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 정권의 상징과도 같은 오오사카 성[大坂城]이 세워진지 얼마 지나지 않은 1586년 2월 21일. 혼간지 켄뇨[本願寺 顕如]의 문서담당관[右筆]인 우노 몬도[宇野主水]의 일기[각주:1]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요즘 '천명 베기[千人斬り]'라 하여 오오사카 시내에서 노동자 등 수없이 많은 사람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여러 소문이 돌고 있다. 오오타니 키노스케[大谷 紀之介]라는 소성(小性) 중 하나가 자신이 걸린 악성 종양(惡瘡)을 치유하기위해 천 명을 죽이고 그 피를 마시면 낫는다는 말을 듣고 그리한다는 소문이 있다.
此の頃、千人斬りと号して、大坂の町中にて人夫風情のもの、あまた討ち殺す由、種々風聞あり。大谷紀ノ介と云う小姓衆、悪瘡気につきて、千人殺してその血をねぶれば彼の病平癒するとて此の儀申し付く云々、世情風聞なり
여기서 나오는 오오타니 키노스케[大谷 紀之介]는 훗날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패배할 줄 알면서도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의 우정을 지켜 서군(西軍)에서 싸우다 죽은 사람으로 유명한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를 말합니다. 일본에선 나름 '고결(高潔)'한 사람으로 꼽히는 듯합니다.
범인이 처음 등장한 것은 전년도인 1585년 11월 27~28일 사이.
그때까지 이런 소문이 떠돈다는 것조차 몰랐던 히데요시는 격노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있는데도 보고조차하지 않다니 직무태만이다. 담당자[町奉行]들을 죽여야 마땅하겠지만 우선 목숨만은 살려둔다" 히데요시의 분노는 당연했습니다. 전년 1585년 7월 텐노우[天皇]의 대리인인 칸파쿠[関白]에 임명되었으며 본거지로 정한 오오사카의 성과 도시도 막 완성되어 일본 전역에 자신의 위광을 과시하고자하였는데 발생한 치안사건이었기에 히데요시의 분노는 컸습니다.
님들아~ 이젠 일본의 평화는 제가 지킬께요! - 라며 히데요시가 총무사령[惣無事令][각주:2]을 반포한들, '지 본거지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놈이 무슨 일본 운운이냐?'라는 비웃음만 돌아올 테니까요.
미담의 세계에선, "범인은 오오타니 키노스케라고 합니다. 이유는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해서 천 명을 죽이고 그 피를 마시면 낫는다는 말을 듣고 그러는 것 같습니다." 라는 담당관들의 보고에, "허허~ 키노스케가 그럴 리 없지" 라고 웃으며 히데요시는 단박에 물리쳤기에[각주:3]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는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합니다.
우선 미담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히데요시는 우선 담당관 세 명에게 근신처분을 명합니다. 너무 늦은 보고, 거기에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바탕으로 보고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히데요시는 범인에게 황금 10매(枚)를 현상금으로 걸었습니다.
범인이 잡혔습니다.
우키타 지로우쿠로우[宇喜多 次郎九郎].
성씨가 우키타[宇喜多]인 것으로 보아서는 히데요시의 유자(猶子)인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지로우쿠로우는 히데요시의 친위대[馬廻]에 속했던 자로, 오오사카에서 천 명베기[千人斬り]를 칭하며 사람들을 살해하다가 발각되어 히데요시에게 자살을 명령받아 3월 3일 자살합니다.
그러나 범인으로 지목된 우키타 지로우쿠로우가 죽은 바로 그날 저녁인 3월 3일에 5명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또 일어나게 됩니다. 이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정말 오오타니가 한 것이 아니냐고들 쑤군거렸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이에 언급하는 기록이 없기에 어떤 결말로 끝이 났는지 모릅니다.
적어도 이 이후 오오타니의 활약과 출세를 보건대 범인이 요시츠구가 아니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오히려 히데요시는 비록 명목상이긴 하나 바로 이해인 1586년 7월 사법을 다스리는 부서 형부(刑部)의 차관 교우부노쇼우[刑部少輔]에 요시츠구를 임명합니다.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살인사건의 용의자에게 사법 담당관에 임명하지는 않았을테니 말입니다.
사투 금지령(私鬪禁止令). 한 마디로 싸우지 말라는 소리. 텐노우[天皇]의 대리인 칸파쿠[関白]의 이름 하에 반포했기에 히데요시는 이를 어긴 큐우슈우[九州]의 시마즈 가문[島津家], 칸토우[関東]의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공격할 수 있는 대의명분을 얻었다. [본문으로]
요시츠구가 범인이래요~ 라고 보고하는 담당관에게 칼을 뽑고 다가가 죽이려 했다는 말도 있습죠. [본문으로]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둘째 딸 토쿠히메[督姫=토미코[富子]]와 결혼하였다. 둘 다 재혼이었다. 테루마사의 첫 번째 부인은 시즈가타케[賤ヶ岳]에서 전사한 셋츠[摂津] 이바라키 성[茨城城] 성주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清秀]의 딸이었다.
토쿠히메의 전 남편은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우죠우 우지나오[北条 氏直]였으나,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후 몰락하여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에 돌아와 있었다. 결혼은 히데요시[秀吉]가 선 중매였지만, 이에야스의 사위라는 조건이 테루마사의 출세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전쟁터에서 공명을 다툰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가 이렇게 빈정댄 적이 있었다.
“산사에몬[산사에몬[三左衛門=테루마사]이 지금은 거대한 영지의 영주로 출세했지만 그건 오로지 그의 ‘거시기’ 덕분이다. 창 한 자루로 이렇게 출세한 나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지”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테루마사는,
“확실히 나는 ‘거시기’로 이렇게 출세했지. 만약 창까지 사용했다면 천하를 손에 넣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창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야”
하고 웃으며 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부인이 이에야스의 딸이라는 이유로 굉장히 신경 썼었던 듯 하다.
토쿠히메를 따라서 이케다 가문[池田家]에 온 늙은 시녀[老女]가 어느 날 테루마사 부부 앞에서,
“우리 가문이 이렇게 번영한 것도 토쿠히메 님 덕분이옵죠”
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자 테루마사는 얼굴색을 확 바꾸며,
“내가 공적을 세웠기에 부인도 우리 가문에 시집온 것이며 영지도 더 하사 받은 것이다.”
고 말하며 평소와는 달리 엄하게 질책했다고 한다.
이는 테루마사가 연극한 것이다. 그 후 은밀히 그 늙은 시녀를 불러서는,
“사실 말하자면 우리 가문의 영달은 자네 말마따나 토쿠히메 덕분이지. 그러나 그걸 대놓고 말하면 부인이 기어오를지도 몰라. 앞으로도 부인 앞에서는 그러한 말은 자제해 주기 바라네”
하고 부탁했다고 한다.
테루마사는 키가 작았다. 하지만 그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느 날 제후가 열석한 주연(酒宴)에서 테루마사는 왜소한 키에 대해서 비웃음 당한 적이 있다. 그러자 테루마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럼 내 왜무(矮舞)라고 새로 만든 춤과 노래가 있으니 한번 들어보시오”
라고 말하며 일어서 박수를 치며,
“하리마[播磨], 비젠[備前], 아와지[淡路][각주:1]라는 세 지역[国]의 주인이기에 키 따위 바라지도 않으니…”
하고 부채를 펼치고, 몸과 손으로 춤을 추었다고 한다.
테루마사는 츠네오키[池田 恒興]의 둘째 아들로 키요스 성[清洲城]에 있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저택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부친 츠네오키의 전력(戰歷)은 혁혁한 것이었다. 오케하자마[桶狭間]에서 세운 공적으로 한 부대의 부대장[侍大将]가 되었고, 계속해서 에치젠[越前] 아사쿠라 정벌[朝倉征伐], 오우미[近江]의 오다니 성[小谷城] 공략, 아네가와 전투[姉川の戦い],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 등에 출진하였다.
테루마사의 데뷔전은 1580년의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 공략이었다. 16세인 테루마사는 부친이나 형과 함께 셋츠 하나쿠마 성[花隈城]을 공성하였는데 이케다 부자(父子)의 활약은 눈부셔, 공략이 끝난 후 노부나가는 츠네오키에게 아라키 무라시게의 영지를[각주:2], 장남 모토스케[元助]에게 이타미 성[伊丹城], 테루마사에게는 아마가사키 성[尼崎城][각주:3]을 하사하였다. 노부나가가 츠네오키에게 내린 표창장에서 테루마사에 대해 언급하길,
나이 16살에 불과하면서도 적진에 돌격하여 큰 무용을 자랑하니, 이는 정말 이케다 키이노카미[池田 紀伊守=츠네오키] 자네의 아들 답네. 내가 눈 여겨본 것이 틀리지 않아 기쁘며, 세운 공적 또한 비할 대 없도다
고까지 말하며 격찬하였다.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자 이케다 부자는 히데요시 편에 서지만, 부친과 형은 히데요시가 이에야스와 싸운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 전사하였다. 히데요시는 특별히 테루마사의 조모 요우토쿠인[養徳院][각주:4]에게 편지를 보내어, 츠네오키와 모토스케의 죽음을 위로하며 남겨진 테루마사를 포함한 아들들을 잘 돌보겠다고 약속하였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 테루마사는 이에야스의 사위로 토쿠가와 진영에 접근하였고 곧바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테루마사는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격렬한 공적 다툼을 벌인다. 이해의 7월 아이즈 정벌[会津征伐][각주:5]에 나섰던 이에야스는 시모츠케[下野] 오야마[小山]에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거병소식을 듣고 급거 철군하여 서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때 선봉에 선택된 것이 테루마사와 마사노리였다.
우선 목표로 한 것은 오다 히데노부[織田 秀信=노부나가의 손자]가 지키는 기후 성[岐阜城]이었다. 주공의 대장은 마사노리, 조공은 테루마사로 정해졌다.
8월24일. 전투가 시작되어 기소가와 강[木曽川]을 도하한 테루마사 휘하 7천의 병사는 성 밖 엔마 당[閻魔堂]에 포진한 오다의 군세를 습격하여 수급 700을 취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지만, 주공인 후쿠시마의 군세는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했다. 테루마사의 공적이 한발 앞서나가자 마사노리는 화가 났다. 왜냐면 공격은 동시에 하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이다. 마사노리의 분노를 느낀 다른 장수들이 테루마사를 설득하여 다음 날 공성전에서는 마사노리가 먼저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다음 날이 되자 테루마사는 그 약속을 어기고 앞서나가려 한 것이다. 마사노리는 열화와 같이 화내며 결국 테루마사가 나아가려는 길에 불을 질러 진로를 막았다. 이 양자의 공적 다툼은 낙성된 뒤에도 이어져 어느 쪽이 먼저 성에 진입하였는가에 대해서 서로 자기네가 먼저라고 말하며 물러서지 않아, 마사노리는 테루마사를 죽인다고 까지 말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당신은 이에야스의 사위잖소’라며 독전관[軍監]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의 말에 테루마사는 깨끗이 공을 마사노리에게 양보했다고도 하며, 양자가 동시에 성을 함락시키는 것으로 했다는 말도 있다.[각주:6]
테루마사는 세키가하라 결전[関ヶ原の戦い]에서는 그다지 공을 세우지 못했지만, 이 기후 성 공성에서 세운 공적으로 미카와[三河] 요시다[吉田] 15만2천석에서 하리마[播磨] 히메지[姫路] 52만석이라는 대봉(大封)을 하사 받아, 이곳에 후세까지 명성이 자자한 히메지 성[姫路城] 축성을 개시하였다.
히메지 성은 모우리[毛利], 시마즈[島津] 등 서국(西国]의 토자마다이묘우[外様大名] 감시와 오오사카 성[大坂城]의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을 위압하기 위해 무엇보다 웅대하게 만들어졌다.
재능있는 낭인(浪人)을 고용하여 자가(自家)의 강군(强軍)을 꾀했지만 그로 인해 돈을 아끼지 않았다.[각주:7] 유명한 고토우 마타베에[後藤 又兵衛]를 고용하여 그의 옛 주가인 쿠로다 가문[黒田家]은 물론 막부(幕府)에서도 클레임이 왔지만 테루마사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그를 지켜주었다고 한다.
[이케다 데루마사(池田 輝政)]
1565년 생. 1584년 미노[美濃] 오오가키 성[大垣城] 성주[각주:8]. 1590년 미카와[三河] 요시다[吉田] 15만2천석으로 옮겼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히메지[姫路]를 하사받았다. 1613년 1월 27일 죽었다. 49세.
노부나가의 유모(乳母). 고귀한 집안은 젖물리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아기 때의 노부나가는 다른 유모의 젖꼭지를 물어 뜯는 버릇이 있었지만 테루마사의 조모인 요우토쿠인[養徳院]의 젖꼭지는 물어 뜯는 일 없이 얌전히 먹었다고 한다. 요우토쿠인은 후에 노부나가의 부친 노부히데[信秀]의 측실이 된다. [본문으로]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고 하자 상경하라고 명령하나 카게카츠의 가로(家老)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의 편지에 빡쳐 정벌하러 간 사건. [본문으로]
테루마사는 5년간 기후 성[岐阜城]의 성주였다. 때문에 마사노리 보다는 성 공격이 수월했을 것이다. [본문으로]
대신 그만큼 절약하여 부인 토쿠히메[督姫]가 놀이개를 갖는 것도 금지했으며, 아이들에게도 장난감을 사주지 않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한국 이명박 대통령과 후나바시 요우이치(wiki_jp)[船橋 洋一] 아시히 신문 주필의 인터뷰 일부를 발췌하는 기사들은 있으나 전문은 게재한 곳이 없기에(...있으면 대략 시간낭비) 번역해 올립니다.
- 는 후나바시 요우이치 씨의 질문. 굵은 글자는 이명박 대통령의 답변입니다.
- G20 의장국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셨습니다. G20을 앞으로 어떻게 키워나가고자 하십니까? 그리고 의장으로서 이번 회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처음 G20이 모인 것은 2008년 11월 워싱턴. 그때는 (금융)위기였기에 선진국, 신흥국 등 대륙을 대표하는 나라들이 모였습니다. 지금은 회복기에 들어섰습니다만 걱정은 남아있습니다. 위기 때는 단결하지만 회복기가 시작되면 나라마다 각각의 사정이 다르기에 과연 한마음이 될 지 걱정입니다. 그 고비가 된 것이 서울에서의 회의입니다. 앞으로도 G20이 계속 이어질 것인가, 서울에서 합의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많이 제기되었습니다. 때문에 과거의 회의에는 없었을 듯한 부담감을 크게 느꼈습니다. 서울 회의로 인해서 G20 역할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부담감입니다.[각주:1]
결과적으로 G20에 속한 나라들은 세계의 문제를 토론하는 자리로써 앞으로도 G20을 대신할 포럼이 없다는 인식을 가졌습니다. 회의 마지막에는 모든 정상들이 G20이야말로 세계적으로 어려운 때 문제 해결의 장소가 될 것이라는 인식을 같이 하였습니다. G20을 대신할 상설 채널은 없다고 확신합니다.
G20 멤버 이외에도 개발문제가 있기에 아프리카를 상징하는 2개국을 초청하였습니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까지 G20이 앞으로도 선도적인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최선진국, 신흥국, 가장 가난한 나라까지 모두가 G20에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 한국은 세계의 글로벌 파워로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는 14년전에 가입한 선진국입니다. 한국이 G8에 들어가 G8을 강화하는 시대가 온 것은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아직 세계 경제문제가 주된 관심사인 G20입니다만 이번 토론에서는 기후변동에서 개발도상국 개발문제까지 다양한 토의를 하였습니다. G20에서 함께 연구하는 편이 효과적이라 생각합니다.
- 한국은 환태평양 파트너십 협정(TPP)에 어떤 방침을 가지고 임하고 있습니까?
상징적인 효과는 있습니다만 실질적 효과에 대해서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역내의 APEC 국가들이 역내에서 자유무역을 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어 어느 나라건 (TPP를) 검토하고 있는 듯 합니다. 한국도 그러한 나라 중 하나입니다.
- 한일 자유무역협정(FTA)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까요?
제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일본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많은 나라와 FTA를 맺고 있습니다. 비관세 장벽을 없애는 것만으로 자유무역이 되는 것이 아니라, 관세 장벽과 비관세의 장벽을 없에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당 부분이 일본 측 의사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 일본의 어려움 중 하나는 농업을 보호하고자 하는 정치적 압력입니다만 그것은 한국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FTA를 연달아서 성사시키고 있습니다. 어떻하면 농촌, 농민의 반발, 불안감, 반대 등을 극복하고 FTA 쪽으로 가져갈 수 있는 것입니까?
농민의 문제는 단순한 경제문제가 아닙니다. 한국과 일본이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FTA를 체결하려면 많은 농민을 설득해야만 합니다만 반대가 굉장히 많습니다. 지금도 깃발을 휘날리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치가가 그런 반대들을 극복하여 결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모든 분야가 국제적인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 농업도 국제경쟁력을 가져야만 하는 점이 중요하며, 농민도 열심히 하면 잘 살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저는 농민의 입장을 정치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려는 것이 아니라, 농민의 입장에 서서 어떻게 하면 외국과 경쟁해가면서 잘 살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대화를 많이 나누고 싶습니다. 제 생각을 이해해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노력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 남북정상회담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근본적으로 한반도의 평화가 필요하다는 것이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화가 전제이며 그 다음이 경제협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협력이 실현되면 자연히 통일문제입니다. 지금 당장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하고 북의 비핵화라는 커다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저는 언제라도 정상회담이 가능하다고, 취임했을 때부터 일관되게 말해 왔습니다. 하지만 정상회담을 국내의 정치적인 목적때문에 할 생각은 없습니다. 한반도의 남북전체를 위한 길을 탐색하기 위한 회담을 해야만 합니다.
- 저는 북한이 권력계승기에 진입하고 있으며, 불안정하게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도 미리 상정하여 한국의 대응, 한미, 한미일의 협력이 필요하지 않냐고 생각합니다.
삼대세습은 일반적,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납득되지 않는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삼대세습했다고 해서 곧바로 북한이 위험해 진다거나 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항상 한반도 전체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한반도 전체, 동아시아 전체의 정세를 보고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협력할 것이며, 지금도 협력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은 동맹관계이며 미국과 한국도 동맹관계이기에 자연히 말씀하신 것은 유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지금은 예전에 비해 더욱 국제무대에서 상호간 긴밀히 협력하고 있습니다. 천안함 사건이 있던 때도 국제연합에서 일본이 앞서서 잘 협력해 주었습니다. 그렇 것을 통해서 상호 신뢰가 깊어지기에 북한 정세가 위험하다거나 위험하지 않다거나에 관계없이 앞으로도 이러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 한일 안전보장협력을 더욱 강화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현재 우리는 자연스럽게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면 자연히 그렇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강화한다고 하면 주변 나라들이 의심스런 눈으로 볼 지도 모르기에, 반대로 그런 의심을 강하게 받게 될 지도 모릅니다. 자연스럽게 서로 이해하고 신뢰를 쌓아 간다면 자연스레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번 한국에서 대량파괴병기 확산방지구상(PSI)의 훈련이 있었을 때 일본에서도 왔습니다. 훈련에는 직접 참가하지 않았지만 참관하였습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하면 다음에도 또 자연스럽게 관계가 발전해 나가지 않겠냐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것 자체가 지금까지 없었던 일입니다.
- 한미의 군사연습을 예전에 했을 때, 일본 해상자위대를 옵저버로 초대해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이번에 미일간 훈련할 때 한국도 옵저버로 올 수 있습니까?
참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연히.
- (한국이 반환을 요구하고 있는) 문화재 인도 서명이 한일간에 행해집니다. 연내에 1205점을 인도할 때 대통령 스스로 한 번 더 일본에 오셔서 가져가시는 것도 가능할까요?
그런 문제는 일본 국회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통과된 다음부터 생각하겠습니다.
- 6자회담을 재개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어떤 행동, 태도로 나올 필요가 있을까요?
간단한 일입니다. 과거를 되돌아 보면 6자회담을 하고 있는 도중에 적절한 보상을 주더라도 그들은 핵실험을 하여 망친 다음 또 (회담에) 나오거나 하는 일을 반복하였습니다. 이러한 전략에는 6자회담을 열더라도 의미가 없습니다. 핵을 완전히 포기한다는 의사를 전제로 회담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일본과 한국은 같은 생각이며, 중국도 어느 정도는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러시아 역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미국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회담을 위한 회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북한이 만나고자 한다면 어떻게 하면 핵을 포기하는가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대화하는 자세를 가지고 나올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북한에 대해서 언제나 중국을 모델로 하라고 말해 왔습니다. 중국정부에 대해서도 북한을 중국과 같이 해 주길 바란다고 말햇씁니다. 우리들이 개방하시오, 변하시오 라고 하여도 그들은 오해하는데, 중국이라는 성공사례도 있으며 체제도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직역 반, 의역 반. 제 실력이 딸릴 수도 있겠지만 좀 중구난방한 느낌이 있습니다. 일본어 가능하신 분은 링크를 직접 참고하시고 보시는 편이 좋을 듯.
아마도 서울 회의에서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면 G20이 무용지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으셨다고 말씀하시는 듯. [본문으로]
“시마즈 효우고노카미 요시히로[島津 兵庫頭 義弘]! 무운 다하여 여기서 배를 가른다. 일본의 무사들이여! 너희들이 내 목을 베었다고 나중에 자랑하지 말지어다”
1600년 9월13일. 사츠마[薩摩] 카모우[蒲生]에 있던 쵸우쥬인 세이쥰[長寿院 盛淳]은, 소수의 병력[각주:1]으로 서군(西軍)에 참가해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의 동원령에 응하여 요시히로의 저택이 있던 쵸우사[帳佐]와 자신이 다스리던 카모우[蒲生]의 무사 70여명을 이끌고 8월 3일 출발하여 9월 13일 이른 아침 세키가하라의 난구우산 산[南宮山] 근방에 도착. 아침.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휘하의 병사 1000명을 파견하여 마중. 길 양측에 도열해서는 앞을 지나가는 쵸우쥬인 세이쥰의 병사들에게 큰소리로, "오시는 동안 많은 고난이 있었을 텐데 이렇게 무사히 오시다니 정말 군신(軍神)이 따로 없소" 라 외쳤고, 마중 나왔던 미츠나리는 금으로 된 지휘부채[軍配]를 주며 쵸우쥬인 세이쥰[長寿院 盛淳]의 노고를 치하.
점심.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가 주둔해 있던 오오가키[大垣]에 도착. 요시히로 문밖으로 달려 나와, ”쵸우쥬[長寿]구나! 자네가 가장 먼저 와 줄거라 믿고 있었네.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어” 라 기뻐하며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하사 받았던 흰 봉황이 새겨진 진바오리[陣羽織][각주:2]를 하사.
이틀 뒤인 1600년 9월 15일.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시작.
서군(西軍)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시마즈 부대의 본영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그 너무도 빠른 서군의 붕괴에 요시히로는 아직 갑옷도 완전히 입지 않은 상태였다.[각주:3] 서군의 좌익 이시다, 우익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는 이미 무너져 전장에 남아있는 서군의 부대는 시마즈 부대 뿐이었다. 앞으로 어느 쪽으로 탈출할 지를 놓고 토론하였다. 그때 세이쥰이 들어왔다. ”이때가 되어서도 한가롭게 말싸움이나 하고 있을텐가? 말로 다툼하는 대신 무공으로 다투고 싶은 사람은 나와 함께 여기에 남아 마지막 무명을 높이세”
막료들이 이러고 있는 동안 요시히로는 할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거기에 조카인 시마즈 토요히사[島津 豊久][각주:4]가 와, “이제 정해진 천운(天運)을 바꿀 순 없습니다. 살아 장수를 누리는 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희는 여기서 싸우다 죽으려 하니, 그 사이 큰아버지는 가신들을 이끌고 사츠마[薩摩]로 돌아가십시오.” 그래도 요시히로는 듣지 않았다. “큰아버지의 몸에 시마즈 가문의 운명이 걸려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옵소서” 라고 외치자 그제서야 요시히로는 일어섰다.
그 대화를 보고 있던 세이쥰은 요시히로와 토요히사의 말이 끝나자 재빨리 요시히로의 갑주 쪽으로 가 자신의 무구를 벗은 후 요시히로의 것을 서둘러 입었다. 그것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알고 있기에 요시히로는 아무 말 없이 대신 세이쥰이 벗은 무구를 입었다. 이로 인해 세이쥰은 도착했을 때 요시히로에게 받은 진바오리와 요시히로의 무구, 거기에 미츠나리가 준 황금 지휘부채로 인해 오히려 요시히로보다 더욱 화려한 모습이 되었다.
역할이 정해졌다. 토요히사는 시마즈 요시히로를 호위하며 탈출하기로, 세이쥰은 본진이었던 곳에 남아 요시히로의 영무자[影武者]가 되기로.
요시히로가 부하에게 물었다. “어느 쪽 적의 기세가 가장 왕성한가?” 부하가 답했다. “동쪽에 있는 적이 가장 기세 등등합니다.” 부하의 보고를 받고 요시히로는 말했다. “그렇다면 그 기세를 향해 돌파할 것. 돌파하지 못하면 효우고 뉴우도우[兵庫入道][각주:5]는 할복할 뿐!” 부하들이 합창하듯이 답했다. “말씀하신 두 명령. 받자와 메시겠습니다”
떠나는 토요히사에게 세이쥰이 다가가 말했다. “이것으로 금생에서는 더 만나지 못할테니 지금 인사를 올립니다” 토요히사는 말했다. “오늘은 아군이 약하기에 무공을 세우긴 힘들 것 같군요” 둘은 미소를 지으며 헤어졌다.
남겨진 쵸우쥬인 세이쥰 부대 200~300에 동군(東軍) 부대 700이 돌진해 왔다. 처음엔 본진에 적들이 난입하기 전에 철포로 물리쳤다. 두 번째는 난전이 되었다. 시마즈 부대의 암구호는 ‘자이[ざい]’였는데, 하필 상대도 ‘자이[ざい]’였다[각주:6]. 같은 편끼리 죽고 죽이기도 하였다. 개중에는 두려워 본진 뒤편에 파 두었던 해자[垓字]로 도망치는 자들도 있었다. 세이쥰은 노하여 외쳤다. “사츠마까지는 500리나 된다. 설사 도망치더라도 멀어서 가기나 하겠나? 거기에 도망치는 놈은 얼굴 다 알려졌을테니 앞으로의 굴욕을 어떻게 감당하려 하나!” 몇몇이 해자에서 기어나와, “잠시 동안이라도 미련을 가졌던 것이 정말 창피하옵니다.” 라 말했다.
난전이 된 두 번째 적의 파도을 제압한 세이쥰이 부하들에게 물었다. “주군은 어디까지 가셨나?” 부하들은 모두 입 맞추어, “적진을 돌파하였습니다. 이제는 아주 멀리 가셨을 것입니다.” “축하할 일이구나. 이제 내가 주군의 영무자[影武者]로 죽는 일만 남았군”
적의 3차 돌격에서 세이쥰은 죽었다고 한다. “시마즈 효우고노카미[島津 兵庫頭] 죽으려고 환장했으니 올테면 와라” 라 외치며 돌진하다 무수한 적의 창에 몸이 꿰뚫린 후 힘 다해,
“시마즈 효우고노카미 요시히로! 무운 다하여 여기서 배를 가른다. 일본의 무사들이여! 너희들이 내 목을 베었다고 나중에 자랑하지 말지어다”[각주:7]
외친 후 배를 열십자로 가르고 머리를 북쪽으로 향해 죽었다.
그때까지 남아 있던 283명은 그 모습을 보고 돌진하여 살아남아 도망친 자는 50명이라고 한다.
시마즈 토요히사[島津 豊久]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고 한다. 퇴각전 중 그가 타고 있던 말만 나타났다고 한다. 토요히사를 죽였는지 아니면 그가 죽어있을 때 갑주만을 벗겨 전공품으로 삼았는지 알 수 없지만, 토요히사가 입던 갑옷는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양자 후쿠시마 마사유키[福島 正之]의 부대에 꼽사리 끼었던 낭인[浪人] 카사하라 토우자에몬[笠原 藤左衛門]이 가져가 그의 자손이 대대로 소유했다고 한다. 후에 소문을 들은 토요히사의 6대손이 찾아가 살피자, 갑옷에는 창에 꿰뚫린 자욱이 두 군데 있었다고 한다.
쵸우쥬인 세이쥰[長寿院 盛淳] 1548년~1600년. 盛淳을 일본 위키피디아의 해당항목이나 일본 일반 웹에서는 ‘모리아츠’라고 읽으나 세이쥰은 승려에, 그의 스승이 ‘다이죠우인 세이큐우[大乗院 盛久]’였기에, 스승의 이름자 하나를 물려 받았을 터이니 ‘세이쥰’이라 읽어야 할 듯. 어렸을 적부터 불문에 들어갔다.[각주:8] 처음 입문한 곳은 시마즈 가문[島津家]이 기도를 올리는 사원인 다이죠우인[大乗院]. 그 후 키이[紀伊]의 네고로 사[根来寺], 코우야[高野]에서 수행 후 사츠마[薩摩]로 돌아와 안요우 원[安養院]의 주지가 되었다. 그 후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의 부름으로 환속하여 시마즈 가문의 국정에 참가. 후에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의 휘하 가로가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요시히로의 동원령에 호응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가하였다 요시히로의 영무자(影武者)가 되어 전사. 향년 53세.
약 200명 이하. 여담으로 1600년 8월 토요토미 정권이 정한 시마즈의 재경 주둔병(在京駐鈍兵)은 7000명이야 했다. [본문으로]
뉴우도우[入道]는 불문에 입도한 사람에 붙는 말. 요시히로는 히데요시가 죽자 그의 명복을 빈다며 중이 된 상태였다. – 단 머리는 밀지 않았던 듯 당시 몇몇 종군기에는 머리 묶는 끈에 대한 묘사가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당시 전투방식으로, 무사들끼리 대치하면 우선 자기 부대의 암구호를 대어, 상대방도 맞으면 다른 적을 찾아 나서고, 다르면 싸우는 식이었다. [본문으로]
내가 스스로 죽었는데도 나를 죽이고 내 목을 베었다고 무공을 자랑하지 말라는 말. [본문으로]
이에 대해선 그의 부친 하타케야마 요리쿠니[畠山 頼国]가 “우리 집안은 원래 아시카가 쇼우군[足利将軍]의 중신이었지만 시대를 잘못 만나 서국의 벽지(사츠마[薩摩])에 오게 되었다. 내 자손을 미천하게 키우고 싶지 않으니 불문에 보내고 싶다”고 하여 불문에 보냈다는 설이 있다…카더라. [본문으로]
1913년 9월 29일 밤.
벨기에에서 영국으로 향하던 배에서 한 사람의 독일인이 사라졌다. 자신의 발명품이 세상에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좌절과 인간관계, 빚 문제와 같은 스트레스로 바다에 뛰어들었을 거라 추측된다. 그러나 그의 발명이 타국의 손에 건네지는 것을 막고자 독일 정보기관이 살해했다고 추리하는 사람도 있다.
발명가 루돌프 디젤. 그의 발명품이라는 것은 새삼 말할 것도 없이 디젤 엔진이다.
확실히 디젤의 엔진은 그가 죽은 다음 해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 U보트에 사용되어 그 우수성을 알렸기에, 그의 조국 독일은 디젤 엔진의 기술이 가상적국 영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두려워했다고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독일정부가 암살하려고 할 정도로 루돌프 디젤의 발명을 높게 평가했다면 그가 스트레스 받을 정도로 몰리지 않았을 것이며 일부러 외국까지 자신의 발명품을 팔러 갈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역시 암살설은 근거가 부족하다.(디젤 암살설은 경향 신문의 이 기사를 참조)
디젤의 죽음(향년 55세)은 너무 빨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71살에 죽은 부친만큼 살았다면 자신의 발명품이 잠수함이나 기관차, 자동차나 비행기에 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디젤의 엔진은 그의 사후 20여 년 지나자 전차에도 실리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디젤 엔진을 전차에 채용한 것은 조국 독일이 아니었다. 그것을 실현시킨 것은 그의 조국과 싸우게 되는 소련이었으며, 먼 동양의 나라 일본이었다. 그의 모국 독일이 디젤 엔진을 사용한 제식 전차는 2차대전이 끝난 후인 레오파르트 1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디젤의 모국 독일은 어째서 디젤 엔진을 전차에 채용하지 않았는가? 이는 이외로 맹점을 찌른 의문일지도 모른다.
루돌프 크리스티안 칼 디젤(Rudolf Christian Karl Diesel)의 조부나 부친은 제본공(製本工)이었다. 부친 테오도르(Theodor) 때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프랑스로 이주하였다. 테오도르는 파리에서 독일상인의 딸 엘리세(Elise)와 만나 결혼해서 루돌프와 두 딸을 두었다.
디젤 일가는 1870년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외국인이라 추방된다(프랑스와 프로이센간의 전쟁이 원인). 루돌프는 가족과 떨어져 아우크스부르크의 친척집에 맡겨져 독일에서 교육을 받게 된다. 모국 독일에서 그는 엔지니어가 되는 꿈을 꾸며 우수한 성적으로 뮌헨 공과대학에 진학, 1880년에는 뮌헨 공과대학 사상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다.
처음에는 은사의 추천으로 냉장고 회사에 취직하였고 프랑스어를 할 수 있었기에 프랑스 지점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883년 파리에서 살던 독일여성 마르타(Martha Flasche)와 결혼. 이를 계기로 회사를 관두고 발명가, 기술 컨설턴트로 살아가는 길을 택한다. 디젤은 대학시절부터 효율이 좋은 내연기관 발명에 깊은 흥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내연기관의 이론적 근거는 1824년 프랑스의 니콜라 레오나르 사디 카르노가 발표하였다. 또한 독일의 니콜라우스 오토는 1876년에 카르노가 제시한 기관(4사이클 엔진)을 실제로 제작하였다. 1883년 독일의 고틀립 다임러와 빌헬름 마이바흐가 니콜라우스 오토의 엔진에 개량을 더하고 연료에는 가솔린을 채용하였다. 이것이 가솔린을 연료로 하는 엔진의 원형이 되었다.
그러나 니콜라우스 오토의 엔진은 14%의 열효율(발생한 전 에너지 중 유효하게 사용할 수 있는 비율)밖에 발휘하지 못하였고, 다임러의 엔진조차 효율 18~19%로 낮았다(가솔린을 연소시켜 얻을 수 있는 열에너지 중 80%이상을 버리는 엔진. 현대의 엔진 효율은 40%정도).
디젤이 제작한 엔진은 혼합기 대신에 공기만을 압축하여 거기에 연료를 내뿜어 연소시키는 구조였다. 단열압축하면 보일의 법칙과 샤를의 법칙에 따라 공기는 섭씨 수 백도의 고온이 되기에 적당한 타이밍에 연료를 내뿜는 것만으로도 점화기 없이 연소, 폭발이 일어난다. 이 때문에 디젤 엔진을 ‘압축점화기관’이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방식의 엔진은 디젤 이전부터 연구되었으나 실제로 제작에 성공한 것은 루돌프 디젤이 처음이었다. 그는 1893년에 ‘합리적 열기관의 이론과 설계’를 간행하였고, 같은 해 독일정부에서 특허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만족할 만한 엔진이 완성된 것은 1897년의 일이었다. 완성될 동안 그는 고압축비(高壓縮比)나 연료분사(고기압 하의 실린더에 연료를 넣기 위해서는 가솔린 엔진처럼 부압을 이용한 카브레터가 아니라 연료를 분사하는 장치가 필요했다. 이 인젝션이라도 부르는 장치가 디젤 엔진 개발의 가장 중요한 기술이었다)에 따른 기술적 문제 해결에 고심하였으며, 덤으로 특허소송에도 연루되었다.
디젤의 발명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아우크스부르크 기계제작소를 이끌고 있던 하인리히 폰 부츠(Heinrich von Buz)였다. 아우크스부르크 기계제작소는 원래 인쇄기계를 전문으로 하는 기계 메이커였지만, 디젤이 아우크스부르크 출신 제본공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면 일종의 동류의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우크스부르크 기계제작소는 1898년에 뉘르베르크 기계제작소와 합병하여 아우크스부르크 뉘른베르크 기계제작소(약칭 MAN)가 되는데, 흥미롭게도 디젤의 모친은 뉘른베르크 출신이었다.
MAN사(社)와 더불어 디젤을 지원한 것이 독일을 대표하는 철강, 병기 회사인 크룹(wiki_en)사(社)였다. 즉 디젤의 발명은 실용화 되기도 전부터 강력한 지원자를 얻었다는 것이 된다. 디젤은 엔진을 1900년 파리 박람회에 출품하여 최우수상을 받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디젤은 기업 경영감각이 떨어졌고 상업적인 재능도 없었다. 거기에 아직 디젤의 엔진은 신뢰성에도 문제가 있어 그다지 팔리지 않아 특허가 실효되는 1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연간 판매대수는 200~300대뿐이었다. 디젤은 이상가에 완고하였고 사교성이 없는 독불장군이었기에 1906년에는 MAN사(社)와 결별하고 자신이 만든 디젤사(社)에서도 쫓겨나게 된다. 거기에 더해 특허수입으로 부동산에 투기하여 거액의 빚을 지게 된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 소식불명이 된 만큼 자살이라는 추측이 자연스러웠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죽자 차츰 디젤 엔진 보급이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특허실효 후에 영국을 시작으로 한 각국이 독자적으로 디젤 엔진을 개량한 성과가 나타난 것이다.
이런 사정을 보아도 디젤 엔진 보급에 디젤 개인의 존재는 절대적 요건이 아니었고, 기술이 영국에 넘어가는 것을 두려워 한 독일 정보기관이 그를 암살하였다는 추측도 난센스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디젤 엔진의 장점
디젤 엔진의 장점 특히 가솔린 엔진(니콜라스 오토의 엔진)과 비교할 경우 장점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디젤 엔진의 장점은 다음 세가지가 있다.
(1). 열효율이 높다.
즉 같은 출력이라면 연료소비율이 낮다(연비가 좋다 = 항속거리가 길다).
디젤 엔진의 이론적인 열효율은 50%~60%나 된다. 가솔린 엔진으로는 기껏해야 40%정도일 것이다. 물론 이론대로의 열효율이 나올 순 없었지만, 실제로 디젤 엔진은 같은 양의 연료로 가솔린 엔진보다 1.5배 더 이동할 수 있었다.
(2). 경유 등 저가의 연료를 사용할 수 있기에 경제성이 높았다.
가솔린 엔진은 가솔린 밖에 쓸 수 없었지만 디젤 엔진은 연료의 융통성이 높아 가솔린은 물론 알코올도 쓸 수 있었다. 루돌프 디젤은 입도가 0.5mm 이하인 석탄가루를 연료로 할 생각까지 하였다(물론 실용화되지는 않았지만).
(3). 구조가 단순하고 튼튼하여 내구성이 높다.
디젤 엔진은 압축비가 20전후(통상기압의 20배)나 달하기에 처음부터 튼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루돌프 디젤이 실용화하기까지 많은 실패를 거듭했던 것도 엔진 부품을 튼튼하게 제작하고 결합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런 장점을 뒤집어 보면 디젤 엔진은 무겁고 부피가 커진다는 단점이 된다.
디젤 엔진을 전차에 채용할 경우 (1)열효율이 높다는 점은 이동거리 연장으로 이어진다. 즉 같은 양의 연료통 용적이라면 연료소비율 에 반비례하여 이동거리가 길어진다. 전차가 보병의 동반병기였을 즈음이라면 몰라도 전차가 집단으로 질주하게 되자 1회의 연료보급만으로 오래 가는 편이 좋았다.
(2)는 연료비의 저하는 물론이고 가솔린보다도 경유 쪽이 확보하기 쉽기에 전쟁 때도 쉽게 연료가 부족해지는 일은 가솔린에 비해 덜했다. 전쟁 때 가솔린은 항공기의 연료로 우선적으로 배당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점에서 경유라면 확보하기 쉽다.
또한 디젤 연료(경유)는 인화점이 높아 가솔린과 같이 폭발적으로 타오르는 일이 없다. 이 때문에 전차가 피탄 당했을 시의 생존성 향상으로 이어진다. T-34 등 소련 전차는 후부에 드럼통처럼 생긴 예비연료통을 외부에 대놓고 탑재하였다. 이는 디젤 연료였기에 가능한 것으로 만약 안에 가솔린이 들어있었다면 피해가 더 늘었을 것이다.
미국에서도 M4A2 셔먼이 GM의 디젤을 탑재하였지만 대부분은 무기대여법에 따라 소련으로 보내졌고, 미육군 자신들은 실전에서 사용하지 않았다.
2차대전 중 본격적으로 디젤 엔진을 전차에 탑재한 나라는 앞서 이야기 했듯이 소련과 일본이었다.
소련은 피아트제의 항공기용 디젤 엔진을 연구하여 V형 12기통의 BD-2를 개발. 1933년에 BT-5 쾌속전차(wike_en)에 탑재하여 테스트하였다. BD-2엔진은 V-2엔진으로 발전하여 1939년에는 표준엔진으로 제정. KV-1 중(重)전차, T-34 중(中)전차, 스탈린 중(重)전차 등에 탑재되었다. V-2 시리즈는 개량에 개량을 거듭하여 1970년대까지 사용되었다.
그러나 가장 적극적이고 조직적으로 전차용 디젤 엔진을 개발한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가솔린 확보의 불안, 화재 위험 등을 고려하여 디젤 엔진 개발을 단행하였다. 또한 중국대륙에서의 작전 중 냉각용수 확보의 어려움(냉각수에는 칼슘 등 미네랄이 적은 물이어야 했다. 우물이나 강물은 부적절)이나 냉각계통이 얼어붙을 위험(극한의 중국 동북부에서 작전행동을 고려했기 때문) 등도 감안하여 1932년부터 공냉식 디젤 엔진 개발에 들어갔다. 세계적으로도 공냉식 디젤 엔진 모델이 없어 독자적인 개발이 되었지만, 우선 직열 6기통 4사이클 디젤 엔진이 1936년 제식 채용되어 89식 중전차(을형)에 탑재되었다. 이어서 일본은 동일 실린더의 조합을 바꾸어 각종 사이즈의 엔진을 만드는 – 모듈러 사상의 선구자와 같은 4사이클 디젤 엔진 개발에 착수했다.
통제 디젤(100식 엔진)(wiki_jp)이라 부르는 보아(내경)120mm, 스트로크 160mm의 배기량 1.8리터의 실린더를 1단위로 하고, 이것을 4본(직렬4기통)에서 최대 12본(V형 12기통)으로 조합함으로써 배기량 7.2리터에서 21.6리터의 디젤 엔진을 만드는 것이다. 최대 V형 12기통 과급기 내장 엔진의 최대출력은 300마력으로 공냉식 외에 수냉식도 있었다. 통제 엔진은 1식 중전차(치헤) 이후의 전차에 탑재되었다.
패전으로 인해 일단 일본은 병기개발에서 손을 떼지만 자위대의 발족과함께 전차 개발을 재개. 2차대전 후 첫 번째인 61식 전차에는 2차대전 때의 기술을 살려 공냉식 4사이클 디젤이 탑재되었다. 그 후에도 74식 전차(공냉 2사이클), 90식 전차(공냉 2사이클)에 디젤 엔진을 탑재하였다. 즉 일본은 반세기에 걸쳐 일관되게 전차용 디젤 엔진을 계속 추구한 것이다. 전차용 디젤 엔진은 2차 대전 이전부터 이후까지 기술을 계속 발전시켰던 일본의 병기개발사상 드문 예가 되었다.
가솔린 엔진을 채용한 독일
디젤 엔진의 원조 독일에서는 2차대전 중 전차에 가솔린 엔진을 계속 탑재했다.
디젤 엔진을 탑재한 시작전차라 하면 판터의 다임러 벤츠의 시작차(VK3002DB)에 동사(同社)의 디젤 엔진을 탑재하긴 했지만 저 시작차는 채용되지 않았다. 제식전차는 I호 전차 B형 이후 전부 마이바흐 사(社)의 가솔린 엔진을 탑재하였다. 마이바흐 사(社)는 비행선이나 철도차량용 디젤에서 실적이 있던 회사였던 만큼 독일이 디젤을 채용하지 않았던 것은 수수께끼다.
또한 디젤의 발명에 처음부터 관여했던 MAN 사(社)나 크룹 사(社)도 2차대전 중에 전차의 생산이나 설계에 관여하였다. MAN 사(社)나 크룹 사(社)에서 디젤 엔진을 탑재한 전차가 등장하여도 이상하지 않았음에도 실제로 전차에는 마이바흐 제의 엔진을 탑재한 것을 보면 이는 역시 독일육군의 기술정책이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또한 디젤 엔진이라 아울러 말하지만 잠수함, 기관차용과 자동차, 전차용은 설계 자체가 많이 달랐다. 잠수함이나 기관차용은 대형대중량으로 저회전인 소위 저속디젤이며, 자동차용과 전차용은 소형경량의 고속디젤이 요구되었다. MAN의 특기인 U보트 용 디젤 엔진 기술은 기관차에 적용할 수 있었지만 그 상태대로 차량용에는 전용할 수 없다.
디젤 엔진의 소형경량화에 공헌한 기술은 연료의 공기분사에서 무기분사로의 전환이었다.
디젤이 설계한 시작 엔진이나 1920년대까지의 실용 디젤 엔진은 대부분이 연료를 압축공기와 혼합하여 실린더 내에 분사하는 방식을 채용하였다(공기분사). 당시의 기술수준으로는 연료를 단독으로 깨끗한 안개 상태로 뿜어내는 노즐, 고압연료 펌프 등을 제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기압축기는 부피가 커 필연적으로 엔전 전체도 크고 무거워졌다.
1927년 독일의 로베르토 보슈 사(社)가 무기연료분사 펌프 개발에 성공한다. 덕분에 1930년대가 되자 차츰 무기분사 디젤 엔진이 보급되었다. 이와 함게 디젤 엔진의 신뢰성도 눈에 띄게 향상되어 갔다.
흥미롭게도 1930년대에는 열강들이 경쟁하듯 항공기용 디젤 엔진 개발에 분주하였다. 디젤 엔진은 가솔린 엔진보다도 필연적으로 무겁기에 항공기용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좋은 연비율과 내구성은 장거리용 항공기에게 있어서는 무게에 관한 문제를 고려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엔진이 무거워도 필요한 연료가 적다면 차감하여 엔진 중량이 무거워도 연료를 적게 실으니 가벼워 질 수 있는 가능성도 생긴다.
실제 디젤 엔진은 우선 1930년대에 비행선용으로 확고한 지위를 점할 수 있었다. 그 여세를 몰아 MAN, 다임러 벤츠, 피아트, 롤스로이스, 융커스(wike_en), 리카도 등 유명한 회사가 대형 항공기용 디젤 개발에 매진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실용의 영역에 달한 것은 융커스 사(社)의 유로204/205/207 시리즈가 유일했다.
융커스의 항공기용 디젤 엔진은 긴 기통의 양측에 크랭크 샤프트가 있어 두 개의 피스톤 사이엔 연소실을 형성하는 대향(對向) 피스톤이라는 특이한 형식을 채용하였다. 이 엔진은 종전 후 영국의 치프틴, 소련 T-64의 디젤 엔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석유를 갈구하며
지금은 디젤 엔진을 탑재한 승용차나 트럭이 널리 보급되어 있지만 독일이 전차 개발을 재개한 1920년 말 즈음은 디젤 엔진 차량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는 디젤 연료(경유)보다 가솔린을 구하기 쉬웠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에 침공한 독일 육군의 장갑부대는 길가에 있던 주유소에서 연료를 약탈하여 사용하였다. 경유라면 현지조달이 어려웠을 지도 모르지만 디젤 엔진이라면 가솔린을 연료로 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나폴레옹 전쟁 때라면 모르겠지만 근대적인 군대에서 연료나 식량을 현지조달 하겠다는 생각 따위 하지 않을 것이다. 연료를 최전선까지 보낼 수 있는 보급체재가 만들어지지 않는 한 전쟁은 시작할 수도 없다.
연료(석유자원) 확보에 관해서는 독일군 수뇌부보다도 히틀러 쪽이 확실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정권을 잡기 전인 1932년 6월 히틀러는 독일의 석유화학기업 I.G.파르벤(wike_en)과 손을 잡고 보호를 약속하였다.
I.G. 파르벤은 석탄을 원료로 하는 석탄액화연료를 개발하고 있었다.
석탄을 석유로 만드는 합성에는 프리드리히 베르기우스의 수소 첨가법(wike_en)과 석탄을 일단 수소와 일산화탄소로 분해해서 재합성하는 피셔 트로프슈 공법(wiki_en)이 있는데, 파르벤의 방법은 베르기우스의 수소 첨가법으로 이는 항공기용 가솔린을 합성하는데 적합했다.
히틀러는 강박관념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항상 석유자원 확보에 신경썼다. 그가 말하는 게르만 민족의 레벤스라움(생존권)에는 식량산지와 더불어 유전지대도 포함되어 있다. 루마니아를 동맹국에 끌어들여 플로이에슈티의 유전을 확보했으며, 1941년 소련침공 때는 장군들을 물리치고 주공을 카프카스의 유전지대로 돌렸다. 그는 장군들에게 “자네들은 전쟁의 경제적 측면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까지 말했다.
독일군은 카프카스 산맥 앞에 도달하여 바쿠의 유전지대가 보이는 곳까지 육박했지만, 기상악화와 보급선의 한계로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다.
프랑스 전선과는 정반대인 일이 러시아 전선에서 일어난다.
독일군은 소련군의 보급기지를 점령하지만 비축되어 있던 연료는 디젤 용의 경우로 독일군의 전차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942년 공세에서도 카프카스의 유전지대를 목표로 하였다. 바쿠 유전을 점령하면 독일은 그리도 바라던 석유자원을 손에 넣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소련의 전쟁유지 능력을 뺐어 패배로 몰아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은 점령한 유전을 복구하기 위한 석유기술여단까지 재빨리 편성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1942년 공세도 역시 기상악화와 보급선의 한계로 실패했다. 독일육군은 다시 연료부족으로 진격을 멈추었기에 공세에서 수세로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히틀러가 기대했던 I.G. 파르벤의 석탄액화연료는 1944년 초반에는 석유공급의 54%를 점할 정도가 되었고, 항공 가솔린은 92%나 석탄액화연료에서 만들어졌다. 아우슈비츠의 강제수용소 옆에 I.G. 파르벤의 석탄액화연료 고장이 건설되어 유대인 수용자들이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 연료생산에 종사했다. 독일의 석탄액화연료의 1/3은 이런 강제노동의 산물이었다.
연합국 공군은 1944년 5월부터 독일의 석탄액화연료 공장을 공격하였으며 또한 플로이에슈티의 유전을 폭격하였다. 독일의 석탄액화연료 생산은 곧바로 1/10이하로 떨어져 항공기는 날 수 없게 되었고 전차는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독일은 운명은 석탄액화연료와 함께 다한 것이다.
이제 여기서 서두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독일은 어째서 디젤 엔진을 전차에 탑재하지 않았을까?
여러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알 수 없다. 독일육군 수뇌부가 주로 유럽 안에서만 작전을 상정하였기에 연료 확보를 문제시 하지 않는 점도 있었을 것이다. 전차는 보병의 동반병기라는 개념을 계속 가지고 있어 그다지 긴 작전행동을 요구하지 않음 점도 있을 것이다. 당시의 디젤 엔진을 전차에 탑재하기에는 신뢰성이 떨어지는 점도 있었을 테지만 그 정도라면 독일의 기술력으로 해결할 수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그것을 하지 않았다.
물론 독일 전차가 디젤 엔진을 채용했다고 하더라도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석유생산의 근원을 파괴당하면 디젤 연료(경우)건 가솔린이건 부족하긴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디젤 엔진이라면 독일 전차의 이동거리가 좀 더 길어졌을 것이며 보급도 원활하지 않았을까? 연료부족으로 진격을 멈춘 몇몇 국면에서는 좀 더 유리하게 진행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루돌프 디젤의 모국 독일이 전차용 디젤 엔진을 개발하고자 하지 않았던 점은 기술사적으로 기묘한 일이라 할 수 있다.
2차대전 서적을 읽다가 삘받아서 번역하긴 했습니다만 제가 2차대전과 이런 기계에 관한 것은 무지에 가까우니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가차없이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