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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광고성 댓글이 달려서 참다참다 못해 네이버에 문의해 보았다.
질문제목 : 불량 덧글에 관하여.... 접수시각 : 2006년 11월 28일 18:21:08 |
요즘 따라 자주 상업성 & 화상채팅 & 인터넷 도박을 권유하는 덧글이 자주 달리더군요.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해결책을 가지고 계신지 듣고 싶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한 사용자가 똑같은 내용의 덧글을 다수 올릴 때 제재하는 방법이나, 특정 단어를 여러 블로그의 덧글에 사용할 때 제한하는 방법 등이 있습니다만 네이버 측에서는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계시고, 과연 광고성 덧글을 제한할 의지가 있으신지 궁금하군요.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
라고 말이다....
그러자 오늘온 메일 내용....
안녕하세요. valhae0810고객님!
즐거운 지식 세상 네이버 상담원 *** 입니다.
불량 덧글이 있어 문의 주셨는지요?
네이버에서는 운영원칙에 명시한 불량 게시물로부터
회원님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불량게시물이 발견되는 모든 카페에 동일한 원칙하에 조치하고 있으나
미처 조치되지 못한 채로 남아있는 게시물이 있을 있을 수 있으며
이로 인해 고객님께 불쾌감을 드렸다면 깊은 양해 부탁 드리겠습니다.
또한 이러한 경우 해당 게시물이나 운영을 하고 있는 페이지의 URL과 ID를
자세히 기재하여 신고하여 주시면 확인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더 궁금하신 점이 있으신 경우 고객센터로 문의해 주시기 바라며,
건전한 인터넷 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
라는 답장을 받았지만....
밑에 만족 불만족과 그에 대한 의견을 쓰는 곳에 아무리 "확인"을 눌러도
갔다는 말이 없어서다시 고객센터에 메일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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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성의없는 답변을 하시는군요.
제가 말씀 드린 것은 카페가 아닌 블로그였으며,
님이 보내신 내용은 '내용에 따라 비슷한 형식의 메일을 보낸다'는 대충대충
정신을 저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라는 것을 말곤 저에게 어떤 도움이 되었을까요?
더구나 우리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못 찾는 것이 있을 수 있고
니가 보고 있는 것은 우리가 열심히 하지만 미처 발견 못한 것이니
나머지는 니가 알아서 해라
라는 뜻이죠?
저는 제가 생각한 방법까지 알려드렸는데
그 방법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으시군요.
(아무리 뭐해도 "님이 생각해 주신 방법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정도는 써야 하는 것 아닐까요?)
똑같은 형식의 답변을....
누구에게나 보내는 것을 받았다고 해서
전혀 기쁘진 않습니다.
업계 최고라는 인식이 언제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의 있는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라고 메일을 또 보냈는데 어떤 답변이 올지....
12월 2일 온 답장....
안녕하세요. valhae0810고객님!
즐거운 지식 세상 네이버 상담원 ### 입니다.
고객님, 불량 블로그 때문에 추가로 문의 주셨지요? 먼저, 다른 사용자의 불량 행위로 인해 고객님의 심기가 불쾌하게 되신 점,
|
.....뭐 상담원이 할 수 있는 것이야 여기까지겠지..
이 상담원이 보고가 어디까지 갈지가 문제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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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
1573년 8월 28일
1545년 ~ 1573년.
오우미(近江) 오다니(小谷) 성주(城主).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여동생인 오이치(お市)를 처로 맞이하여 동맹을 맺지만, 맹우 아사쿠라(朝倉)씨(氏)를 노부나가가 공격하였기 때문에 배반. 아사쿠라 요시카게(義景)와 함께 아네가와(姉川)의 전투를 벌이나 패배. 후에 오다니 성을 공격당하여 할복했다.
부인과 자식을 사랑하는 호북(湖北)의 용장(勇將)
아자이 가문은(浅井家)은 초대(初代) 스케마사(亮政)가 주가(主家)인 쿄우코쿠(京極)씨(氏)를 하극상(下剋上)으로 밟고 올라 와 히사마사(久政), 나가마사로 3대가 이어져 소위 [호북의 패자(覇者)]가 되어있었다. 특히 나가마사는 조부의 기질을 이어 받아 뛰어난 무략(武略)을 발휘하여 가문의 기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1567년.
오와리(尾張) 키요스(淸州) 성주 오다 노부나가의 동생 오이치를 처로 맞이하여 아자이 가(家)의 위세는 안정되게 되었다. 오이치와의 사이에 2남 3녀를 두었고 이 행복이 영원이 이어질 것이라고 꿈꾸고 있었다.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받들어 상경(上京)할 때 나가마사는 망설임 없이 노부나가와 함께 롯카쿠(六角)씨(氏)를 싸워 추방시켰다.
하지만 나가마사는 노부나가의 이기적인 면을 꽤 뚫어 보지 못했다. 아니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부인이나 자식들을 너무 사랑하여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었을 것이다.노부나가는 나가마사의 사람 좋은 것을 이용하여 약속을 위반하였다.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 공격이었다.
노부나가와 갈라서다.
나가마사는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을 때 - 에치젠의 아사쿠라씨(氏)는 조부 스케마사의 시대부터 친밀한 관계이니 자신한테 알리지 않고 아사쿠라씨(氏)를 공격하지 않는다. 만약 아사쿠라씨(氏)를 공격할 때에는 사전에 나가마사의 이해를 구하도록 굳게 약속했다.
그러나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은 노부나가를 싫어하여 번번히 쿄우(京)로 올라오도록 한 요청에도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다의 속성(属城)인 테즈츠(手筒), 카나가사키(金ヶ崎)를 빼앗아 버린 것이다. 노부나가는 격노하여 나가마사에게 통보하지 않고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의 원군과 함께 에치젠 공격을 감행했다. 1570년 2월이었다.
그야말로 오다군의 선봉이 아사쿠라의 본거지인 이치죠다니(一乗谷)를 포위하려 할 즈음 노부나가는 나가마사가 배반하여 요시카게에게 가담한 것을 알게 되었다. 옛 의리를 중요시 하는 부친 히사마사의 설득에 의한 것이었다고도 하지만 거기에는 나가마사의 논리가 있었으며 맹목적으로 노부나가를 섬길 수 없다는 오우미(近江) 무사의 의지도 있었을 것이다. 노부나가는 에치젠에서 철수를 명하고 쿄우(京)로 돌아갔다. 앞뒤로 협격 당하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사태는 같은 해 6월의 아네가와(姉川) 전투로 발전했다.
이부키(伊吹)산에서 비와코(琵琶湖) 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아네가와 천을 사이에 두고, 오다-토쿠가와 연합군과 아자이-아사쿠라 연합군이 싸웠다. 선전했지만 노부나가 측의 머릿수에 눌려 나가마사 측은 패배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나가마사는 거성(居城)인 오다니 성을 중심으로 끊이지 않고 노부나가 진영을 공격하여 괴롭혔다.
부인과 자식을 도망시키고 철저항전
부인과 자식을 가진 인간은 자식이 성장함과 동시에 보수적인 자세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필시 나가마사도 그랬음에 틀림이 없다. 오오기마치(正親町) 텐노우(天皇)의 명령를 바탕으로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중개에 나서자 나가마사는 간단히 화의(和議)에 응했다. 성립은
이것을 좋지 않게 생각한 나가마사 휘하의 무장도 있었다. 이소노 카즈마사(磯野 員昌) 등의 부하 장수들이 나가마사에게는 더 이상의 가망성이 느낄 수 없다고 단념하며 뒤를 이어 노부나가에게 항복하였다. 나가마사의 수동적인 모습에 실망을 느꼈기 때문이다.
노부나가는 집념이 강하다. 자신을 거역한 자를 방치해 두는 성격이 아니다. 우선 1573년 8월에 에치젠을 공격하였고, 20일에는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자살로 몰았다. 일족인 아사쿠라 카게아키라(朝倉 景鏡)의 배반이 원인이었다. 그리고 노부나가는 이 공격의 기세를 이용하여 나가마사의 오다니 성을 포위하였다.
8월 26일.
노부나가는 오우미(近江)의 토라고젠(虎御前)산에 포진하고, 후와 카와치노카미(不破 河內守)를 사자로 하여 나가마사에게 항복을 권고하였다. 요시카게를 쓰러트린 지금 나가마사에게는 원한이 없으니 항복한다면 나쁘게는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나가마사가 거절하자 이번엔 야마토(大和) 일국을 주겠다고 하였다.
나가마사는 1568년 오우미(近江) 침공부터 6년 간 노부나가의 동향을 빠짐없이 관찰해 왔다. 아무래도 목숨을 구해 줄 것 같은 상대가 아니다. 나가마사는 다시 거절했다.
이 이야기는 결국 오다니성에 농성하는 무장들을 동요시켜 전투의욕을 잃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졌다.
카와치노카미가 돌아가자 부인인 오이치노카타(お市の方)를 설득하여 딸 세 명(챠챠(茶々 1), 오하츠(お初), 오고우(お江 2))과 함께 노부나가에게 보냈다. 아들인 만부쿠마루(万福丸)와 이쿠마루(幾丸 3)는 도망치지만 만부쿠마루는 잡혀서 살해당한다.
나가마사는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고 성 밖으로 나가 용감하게 싸웠다. 그리고 8월 28일. 성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아카오 미마사카노카미(赤尾 美作守)의 저택에서 할복하였다. 향년 29세.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는 사람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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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하도 원이 비싸서....
첫 스캔이라 부족한 것이 많네요.
넓은 아량으로 클릭하면서 봐주세요~
안경쓰고 회의를 주도하는 인물이 하시바 히데요시
잘 모르지만 따라하는 타입이 토쿠가와 이에야스
바로 위에 수박들고 여자같이 생긴 것이 모리 란마루
총리는 오다 노부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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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0년 ~ 1602년.
이마가와 씨[今川氏]에게 쫓겨나 방랑의 몸이 되나 후에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를 섬기며 '
에도 시대[江戸時代], 토쿠가와 쇼우군 가문[将軍家]의 후다이[譜代] 다이묘우[大名] 필두의 지위를 점하고 있었던 것이
1575년.
15살에 이에야스[家康]을 섬기며 이이노야의 옛 영지를 되찾게 된다. 이후 나오마사는 이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하타모토(旗本 3)의 측근으로 많은 전투에 참가한다.
혼노우 사[本能寺]의 변 직후 이에야스 최대 위기인 이가도피행[伊賀越え 4] 때도 함께 했으며, 그 후 코우슈우[甲州] 공략에도 참가, 5 그 공적으로 타케다 가문[武田家]에서도 용맹함을 자랑하던 츠치야 중[土屋衆], 야마가타 중[山県衆], 오바타 당[小幡党] 등을 부하로 거느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타케다 가문의 적비대[赤備え]를 모방하여, 갑옷부터 깃발[旗], 등에 꽂는 작은 깃발[指物], 갑옷 위에 입는 덧옷[陣羽織]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붉은 색으로 통일했다. 나오마사는 이 적비대를 이끌고 선봉을 다투었고,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 전투에서의 활약으로 인하여, '붉은 귀신[赤鬼]'라는 이명으로 두려움을 얻게되었다. 이후 이에야스가 가는 곳엔 항상 선봉을 맡아 돌진하는 나오마사와 적비대가 있었다.
그 결과 이에야스를 섬긴 지 10년 만에 미카와 후다이[譜代]인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 등과 함께 이에야스의 삼걸(三傑)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1590년 이에야스가 칸토우[関東]로 이봉 되었을 때에는 코우즈케[上野] 미노와[箕輪 - 후에 타카사키(高崎)로 옮김) 12만석을 받았다.
12살 연상인 타다카츠, 야스마사를 뛰어넘어 불과 15년 만에 토쿠가와 가신단 중 최고의 영지를 영유할 수 있었던 것은, 이에야스가 가문이나 문벌에 구애 받지 않고 능력만을 평가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무단 돌진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나오마사는 혼다 타다카츠와 함께 동군(東軍) 선봉의 군감(軍監 6)으로 참가했다. 이 때 40세였다.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 토요토미[豊臣]계 유력 무장을 중심으로 한 동군에서, 히데타다[秀忠]가 거느린 토쿠가와 본대(本隊)가 도착하지 않은 당시, 토쿠가와 가문의 주력은 사실상 나오마사와 그의 사위이자 이에야스의 넷째 아들인 마츠다이라 타다요시[松平 忠吉] 휘하 약 6천의 병력이었다.
향후의 천하를 판가름하는 결전이라 생각한 나오마사는 토요토미계 다이묘우[大名]에게 선봉의 공을 빼앗꼈다간, 토쿠가와의 천하가 되더라도 후환이 남을 것이라 생각하여 이에야스와 타다카츠에게 설명하고 일부러 무단 돌진을 감행하기로 한다.
15일 이른 아침. 휘하의 적비대[赤備え]에서 추리고 추린 30기(騎)를 이끌고, 이번 전투가 데뷔전인 타다요시와 함께 한 나오마사는 선봉인 후쿠시마의 선두 부대장인 카니 사이조우[可児 才蔵]의 제지를 물리치고 7 빠져나가 맨 앞까지 진출하여 서군(西軍)에게 철포를 쏘았다. 이것으로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 싸움에서 나오마사와 타다요시의 활약이 뛰어났는데 특히 전대미문의 적중돌파(敵中突破)를 시도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를 추격하여, 그의 조카인 토요히사(豊久)를 죽이기 까지 했다. 이 때 시마즈 대(隊)의 결사적인 반격에 타다요시가 부상을 당했고, 나오마사도 투구와 오른손 엄지손가락, 거기에 오른 팔과 타고 있던 말에 총격을 받아 낙마하여 한때는 실신했다고 한다. 본진으로 돌아온 둘을 맞이한 이에야스는 직접 나오마사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며 “오늘 싸움에 있어서 제일 큰 공을 세웠다”며 극찬하였다.
전후 처리로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본거지였던 오우미[近江]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의 공략, 서군의 총대장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항복의 알선, 토사[土佐]의 쵸우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 盛親]에 대한 대응 등 군사적인 면뿐만 아니라 외교, 통치 등의 면에서도 큰 공적을 올렸다.
너무도 이른 죽음
세키가하라 전쟁 후의 논공행상으로, 1601년 2월 이에야스는 나오마사에게 이시다 미츠나리의 성이었던 오우미[近江] 사와야마 성과 새로이 6만석을 더해 합계 18만석을 하사했다. 그리고 서국 다이묘우[大名] 감시와 쿄우토[京都]의 조정 수호라는 특별임무를 부여했다. 10월에 나오마사는 타카사키[高崎]에서 새로 보수한 사와야마 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나오마사는 이시다 미츠나리의 통치를 존중하여 민정의 안정을 꾀하는 한 편,
그러나 같은 해의 겨울부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얻은 오른 손 엄지의 총상이 차츰 악화되어 다음 해인
祈るぞよ 子の子のすへの 末までも まもれあふみの 国津神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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