가와(姉川) 전투로 발전했다.

 이부키(伊吹)산에서 비와코(琵琶) 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아네가와 천을 사이에 두고, 오다-토쿠가와 연합군과 아자이-아사쿠라 연합군이 싸웠다. 선전했지만 노부나가 측의 머릿수에 눌려 나가마사 측은 패배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나가마사는 거성(居城)인 오다니 성을 중심으로 끊이지 않고 노부나가 진영을 공격하여 괴롭혔다.


부인과 자식을 도망시키고 철저항전


 부인과 자식을 가진 인간은 자식이 성장함과 동시에 보수적인 자세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필시 나가마사도 그랬음에 틀림이 없다. 오오기마치(正親町) 텐노우(天皇)의 명령를 바탕으로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중개에 나서자 나가마사는 간단히 화의(和議)에 응했다. 성립은 1570년 12월 14.

 이것을 좋지 않게 생각한 나가마사 휘하의 무장도 있었다. 이소노 카즈마사(磯野 員昌) 등의 부하 장수들이 나가마사에게는 더 이상의 가망성이 느낄 수 없다고 단념하며 뒤를 이어 노부나가에게 항복하였다. 나가마사의 수동적인 모습에 실망을 느꼈기 때문이다.


 노부나가는 집념이 강하다. 자신을 거역한 자를 방치해 두는 성격이 아니다. 우선 1573 8월에 에치젠을 공격하였고, 20일에는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자살로 몰았다. 일족인 아사쿠라 카게아키라(朝倉 景鏡)의 배반이 원인이었다. 그리고 노부나가는 이 공격의 기세를 이용하여 나가마사의 오다니 성을 포위하였다.


 8 26일.

 노부나가는 오우미(近江)의 토라고젠(虎御前)산에 포진하고, 후와 카와치노카미(不破 河內守)를 사자로 하여 나가마사에게 항복을 권고하였다. 요시카게를 쓰러트린 지금 나가마사에게는 원한이 없으니 항복한다면 나쁘게는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나가마사가 거절하자 이번엔 야마토(大和) 일국을 주겠다고 하였다.

 나가마사는 1568년 오우미(近江) 침공부터 6년 간 노부나가의 동향을 빠짐없이 관찰해 왔다. 아무래도 목숨을 구해 줄 것 같은 상대가 아니다. 나가마사는 다시 거절했다.

 이 이야기는 결국 오다니성에 농성하는 무장들을 동요시켜 전투의욕을 잃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졌다.


 카와치노카미가 돌아가자 부인인 오이치노카타(市の方)를 설득하여 딸 세 명(챠챠([각주:1]), 오하츠(お初), 오고우(お江[각주:2]))과 함께 노부나가에게 보냈다. 아들인 만부쿠마루(万福丸)와 이쿠마루(幾丸[각주:3])는 도망치지만 만부쿠마루는 잡혀서 살해당한다.


 나가마사는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고 성 밖으로 나가 용감하게 싸웠다. 그리고 8 28일. 성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아카오 미마사카노카미(赤尾 美作守)의 저택에서 할복하였다. 향년 29.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는 사람이 많았다.

  1. 후에 요도도노(淀殿). [본문으로]
  2. 후에 에도 바쿠후(江戸幕府) 2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의 부인. [본문으로]
  3. 갓난 아기였기에 절로 보내져 중이 되었지만 후에 호소카와(細川)씨의 가신이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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