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다 헤이하치로우 타다카츠[本多 平八郎 忠勝]는 가문 대대로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을 섬겨온 무공파(武功派)에 사천왕(四天王)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전형적인 센고쿠[戦国] 무장이다. 사서(史書)가 전하는 타다카츠는, ‘어려서부터 전쟁터에 향하길 50여 번에 이르렀으며, 뛰어난 무공에 공적이 많았음에도 한번도 상처를 입은 적이 없었다’는 용장이다.

 ‘이에야스에게 과분한 것이 둘 있으니 중국산 투구와 혼다 헤이하치[각주:1]
 이도 타다카츠의 무공을 전하는 말로써 유명하다. 미카타가하라 전투[三方ヶ原合戦] 후 카이[甲斐]의 타케다[武田]군이 타다카츠의 활약을 보고 절찬한 문구이다.

 타다카츠는 1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데뷔전을 치렀고[각주:2], 15살 때 미카와[三河] 나가사와 전투[長沢合戦][각주:3]에서는 적의 수급을 거두었다.[각주:4] 이때 숙부인 타다자네[忠真]는 타다카츠의 그릇이 크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며, 이에야스[家康]도 이에 동감하였다고 한다.

 소년시대의 타다카츠가 씩씩한 면목를 알려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1561년, 타다카츠 14살 때의 일이다.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동맹을 맺기 위해 백여 명의 가신들을 이끌고 키요스[清洲]로 향했다.
 키요스 성 주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한때 오와리에 인질로 와 있던 미카와의 이에야스 행렬을 구경거리 삼아 몰려들어 시끌벅적거리며 떠들어댔다. 이에야스에게 손가락질 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동행했던 타다카츠는 그런 구경꾼들을 닥치고 못 본체 할 수가 없었다. 이에야스가 탄 말 앞에 저벅저벅 걸어가서는 장도(長刀)를 양 손으로 휘두르며 외쳤다.
 “어찌 이리 무례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 계시는 분은 미카와의 이에야스 공이시다. 노부나가 공과 친선을 맺기 위해 먼 길을 오신 분에게 이 무슨 무례란 말인가!?”
 어린 소년의 이 위풍(威風) 앞에 수 많은 구경꾼들도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1572년 미카타가하라 전투 때, 타다카츠는 25살이었다.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대군에 맞서 토쿠가와 군은 대패를 당하고 거성(居城) 하마마츠 성[浜松城]으로 퇴각하게 되는데[각주:5], 이럴 때는 적의 추격을 막는 후군[殿]의 역할이 중요하며 또한 어려웠다. 타다카츠가 이 어려운 역할을 맡게 되었다.
 타다카츠는 적과 아군 사이의 한가운데에 말을 타고 가 적진을 노려보며 아군의 퇴각을 성공시켰다. 후에 타케다 측의 하지카노 덴에몬[初鹿野 伝右衛門][각주:6]이 회고하며 이런 말을 하였다.
 “…그때 후군의 타다카츠를 추격하고자 했지만 타다카츠의 공포스러운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톤보키리[蜻蛉切り]라는 창을 한 손으로 휘두르며 저승사자와 같은 형상으로 노려보았기에 온 몸의 털이 곤두서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에야스도,
“오늘 헤이하치로우는 평소보다 더 많은 활약을 하였다. 이는 필시 하치만 대보살[八幡大菩薩][각주:7]이 우리 편을 들어서일 것이다”
 고 하며 그 분전을 칭송했다고 한다.

 참고로 타다카츠의 창은 창신이 길어 2장(약 6m)정도 되었고, 잠자리[각주:8]가 창 날에 부딪혀 두 동강이가 난 다음부터 ‘톤보키리’[각주:9]라는 이명을 얻게 된 명창이었다. 타다카츠는 그런 창을 가볍게 휘두를 정도로 힘이 셌다고 한다.
 나중에 늙어서의 일이다. 거성(居城)이 있는 이세[伊勢] 쿠와나[桑名]에서 아들인 타다토모[忠朝]와 함께 배를 타고 가다 타다토모에게 배의 노로 물가에 있는 갈대를 베어 보라고 하였다. 타다토모가 한 손으로 노를 들고 휘둘렀다. 갈대는 약 5.4미터정도 쓰러졌다. 하지만 타다카츠는, “정말 힘이 약하구나”라고 웃으며 말한 뒤 이번엔 자신도 한 손으로 노를 들고 휘둘렀다. 그러자 갈대는 마치 낫으로 벤 듯이 깨끗이 절단되었다고 한다. 그 노는 보통 사람 둘이서도 쉽게 들어올릴 수 없는 것이었다.

 1582년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 은 미카타가하라의 패전에 버금가는 이에야스 생애에서 잊지 못할 큰 위기였다.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가 오다 노부나가를 살해한 이 6월 2일, 이에야스는 사카이[堺]에 있었다. 전날 아즈치[安土]의 노부나가를 방문한 뒤 노부나가의 주선으로 쿄우토[京都] 근방을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쿄우토는 이미 노부나가를 쓰러뜨린 아케치의 제압 하에 있었다. 흉보는 토쿠가와 가문의 어용상인 챠야 시로우지로우[茶屋 四郎次郎][각주:10]를 통해 사카이에 있던 이에야스에게 전해졌다. 아무리 이에야스라도 이때는,
 “이리 된 이상 배를 갈라 오다 님의 뒤를 따르겠다”
 라면서 까지 각오를 정했지만, 타다카츠가 이를 말렸다고 한다.
 “오다 님의 후은에 응하려 하신다면 오히려 어떤 수를 써서라도 본국 미카와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뒤 군세를 이끌고 아케치 미츠히데를 물리치는 것이 돌아가신 오다 님을 위한 공양이 될 것입니다”
 라는 타다카츠의 진언에 오카자키[岡崎] 귀성이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이에야스 일행은 이가[伊賀]의 산길을 통해 지역민들의 회유하면서 귀국에 성공한 것이다.

 1584년 3월,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와 손 잡고 히데요시[秀吉]와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에서 대치하였다. 이때 타다카츠는 코마키야마[小牧山] 산을 지키고 있었는데, 거기에 히데요시가 대군을 이끌고 강의 북편을 건너는 것을 보고 불과 800[각주:11]의 병사를 이끌고 출격하여, 후방의 이에야스가 부대를 정비할 시간을 벌기 위해 과감히 히데요시 군에 철포를 쏘아대며 공격하였다. 그 호담함에는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감탄했다고 한다.[각주:12]

 세키가하라[関ヶ原] 결전 이후, 토쿠가와 가문이 패권을 확립하는데 활약한 무공파의 면면들은 차츰 활약할 장소를 잃어갔다.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를 대표로 하는 행정사무의 관료파(官僚派)가 대두한 것이다. 그런 풍조를 타다카츠는 참을 수 없었다. 세키가하라 후 이세 쿠와나에 봉해진 타다카츠는 에도[江戸]에서 사자(使者)를 맞이하였을 때,
 “답례로 에도에 오르고 싶으나 요즘 허리가 빠져서 갈 수가 없사옵니다[각주:13]"
 라고 답했다고 한다. 평소 ‘사도의 겁쟁이[佐渡の腰抜け]’라고 경멸하던 혼다 사도노카미 마사노부[本多 佐渡守 正信]를 빈정대며 한 말이었다.

 또한 타다카츠는 늙어서,
 “문치파의 행정관[代官]은 연극에서 다이묘우[大名狂言] 역을 하는 배우들 같은 자들이다[각주:14]
 고 비판하며 막부의 중추 각료들을 계속 비판하였다.

 예전 전쟁터에서의 영광이 아무리 시간이 흘른 뒤라도 타다카츠의 뇌리에서 사라지질 않았을 것이다.

[혼다 다다카쓰(本多 忠勝)]
1548년 미카와[三河]에서 태어났다. 헤이하치로우 타다타카[平八郎 忠高]의 아들. 이에야스[家康]가 칸토우[関東]로 영지를 옮겼을 때 카즈사[上総] 오오타키[大多喜] 10만석에 봉해진다. 1598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죽었을 때 유품으로 칼을 한 자루 받았다. 1601년 이세[伊勢] 쿠와나[桑名] 15만석[각주:15]에 봉해졌지만 1610년 죽었다. 63세. 여담으로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와는 같은 일족이지만 계통이 다르다[각주:16].

  1. 家康に過ぎたるものが二つあり、唐の頭に本多平八. 중국산 투구[唐の頭]는 티벳 근처에서 서식하는 소과의 야크(Yak)라는 축생의 꼬리털로 장식한 투구로, 당시 이에야스뿐만 아니라 미카와 무사들도 수집하고 있었다고 한다. 타케다 측 군기물인 갑양군감[甲陽軍鑑]에 따르면 미카와 무사 10명 중 7,8은 이 당나라 투구를 쓰고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1560년 오오타카 성[大高城] 군량 반입 때. [본문으로]
  3.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의 부하로 미카와 요시다 성[吉田城]의 성주 오하라 시게자네[小原 鎮実]와의 전투. 요시모토가 노부나가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후 미카와의 호족들이 이마가와 씨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하자 우지자네는 시게자네에게 그런 호족들의 정벌을 명해 벌어진 전투. 단 이에야스 측과 이때 싸웠는지는 미묘. [본문으로]
  4. 처음엔 숙부 타다자네가 조카인 타다카츠에게 공적 세울 기회를 주기 위해서 자신이 쓰러뜨린 적을 타다카츠에게 목만 베라고 하였다. 타다카츠는 불같이 화를 내며 적진에 돌진하여 직접 수급을 취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정확히는 이에야스가 똥을 지렸다는 미카다카하라 전투[三方ヶ原の戦い]가 아닌, 그 전에 일어난 후타마타 성[二俣城]의 전초전 히토코토자카 언덕 전투[一言坂の戦い] 때의 일. 이에야스는 타다카츠 등 3000을 이끌고 정찰 나갔다 타케다 군과 조우. 이 책의 저자는 미카타가하라 전투라 여기고 대패라고 하였으나, 이 히토코토자카 언덕 전투에서는 포위 당할 낌세를 보자 냅다 퇴각. 즉 대패는 아님. [본문으로]
  6. 이름은 마사츠구[昌次] [본문으로]
  7. 무가(武家)의 수호신. [본문으로]
  8. 일본말로 잠자리를 톤보[蜻蛉]라고 한다. [본문으로]
  9. 창 날 끝에 앉았는데 그 날카로움에 미끌어져 반토막이 났다고도 한다...오히려 이쪽이 더 유명한 듯. [본문으로]
  10. ...여담으로 이때 이에야스의 목숨을 구한 초대 챠야 시로우지로우의 둘째 아들 3대째 챠야 시로우지로우(2대는 장남이나 요절)는 이에야스에게도미 튀김을 강추하여 죽게 만든다. [본문으로]
  11. 300이라고도 500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12. 또 다른 이야기로는 사이에 흐르는 강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는 등 대담한 행동을 하였기에, 죽여 버리자는 히데요시 측 무장들의 말을 물리치며 히데요시는 "저런 용사는 나중에 내 편이 될 수 있으니 살려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다. [본문으로]
  13. 일본말로 겁쟁이를 코시누케[腰抜け]라고 하는데 이는 허리[腰]가 빠진다[抜け]는 말을 합친 것이다. 앞에 적을 앞에 두고 쫄았을 때 허리가 뒤로 빠지는 모습에서 따온 말. [본문으로]
  14. 아마.. 겉만 그럴 싸 하고 실제로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들을 비유한 것 같음...大名狂言은 멍청한 다이묘우가 바보짓 하는 것을 비웃는 내용의 연극 종류를 말한다고 함. [본문으로]
  15. 10만석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16. 마사노부의 7대조, 타다카츠의 8대조는 혼다 스케마사[本多 助政]로 같다. 여담으로 타다카츠는 마사노부를 혐오하여 같은 혼다긴 하여도 같은 핏줄이 아니라고 하였다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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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09.11.08 11: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삼천포로 빠지는 얘기지만 천도에서의 다다카쓰의 신창은 거의 사기더군요 ( ..)

    사타케 요시시게의 귀창으로 대응을 해봤지만 사정없이 녹아내리는 우리의 병력 ㅜ.ㅜ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09 16: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신창과 귀창의 대결이라... 무협지의 한 장면 같군요. ^^

      역시 그런 놈과 맞붙을 때는 갑옷 업그레이드(胴丸??) 한 다음이나 맞붙어야 할 듯.

  2.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11.09 21: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슴뿔투구 라는 챠밍 포인트(?) 때문인지 인상이 강한데 저는 어째 맨먼저 생각는건 꽃사슴이..(....)

    무쌍에선 전용 bgm이 들리면 괜히 움찔해서 주위를 살펴봅니다;;;
    (그렇긴해도 bgm은 참 좋더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0 04: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여담으로...저 사슴뿔 투구[鹿角の冑]는 히데요시에게 하사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맘에 드는 그림이 나올 때 까지 9번을 그리게 해서 나온 것이 저 그림일고 합니다(그 전 8폭의 그림은 전부 쓰레기 통).

      타다카츠가 쿠와나 성에 있을 시에 토사파[土佐派]의 화가에게 그리게 한 그림으로, 주제는 '세키가하라에 출전한 타다카츠'라 합니다. 즉 세키가하라 때 타다카츠는 저런 갑주와 투구를 썼었다는 말입죠.

      무쌍 시리즈는 초대 삼국무쌍 때 달려드는 여포에게 공포를 느낀 나머지 그 다음부터는 안 하고 있습니다.
      여포가 너무 강한 나머지 구석에서 숨어서 활만 쏘고 있었는데 몇 번 맞던 여포가 이쪽을 쳐다보고는 달려와서 '조운'이었던 절 죽이더군요. 화살 쏘는 시점에서 달려오는 여포는 공포 그 자체였습죠.....는 경험담이긴 하지만 그 이후 그런 류의 게임은 잘 안 해서...(늙어서 손이 느려진 이유도 없지않아 있긴 한 것 같기도 합니다)

  3. ckyup 2009.11.11 23: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비에겐 자룡, 이에야스는 헤이하치로, 그 유명한 혼다얘기군요. 잘 읽었습니다. 근데 센코쿠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며 항상 궁금했는데요 - 장수끼리 소위 '맞짱'은 없었나요. 삼국지에서 관운장이 안량과 문추를 베었듯이, 뭐 예를들어 '백전의 노장 혼다헤이하치와 칠본창의 거두 기요마사와의 한판' 이딴거 말이죠. 생각만 해도 재밌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5 16: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타다카츠는 보통 장비와 비교되더군요.

      장수끼리의 맞짱은 없었습니다. 이미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 義経]가 활약하던 12세기때도 예전엔 그런 일기토[一騎打ち]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거 없다...고 하타케야마 시게타다[畠山 重忠 - 당시엔 엄청난 武의 소유자로 유명]에게 말해 준 노병사가 있을 정도로 과거의 유물이었습죠.

      ==================================================
      11월15일 추가:조금 추가합니다.

      삼국지연의와 같은 장수끼리의 맞짱은 없었습니다만 특이한 예로 전투 중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상대편 지휘관 중 하나를 직접 죽인 적은 있습니다.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카츠[信勝 - 보통 '노부유키'로 유명]가 하야시[林] 형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이노우 전투[稲生の戦い]에서, 노부나가는 반란군 지휘관 중 한명이며 하야시 형제 중 동생인 하야시 미마사카노카미[林 美作守]를 직접 쓰러뜨리긴 하였습니다만 이도 난전 중 일어난 일이며 또한 스기와카[杉若]라는 부하의 종이 가세해 주었죠(즉 2:1로)

      ===================================================
      타다카츠도 젊었을 때는 물론 직접 창들고 싸우긴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죠. 아들이 창술 연습하는 거 보고 화를 내며,
      "전투에서 창을 드는 것은 무명소졸이나 할 일이고, 너희들 쯤 되는 신분이라면 사람들을 부리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 나도 무명소졸이었을 때는 직접 창을 쥐었지만 지금과 같은 신분이 된 지금은 창을 쥘 일도 없으며 지휘채를 휘두를 뿐이다. 너희들도 헤이하치의 뒤를 이을 생각이 있다면 지휘채를 휘두르는 법, 사람을 부리는 법을 훈련하는 편이 좋다. 무명소졸이나 하는 연습은 할 필요가 없다"

  4. 써니데이 2009.11.15 14: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인 토시이에와 같은 일본 사극보면서 항상 느끼던거군요 ..
    창의 명수로 알려진 토시이에가 저 나이에 지휘는 안하고
    창 들고 병사들 찔러죽이는데 혈안이 되어있는 모습만 나오니.. -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5 18: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시 비주얼 적으로 그게 좀 멋있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그나저나... 토시이에로 나온 카라사와 토시아키, 마츠로 나온 마츠시마 나나코 둘 다 좋아하는 배우에, 관심있는 시대이지만 아직까지 전 그 드라마를 보지 않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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