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2년 3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이에미츠[徳川 家光]의 아들 타케치요[竹千代][각주:1]오우미[近江] 히에이잔[比叡山]에 있는 산노우 신사[山王神社][각주:2]에 처음으로 기도를 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기다리고 기다리던 세자[각주:3]가 처음 성 밖을 나가는 것인 만큼 이에미츠는 그런 세자의 첫 나들이를 화려하게 장식해 줄 요량으로 어삼가[御三家][각주:4]까지 함께 가라며 그 일에 대한 처리를 마츠다이라 노부츠나[松平 信綱]에게 맡깁니다[각주:5]. 노부츠나는 우선 어삼가의 필두 오와리[尾張]의 토쿠가와 요시나오[徳川義直]에게 연락합니다.

노부츠나 : 어삼가의 당주들께서도 타체치요님의 히에이잔 기도에 함께 가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요시나오 : 다이나곤[大納言]인 내가 무위무관(無位無官)인 타케치요를 뒤따라 가야 한단 말인가?

노부츠나 : 무위무관이긴 하셔도 타케치요의 아버님은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이십니다.

요시나오 : 아버지를 말하자면 우리 아버지다죠우다이진[太政大臣]이시네.

…하고 거부하여 오와리의 요시나오는 물론 키이[紀伊]의 토쿠가와 요리노부[徳川 頼宣], 미토[水戸]의 토쿠가와 요리후사[徳川 頼房]까지 빠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1. 후에 4대 쇼우군 이에츠나[家綱] [본문으로]
  2.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신호(神号) '토우쇼우다이곤겐[東照大権現]'이라는 이름이 나온 사상적 바탕이 된 곳...이라고 썼지만 사실 제가 철학적인 것을 알리가 없습죠. 단지 천태종(天台宗)을 믿는 텐카이[天海]가 신불습합에 따라 '산노우이치지츠 신도[山王一実神道]에 따라 이에야스를 '곤겐[権現]'으로 만들었다는' 사실'만 조금 알고 있을 뿐입죠 [본문으로]
  3. 1634년 세자가 없던 이에미츠가 조금 아퍼 누워있자. 어삼가 중 하나인 오와리[尾張]의 요시나오[義直]가 군사를 이끌고 에도로 진격하였는데, 세자 없는 이에츠나가 죽으면 요시나오 자신이 쇼우군이 되고자 하여 에도 막부를 공포에 떨게 한 적도 있었기에, 이에미츠로서도, 에도 막부의 각료들에게 있어서도 세자는 절실히 필요했다. [본문으로]
  4. 사실 어삼가[御三家]라는 것이 정식으로 생긴 것은 5대 츠나요시[綱吉] 때나 가서야 생긴 것.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오와리 가문, 키이 가문, 미토 가문. [본문으로]
  5. 별명이 '지혜로운 이즈[知恵伊豆 - 노부츠나의 관직이 이즈노카미[伊豆守]였기에]'일 정도로 현명했기에, 이에미츠는 힘든 일처리를 노부츠나에게 자주 맡겼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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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goreun.com BlogIcon 고어핀드 2011.05.18 17: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텐카이? 설마 난코보 텐카이 스님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 양반이 천태종이었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5.18 17: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 그 난코보우 텐카이[南光坊 天海] 맞습죠.

      콘치인 수우덴[金地院 崇伝=게임 상에는 아마 이신 수우덴[以心崇伝]으로 나오는 것이 많을지도)]은 이에야스를 다이묘우진[大明神]으로 하려 했는데, 갑자기 텐카이가 이에야스는 죽기 직전에 '자신에게만' "난 '곤겐[権現]'이 되고 싶어"라고 했다고 주장하여 말빨로 히데타다를 설득하여 이에야스는 '토우쇼우다이곤겐[東照大権現]'이 됩지요.

      일본 천태종 총본산에 산노우 신앙[山王信仰]이란...제 능력이 부족해서 댓글로 설명하기가 복잡하군요. ^^: 언젠가 따로 포스팅 하겠습니다.

      어쨌든 천태종의 텐카이가 임제종(臨濟宗)의 수우덴에게 승리함으로서 이후 텐카이는 막부의 중추에서 활약하게 되고, 천태종 역시 에도 막부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에도 시대 내내 '노부나가 천하의 개쌍놈'으로 만드는데 일조합죠.

 1960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두 명이었다는 놀랄만한 이설(異說)을 발표한 사람이 있다. 사의(史疑)라는 책을 저술한 무라오카 소이치로우[村岡 素一郎]이다. 토우카이 지방[東海地方]의 지방관리로 근무하던 중 미카와[三河]를 철저하게 조사하여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고 한다.

 후년 천하를 손에 넣은 이에야스는 세라타 모토노부[世良田 元信]라는 양아치들의 두목이었다고 한다. 그는 진짜 이에야스(당시는 마츠다이라 모토야스[松平 元康])의 부하가 되어 불시에 진짜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이에야스에게 이런 이설이 나올 정도이니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의 선조 역시 확실치 않다. 닛타 겐지[新田源治][각주:1]의 자손을 자칭하고 있지만 이는 나중에 날조된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토쿠가와 가문의 시작은 코우즈케[上野] 닛타 군[新田郡]에 살던 토쿠아미[徳阿弥]라는 행각승()으로, 이 스님은 떠돌던 중 미카와에 와서 서부 미카와의 마츠다이라 향[松平郷]의 호족 타로우사에몬[太郎左衛門]의 사위가 되어 환속, 이름을 마츠다이라 타로우사에몬 치카우지[松平 太郎左衛門 親氏]라고 했다 한다.[각주:2]
 후년 이에야스가 쇼우군[将軍]이 되었을 때 아시카가 겐지[足利源氏][각주:3]의 명문 키라 씨[吉良氏][각주:4] [각주:5]의 족보를 물려 받은 것[각주:6]도 이런 애매한 선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명백한 족보사칭이다.

 

화제를 돌려, 이에야스의 천하쟁취는 두견이[ほととぎす]에 비유하여, 울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가 노부나가[信長], ‘울게 만들겠다’가 히데요시[秀吉], 마지막으로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리자’라는 식으로 정권의 자리를 획득했다고 평가 받고 있다.
 또한 에도 시대[江戸時代] 후기 턴포우[天保] 연간[각주:7]에 그려진 풍속도에는 갑주를 입은 남자들이 떡을 만들고 있는 장면이 있어, 절구공이를 들고 막 찧으려고 하는 것이 노부나가, 그 옆에서 떡을 만들고 있는 것이 히데요시, 그리고 최상석에 가만히 앉아서 떡을 먹는 것이 이에야스이다. 이에야스의 천하쟁취를 비꼰 그림으로 그 때문에 만든이인 우타가와 요시토라[歌川 芳虎]는 막부(幕府)에 체포되어 60일간 수갑이라는 형(刑)과 절판이라는 벌에 처해졌다.

 “인간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이에야스의 유훈(遺訓)이라 알려진[각주:8] 이 말은 그의 인생을 잘 표현하고 있다. 참을 인(忍)이라는 글자가 그의 생애를 관철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보다 8살, 히데요시보다는 5살 어리다. 조부 키요야스[清康]의 시대부터 미카와 오카자키[岡崎] 성주가 되었지만, 동쪽의 이마가와[今川], 서쪽의 오다[織田]라는 강력한 세력에 끼어 약소세력의 비애를 맛보고 있었다.
 조부 키요야스가 자신의 부하에게 살해당하면서부터 마츠다이라 가문은 고난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마츠다이라 가문은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보호를 받기 위해 어린 이에야스는 인질로 바쳤고, 그로 인해 이에야스와 마츠다이라 가문은 인종의 시절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12년간 마츠다이라 주종(主從)은 고난 속에서 허덕이지만, 이 시기에 이에야스의 참을성 강한 성격이 만들어진다.

 1560년 5월 19일.
 오다 노부나가의 전격작전으로 인해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桶狭間]에서 죽어, 덕분에 이에야스도 인질생활에서 해방된다. 이에야스는 19살이 되어 있었다.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가문과 관계를 끊고 오다와 동맹을 맺어 미카와 통일을 이룬다. 1563년, 그때까지 모토야스[元康]에서 이에야스[家康]로 개명한다.

 막 새로운 출발을 하려는 찰나 본거지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적이 봉기한다. 영내에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9]가 봉기한 것이다. 미카와에 있던 이마가와 잔당에 더해 대대로 마츠다이라 가문을 섬기던 미카와의 무사들까지도 반기를 들었다.
 이를 반년에 걸쳐 겨우 진압하였는데, 강화 조건의 실시에서 이에야스는 일찌감치 후년의 뻔뻔한 정치성을 발휘한다. 잇코우 종[一向宗][각주:10] 사원의 안전을 보장했으면서도 막상 반란이 진정되자 잇코우의 절들을 모두 파괴해 버렸다.

 약자와 맺은 약속은 아무렇지도 않게 어기지만, 강자에게는 어디까지나 의리를 지키는 정책이 일찍이도 이때부터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즈음 강자 노부나가에게는 자신의 적자(嫡子) 노부야스[信康]에게 노부나가의 딸과 결혼시켜 충성의 뜻을 나타내었고, 나중에는 그 노부나가가 명령에 따라 자기 아들 노부야스를 죽이기까지 한다.(이 부분은 졸역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에게 명령 받아 처자식을 죽였다?"를 참조 삼아 보시길.)

 이에야스는 조심성 있는 성격이었지만 막상 전투에 들어서면 그의 호방함에는 괄목할 만한 것이 있었다. 1572년,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2만 군세와 싸운 미카타가하라 전투[三方ヶ原の戦い]에서 그런 모습을 여실히 드러난다.


 이 전투는 센고쿠 최강인 코우슈우[甲州]의 군세가 상대. 더구나 상경(京)하려는 대군이었다. 이에야스의 패전은 불을 보듯 뻔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맞서 싸워 실제로 참패하였다. 하마마츠 성[浜松城]으로 퇴각해 온 이에야스는 일부로 성문을 활짝 열고 성문 안팎으로 화톳불을 대낮같이 밝히게 하였다. 적에게 공격해 볼 테면 하라는 대담한 전술이었다. 뒤를 쫓아 온 코우슈우의 병사들은 어떤 함정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결국 공격을 단념하였다. 그리고 이에야스 본인은 뜨슨 물에 밥을 말아 세 그릇을 비우고는 코를 크게 골며 잤다고 한다.
 싸움이 끝난 후 타케다의 맹장 바바 노부후사[馬場 信房]는, “토쿠가와 군의 전사자는 모두 우리에게 등을 보이지 않고 죽었다”고 신겐에게 보고하였다. 이에야스는 패하기는 했지만, 토우카이 No.1 무장[각주:11]이라고 일컬어지기 시작하는 것은 이때부터이다.

 전쟁터에서 이에야스가 지휘하는 모습은 섬뜩할 정도다. 처음엔 지휘봉을 휘두르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주먹을 쥐고 말 안장 앞부분을 두드리며 공격하라!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너무도 세게 두드려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피가 날 정도였다. 그래서 이에야스의 손가락에는 굳은살이 박였다고 한다.

 천하에 대한 야망이 이에야스의 마음 속에서 형태를 띄기 시작한 것은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각주:12] 때부터 일 것이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태두로 그 꿈은 잠시 접어 둔다. 그리고 히데요시가 죽자 이에야스는 대놓고 정권획득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히데요시에게 바친 서약서를 어기고 여러 다이묘우[大名]들과 그들의 자식에게 자신의 양녀를 시집 보냈고, 또한 자기 마음대로 여러 다이묘우의 영지를 가증시켜 많은 다이묘우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 이전에 이에야스가 토요토미 계열의 다이묘우에게 보낸 편지는 실로 179통에 이른다고 한다.
 그렇게 세키가하라 전쟁에서 서군을 격파하였고,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에서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확인 사살하여 토쿠가와 정권을 반석에 올려 놓은 것이다.

 말년의 이에야스의 풍모를 전해주는 기록이 있다. 그에 따르면 50세 전후부터 비만 체형이 되었고 아랫배가 나와 혼자서 훈도시를 조이지 못하여 시녀(侍女)에게 조이게 할 정도였다. 신장은 5척 1~2촌(약 155~158)정도였다고 한다.

 이에야스가 굉장히 건강을 생각했다는 것은 유명하다. 매사냥이 이에야스 건강의 원천인 듯 죽을 때까지 매사냥을 행한 횟수는 천 번을 넘는다.

 이에야스의 측실은 10명 이상 있는데 다이묘우 등 고귀한 집안의 딸들을 동경했던 히데요시와는 반대로 이에야스의 측실에는 하층계급의 딸이나 미망인이 많았다. 말년까지 정력은 절륜했던 듯 소위 토쿠가와 어삼가(御三家)[각주:13]의 오와리 가문[尾張家]의 9남 요시나오[義直]는 59살 때, 키이 가문[紀伊家]의 10남 요리노부[頼宣]는 61살 때, 미토 가문[水戸家]의 11남 요리후사[頼房]는 62살 때의 아들이다. 

 건강을 소중히 한 이에야스는 의사 이상으로 의학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화제국방(和剤局方)[각주:14]’이라는 의학서를 항상 옆에 끼고서 스스로 진단하고 약을 조제할 정도였다. ‘만병원(万病圓)’이라 이름 지은 약을 특히 잘 만들었다고 한다.[각주:15]

 1616년 4월. 죽음을 앞둔 이에야스는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와 측근들에게 자신이 죽은 뒤에 할 일을 세세히 지시하였다. 유체나 위패의 위치는 물론 닛코우[日光]에 작은 묘소를 세우는 것까지 지시하였다. 죽기 이틀 전에는 죄인(罪人)을 시험 삼아 베게 한 명도(名刀) 미이케덴타[三池典太]를 베갯머리에 가지고 오게 한 뒤, 이불에서 일어나 혼신의 힘을 다하여 허공을 내리쳤다. 그리고 당장 죽을 사람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확실한 말투로, “나는 이 칼을 가지고 자자손손을 지키겠다”고 외쳤다.

 그 다음 날, 신류우인 본슌[神流院 梵舜]을 불러 “쿠노우[久能山]의 내 묘소에, 내 몸을 서쪽으로 향하게 해서 안치하라”고 했다고 한다. 즉 서방의 토자마 다이묘우[外様大名][각주:16] 쪽으로 향하게 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히데요시가 대로(大老)를 불러, “히데요리[秀頼]를 부탁 드립니다. 부탁 드립니다”고 유언한 안쓰러운 모습에 비하면, 실로 냉정한 최후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1542년생. 마츠다이라 히로타다[松平 広忠]의 적자. 아명 타케치요[竹千代], 이름이 처음엔 모토노부[元信], 다음엔 모토야스[元康]였다.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전사를 기회로 독립하자, 1568년 즈음 미카와[三河]를 평정.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 후 미카와, 토오토우미[遠江], 스루가[駿河], 카이[甲斐], 시나노[信濃]의 남반부를 영유. 히데요시[秀吉]와의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는 결전을 피해 화해하였다.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17] 후인 1590년 칸토우[関東] 6개 지역에 242만석을 하사 받아 에도 성[江戸城]를 거성(居城)으로 하였다. 1603년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이 되어 에도 막부[江戸幕府]를 열었다. 1616년 4월 7일 죽었다. 75세.

  1. 오우슈우[奥州]를 무대로 펼쳐진 전구년의 역[前九年の役]과 후삼년의 역[後三年の役]에서 대활약한 미나모토노 하치만타로우 요시이에[源 八幡太郎 義家]의 셋째 아들 요시쿠니[義国]의 첫째가 코우즈케[上野]의 닛타[新田]라는 곳을 영유하면서 닛타라는 성을 썼다. [본문으로]
  2. ...는 에도막부가 편찬한 책(朝野旧聞褒藁)에 따른 말이고, 후세 아직까지 권위를 인정 받는 와타나베 요스케[渡辺 世祐]라는 사람의 논문에 따르면 - 토쿠아미에게 조상을 묻자, 토쿠아미는 "뭐 우리네라고 하는 것들은 동서남북을 떠돌며 여행하는 사람들로, 어디건 상관없이 유랑하는 자이기에 그런 것을 물으면 창피합니다"라고 했다 한다. 당시 무사란 한곳에 정착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에, 떠돌이라는 것이 창피하다고 한 것이다. [본문으로]
  3.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쇼우군 가문[将軍家]. 닛타 겐지와 마찬가지로 요시쿠니[義国]가 아시카가 장[足利庄]을 영유하며 그의 둘째 아들 요시야스[義康]가 영유하며 이후 아시카가 씨가 된다. 사족으로 닛타와 아시카가 양 쪽의 선조인 요시쿠니는 아시카가 시키부다이후[足利式部大夫]라고 칭한 것을 보면, 닛타와 아시카가 중 적류는 아시카가 인 듯. [본문으로]
  4. 아시카가 씨 3대 당주 요시우지[義氏]가 카마쿠라 중기 미카와의 키라 장[吉良荘]을 하사 받아, 아시카가의 땅을 물려 준 적남 야스우지[足利 泰氏]를 제외한 서장자 나가우지[吉良 長氏 - 사족으로 이 나가우지의 둘째 아들 쿠니우지[国氏]가 이마가와 씨[今川氏]의 선조이다], 셋째 요시츠구[吉良 義継]에게 부터 시작하는 가계. 키라 장은 야하기가와 강[矢作川]을 사이에 두고 동과 서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형인 나가우지는 서쪽을 영유하여 사이죠우 키라 씨[西条吉良氏]를 칭했다. (동생 요시츠구는 처음엔 동쪽인 토우죠우 키라시[東条吉良氏]가 되나 후에 오우슈우[奥州]의 남조 측을 정벌하기 위해 오우슈우로 가 오우슈우 키라 씨[奥州吉良氏]의 선조가 되어 무로마치 막부 초기 잠깐 활약하나 몰락). [본문으로]
  5. 후에 나가우지의 손자 미츠요시[吉良 満義] 때 미츠요시와 그의 적남 미츠사다[吉良 満貞]가 무로마치 막부 초반 혼란기에 각지를 전전하여 비운 사이 본거지인 키라의 동쪽을 미츠사다의 동생 타카요시[吉良 尊義]가 횡령하여 토우죠우 키라 씨[東条吉良氏]가 성립. 후에 오우닌의 난[応仁の乱] 때 이 토우죠우 키라 씨의 5대 당주 키라 요시후지[吉良 義藤]가 동족이며 예전 종가집인 사이죠우 키라 씨[西条吉良氏]와 싸우다 전사. 그 뒤를 마츠다이라 가문[松平家] 5대 당주 나가치카[松平 長親 - 이에야스의 고조부가 된다]의 셋째 아들 마츠다이라 요시하루[松平 義春]가 잇고 이때부터 토우죠우 마츠다이라 씨[東条松平氏]가 된다. [본문으로]
  6. 센고쿠 시대 키라 씨는 동쪽의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의 압박에 대항하기 위해 동서 양 가문은 키라 요시야스[吉良 義安] 때 합병. 요시야스의 부인은 이에야스의 할아버지 키요야스[松平 清康]의 딸. 또한 요시야스는 후에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포로가 되어 있던 시기에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만나 친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7. 1830~1844년 사이. [본문으로]
  8. 이 말은 이에야스의 손자이자 미토 코우몬[水戸黄門]으로 유명한 토쿠가와 미츠쿠니[徳川 光圀]가 한 말을 바탕으로,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에 어떤 놈(이케다 마츠노스케[池田 松之介])가 이에야스의 글을 흉내 낸 것을 또 딴 놈(타카하시 테이슈우[高橋 泥舟])가 각지의 이에야스 사당[東照宮]에 바친 것이라고 한다.(by wiki) [본문으로]
  9. 혼간지[本願寺] 문도들을 바탕으로 한 그 지역 무사, 농민들의 반란. [본문으로]
  10. 혼간지[本願寺]의 종파인 쟁토진종(浄土真宗)의 별칭. [본문으로]
  11. 海道一の弓取り. [본문으로]
  12. 1582년 아케치 미츠히데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란을 일으켜 살해한 사건. [본문으로]
  13. 쇼우군 가문[将軍家]의 후사가 끊겼을 때 쇼우군을 배출할 수 있는 가문. [본문으로]
  14. 중국 북송(北宋) 휘종 대에 만들어진 중국의 의약서. [본문으로]
  15. 여담으로 죽기 전 이에야스는 이 만병원에 굉장히 의지하였다. 이에야스의 전의(典醫)인 카타야마 소우테츠[片山 宗哲]가 말리자 신경질내며 그를 시나노[信濃]의 타카시마[高島]로 유배를 보냈다고 한다.   [본문으로]
  16.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이전까지는 토쿠가와의 부하가 아니었던 가문. [본문으로]
  17. 히데요시가 칸토우[関東]의 호우죠우 가문[北条家]를 멸한 1590년의 전쟁.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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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hiroyume 2009.10.19 10: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왠만큼은 다 아는 내용이지만 승려가 마쓰다이라가의 선조인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정설이 아니라 그냥 추측 중에 하나라는 것과 50세부터 비만이라는건 원래부터 비만이라고 생각했던 제가 좀 잘못 알고 있던 사실인 듯.
    이 양반도 보면 만만찮은 간웅인데 노부나가, 히데요시의 생애가 격렬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뭍히는 듯 그러고 보면 불같다고 생각하는 노부나가도 여자(네네에게 보낸 편지) 자상한 면이 있는 한편 느긋하다고 생각하는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당시 제장들에게 열라게 편지써보낸 것과 같은 것이겠죠. 소하찌씨는 저런 이에야스를 어떻게 그럴듯 하게 미화를 잘 시켰을까나. -_-;
    떡에 관한 일화는 아는데 저 그림을 본건 처음입니다. 어째 우리나라의 솥단지 얘기가 생각나는건......

    즐거운 한주 되세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0 11: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시 야마오카 선생의 소설의 영향이 큰 듯 합니다. 그런 인물은 다시 찾기도 힘들 정도로 성인군자로 나왔을 정도다 보니.

      개인적으로 그 소설 초반의 노부나가는 정말 멋진 듯 합니다.

      우리나라의 솥단지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비슷한 이야기 인가요?

      흰꿈님도 좋은 한 주가 되시길 바랍니다.

  2. 나라 2009.10.19 11: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문득 궁금한게 생겼는데... 저 일본식으로 중간에 머리 깎는 습관은 언제 생긴 건가요? -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0 1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야마가와[山川] 출판사의 일본사 사전에 따르면 중세(카마쿠라 시대~센고쿠 시대) 귀족부터 시작되었다고 나오며, 일본 위키 해당항목[さかやき]를 보면 1176년에 그 기록이 보인다고 하네요.(즉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날뛰기 몇 십년 전부터 나왔다는 말입죠)

      생성 초반엔 전쟁터에서 투구를 쓸 때 후끈거리고 답답한 것을 막기 위해서 했는가 봅니다만, 나중엔 무가의 일상 생활에서도 하게 되어, 특히 무가에서는 성인식 때 이발역[理髪役]을 맡은 사람이 머리를 밀고나 잘라 줌으로써 아이에서 성인이 되었음을 외견 상으로도 알 수 있게 됩죠.

  3.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10.19 23: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떡 치는 (...이라고 하니 어감이 요상하군요;;) 얘기는 많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림에 미츠히데도 들어가 있는지는 처음 알았네요. 처음 보기도 하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0 1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개인적으론 꽤 유명한 그림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어쩐지 그래서 미디어위키에도 없었군요.(즉 저 그림은 와세다 전자 도서관에서 무단으로 다운 받은 것! 우하하하)

      그러고 보니 몇 달전에 떡집 사장이 수 십명의 여성들을 농락했다고 자극적인 제목을 달던 몇몇이 떠오르는군요.
      (떡집사장이 떡은 안치고 떡을...이라는 식으로 ^^)

  4. 나라 2009.10.20 17: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소중한 정보 감사합니다!

  5. ckyup 2009.10.20 22: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대망에서의 너구리 이미지가 우리에게는 상식이 되었나 봅니다 - 무조건 대의를 위해서만 행동하는 성인군자..... 좋은글 또 감사합니다, 몰랐던걸 알게되었군요. 떡반죽하는 히데요시 그림이 참 재밌네요. 물론 또 대망 이야기지만..., 삼국지와 비교해보면 삼국지의 주군들은 거의 모사나 군사들의 머리에 의지하는면이 많지만, 대망에서보면 가장 똑똑한 군사도 주군들의 머리를 따르지 못하더군요, 특히 히데요시. 그리고 대망이 뻥이 덜 심해요 - 군사숫자에서 비교해보면 확실하죠, 삼국지는 갑자기 급하게 정찰나가도 한 5천 끌고 나가죠.

    암튼 좋은글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연재물 목빠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2 13: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무래도 처음으로 접했을 때의 이미지가 가장 오래 가는 것 같습니다. 동물도 태어나서 처음 본 생물을 어미로 여긴다고 하는데 그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대망과 삼국지의 차이는 작자의 인식 차이라 생각합니다. 재미를 느끼게 하는 곳을 대규모 군사 움직임에서 찾느냐 인물의 심리에 중저을 두느냐의 차이 아닐까요?

      정찰나가도 오천...^^ 정말 재미있는 표현이군요. 순간 박장대소하였습니다.

  6. 맹꽁이서당 2009.10.21 12: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너구리 영감이군요. [삼국지 연의]가 수많은 독자들에게 촉한정통론을 심었듯이 (머리가 굵어지면서 위나 오에도 관심이 가긴 하지만, 맘 깊은 곳에서는 역시..) [대망]도 마찬가지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 노부나가나 히데요시가 평화를 정착시켰으면 이에야스는 역사속에서 다테 마사무네 정도의 위상이 아니었을까, 아님 이에야스가 히데요시 정도 나이(세키가하라 직전?)에 죽었다면 전국시대가 더 이어지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2 13: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나이 먹으면서 조조 쪽으로 옮겨지긴 했지만 여전히 제갈량에 대한 동경은 지워지질 않더군요(유비는 많이 인식이 변했지만요)

      노부나가가 살아서 천하통일 했을 시에는...음... 개인적으로는 오다 가문 휘하의 무장들이 너무 쟁쟁해서 이에야스가 나올 자리나 있었을지...뭐 IF의 이야기는 각자 다들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보니 이거다..라고 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에야스가 죽더라도 그후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대로 흘러간다면 마에다 토시이에 혹은 모우리 테루모토 정도가 이에야스의 자리를 대신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7.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09.10.21 19: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천하인이 있는가 하면, 저런 천하인도 있고.
    천하를 얻기 위한 사람은 딱히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닌가봅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2 14: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는 말은 그래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뭐 천하만 손에 넣으면 조상 바꾸기야 쉬울테니까요. 사람들이 믿건 안 믿건 대놓고 반론을 하지는 못할테니까요.

  8. Favicon of http://liquer.tistory.com BlogIcon 2009.10.21 22: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금 사이언스 채널에서 [전사]란 제목으로 이에야스 다큐멘터리를 방영해주더군요. 이에야스가 딱히 나쁘진 않게 나오는데 결말이 좀 씁쓸했던것도 같습니다. '미츠나리는 죽고 히데요리는 반란을 일으켰다 죽고 이에야스의 가문은 250년간 일본을 지배했다.' 식으로 -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2 14: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호~ 사이언스 채널에서도 그런 것을 하나 보군요. 뜬금없겠지만 히스토리 채널 없애버린 중앙일보에게 갑자기 분노가 이는군요. ^^;

      이에야스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겠지!!..하고 말하고 싶군요. ^^ 뭐 일본 사람들도 쇼우군 가문[将軍家]와 섭정가문[摂家]의 상하구별을 못하는 사람들 많으니 그건 어쩔 수 없는 듯.

  9. shotokanfist 2009.10.25 15: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전사라는 프로그램을 문장으로 정리해서 동명의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누가 책을 줘서 읽어봤습니다만, 번역상의 오류가 많았는지 (설마 원저자가...) 기본적인 연도나 인명, 사실관계에 오류가 많아서 읽으면서 좀 황당했던 기억이 나네요.

    프로그램 자체는 호평이었던걸로 기억합니다. 저는 못봤는데, 평이 좋더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6 13: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검색해 보니....
      전사들(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전사들의'이기는 기술') Heroes and villains

      라는 책이 나오는데 이것인가 보군요.... 설명에 인문경영서다...라는 부분이, 좀 슬프게 느껴지는 군요. 그냥 인문서라고 해도 될 것을 꼭 경영서라는 부분을 붙여야 한다는 점이 조금 아쉽군요.

      이야~ 어쩌면 윌리엄 아담스의 수기를 바탕으로 제작된 우리가 잘 못 알고 있는 숨기진 역사를 쓴 것일 수도...(물론 그럴리 없겠지만요 ^^ )

미토 코우몬[水戸黄門]이 말했다.

그냥 생각난 것 2009.10.07 00:02 Posted by 渤海之狼

정치에 대해 말하길...
"남자끼리 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랑 할 때처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 말했다 합니다.
남자끼리 즉 anal을 통해서 하면 한쪽만 즐겁고 나머지 한쪽은 괴롭지만,
여자랑 하면 양쪽이 다 쾌락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니 정치는 위정자와 백성이 다 이로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
.
그런 말을 보니 생각나는 이분.

앤 해서웨이(Anne Jacqueline Hathaway) / 영화배우
출생 1982년 11월 11일
신체 키173cm
팬카페
상세보기
 
"every woman should try it, otherwise they miss out on something amazing"
.
.
고통만이 아니라는 군요. 미토 코우몬 어르신~

PS: 여담으로 토쿠가와 미츠쿠니[徳川 光圀]의 호칭 '미토 코우몬[水戸 黄門]'과 항문의 일본어 발음 '코우몬[肛門]'은 우연인지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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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加藤 ]
1611년 6월 24일 병사(病死) 50세.

1562년 ~ 1611년.
시즈가타케[賤ヶ岳] 칠본창(七本槍)[각주:1]중 한 명. 히데요시[秀吉]가 큐우슈우[九州]를 제압하자 히데요시에게서 히고[肥後]의 반(半)을 하사받았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동군(東軍)에 속하였고, 히고 일국(一国)를 영유하며 쿠마모토 성[熊本城]을 축성하였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회견을 성사시켰지만 곧바로 병이 나서 죽었다.



갈등으로 고심한 말년

 카토우 키요마사가 일부 지역을 뺀 히고[肥後]와 붕고[豊後]의 3개 군(郡)[각주:2]을 합하여 54만석을 소유하게 된 것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인 1600년 11월.

 키요마사의 "말년"은 용맹을 바탕 삼아 혁혁한 공을 세워 온 센고쿠[戦国] 무장에서 위정자(爲政者)로 변신한 이 해의 38살부터 한창 일할 나이인 50세로 죽었을 때까지인 12년간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쿠마모토에서는 키요마사를 [세이쇼우 코우(清正公 = 키요마사 공)]을 줄여 [세이쇼코 상(セイショコ さん = 키요마사 씨)]이라 부르며 키요마사의 은덕(恩徳)을 우러르는 풍습이 남아있다. 이 12년 동안 키요마사가 정력적으로 기반을 닦고 발전을 위해 노력한 것이 후에 쿠마모토 발전의 기초가 되었고 지금도 그 노력의 은혜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

 천하의 명성(名城)인 쿠마모토 성(城)의 축성, 가도(街道)의 정비, 관개(灌漑)의 확충, 간척(干拓) 등에 의한 경작지(耕作地)의 조성, 제사(製絲) 등의 산업 진흥 등이 그 후의 히고 쿠마모토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히고 카토우 가문[加藤家]은 그 다음 대인 타다히로[忠広]의 삭탈관직[改易[각주:3]]과 함께 끊어지지만, 카토우 가문 다음으로 이봉(移封)되어 온 호소카와 가문[細川家]이 카토우 가문의 유적, 풍습을 존중한 것도 키요마사에 대한 히고 사람들의 감사와 존경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군(名君) 카토우 키요마사의 말년은 정말 충실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내면(内面)에서는 토요토미 은고(恩顧)의 다이묘우[大名]이면서도, 토쿠가와 정권에 순종할 수 밖에 없는 인간적 갈등으로 고심했다고 여겨진다.

토요토미 안태(安泰)를 꾀하다

 키요마사에게는 세 명의 측실(側室)이 있었다고 한다.
 2남 1녀를 낳은 ‘혼가쿠인[本覚院 = 통칭 카와지리도노[川尻殿]]’, ‘죠우코우인[浄光院 = 통칭 키쿠치도노[菊池殿]]’, 후에 뒤를 잇는 셋째 아들 타다히로와 둘째 딸 아마[あま]의 1남1녀를 낳은 ‘쇼우오우인[正応院]’이다.

 키요마사가 죽은 뒤, 불과 12살며 셋째 아들 타다히로가 뒤를 이은 것은 이미 장남 토라노스케[虎之助]가 2살, 둘째인 타다마사[忠正]가 8살에 요절했기 때문이다.

 정실(正室)[각주:4]법호(法號)를 ‘쇼우죠우인[清浄院]’이라 하는데, 이에야스의 외숙부 미즈노 타다시게[水野 忠重]의 딸이다. 이에야스는 모친 오다이[於大 = 덴즈우인[伝通院]]의 동생인 이 타다시게의 딸을 양녀로 삼아서 키요마사에게 시집보냈다[각주:5].

 그리고 키요마사의 장녀인 코야[古屋 – 혼가쿠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를 토쿠가와 사천왕[徳川 四天王][각주:6] 중 한 명인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의 아들 야스카츠[康勝]와 결혼시켰고, 둘째 딸 아마를 후에 어삼가(御三家[각주:7])인 키슈우 토쿠가와 가문[紀州家]를 세운 이에야스의 10째 아들 요리노부[徳川 頼宣]와 결혼시켰다.

 토쿠가와 가문과 키요마사가 이런 인척(姻戚)관계로 이어진 것은, 이에야스가 토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기 위한 책략의 하나로 이루어진 것이다. 토요토미 은고 다이묘우(大名)를 회유하기 위한 정략결혼이었다. 키요마사가 비록 서국(西国) 큐우슈우[九州]에 있더라도, 키요마사라는 인물은 적으로 돌리면 또 이 정도로 성가신 무장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키요마사는 밖에서 보면 토쿠가와와 친하며, 토요토미와는 거리가 생긴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 우직한 인물은 고(故) 히데요시의 두터운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 은혜를 갚는 길은 겉으론 토쿠가와에게 복종하면서, 히데요리를 당주로 하는 토요토미 가문의 안태를 꾀하는 것 말고는 없었던 것이다.

 이에야스가 강요하는 니죠우 성[二条城]에서 히데요리와의 회견을 성사시키기 위해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등과 함께 요도도노[淀殿 – 히데요리의 생모]를 설득하여 실현시킨 것은 토요토미 가문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하고자 하는 생각에서였다.

귀국 도중에 병이 나다

쿠마모토 시[熊本城]에 있는 키요마사 동상.

 이에야스와 히데요리의 회견은 1611년 3월 27일 무사히 끝났다.
 니죠우 성에서 나와 숙소로 돌아온 키요마사가 침실에서 몸 안에 품고 있던 단도를 꺼내고 잠시 이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慶元記[각주:8]].

 회견장에서 만약의 일이라도 발생한다면 그 단도로 히데요리를 지킬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사태가 되지 않았다는 안심에서 흐른 눈물일 것이다.

 히데요리를 오오사카 성[大坂城]으로 경호하며 돌려보내는 도중에 후시미[伏見]에 들렸다. 그곳에 있는 자기 저택 앞을 흐르는 강에 배를 띄우고 그 배에서 잔치를 연 키요마사는 그제서야 어깨의 무거운 짐을 내린 듯한 생각이 들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같은 해 5월 하순.
 귀국하던 배에서 갑자기 병이 나 병든 몸을 질질 끌듯이 하며 쿠마모토로 돌아왔다. 혀가 꼬이는 증상의 병이었는데 확실한 병명(病名)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병은 나날이 악화되어 6월 24일 숨을 거두었다.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大坂 夏の陣]에서 토요토미가(家)가 멸망하기 4년 전이었다.

  1. 1583년 오우미[近江]에서 히데요시[秀吉]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2. 후에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乱]의 무대가 되는 아마쿠사[天草] 섬 등은 기독교도들이 많았기에 막부에 부탁하여 옆 지방인 붕고[豊後]의 세 개군(郡)과 교환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카이에키[改易]라 읽는다.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줄임. [본문으로]
  4. 키요마사의 정실은 야마자키 카타이에[山崎 片家]의 딸로, 키요마사가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건너가 있던 중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즉 쇼우죠우인[清浄院]은 후실(後室). [본문으로]
  5. 그녀의 나이 18세. 키요마사와는 20살 차이가 난다. [본문으로]
  6.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토쿠가와가(家)를 지탱한 네 명의 공신을 지칭. [본문으로]
  7. 오와리[尾張], 키슈우[紀州], 미토[水戸]에 이에야스의 각각 9째, 10째, 11째 아들들이 임명된 가문으로, 후에 쇼우군 본가가 끊길 경우 쇼우군을 배출할 수 있는 가문. 특징 겸 우대로써 토쿠가와[徳川]라는 성(姓)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에도 바쿠후에서는 다방면에 걸쳐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본문으로]
  8. 호우죠우 츠나시게(北条 綱成)의 증손자 호우죠우 우지나가(北条 氏長)가 쓴 책.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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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1.19 20: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아저씨도 암살인지 독살인지 하는 설이 있더군요..ㅎㄷㄷ

    소녀닌자 이즈미던가..라는 막장 망가에서는 이 아저씨를 비롯 세키가하라 이후에 죽은 다이묘는 all암살이라는 황당한 설정의 망가도 있었지만;;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1.19 20: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오사카 공략전을 앞두고 무용이 뛰어나고, 오오사카 바로 아래인 키이(紀伊)를 영유하고 있던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호쿠리쿠(北陸)의 마에다 토시나가(前田 利長), 히메지(姫路)의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등... 각각의 위치에서 바쿠후의 군을 견제할 수 있고, 또한 토요토미家와 굉장히 친했던 가문의 당주들이 비슷한 병 혹은 급사라는 형식으로 동일한 시기에 죽었던 것이 그런 설로 전해져 오는 것 같습니다.(반대로... 그런 이들이 동일한 시기에 죽어서 이에야스에게는 오오사카 공략을 결심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겠지만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1.19 21: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즈미... 만화는 본 적이 없고, 영화 아즈미 2탄만 쪼금 보다가 다 못 보았습니다만... 만화 재미있나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1.20 08: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그 황당한 만화의 리뷰만 본거라서.. 따로 말은 못 드리겠지만 리뷰만 봐도 참 막장..(-_-;;)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nagoomo BlogIcon 볼리바르 2007.11.20 23: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말씀하신 만화는 재미 면에서는 아주 충실합니다. 만화라는걸 염두에 두고 보면 아주 재미있죠.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1.21 11: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옷~ 볼리바르님~ 반갑습니다. 그렇군요. 재미는 있나보군요. 왠만하면 전국물은 다 읽는데(사무라이 디퍼 쿄우~도 읽었는데..) 소년 검객이라는 말에... 연약한 여자애가 썩둑썩둑 사람 자른다는데 왠지 말이 안된다는 생각에 읽지 않았는데, 함 봐야 겠네요.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korea40003 BlogIcon korea40003 2007.12.14 19: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토기요마사아닌가?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14 23: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국립 국어원의 일본어 표기법
    http://www.korean.go.kr/06_new/rule/rule05_01_04.jsp
    에 따르면 korea40003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다만....전 예전에 그 표기법 때문에 아직도 발음에 무리를 겪고 있어서,
    일부러 글자 발음대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이 점 양해를...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deadsushi BlogIcon 리더쉽 2008.05.04 14: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니시와 더불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무장이 아닐까 생각..(모 게임사의 게임의 영향으로 인해 -0-)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04 18: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임진년 1진과 2진일테니까요. 함경도 담당이라 저 북쪽까지 갔으니 아무래도 그만큼 유명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에...어떤 게임이요? 코니시까지 나올 정도면 코에이 신장이나 태합 시리즈 같은데...)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eadsushi BlogIcon 리더쉽 2008.05.04 21: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국내 게임사의 임진록 시리즈와 거상시리즈죠.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05 14: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이름만 들어보고 해 본적이 없어서...^^

  13. Favicon of http://blog.naver.com/ttl00013 BlogIcon 라빈스텐 2008.08.31 09: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임진왜란때 조선 사람들 중에서 제일 무섭운 사람중 넘버원이 가토 기요마사임...
    쾌지나 칭칭나네 이말도 조선사람이 기요마사를 너무 무서워서 해서 아직도 전해지는 노랫말이죠,
    예전 조선 사당이나 무당에 기요마사의 그림을 붙여서 귀신을 쫓을정도로 기요마사는 조선에서 원수인 놈과 동시에 가장 무서운 인물입니다.
    조선의 호랑이를 좋아해서 조선 호랑이를 씨를 말릴정도로 잡아 가서 히데요시에게 호랑이 가죽 선물도 주고~설에는 호랑이를 맨손으로 ??쳐 잡앗다고 하지만 그건 쫌 구라가 섞인듯 합니다.
    기요마사설에는 영웅은 색을 좋아한다는 말처럼 너무 여자를 밝힌 탓인지 셩병인 매독으로 죽엇다는 설이있습니다.
    아즈미 같은 쓰레기 SF 잡 영화에서 독살로 죽은게 아닙니다.~~

  1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8.31 18: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쾌지나 칭칭나네...라는 말은 저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다만 그렇게 확정을 지어서까지 말씀하실 만한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시베리아 호랑이가 한 인물이 몇 년간 몇 마리 잡았다고 씨가 마를 정도면 이미 그 전에 멸종에 가까운 상태여야 하지 않을까요?

    창으로 잡았다는 설이 있지만, 맨주먹은 처음 듣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만화에서는 아즈미가 칼로 죽이던데 영화에서는 독살로 나오나요?

  1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06 01: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발해지랑//..쾌지나칭칭나네라는..말은...카토기요사마녀석댐에..생긴말..맞고요..제가..이글..모두..댓글읽어본결과..발해지랑님은..자신이..일본역사인물올리면서..일본역사인물들을..비하하시더군요..아주..니만의생각으로..반박하시던대...증거자료를보여줘도..말을4가지없게..마무리하고..아주..보기안좋내요...

  1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06 01: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http://ko.wikipedia.org/wiki/%EC%BE%8C%EC%A7%80%EB%82%98_%EC%B9%AD%EC%B9%AD%EB%82%98%EB%84%A4
    위키의 '쾌지나 칭칭나네'의 항목입니다. 키요마사의 이야기는 하나의 설일 뿐입니다.

    증거자료 보여 주셨습니까? 우선 해당 링크라도 걸어 주시던지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기분나쁘셨다면 미안합니다만 우선 제 말에 반론이 되는 것을 말씀하시거나 링크를 걸어 주셔야지, 4가지 없게 한다는 말씀만 하시니.... 그래서는 서로 아무런 발전이 없습니다. 또한 그렇게 끝내면 서로 기분만 나뻐지지 않을까요? 그럴 필요가 뭐가 있나요?

  17. 참~ 2011.01.26 14: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발해지랑님이 참으세요 아골이 여까지출몰하네요

  18. 아이즈 2012.07.13 17: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같은맥락으로
    그래도 나름 도요토미가 충신이엇기때문에
    도쿠가와한테 부담된것도 잇겟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7.20 21: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변 굉장히 늦은 점 사과드립니다.

      뭐...토요토미 가문과 이러저러 연이 깊던 가문들의 주인들이 비슷한 시기에 죽어나갔다는 정황증거는 있습니다만... 아직 더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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