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니 사이조우[可児 才蔵]는 소위 전투의 프로페셔널로 센고쿠[戦国]의 세상을 유랑한 사나이이다. 7번 주군을 바꾸지 않으면 한 사람의 무장이라는 말할 수 없다 – 고 일컬어지는 센고쿠의 풍조가 바로 그의 인생이었다.

 미노[美濃]의 사이토우 타츠오키[斎藤 竜興]를 시작으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오다 노부타카[織田 信孝][각주:1], 하시바 히데츠구[羽柴 秀次][각주:2],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 주군을 바꾸가며 전전하였다. 이런 식이었기에 사이조우의 행동은 언제나 조직에서 벗어난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하시바 히데츠구[羽柴 秀次]를 섬기고 있을 즈음의 일이다.
 1584년
히데요시[秀吉]와 이에야스[家康]간에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가 일어나, 사이조우는 하시바 히데츠구의 선봉을 맡고 있었다.
 이 전투에서 선봉이었던 사이조우는 갑자기 최전선에서 철퇴를 하기 시작하여 히데츠구를 화나게 만들었다. 사이조우는,
 “오늘은 적이 대군이고 더구나 강력하기에 여기서는 일단 물러나야만 합니다. 무리하게 공격했다가는 대패로 이어질 겁니다.”
 하고 히데츠구를 설득하였지만 전투를 모르는 히데츠구는 펄펄 날뛰며 사이조우의 진언을 물리친 후 오로지 군사를 돌진시켰다. 사이조우도 또한 히데츠구의 무식과 무모함에 화가 나,
 “에이 좆병진!”
 라는 말을 내뱉고는 자신의 병사들을 이끌고 재빨리 철퇴했다고 한다.

 사이조우의 말대로 히데츠구는 참담한 패배를 당하여 히데츠구 자신도 겨우 목숨만 부지해서는 전장에서 도망치는 꼴이 되었다. 더구나 도망치던 도중 사이조우를 발견하고는 사이조우의 말을 빌려달라고 부탁하였지만, 사이조우는 단 한마디, “싫습니다.”라고 말하며 말에 채찍질하고는 도망가 버렸다.

 그 후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를 섬기고 있을 때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이 일어나, 사이조우는 ‘조릿대의 사이조우[笹の才蔵"]’라는 이명(異名)을 얻는 기발한 활약을 하게 된다.
 이야기는 여러 버전이 전해지는데 여기서는 그 중 하나를 소개하겠다.

 동서 양군의 결전이 시작되기 전날 미노[美濃] 세키가하라 근방 아카사카[赤坂]에 체진 중일 때의 일이다. 사이조우는 명령이 있을 때까지 돌격하지 말라는 말을 어기고 뛰쳐나가 서군의 용사 유하라 겐고로[湯原 源五郎]를 죽이고 와 후쿠시마 마사노리에게 질책을 받아 근신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그대로 얌전히 있을 사이조우가 아니었다.

 그 뒤 아카사카에 도착한 이에야스가 장수들을 소집하여 군의(軍議)를 연 뒤 후쿠시마 마사노리에게,
 “지금까지 취한 목들을 살펴 봅시다”
 라고 말하였기에 각 부대가 취한 서군 무사들의 목을 검사하게 되었다.
 사이조우가 가져 온 유하라의 목 차례가 되자 이에야스의 옆에 있던 마사노리는,
 “너는 이 단 하나의 목을 취하기 위해서 군령을 어긴 어리석은 놈이다”
 라고 사이조우를 질타하였다. 그러자 사이조우는 다음과 같이 변명을 하였다.
 “사실 근신중인 몸이기에 매일 슬며시 나가서 적과 싸웠고 그럴 때마다 투구를 쓴 목[兜首][각주:3]을 베었습니다. 그러나 근신 중이기에 그 목을 가지고 올 수가 없기에 그런 목들에는 콧구멍이나 귓구멍에 조릿대[笹]를 끼어 넣은 채 버리고 왔습니다. 그런 것들은 아마 젊은 무사들이 주워와 자신의 공적으로 하였을 거라 사료됩니다.”
 사이조우의 이런 말투에 마사노리는 열화와 같이 화를 내었지만, 어쨌든 사이조우의 말대로 조사해 보자 정말 조릿대가 꽂힌 목이 17개나 되었다고 한다. 이것에는 이에야스도 놀라,
 “오늘부터 ‘조릿대의 사이조우[笹の才蔵]’라는 이름을 쓰라”
 며 이명(異名)을 하사하여 이때부터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사이조우의 무예를 알려주는 일화로 장도[長太刀] 기술이 있다.
 젊었을 때부터 장도[長太刀]를 허리에 차고 다니며 즐겨 사용하였지만 늙자 체력적인 부담이 있었던 듯 이 장도[長太刀]를 종자(從者)에게 들게 하고 다녔는데, 어느 무사[각주:4]가 이것을 보고 놀리며,
 “이제는 칼도 들고 다니지 못할 정도로 늙으셨구랴. 그 정도라면 실력도 뻔하겠구먼”
 라고 말하자 사이조우는,
 “이거 참 부끄럽소. 하지만 실력이라면 그쪽이 보는 것만큼 늙진 않았소. 내 함 보여드리지”
 라며 재빨리 장도를 뽑아서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그 무사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사이조우는 젊었을 때부터 아타고 대권현[愛宕大権現][각주:5]을 믿었기에 항상 아타고의 신통력이 영효(靈效)로운 날[縁日]에 자신은 죽을 거라고 말하였는데, 그 말대로 1613년 음력 6월 24일[각주:6]에 몸을 깨끗이 하고, 갑주로 몸을 감싼 후 미첨도[薙刀]를 든 채 의자에 앉은 채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60세라고 한다.

가니 사이조[可児 才蔵]
미노[美濃] 혹은
오와리[尾張] 출신이라고 한다. 호우조우인 인에이[宝蔵院 胤栄]에게 창술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1. 노부나가[信長]의 셋째 아들. [본문으로]
  2. 살생관백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 [본문으로]
  3. 아시가루[足軽]나 무가봉공인(武家奉公人)은 머리 방어구로 주로 삿갓[陣笠]였지만, 무사 계급이 되면 투쿠[兜]를 썼기에 투구를 쓴 목은 더 높은 전공의 대상이 되었다. [본문으로]
  4. 카헤에[嘉兵衛]라는 후쿠시마 일족의 인물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5. 불의 신. [본문으로]
  6. 양력 8월 10일. 여담으로 블로그 주인장의 생일이다. [본문으로]

 후리타 오리베[古田 織部]의 이름은 센고쿠 무장[戦国 武将]이라기 보다는 다인(茶人), 도예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오리베 애호[織部好み]’라 불리는 기발한 그릇 모양과 특색있는 문양을 가진 도기(陶器)를 창시하였고, 그것이 지금 ‘오리베야키[織部焼]’라는 이름으로 명물이 되어 있다.

 오리베는 센노 리큐우[千 利休]에게 사사 받아 후세에 리큐우 칠철[利休七哲][각주:1]의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인 다인 다이묘우[茶人大名]이다. 그러한 오리베였기에 특별한 무공은 없었다. 다도를 좋아했던 히데요시[秀吉]에게 총애를 받아 히데요시의 말상대인 ‘오토키슈우[御咄衆]’까지 출세하였다.

 스승으로 섬긴 리큐우가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자살을 언도 받은 뒤 오리베의 명성은 한층 더 높아져, 오리베의 저택에는 다이묘우나 다인(茶人)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아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한다. 오리베가 감정을 하고 보증서를 하나 써주면 바로 지금까지 부엌 한 구석에 놓여있던 투박한 사발[茶碗]도 곧바로 천금의 가격을 가지게 되었다고 할 정도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히데요시가 죽고 곧이어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이 일어나자 오리베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에게 속하여,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 통하고 있던 히타치[常陸]의 사타케 요시노부[佐竹 義宣]를 설득하여 서군에 참가하려던 요시노부를 중립에 서게 만들었고, 이 공적으로 인해 이에야스에게 1만석을 하사 받아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각주:2] 거기에 더해 쇼우군 가문[将軍家]의 다도사범이라는 지위를 얻어 2대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에게 다도를 가르치는 몸이 되었다.

 이때까지 오리베의 인생은 순풍에 돛이 단 듯했다. 그러나 곧이어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이 시작된다. 겨울 전투[大阪冬の陣} 때는 별일 없었다. 오히려 웃긴 일화조차 전해진다.

 어느 날 오리베는 살기등등한 진중 속에서 다도의 벗인 사타케 요시노부[佐竹 義宣]의 본진에 방문하였다.
 참고로 사타케 씨[佐竹氏]는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의 행동으로 이에야스의 분노를 사, 전후(戰後) 아키타[秋田]로 이봉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에야스의 속한 무장으로 오오사카 성[大坂城]을 공격하고 있었다.
 마침 그때 요시노부는 최전선에 설치된 시요리[仕寄 – 대나무 묶음 등을 연달아 이은 총탄 방어용 방패와 같은 것] 안에 들어가 있었다. 오리베는 그 안에 기어들어가기 위해서 투구를 벗고 들어갔고, 잠시 동안 요시노부와 쌓인 이야기를 한 뒤 차를 다리기 시작했다. 총탄이 오가는 와중에 지금으로 보면 실로 재수없는 행동이었다. 거기에 이 시요리[仕寄]의 대나무 묶음 속에 작은 차주걱[茶杓] 될 만한 좋은 대나무가 없나 하고 몸을 숙여가며 찾기 시작한 것이다. ‘싸움에 쓰이는 도구라도 다도에 쓰인다’는 오리베 류[織部流] 다도의 특색을 보여주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좁은 시요리[仕寄]에서 몸을 움직였기에 오리베의 머리[キンカ頭]가 시요리[仕寄] 밖으로 삐져나와  태양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이것이 성 방어군의 눈에 띄었다. 이 빛을 향해서 철포가 불을 뿜었다. 그 중 한발이 오리베의 머리를 빗맞혔다. 오리베는 ‘꺄아~”라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지고 옆에 놓아두었던 찻잔을 닦는 수건[茶巾]과 받침으로 쓰는 헝겊[ふくさ]로 흐르는 피를 막았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던 사타케의 군사들은 ‘다도인에 걸맞은 붕대구만’하고 낄낄대며 웃었다고 한다.

 이 다음 해인 1615년 여름 전투[大阪夏の陣] 직후 오리베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이 전투도 마지막이 다가왔을 무렵, 오오사카 성 안에서 쿄우토쇼시다이[京都所司代][각주:3]에게 밀고하는 자가 있었다. 그 사람의 말에 따르면 후루타 오리베[古田 織部]의 가신(家臣) 키무라 무네요시[木村 宗喜]라는 자가 미리 오오사카 측과 의논하여 이에야스[家康], 히데타다[秀忠]가 오오사카를 향해서 후시미[伏見]를 출발하는 것에 맞추어 쿄우토[京都]에서 거병하고, 오오사카 측과 호응하여 토쿠가와 군(軍)을 협격하려고 하였다는 것이었다.

 곧바로 일당의 체포가 시작되어 오리베도 역시 잡히는 몸이 되었고, 오오사카 낙성 후 할복이 언도되었다. 오리베가 정말 모반을 꾸몄는지, 만약 정말로 그러했다면 무엇이 원인인지는 아직 확실히 알려진 것이 없다.

후루타 오리베[古田 織部]
1544년 미노[美濃]에서 태어났다고 한다[각주:4]. 이름은 시게나리 혹은 시게테루[重然], 통칭은 사스케[左助]. 나카카와 키요히데[中川 清秀]의 매제로, 처음엔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의 휘하 무장[与力]이였고, 후에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거쳐.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 뒤에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를 섬긴다. ‘다도백개조(茶道百箇条)’를 저술하였고,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 혼아미 코우에츠[本阿弥 光悦], 코보리 엔슈우[小堀 遠州][각주:5]의 다도 스승이었다. 1615년 6월 아들 야마시로노카미 시게히로[山城守 重広]와 함께 자해. 72세.

  1. 문서에 따라 다르나 주로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후루타 오리베[古田 織部], 시바야마 무네츠나[芝山 宗綱], 세타 마사타다[瀬田 正忠],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마키무라 토시사다[牧村 利貞]. [본문으로]
  2. 이미 이전에 히데요시에게 야마시로[山城] 니시가오카[西ヶ岡]에 3만5천 석을 하사 받아 다이묘우[大名]인 상태였다. 여담으로 '만화 헤우게모노[へうげもの]'에서 히데요시는 오리베에게 니시가오카 3만 5척석을 주며 "쿄우[京] 주변의 3만5천석은 중한 것이네"라는 대사를 한다.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의 일화 - 쿄우토 주변이라면 영지가 적어도천하를 바라 볼 수 있었을 것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쿄우토 주변은 적은 영지라도 무게감 있는 자리였다. [본문으로]
  3. 쿄우토 행정, 조정의 수호와 감시, 키나이[畿内]와 하리마[播磨]의 소송, 쿄우토, 나라[奈良], 후시미[伏見]의 각 봉행(奉行)를 통괄하던 직책. [본문으로]
  4. 노부나가 가신단 연구자인 타니구치 카츠히로[谷口 克広]씨는 '토키츠구 경기[言継卿記]'에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의 직할군에 속해 있다는 기록과 나카가와 키요히데의 4촌이라는 기록에 따라 킨키[近畿] 출신이 아닌가 - 라고 추론하고 있다. [본문으로]
  5. 근대 다도(茶道)를 집성시킨 인물. 또한 그 역시 1만석의 다이묘우[大名]였다. 3대 쇼우군 이에미츠[家光]의 다도사범. [본문으로]

 쿄우토[京都]의 산쥬우산켄 당[三十三間堂] 앞에 요우겐 원[養源院]이라는 절이 있다. 사람들은 요우겐 원 본당의 천장을 일컬어, ‘혈천정[血天井]’이라고 하다. 기분 나쁜 흑색으로 천장에 늘러 붙은 혈흔 – 그것이 장렬한 낙성을 보여준 후시미 성[伏見城]의 수비장수 토리이 모토타다[鳥居 元忠]와 그의 사졸들이 흘린 피였던 것이다.

 절의 역사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절은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측실 요도도노[淀殿]가 망부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하였지만 나중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각주:1] 요도도노의 동생이며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의 부인 수우겐인[崇源院][각주:2]이 재건한 것이라고 한다.[각주:3] 재건할 때 에도 막부[江戸幕府]는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이 세웠던 절을 재건시킬 수 없다고 하자, 후시미 성에서 전사한 토리이 모토타다 들의 혈흔이 새겨진 후시미 성의 마루바닥을 요우겐 원의 천장으로 하여 모토타다 들의 명복을 빈다는 명목으로 세웠다고 한다.[각주:4]

 세키가하라 결전[関ヶ原の戦い]의 전초전 격으로 치러지고 낙성된 후시미 공방전이야 말로 미카와 무사[三河武士]의 본질을 잘 알려주는 전투였다. 의리 있고 완고하며 주군을 위해서는 온 몸을 바친다. 그러한 미카와 무사의 전형을 후시미 성의 수비장수 토리이 모토타다가 농성전에서 보여준 것이다.

 토리이 모토타다는 부친 이가노카미 타다요시[伊賀守 忠吉][각주:5]의 아들로, 토쿠가와 가문[徳川家=당시엔 마츠다이라 가문[松平家]]을 대대로 섬겼다는 가문[普代]에서 태어났다. 모토다다는 13살 때부터 3살 연하인 이에야스[家康]를 근시(近侍)하였다.

 미카와 무사 모토타다의 충섬심에 대한 일화가 있다.
 어느 땐가 이에야스가 모토타다에게 몇 번 모토타다의 공적을 상찬하는 표창장[感状]을 주려고 하자 모토타다는,
 “표창장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려 다른 가문에 취직할 때 이력서로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토쿠가와 가문과 운명을 함께 하는 것 말고 다른 생각을 가진 적이 없기에 그러한 표창장은 저에겐 휴지쪼가리나 마찬가지입니다.”
 고 거절하며 받지 않았다고 한다.

 비슷한 이야기로, 히데요시[秀吉]가 모토타다에게 조정의 관직을 주력 하자 모토타다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뭘 하건 서투르기에 이군(二君)에게 충성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거기에 미카와에서 자란 시골뜨기라 역시 뭘 하건 투박하여 도저히 관위를 얻어 전하(=히데요시)의 앞에서 어떤 실수를 할 지 모르옵니다. 부디 관위에 관해서는 생각을 거두어 주시길.”
 하고 완고히 사퇴하며 받지 않았다고 한다. 즉 정중하면서도 히데요시에 대한 접근을 거부한 것이다.

 모토타다의 경우 이러한 의리 있는 모습, 완고함은 자신의 주군 이에야스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1580년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 측의 타카텐진 성[高天神城]을 공격하였을 때, 격전을 치른 뒤 모토타다의 부대는 험한 산길에 본진을 두게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보급부대가 오지 않았다. 병사들은 계속 된 격전에 피로와 굶주림으로 지쳐갔다. 그러던 중 모토타다에게 한 병사가 밥을 한 상 차려왔다. 부근의 민가를 돌아다니며 조달해 온 것이었다. 모토타다는 병사의 얼굴을 보고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있었으나 행여라도 싶어 보급대가 도착하였는지, 병사들은 밥을 먹었는지 물어보았다. 대답은 역시 아니라고 하였다. 모토타다는 말했다.
 “장수인 자가 병사들과 함께 고생도 하지 않고 무슨 전공을 얻을 수가 있겠는가? 지금 식량이 없다면 너희 병사들과 함께 굶어 죽는 것이 내가 바라는 바이다.”
 고 말하며 차려온 밥상을 눈 앞의 절벽으로 던져버렸다고 한다.

 1600년 5월 17일. 이에야스가 아이즈[会津]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토벌하기 위해 동쪽으로 가기 전날이었다. 중간에 후시미 성에 들른 이에야스는 이미 62세가 된 모토타다를 불러, 자신이 부재 중 후시미 성의 수비장수로 임명하였다.
 이미 이에야스는 자신이 동쪽으로 떠나면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이 거병할 것이라는 것을 간파하여 오히려 그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때 이 후시미 성은 사방에서 이시다 측에게 포위되어 고성(孤城)이 될 것이다. 그런 희생양을 부탁할 수 있는 인물이 있다면 토리이 모토타다 말고는 없다고 이에야스는 생각한 것이다.
 모토타다는 이에야스에게 수비장수에 임명되었을 때 자신이 이시다 측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라는 것을 있었다. 그리고 이에야스가,
 “수비장수의 역할은 힘들 것이네. 수비병도 많이 남기지 못하여 고생할 테이지만…”
 하고 말을 꺼내자,
 “지금은 아이즈로 출병하는 것이 가장 중대한 일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한 부대라도 많이 데려가시길”
 하고 답하며 모토타다와 함께 후시미 성의 수비역할을 맡게 된 나이토우 이에나가[内藤 家長], 마츠다이라 이에타다[松平 家忠]들도 아이즈로 데려가길 바란다며 반대로 이에야스에게 부탁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이에야스라도 이것까지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날 밤. 이에야스와 모토타다는 술을 마시며 어렸을 적 추억 등[각주:6]을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모토타다가,
 “만약 이시다의 거병 등이 있다면 오늘 밤이 이번 생의 마지막이옵니다.”
 고 인사를 하고 물러나는 모토타다의 뒷모습을 보며 이에야스는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고 한다.

 예상대로 한 달이 지나자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거병하여 곧바로 후시미 성 공격에 나섰다. 공성군 총세 4만에 수비하는 병사는 2000미만[각주:7]이었다. 누가 보아도 낙성은 시간의 문제였다. 그러나 성 수비병의 사기가 높아 10일간의 포위공격이 이어져도 여전히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이때 공격군 속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가 휘하의 코우가[甲賀] 출신자를 이용하여 그의 일족으로 성안에서 수비를 하고 있던 자에게 내응하도록 만들었다. 만약 응하지 않으면 고향에 있는 너의 부인이나 아들을 전부 죽이겠다고 협박한 것이다.

 그리하여 내응자가 지른 불로 성안에 불이 나 혼란에 빠지자 공격군이 단번에 성 안으로 진입했다. 세 번째 성관[三の丸]의 수비장인 마츠다이라 이에타다, 서측 성관[西の丸]의 수비장인 나이토우 이에나가도 연달아 전사하여 남은 것은 본성[本丸]의 토리이 모토타다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모토타다는 마지막까지 할복을 거부, 적병을 한 사람이라도 많이 죽이기 위해 계속 분전했다. 하지만 얼마 안가 62세의 노구에 피로가 쌓였다. 지친 모토타다는 나기나타[薙刀]를 지팡이 삼아 계단에 앉아있을 때 적 사이카 마고이치[雑賀 孫一][각주:8]가 그 목을 베었다고 한다.

도리이 모토타다[鳥居 元忠]
1539년 생. 토쿠가와[徳川]를 대대로 섬긴 집안 출신. 아네가와 전투[姉川の戦い]에서 공을 세웠고, 미카타가하라 전투[三方ヶ原の戦い] 때 발에 부상을 입어 절름발이가 되었다고 한다. 혼노우지의 변[本能寺の変] 뒤 카이[甲斐]에서 호우죠우 우지카츠[北条 氏勝][각주:9]의 부대를 격파[각주:10]하여 카이 군[甲斐郡] 안에 영지를 하사[각주:11]받았으며, 이에야스칸토우[関東]로 이봉(移封) 됨에 따라 시모우사[下総] 야하기[矢作] 4만석에 봉해졌다.[각주:12]

  1. 1619년. [본문으로]
  2. 2011년도 NHK 대하드라마 주인공 오고우[お江]. [본문으로]
  3. 1621년. [본문으로]
  4. 요우겐 원 뿐만이 아니라 후시미 성의 혈천정은 여러 곳에 남아 있다. [본문으로]
  5. 소설 ‘대망’에서, 인질시대의 이에야스가 조상의 성묘를 핑계로 오카자키에 잠깐 들렸을 때, 타다요시는 자신의 집 창고에 이마가와 가문 파견 무장들의 눈을 피해 쌀과 돈, 무구 등을 축적하여 보여주며 다시 이 성의 주군이 되었을 때 쓰라며 미카와 무사들의 와신상담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에 나오는 그 인물. [본문으로]
  6. 모토타다는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에 인질로 잡혀있을 때 함께 순푸[駿府]에 있었었다. 또한 이에야스는 같이 놀다 맘에 안 들어 모토타다를 발로 찼다는 일화도 있다. [본문으로]
  7. 처음엔 약 1800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이에야스의 정무소였던 오오사카 성[大坂城] 서측성곽[西の丸]를 지키던 사노우 츠나마사[佐野 綱正]와 휘하 600명이 모우리 가문[毛利家]에 쫓겨 후시미로 왔고, 이에야스의 오우미의 영지 코우가 군[甲賀郡]의 호족 - 이 들중 하나가 나중에 서군과 내통 - 들이 입성하여 후시미 성의 수비군은 총 2500~3000 사이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이 사이카 마고이치는 스즈키 시게토모[鈴木 重朝]로 알려져 있다. 나중에 미토 토쿠가와 가문[水戸徳川家]에 임관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9.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의 맹장 호우죠우 츠나시게[北条 綱成]의 손자. [본문으로]
  10. 호우죠우 1만에 대하여 미즈노 카츠나리[水野 勝成]와 함께 2000여를 이끌고 기습하여 승리. 이에야스는 “이 땅은 자네가 무용으로 취한 땅이니 앞으로도 이 땅을 다스려라” [본문으로]
  11. 사족으로 이때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에야스가 타케다[武田]의 명장 바바 노부후사[馬場 信房]의 딸을 찾아서 데려오라고 하자 모토타다는 찾을 수 없다며 보고했다. 나중에 어떤 이가 이에야스에게 노부후사의 딸이 있는 곳을 보고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모토타다가 데리고 있다고 하였다. 이에야스는 “모토타다 녀석 빈틈이 없구만”이라고 웃어 넘겼다고 한다. 모토타다는 그녀와의 사이에서 3남1녀를 낳았다. [본문으로]
  12. 토쿠가와 삼걸인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12만석,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10만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 10만석에 이어 오오쿠보 타다요[大久保 忠世]와 같은 4만석. [본문으로]

 야마우치 카즈토요[山内 一豊]라고 하면 부인의 내조를 받은 에피소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카즈토요가 아직 이에몬[猪右衛門]이라는 이름으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던 하급무사였을 때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아즈치[安土]의 성 아래에 동국(東國)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말(馬)을 팔러 온 사람이 있었다. 오다 가문의 무사들은 누구나가 그 말을 보고 경탄하였지만 그런 만큼 비쌌기에 아무도 사질 못하였다. 카즈토요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기는커녕 자신과 부인 둘의 생활조차 근근한 처지였다.
 카즈토요는 한숨을 쉬면서 집에 돌아와서는,
 “가난하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로군. 저렇게 멋진 말이 있다면 노부나가님의 열병식 때 멋진 모습을 보여 드릴 수 있을텐데…”
 하고 혼잣말을 하였다.
 이를 곁에서 부인 치요[千代]가 듣고
있었다. 치요는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이내 그 말의 가격이 황금 10냥[각주:1]라는 것을 카즈토요에게 듣고서는,
 “그렇다면 이 돈으로 그 말을 사십시오”
 라고 말하며 화장대 밑에서 황금 10냥를 꺼내 카즈토요에게 주었다.
 카즈토요는 놀랐다. 지금껏 빈곤했는데 이런 큰 돈이 어디서 생긴 것이냐고 묻자 치요는,
 “이 돈은 제가 시집올 때 아버님에게 ‘평소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 너의 남편에게 아주 큰일이 생겼을 때만 사용하거라’하면서 주신 돈입니다. 열병식이라면 주군 노부나가님을 시작으로 많은 분들의 눈에 띌 좋은 기회겠지요. 어서 그 명마를 사시옵소서”
 라고 말하였다. 카즈토요는 매우 기뻐하며 곧바로 그 말을 사러 갔다.
 
얼마 후 쿄우토[京都]에서 열병식이 성대히 치러졌다. 그리고 카즈토요의 말은 당연히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노부나가도 경탄을 하여[각주:2], 이를 계기로 카즈토요는 출세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고 한다.[각주:3]

 이 에피소드는 에도시대[江戸時代] 중기에 기술된 몇몇 사료에 실려 있기에 시대성에서 본다면 ‘좋은 부인의 모범’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의 여성을 이러한 유교론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치요는 센고쿠의 여성이 보여주는 억척스러움과 강인한 정신을 겸비한 인물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덧붙여 치요의 내조에 대해서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카즈토요가 결혼하였을 때 카즈토요는
오우미[近江] 카라쿠니[唐国]에 400석[각주:4]영지를 얻었지만 빈곤하여 집에 도마조차 없어 치요는 되를 뒤집어 대신 사용하였다.[각주:5]
 또한 당시 카즈토요가
히데요시[秀吉]에게 배속되어 히데요시에게 축성의 감독을 명령 받았지만, 가난하여 인부들의 야식도 대접하지 못하자 치요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팔아 쌀을 사 와서 카즈토요의 면목을 세웠다고 한다.

 카즈토요는 히데요시의 휘하로 각지를 전전하였지만 특별한 전공을 세우지는 못했다. 그러나 용맹심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1573년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 토벌전 때 패주하는 아사쿠라의 군세를 추격하여 오다 군[織田軍]이 에치젠과 오우미[近江]의 국경에 있는 토네자카[刀根坂]에 이르렀다. 이때 아사쿠라 군의 후군[殿]에 미타자키 칸에몬[三段崎 勘右衛門]이라는 활을 잘 쏘는 무장이 있어, 오다 군은 그 활 때문에 쉽사리 진격을 못하고 있었다. 거기에 카즈토요가 창을 꼬나쥐고 단숨에 돌격하였다.
 진에몬은 자랑하는 활을 쏘았다. 화살은 정확히 카즈토요의 볼을 꿰뚫어 어금니까지 파고들었다. 그러나 카즈토요는 그대로 진에몬에게 달려들어 뒤엉켰고 아군의 도움으로 진에몬을 죽였다.

 어쨌든 카즈토요는 히데요시 아래서 순조롭게 출세하여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때의 공으로 카케가와 성[掛川城] 5만석의 성주로 봉해졌다. 카즈토요가 카케가와에 봉해진 것은 칸토우[関東]에 봉해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감시하며 만일의 경우가 있을 때는 이에야스를 방비하려는 히데요시의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카즈토요는 자신이 배속되어 있던 칸파쿠[関白] 히데츠구[秀次]가 난행을 이유로 할복을 명령 받은 다음부터는, 오히려 이에야스의 수완에 장래를 맡기려는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즉 카즈토요는 히데츠구 사건의 전말을 보고 히데요시 정권의 종말을 느끼게 된 것이다.

 1600년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토벌을 위한 이에야스의 군세 속에 카즈토요의 모습이 있었다.
 7월 24일
시모츠케[下野] 오야마[小山]에 이르렀을 때, 카즈토요에게 오오사카[大坂]에 있는 치요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다. 거기에는 오오사카 측의 봉행[奉行]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와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의 이름으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거병과 자기들 편에 참가를 요청하는 편지 한 통, 거기에 카즈토요에게 직접 보낸 편지에는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다해 주십시오, 제 몸은 걱정하지 마십시오’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카즈토요는 이 두 통의 들어간 상자의 봉인을 뜯지 않은 채 이에야스에게 제출하였다.
 사실 카즈토요는 이것과는 따로 또 한 통의 밀서를 치요에게서 받았던 것이다. 그것은 전령인 타나카 마고로쿠[田中 孫六]의 삿갓에 숨겨져 있던 것으로 치요의 의견이 담겨 있었다. 카즈토요는 다 읽은 뒤 곧바로 불살랐지만, 추측하건대 편지가 담긴 상자의 봉인을 풀지 말고 그대로 이에야스에게 제출을 권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곧바로 ‘오야마의 군의[小山の軍議]’가 열려, 이미 넘어가버린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한 마디[각주:6]로 ‘미츠나리 타도’가 결정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카즈토요는 중대한 발언을 하였다.
 “상경하는 군세를 위해서 도중에 있는 제 카케가와 성을 군량과 함께 전부 바치겠습니다. 거기에 인질도 바쳐 저에게 두 마음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하겠습니다”
 라는 것이었다.[각주:7] 
 토우카이도우[東海道]에 성을 가지고 있던 무장들도 전부 이에 따랐다고 한다.

 이로 인해 카즈토요의 공은 단번에 여러 무장들 중 눈에 띄게 되었다. 세키가하라 결전 때 카즈토요는 그다지 전공이 없었음[각주:8] 에도 이에야스는,
 “카즈토요가 오야마에서 한 말이 세키가하라 승리의 초석이 되었다”
 며, 영지배분 때 일약 토사[土佐] 전부인 24만석[각주:9][각주:10]을 주었던 것이다.

야마우치 가즈토요[山内一豊]
1545년 오와리[尾張] 출생. 1560년 미노[美濃] 마키무라 성[牧村城]의 성주 마키무라 마사토모[牧村 政倫], 이어서 오우미[近江] 세타 성[勢多城]의 성주인 야마오카 카게타카[山岡 景隆]를 섬겼다고 한다. 그 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히데요시[秀吉]에게 배속. 1584년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 종군하여 오우미 나가하마[長浜] 5000석에 봉해지고 1년 후 2만석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카케가와[掛川] 5만석에서 토사[土佐] 24만석이 주어졌다. 1605년 61세로 죽었다.

  1. 당시 보통 말은 1냥, 좋은 말은 5냥 정도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2. 노부나가가 경탄한 것은 말 때문이 아니다. 노부나가는 카즈토요가 치요가 건네 준 돈으로 말을 산 것을 듣고 말하길 “동국 제일(東国第一)이라는 말을 상인이, 천하에 오다 가문만이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이리도 먼 내 영지까지 끌고 와서 팔려 했는데도 아무도 사지 않았다면 안타까운 일이며 이는 노부나가의 부끄러움이기도 하다. 그러던 때 오랫동안 낭인이었다는 카즈토요가 가난했음에도 말을 샀다. 무사의 마음가짐은 이래야 함이다.”고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수상한 점이 많다. 당시 열병식이 열린 시기는 서력 1581년. 당시 카즈토요는 기록에 따라 다르다고는 하나 츄우고쿠[中国] 등에서의 활약으로 최대 2700석의 신분이었다. 당시 황금 10냥으로 대략 쌀을 140석 정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치요하고 카즈토요가 과소비하지 않는 한 살 수 있었단 이야기. 무엇보다 1581년 열병식 때 히데요시와 히데요시 휘하의 무장들 즉 카즈토요는 츄우고쿠[中国] 공략에 바빠 참가를 아예 못하였고, 노부나가 역시 참가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본문으로]
  4. 1573년 아사쿠라 침공전[朝倉攻め] 때 에치젠[越前]의 호걸 미타자키 칸에몬[三段崎 勘右衛門]을 부상 당하면서도 쓰러뜨린 공적으로. [본문으로]
  5. 링크는 당시의 것이 아니다. 링크의 것은 1806년 후지나미 신사[藤並神社]에 봉납된 모조품.실물은 2차대전 때의 공습에 불에 타 없어졌다고 한다. 크기는 종횡17cm * 17cm에 높이 8cm라고 한다. [본문으로]
  6. 대충 '나이 어린 히데요리가 이에야스 토벌을 명령 할리 없다. 이는 미츠나리가 사사로이 거병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7.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의 번안보[藩翰譜]에 따르면, 이에야스에게 성과 쌀을 바치는 것은 원래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의 아들이며 당시 하마마츠 성[浜松城]의 성주였던 호리오 타다우지[堀尾 忠氏]가 친했던 카즈토요에게 이야기했던 것을 카즈토요가 타다우지가 말하기 전에 말한 것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아이디어 도용이라 할 수 있다. 여담으로 도용 당한 타다우지는 카즈토요에게 “평소 성실한 당신과는 어울리지 않는군요”라면서 웃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당시 카즈토요의 부대는 난구우 산[南宮山]에 진을 친 모리 가문[毛利家]에 대한 대비책으로 전선 후방에 놓여 있었다. 결국 모우리 가문은 움직이지 않았고 그랬기에 카즈토요의 부대도 피 흘리지 않았다. [본문으로]
  9. 실제로는 9만 8000석. 나중엔 1605년 카즈토요가 제출한 영지 목록에 20만 2600석으로 이후 이것이 막부 공인이 됨. [본문으로]
  10. 24만석이 나온 숫자는, ‘쵸우소카베 영지조사장부[長宗我部地検帳]’에 토사[土佐]의 농작면적이 2만 4000정(町)으로 나와있는데 단순히 1반(反=1/10정(町))을 1석(石)으로 하여 24만석이 속설로 된 것으로, 1705년 번(藩)이나 다이묘우[大名], 하타모토[旗本] 등을 다룬 백과사전격인 '무감(武鑑)'부터 이렇게 나왔다고 한다. [본문으로]

 ‘오케하자마 전기[桶狭間戦記]’ 최종화에서 타이겐 셋사이[太原 雪斎]가 어렸을 적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타이르는 장면이 있다. 말하길,
 “난세에서 살기 싫다면 개처럼이건 축생처럼이건 정점에 서서 난세를 끝내거라” 

 이는 아사쿠라[朝倉] 5대 100년의 번영을 쌓은 중흥조(中興祖) 아사쿠라 소우테키[朝倉 宗滴]의 [아사쿠라 소우테키 말씀집[朝倉宗滴話記]]에 나오는 말이 출처이다. 소우테키는 1477년생이며 셋사이는 1496년생. 기이하게도 아사쿠라 소우테키와 타이겐 셋사이는 같은 1555년에 죽는다. 그야말로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인물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소우테키는,  

개처럼이건 축생처럼이건 이기는 것이 최고다

 라고 하였다. 아사쿠라 가문[朝倉家]의 군사 책임자[軍奉行]로 생애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낸 무장의 말이다. 그것은 소빙하기로 인한 기근에서 살아남은 중세인(中世人)의 말이기에 무게감이 있다.

 소우테키는 간단하게 무자(武者)의 마음가짐을 말한 거라 여겨진다. 하지만 전투에 참가하는 무자란 기본적으로 소규모이긴 하여도 재지영주(在地領主)이다. 자립한 센고쿠의 마을=총촌(惣村)의 영주는 그 마을 내의 재판권과 징세권[徵稅權]을 가진다. 그 영주들은 “어떠한 방법을 쓰더라도 살아 남는다”를 규범으로 삼아 행동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다. 거기에는 조정(朝廷)도 막부(幕府)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대전제가 있다. 그 행간에서 “나에 대한 것은 내 자신이 결정한다”는 사상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내 몸은 내가 지킨다”는 냉철한 사상이다. 철포나 칼로 무장하는 것도 자력(自力). 어떤 영주에게 붙는가도 자력. 전투에 참가하는 것도 자력. 물길 싸움으로 물을 확보하는 것도 자력. 중세인은 모름지기 자력(自力)이었던 것이다. 이를 역사용어로 “자력구제(自力救濟)”라고 부른다. 글자 그대로 ‘자력’으로 ‘구제’한다는 사상이다.

 이 자력구제가 인정되는 아니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중세에는 전쟁이 필요했으며 전쟁이 분쟁해결의 수단이었다. 그리고 4권에서 언급했듯이 “약탈[乱取り]’이라는 ‘전쟁작법(戦争作法)”에 따라 전투 그 자체가 국가 운영의 한 수단으로 변해간다.

 이 자력구제를 확실히 명문화(明文化)하여 법제도로 확립시킨 것이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이지 않을까? [이마가와 법률 추가[今川仮名目録追加]]에서

스스로의 역량을 가지고 내 영국[国]에 법도를 반포
(自らの力量を以って、国の法度を申しつけ)

함으로써,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이 ‘자력’으로 재판권, 징세권을 가진다고 선언하였다. 즉 ‘자력구제’를 ‘영국[国]’ 단위로 확대시킨 것이다. 그렇게 세력을 확대하여 스루가[駿河], 토오토우미[遠江], 미카와[三河]의 태수(太守)가 되어, 마침내 오와리[尾張]에 침공하지만 도중에 쓰러진다. 그러나 ‘영국을 자력구제’한다는 사상은 [코우슈우 법도[甲州法度之次第]] 등 각 가문의 분국법(分国法)[각주:1]에 영향을 끼쳐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의 근본사상이 되었다.

 오다 정권[織田政権]이 어떠한 천하통일을 구상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정권을 이은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 토쿠가와 정권[徳川政権]을 보면 ‘자력구제’를 어떻게 하면 배제하느냐가 정치과제가 되어 간다.
 토요토미 정권은 ‘태합검지[太閤検地]’로 석고(石高)를 명확히 하고, ‘칼사냥[刀狩り]’으로 무장을 해제시켰으며, ‘다툼 정지령'[喧嘩停止例]’으로 총촌(惣村)의 전투를 금지하였고, ‘총무사령(惣無事令)’으로 다이묘우[大名]’간의 다툼을 중재하였다. 이는 전부 ‘자력구제’의 부정이었다. 자력구제를 뼛속까지 이해하며 하극상(下剋上) 최대의 구현자인
히데요시[秀吉]가 이런 것들을 전부 규제하게 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까.
 그리고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가 들어서게 되자 전일본의 재판권, 경찰권을 막부가 장악하게 되어 중세의 종말, 근세의 시작을 보게 된다. 유일하게 신고제에 따른 ‘복수[仇討]’만이 허용되게 되지만, 이는 더 이상 ‘자력구제’라고 볼 수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어렸을 적 셋사이와 요시모토에게 교육받은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는 살아가며 그야말로 ‘개처럼이건 축생처럼이건’ 끈질기게 살아 남았다. 그리고 강대한 무력을 배경으로 ‘스스로의 역량을 가지고 영국[国]에 법령을 반포’, 에도 막부[江戸幕府]를 열어 난세에 종말을 고한 것이다.

키지마 유우이치로우[木島 雄一郎]

  1.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가 자신의 영지에 반포한 법.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