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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 다카토라[藤堂
가난한 무사 집안의 둘째로 태어났다. 처음으로 전쟁터에 발을 디딘 것이 아네가와 전투[姉川の戦い]. 오다[織田], 토요토미[豊臣], 토쿠가와[德川] 씨를 섬기며 활약. 또한 축성의 명인으로 각지에 성을 쌓았다. 고미즈오 텐노우[後水尾天皇]와 토우후쿠몬인 마사코[東福門院 和子]의 결혼을 성공시켜 공무일화(公武一和 1)를 실현하였다.
센고쿠[戦国] 시대에서 수완 좋게 살아남기
토우도우 타카토라는 말년의 대부분을 에도[江戶]에서 생활하였다.
에도 성[江戸城] 개수(改修)와 마을 정비에 분주한 한편 우에노[上野]나 칸다[神田]등에 번저(藩邸 2), 별저(別邸)를 두고 쇼우쥬[松寿]부인(2대 번주 다카츠구[高次]의 모친)을 살게 하여 인질, 참근 교대의 선례를 만들었다.
에도성에 자주 등성하여 2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히데타다[德川 秀忠], 3대 쇼우군 토쿠가와 이에미츠[德川 家光]를 보좌하여 '천하태평(天下泰平)'과 '공무일화(公武一和)'에 심혈을 기울였다.
오우미(近江)에서 태어난 그는 건장한 몸과 드센 힘을 타고났으며, 15살에 오우미의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의 아시가루[足軽]가 되어 아네가와 전투에 참전. 이후 아츠지 요시히데[阿閉 義秀], 이소노 카즈마사[磯野 員昌], 오다 노부스미[織田 信澄 3] 등 여러 가문을 전전하다 하시바 히데나가[羽柴 秀長 – 히데요시[秀吉]의 동생]을 섬겼으며 여러 고난을 겪은 후에 히데요시의 가신이 된 후 히데요시가 죽자 토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긴다.
토자마 다이묘우[外様 大名 4]이면서도 절대적인 신뢰를 받아 이세[伊勢], 이가[伊賀] 32만석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이 인물에게 말년이라던가 "정년"에 평온은 없었다.
1608년.
53살 때 이요[伊予] 이마바리[今治]에서 이세 츠[津]로의 이봉(移封)은 영전(榮轉)이었으나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있는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을 공략하기 위한 포석과 이가 닌쟈[忍者]의 공급원인 이가[伊賀]의 지배라는 무거운 사명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런 막부(幕府)의 부탁과도 같은 임무에 응하여 이가 우에노[上野], 아노우즈[安濃津]에 성을 쌓았다.
7년 후인 오오사카 겨울 전투[大坂冬の陣]에서는 60세의 나이로 6천의 군세를 이끌고 토쿠가와 측의 선봉을 맡았다. 다음해 여름의 전투에서도 4천의 군세를 이끌고 쵸우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 盛親]의 부대와 사투하였다.
1619년.
64살 때 오오사카 성 재건의 명령을 받아 완수하였고 또 그 즈음에 여러 축성 공사에 착출되어 불만이 쌓인 토요토미 은고[豊臣 恩顧 5] 다이묘우[大名]의 반란에 대비한 셋츠[摂津] 타카츠키[高槻], 탄바[丹波] 사사야마[篠山]의 축성을 지휘하였다.
다음해인 65세. 노령에 굴하지 않고 90여일 간 머물면서 거대한 바위를 키츠가와 강[木津川] 6 야마시로[山城] 카모[加茂]의 죠우넨 사[常念寺]로 운반하는 작업을 담당하였다.
세찬 바람에 맞서 서있는 거목
이 즈음부터 눈병을 앓아 에도로 돌아오자 실명 직전. 그러나 공무일화(公武一和)를 위해서 상경하여 쇼우군 히데타다[秀忠]의 딸 토우후쿠몬인 마사코[東福門院 和子]를 고미즈오 텐노우[後水尾天皇]의 부인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막부(幕府)의 출장소라고 할 수 있는 니죠우 성[二条城]의 정비에 조력했다.
텐노우에게는 이미 '오세츠노 츠보네[於世津局]'와의 사이에 황자인 카모미야[加茂宮]와 황녀 우메미야[梅宮]를 둔 상태였기에 텐노우와 쿠교우[公卿 7]들이 반발. 그에 따라 쇼우군의 면목도 손상되어 막부 각료들도 격한 반대론을 내세웠다. 그러나 타카토라는 히데타다가 딸을 사랑하는 마음에 감복. 물심양면의 노력을 하여 결국목적을 달성했다.
1627년.
72살 때. '생애 최대의 스승이며 은인'이라는 이에야스를 위해서 이에야스의 묘를 만들었다.
다음해에는 코우즈케[上野]에 있는 칸에이 사[寬永寺]에 칸쇼우 원[寒松院]을 건립하였고, 쿄우토[京都]의 난젠 사[南禪寺]에는 일본 최대의 산문(山門 8)을 만들어 헌납하여 오오사카 공성전에서 전사한 가신의 넋을 기렸다.
1630년 10월 5일.
에도 야나하라[
마지막 말은 "천하를...츠[津]를 부탁한다"라고 했다고도 하며, 몽롱한 듯한 모습으로 타카토라를 위해서 토우도우 가문[藤堂家]을 위해서 전쟁터에서 죽은 수많은 가신들의 이름을 주문처럼 외웠다고도 한다.
향년 75세. 경애하던 이에야스의 죽음보다 14년 더 살았으면서도 이에야스와 같은 75세의 죽음이었다.
토우도우가의 기록에 의하면,
"몸에는 빈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상처가 있었다. 총에 의한 상처, 창에 의한 상처 등 모두 전투에서 얻은 것으로 왼손의 약지는 뭉개져 손톱이 없었고 오른손 중지도 1촌 정도 짧았으며 오른발의 발톱은 전부 빠지고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3대 쇼우군 이에미츠[家光]는 그 죽음을 안타까워했고, 텐카이[天海]도 그 빛나는 생애(生涯)를 "세찬 바람에 맞서 서있는 거목"이라 찬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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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나가마스(織田 長益)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동생. 출가하여 우라쿠사이(有樂斎). 노부나가가 죽은 뒤에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이어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를 섬겼으며,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 전투, 오오사카(大坂) 겨울의 전투의 화평 교섭 등에서 활약. 후에 다인(茶人)으로 살아가며, 토우쿄우(東京) 유우라쿠쵸우(有樂町)에 그 이름을 남겼다.
다인(茶人) [우라쿠(有樂)]의 탄생
토우쿄우(東京)에 유우라쿠쵸우(有樂町)라는 번화가가 있다.
이 지명은 오다(織田) 우라쿠(有樂)가 에도(江戶) 초기에 이 곳에 저택을 지어 살았던 것에서 유래한다. '오다 우라쿠'라는 인물은 노부나가의 동생인 나가마스(長益)를 지칭하는 것이다. 노부나가의 동생들 중에 에도 시대까지 살아 남은 것은 노부카네(信包)와 나가마스, 두 사람이었지만 바쿠마츠(幕末) 1까지 다이묘우로 존속한 것은 나가마스의 가계(家系)뿐이다.
나가마스는 1547년생으로 노부나가와는 13살 차이가 난다. 노부나가가 살아있을 당시의 행적은 대부분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전장에 나간 기록도 1582년 카이(甲斐) 타케다(武田)씨를 정벌 할 때 노부나가의 장남인 노부타다(信忠)의 부하로 키소(木曽) 방면에서 침공한 정도만이 알려져 있다.
혼노우(本能)사(寺)의 변 후, 나가마스는 오와리(尾張)나 북(北) 이세(伊勢)를 영유(領有)하는 조카인 노부카츠(信雄)를 섬기며, 1만 3천관을 식록(食祿)으로 받는 유력한 가신이 되어 검지봉행(検地奉行) 2등을 맡았다. 일반적으로 [寛政重修諸家譜] 3에 의거하여 [혼노우(本能)사(寺)의 변 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를 섬기며 셋츠(摂津) 시마시타(島下)군(郡) 마이타(昧舌)에서 2천석을 치교우(知行)로 받았다]라는 설(國史大辭典 등)은 잘못된 것이다.
히데요시를 섬기게 되는 것은 1590년 9월로 그 직전에 노부카츠가 히데요시에게 오와리를 빼앗기는 등 카이에키(改易 4)당했기 때문이다. 머리를 깎고 [우라쿠(有樂)]라는 호를 칭하는 것도 이 시기이다. 우라쿠 44살 때였다. 필시 셋츠에 치교우를 지급 받은 것도 이 즈음이라고 추측된다.
우라쿠는 센노 리큐우(千 利休)의 뛰어난 제자 일곱명(利休七哲 5)중의 한 명으로 꼽히는데, 차를 즐기게 된 것은 리큐우가 노부나가의 사도우(茶頭 6)를 맡을 즈음인 것 같다. 하지만 다도(茶道)의 세계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우라쿠라는 호를 칭하는 시기부터라고 한다.
1591년 2월 리큐우가 죽자 [차의 장인(茶の宗匠)]라 불리며 히데요시가 다도회를 열때마다 옆에서 도와주는 일이 많아졌고, 다음 해인 1592년에 조선 출병이 시작되자 히데요시를 따라서 큐우슈우(九州)로 내려가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 성에서 자주 다회를 열었다.
또한 전년 9월에 우라쿠는 히데요시의 '오토기슈우(御伽衆)'에 들어갔다. 오토기(御伽)라는 것은 주군이 심심할 때 말상대를 해주는 것을 말하며 그 자리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오토기슈우'라 칭했다. 필시 우라쿠는 히데요시의 오토기슈우에 더해짐으로써 다인으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확립한 것이라 추측된다. [리큐우 류(流)]를 기반으로 하면서 독자적인 다풍(茶風)을 가미한 [우라쿠 류(流)]의 다도가 형성되어 가고 있었을 것이다.
1600년 세키가하라(関ヶ原) 때는 우에스기(上杉)를 정벌하기 위하여 칸토우(関東)로 내려간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를 따라 종군하였으며 이어서 세키가하라 전쟁터에서도 무공을 세웠다. 싸움이 끝난 뒤 은상으로 셋츠에 가지고 있던 2천관에 더하여 야마토(大和)에 3만석이 주어졌다. 다인(茶人) 다이묘우 오다 우라쿠의 탄생이다.
세키가하라에서는 노부나가의 적류(嫡流)인 기후(岐阜) 성주 오다 히데노부(織田 秀信 – 노부나가의 맏손자)와 에치젠(越前) 오오노(大野)성주 오다 히데카츠(織田 秀雄 – 노부카츠의 장남)가 서군에 속하여 카이에키 당하였기에 에도(江戶) 바쿠후(幕府) 초창기에 오다 일족 중에서 다이묘우로써 남아 있던 것은 우라쿠의 가계(家系)뿐이었다.
차(茶)로 보내는 나날
토쿠가와 쇼우군(将軍)의 지배를 받는 다이묘우가 된 우라쿠는 에도나 순푸(駿府)에 자주 출사(出仕)하였고, 그러는 한편 오오사카(大坂) 성에도 빈번히 출입하였다.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생모 요도도노(淀殿)의 외숙부라는 인척 관계로 히데요리를 보좌하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1611년 3월.
히데요리가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니죠우(二条)성에서 회견했을 때 우라쿠가 히데요리를 따르고 있는 모습은 그의 입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 흥미 깊다.그 후 토쿠가와-토요토미 양 가문의 사이가 악화되자 우라쿠의 정치적 입장도 미묘하게 되어 일설에 의하면 우라쿠는 이에야스의 첩자가 되어 토요토미 측의 비밀을 보고 했다고도 하며, 오오사카 겨울의 전투가 시작되자 오오사카 성 안에서 요도도노와 히데요리에게 이에야스를 복종하도록 계속해서 설득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름의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에는 오오사카 성을 빠져나와 쿄우토에 가서 살며 아들 나가마사(長政)와 히사나가(尚長)에게 각각 1만석씩 나누고 자신은 남은 1만석을 가지고 살았다.
우라쿠는 항상 쿄우토에 칩거하며 다도에 몰두하면서 여생을 보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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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카쓰(織田 信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둘째 아들. 키타바타케 토모노리(北畠 具敎)의 양자가 되어 이세(伊勢) 코쿠시(国司)가 되었다. 혼노우(本能)사(寺)의 변 후에는 오다가(家)의 차기 당주인 산포우시(三法師)의 후견인이 되었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대항하여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전투을 일으키지만 화해하여 복속. 토요토미씨 멸망 후에는 토쿠가와(德川)씨를 섬겼다.
아즈치(安土)성 방화범의 소문
노부카츠는 혼노우 사(寺)의 소식을 거성인 이세(伊勢) 마츠가시마(松ヶ島)에서 들었다. 곧바로 구원군을 이끌고 오우미(近江)의 츠치야마(土山)까지 진출시켰지만 거의 하는 일 없이 되돌아왔다고 한다. 노부카츠가 오우미에 진출해 있을 즈음인 6월 13일 비와(琵琶) 호숫가에 장엄히 서 있던 천하의 명성 아즈치 성이 갑자기 불길에 휩싸였다. 선교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노부카츠가 아무도 없는 성에 불을 질렀다고 하며, 일본측 사료에서는 점령하고 있던 아케치 히데미츠(明智 秀満)가 성을 떠나면서 불을 질렀다고 기록한다. 그 밖에도 지역민 방화설도 있어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의문에 싸여 있다.
진상이 확실치 않으면서도 선교사의 보고서에 쓰여있듯이 노부카츠가 방화범으로 몰리는 것은 소문에 지나지 않지만 사실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부나가의 아들로써 불명예스러운 소문임에는 틀림이 없고 후에 노부카츠의 무장으로써의 평가에도 영향을 끼쳤다고도 생각된다.
몰락 다이묘우(大名)로 가는 길
키요스(淸須) 회의로 인하여 1 노부카츠는 형 노부타다의 영지였던 오와리(尾張)을 계승하여 원래 있던 영지인 이세, 이가(伊賀)를 합친 3국을 지배하는 다이묘우가 되었다.
그러나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인식 받으며 급성장하고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의 권력 항쟁(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의 전투)에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와 손을 잡고 국지전에서는 승리를 거두지만 대국적으로는 히데요시의 압도적인 군세와 뛰어난 외교술로 인해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되어 어쩔 수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 히데요시와 화해한다.
이후 칸파쿠(関白)에 취임하여 일본 통일을 목표로 하는 히데요시와 협조 체제에 들어간다. 조정의 관직 체계에서는 항상 히데요시보다 한단계 아래인 다이나곤(大納言), 나이다이진(內大臣)으로 승진하지만 실상은 오와리, 이세를 영유하는 토요토미 정권의 일개 다이묘우라는 입장에 지나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입장에서는 주군 노부나가의 아들로서 노부카츠를 우대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우죠우(北条)씨 정벌 후의 영지 재배치에서 칸토우(関東)로 이동한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옛 영지로의 전봉(転封)을 거부한 노부카츠를 카이에키(改易) 2한 후 히타치(常陸)의 사타케(佐竹)씨에게 유배를 보냈다.
히데요시의 노림수는 토요토미 정권을 강고히 하기 위해서도 오다, 토요토미 양 가문의 발상지인 오와리의 영국화(領國化)와 노부나가, 노부타다의 직신(直臣)을 많이 고용하고 있는 노부카츠 가신단 해체를 단번에 해치우려 했던 것이다.
노부카츠로써도 옛 주군의 아들인 자신을 카이에키에 처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다씨(氏)와 연이 깊은 오와리를 몰수 당하는 것은 노부카츠에게도 자기 존재를 부정 당하는 것이라 인식했음이 틀림이 없으며 히데요시의 영지 변경 명령 거절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도 칸파쿠의 명령 거부는 토요토미 정권에 대한 반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다이묘우에서 평민으로 몰락한 노부카츠는 관위도 박탈당해, 머리를 밀고 출가하여 [죠우신(常真)]이라 호를 칭하였다. 이 때 33세.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용서받아 히데요시의 오토키슈우(お伽衆 3)에 들어갔으며, 1595년에는 장남인 히데카츠(秀雄)에게 에치젠(越前) 오오노(大野) 4만 5천석이 주어져 사실상 노부카츠의 가계(家系)는 다시 일으켜졌다.
그러나 5년 뒤의 세키가하라(関ヶ原)의 싸움에서 노부카츠-히데카츠 부자는 서군에 속했기에 싸움이 끝난 후 이에야스에게 영지를 빼앗겼다. 일설에 의하면 싸움이 일어나기 한 달 전에 노부카츠는 옛 영지 회복을 노리며 오와리에서 동군에 속한 옛 신하들의 분열을 노렸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오다 가문 부활
시간이 흘러 때는 오오사카(大坂) 겨울의 진(陣)을 목전에 둔 1614년 9월.
노부카츠는 오오사카 성에서 퇴거하여 쿄우토(京都)의 류우안(龍安)사(寺)로 들어갔다. 개전을 앞두고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부름을 거절하고 은밀히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내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야스에게는 그 대가로 땅을 약속 받았던 듯 실제로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 이후, 1615년 7월에 야마토(大和)와 코우즈케(上野)의 양국(国) 내에서 5만석이 주어졌다. 세키가하라의 싸움에서 15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 드디어 다이묘우가 다시 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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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나가요시(森 長可)
미노(美濃) 카네야마(金山) 성주 모리 요시나리(森 可成)의 차남.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타케다(武田)씨(氏) 공략 등에서 전공을 세워 [오니무사시(鬼武蔵) 1]라 불리었으나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의 전투에서 전사. 혼노우(本能)사(寺)의 변에서 전사한 노부나가의 코쇼우(小姓 2)모리 란마루(蘭丸), 보우마루(坊丸), 리키마루(力丸)는 동생.
오니무사시(鬼武蔵)의 패사(敗死)
모리 나가요시는 1570년에 오우미(近江) 우사야마(宇佐山)성에서 전사한 모리 요시나리(森 可成)의 차남이다. 형 요시타카(可隆)도 같은 해에 전사하는 바람에 불과 13세의 나이로 미노(美濃) 카네야마(金山)성주가 되었다.
1582년의 타케다(武田) 공략에서는 선봉대로 출진하여 활약. 북부 시나노(信濃)의 4군과 카이즈(海津)성을 하사 받았지만 혼노우(本能)사(寺)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죽자, 우에스기(上杉) 공략을 위한 에치고(越後)의 진중에서 퇴각하여 카네야마성으로 돌아왔다.
한편 이케다 츠네오키, 모리 나가요시에 대해서는 히데요시도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해 설득 공작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츠네오키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젖형제이기도 하기에 4 오다 가문을 선택해야 하나, 한창 커가는 히데요시 측에 서야 하는가라는 선택의 기로에 가로놓였다.
전쟁의 시작은 북부 이세에서 시작되었는데 히데요시는 미노 지방에 대해여 설득 공작을 계속함과 동시에 3월 11일에는 미요시 히데츠구(三好 秀次 5)를 대장으로 한 1만 7천의 군세를 오우미(近江) 나가하라(永原)에 배치하여 미노 방면에 압박을 가했다.
13일.
결단에 몰린 츠네오키는 예전 자신의 성이기도 했던 노부카츠 쪽의 이누야마(犬山)성을 탈취하는 형태로 히데요시의 편임을 알렸다. 츠네오키의 사위이기도 한 모리 나가요시도 이것에 응하는 형태로 최전선인 하구로(羽黑) 하치만(八幡)산으로 진출했다. 한편 이에야스는 코마키(小牧)산에 올라, 17일에는 나가요시를 기습하여 이누야마로 패주시켰다.
히데요시가 이누야마에 도착한 것은 27일이었다.
히데요시는 더욱 전진하여 라쿠덴(樂田)에 본진을 두었으며 코마키산의 이에야스-노부카츠군과 대치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하여 츠네오키가 제안한 것이 별동대를 이끌고 이에야스의 본거지 미카와(三河)의 빈집을 터는 작전이었다. 이누야마성 탈취로 이미 전공을 세운 츠네오키가 새로이 도박을 할 필요는 없었으니 하치만 산에서 일패도지한 나가요시의 강한 희망에 위한 것이라도 한다.
작전은 4월 6일 밤중에 행해졌다.
선봉은 이케다 츠네오키, 2번대는 모리 나가요시, 3번대는 호리 히데마사(堀 秀政), 4번대가 총대장인 미요시 히데츠구였다. 덧붙여 히데츠구도 츠네오키의 사위였다.
이러한 움직임을 재빨리 탐지한 이에야스는 8일 은밀히 주력을 이끌고 추격하여 9일 오전부터 각 부대를하나씩 각개 격파했다. 후속부대가 모두 무너져 이케다의 부대와 모리의 부대는 이에야스의 본대까지 달려든 총공격을 당하여 괴멸되었다. 나가요시는 철포에 미간을 뚫려 즉사.
[오니무사시]의 허무한 최후였다. 향년은 27세.
출진 전에 남긴 유언장.
그러한 일이 있기 전인 3월 26일. 나가요시는 유언장을 남겼다.
1조와 2조는 차도구인 사와히메(沢姫)의 단지, 다이텐모쿠(台天目)를 히데요시에게 진상한다는 내용이다.
제 3조는 어머니가 히데요시에게 영지(領地)를 얻어 쿄우토(京都)에 살 것, 센(나가요시의 동생 센마루(千丸))는 계속해서 히데요시에게 머물 것을 권하고 있다.
제 4조와 6조도 센과 관련한 것으로 자신의 뒤를 잇지 말 것을 명하며 카네야마(金山)성에는 능력과 충성심이 확실한 무사를 성주로 삼아 달라는 것을 히데요시에게 부탁하며 앞서 말한 것 이외의 목욕 도구나 도(刀), 와키자시(脇差 6)는 센에게 준다고 하고 있다.
제 5조에서는 여성들에게 정실의 친정이기도 한 오오가키(大垣 = 츠네오키의 성)로 피난할 것을 권하고 있다.
유언장 말미에는 쿄우토의 혼아미(本阿弥)에게 맡겨놓은 와키자시를 센이 받을 것, 오코우(여동생인지 딸인지는 불명)는 쿄우토의 의사와 같은 쵸우닌(町人)에게 시집갈 것을 희망. 거듭 센이 모리 가문을 상속 받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만에 하나라도 히데요시까지 죽는 패배를 했을 경우 모두 불을 붙여 자살을 강요하는 점에서 전국 시대의 비장감이 흐른다.
초반의 1조와 2조는 이 편지가 히데요시에게 보여졌을 것을 강하게 의식한 것이겠지만 가족과 관계된 부분은 거짓 없는 마음일 것이다. 나가요시가 자신의 부친이나 형제들처럼 피 냄새 끊기지 않는 센고쿠의 생활에서 가족이 벗어나길 바라는 부분에는 현대인들에도 공감할 것이다.
나가요시가 죽은 뒤.
사와히메의 단지는 히데요시의 것이 되어 같은 해(1584년) 10월 10일 다회(茶會)에서 피로되었다. 한편 아버지와 형 5명(혼노우(本能)사(寺)의 변에서 전사한 란,보우,리키의 3형재는 센의 형)을 전쟁에서 잃은 센고쿠 시대의 [라이언 일병]인 센은 타다마사(忠政)라 이름 지어져 형의 바램과는 반대로 카네야마 성주가 되었지만, 그 후는 전란을 잘 헤쳐나가 미마사카(美作) 츠야마(津山) 번주(藩主 = 18만 6천석)가 되어 1613년에 죽기까지 천수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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