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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케나카한베에'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9.05.11 타케나카 한베에(竹中 半兵衛) – 히데요시를 도운 군사(軍師) (7)
  2. 2008.05.04 대화대납언(大和大納言) -3- (10)
  3. 2006.08.18 키타바타케 토모노리 (2)
  4. 2006.04.25 타케나카 시게하루 (1)

 사서는 타케나카 한베에(竹中 半兵衛)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모략 있는 인물이었지만 얼핏 보기에는 여성을 보는 듯 했다]
 흰 피부에 나서지 않는 성격이었던 듯하다.
 전투에 임해서도 위압감을 풍기는 듯한 인물이 아니었다. 말가죽으로 된 갑옷을 입고 목면으로 된 겉옷(
羽織)를 걸쳤으며 투구의 장식이 이치노타니()[각주:1]라는 평범한 것이었다.

 한베에에게는 기묘한 버릇이 있었다.
 평소에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다리를 자주 움직였으며 추울 때는 손을 파리처럼 비벼댔다. 자신의 주군인 히데요시(
秀吉)[각주:2]의 앞이라 하더라도 다리를 정신 사납게 떨거나 바꾸었다. 매우 의아히 여긴 어느 사람이 그 이유를 물었다. 한베에의 대답은 이러했다.
 "이것은 단순한 버릇이 아니야. 갑작스런 사태가 일어났을 때 막상 다리가 저리거나 손이 얼어서 움직이지 못하면 어처구니가 없잖아? 조금 버릇없이 보일지는 몰라도 급작스런 때를 의해서 이러고 있는 것이지"
 체면을 신경 쓰지 않는 성격임을 알 수 있는 이야기이다.

 한베에는 센고쿠(戦国) 굴지의 천재군략가로서 유명하다. 그 병법의 묘를 완벽한 작품으로써 살려 세상에 이름을 날린 것이 미노(美濃) 이나바야바 성(稲葉山城) 쿠데타이다.
 1564년 한베에는 21살. 도우산(
道三)의 시대부터 사이토우 가문(斉藤家)에게 보호를 받고 있었지만, 이 당시의 사이토우 가문 당주는 도우산의 손자 타츠오키(竜興)였다. 암우하며 주색에 허우적대는 인망이 없는 당주였다.
 한베에의 장인인 안도우 이가노카미(
安藤 伊賀守)[각주:3]가 행실을 올바로 하라고 충언을 하자 타츠오키는 도리어 화를 내며 근신 처분을 내렸다. 그러자 타츠오키의 측근들은 안도우 이가노카미의 사위인 한베에도 무시하기 시작하여 어느 날 술 마시고 있던 요시오키의 총신()은 망루에서 등성하고 있던 한베에에게 오줌을 쌌다. 이때 한베에는 얼굴색 하나 안 바뀌고 그대로 그 자리를 떠났지만 마음속으로는 주군 타츠오키를 시작으로 한 이나바야마 성 안에 있는 자들의 콧대를 꺾어 놓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한베에는 타츠오키의 시동인 동생 큐우사쿠(久作)[각주:4]에게 꾀병을 부리라고 하여 그 간병을 핑계로 의약품을 실은 수레를 성 안에 들여보냈다. 그 안에는 무구를 숨겨 놓았다. 이렇게 한베에와 그 부하 17명은 성 안 깊숙한 곳에 있는 큐우사쿠의 방에 들어가 거기서 날이 저무는 것을 기다렸다. 곧이어 밤이 되자 한베에 일당은 재빨리 전투준비를 마치고 그 중 한 명이 성 안에 위급을 알리는 북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북을 쳤다. 갑작스런 북소리에 성 안 모두가 당황했다. 그 순간 숨어있던 한베에의 부하들이 숙직하는 무사들을 습격했다.
 처음 약속한대로 다시 북을 치자 한베에의 장인인 안도우 이가노카미가 수하 천여 명이 이끌고 단번에 성안으로 들어왔다. 당황한 타츠오키는 여성들과 함께 서둘러 도망쳤다.

 한베에는 뛰어난 지략으로 순식간에 이나바야마 성을 손에 넣은 것이다. 그러나 원래부터 빼앗을 생각은 없었기에 그 뒤 순순히 성을 타츠오키에게 건넸다.[각주:5] 그리고 자신은 모반을 일으킨 사람이라며 거성인 보다이야마 성(菩提山城)를 동생 큐우사쿠에게 물려주고는 오우미(近江) 이부키야마(伊吹山) 산기슭에 은거해버렸다. 거기서 세상과 연을 끊고 독서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한베에가 다시 전란의 세상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3년 후였다. 1567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공격받은 사이토우 타츠오키가 이세(伊勢)로 도망쳐 미노(美濃)는 노부나가의 것이 되었다. 한베에도 장인 이가노카미의 주선으로 오다 가문을 섬겼고 다음 해인 1568년에는 키노시타 토우키치로우(木下 藤吉郎)[각주:6]에게 파견되어 이후 히데요시의 참모로서 그 지능을 한껏 발휘하게 된다.

 1570년 오다 노부나가는 아자이(浅井)-아사쿠라(朝倉) 연합군을 아네가와(姉川) 전투에서 물리쳤고 그와 동시에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의 거성 오다니 성(小谷城)의 지성(枝城)인 요코야마 성(横山城)를 점거하여 히데요시에게 수비를 명했다.
 다음 해인 1571년.
 아자이 나가마사는 이 요코야마 성을 탈취하기 위해서 히데요시가 없는 틈을 타 7000의 군사를 이끌고 맹공을 가했다. 한베에가 수성의 지휘를 맡았다. 한베에는 일부러 성안 병사가 적게 보이도록 만든 뒤 적이 깔보고 성에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기다려 일제히 사격했다. 아자이 군의 기세가 죽어 물러나면 쫓는 일 없이 제자리를 지켰고 또 공격해 오면 총과 활을 쏘는 전법을 거듭했다.
 곧이어 해가 저물자 아자이 군은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한베에가 기다리던 바였다. 미리 성 밖에 수백 명의 저격병을 숨겨 놓았던 것이다. 그들의 총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성에서도 추격대를 내보냈다. 협공에 아자이 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오다니 성으로 도망쳤다. 한베에는 깊이 쫓는 일 없이 성으로 돌아왔다. 곧이어 히데요시가 소식을 듣고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와 아자이 나가마사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이 즈음의 한베에에 대해서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날 군대 이야기 하는 자리에서 한베에는 아들인 사쿄우(
左京)[각주:7]와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사쿄우가 잠깐 자리를 떴다. 화장실에 갔다 온 것이다. 한베에는 그런 자세를 못마땅해 하며 화를 냈다.
 "소변이 마려우면 앉아서 싸라. 무도(
武道)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바지에 오줌을 쌌다고 하면 칭찬을 들을지언정 누가 비웃겠느냐!?"

 1575년 한베에는 나가시노 전투(長篠い)에 참전하였고 그 후 히데요시가 츄우고쿠() 정벌의 사령관에 임명되자 그의 참모로 종군하였다. 특히 히데요시가 벳쇼 나가하루(別所 長治)의 하리마(播磨) 미키 성(三木城)을 [말려 죽이기(干殺し) 전법]으로 나가게 만든 것은 한베에의 헌책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결과를 보기도 전에 한베에는 죽었다. 결핵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은 병간호를 위해 쿄우토(京都)에 갔었지만 전황이 걱정된다며[각주:8] 다시 하리마(播磨)로 돌아와 거기서 결국 돌아오지 않는 길을 떠났다.

[다케나카 한베에(竹中 半兵衛)]
1544년 미노(
美濃) 이케다 군(池田郡)[각주:9]에서 태어났다. 부친 시게모토(重元)가 죽어 10살의 나이[각주:10]보다이야마 성(菩提山城) 성주가 된다. 사이토우 도우산(斉藤 道三), 요시타츠(義竜), 타츠오키(竜興)의 삼대를 섬겼지만 미노(美濃)가 노부나가(信長)에게 넘어가자 오다 가문(織田家)을 섬기다 1579년 하리마(播磨) 미키 성(三木城) 포위 중 병으로 죽었다. 36세.

  1. 겐페이(源平)가 싸우던 시대에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 義経)가 깍아 세운 듯한 절벽을 타고 내려와 이치노타니(一ノ谷)에 있는 헤이케 군을 물리친 것에서 본받고자 만든 투구의 장식. 임전무퇴를 상징하는 것으로 결코 평범한 것은 아니었다. 보통 링크를 누르면 볼 수 있는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의 투구가 유명한데 이것이 원래 타케나카 한베에의 투구였다고 한다. 죽을 때 유품분배로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에게 전해졌고 이것이 임진왜란 때 조선에 함께 있던 쿠로다 나가마사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2. 히데요시는 주군이 아니다. 한베에의 주군은 어디까지나 노부나가(信長)로, 히데요시에게는 파견을 나가있었음에 지나지 않는다. [본문으로]
  3. 미노 삼인중(美濃三人衆)의 하나인 안도우 모리나리(安藤 守就) [본문으로]
  4. 타케나카 시게노리(竹中 重矩). 아네가와 전투(姉川の戦い)에서 노부나가 군 행세를 하며 본진으로 들어와 노부나가의 목숨을 노리던 엔도우 나오츠네(遠藤 直経)를 죽인 인물. [본문으로]
  5. 실제로는 약 1년 가까이 계속 점령하며 이제 미노는 내꺼임~ 이라는 푯말과 세금고지서를 날리는 식으로 노력했지만 다른 호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성을 내놓고 본거지로 퇴거. [본문으로]
  6. 초창기 토요토미노 히데요시의 이름 [본문으로]
  7. 타케나카 시게카도(竹中 重門). 후에 '토요카가미[豊鏡]'라는 히데요시 일대기를 저술. [본문으로]
  8. 무사는 전쟁터에서 죽어야 한다며 돌아왔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9. 현재는 이비군(揖斐郡)에 통합되어 있다. [본문으로]
  10. 16세~20세까지 여러 설이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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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산들바람 2009.05.12 18: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케나카 한베에는 왜 없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올리신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나라훔친 이야기를 쓴 시바료타로는 역사적으로는 히데요시가 스노마타성을 만든 이후에 노부나가의 명을 받아 등용하러 갔는데 6번실패하고 7번째에 오다노부나가의 가신이 아니라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는 조건으로 승락한 것이다 라고 하더군요. 안도 이가노카미도 한베에가 등용되고 나서 등용되었지만 1년 후에 반란을 획책하다 발각되어 도망가서 영지가 몰수되었다고 하고요. 이 내용은 본문의 내용과 엇갈리는 듯 하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5.12 23: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책에 실린 차례대로 하느라 늦어졌습니다. ^^

      소설 상의 이야기다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한베에와 히데요시가 마치 제갈공명과 유비와 같이 쓰여진 것은 그의 아들인 시게카도(重門) - 본문에서는 사쿄우(左京)로 나오는 - 의 토요카가미(豊鑑)의 기술로, 정사로 여겨지는 신장공기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내용입니다.(신장공기에서는 오히려 타케나카 한베에보다 그의 동생(본문에서 꾀병을 부려 이나바야마 탈취를 도운)인 큐우사쿠(久作)가 엔도우(遠藤)를 죽인 이야기가 먼저 나올 정도입죠.

      안도우 이가노카미는 1580년에 타케다 가문과 내통이라는 혐의를 뒤집어 쓰기 전까지 계속 오다 가문에 속해 있었습니다. 1570년(이나바야마 성이 노부나가에게 함락되는 것은 1567년)의 아네가와 전투(姉川の戦い)에서도 참가했습니다.

      신장공기에서 한베에의 이름이 처음으로 나오는 것은 히데요시에게 하리마와 타지마를 맡긴다는 1577년의 기사에서 나올 정도입니다.

      덧붙여...스노마타 성도 히데요시가 축성한 것이 아니라는 말도 많으니까요(있던 성을 수축했다는 설이 강합니다)

      일본에는 시바사관(司馬史觀)...이라는 단어가 있을 정도입죠. 역사가들은 강연할 때마다 시바 선생님의 글과 다르다는 말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할 정도라고 하네요.

  2. 산들바람 2009.05.13 08: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타 규이치가 쓴 신장공기가 삼국지로 따지면 진수의 정사에 해당되나 봅니다. 주로 접하는 책이 역사소설이다보니 작가들이 중간중간 달아놓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언급해 놓은 것 외에는 객관적이라고 생각되는 근거를 찾기가 쉽지가 않아 확인도 어려워 보통 비판없이 받아들이게 되더군요. 신장 공기는 언제 한 번 읽어봤으면 좋겠습니다.

    답변 감사드립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5.14 10: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제가 말을 잘못했네요. 정사..라고 할 정도로 거창하진 않고 신빙성이 높은 자료입니다.

      본전과 열전...식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측근이라고 하던 사람이 노부나가에 관해서 쓴 글인데, 어리석을 정도로 솔직하다는 소릴 들을 정도에 다른 기록들과 비교해서도 정확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생각없이 단어를 선택해 혼란스럽게 한 점 죄송합니다.

  3. dameh 2009.05.13 13: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봤습니다. 그 쿠로다 나가마사의 태양전지판 투구의 정체가 궁금했었는데 이 글덕분에 어느정도 의문이 풀린것같습니다(심심한 감사를..)

    여담이지만 역시 정사나 야사나 통치와는 별로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었군요(;;역시 미노는 호족이 참..)

  4. t 2012.06.13 19: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베는 멋진 인물이군요 ^^

.

 

 선천적인 인격자였을지도 모른다.

 코이치로우[小一郎]히데요시의 부름을 받은 것은, 형제의 첫 대면을 치른지 3년 후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織田家]에서 낮은 신분인 채로 스노마타[墨俣]의 요새() 수비에 임명 받았을 즈음이었다. 히데요시는 코이치로우뿐만 아니라 그 어미, 누나와 매형, 그리고 여동생인 아사히[朝日]도 요새로 불러 크게 대접하였다. 이 때 오나카[]는 처음으로 히데요시의 처인 네네[々]와도 대면하였고, 네네의 양갓집 동생인 아사노 야헤에 나가마사[野 弥兵衛 長政]와도 면식을 텄다. 말하자면 히데요시의 가족과 네네의 친정 쪽의 사람들과의 대면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그 사람과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접대하였고 곧이어 술자리가 끝나자,

 

 코이치로우는 이 요새에 남아라

 

 라고 이 아비 다른 동생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나카는 될 수 있으면 막고 싶었지만 코이치로우는 이미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코이치로우는 이날부터 무사가 되었다. 히데요시는 이 동생을 별실로 불렀고 이어서 히데요시에게 있어서 처남에 해당하는 아사노 나가마사도 불러 오게 한 후,

 

 둘이서 나를 도와라

 

 고 말했다. 옛날부터 무가(武家) 관습으로 가문의 당주가 대장이 되며, 그 동생이나 숙부가 곁에서 수족과 같은 부장(副將)이 되어 그것을 보좌하였. 말하자면 가문은 일족의 혈맹에 의해 성립되어 가는 이상 히데요시도 그런 형식을 취하고 싶었다.

 

 코이치로우는 언젠가는 내 대리인(名代)이 되어야 할 때도 올 것이다. 뭐든 잘 익혀두도록

 

 라고 말하며 이 즈음 이미 스노마타 성에 와서 히데요시의 휘하가 되어 있던 미노[美濃] 출신의 군사(軍師) 타케나카 한베에[竹中 半兵衛]에게 코이치로우의 교육을 부탁했다. 한베에는 스노마타로 쳐들어 오는 적과 싸우는 실전 속에서 아이에게 젓가락질을 가르쳐 주듯이 전투의 밀고 당김을 알려 주고 적 상태를 보는 법, 명령을 내리는 법, 사졸들을 돌보는 방법 등 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가르쳤다.


 코이치로우는 좋은 학생이었다. 언제나 조신한 태도로 그것을 들었고 전투 속에서 보고 배웠다. 실제로 지휘시켜 보자, 어떤 것이든 과하지 않고 부족함 없이 한베에가 가르친 대로 행했다. 그 이상의 재능은 없었지만, 성을 지키는 것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는 평가를 한베에는 가졌다.

 이것도 하나의 기량일 것이다

 고 한베에는 생각하였다. 한베에가 보건대, 독창성이 없기에 어떤 일에건 익숙해지는 것이 빨랐다. 성격이 이의(異意)를 내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지시한대로의 것을 한다. 더구나 그 행함이 견실했다. 마치 성을 지키기 위해서 태어난 듯한 성격이었다.

 

 실제로 히데요시는 오다 군[織田]기후 성[岐阜城]을 공격할 때, 이 동생에게 진()을 지키게 하였다. 히데요시는 이 전투에서 하치스카 당[蜂須賀黨]의 경병(輕兵) 소수만을 이끌고 기후 성 뒷산에서 샛길을 타고 성 안으로 잠입하였다. 출발에 앞서 코이치로우에게 미리,

 

 내가 이끄는 부대는 성 안으로 은밀히 잠입하여 안에서부터 성문의 빗장을 풀겠다. 그 때 신호로 장대에 매단 표주박을 높게 쳐들 테니까 그걸 보면 곧바로 밖에서 문을 열고 성안으로 들어와 나와 합류하거라

 

 고 사전에 계략을 설명해 두었다. 만약 이 방법이 어긋났다면 히데요시는 성안에서 자멸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코이치로우는 타이밍에 맞추어 지시한대로의 것을 멋지게 성공하였다.

 

 좋은 동생분을 두셨군요

 

 전투가 끝난 뒤 한베에가 일부러 축복할 정도였다.

 한베에의 지론으로는 혈족군단에 있어서 뛰어난 인물은 형 하나로 족했고, 동생이라는 것은 형보다 능력이 뛰어나서는 안 되었다. 뛰어나면 사졸은 자연히 동생에게 달라붙어 가문 통제가 흐트러질 것이다. 또한 동생은 욕심이 없어야 한다 는 것이 한베에의 생각이었다. 욕심이 많으면 형의 부하인 다른 부장(副將)들과 공명(功名)을 다투기 때문에 가문이 흐트러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 두 가지 점에서 코이치로우라는 젊은이는 거기에 딱 알맞을 정도로정도가 좋았다.

 

 스노마타 즈음부터 십 수년이 흘러,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에게 명령 받아 츄우고쿠[国]로 향하였을 때, 코이치로우는 이 군단의 선봉장으로써 전쟁터에 있었고 하리마[播磨]에서 빗츄우[備中]에 걸쳐 각지를 전전하며 무공을 세웠다. 그가 지휘하는 모습은 오다 군단의 다른 무장들과 비교해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기에 무장들 사이에서의 평판도 크게 높아졌다.

 

 이 시기.

 타케나카 한베에는 현지에서 지병(持病)이 재발하여 자리에 누웠다. 코이치로우가 병문안을 하러 왔을 때에 한베에의 용태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그는 시중드는 소년에게 등을 받치게 해서는 몸을 일으켜,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고 스노마타 때부터 순종적인 제자를 위해서 이미 가냘퍼진 숨을 쥐어 짰다.

 

 몸의 안전을 꾀하시길. 병법에서 궁극(窮極)의 극의(極意)…. 그것입니다.”

 

 한베에의 걱정은 코이치로우의 평판이 크게 높아지고 있다는 것에 있었다. 오르면 자연히 마음도 거만해 진다. 오만해 져서는 다른 부장의 원한을 사게 되어 참언(讒言)을 치쿠젠[筑前](=히데요시)에게 할 수도 있다. 공을 세우면 그것을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시길. 다른 무장들은 공명을 세워야 출세를 할 수 있지만 당신은 아무리 공이 없다고 하여도 치쿠젠님의 동생분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해 오셨다

 

 고 한베에는 새삼 코이치로우의 이 십 수년간의 발자취를 칭찬하였다. 전혀 명성을 떨치려고 하지 않았고 공은 부하에게 돌렸으며, 히데요시의 대리인[名代]이 되어도 히데요시만을 세우고 자신의 존재를 자랑하는 일이 없었다.

 

 잘 해오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어떨지 모른다. 특히 이 하리마[播磨] 부근에서의 코이치로우의 뛰어난 활약과 평판은 그의 인격을 바꾸어 버릴지도 몰라, 한베에는 그것을 두려워했다.

 

 그림자처럼 되시기를……”

 

 하고 마지막으로 말했다. 히데요시의 그림자가 되어 그것만을 만족하고 코이치로우 히데나가라는 존재를 버리라는 것이었다. 앞날을 생각하면 그걸 말고 당신께서 이 세상에 있으실 장소가 없다. 병법의 극의는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숨기는 것에 있다. 아시겠습니까? 하고 한베에는 확실히 해 두었다.

 코이치로우는 역시 이론(異論)을 말하지 않고 순순히 끄덕이며,

 

 좋은 말씀 감사 드립니다

 

 고 눈물을 담아 감사를 전했다. 이로부터 25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한베에는 숨을 거두었다. 자연히 위에 있는 것은 한베에가 이 세상에서 말한 최후의 말이 되었다.

 

 이 히데요시의 츄우고쿠[国] 공략이 한창일 때,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었다. 히데요시는 쿄우[京]를 점령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치기 위해서 빗츄우[備中]에서 군을 되돌려 우선 히메지 성[城]으로 돌아왔다.

 이 시기,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에게 북부 오우미[近江] 세 개의 군() 외에 하리마[播磨]도 하사 받아서는 이 히메지 성을 거성(居城)으로 하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빗 속의 급행군을 마치고 입성해서는 곧바로 욕탕(浴湯)에 들어가, 욕실(浴室)에서 온갖 군령을 내렸다. 히데요시는 이 일전에 모든 것을 걸었다는 듯이 성 안에 있던 금은이나 쌀을 모두 사졸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명령한 뒤,

 

 성을 지키는 것은 코이치로우가 해라~!”

 

 고 말했다. 코이치로우는 욕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그것을 들었다.

 이것은 치욕이다

 라고 생각하여, 한베에가 죽은 뒤 히데요시의 모신(謀臣)의 자리에 앉아 있는 쿠로다 칸베에[田 官兵衛=죠스이[如水]]에게 따지며, 이 너무도 불명예스러운 자리 배치의 변경을 원했다.

 하고자 하는 주장은 당연할 것이다. 형인 히데요시가 아케치와의 일전에서 패하기라도 한다면 이 히메지 성은 적의 일격에 무너져 버릴 것이. 성 안에는 500명의 수비병밖에 없으며 더구나 농성에 필요한 병량(兵糧)은 나누어 주어서 없고, 또한 그 수비 임무라는 것이 하리마[播磨]의 여러 호족들에게 받은 인질의 감시와 히데요시의 첩인 통칭 히메지도노[路殿][각주:1]라고 불리는 여인의 보호 정도였다. 이 천하존망의 시기에 남자로서 명예로운 자리가 아니다. 하지만 쿠로다 칸베에는 코이치로우의 소매를 끌고서는 떨어진 곳으로 데리고 가서,

 

 이건 생각지도 못했던 말씀을 하시는군요

 

 라고 말했다. 칸베에가 말하기를 이번 일전은 천하를 판가름하는 싸움이 될 것이다. 히데요시 휘하에 있는 무장들의 8할은 오다 가문에서 파견 나온 장수들로, 이번 일전에서 히데요시를 앞세워 자기 가운(家運)을 트이게 하기 위해서 안달들이 나있다. 치쿠젠님(=히데요시)의 운은 이런 그들의 활약으로 인해 트이는 것이기에, 지금 당장은 육친이시니 참으시길. 그들과 공을 다투면 안됩니다. 공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시라는 것이었다. 평소의 코이치로우였다면 온후한 얼굴로 끄덕이며 이 도리에 따랐을 것이지만, 시기가 시기였던 만큼 이 온후한 남자라도 감정을 주체 못하고,

 

 나는 언제나 성이나 지켜야 한다. 형이 모든 것을 거는 이 때만큼은 이 코이치로우도 야마시로[山城]의 전쟁터에서 죽고 싶다!”

 

 고 큰소리로 외쳤다. 목소리만이 히데요시와 닮아 컸다. 그 목소리가 욕실에 있던 히데요시의 귀에도 달했다.


 코이치로우!!”

 

 하고 역시 큰소리로 외치며,

 

 다 들린다! 뭐 그런 생각이 다 있느냐! 니가 그런 말을 한다면 나가하마[長浜]는 어쩌란 말이냐? 나가하마는 지금 버린 성이나 마찬가지다. 지금쯤 어머니도 내 마누라도 시뻘건 불길 속에서 타 죽고 있을지도 모른단 말이다!

 

 고 소리질렀다.

 오우미 나가하마 성은 히데요시의 본성(本城)으로, 거기에 오나카도 네네도 살고 있었다. 적은 당연히 이 성을 공격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도 병가상사(兵家常事). 어머니도 네네도 아녀자지만 성벽 뒤에 몸을 기대고 지키고 있음에 틀림 없다. 그래도 니는 히메지의 수비가 불만인가? 아니면 히메지에서 죽을테냐?”

 

 히데요시도 역시 흥분했는지 말을 꼬여가며 되지도 않는 논리를 내세우며 무조건 호통만 치고 있을 뿐이다. 코이치로우는 이미 그 호통소리에 압도되어 풀이 죽었다.

 세상에 동생이라는 자리만큼 처량한 것이 없다

 고도 생각하였다. 형인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는 세상에 동생만큼 편리한 것도 없을 것이다. 이 정도로 매도(罵倒)당하면 - 다른 무장이라면 원한을 가지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어디론가 갈지도 모르지만, 동생이라면 그런 점에서 안심할 수 있어 좋았다. 지금도 코이치로우는 뚱뚱한 몸을 움츠리고서는 둥그런 얼굴도 들지 않고 그냥 떨고만 있었다.

 

 알겠느냐?”

 

 하고 히데요시가 못을 박자 코이치로우는 허리를 굽히며,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히데요시는 히메지를 출발, 곧이어 야마시로[山城] 야마자키(山崎)에서 아케치 군[明智軍]을 물리치고 오다 정권의 후계자로써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그 후 코이치로우는 히데요시의 천하 패권을 건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い][각주:2]에도 참가하였고, 코마키[小牧] 전투[각주:3]에도 종군하였다. 또한 킨키[近畿]소탕전(掃蕩戰)이라고 부를 수 있는 키슈우 정벌[紀州征伐]에 참가하여 평정 후, 히데요시에게서,

 

 코이치로우는 키슈우를 다스려라

 

 는 명령을 받았다. 키슈우는 노부나가 시대부터 골치를 썩여왔던 곳으로 지역 무사들의 기풍이 거칠고 독립심이 강하여, 센고쿠[戦国] 100여년 동안 그들은 연합하여 키이[紀伊]를 합의에 의해 운영하여, 한 번도 통일 다이묘우[大名]를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거기에 '잇코우 종[一向宗][각주:4]의 기반이 되는 땅으로 영민(領民)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만을 절대적인 존재로 하여 지상(地上)에 있는 현세의 교주(敎主)조차 존중하지 않는 풍토가 있었고, 또한 산에는 산적이 많았으며 해안의 항구는 대부분이 해적의 소굴이 되어 있었다. 히데요시가 보건대,

 키이[紀伊]는 코이치로우와 같은 사람이 아니면 다스려지지 않는다

 라는 것이었다. 그들을 쓰다듬으며 가지고 있는 불평들을 끈기 있게 잘 들어주고, 계속해서 불공평을 없앤다는 점에서는, 많은 장수들이 있다고 하여도 코이치로우만이 할 수 있었다.

 

 이 동생은 그 기대에 응했다. 1585 3월 봉토(封土)를 받자마자 코사이가[賀][和歌山城]을 쌓아 신영주(新領主)의 위용을 나타내는 한편, 부하의 잘못에는 벌을 내려 법제를 철저히 하고, 민치에 힘을 썼기에 그토록 다스리기 어렵다고들 하던 이 지역의 호족들이 이상할 정도로 잘 따라 키노카와[川] 강 주변은 물론이거니와, 히데나가의 영지(領地)북으로는 이즈미[和泉]에서 남으로는 쿠마노[熊野]에 있는 70여 만석의 산야(山野)가 아주 평온해 졌다.


 코이치로우에게는 기묘한 품성과 재능이 있구나

 하고 그것을 명령했던 히데요시가 제일 먼저 놀랐다. 히데요시가 보건대 코이치로우는 천성의 조정가(調整家)이며 민정가(民政家)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히데요시를 또 기쁘게 한 것은 좆병진들이 많은 히데요시의 혈연 중에서도 이 코이치로우만은 기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걸출하다는 것이었다. 장래에 그 기량과 인격을 보건대 필시 히데요시 정권의 (柱石)이 되어 줄 것이다.

이 글은 소설입니다.


  1.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카네[織田 信包]의 딸인 히메지도노[姫路殿]가 히데요시의 측실이 된 것은 노부나가가 죽은 다음의 일로(내가 알기로는 노부나가의 셋째 노부타카[信孝]와 히데요시가 싸울 즈음 노부카네가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받쳤다는 설이다). 아무리 히데요시가 유력 무장이라도 노부나가의 조카를 측실로 두지는 못했을 것이다. [본문으로]
  2. 오다 가문 서열 1위인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와의 싸움. [본문으로]
  3. 보통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戦い]라고 한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오와리 근방에서 싸운 전투. [본문으로]
  4. 정확히 설명하면 복잡하니 여기서는 혼간지[本願寺] 세력을 뜻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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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5.04 14: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케나카 시게하루가 하시바 히데나가에게 하는 말은 마치 자신이 그래 온 것 같이 해 달라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자신의 한을 그대로 물려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사노 나가마사라. 그러고 보니 얘도 하시바 히데요시의 육친으로써 히데나가보다도 더 숨어서 일하는 사람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히데요시의 일문중 중에서 이 히데나가랑 나가마사 빼면 쓸 만한 사람이 없긴 없네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5.04 14: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 보니까 나가하마 성을 공격한 것이 다케다 모토아키랑 교고쿠 다카쓰구군요. 좀 중량 있는 무장을 여기다 배치했으면 어땠을까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5.04 15: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읽었는데 마지막 부분에서 김이 약간 빠졌습니다. ^^a

    신사본론 님의 답글을 읽고 아사노 나가마사는 히데요시와 어떤 친척 관계인지 궁금해져서 검색을 해 봤는데, 위키의 친족표를 보니 데릴사위와 양녀 관계가 섞여서 뭔가 복잡하더군요. --a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04 19: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사본론님//나가마사 아들 있잖습니까~
    (히데츠구도 나름 괜찮았다~ 는 글들이 보이더군요... 저도 실은 그런 쪽입니다 ^^; )
    나가하마가 오우미다 보니 거기의 슈고였던 쿄우고쿠 씨는 제법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만 ^^
    뭐 결과가 그렇다 보니 뭐라고 말하기도 뭐하지만 말입니다.

    맹꽁서당님//에... 끝에 요약글 말씀이십니까?
    달까 말까 하다가... 일본에서도 시바 선생의 글을 역사로 여기는 분들이 많다고 하다 보니 달게 되었습니다.(^^ 다음 부터 비슷한 경우가 생길시에는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5.04 20: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아니요... 그래도 소설도 읽고 정확한 역사적 지식도 얻는 것이 금상첨화겠지요.
    (이런 경우가 아니면 정확한 지식을 알게되는 기회가 잘 없는지라... 다음에도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5.04 20: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젊은이-라고 평한 히데나가가 다케나카 한베에보다 4살이나 더 많았으니..;;

    그런데 히데나가 보면 볼 수록 삼국지의 노숙이 떠오르는군요;; 참 온화한 사람의 내면에서도 그 사람 나름대로 고충이 있지 않았을까.. 그런걸 보여줄 수 있는게 소설의 묘미 아닐까요.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05 14: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맹꽁서당님//타이밍이나 흐름봐서 적당히 하겠습니다. ^^

    다메엣찌님//아~ 그런가요? 생각도 못하고 있었네요 ^^;
    그러고보니 말씀대로 형주의 관우와 자기 주군을 오가며 고뇌하는 모습과 겹치는 부분도 있군요.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5.06 17: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실제 노숙은 문무를 겸전한 상당한 터프가이입니다...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06 20: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헉~ 그렇군요!!! 저는 삼국지연의의 노숙말고는 모르다 보니.. ^^;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5.07 09: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연의 말고는 정사는 촉서 번역된거 밖에 안읽어봐서(ㅎㄷㄷ)

기타바타케 도모노리(北畠 具敎)

1576 11 25 암살 49

1528~1576.

이세(伊勢) 고쿠시(国司[각주:1]) 키타바타케 씨() 8대 당주. 남부 이세 5()이가(伊賀), 야마토(大和)의 일부를 지배. 검호(劍豪) 츠카하라 보쿠덴(塚原卜)에게서 [히토츠노 타치(一の太刀)]를 전수 받았으며 와카(和歌)에도 뛰어났.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둘째 아들 노부카츠(信雄)를 양자로 받아들여 은거하지만 옛 신하에게 암살당했다.

<그림은 http://homepage1.nifty.com/kitabatake/kitabatake21.html에서 불펌...>






노부나가에게 항복하다.


 무라카미(村上) 겐지(源氏)의 명류이며, [神皇正統記[각주:2]]를 쓴 것으로 유명한 키타바타케 치카후사(親房)와 그의 셋째 아들인 초대 이세 고쿠시 키타바타케 아키요시(北畠 顕能)가 남북조시대에 이세, 이가, 야마토 3국의 요충지인 타게고쇼(多芸御所)와 키리야마(霧山)에 성을 세운 다음부터 키타바타케 가(家)는 8대 토모노리까지 남부 이세 5()을 다스렸다.


 토모노리는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와도 친밀했으며 , 검법, 와카에도 뛰어난 문무양도의 달인으로 쿠교우(公卿)인 야마시나 토키츠구(山科言継)나 야마토의 야규우 세키슈우사이(柳生 石舟斎)등 문인(文人), 검호가 토모노리의 저택에 자주 방문하여 함께 풍류를 즐겼다. 특히 잠시 동안 머물던 츠카하라 보쿠덴에게서는 신토우(新当)류의 비전인 [히토츠노타치(一の太刀)]를 전수받아, 동문인 무로마치 바쿠후 13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를 지칭하는 [검호 장군(劍豪将軍)]을 빗대 [검호 국사(劍豪 国司)]라 칭송되었다. 후에 이 두 명 다 암살대와 칼을 맞댄 끝에 참사를 당한 것은 아이러니컬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풍류를 좋아하여 와카나 렌가(連歌) 모임을 개최했으며, 검의 타류시합(他流試合)도 하였다. 영내(領內) 20여개의 성이나 요새를 쌓아 정병(精兵)을 키우고 있었지만 천하를 향한 야망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1568 41살 때.

 천하 평정을 목표로 하는 오다 노부나가가 3만의 대군을 이끌고 갑자기 이세로 침공하여 유서있는 칸베(神戶)(), 코츠쿠리(木造)()를 자기 진영에 끌어들이고 키타바타케 가()를 공략할 준비를 시작했다.

 토모노리는 격노하여 산 속에 있는 타게고쇼(多芸御所)를 나와 이세 평야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오가와치(大河內)성에 본진을 두고 철저 항전의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노부나가군 3만에 대하여 키타바타케군은 5천.

 전투 경험이 풍부한 오다의 병사들에 비하여 2백여 년간의 평화로 인해 전의도 낮았다. 그럼에도 50여 일간 버텼지만 그러는 동안 수많은 희생자가 생겼으며 화살과 식량도 떨어졌고 노부나가의 조략으로 배신자가 나와 물길도 끊어졌다. 노부나가 군에도 피해가 생겼기에 노부나가는 타키가와 가즈마스(川 一益)와 타케나카 한베에(竹中 半兵衛)의 진언에 따라 싸움을 멈추기로 하였다.


 노부나가쪽의 내건 조건은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인 챠센마루(茶筅丸 = 후의 오다 노부카츠) 토모노리의 딸인 유키히메(雪姬)의 남편으로 삼는 것과 동시에 양자가 되어 키타바타케가()를 상속하게 한다. 그 외의 처벌은 없다는 관대한 제안이었다.

 이걸로 개성(開城). 얼마 지나지 않아 양 가문의 혼례가 치러졌고 키타바타케가()의 가독을 이어받아 당주가 된 노부카츠는 마츠가시마(松ヶ島)성에 입성했다.

 [이젠 전쟁으로 이세의 사무라이나 백성들을 고생시키지 않아도 된다. 키타바타케의 가명만 남으면 그걸로 만족한다]

 라는 토모노리는 오다 가문을 증오하는 키타바타케의 가신들을 다독거리며 자신도 오가와치성에서 남서로 약 20킬로 떨어진 미세()의 저택에 은거했다. 그 곳은 해자로 둘러 쌓인 1만여 평의 작은 성이었지만 몇 몇의 종자들과 함께 자연을 노래하며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토모노리 암살 지령


 그렇지만 노부나가는 노부카츠에게 토모노리의 암살을 명하였고 노부카츠는 이미 자신의 충실한 부하가 되어있던 키타바타케 일족인 타키가와 사부로베에 카츠토시(川 三郞兵衛 雄利 토모노리의 동생인 코츠쿠리 토모마사(木造 具政)의 서자로 타키가와 카즈마스(川 一益)의 양자)에게 실행을 명했다.


 이리하여 1576년 11월 25 이른 아침.

 타키가와와 옛 신하였던 카루 사쿄우(加留 左京), 나가노 사쿄우노신(長野 左京進)등 몇 명이 미세의 저택을 방문하여 면회를 청했다.

 측근인 사사키 시로사에몬( 四郞左衛門)이 타키가와 등이 왔다는 소식을 토모노리에게 전하자 토모노리는 굉장히 반가워하며 그 들을 자신의 방으로 직접 오게 한 후 세 살인 토쿠마츠기미(德松君)를 무릎에 앉힌 채로,

 [잘 오셨네. 편히 쉬다 가게나. 내 딸이나 사위께선 건강하시겠지?]

 라고 미소를 지으며 차를 권했다.


 이때 토모노리가 윗몸을 내밀어 차 그릇을 권하는 순간. 카루가 소매에 감추어 두었던 테야리(手槍[각주:3])를 꺼내어 토모노리의 가슴팍을 향해서 찔렀다. 깜짝 놀란 토모노리는 검호 국사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뒤 편에 있던 칼걸이에서 칼을 뽑아 맞섰지만, 타키가와 등의 암살대는 계획대로 토모노리를 제압하여 세 살짜리 토쿠마츠기미까지 죽였다.

 한 사람이 목을 들고서 도망쳤지만 토모노리의 무사들이 뒤쫓아 난투를 벌였고, 양쪽에서 사상자가 나왔지만 카루와 나가노는 도망쳤다고 전해진다.


 당시 토모노리에게는 1572년 상경을 목표로 하는 카이(甲斐)의 타케다(武田)군과 연락을 취하며 노부나가를 공격한다는 소문이 퍼져 의심 많은 노부나가가 암살을 시도한 것 같다. 방심하고 있던 토모노리만 불쌍할 따름이다.


 토모노리 암살을 알게 된 충성심 깊은 키타바타케 무사 약 400명은 각지에서 키리야마(霧山)성으로 모여들어 노부나가의 대군과 싸우다 12 5일 패했다. 이리하여 키타바타케씨가 이세에 들어온 이래 8 2 4십 여년 이어진 영광스런 역사도 막을 내렸다.

  1. 무로마치 바쿠후(幕府)와는 별도로 예전부터 쿄우(京)의 조정에서 임명. [본문으로]
  2. 일본의 남북조시대에 키타바타케 치카후사가 속한 남조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쓴 역사서. [본문으로]
  3. 손잡이가 짧은 단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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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3.06 13: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0년 간의 평화라… 나가노 씨 등 이세의 호족들과 신사 세력과 싸우고, 야마토·기이에도 쳐들어간 기타바타케와 평화는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07 10: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과연 신사본론님!! 신사본론님의 눈썰미는 피할 수 없군요. ^^

    변명을 하자면....

    이 책은 각 무장 별로 필자들이 다릅니다.(가문 혹은 지역 별로 같기는 합니다만)
    그 중에서도 이 키타바타케 토모노리를 담당하신 분 이름이 &quot;&amp;#27178;山高治&quot;라는 분으로...
    이 분은 출신이 미에(三重&amp;#30476;)이라서 그런지 이세(伊勢)에 관련된 이야기는 참 아름답게 쓰신다는 평가가 있더군요.

    그래서인지 본문에서도 이세의 키타바타케 군세가 진 이유를 그런 식(平和&amp;#21574;け)으로라도 희석시키고 싶으셨나 봅니다.

다케나카 시게하루(竹中 重治)

1579 6 13 병사 36

1544 ~ 1579.

통칭 한베에(半兵衛). 사이토우 타츠오키(斎藤 龍興[각주:1])의 신하였으나, 오다 가문(織田)으로 배를 바꾸어 탄 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요리키(与力[각주:2])가 된다. 아자이(浅井)씨 공략이나 나가시노(長條) 합전 등에서 공을 세웠다. 노부나가(信長)츄우고쿠(中国) 지방 공략의 선봉으로 출진하지만 하리마(播磨) 미키(三木)성을 포위하고 있던 중에 진영에서 죽었다.










이나바야마(稲葉山)성 탈취극


 타케나카 시게하루는 통칭인 '한베에(半兵衛)'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외견은 아름다운 부인(婦人)과 같아 전장에서도 용맹함이 느껴지지 않으며, 말 가죽으로 둘러싼 투구와 목면의 하오리(羽織[각주:3]), 이치노타니(一ノ谷)의 갑옷을 입고 조용했다는 것이 [상산기담(常山紀談)]이 전해주는 이미지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삼고지례로 맞이한 천재 군사라는 이야기는 [絵本太閤記]의 기술로 시게하루가 섬긴 것은 어디까지나 오다 노부나가이며 노부나가에게서 요리키라는 형식으로 히데요시에게 협력한 것이다.


 시게하루가 군략가로써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가 그 군략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이름을 알린 것은 1564 2로 20살 때의 일이었다.

 시게하루는 인질로 이나바야마성에 있던 동생 시게노리(重矩)의 병문안을 핑계로 불과 16명을 이끌고 성에 들어가 사이토우 타츠오키의 측근 사이토우 히타노카미(斎藤 飛騨守)[각주:4] 이하 6명을 죽였다. 거기에 호응하여 한베에를 사위로 둔 안도우 모리나리(安藤 守就)가 카가미시마(鏡島)성에서 병사를 보내어 타츠오키를 쫓아 내고 성을 점령한 것이다. 그러나 이 쿠데타는 대의명분이 없었기 때문인지 사이토우씨에게 비판적인 카이센 쇼우키(快川 紹喜)조차도 쪽팔림도 모르고 의도 모르는 놈들이 타케나카, 안도우 패거리들이다고 할 정도였다. 이러는 동안 오다 노부나가는 성을 건네라고 자주 사자(使者)를 시게하루에게 보냈으나 시게하루는 여기에 응하지 않았고 8월 즈음에는 요시타츠에게 성을 되돌려 주었다.


 그 후 시게하루는 잠깐 오우미(近江)의 아자이(浅井)() 아래로 몸을 피했으나 다음해는 미노(美濃)로 돌아왔다고 한다. 1566년 쿠리하라(栗原) 산에 칩거하고 있던 시게하루를 히데요시가 세번 방문하여 꼬셨다라고 하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絵本太閤記]의 기술인데 실제로 노부나가를 섬긴 것은 안도우 모리나리가 노부나가에게 내응했던 다음해 8월 이후일 것이다.


미키(三木)성 포위중에 죽음


 아네가와(姉川) 전투 후 히데요시가 요코야마(橫山) 성주가 되자, 시게하루가 히데요시 부재시에 성을 맡는 일이 많아져 아자이 세력(勢力)의 빈번한 습격에서도 성을 지켜냈다. 1577 히데요시의 츄우고쿠 지방 공략이 시게하루 최후의 무대가 되었다.


 1578년.

 아리오카(有岡)성의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가 모반을 일으켰을 때, 히메지(嬉路)성주 쿠로다 요시타카(黑田 孝高)는 무라시게 설득을 명령 받았지만 반대로 무라시게에게 잡혀 유폐되어 버렸다. 요시타카도 배반했다고 생각한 노부나가는 히데요시의 나가하마(長浜) 성에 맡겨 두었던 인질 처형을 명했다. 처치가 곤란해 하고 있던 히데요시에게 시게하루는 하나의 계책을 알려 인질을 자신의 본거지인 이와테(岩手)[각주:5]에 감추었다.


 1579 10월.

 아리오카 성이 낙성되어 요시타카도 구출되었고 인질도 요시타카에게 돌려주었다. 이 인질이 후의 쿠로다 나가마사(黑田 長政) 나가마사는 죽을 때까지 시게하루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았다고 한다.


 1578 3월.

 벳쇼 나가하루(別所 長治)가 지키는 미키 성을 히데요시가 공격하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이곳을 성급히 정면 공격하지 않고 주위에 많은 수의 진지로(陳城[각주:6])를 세워 장기 포위전을 하기로 하였다. 긴 전쟁터 생활로 건강을 헤친 시게하루가 병으로 쓰러진 것은 포위 중이던 다음해 4월이었다.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시게하루는 쿄우토(京都)에서 잠시 휴양했지만 병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죽는다면 전장에서 죽는 것이 무가의 바램이다"라며 비장한 결의를 한 시게하루는 부하의 걱정스러운 말을 뒤로하고, 하리마(播磨) 히라야마(平山)로 돌아왔다. 6 13 시게하루는 36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한창 일할 나이의 죽음이 이 글 초반에 언급한 [常山紀談]과 같이 천재지만 여성적이며 선이 가는 이미지를 시게하루에게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코우야(高野) 칩거의 꿈


 시게하루의 장남 시게카도(重門)가 기록한 [토요카가미(豊鑑)] 히데요시의 한 없는 슬픔을 [제갈 공명]을 잃은 [유비]에 비교하고 있다. 또한 시게하루 죽은 뒤에도 군사 회의를 할 때마다 히데요시는 반드시 시게하루를 언급했다고 한다.([寬永諸家系図伝])


 한편 다음과 같은 견해도 있다.

 노부나가나 히데요시는 시게하루가 큰 뜻과 야망을 품고 있는 것을 알고서 결코 마음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시게하루에게 따로 영지를 하사하지 않고 고생만 시키며 그의 위세를 꺾으려 했다고 한다. 그것을 깨달은 시게하루는 미키성을 함락하면 코우야 산에 올라가 은퇴하여 세상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살려고 결심하고 있었다 한다.([竹中家譜])


 시게하루의 유골은 미키성이 보이는 장소에 묻어졌다. 죽어서도 아군을 고무하며 전군을 지휘하려고 했을 것이다. 미키성이 낙성된 것은 시게하루가 죽은 반년 후인 1580 1월이었다.

  1. 사이토우 도우산(斉藤 道三)의 손자. [본문으로]
  2. 조력자...를 말한다. 주군이 부하에게 도움이 될 부하를 파견하는 것으로 격을 따지자면 동격임. [본문으로]
  3. 갑옷 위에 입는 조끼와 같은 덧옷 [본문으로]
  4. 성 탈취의 원인은 이 히타노카미가 시게하루에게 오줌을 쌌기 때문. [본문으로]
  5. 보다이야마 성(菩提山城)의 별칭. [본문으로]
  6. 합전 혹은 공성용으로 임시적으로 세워두는 주둔용 요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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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edge7744 BlogIcon 우에스기 2006.08.08 12: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담아가겠습니다.
    정말 잘쓰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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