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둘째 딸 토쿠히메[督姫=토미코[富子]]와 결혼하였다. 둘 다 재혼이었다. 테루마사의 첫 번째 부인은 시즈가타케[賤ヶ岳]에서 전사한 셋츠[摂津] 이바라키 성[茨城城] 성주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清秀]의 딸이었다.

 토쿠히메의 전 남편은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우죠우 우지나오[北条 氏直]였으나,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후 몰락하여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에 돌아와 있었다. 결혼은 히데요시[秀吉]가 선 중매였지만, 이에야스의 사위라는 조건이 테루마사의 출세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전쟁터에서 공명을 다툰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가 이렇게 빈정댄 적이 있었다.
 “산사에몬[산사에몬[三左衛門=테루마사]이 지금은 거대한 영지의 영주로 출세했지만 그건 오로지 그의 ‘거시기’ 덕분이다. 창 한 자루로 이렇게 출세한 나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지”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테루마사는,
 “확실히 나는 ‘거시기’로 이렇게 출세했지. 만약 창까지 사용했다면 천하를 손에 넣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창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야”
 하고 웃으며 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부인이 이에야스의 딸이라는 이유로 굉장히 신경 썼었던 듯 하다.
 토쿠히메를 따라서 이케다 가문[池田家]에 온 늙은 시녀[老女]가 어느 날 테루마사 부부 앞에서,
 “우리 가문이 이렇게 번영한 것도 토쿠히메 님 덕분이옵죠”
 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자 테루마사는 얼굴색을 확 바꾸며,
 “내가 공적을 세웠기에 부인도 우리 가문에 시집온 것이며 영지도 더 하사 받은 것이다.”
 고 말하며 평소와는 달리 엄하게 질책했다고 한다.
 이는 테루마사가 연극한 것이다. 그 후 은밀히 그 늙은 시녀를 불러서는,
 “사실 말하자면 우리 가문의 영달은 자네 말마따나 토쿠히메 덕분이지. 그러나 그걸 대놓고 말하면 부인이 기어오를지도 몰라. 앞으로도 부인 앞에서는 그러한 말은 자제해 주기 바라네”
 하고 부탁했다고 한다.

 테루마사는 키가 작았다. 하지만 그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느 날 제후가 열석한 주연(酒宴)에서 테루마사는 왜소한 키에 대해서 비웃음 당한 적이 있다. 그러자 테루마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럼 내 왜무(矮舞)라고 새로 만든 춤과 노래가 있으니 한번 들어보시오”
 라고 말하며 일어서 박수를 치며,
 “하리마[播磨], 비젠[備前], 아와지[淡路][각주:1]라는 세 지역[国]의 주인이기에 키 따위 바라지도 않으니…”
 하고 부채를 펼치고, 몸과 손으로 춤을 추었다고 한다.

 테루마사는 츠네오키[池田 恒興]의 둘째 아들로 키요스 성[清洲城]에 있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저택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부친 츠네오키의 전력(戰歷)은 혁혁한 것이었다. 오케하자마[桶狭間]에서 세운 공적으로 한 부대의 부대장[侍大将]가 되었고, 계속해서 에치젠[越前] 아사쿠라 정벌[朝倉征伐], 오우미[近江]의 오다니 성[小谷城] 공략, 아네가와 전투[姉川の戦い],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 등에 출진하였다.

 테루마사의 데뷔전은 1580년의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 공략이었다. 16세인 테루마사는 부친이나 형과 함께 셋츠 하나쿠마 성[花隈城]을 공성하였는데 이케다 부자(父子)의 활약은 눈부셔, 공략이 끝난 후 노부나가는 츠네오키에게 아라키 무라시게의 영지를[각주:2], 장남 모토스케[元助]에게 이타미 성[伊丹城], 테루마사에게는 아마가사키 성[尼崎城][각주:3]을 하사하였다. 노부나가가 츠네오키에게 내린 표창장에서 테루마사에 대해 언급하길,

나이 16살에 불과하면서도 적진에 돌격하여 큰 무용을 자랑하니, 이는 정말 이케다 키이노카미[池田 紀伊守=츠네오키] 자네의 아들 답네. 내가 눈 여겨본 것이 틀리지 않아 기쁘며, 세운 공적 또한 비할 대 없도다
 고까지 말하며 격찬하였다.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자 이케다 부자는 히데요시 편에 서지만, 부친과 형은 히데요시가 이에야스와 싸운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 전사하였다. 히데요시는 특별히 테루마사의 조모 요우토쿠인[養徳院][각주:4]에게 편지를 보내어, 츠네오키와 모토스케의 죽음을 위로하며 남겨진 테루마사를 포함한 아들들을 잘 돌보겠다고 약속하였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 테루마사는 이에야스의 사위로 토쿠가와 진영에 접근하였고 곧바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테루마사는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격렬한 공적 다툼을 벌인다. 이해의 7월 아이즈 정벌[会津征伐][각주:5]에 나섰던 이에야스는 시모츠케[下野] 오야마[小山]에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거병소식을 듣고 급거 철군하여 서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때 선봉에 선택된 것이 테루마사와 마사노리였다.

 우선 목표로 한 것은 오다 히데노부[織田 秀信=노부나가의 손자]가 지키는 기후 성[岐阜城]이었다. 주공의 대장은 마사노리, 조공은 테루마사로 정해졌다.
 8월24일. 전투가 시작되어 기소가와 강[木曽川]을 도하한 테루마사 휘하 7천의 병사는 성 밖 엔마 당[閻魔堂]에 포진한 오다의 군세를 습격하여 수급 700을 취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지만, 주공인 후쿠시마의 군세는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했다. 테루마사의 공적이 한발 앞서나가자 마사노리는 화가 났다. 왜냐면 공격은 동시에 하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이다. 마사노리의 분노를 느낀 다른 장수들이 테루마사를 설득하여 다음 날 공성전에서는 마사노리가 먼저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다음 날이 되자 테루마사는 그 약속을 어기고 앞서나가려 한 것이다. 마사노리는 열화와 같이 화내며 결국 테루마사가 나아가려는 길에 불을 질러 진로를 막았다. 이 양자의 공적 다툼은 낙성된 뒤에도 이어져 어느 쪽이 먼저 성에 진입하였는가에 대해서 서로 자기네가 먼저라고 말하며 물러서지 않아, 마사노리는 테루마사를 죽인다고 까지 말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당신은 이에야스의 사위잖소’라며 독전관[軍監]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의 말에 테루마사는 깨끗이 공을 마사노리에게 양보했다고도 하며, 양자가 동시에 성을 함락시키는 것으로 했다는 말도 있다.[각주:6]

 테루마사는 세키가하라 결전[関ヶ原の戦い]에서는 그다지 공을 세우지 못했지만, 이 기후 성 공성에서 세운 공적으로 미카와[三河] 요시다[吉田] 15만2천석에서 하리마[播磨] 히메지[姫路] 52만석이라는 대봉(大封)을 하사 받아, 이곳에 후세까지 명성이 자자한 히메지 성[姫路城] 축성을 개시하였다.
히메지 성은 모우리[毛利], 시마즈[島津] 등 서국(西国]의 토자마다이묘우[外様大名] 감시와 오오사카 성[大坂城]의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을 위압하기 위해 무엇보다 웅대하게 만들어졌다.

재능있는 낭인(浪人)을 고용하여 자가(自家)의 강군(强軍)을 꾀했지만 그로 인해 돈을 아끼지 않았다.[각주:7] 유명한 고토우 마타베에[後藤 又兵衛]를 고용하여 그의 옛 주가인 쿠로다 가문[黒田家]은 물론 막부(幕府)에서도 클레임이 왔지만 테루마사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그를 지켜주었다고 한다.

[이케다 데루마사(池田 輝政)]
1565년 생. 1584년 미노[美濃] 오오가키 성[大垣城] 성주[각주:8]. 1590년 미카와[三河] 요시다[吉田] 15만2천석으로 옮겼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히메지[姫路]를 하사받았다. 1613년 1월 27일 죽었다. 49세.

  1. 이상 테루마사의 영지. [본문으로]
  2. 거성은 아리오카 성[有岡城]. [본문으로]
  3. 그냥 표창장[感状]만 받았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4. 노부나가의 유모(乳母). 고귀한 집안은 젖물리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아기 때의 노부나가는 다른 유모의 젖꼭지를 물어 뜯는 버릇이 있었지만 테루마사의 조모인 요우토쿠인[養徳院]의 젖꼭지는 물어 뜯는 일 없이 얌전히 먹었다고 한다. 요우토쿠인은 후에 노부나가의 부친 노부히데[信秀]의 측실이 된다. [본문으로]
  5.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고 하자 상경하라고 명령하나 카게카츠의 가로(家老)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의 편지에 빡쳐 정벌하러 간 사건. [본문으로]
  6. 테루마사는 5년간 기후 성[岐阜城]의 성주였다. 때문에 마사노리 보다는 성 공격이 수월했을 것이다. [본문으로]
  7. 대신 그만큼 절약하여 부인 토쿠히메[督姫]가 놀이개를 갖는 것도 금지했으며, 아이들에게도 장난감을 사주지 않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8. 1585년엔 기후 성[岐阜城] 성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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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동희 2010.11.23 11: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친구도 참 난세를 거쳐 예상치 못한 출세를 한 대표적인 인물이죠
    이에야쓰의 사위가 되서 출세를 한 것도 행운이었지만
    사실은 그 이전에 아버지와 형이 횡사를 한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히데요시 입장에서 이께다 부자가 괜히 오까자끼 공격하겠다고 나서서 사실 손해만 본 싸움이었는데
    그래도 그 아들을 잘 돌봐 줬으니 히데요시에 대한 의리도 큰데 말이죠
    아무튼 눈치 빠르게 이에야쓰에게 붙어서 영화를 누렸으니
    역시 센코쿠 지다이의 공명은 눈치싸움이 아니었는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1.23 12: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정동희님.

      개인적으로는 운만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테루마사의 부친 츠네오키는 노부나가 유모의 아들입니다. 당시 그리고 에도 시대 때를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유모의 혈통들은 막부의 중추가 되어 활약하더군요. 만약 노부나가가 살았다면 테루마사 역시 오다 정권의 중추에서 활약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아...이것도 운이라면 운이군요. ^^;)

      혈통문제를 하나 더 언급하자면 테루마사의 여동생(누나??)은 칸파쿠 히데츠구[秀次]의 정실이었습니다. 히데요시 정권이 이어졌더라도 테루마사는 순풍만파한 인생을 보냈을 것 같습니다.

      또한 테루마사 역시 범용한 무장은 아니던 것 같습니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했다는 말 중에 이런 것이 있던데, "주군에게 받은 녹은 인재를 모으는 데 써야 한다". 노부나가 역시 자기 부하들에게 축재를 하지 말고, 영지를 주면 거기서 나는 이익으로 인재를 모으는데 쓰라고 하지요(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를 쫓아낼 때도 그런 말을 합지요).

      테루마사도 그런 말을 하였는데,
      "내 스스로 다 할 순 없으니까 인재를 모아야 한다"
      라고 하며 50만석 이상의 다이묘우가 2~3만석 정도의 다이묘우와 같은 생활을 했다고 하며, 자기 부하 중에 그렇게 실천하는 자들을 칭찬하고 상을 내렸다 합니다.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의 정벌전 때 세운 공 역시 상당했던 것을 보면 나름 능력은 있었다 생각합니다.

      테루마사는 이에야스의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役]이 일어나기 2년전에 죽었는데, 토요토미 가문과 나름 인연이 깊었던 인물 들(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마에다 토시나가[前田 利長],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이 동시기에 죽었기에 에도 막부에 의한 암살설도 있습죠.

      센고쿠 뿐만 아니라 지금도 눈치(=시세를 읽는 능력)는 중요한 재능이라 생각합니다. ^^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10.11.23 23: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전에 코마키-나가쿠테 전장터 표끊어서 갔을때 근처에 아버님 츠네오키 무덤도 있었던 듯 한데 이게 또 기억이 잘 안나는군요(...) 이래저래 능력있던 무장인듯은 싶습니다...

    정작 혁신에서는 그 간지 일러스트에 비해 능력이 그 마사노리보다 놀랄만큼 구려서 세키가하라 사나다로 플레이시에는 잡자마자 냉큼 +9 명검이 아까워서 참수시켰던 기억이라 이래저래 안습이(....)

    요즘엔 센고쿠 관련 게임만 하다보니 정작 역사쪽으론 등한시 하는 경향이 생겼는데(OTL...)발해지랑님 포스팅덕에 이래저래 많이 배우고 갑니다.

    //

    그 암살설에 관해서는 소녀 닌자 아즈미...라는 괴 영화에서 잘 다루고 있더군요(OTL....)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1.24 11: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름 무패의 장수입죠. ^^(싸운 횟수가 그만큼 적지만요)

      확실히 신장의 야망에선 뭐 하나 특출날 것 없는 평범 그 자체같더군요.

      그쵸. 아즈미가 싹 다 죽이더군요. 오히려 너무 쉽게 죽이는 거 같아서 개인적으로 어처구니 없더군요(뭐 만화에 많은 것을 바랄 순 없습니다만)

  3. 맹꽁이서당 2010.11.28 15: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래 주군이었던 오다 가문보다 결과적으로 더욱 부흥했군요.
    도쿠가와 가문을 원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텐데, 오히려 사위가 되고 거대한 영지까지 받았으니.. 묘하네요. ^^

    간만에 인사드립니다. 잘 지내셨는지요? 전 초가을에 이스탄불과 파리에 잠시 다녀왔답니다. ㅎㅎ
    http://belldandy314.blog.me/50100327508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1.29 11: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습죠. 오다의 핏줄들이야 전부 1만석 쩌리들이었는데 이케다 핏줄은 10개 가까운 다이묘우에 전 영지를 따지면 100만석 가까웠다고 하니까요.

      여담으로 이케다 테루마사가 이에야스의 딸과 결혼할 때, 이에야스에게 부탁하여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 테루마사의 아비 츠네오키[恒興]를 죽인 나가이 나오카츠[永井 直勝]를 불러 아비가 전사할 때의 모습을 듣고 난 뒤,
      "자네는 영지가 얼마나 되나?"라고 묻자 나가이 왈,
      "5000석입니다"
      는 말을 듣고,
      "아버지의 목이 5000석밖에 안 되는구나"
      라고 하여 이에야스는 즉좌에서 나가이의 영지를 1만석으로 가증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
      .
      .
      ...만 실제로는 나가이 나오카츠가 1만석을 얻게 되는 것은 결혼식(1594)이 있는 후 몇년 뒤 세키가하라가 끝난 뒤인 1601년에 1만석이 되었다고 하니 그냥 일화일 뿐인 듯 합니다.

      ==================================================

      유럽여행기 잘 보았습니다. ^^
      엄청나게 풍부한 사진을 찍어 보여주셔서 고맙습니다. ^^b

      양이 엄청난 만큼 오늘은 3일차까지만 보았습니다.

      이스탄불은 전체적으로 우리나라 물가와 비슷한 듯 합니다.

      이교의 건물들을 그냥 놔두는 데에서 그들의 관용(??)을 느낄 수 있더군요.

      냥이 사진도 있어 기뻤습니다. ^^

      대항해시대에 관련된 것은 놓치지 않고 언급하시는데에서 맹꽁이서당님이 얼마나 대항해시대를 좋아하셨는지 알 수 있는 것 같아 나름 동질감을 느껴 기쁩니다. ^^

이케다 데루마사[池田 輝政]

1613 1 25일 병사 50

1564 ~ 1613.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유형제(乳兄弟)[각주:1]인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의 아들.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 부친이 죽는 바람에 오오가키[大垣]성주가 된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 공을 세워 하리마[播磨] 하사받아, 히메지 성[姫路城]를 쌓았다. 후에 '서국 쇼우군[西 ][각주:2] 이라는 이명(異名)을 얻었다.









히메지 백만석


 이케다 테루마사의 할머니인 요우토쿠인[養徳院]이 오다 노부나가의 유모(乳母)였던 연()도 있어 테루마사는 어려서부터 노부나가를 가까이서 섬겼다. 노부나가가 죽자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를 섬기며 중용(重用)받아 히데요시는 테루마사를 양자(養子)로 삼는다는 약속도 하였다[각주:3]. 그러나 나가쿠테의 전투에서 부친 츠네오키와 형인 요시스케[之助]가 전사한 후에는 이케다 가[池田]를 상속하여 미카와[三河] 요시다([吉田] 15 2천 석의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1594 8월.
 테루마사는 히데요시의 중매로 토쿠가와 이에야[
川 家康]의 둘째 딸 토쿠히메[督姬][각주:4]를 후처로 맞이하였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이에야스 편에 섰고, 공을 세워 하리마 52 1천 석이라는 큰 영토를 하사받아 히메지성에 입성했다. 입국한 다음 해인 1601년부터 성을 개축(改築)하기 시작하여, 1609년에 한 층 더 호화장대(豪華壯大)한 성곽이 완성되었다.


 가정면에서도 토쿠히메와의 사이에 5명의 남자아이가 탄생. 전처(前妻)의 아들인 장남 토시타카[利隆]는 둘째 치더라도 2남 타다츠구[継]는 다섯 살 때 외할아버지인 이에야스에게서 비젠[備前] 오카야마[岡山] 28 6천 석을 하사 받았을 뿐만 아니라, 3남 이하에게도 아와지[淡路], 하리마 안에 각각 영토를 하사받았기에 그런 영지들을 합쳐서 '히메지 백만석', '서국 쇼우군' 등으로 불렸다. 너무 과한 대우에 이에야스의 적남(嫡男) 히데타다[秀忠]가 질투하여,
 “
아예 테루마사에게 천하를 잇게 하는 것이 좋겠군요
 라고 삐쳤을 정도였다.


 사위와 장인이 되어서부터 급속히 토쿠가와 가문[徳川家]과 관계가 깊어진 테루마사이지만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은혜를 잊는 일 없이 어린 히데요리에 대한 배려를 게을리 하는 법이 없었다. 누나가 칸파쿠[白] 히데츠구[秀次]의 정부인이라는 것도 있어 토요토미 가문과는 깊은 연으로 맺어져 있었다.
 
히데요리가 니죠우 성[
二条城]에서 이에야스와 만났을 때도 옛 토요토미 가의 무장들과 함께 히데요리를 경호(警護)했으며, 1602년 정월 궁궐에 신년인사를 할 때도 테루마사는 히데요리를 대리해서 입궐하였다.


성내에 이변(異變)이 일어나다.


 1609 5월.

 천수각(天守閣)을 완성했을 때부터 히메지 성 안에서 이변이 자주 일어났다. 예를 들면,


 '
천수각의 한 방에서 17~8살 정도의 시녀가 12히토에[単][각주:5]를 입고 홀로 촛불을 들고는 혼자서 앉아있었다. 젊은 사무라이가 이상히 여겨 가까이 다가가자 빗을 건내 주었다. 그 빗은 천수각의 갑옷 상자 안[각주:6]에 있던 것이었다.'


 '심야(深夜). 맹인(盲人)이 나타나서 들고 있던 비파의 통을 열어보라고 하였다. 젊은 사무라이가 열어보려고 하자 맹인은 키가 3미터나 되는 귀신으로 변신해서나는 이 성의 주인이다라고 위협했다'


 같은 해 12 13일. 한 통의 이상한 편지가 성에서 발견되었다.
 보낸이는 '하리마의 주인인 대천신(大天神) 토우센보우()' '수도(首都) 니죠우[二条]의 센마츠'이며, 받은이는 테루마사와 토쿠히메 부부로 되어 있는 것으로 50~60장에 이르는 협박문이었다. 내용은,

토오토우미[遠江]의 요린보우라는 대천신(大天神)이 큐우린보우라는 천신(天神)을 꼬셔서 테루마사 부부를 저주하여 죽이려고 한다. 이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성 안에 8층탑을 세우고 호마(護摩)의 비법을 익혀 기도하라.
 
또한 팔층탑안에 넣을 두루마기와 그림은 천축에서 이 나라에 전해진 두통 중 하나를 넣을 것. 한 통은 하리마 동쪽에 사는 유명한 목수인 히하라[
日原]가 몰래 가지고 있다. 호마는 온타케산[御嶽山] 산에 있는 시미즈 사[清水寺], 후나코시산[船越山] 산에 있는 루리 사[瑠璃寺] 등의 고명한 중을 스승으로 삶아 수련할 것.

등의 지시가 쓰여져 있었다. 테루마사는 몸집이 작은 사내였지만 용맹과감하고 침착한 사나이였기에 협박장을 무시했다.


 그러나 1611 12월.
 그는 갑자기 중풍에 걸렸다. 발병 당일. 테루마사는 가신의 집에 방문했다가 갑자기 쓰러져 가마로 성으로 돌아오는 도중 어디서 왔는지 모를 수 많은 까마귀들이 날아와 가마에 부딪혔다. 성에서 이변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렇게 되자 아무리 테루마사라도 어쩔 수 없었다.


 타카 군[多可郡] 엔만 사[円満寺]의 묘우카쿠() 아사리에게 악마 퇴치, 국가 수호의 기도를 부탁했다. 37일간 성안에서 술법을 행한 묘우카쿠의 진언(進言)에 따라, 천수의 귀문(鬼門)에 해당하는 북동쪽에 팔층탑을 세우는 동시에 오사카베 신사[刑部神社]를 건립하였다. 오사카베 신사는 원래 히메야마[姫山] 산에서 지방신(地方神)을 모시던 신사의 건물을 히데요시가 히메야마 산에 성을 세울 때 산 아래로 옮겼기 때문에 신의 분노를 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테루마사의 중풍은 일시 회복했다. 성 안은 평온을 되찾았다. 하지만 다음 해 1월에 재발하여 테루마사는 피를 토했다. 이 때도 수 많은 까마귀가 날아와서 창호지에 부딪혔다. 마당에 죽은 솔개가 두 마리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아타고[愛宕][각주:7] 신자인 테루마사는 이 일울 흉한 일이 있을 징조라 생각하여 더욱 병이 깊어졌다. 이에야스가 중풍의 묘약을 보내왔지만 테루마사는 25일 오후. 숨을 거두었다.


 이에야스는,

 "그런가…… 죽었는가. 뭐든지 아타고에게 의존한다고 천하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에야스는 천하를 노리고 있던 테루마사의 마음 속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1. 같은 여인의 젖을 먹고 자란 사이. 높은 집안의 아이는 모친의 젖이 아닌 다른 사람의 젖을 먹는 풍습이 있었는데 노부나가는 유두를 물어 뜯는 버릇이 있었다고 하지만 츠네오키의 모친의 젖만은 얌전히 먹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칸토우[関東]의 토쿠가와 쇼우군[德川 将軍]만큼 권세와 힘이 있다는 뜻에서. [본문으로]
  3. 실제로 히데요시의 양자가 된 것은 테루마사의 동생 이케다 나가요시[池田 長吉]. [본문으로]
  4.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우죠우 우지나오[北条 氏直] 부인이었으나 우지나오의 죽음으로 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본문으로]
  5. 귀족 여성의 정복. [본문으로]
  6. 평시에는 열지 못하는 것에도 불구하고. [본문으로]
  7. 일본의 종교인 신도(神道)에서는 불을 막는 신이지만, 신불습합 사상에 따라 불교의 승군지장[勝軍地蔵 – 지장보살의 군신(軍神)일 때의 이름]과 같은 신으로 여겨졌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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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고시치로우 히데츠구는 성인식을 치른 후 카와치(
) 2만석의 영토를 하사 받고 이때부터 외삼촌인 히데요시를 따라다니며 10대 중반 즈음부터 전투에 참가하였다.
 물론 처음부터 한 군단의 대장이었다. 16살 때는 이세(伊勢)타키가와 가즈마스(川 一益) 정벌에 참가했다.

 

 “열심히 해라. 열심히 하면 좋은 일이 있을 거다”

 
 라고 외삼촌 히데요시는 매번 말했다. 좋은 일이라는 것은 히데요시의 후계자가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긴 했다. 이 세상에서 히데요시의 피를 가장 진하게 이어받은 것이 바로 이 마고시치로우였다.
 둘째인 고키치(小吉 = 히데카츠(秀勝))도 그렇기는 했지만 이 둘째는 지능이 좀 떨어졌고 더구나 태어날 때부터 외눈이었다.
 셋째인 아이는 후에 히데토시(秀俊)라는 인물이 되지만 이 아이는 일찍부터 히데요시의 이부제(異父弟)히데나가(秀長)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탈락했다고 보아도 좋았다. 즉 히데요시의 혈통 중에 젊은 사람은 누나 오토모가 낳은 이 세 명밖에 없었다.

 
 ‘이 분이 후계자가 되신다.’
 라고 여러 장수들도 그리 생각하였다. 자연히 나이 먹은 장수들은 마고시치로우를 히데요시의 분신처럼 떠받들었다.
 이런 와중에 웃기지도 않다는 듯이 마고시치로우를 비웃는 사람이 있었으니, 히데요시의 몇 없는 친척 중에 하나인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였다. 오와리 키요스(淸州)의 오케야(桶屋[각주:1])의 아들로 태어나 아명(
兒名

)
이치마츠(市松)인 마사노리(正則)는 히데요시의 죽은 아비의 혈연이었던 관계였기에 어렸을 때부터 하시바 가문(羽柴)의 부엌 밥을 먹고 자라며 코쇼우(小姓)가 되었고, 이어 시즈가타케(賤ヶ岳[각주:2])에서는 공을 세워 지금은 모노가시라(物頭[각주:3])가 되어 세 개의 부대를 이끌고 있었다. 원래 마사노리는 감정의 기복이 심하였으며 광인(狂人)이라 생각되어 지는 곳도 있었고 또한 히데요시의 일족이라는 자부심이 굉장히 강한 남자였기 때문에 마고시치로우를 질투의 감정을 통해서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괭이질 하는 것밖에 재주가 없는 남자다”

 

 누군가가 마고시치로우를 '귀족'이라 말했을 때 마사노리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저 놈이 귀족인가? 옷이야 귀족하고 같겠지만 안에 있는 몸뚱이는 보급대의 짐꾼조차 버거운 놈이다”

 
 고 말했다.
 그런 험담이 마고시치로우의 귀까지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그런 종류의 말들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자연히 허세를 부리게 되었고 보좌하는 노장들에게까지 거만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16살 때 말이다.
 그러나 전투에 있어서는 보좌역들이 모든 것을 관리하였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그렇기에 큰 공도 없었다. 이 젊은이가 전투를 - 라기보다는 역사를 좌우할 정도의 행동을 하게 된 것은 다음 해인 17살이었을 때였다.

 
 그 전투는 후에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의 싸움이라고 일컬어 진다.
 때는 히데요시가 일본의 중앙 24개국을 휘하에 두었을 즈음으로 그 위세를 몰아 토우카이(東海)지방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
川 家康)를 제압하고자 직접 대군을 이끌고 오와리로 진출했다. 이에야스도 본국인 미카와(三河)를 비워둔 체 오와리에 포진하여 거의 3배에 달하는 병력을 가진 히데요시군과 대치했다.
 서로 상대의 허실을 간파하고 있었기에 대치한 채 움직이지 않았고 서로 견고한 야전진지를 구축하여 전선은 고착상태가 되었다. 이럴 경우 가벼이 군을 움직이는 쪽이 질 것이다. 적이 움직임에 따라 곧바로 대응하는 태세를 쌍방이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는 자중에 자중을 거듭하였지만 이럴 때 그에게 있어서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 작전을 제안해 왔다.

 과거 오다 가문(織田家)의 동료였던 이케다 쇼우뉴우(池田 勝入[각주:4])와 테루마사(輝政) 부자(父子), 천하를 손에 넣고자 하는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는 기분상하게 하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이케다 쇼우뉴우는 공을 세우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그가 제안한 작전이라는 것은 - 이에야스의 본거지인 미카와가 비어있다. 지금 은밀히 별동대를 편성하여 이에야스 모르게 우회 행군하여 곧바로 미카와를 공격하면 이에야스는 놀라 이곳을 버리고 지 나라로 돌아갈 것이다. 이 별동대의 선봉을 자신에게 맡겨주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찬동할 수 없었다. 이에야스가 알아채고 행여라도 패배라도 당한다면 이것을 계기로 전군의 사기가 떨어져 버릴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쇼우뉴우는 다음날 다시 한번 간청했다. 히데요시는 쇼우뉴우의 마음이 멀어지게 하지 않기 위해서 결국 허용했다. 단 하나하나 세세히 주의시켰다.

 

 곧바로 별동대가 편성되었다.
 선봉은 이케다 쇼우뉴우, 중군은 모리 나가요시(森 長可), 호리 히데마사(堀 秀政)라는 식으로 오다(織田) 시대부터 맹장으로 유명한 장수가 선발되었고, 후군은 미요시 마고시치로우 히데츠구가 담당함과 동시에 별동대 전체의 대장도 겸했다.
 유격군 총 1 5천이 오와리 가쿠덴(樂田)의 진지를 출발한 것은 1584 4 6일 심야였다. 모노쿠루이(物狂) 언덕을 살며시 넘어 이에야스의 진지 전방을 통과, 첫째 날은 무사히 그 행동이 탐지되는 일 없이 넘어갔다.
 이에야스가 알게 된 것은 다음날인 7, 그것도 노을 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싸움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에야스가 히데요시군에 밀정으로 파견했던 이가(伊賀) 닌쟈(忍者) 핫토리 헤이로쿠(服部平六)라는 자가 돌아와서 이것을 보고했다.
 히데요시의 한 부대가 움직였다는 보고에 이에야스는 뛸 듯이 기뻤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해가 짐과 동시에 행동을 개시했다. 그가 취한 방법은 은밀히 움직이는 적군을, 이 또한 은밀히 추격하는 것이었다.

 이에야스는 코마키의 본영에서 9천의 병사를 히데요시군이 알아채지 못하게 빼내는 데 성공, 그 뒤 재빨른 행군으로 뒤를 쫓았고 곧이어 심야에 적 후미를 발견했다.

 

 “적 후군의 장수는 누구더냐?

 

 “미요시 마고시치로우님이십니다.

 
 고 부하 중에 하나가 답했다.
 이에야스가 히데츠구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인식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어떤 인물인가?

 
 고 적 정세를 자세히 아는 자에게 물었다. 히데요시의 양자라고 한다. 나이는 17. 다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기묘했던 것은 이 어린 대장이 몸에 걸치고 있는 무구(武具)였다.
 마고시치로우 히데츠구는 그의 인생을 통해서 여러 가지를 수집했었는데 이 시기에는 열심히 유명한 무장의 무구를 모으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이 남자의 대장으로써의 특징인 부대표식에치젠(越前) 키타노쇼(北ノ庄)에서 패사(敗死)한 오다 가문 제일의 용장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의 금색 마토이([각주:5])이다.
 쓰고 있는 투구는 미노(美濃)출신의 무예가 뛰어난 무사로 지금은 히데요시를 섬기고 있는 히네노 빗츄우노카미 히로나리(
日根野 備中守 弘就)의 중국 관모(官帽)모양의 투구를 억지로 청해서 손에 넣은 것이었고, 몸에 걸치고 있는 새털로 된 진바오리(陣羽織[각주:6])오우미(近江)출신의 호걸(豪傑)로 지금은 히데요시의 군중에 있는 키무라 히타치노스케(木村 常陸介)가 항상 걸치던 것을 졸라서 손에 넣은 것이다. 말하자면 당대 영웅호걸의 전장도구들을 끌어 모아서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이었다.

 

 “특이한 분이시군

 
 이에야스는 머리를 조금 갸웃거리더니 비웃었. 이에야스가 알고 싶었던 것은 적장의 강하고 약함이었다. 선봉인 이케다 쇼우뉴우의 용맹함은 천하에 떨치고 있었으며, 중군인 호리 히데마사는 역전(歷戰)의 용사였고, 모리 나가요시는 미노 사이토우(
)()의 옛 신하출신으로 무사시노카미()를 칭하며 노부나가를 섬겨 여러 전장을 경험하면서 오니무사시(鬼武蔵[각주:7])라는 이명(異名)을 얻고 있었다. 또한 이 일족은 그의 동생 란마루(蘭丸), 리키마루(力丸)가 혼노우(本能)()에서 노부나가를 지키며 분전하다 그와 함께 죽은 것으로 유명하다.
 다들 너무 강했다. 기습의 효과는 적의 약점을 공격하는 것에 있다. 이에야스는 마고시치로우의 겉모습의 기묘함을 듣고,

 

 “그 분은 분명 약할 것이다

 
 고 말했다.
 이에야스가 보건데 그 히데요시의 친척이라는 인물은 자신의 용렬함과 무능함을 그러한 허세로 다른 사람들의 눈을 돌리고자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인간 관찰을 끝낸 후 이에야스는 마고시치로우로를 공격의 중점으로  두기로 하고
포위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하쿠산(白山)
 이라는 곳에 마고시치로우군() 야영했다.
 동쪽은 고지(高地) 서쪽으로 경사졌으며, 계곡 사이에 남북으로 길이 하나 나있을 뿐으로 주변은 울창한 숲이었다. 이런 지형으로 보건대 마고시치로우는 마치 습격 당하기 위해서 야영하고 있다고 밖에 없었다.
 더구나 공격하는 이에야스 본인조차 놀랄 정도로 척후는 커녕 보초도 게을리 하고 있는 상태였다.

 

 “편한 싸움이 되겠군. 명도 남기지 말고 모두 죽여라

 

 고 이에야스는 명령하며 야심함을 틈타 9천명을 속에 잠입시켜 완전히 포위한 상태에서 시간이 흐르는 것을 기다렸다.

 
 아침이 되어 마고시치로우군은 일어났고 일어났지만 주변에 이에야스군이 잠복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눈치채지 못한 채 왁자지껄대며 아침식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에야스군이 공격을 시작한 것은 때였다.


 이미
전투가 아니었다.
 학살이었다.
 대부분의 사졸들은 식기를 버리고 말을 버리며 맨몸으로 도망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마고시치로우는 이미 대장이 아니었다. 사냥터의 동물과 같은 신경만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도망가기 위해서 옆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숲에서 돌격해 오는 토쿠가와의 병사들을 보고 몸을 반대로 돌렸고 막상 갈 곳도 없어 주변을 우왕좌왕 하기만 하였다. 이러는 동안 그가 내린 명령은 하나밖에 없었다.

 

 “큐우베에(久兵衛) 불러라! 큐우베에를 불러라~!


 고 외쳤다.
 큐우베에는
그의 선봉대의 대장인 타나카 요시마사(田中 吉政)를 말한다.
 요시마사는 오우미(近江) 출신으로 아시가루(足軽[각주:8])부터 시작하여 출세, 여러 직책을 역임하는 동안 히데요시의 눈에 띄어 지금은 마고시치로우에게 파견된 전술 지휘관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남자였다. 남자의 부대만이 이런 혼란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간신히 버티며 적을 막아내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요시마사는 이상히 여겨 방어선을 철수시키고 왔다.

 

 “쇼우뉴우나 무사시에게 사태를 알려라~ 도우러 오라고 말해!

 
 하고 소리쳐댔다.
 요시마사는 어처구니 없었다.
 전령 역할이라면 츠카이반(使番[각주:9]) 대장 옆에 있다.
 제1선의 지휘관을... 그것도 방어하기에바쁜 와중에 불러서는 전령으로 삼으려하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거기에명령이라는 것도 좋지 않았다.
 지금 혼란은 후군이 혼자서 막아야만 하지 리나 앞서 있는 전방의 부대를 불러, 설사 그들이 구원하러 오더라도 개미지옥과도 같은 적의 함정에 빠져 속에서 각개격파 당해 버릴 것이다. 그런 가지 이유로 요시마사는 거절했다. 그러나 마고시치로우는 미친 듯이 외쳤다.

 

 “주인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거냐? 죽인다!!”

 
 고 소리쳐댔기 때문에 어쩔 없이 부하도 없이 혼자서 말을 몰고 전방 부대로 향했다.
 한 시간 정도 열심히 달려 호리 히데마사의 부대를 따라 잡아 후군이 무너졌다고 알리자,

 

 “큐우베에. 자네는 츠카이반이 아니다, 미요시 가문에서 지휘를 하는 신분이 아닌가? 그렇다는 것은 겁을 먹고 도망쳐 것이군

 
 하고 모두 앞에서 창피를 주었다. 요시마사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물러나 전장에서 이탈하면서
 ‘
장래 가능성이 있는 대장은 아니다
 며 마고시치로우에게 가망이 없음을 깨닫고 전투 후에 사표를 내고 낭인이 되었다.
 그 여담이지만 남자는 고향이 같았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주선으로 히데요시의 직속 신하가 되어, 기량에 걸맞게 10만석이 주어졌고 후에 세키가하라(ヶ原)에서는 이에야스측에 선 덕분에 치쿠고 야나기카와(筑後 柳川) 30여만석을 영유하게 된다.

 
 요시마사가 전령으로 떠나면서부터 마고시치로우의 군은 이상 군대가 아니었다. 모두 말을 버리고 맨발로 도망쳤다. 마고시치로우도 도망치면서 잔머리를 굴렸다. 중국 관모 모양의 투구, 금색 마토이의 우마지루시, 새털로 진바오리라는 호걸의 상징은 모두 버리고 역시 맨발로 도망쳤다. 이렇게 하면 적은 자기를 말단 무사로 밖에 보지 않을 것이다.

 그 앞을 카니 사이조우(可児 才蔵) 언제나 자랑하던 말에 채찍질하며 조릿대로 개인표식을 비스듬히 등에 단 채 유유히 도망치고 있었다.
 카니는
미노 출신으로, 창을 쥐면 남자를 당해낼 사람이 없다고 하는 남자이다. 히데요시는 마고시치로우에게 도움 된다고 생각하여 이런 종류의 능숙한 전쟁꾼들을 많이 배속시켜 주었다.

 카니는 역시 전장에 익숙한지 도망치는 방법도 어딘가 여유가 있어 보였다.

 

 “사이조우~ 사이조우~”

 
 하고 마고시치로우는 애원하는 듯이 불렀다. 물론 마고시치로우는 카니에게 아무런 용무가 없었다. 필요한 것은 그가 타고 있는 말이었다.

 

 “말을 나에게 다오

 

 마고시치로우가 말하자 카니는 눈동자를 굴리며 뒤돌아서는,

 

 “비올 때의 우산이외다

 
 라고 말하고선 도망쳤다. 비가 때는 우산이 필요하다. 퇴각할 때는 말이 필요하다. 그리 쉽게 말을 줄까하는 말이었다. 카니와 같은 미노 사이토우 가문에서 오와리 오다 가문으로 말을 갈아타며 수 많은 전쟁터를 경험해 전쟁전문가들은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패하는 모습을 보고 주인의 앞길에 한계를 느꼈을 것이다.
 실제로 남자는 후에 사표를 내던지고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섬기게 된다.

 
 그러는 동안 마고시치로우에게 배속된 부대장 중에 명인 키노시타 토시나오(木下 利直) 도망치면서 마고시치로우를 발견하곤 자신의 말에 태워 도망치게 하였고 자신은 맨땅에 서서 개인표식을 등에서 뽑아 땅에 꽂고서는 달려드는 적병을 막았지만 전사했다. 역시 그의 동생인 스오우노카미 토시마사(周防守 利匡) 형을 도와 말 없이 맨땅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마고시치로우는 뒤돌아 보지도 않고 도망쳤기 때문에 둘의 마지막조차도 알지 못했다.

 
 이 붕괴는 곧바로 전방의 아군들에게도 파급되어 선봉대장인 이케다 쇼우뉴우는 아들인 모토스케(之助) 함께 전사하였고 명장이라 일컬어졌던 모리 나가요시도 적의 두터운 포위망 속에서 이마에 철포 탄환을 맞고 죽었다. 어쨌든 별동대는 전멸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였다.
 이 나가쿠테(長久手) 패전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외교로 고립시킨 화해하여 결국은 신종(臣從)시켜 토요토미 가문 휘하 다이묘우(大名)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에야스에게 이것이 오히려 그의 무위(武威) 나타내는 최대의 이력이 되었으며 히데요시는 죽을 때까지 이에야스에게 큰소리를 못쳤다. 또한 덕분에 히데요시가 죽은 천하를 손에 넣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만약 마고시치로우의 실패가 없었다면 히데요시가 이겼고 이에야스는 패망(敗亡)하여 히데요시 정권 불안의 불씨는 꺼졌을 것이다. 이것은 누구보다도 히데요시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고시치로우는 몰랐다. 도망친 히데요시에게 전령을 보내어,

 

 “대신할 장수를 주세요

 
 라고 하였다. 마고시치로우의 입장에서는 키노시타 형제가 죽었으니 그들을 대신할 인물이 필요하다, 히데요시 옆에 있는 인물 중에 하나를 보내주세요 - 라는 것이었다.
 이름까지 집어서 말했다. 무용(武勇) 뛰어난 이케다 켄모츠(池田 監物) 원합니다 하였다. 말투가 마치 물건이라도 바꾸자는 듯하였다.

 

 “ 놈이 인간이냐?”

 

 라고 히데요시는 뻔뻔스럽게 마고시치로우의 말을 가지고 사자 히토츠야나기 이치스케(一柳 市助 = 후에 이즈노카미(伊豆守)[각주:10])를 향해서 우선 격노하였다.

 

 “네 놈을 우선 죽이고 나중에 마고시치로우에게 배를 가르게 하겠다"


 까지 말하였다. 키노시타 형제를 개죽음 시키고 자신만 전쟁터에서 도망쳐 왔으며 거기에 그 때문에 모리 나가요시, 이케다 쇼우뉴우 부자까지 전사했다. 그것에 아무런 창피를 느끼지 못하고 도망쳐 오자마자 대신할 사람을 보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정신상태를 가진 것인가?
 '저건 그냥 바보인가
?’

 히데요시는 이 패전보다도 그 생각으로 인해 더욱 마음이 어두워졌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장래를 맡길 자신의 혈연이 어째서 하나같이 이렇게 졸렬한 놈들뿐인지 예전부터 생각했다.
 많지도 않았다.
 그런데
동생인 히데나가(
秀長)를 제외하곤 모두 지능에 결함이 있던지 성격이 좇같았다. 처의 친척들을 둘러보아도 스무 살 전후의 젊은이 중에서는 제대로 된 놈이 없었다. 적어도 마고시치로우 정도는 하고 생각하여 조금은 기대를 걸었다. 그 재능은 포기한다손 치더라도 저 가벼운 성격을 보면 자신의 뒤를 물려준다고 하여도 세상 사람들은 따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따르지 않으면 권력의 자리라는 것은 하루도 버틸 수 없다는 것을 히데요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도 히데요시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 젊은이를 어떻게든 제 앞가림은 하는 머리와 마음의 소유자로 만들어 그런대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후계자로 만들어 가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히데요시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일을 꾹 참고 있었지만, 일단락한 어느 날 조용히 자신의 비서를 불러, 붓과 종이를 준비케 한 후, 눈 앞에 땀구멍이 커다란 밉상 맞은 얼굴을 한 마고시치로우가 바로 앞에 두고 있는 듯한 목소리로 받아 적게 하였다.

 
 [너는]이라는 말투로, 편지는 곧바로 본제로 들어갔다.

 평소 히데요시의 조카라는 것을 내세우며 눈을 찌푸리게 만드는 행동이 많다.
 
꾸짖어야 할 때가 왔다. 마음가짐도 올바르지 못하다. 반대로 역시 히데요시의 조카라고 존경 받을 수 있는 각오를 가져야 한다.
 앞으로는 더 이상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
 한 때는 죽이려고 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가엾다는 마음이 생겨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되었다. 마음을 고쳐 남들에게도 제대로 된 인간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뭐든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

 어쨌든 이번 전투에 대해서다.
 키노시타 형제를 붙여주었더니 너는 그 둘을 개죽음 시켜 버렸다. 그것을 너는 미안하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그런 마음도 없이 히토츠야나기 이치스케를 보내와 이케다 켄모츠를 달라고 말해 왔다. 창피함을 느끼고 분발해야 할 때에, 그 대신할 사람을 요구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이냐? 그 말을 전하러 온 놈도 얼간이여서 한 때는 내 직접 죽이려고 생각했다.

 어쨌든 앞으로는 심사 숙고하여, 히데요시의 조카는 굉장한 인물이라고 남들에게 들을 수 있게 되어 준다면 나는 무엇보다도 그것에 만족하겠다.
 지금의 마음 가짐만 고친다면 어느 나라건 너에게 주겠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제 앞가림도 못하는 얼간이라면 아무리 목숨을 구해주어도 내 체면에 걸린 문제이기에 내 손으로 직접 베겠다. 히데요시는 사람 베는 것을 싫어하지만 너를 이 상태로 놓아두는 것은 더욱 창피해지기에 다른 사람 손을 쓰지 않고 내 손으로 너를 죽이겠다.
  누가 봐도 훈계(訓戒)의 편지임을 알 수 있듯이 똑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말하고 있다. 그리고 다섯 번째 항목에,
 [너는 요령 좋고 잔재주가 많다
.]

 라는 말로 마고시치로우의 능력을 평하였. 요령 좋고 잔재주가 많다는 말을 제대로 인간이 들으면 내겠지만, 히데요시에게 있어선 정도의 표현만이 간신히 마고시치로우를 칭찬할 있는 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관심을 두고 언젠가는 나의 묘우다이(名代[각주:11]) 시켜주려고 까지 생각했었지만 지금과 같은 마음가짐으로는 끝이 보였다. 이것은 하늘이 히데요시의 이름을 남기지마라, 가문이 끊어져라라고 말씀하시는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라고 계속해서 훈계를 주제로 강조했다.
 그러나 마고시치로우는 편지의 의미를 이해할 없었다. 읽고 나서는,

 

 “나는 무예도 부족하 겁쟁이다라는 뜻인가?”

 
 라고 말했다. 말한 상대는 편지를 전하러 미야베 젠쇼우보우(宮部 善祥坊), 하치스카 히코에몬(蜂須賀 彦右衛門) 사람에게 였다. 둘은 마고시치로우의 난독증 놀라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그렇지는 않사옵니다

 
 하고 둘은 히데요시의 진의를 열심히 설명했다.

 

 “알고 있다!

 
 고 마고시치로우는 소리 높여 날카롭게 말했다. 정도의 독해력이라면 젊은이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단지 가지 이해할 없는 것이 히데요시의 분노였다.
 마음가짐, 마음가짐이라고 말은 하고 있지만 실은 자신의 부족한 무예와 많음을 질책하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 틀림이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히데요시는 마고시치로우라는 인간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틀리다 마고시치로우는 생각했다. 억울하다.
 ‘
나는 원래 용감한 남자다
 마고시치로우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아니, 믿는 습관이 되어있었다라고 하는 편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주문을 외우는 듯이 이렇게 믿는 습관을 항상 마음속에 갖추고 있기에 군단의 대장으로써 말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 용감함을 히데요시는 모른다. 승패는 병가지상사다. 한번의 패배로 이렇게 질책 받지 않아도 되잖아? 라고 내심 생각했다. 하지만 마고시치로우는 아무리 그래도 말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고 조그만 목소리로 둘에게 물었다. 세상살이에 익숙한 둘이라면 히데요시의 분노를 피하여 그의 기분을 좋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무엇을 하던지, 히데요시님에게서 붙여드린 숙노(宿老)들이 하자고 하는 대로 하심이 어떨까 하고 생각합니다

 

둘은 말했다.

  1. 상자나 통 등을 제조, 판매하는 가게 혹은 사람을 뜻함. [본문으로]
  2. 오다(織田)가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싸운 전투. [본문으로]
  3. 중급 지휘관. [본문으로]
  4.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를 말함. [본문으로]
  5. 대장 옆에 세우던 표식. [본문으로]
  6. 갑옷 위에 조끼처럼 걸쳐 있는 옷. [본문으로]
  7. 전장에서의 모습이 괴물(鬼에 비견될 정도로 뛰어나다는 뜻과 그의 관도명을 붙인 것. [본문으로]
  8. 최하층 무사(侍). [본문으로]
  9. 전령(傳令)을 말함. [본문으로]
  10. 히토츠야나기 나오스에(一柳 直末). 굉장히 뛰어난 인물이었든 듯 호우죠우(北条)를 멸한 오다와라 정벌에서 그가 전사하자 "칸토우를 손에 넣은 것보다 그를 잃은 슬픔이 더 크다"라고 말했다 하다. [본문으로]
  11. 대리인을 말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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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gayasea BlogIcon 오연 2007.06.27 09: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랜만에 느껴보는 역사소설의 즐거움입니다...감사합니당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6.27 09: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읽으셨으면 좋겠지만, 워낙 제 번역 실력이 딸려서 시바 선생의 필력을 전해드리지 못함이 안타깝네요.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

1586 5 4일 병사(病死) 52.

생년불명[각주:1] ~ 1586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겨 셋츠() 아리오카(有岡)()의 성주(城主)가 되었다. 후에 모우리(毛利)(), 혼간지(本願寺)와 손을 잡고 모반을 일으키지만 실패하여 도망쳤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시대가 되자, 센노 소우에키(千 宗易)에게 다도(茶道)를 배워, [利休七哲[각주:2]]의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의 다인(茶人)이 되었다. (그림은 KOEI의 태합입지전V)






풍류의 자리에 있던 이외의 인물



 혼노우(本能)()의 변이 일어난 지 1 3개월 정도 지난 1583 9 16.

 아라키 무라시게는 죽은 오다 노부나가를 대신하여 쿄우토(京都)와 킨키(近畿)의 새로운 패자(覇者)가 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가 처음으로 개최한 [차 도구 전시회 = 御道具揃]에 참가하였다. 이미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道薰(도우쿤)]이라는 호를 칭하고 있었다. 참가한 면면(面面)을 보면,

구우나이쿄우(宮内卿) 호우인(法印[각주:3])[마츠이 유우칸(松井 友閑)]

소우에키(센노 리큐우 = 千 利休)

모즈야 소우안(万代屋 宗安)

텐노우지야(天王寺屋[츠다(津田)]소우규우(宗及)

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전부 노부나가의 풍류 취미와 관련된 스키샤(数奇者[각주:4])이며 사도우(茶頭[각주:5])였다.


더구나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케다 쇼우뉴우(勝入)[츠네오키(恒興)],

의사인 토쿠운켄(德雲軒)[야쿠인 젠소우(院 全宗)]

가 있었다. 츠네오키는 노부나가의 유형제(乳兄弟[각주:6])였으며, 토쿠운켄은 산몬(山門[각주:7])이나 조정에 연줄이 있는 승의(僧醫)였기에 둘 다 히데요시의 권력장악에 불가결한 사람들이었다.


 소우규우나 소우에키라는 당대 풍류의 세계를 둘로 나뉘고 있던 다도(茶道)의 거장들과 섞여 무라시게가 내 놓은 것은 [모모지리(桃尻)의 하나이레(花入[각주:8])], 못케이(牧溪)가 그린 걸개 그림인 [범귀회(帰絵)], [효우고(兵庫)의 오오츠보(大壷)] 어느 것이나 이름있는 명물이었다.


 주군(主君)의 복수전이 된 야마사키(山崎)의 싸움에서 이기고, 자기 입으로 일본 통치는 이제부터라고 한 시즈가타케(賤ヶ岳)의 싸움 및 키타노쇼우(北ノ庄)()의 싸움을 이겨 정청(政廳)으로 오오사카(大坂)()과 쿄우토(京都)에 저택을 짓기 시작한 히데요시의 면목을 살리기에 충분한 전시회가 되었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이상한 것은 이러한 장소에 어째서 무라시게가 있을 수 있었냐는 점이었다.


 무라시게라고 하면 1578 10월.

 혼간지(本願寺)에 딸을 인질로 보내어 법주(法主)인 켄뇨 코우사( 光佐)와 맹약을 맺고서는 주군인 노부나가에게 반역을 한 다이묘우(大名)가 아니었던가? 그 때문에 거성(居城)에서 쫓겨나 영지(領地)도 잃고 방랑의 몸이 되었던 인물이 아니었던가? 그런 무라시게가 하필이면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히데요시 밑에 있는 것은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확실히 무라시게는 셋츠의 이케다(池田)()의 부하에서 올라 온 토자마(外様[각주:9])의 신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셋츠의 국주(国主)로 발탁시켜 준 노부나가를 가장 중대한 국면에 배반하여 숙적인 혼간지(本願寺)와 모우리(毛利)()의 연합세력으로 달려간 반역자였기에 오다(織田)쪽에게 있어서는 용서할 수 없는 인물이었을 터였다.


다인(茶人)으로 여생을 보내다.


 당초 여러 방법으로 무라시게의 뜻을 돌릴 방법을 시도했던 노부나가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자 공격에 전념하였다.

 우선 무라시게에게 가담하고 있던 셋츠 타카츠키(高槻)()의 성주인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과 이바라키(茨木)()의 성주인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清秀)등을 귀순시킨 후에 무라시게의 거성(居城) 아리오카(有岡)를 포위하였다. 1578 11월부터 10개월간에 걸친 장기 포위전을 전개 하여 다음 해 1579 9 2 무라시게가 처자식을버려둔 채 아리오카성()을 탈출하여 아마가사키(尼崎)()으로 도망치자, 노부나가 군세는 아리오카성을 함락시켜 무라시게의 처자식과 친척 36명을 쿄우토(京都)의 로쿠죠(六条) 강변(河原)에서 처형하였고, 가신(家臣)의 처자식 120여명을 성 아래서 십자가 같은 곳에 매달아 창으로 찔러 죽였으며, 510여명을 역시 성 아래 4개의 집에 쳐 넣고 불을 질러 죽였다.[立入左京亮入道隆佐記].

 그 비참함엔 구경하던 사람도 눈물을 흘렸고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여서 부처가 이 세상을 창조한 이래로 이러한 일은 없었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한다.


 이런 학살이 일어날 즈음. 무라시게는 아마가사키(尼崎)()에서 하나구마(華熊)()으로 피난하였지만 여기도 1580 7월 초 즈음에 오다 세력에게 공격받아 낙성(落城)되자 모우리(毛利)()의 영토로 도망쳤다.자신의 처자식뿐만 아니라 친척, 가신의 처자식마저 참혹한 죽음을 당하는 와중에 거성(居城)이나 일족(一族), 가신을 계속해서 버려가며 도망친 무라시게의 목적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무라시게가 주가(主家)인 이케다(池田)()를 쓰러뜨리는 하극상(下剋上)으로 몸을 일으키긴 했지만 노부나가에게 반역을 일으킨 것은 참언(讒言)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시야마(石山)()[本願寺]을 포위하고 있던 아라키 무라시게의 부대에서 매일 밤마다 작은 배를 이용하여 성()안으로 쌀을 팔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자 노부나가에게 변명을 하려 했던 무라시게를 측근인 나카가와 키요히데가 만류하여 어쩔 수 없이 반역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자세한 사정을 안 노부나가의 적남(嫡男) 노부타다(信忠)나 히데요시들이 무라시게를 굉장히 불쌍히 여겼다고 한다. [寬政重修諸家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