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노시타 가쓰토시(木下 勝俊)

1649 6 15 병사 81

1569 ~ 1649.

호는 쵸우쇼우지[長嘯子=장소자] .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정실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의 조카. 와카사[若狹]의 오바마성[小浜城]성주였으나,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 임무 방임죄로 영지(領地)를 잃었다. 후에 풍류의 세계에 살며 가인(歌人)으로 이름을 남겼다. 저서로는 가집(歌集) '쿄하쿠슈우[举白集]'











전도유망했던 와카사 소장(若狹少将)


 세키가하라 전투를 일컬어 '천하를 가르는 싸움'이라 하는데 이번에 등장하는 무장 키노시타 카츠토시에게 있어서도 인생이 갈려 버린 싸움이었다.

 카츠토시는 1569토요토미노 히데요시의 정실 키타노만도코로의 오빠인 키노시타 이에사다[木下 家定]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막내 동생이 히데토시[秀俊] - 후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각주:1]였다. 성인식을 치른 후 카츠토시는 1548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 히데요시를 따라 종군하였는데 아마 이것이 전장에 처음 출진일 것이다.

 

 1587년.

 큐우슈우[九州] 정벌에서도 1천의 병력을 이끌고 종군했다. 이 시기에 시키부다이후[式部大輔]에 임관.

 다음해 1588년 4 14 쥬우라쿠테이[聚樂亭]로 천황이 놀러 갔을 때, 카츠토시는 칸파쿠[関白] 히데요시의 우마차 바로 뒤를 따랐다. 그때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그 뜻을 적은 서약서에 [타츠노 지쥬우 토요토미노 카츠토시[龍野 侍從 豊臣 秀俊]]라 서명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당시 하리마[播磨] 타츠노 성주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590년.

 칸토우[関東], 오우슈우[奧州] 원정에서는 9백명을 동원. 이어서 1592년 조선 출병으로 인해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에 주둔하지만 조선에는 건너 가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다음해인 1591 1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의 뒤를 이어 와카사 오바마 6 2천석으로 이봉되었다. 이 때 동생인 토시후사[利房]도 같은 와카사 내의 타카하마 성[高浜城] 2만석으로 봉해졌기에 카츠토시, 토시후사 형제가 다이묘우[大名]로서 와카사를 지배하게 되었다.


 또한 1598 4월에는 종사위하(從四位下) 사코노에노곤쇼우쇼우[佐近衛権少将]에 임관되었기에, 와카사 쇼우쇼우[若狹少将]라 불렸다. 키타노만도코로의 조카, 거기에 타이코우[太閤] 히데요시[秀吉]의 친족이기에 카츠토시의 앞날은 그야말로 전도유망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2년 뒤에 운명의 세키가하라의 전투를 맞이한 것이다.


후시미(伏見)성의 수비에서 도망치다.


 1600 7월.

 세키가하라의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는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우에스기 씨[上杉氏]를 토벌하기 위해 칸토우로 내려가면서, 카츠토시에게 후시미 성의 수비를 명령하였기에 카츠토시는 후시미 성의 마츠노마루[丸]를 수비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를 타도하려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의 서군의 포위 공격이 시작되자 몰래 후시미성에서 빠져나온다. 공격군 중에는 동생인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참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츠토시가 후시미성의 수비를 방기(放棄)한 것은 이에야스의 명령을 배신하고 서군에 가담한 것을 의미했다. 결국 서군의 맹공을 받은 후시미성은 곧바로 낙성되었고 이에야스의 부하인 토리이 모토타다[鳥居 元忠] 등 농성군은 장열한 전사를 했다.


 9 15일 세키가하라 전투가 이에야스의 승리로 끝나자 전후 처리과정에서 임무 방임의 책임에 따라 와카사 오바마 62천석을 몰수당한다. 이때 카츠토시의 정실 모리 씨[森氏]는 카츠토시의 행동에 정이 떨어져 비구니가 됨과 동시에 카츠토시에게 시를 한 편 보내고는 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한다. 참고로 이 정실 모리씨는 예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유력 부장이었던 모리 요시나리[森 可成]의 딸로,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 때 전사한 모리 란마루[森 蘭丸]의 여동생이었다.


낙동[洛東[각주:2]]의 은거자


 그 후 다이묘우에서 전락하여 낭인이 된 카츠토시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쿄우토 히가시야마[東山]의 코우다이 사[高台寺]에서 죽은 히데요시의 명복을 빌고 있던 키타노만도코로는 조카인 카츠토시를 불쌍히 여겨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1608 8월.

 카츠토시의 부친인 키노시타 이에사다가 쿄우토에서 죽자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에사다의 영지였던 빗츄우[備中] 아시모리[足守] 2 5천석을 카츠토시와 토시후사에게 나누어 물려받게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끼어든 키타노만도코로가 이에야스의 명령과는 다르게 이에사다의 영지를 카츠토시 한 명에게만 몰아주었기에 격노한 이에야스는 영지의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고 아시모리 2 5천석은 아사노 나가마사의 둘째 아들인 나가아키라[長晟]들에게 주어 버렸다. 이 직후 다시 다이묘우가 되지 못한 카츠토시는 머리를 깎고 '쵸우쇼우지[長嘯子]'라 호를 칭한 것 같다.


 1610 6월.

 카츠토시는 키타만도코로의 영지인 셋츠[摂津] 히라노 장[平野庄]을 관리하게 되었다. 이 관리직도 원래는 부친 이에사다가 하고 있던 것으로 영주(領主)인 키타노만도코로의 배려로 카츠토시가 이어받게 된 것이다.

 후에 히가시야마에 은거한 카츠토시는 와카[和歌]의 길을 정진하면서 근세 초기의 와카의 무대에 이름을 남겼다.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斎], 하야시 라잔[林 羅山]등의 문인이나, 상급귀족[堂上=도우죠우], 하급귀족[地下=지게]의 사람들과 넓은 교우관계를 맺었다.


 1649년 6월 15 쿄우토 서쪽의 오오하라노[大原野]에서 81세로 죽었다. 묘는 숙모인 키타만도코로가 잠든 코우다이 사에 만들어졌다.

  1. 킨고 츄우나곤(金吾中納言). 즉 금오중납언. [본문으로]
  2. 쿄우토(京都)의 동쪽을 이름 [본문으로]

유키 히데야스(結城 秀康)

1607 4 8 병사 34

1574 ~ 1607.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의 차남으로 2대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의 형. 아명은 오기마루[於義丸].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양자가 되어, 큐우슈우[九州] 정벌에서 처음 전장에 출진했다. 후에 유우키 하루토모[結城 晴朝]의 양자가 되어 시모우사[下総] 유우키 성()의 성주가 되었다. 세키가하라[関ヶ原] 에치젠[越前]을 하사 받았다.









쇼우군[将軍]이상의 성망(聲望)


 유우키 히데야스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남이지만 출생할 때부터 기묘한 소문이 따라다니고 있어서[각주:1] 어릴 적에는 부친에게도 푸대접을 받았다. 그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토요토미노 히데요시에게 양자로 보내졌고, 그  히데요시도 또한 시모우사의 유우키 하루토모에게 양자로 보냈다.


 히데요시가 죽자 토쿠가와 쪽으로 복귀하여 세키가하라에서는 우츠노미야[宇都宮]에 진을 치고서 북방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방비한 것이 공적으로 인정받았다.

 쇼우군의 자리는 이모제(異母弟)인 히데타다가 물려받았지만 에치젠 키타노쇼우[北ノ庄]의 영주(領主)로서 68만석을 받은 것 외에도 와카사[若狹]시나노[信濃]월경지까지 합치면 카몬(家門[각주:2]), 후다이(譜代[각주:3])중에서는 대인 75만석의 신분으로 출세했다. 카가[加賀] 100만 석인 마에다 가문[前田]에 대한 방벽이라는 중대한 역할이 맡겨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부친 이에야스를 불안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이에야스가 죽은 뒤 쇼우군 히데타다가 확실히 그를 제어할 수 있을지 어떨지 자신을 가질 수 없었던 듯하다. 히데타다도 형인 히데야스에게는 조심 또 조심을 하여 후시미[伏見]에 있던 히데야스가 처음으로 에도[江戶]에 왔을 때는 매사냥을 핑계로 시나가와[品川]까지 마중을 나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에도성으로 돌아올 정도였다.


짧은 장년(壯年)시대


 이렇듯 나는 새도 떨어뜨릴 기세의 히데야스였지만 불행하게도 34세라는 단명으로 생을 마감한다.

 에치젠의 국주(国主)가 된 1600 12 그는 아직 29세였다. 그 때부터 죽을 때까지는 6년여. 위세가 절정에 이르렀던 때가 이미 말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자신이 실제로 에치젠에 입국했던 것은 1601 5월인데 최초로 한 일은 영지를 가신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으로 중신들에게 기분 좋게 나누어 줌으로 인해 자신의 직할령이 부족하여 부족한 분은 사도[佐渡]에서 에도로 보내지는 금이나 물자에 통행료를 메겨 징수해서 메웠다 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전투는 잘해도 경제관념은 부족했던 모양이다.[각주:4]


 양부(養父)인 유우키 하루토모와 그의 식솔들을 시모우사의 유우키에서 키타노쇼우로 불러들였으며, 유우키 가문[結城)]의 사원(寺院) 등을 이전하거나 키타노쇼우 성의 개축, 정비, 새로운 혼마루[本丸[각주:5]]의 건축도 당초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한 공사들에 이에야스의 명령을 받은 여러 제후들이 협력했다고는 해도 히데야스의 고생도 보통이 아니었다. 거기에 무사들이 모여 사는 곳[각주:6]이나, 상인들의 마을[각주:7]을 조성하는 것도 큰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126개의 마을, 인구 2 5천여의 성 밑 마을(城下町)이다. 새로운 농업, 산업 정책의 책정이나 친번(親藩[각주:8])으로서 막부를 도우는 것 등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악질적인 병에 목숨을 빼앗기다


 1606년.

 히데야스는 마츠다이라 성[松平]을 하사 받아 토쿠가와 일문으로 복귀(이설이 있다)하였으며, 유우키 가문 5남 나오모토[直基]가 잇게 하였다. 같은 해 7월에는 궁궐의 증축, 은퇴한 텐노우[天皇]를 위한 센토우어소[仙洞御所] 조영 공사의 총 책임자를 맡아 조정에도 그의 존재를 인식시켰다. 그가 병으로 쓰러졌을 때는 궁중에서 쾌유를 빌며 신에게 받치는 춤(神楽=かぐら)이 행해질 정도였다.


 그러나 이렇게 위세가 절정에 이르렀던 히데야스의 육체는 이미 병마가 점령하고 있었다.

 이미 궁궐 조영 중에도 일상생활은 불가능한 상태였던 것 같다. 그 때문에 공사 종료 후 막부가 히데야스를 후시미의 죠우다이[城代[각주:9]]에 임명하지만 히데야스는 곧바로 사임. 1607 3월에는 영국(領国)인 에치젠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윤 4 8일에 병사한 것이다.


 그의 병은 당창이라고 하는데 알기 쉽게 말하면 매독이었을 것이다. 당시 유명했던 [이즈모의 오쿠니(出雲のお)] 등 여자 카부키 배우들과 문란한 교재를 갖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던 것을 보면 그 방면에서 감염되었다고 여겨진다. 34세라는 젊은 나이에 코가 떨어져 나갔다는 것을 보면 이 병이 죽음으로 이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뒤를 이은 장남 타다나오[忠直]가 광란 끝에 카이에키[改易[각주:10]]당한 것도 부친에게서의 유전으로 여겨진다.


 오쿠니를 초대한 잔치에서 그녀에게 [너는 천하 제일의 무녀(舞女)가 되었지만, 나는 천하 제일의 무장이 되지 못하였구나]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한다. 불행한 탄생으로 만들어진 히데야스의 마음에 있던 그림자는 끝까지 지워지지 않고 증식하여 그것이 병마를 불러들였을 것이다.

  1. 모친이 헤픈 여성이기에 실제로는 이에야스의 아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소문. [본문으로]
  2. 어삼가(御三家)와 어삼경(御三卿)를 제외한 쇼우군 가문(将軍家)인 토쿠가와(徳川)의 일문친척인 문벌. [본문으로]
  3. 주로 세키가하라 이전부터 이에야스를 섬기던 문벌. [본문으로]
  4. 실제로 히데야스가 전투를 행한 적은 기껏해야 한 번이다. [본문으로]
  5. 성의 심장부인 천수(天守)를 둘러싼 성곽. [본문으로]
  6. 武家町 [본문으로]
  7. 町人町 [본문으로]
  8. 토쿠가와 가문의 일족친척들이 번주로 있는 번. 여기에는 어삼가(御三家)나 어삼경(御三卿)도 포함된다. [본문으로]
  9. 죠우다이[城代]는 성주의 대리를 뜻하며, 특히 후시미성의 죠우다이는 당시 토요토미 가문과 쿄우토[京都]의 감시, 서국으로 간 토요토미 가신들의 감시 등 막중한 임무와 권한이 주어졌다. [본문으로]
  10. 지위와 땅을 뺏어 평민으로 강등시킴. [본문으로]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

1585 4 16 병사 51

1535 ~ 1585.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겼고 각지에 종군하며 공을 세워 오우미[近江] 사와야마[佐和山], 이어서 와카사[若狹]를 하사 받았다. 혼노우지의 변[本能寺の変]이 일어나자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 합류하여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쳤으며 키요스 회의[淸州会議]도 출석. 시즈가타케 전투[岳の戦い]에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와 싸웠다.









노부나가의 사위가 된 부자(父子)


 니와 나가히데가 오다 노부나가의 사위라는 것은 이외로 알려져 있지 않다.
 
나가히데는 노부나가보다 1년 늦은 1535년에 태어났으며 아명은 만치요[万千代]였다. 15세에 노부나가를 가까이서 모시며, 1552년 키요스[淸州] 성주인 오다 히코고로우[織田 彦五郞]의 가재(家宰[각주:1])인 사카이 다이젠[坂井 大膳]을 물리친 카야츠 전투[
萱津の戦い] 그의 첫 데뷔전이라 한다.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桶狹間の戦い]에도 종군했다고 한다.


 1563년.

 노부나가의 양녀(부친은 노부나가의 배다른 형인 노부히로[信広])를 처로 맞이하는데 이것은 나가히데의 능력을 노부나가가 인정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주군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인다는 것은 가신에게 있어 파격의 대우임과 동시에 일문(一門)에 준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 후 노부나가의 전선 확대와 더불어 각지에 종군했으며, 1571년에는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 공략의 중요 거점이었던 오우미의 사와야마 성주가 되어 오우미 지배에 관여했다.


 1581 2월.

 황거의 동쪽 마장에서 행해진 열병식[각주:2]에서는 오다 가신단 중 최초로 등장. 셋츠[摂津], 와카사[若狹]의 무사들을 이끌고 행진하는 명예가 주어졌다. 이것은 바로 전 해인 1580노부나가의 딸과 나가히데의 아들 나가시게[長重]의 결혼이 성립된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보이며, 나가히데가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의 추방 후 오다 정권에서 가장 유력한 무장 중에 한 명인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예일 것이다. 부자 2대에 걸쳐 노부나가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한 예는 니와 씨[丹羽氏]말고는 없다.


 혼노우지의 변 직후에는 하시바 히데요시들과 역신(逆臣)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하였고, 오다 가문의 당주 결정을 둘러싼 소위 키요스 회의에서는 히데요시를 도와 산포우시[三法師-노부나가의 큰아들인 노부타다[信忠]의 아들]를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정했다. 그리고 히데요시, 나가히데, 시바타 카츠이에,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의 숙노(宿老) 4명이 앞으로의 일처리를 행하기로 했다.


 1583 시바타 카츠이에의 멸망 후에는 그의 거성이었던 키타노쇼[北ノ庄]성이 주어져 에치젠[越前], 와카사[若狹], 카가[加賀]의 남부(南部)를 손에 넣어 백 만여석을 소유했다.


망령 퇴치의 기도 의뢰


 1585 4월.

 나가히데는 키타노쇼 성[北ノ庄城]에서 병상에 누었다. 같은 달 4 쿄우토[京都] 요시다 신사[吉田神社]의 신관[神主] 요시다 카네미[吉田 兼見]에게 나가히데의 가신 사타케 데와노카미[佐竹 出羽守]가 편지를 보내왔다. 용건은 나가히데가 병을 앓고 있으며 특히 요 근래는 더욱 심해졌으니 나을 수 있도록 신에게 빌어달라는 의뢰였다.

 편지에는 발병의 원인으로 시바타 카츠이에의 망령이 내린 저주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적혀있었다. 카츠이에는 나가히데와는 동급의 무장이었지만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나가히데는 카츠이에의 권유를 거부하고서 히데요시의 편을 들었기에 당시 이러한 소문이 그럴듯하게 퍼져 쑤군들 대었던 것 같다.


 4 9일.

 키이[紀伊] 사이카[雑賀]를 공격하는 도중에 나가히데가 병상에 누웠다는 소식을 들은 히데요시는 곧바로 당대의 명의(名醫)인 타케다 죠우카[竹田 定可]에게 키타노쇼성으로 가서 나가히데를 치료하도록 의뢰했다. 그러나 죠우카는 곧바로 가지 않은 듯 히데요시는 12일에 다시 가도록 요청할 정도였다.

 13일에 히데요시는 나가히데에게 편지를 보내 위로를 함과 동시에 쿄우토[京都]로 와서 많은 의사들에게 치료를 받도록 권했다.


 하지만 다음 날인 14일.

 나가히데는 병이 더 심해진 것을 깨닫자 세자인 나가시게(14)를 시작으로 친척들과 중신을 머리맡에 불러 어린 나이의 나가시게를 잘 보좌하여 나라를 지킬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같은 날. 가신인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에게 명하여 히데요시에게 보내는 유서를 쓰게 하였다. 유서에는 평소 히데요시에게 은혜를 받은 것을 감사히 여기며, 3개국이나 되는 영지(領地)를 받았으면서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이 죄송하다고 말한 후 후계에 대한 것은 히데요시의 뜻에 맡기겠다고 했다. 이 서장에 [히데요시님(秀吉)]이라 쓰인 것이 인상적이다. 죽음을 앞둔 나가히데로써는 천하인이 되고 있는 히데요시에게 니와 가[丹羽家]의 앞 날을 맡긴 것이다.


죽음을 둘러싼 기괴한 소문


 4 16일.

 나가히데는 51세의 나이로 생의 막을 내리는데 나라[奈良]의 승려 타몬인 에이슌[多聞院 英俊]의 일기에 따르면 나가히데는 병사하는 것이 분하다고 한탄하면서 14일에 할복하여 결국 16일에 죽었다고 쓰고 있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나가히데는 평소부터 담석을 앓고 있어서 고통을 참지 못하고 할복했다고도 전해지는등 기괴한 소문들이 떠돌았다.


 나가히데가 죽은 뒤 나가히데의 세력을 세자인 나가시게가 이어받았지만 영지는 천하인 히데요시에게 차츰 깎여,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 직전에는 단지 카가[加賀]에 12만 여석을 지배하는 하는 정도로 몰락했다. 또한 나츠카 마사이에, 미조구치 히데카츠[溝口 秀勝] 등 유능한 가신들도 곧바로 히데요시 자신의 가신단에 편입시키는 등 니와 씨의 명운은 나가히데의 생각과는 반대로 히데요시에게 유린된 감이 있다.

  1. 그 가문의 재상 [본문으로]
  2. 京都御馬揃え [본문으로]

삿사 나리마사( 成政)

1588년 윤 5 14 할복 53.

1536 ~ 1588.

오와리(尾張) 히라(比良) 성주.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검은 화살막이 부대 - 쿠로호로(黑母衣)()' 필두(筆頭)에 발탁되었다. 주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등과 호쿠리쿠(北陸) 방면을 담당하였다.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항복하여 히고(肥後) 국주()에 임명받았으나, 실정(政)의 책임을 지고 할복.








히데요시(秀吉), 토시이에(利家)와의 관계


 오다 노부나가 시대.

 용맹으로 유명했던 삿사 나리마사는 라이벌 마에다 토시이에와 거의 같은 스피드로 출세하여 토시이에가 오다 군단의 엘리트들이 모인 '붉은 화살막이 부대 - 아카호로(赤母衣)()'에 발탁되었을 때 나리마사는 쿠로호로중 필두가 되었다.

 1576년에는 토시이에와 함께 [부츄우(府中)삼인중[각주:1]]에 임명되었으며, 1581년에는 엣츄우(越中) 60만석을 받아 토야마(富山) 성주가 되었다.


 나리마사의 비운은 1582 6 노부나가의 죽음부터 시작되었다. 혹은 다음 천하인이 되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를 신출내기 출세자로 깔보는 감정이 나리마사의 말년 6년간의 운명을 결정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다음 해인 1583년.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정하는 시즈가타케() 전투에서토야마성에서 움직이는 일 없이 형세를 관망하고 있던 중에 시바타 카츠이에가 히데요시에게 패했다. 할 수 없이 히에요시에게 둘째 딸을 인질로 받치고 항복. 히데요시도 이것을 받아들여 나리마사는 지금까지처럼 엣츄우 일국을 안도받았다.


 그러나 다음해인 1584년.

 코마키(小牧)-나가쿠테(長久手) 전투에서 히데요시와 대치하며 유리하게 싸움을 전개하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의 요청에 응하여 8천의 병력을 이끌고 마에다 토시이에의 영내(領內)노토(能登) 하쿠이(羽咋)의 스에모리(末森)성을 기습하였다. 토시이에의 필사적인 반격에 패퇴하면서도 쿠리카라(俱利加羅) 고개에 병사를 배치하여 나리마사가 끈질기게 분전하고 있던 와중에 중앙에서는 히데요시와 이에야스의 정전 교섭이 성립되려 하고 있었다.

 고립되는 것을 우려한 나리마사는 이에야스에게 싸움을 포기하지 말 것을 설득하기 위해서 엄동의 산길에 악전고투하면서도 돌파(‘サラサラ라 일컬어지고 있다). 하마마츠(浜松)의 이에야스를 만났지만 [나는 히데요시와 원래부터 원한이 없다]며 거절당해 허무하게 귀국한다.


키타노(北野) 대다회(大茶會) 중지


 토시이에의 원군을 요청 받은 히데요시는 호쿠리쿠에 칸파쿠()의 위광을 과시하기 위하여 다음 해인 1585 8만의 병사를 이끌고 보무당당하게 카가(加賀)로 진입했다. 히데요시-토시이에의 대군을 앞에 두고는 용맹을 떨친 나리마사도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머리를 밀고 중이 된 나리마사는 니이카와(新川)() 20만석으로 영지가 줄었지만 살아 남았다.


 그래도 1587년. 나리마사에게 마지막 기회가 주어진다. 큐우슈우(九州)평정을 끝낸 히데요시는 종군했던 나리마사에게 히고(肥後) 일국(一国)을 하사하였다. 그러면서 히데요시는 히고를 지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설명하면서 앞으로 3년간은 토지조사를 행하지 말 것, 각종 토목공사를 일으켜 히고의 영민들을 힘들게 하지 말 것 등, 거기에 농민 반란을 일으키게 하지 말 것 등 5개조의 주의서를 나리마사에게 주었다[각주:2].


 엣츄우에서는 선정을 펼친 나리마사였지만 코쿠진([각주:3]) 영주의 세력이 강한 히고는 지금까지 나리마사가 겪어 온 것과는 달랐다. 거기에 나리마사에게는 히고로 왔을 때 영지 목록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곧바로 제출하라고 명령을 하자, 일부의 코쿠진 영주가 들고 일어났고, 진압을 서두른 나리마사가 3천의 병력을 보내자 반란은 들불처럼 번졌다.


 이때 히데요시는 쿄우토(京都)의 키타노에서 큰 다회(茶會)를 열고 있었는데, 둘째날이 되어 나리마사가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당초 10일간 열릴 예정인 다회를 중지하였다. 차 도구는 무엇이든 좋으며 빈부나 귀천을 묻지 않고 누구나 참가하라는 대 이벤트를 중지할 수 밖에 없게 된 히데요시의 분노는 컸다.


비운의 최후와 검은 백합 전설.


 새해가 된 1588년.

 히데요시가 파견한 원군으로 반란은 진정되기 시작했으나 히데요시에게 실정의 책임을 추궁받은 나리마사는 이유 설명을 위하여 오오사카(大坂)의 히데요시를 방문하려 했으나,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아마가사키(尼崎)의 호우온(法園)()에 유폐되어, 5 14 할복하여 죽었다.

 배를 열십자로 가르고 장기를 손으로 끄집어 내었다고 한다[각주:4].

 53세였다고 한다.


 강직했지만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 했던 나리마사의 비운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러가지 [검은 백합 전설]이 전해 내려 오고 있다.
 그 중 하나로 히데요시의 분노를 산 나리마사는 아마가사키에서 처분을 기다리고 있던 중 하쿠산(白山) 산에서 핀다는 검은 백합을 하야비캬쿠(早飛脚[각주:5])로 받아서, 좋게 말해 달라며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각주:6])에게 보냈다. 이 검은 백합이 맘에 든 키타만도코로는 곧바로 다회를 열어, 초대했던 요도도노(淀殿[각주:7])를 비롯한 측실들에게 은쟁반에 담아 이 귀중하고 신기한 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몇 일 지난 후.
 
꽃이 난 곳을 알아낸 요도도노는 대량의 검은 백합을 가져와 아무 곳에나 심은 뒤 자신의 다회에 초대한 키타노만도코로에게 그렇게 진귀한 것도 아니라는 듯이 여러 사람 앞에서 창피를 주었다.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키타만도코로는 나리마사에게 냉담해져 히데요시에게 나리마사의 목숨을 구해 달라는 탄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예전 나리마사가 토야마 성주로 있을 때 죄가 없는데도 딴 남자와 놀아났다는 누명으로 죽인 애첩 사유리(小百合[각주:8]) 히메()의 저주가 추가된 것도 있.
  1. 또 한 명은 '후와 미츠하루(不破光治)'. [본문으로]
  2. 오제 호안(小瀬 甫庵)의 [보암태합기(甫庵太閤記)]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동시기에 히데요시는 나리마사를 '하시바 히고지쥬우님(羽柴肥後侍従との)'이라고 썼지만, 저 5개조의 편지에는 '삿사 쿠라노스케(佐々内蔵助)'라 적혀있기에 실존성이 의심간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3. 그 지방의 호족. [본문으로]
  4. 그 외에 오오사카 쪽을 노려보다 이빨을 너무 앙물어 서너개의 이빨이 부러졌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5. 지금으로 말하면 택배 같은 것. [본문으로]
  6. 히데요시의 정실.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본문으로]
  7.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秀頼)를 낳았다. 이 일로 히데요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되어 정실인 키타만도코로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작은 백합'이라는 의미. [본문으로]

마에다 도시이에[前田 利家]

1599년 윤 3 3 병사 62

1538 ~ 1599.

오와리[尾張] 아라코[荒子] 성주 마에다 토시마사[前田 利昌]의 아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전공을 세웠고, 혼노우지의 변[本能寺の変] 후에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을 따르며 오대로(五大老)가 된다. 노토[能登], 카가[加賀]에 영지를 받아 '카가 백만석[加賀百万石]'의 기초를 쌓았다.









히데요시의 말벗


 토요토미노 히데요시가 출생 후 1년 뒤인 1538년에 태어난 마에다 토시이에는 히데요시보다 1년 더살아 1599년에 62세로 죽었다. 히데요시와 산 시간이 거의 겹치는 토시이에의 인생은 좋건 나쁘건 히데요시와 서로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말년 히데요시 정권에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하는 1591년부터 토시이에의 존재는 무게감을 더해 갔다.


 1591년.

 히데요시의 동생인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가 병사했으며, 센노 리큐[千 利休]가 할복하였다. 정권의 중추에 있던 두 사람을 잃고 계속해서 아들 츠루마츠[鶴松]가 일찍 죽어버리는 불행을 맛 본 히데요시는 토시이에를 오토키슈우[伽衆]에 임명하여 공과 사에 걸쳐 상담 상대로 하였다. 이 때 토시이에 54.


 다음 해인 1592년.

 히데요시의 조선 출진에 토시이에는 병 8천을 이끌고 히젠[肥前] 나고야 성[名護屋城]으로 출진. 길어지고 있던 진중 생활에 살기(殺氣) 어린 여러 다이묘우[大名]의 사이를 중재하고 가난한 시골 다이묘우의 뒤를 보아주는 등 남을 잘 살펴주는 인품을 발휘했다. 이때 함께 했던 측실인 치요가 임신하여 후에 3대 번주가 되는 4남 토시츠네[利常]를 낳았다.


깊어지는 히데요시와의 친밀도


 토시츠네가 카가 카나자와[金沢]에서 탄생한 1593년.

 히데요시에게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남자아이 후의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났다. 이 히데요리를 너무 귀여워한 나머지 히데요시는 칸파쿠[関白]을 물려주고 있던 조카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와 그의 일족, 파벌을 멸하였다. 그 직후 모든 다이묘우는 히데요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서를 제출. 히데요리는 히데요시의 후계자로서 온 천하에 인식되었다.


 히데츠구와도 친했던 토시이에였지만 히데요시의 신뢰는 흔들리지 않았고 반대로 히데요리의 후견인[=傳役]에 임명되었다. 그것도 모든 다이묘우[大名] 중에서 유일하게 항상 수도권[上方]에 머물면서 후견을 맡는 큰 역할이었다. 육친조차 믿지 않던 독재자도 토시이에의 '의리'에는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히데요시의 측실이나 양녀가 된 토시이에의 딸들과의 2, 3중으로 엮어진 연도 있었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은 그러한 친밀함을 우려하여 이에야스나 토시이에 둘 다 야심이 많기에 언젠가 둘이 손을 잡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미츠나리의 예언은 반은 적중했지만 반은 빗나갔다.


 1598 8월.

 어린 히데요리의 장래를 걱정하며 이에야스, 토시이에 등 대로와봉행(五奉行)들에게 계속해서 후사를 부탁한 히데요시가 죽자 곧바로 야심을 들어낸 이에야스의 앞을 막아선 것은 다름 아닌 토시이에였다. 이때 토시이에도 또한 병들어 있었다. 조선과의 평화 교섭으로 일본에 와 있던 명()심유경(沈惟敬)에게 지속성의 독을 히데요시와 함께 마시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소문이 퍼지는 등 병증의 악화가 매우 빨랐다.

 이 때문에 토시이에는 이미 가독(家督)을 토시나가[利長]에게 물려준 은거료 15천석의 신분이었지만, 히데요시가 죽자 유언을 무시하며 여러 다이묘우와 혼인을 맺으려 하는 이에야스에게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를 나타냈다. 다이묘우들도 양 쪽으로 나뉘는 큰 소동으로 발전했지만, 마에다 가문[前田家]과 연을 맺고 있던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각주:1]들의 노력으로 겨우 수습될 수 있었다.


의리 있는 사나이의 평범한 죽음


 1599년 정월.

 토시이에는 병든 몸을 이끌고 후시미[伏見]의 이에야스를 만나 화해를 의한 회담을 가졌다.


 3 8일에는 이에야스의 답례 방문이 이어졌다.

 토시이에는 괴로운 숨소리로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알리고 토시나가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자, 이에야스도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실은 이때 이에야스를 죽이고자 했지만 가신들이 반대했다고도 토시나가가 그러한 일을 할 생각이 없음을 알고 포기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토시이에에게는 이미 시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3 15일. 죽음이 가까워 짐을 안 토시이에는 자잘하고 상세하게 유산 분배를 하였다.


 3 21일.

 머리맡으로 정실인 마츠를 불러 토시나가에게 보내는 '유훈 11개조[遺戒十一箇条]'를 필기시켰다. 앞으로 3년간 토시나가는 본거지 카가[加賀]로 돌아가서는 안 되며, 병사 1 6천을 카가[加賀]와 오오사카[大坂]에 둘로 나누어 주둔시키고 모반의 징조가 있으면 합류해서 싸우라며 마지막까지도 히데요리를 걱정하였다.


 10일 후.

 점점 더 중태에 빠졌다. 마츠가,
 
"당신은 예전에 싸움터에 나가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지옥에 갔을 때를 대비해 이것을 입어주세요"
 라며 준비한 경문이 쓰여진 수의를 입으라고 하자 토시이에는,
 
"나는 난세에 태어나 전쟁터에 나가 적을 죽이긴 했지만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이거나 괴롭힌 적은 없다. 때문에 난 죄가 없다. 죄가 없는 내가 지옥에 떨어질 이유도 없다. 만약 지옥의 염라대왕이나 도깨비들이 날 얕보고 괴롭힌다면 나보다 먼저 그곳에 간 우리 가문의 용사들을 이끌고 그 곳을 정벌하겠다"
 
고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틀 후인 윤 3 3일.

 마츠와 토시나가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센고쿠 무장[戦国武将]치고는 드문 평범한 죽음이었다.

  1. 타다오키의 아들 타다타카[忠隆]와 토시이에의 딸 치요[千世]는 부부.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