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슈우 우에다 성[信州上田城]은 검은 판자벽[黒板壁]의 망루와 함께 사나다 가문[真田家]의 성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성의 역사를 보면 사나다 가문의 재성 기간은 마사유키[昌幸]와 그의 장남 노부유키[信之]를 합쳐도 40년에 불과하며[각주:1], 그 뒤를 이어 들어온 센고쿠 가문[仙石家][각주:2]은 85년이며[각주:3], 그 다음을 이은 마츠다이라 가문[松平家][각주:4]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까지 160년이라는 오랜 기간 이 성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덧붙여 이야기하자면 현재 남아있는 우에다 성[上田城]의 망루는 센고쿠 가문이 있을 때 세워진 것이다.

 이와 같이 우에다 성[上田城]과 사나다 가문[真田家]의 연결성은 역사적 시간상으로 보면 가장 짧지만, 사람들의 역사적 지식상에는 센고쿠 가문이나 마츠다이라 가문의 이름이 우에다 성과 연결되는 일은 굉장히 드물다. 즉 불운하게도 센고쿠 가문과 마츠다이라 가문은 사나다의 이름에 가려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 정도로 사나다와 우에다 성의 이름을 높인 사실은 어떤 것인가?

 사나다라는 명성만으로 보자면, 그것은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에서 「사나다 일본 제일의 무사[真田日本一の兵]」라며 칭송 받았던 유키무라[幸村]가 그 중심일 것이다. 그러나 유키무라의 명성은 우에다 성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으며, 유키무라의 부친이며 축성자인 마사유키가 이 성의 주역이다. 사실 사나다의 위명(威名)이라는 것도 마사유키가 쌓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후년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이 목전으로 다가왔을 때,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마사유키와 함께 서군 측에 섰기에, 전쟁이 끝난 후 키이[紀伊]의 쿠도야마[九度山]로 유배 당했던 사나다 유키무라가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입성하였는데, 그 소식이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에게 전해졌다. 이때 이에야스는 “아비냐 아들이냐?”라며 두 번이나 거듭해서 물었으며, 더구나 그때 문을 손으로 잡고 있었는데 그 문이 덜컹덜컹 소리를 낼 정도로 떨었다. 입성한 것이 유키무라라는 것을 알고 그제서야 떨림이 멈추었다고 한다. 이 즈음 마사유키는 이미 죽어 이 세상에는 없었지만, 이에야스는 ‘사나다’라는 이름만 듣고서도 혼란에 빠져 몸을 떨 정도였던 것 같다.

 상기의 일화가 사실인지 거짓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이에야스가 이리도 사나다 마사유키의 이름에 두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를 찾자면 이에야스는 두 번이나 우에다 성의 마사유키를 공격하여 두 번 다 격퇴 당했다는 사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사실이 이에야스에게는 사나다 마사유키와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는 패배자 근성에 가까운 심리상태로까지 발전하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사나다 가문은 마사유키의 부친 유키타카[幸隆] 때부터 옆 나라 카이[甲斐]의 주인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을 섬겼다. 마사유키는 유키타카의 셋째 아들로 코우후[甲府]에서 태어나, 소년일 즈음부터 신겐의 측근 시동[小姓]이 되었으며, 카이의 명문 무토우 가문[武藤家]을 이어, 무토우 키헤에[武藤 喜兵衛]라는 이름으로 신겐의 곁에서 활약하였다. 신겐은 그런 마사유키를,
 “무토우 키헤에와 소네 타쿠미[曽根 内匠][각주:5]는 내 양 눈과 같다”
 라 평했다. 이런 마사유키가 신겐의 외교, 군략(軍略), 전법을 배우지 않을 턱이 없다. 또한 부친 유키타카는 신겐 휘하의 모장(謨將)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런 부친의 지모도 마사유키에게 흐르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1582년. 주가(主家)인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가 오다 가문[織田家]에게 공격 당한 끝에 도망치다 텐모쿠 산[天目山]에서 죽자, 마사유키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따랐으며,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횡사하자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에 속하였고 이어서 토쿠가와[徳川] 그리고 우에스기[上杉] 식으로 주가(主家)를 바꾸어, 어떻게든 하나의 세력으로 열강들 사이에 존재감을 발휘해 갔는데, 이 수완은 주군 신겐, 부친 유키타카에게 물려받은 재능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히데요시[秀吉]도 이러한 마사유키를 ‘종잡을 수가 없어 얕잡아 볼 수 없는 자[表裏比興の者]’라고 평할 정도였다.

 어쨌든 이야기를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사유키와의 싸움으로 되돌리자.
 1584년. 마사유키는 이 즈음 이에야스에 속해있어, 이에야스는 적대관계였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 손을 잡고 있던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에 대항하기 위해 우에다 성[上田城]을 쌓았지만, 그 다음 해 이에야스가 호우죠우 우지마사[北条 氏政]와 화의(和議)를 맺으면서 사나다의 영지 코우즈케[上野] 누마타 지방[沼田地方]을 호우죠우 가문에 넘긴다는 방침을 정하고는 마사유키에게 통고하였다. 이에 대하여 마사유키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 누마타는 이에야스에게 받은 것이 아니오. 우리들의 힘으로 손에 넣은 것이외다.”
 며 거절하였다. 거기에 지금까지 적대하고 있던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손을 잡은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런 마사유키의 반항에 격노하며 토리이 모토타다[鳥居 元忠], 오오쿠보 타다요[大久保 忠世] 등에게 8000의 병력[각주:6] 을 거느리게 하여 우에다 성을 공격시켰다.
 대군을 자랑하는 토쿠가와 군[徳川軍]은 단번에 성 밑 마을을 돌파하여 성벽에 달라붙었다. 그러나 이것이 마사유키의 책략이며 바라던 바였던 것이다. 이때까지 유유히 바둑을 두고 있던 마사유키는 적을 충분히 끌어들였다고 판단하자 곧바로 명령을 내려, 성안에서 철포를 일제히 발사하게 하였다.
 토쿠가와 군은 대군인 만큼 한번 혼란에 빠지자 헤어나오질 못했다. 성 밑 마을에서 갈팡질팡 도망치는 토쿠가와 군을 목표로 이번엔 복병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공격하였다. 그야말로 토쿠가와 군은 총붕괴 상태가 되었다.
 토쿠가와 군은 결국 3개월에 걸쳐 우에다 성과 대치했지만, 토쿠가와 가문의 중신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 数正]가 히데요시에게로 망명하는 대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결국 다시 공격하지 못하고 병사를 물렸다.
 
이로 인해 사나다 마사유키의 무명(武名)은 천하로 퍼졌다.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에서 히데요시 조차 이기지 못했던 토쿠가와 군세를 작은 성 하나에 의지하여 패퇴시켰기 때문이다.

 사나다 마사유키가 다음으로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싸우게 되는 것은 이로부터 15년이 지난 1600년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였다. 잘 알려졌듯이 사나다 가문은 마사유키와 그의 둘째 아들 유키무라[幸村]가 서군(西軍)에 속하였고, 장남 노부유키[信之]가 동군(東軍)에 속하였다. 우에스기 정벌[上杉征伐][각주:7] 도중 노부유키와 헤어져 시모츠케[下野]에서 거성 우에다 성으로 돌아 온 마사유키-유키무라 부자는 여기서 나카센도우[中山道]를 거슬러 서상(西上)하려는 토쿠가와 군의 발을 묶고자 하였다.

 9월.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가 거느리는 3만8천이 코모로 성[小諸城]에 착진. 곧바로 우에다 성을 개성하라고 명령하였다. 마사유키는 순순히 알았다고 대답하였다. 머리까지 밀고는 공순(恭順)의 뜻을 나타냈다. 하지만 증거가 되는 서약서를 제출하는데 시간을 끌었다. 히데타다는 초조해하며 재촉하였다. 그러자 마사유키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사실은 농성 준비를 위해서 답변이 늦어졌습니다. 이제야 군량 반입도 끝나, 무기나 장비류도 제대로 갖추어졌으니 한번 싸워보자 합니다”
 히데타다는 분노하였다. 지금 여기서 단번에 물리쳐주마 - 하고 우에다 성을 공격하였다. 토쿠가와 군은 15년 전과 똑같은 전법을 취하여 그때와 똑같이 총격을 받고 복병에 당하는 등 전투를 주도하지 못하고 끌려 다니기만 했다. 히데타다는 이 우에다 공성에서 몇 일이나 소비하였지만 세키가하라로 서둘러야 했기에, 끝내 이루는 일 없이 샛길을 이용하여 전쟁터로 향했지만 결국 세키가하라 결전에는 시간을 맞추지 못하고 이에야스의 역정을 사게 된다.

 이렇게 사나다 마사유키의 이름은 두 번이나 토쿠가와 군을 쳐부순 사나이로 만천하에 그 무명(武名)을 떨치게 되지만, 불운하게도 세키가하라에서의 결전에서 서군은 패하였다. 
 이렇게 되면 다른 서군의 제장들처럼 참수죄에 처해질 터였지만, 동군에 속해있던 장남 노부유키가 필사적으로 조명탄원하였기에, 죽음만은 면하여 유키무라와 함께 코우야 산[高野山]으로 유배 당하게 되었다.
 
유배에 앞서 마사유키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나이후[内府=이에야스][각주:8]야말로 이러한 처지로 만들고 싶었는데…”
 하면서 눈물을 떨구었다고 한다.

 유배지의 마사유키에게는 노부유키를 시작으로 사나다 가문의 사람들은 일족이건 가신이건 예를 다하여, 편지도 끊임없이 주고 받았고 금전 등도 계속 보냈다. 그러나 마사유키는 유배당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16명의 가신이 따라붙었으며 다이묘우[大名]였을 때의 격식도 계속해서 유지하였다. 그랬던 만큼 드는 돈도 많았을 것이다. 마사유키는 자주 노부유키 등에게 돈을 보내라고 요청하였다.
 또한 언젠가 사면 받을 날이 올 거라 기대하여, 이에야스의 측근인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에게 활발히 청탁하거나 하였다. 이런 것을 보면 아무리 마사유키라도 늙어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1611년, 64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
1545년생. 두 명의 형 – 노부츠나[信綱], 마사테루[昌輝]가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전사하였기에 사나다 가문[真田家]의 당주가 된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9]에 종군하였을 때 히데요시[秀吉]가 여러 무장들 앞에서 마사유키에게 전략을 물어보는 등 영예(榮譽)와 면목을 세우게 된다. 장남 노부유키[信之]가 이에야스[家康]의 중신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둘째 유키무라[幸村]가 히데요시의 봉행(奉行)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의 딸과 결혼하여[각주:10] 토쿠가와 - 토요토미 양측과 연을 맺었다. 또한 마사유키의 부인은 우타 요리타다[宇田 頼忠]의 딸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부인과는 자매지간이었다. 

  1. 우에다 성 축성한 1583년~사나다 가문이 마츠시로[松代]로 이봉한 1622년까지. [본문으로]
  2. 만화 센고쿠로 유명한 센고쿠 히데히사[仙石 秀久]의 아들 센고쿠 타다마사[仙石 忠政]가 입봉. [본문으로]
  3. 1622년~ 1706년. [본문으로]
  4. 열여덟 마츠다이라[十八松平] 중 후지이 마츠다이라 가문[藤井松平家]. [본문으로]
  5. 타케다 24장[武田二十四将] 중 한명인 소네 마사타다[曽根 昌世]. [본문으로]
  6. 토쿠가와 막부가 대패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병력을 적게 기록하였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7.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여, 이에야스는 카게카츠에게 상경하라고 명령하나 카게카츠의 가로(家老)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의 편지에 빡쳐 정벌하러 간다. [본문으로]
  8. 당시 이에야스의 관직 나이다이진[内大臣]을 중국풍으로 부른 것. [본문으로]
  9.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10. 사위 유키무라와 장인 요시츠구의 나이차이가 최소 2 ~ 최대 11살 차이라 아마 조카나 친족의 여성을 양녀로 삼은 뒤 시집 보낸 듯,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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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2.02.23 09: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나다 가문의 인물들은 평하기가 참 어려운 것이 수많은 창작물에 의한 사랑과 관심을 받는 센고쿠시대의 아이돌급 인물들이기 때문이겠죠.

    신슈가 공략하기 어려운 지역이라는 생각은 자주 듭니다. 신겐도 무참히 박살난 것이 여러번이요, 도쿠가와도 신슈 전역을 통치한 적은 없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런데 이에야스는 본인이 마사유키에게 직접 패한 적은 없었는데 왜 마사유키에게 그토록 두려움을 느꼈던걸까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2.23 11: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에도 막부의 창시자를 부자이대에 걸쳐 괴롭혔다는 것이 인기의 비결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나노信濃는 아무래도 남북으로 길며 거기에 산악지방이다 보니 하나의 쿠니国치고는 다양한 세력들이 작게나마 많이 발전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생각합니다.
      거기에 시나노라는 지역이 무로마치 시대 때 좀 특수한 지역이었습니다. 쿄우토 무로마치 막부에서 보기에 라이벌인 칸토우 쿠보우関東公方의 영향권과 맞다은 곳이다 보니 다른 곳과는 다른 특혜나 명예가 좀 주어졌던 곳이더군요. 아무래도 그러다보니 다른 곳에서 시나노를 차지하는데 더 힘이 든 것 같습니다.

      상기의 일화 등은 에도시대 사나다 가문의 가신인 타케노우치 노리사다[竹内 軌定]가 지은 진무내전(真武内伝)이란 책에 실린 것으로,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조금 의문시됩지요. 이에야스가 실제로 두려움을 느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2.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7 07: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설 대전란에서 도쿠가와 잡는 장면 정말 재밌게봤는데 6편 이후로 번역이 안되니 너무 아쉽습니다.

 

 에도 시대[江戸時代], 오우미[近江] 히코네 번[彦根藩] 이이 가문[井伊家]은 대대로 대로(大老[각주:1])를 배출하는 후다이 다이묘우[譜代大名[각주:2]] 필두의 가격(家格)으로 유명했다. 막말(幕末) 즈음, 안세이의 대옥[安政の大獄[각주:3]]과 사쿠라다 문밖의 변[桜田門外の変[각주:4]]으로 잘 알려진 이이 카몬노카미 나오스케[井伊 掃部頭 直弼]가 이 가문 출신이다.

 센고쿠[戦国] 시대, 이이 가문은 ‘이이의 적비대[井伊の赤備え]’라는 호칭으로 용명을 떨친 용맹무쌍한 전투집단이었다.  이이 가문의 깃발, 표식, 장병의 갑주는 물론 마갑(馬甲)에 이르기까지 모두 붉은 색으로 통일, 그 붉게 타오르는 듯한 붉은 무리가 전쟁터를 질주한 것이다. 이 집단을 처음으로 이이 가문에 도입한 것이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였다.

 적비대는 원래 타케다 가문[武田家]의 것으로 나오마사는 이를 모방한 것이다. 즉 1582년 텐모쿠잔[天目山] 산에서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가 죽은 뒤, 이에야스[家康]는 타케다의 유신(遺臣)들을 나오마사의 가신단에 편입시켰다. 나오마사는 새로 타케다의 유신들을 포함한 가신단을 편성하면서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 휘하에서 용명(勇名)을 떨쳤던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 昌景]의 군단이 적비대였다는 것을 참고로 한 것이다. 그간의 사정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코우슈우 군[甲州[각주:5]軍]의 명성은 천하를 진동시켰었다. 누구나가 이 타케다의 유신들을 원했다. 그런 타케다의 유신들이 이이 가문에 배속되게 된 데에는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가, “젊고 신참인 나오마사의 기를 살려 주기 위해 그의 휘하로 배속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하고 이에야스에게 진언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반 정도는 자신에게 배속해 달라고 부탁하며, 만약 들어주지 않을 경우엔 나오마사와 결투를 벌이겠다고까지 거친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타다츠구는 가당치 않다는 듯이 이렇게 답했다.
 “원래 주군께서 나에게 배속시켜 주신다는 것을 내 멋대로 나오마사에게 배속시킨 것이다. 만약 자꾸 네놈이 툴툴거리면 네놈 일족을 모두 꼬챙이에 꿰어버릴 테다”
 이 완고한 타다츠구의 태도로 인해 타케다 유신단은 이이 가문 배속이 결정된 것이다.

 나오마사는 토쿠가와 사천왕 중 한 명으로 꼽힐 정도인 무공파(武功派)이지만 사천왕의 다른 멤버들인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들 처럼 조상 대대로 토쿠가와 가문을 섬긴 것이 아니라 나오마사의 대가 되어서 처음으로 토쿠가와를 섬긴 신참이었다.
 이에야스를 섬기기 전까지 이이 가문은 대대로 토오토우미[遠江]의 이이노야[井伊谷]라는 곳에서 살며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에 속해 있었지만, 부친 히고노카미 나오치카[肥後守 直親]가 누명을 쓰고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에게 살해당하자 나오마사는 도망쳐 친족의 손에 키워지던 중 이에야스가 나오마사를 발견하여 자신의 가신으로 삼았다. 이 이례적인 발탁과 그 후 이에야스의 지나친 총애로 인하여 나오마사는 이에야스 남색(男色) 상대가 아닐까? 하는 시각도 있다. 어쨌든 신참이었지만 나오마사에 대한 이에야스의 신뢰는 두터워 토쿠가와 가문에서의 지위를 높여 갔으며, 나오마사도 또한 충실한 가신으로서 견마지로를 다하며 자신 스스로도 후다이[譜代[각주:6]]라 여기고 있었다.

 후년 히데요시[秀吉]와 만나러 이에야스가 상경하게 되는데, 그 동안 오오만도코로[大政所[각주:7]]를 이에야스의 성에 인질로 보내었다. 이에야스가 살아서 돌아옴으로써 오오만도코로의 인질 역할은 끝나 그녀를 반환하게 되었다. 이때 나오마사가 호위하는 역할을 맡아 히데요시에게로 향했다. 히데요시는 나오마사의 빈틈없는 호위에 기뻐하며 공을 치하. 다음 날 나오마사를 위한 향응의 자리를 만들어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 数正]에게, “자네는 요전까지만 해도 나오마사와 동료였으니 함께 참석하게”라며 동석시켰다. 이시카와 카즈마사는 이에야스의 고굉지신이었지만 히데요시로 말을 갈아탄 인물이었다. 카즈마사를 본 나오마사는 참석해 있던 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이 카즈마사는 우리 주군인 토쿠가와를 조상 대대로 섬겨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군을 배신하고 전하(히데요시)에게로 도망친 겁쟁이이기에 졸자는 동석하고 싶지 않습니다”고 말하여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나오마사의 후다이[譜代] 의식을 강조한 일화이다.

 이어서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の役[각주:8]] 때의 일이다. 장기전으로 인해 장병들의 마음이 피폐해지는 일이 없도록, 히데요시는 쿄우토[京都]나 사카이[堺]의 상인들을 자유로이 드나들게 하여 장병들이 술잔치나 춤, 노래도 자유롭게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등 활발한 진중 위안을 행했다. 나중에는 자신의 측실 요도도노[淀殿]까지 쿄우토에서 불러들였고, 여러 다이묘우에게도 그들의 처첩을 부르도록 권했다. 전쟁이라기 보다는 축제와 같은 떠들썩함이었다. 이러한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나오마사는 한 가지 꾀함이 있었다. 빠질대로 빠진 히데요시는 불과 14~15명의 호위만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나오마사는 슬며시 이에야스에게로 가서,
 “주군. 지금이야말로 천하를 손에 넣을 절호의 기회입니다. 히데요시의 목을 취하기는 아주 쉽사옵니다”
 야심만만한 나오마사의 헌책이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천명에 어긋나는 행동을 일으켜선 안 된다. 모름지기 세상 일은 하늘이 내려주신 것에 따라야 한다. 이것을 명심하도록”
 하고 엄격하게 나오마사를 꾸짖으며, 어떤 일이건 성취될 때에는 때의 추세라는 것이 있음을 가르쳤다고 한다.

 1600년 세키가하라[関ヶ原] 결전 때, 나오마사는 동군의 선봉으로 출진하였다.
 9월 15일 결전 당일 새벽. 나오마사는 흰 갑옷을 입고 짙은 안개 속에 말을 채찍질하며 스스로 정찰을 나가 낌새를 엿보다 전투가 시작되자, 말 재갈을 쥐고 있던 부하가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싸우다 전사하면 운명일 뿐”
 이라며 적진으로 돌입했다고 한다.
 또한 아군인 동군 선봉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부하 장수 카니 사이조우[可児 才蔵]가 막아 서자[각주:9], 정찰을 나간다고 속여 계속 앞으로 전진했다고도 한다.

 이 결전도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를 배반케 한 동군이 서군을 총붕괴로 몰아넣었지만, 그때 패잔병 500여기를 이끈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가 동군 진영을 스치며 쏜살같이 질주하여 퇴각하였다.
 나오마사의 이이 군은 곧바로 이를 추격, 시마즈의 후군[殿] 시마즈 토요히사[島津 豊久]를 전사시켰지만, 난전 속에 선두에서 질주하고 있던 나오마사는 시마즈 군의 저격에 오른 팔을 맞아 부상 당해 낙마하였다.[각주:10] [각주:11] [각주:12]

 이때의 상처로 나오마사의 오른 팔은 더 이상 쓸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세키가하라 전쟁 다다음 해인 1602년 7월 나오마사는 거성(居城)인 사와야마[佐和山]에서 죽었다.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1561년 토오토우미[遠江]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만치요[万千代]. 이에야스[家康]를 섬겼으며 1582년 이에야스코우슈우[甲州] 경영에 공적을 세웠다. 1584년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合戦]에 종군. 1588년 텐노우[天皇]가 쥬라쿠테이[聚楽第]에 행차했을 때 히데요시[秀吉]의 알선으로 종오위하(従五位下) 지쥬우[侍従]가 되었다[각주:13]. 배신(陪臣[각주:14])으로서는 파격의 대우였다. 1590년 이에야스의 칸토우[関東] 이봉(移封)으로 인해 코우즈케[上野] 미노와 성[箕輪城] 12만석에 봉해졌고, 후에 오우미[近江] 사와야마 성[佐和山城] 18만석으로 가증되었다. 1602년 42세에 죽었다.

  1. 중요 정책 결정을 할 때, 혹은 다대한 공이 있는 원로 대신을 위한 비상임 막부 최고위직...여담으로 채널 J에서 방영 중인 NHK대하드라마 아츠히메[篤姫]에서는 '특별 정무대신'으로 번역되어 나온다. [본문으로]
  2. 주로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이전부터 토쿠가와 가문[徳川家]를 섬겼던 가문이나, 쇼우군[将軍]이 새로 다이묘우[大名]로 만들어 준 가문. 막부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본문으로]
  3. 안세이[安政]는 당시 일본의 연호. 1858(안세이 5년[安政五年])~1860년 나오스케가 살해당할 때 까지 일어난 옥사. 당시의 대로(大老) 이이 나오스케[井伊 直弼]가 쿄우토[京都] 조정의 허락을 받지 않고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을 무단 조인하고, 나오스케 주도로 14대 쇼우군[将軍]이 키슈우[紀州]의 토쿠가와 이에모치[徳川 家茂]로 결정되자, 그에 반대하던 사람들을 탄압한 사건. 덕분에 나오스케는 자신의 정적들을 단번에 몰아낼 수 있었다. [본문으로]
  4. 안세이의 대옥에서 나오스케의 정적 중 중심적 존재인 미토 번은 번주의 은거, 전 번주의 장기 칩거, 가로들의 할복 등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그에 불만을 품은 미토 번사 17인과 사츠마 번사 아리무라 지자에몬[有村 次左衛門]이 에도 성[江戸城] 사쿠라다 문[桜田門] 앞에서 등성 중이던 이이 나오스케를 습격하여 살해한 사건. 여담으로 나오스케의 목을 자른 것은 주도한 미토 번사가 아니라 사츠마에서 혼자서 참가한 아리무라였다 . [본문으로]
  5. 카이[甲斐]를 달리 이리 부른다. [본문으로]
  6. 주가(主家)를 조상대대로 섬기는 가문 [본문으로]
  7. 히데요시의 애미 [본문으로]
  8. 히데요시가 호우죠우 가문[北条家]를 멸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 [본문으로]
  9. 선봉은 무가의 명예였기에 함부로 내주려 하지 않았다. [본문으로]
  10. 시마즈 요시히로의 전투기인 [유신공관원합전기(惟新公関原御合戦記)]에는 이리 쓰여 있다 한다. [본문으로]
  11.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가한 시마즈 가문의 병사 쵸우사 히코사에몬[帖佐 彦左衛門]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나오마사는 서군이 패주한 후 아직 움직이기 전의 시마즈 군에 병사들을 데리고 와서 큰소리로, “무엇들을 하고 있나? 요시히로를 죽여라!”라고 외쳤을 때 카와카미 타다에[川上 忠兄] 휘하의 카시와기 겐토우[柏木 源藤]가 앞으로 나아가 철포를 쏘아 나오마사를 맞추자 나오마사의 병사들은 자신들의 대장이 맞은 것에 놀라 동요하는 동안 시마즈 군은 퇴각을 시작했다고 한다.[旧記雑録後編 三] [본문으로]
  12. 덧붙여 이이 가문의 사료 [井伊家慶長記]에 따르면 카시와기 겐토우[柏木 源藤]가 쏜 총탄은 갑옷 오른 쪽 옆구리에 맞았지만 갑옷이 튼튼했기에 튕겨서 오른 팔에 맞았다고 한다. 나오마사는 이 충격에 창을 떨군 후 말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13. 효우부쇼우유우[兵部少輔] 겸임. 이때 혼다 타다카츠나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무가(武家)가 관직을 얻었다는 의미인 쇼다이부[諸大夫]인데 비해, 나오마사는 지쥬우[侍従]가 되어 쿠게[公家]가 되었다. 이는 당시부터 나오마사가 토쿠가와 가문 필두의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14. 원래는 중국에서 제후의 신하가 천자에게 자신을 부를 때를 지칭한 일인칭 대명사라고 한다. 그 뜻이 이어져 일본에서는 신하의 신하를 지칭할 때 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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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라 2009.11.18 23: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야마가타 마사카게가 아닌지..^^;

    나오마사가 신참이라니. 꽤 놀라운 걸요?

    문득 궁금한 게 하나. 쿠게가 되는 기준이 뭔가요? 아무리 살펴봐도 잘 모르겠더라구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8 23: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고쳤습니다. 꼼꼼히 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신참치고는 후세의 영향이 막강 & 유명한 것 같습니다.

      당상가(堂上家)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지쥬우[侍従]라는 관직이 종오위하(従五位下) 임에도 불구하고 궁정[内裏]에 입궐이 가능하였으며, 그런 궁정 입궐 가능한 자격을 당상(堂上)이라 하였고, 궁궐 입궐 자격이 없던 사람이 생긴 것을 쿠게나리[公家成]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12시부터 티스토리가 점검 들어간다고 급하게 쓰는군요. 내일 다시 정리하여 쓰겠습니다.

  2. 나라 2009.11.19 11: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뭘요! 좋은 글 올려주시는 발해지랑님께 언제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언젠가 발해지랑님께서 자주 틀리는 맞춤법을 지적해서 올릴까 생각하는데 괜찮으신가요..^^;

    저는 일본어 실력이 바닥이라, 듣는 것과 말하는 건 그럭저럭 하는데 그외엔 전혀.

    당상가가 된다는 듯이었군요.. 종오위하 관직 중 시중이 입궐 가능한진 몰랐습니다.
    승전 가능한 지위는 어느 정도인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20 11: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웃!! 미리미리 말씀해주세요~ 있었음. ^^;

      원칙적으로는 종삼위[従三位]이상은 입궐이 가능했던 듯 싶습니다.(산기[参議]의 경우 사위[四位]라도 의정관이라는 위치 상 입궐이 가능했다 합니다).

      나중에 원정(院政)가 확립되면서 좀 복잡해 진 것 같습니다....이런 쪽은 아직 제 안에서 정리되지 않아서 뭐라 말씀 드릴 수 없군요.

      지쥬우[侍従]는 역할 자체가 텐노우 곁에서 시중드는 것이다 보니 특별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일본은 환관이 없다보니 그런 조선이나 중국의 환관들이 하는 일 중 일부를 지쥬우가 했던 것 같습니다)

  3.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09.11.19 17: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이 나오마사가 당대에 손꼽힐만한 미남이었던 건 사실인 듯 하나, 당대에 손꼽힐만한 잔인성을 지녔다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에야스의 명령을 너무 '외골수'로 받아들인 게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이런 말 하기는 조금 낯부끄럽지만 (?) 나오마사가 너구리의 남색 상대라는 말도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닌 듯 합니다. 워낙 초고속 승진을 한데다가 요지 중의 요지인 히코네에 둘 정도였으면 나오마사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깊었는지 알 듯 합니다. ( 에헴 ) 원래 사랑하는 사이일 수록 더 믿음이 돈독해지는 법이니깐 말입니다 ㅎㅎ

    다만, 나오마사나 사위인 다다요시가 세키가하라 이후 너무 급하게 죽은 감이 없지 않네요. 이 쪽 관련 음모론은 없으려나요? ㅎㅎ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20 11: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쵸... 이이 가문 휘하에 있던 사람들은 아침에 나올 때 미리 조상들에게 인사를 했다고 하더군요.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신참에게 그렇게까지 우대를 한 이유를 댄다면 굉장히 유력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후장파기는... 다만 다른 예가 없다는 것이 저에게는 쪼금 이해가 안가긴 합니다.

      이이 가문은 쿄우토 슈고[京都守護]였다는 말이 있더군요. 그래서 이이 가문 하급 가신이라도 말을 키워야 했었다 합니다. 쿄우토에 만일의 사태가 일어났을 시는 즉시 이동할 수 있도록...그러나 사쿠라다 문 밖의 변[桜田門外の変]에서 이이 나오스케가 살해 당하면서 막의 눈 밖에 나, 그 대신해서 설치된 것이 신선조의 상위 조직으로 유명한 쿄우토 슈고쇼쿠[京都守護職]라고 합니다.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타다요시와 나오마사는 친번(親藩)과 후다이[譜代]에서 각각 워낙 막중한 임무를 띈 중요 인물들이라 오히려 그들이 죽은 것이 막부에게 큰 손해였다고 생각합니다.

  4. shiroyume 2009.11.19 20: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후손이 그 유명한 막말의 이이 나오스케지요. 어찌보면 어울리는 최후. 거기다 이 이이 가문은 메이지 정부 이후에도 시장까지 하는 인물이 나오죠. 역시 중간보스 가문?
    말년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네요. 자기는 죽도록 싸워봐야 20만석 가량이었는데 철부지 어린애들한테 자기 아들이라고 50만석 얹어줬는걸 보면 화가 끌어오르지 않았을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20 11: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말년엔 젊었을 때의 날카로움이 빠져 뭐든 허허~ 하고 미소짓는 중년이었다고 합니다.

      말년의 에피소드로, 자기가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코쇼우[小姓]가 나오마사의 과자를 몰래 집어 먹었는데, 그걸 문 틈으로 보면서도 "어찌할고~어찌할고~"하면서 웃었다고 하더군요.

      어떤 기분을 가졌는지 모르겠지만, 오와리 번[尾張藩] 자체가 나오마사의 사위 타다요시[松平 忠吉]가 죽으면서 생긴 중요한 빈 공간을 급격히 메워야 했기에, 별다른 불만은 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5.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11.20 17: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뻘플이지만....
    천도에서 토라마사, 마사카게, 나오마사만 적비를 갖고 있던가... 암튼 맞으면 무섭더군요;;;

  6. 맹꽁이서당 2009.11.20 22: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이 인물이 어디서 공을 많이 세웠길래 도쿠가와가 가신 중 거의 으뜸 자리를 차지했는지 항상 궁금했습니다. 대망에서도 그렇고 이 글 요약에서도 사실상의 첫 출전은 코마키-나가쿠테 전쟁 같은데, 그 이후 세키가하라까지 도쿠가와 가문이 전력으로 응한 전쟁은 거의 없지 않나요? 호죠가 정벌도 전투 보다는 병력 수로 압도한 경우라고 생각하구요.

    대망에서는 나오마사 첫 등장 씬에서 이에야스 첫사랑 여인의 친척 아이라고 묘사했던데, 남색설은 별로 반기지 않기에 차라리 그런 소설적 구성을 믿고 싶어지기도 하네요.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24 06: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마도... 노부나가 사후 공백지가 된 시나노[信濃], 카이[甲斐]를 두고 호우죠우 가문[北条家]과 싸울 때 전권대사가 되어 휴전 & 동맹을 성립시킨 공이 무지 큰 듯 합니다. 요다 노부시게[依田 信蕃]나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의 후방 교란이 있었다 하나 총체적으로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호우죠우와의 교섭에서 이에야스가 바라던 결과를 낼 수 있었던 공이 큰 듯 합니다.

      첫 출진은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 토오토우미[遠江] 시바하라[芝原]에서 일어난 전투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공을 세웠다고 하는데.... - 패하여 이에야스와 몇 명들과 도망치던 중 허술한 식사를 하던 중 혼자서 먹지 않는 나오마사를 반찬투정 부린다고 생각한 이에야스가, '니도 먹어라'...라고 하자, 나오마사는 '남들이 식사하는 동안 보초를 서겠습니다. 행여 적이 오면 모두 도망가는 동안 목숨을 바쳐 모두 피할 시간을 벌겠습니다'...라고 하여 이에야스를 감동시켰다고 하더군요.

      개인적으로 이에야스-나오마사 그렇고 그런 관계는 좀 믿기 힘들더군요. ^^

  7. 보통사람 2009.11.26 1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니 시마즈가문이 역전의 용사들을 많이 잡았네요...

    오오토모 소린 - 규슈전체의 60%를 영유하던 군웅.
    시마즈가문의 침공을 받은 이토가문을 구원하러 8만의 군사를 일으켰으나
    계략에 빠져 대패하고 겨우 도망침. 많은 인재들이 전사했고 패배가 알려지자
    오오토모가문의 많은 가신들이 류조지, 아키츠키 등과 내통하며 반란을 꾀하는등
    적지않은 후유증...

    류조지 타카노부 - 히젠의 곰이라 불린 군웅. 아리마 가문을 치기위해 군사를 일으켰으나
    아리마 가문을 구원하러 온 시마즈군의 계략에 걸려 대패하고 전사.
    류조지가문의 많은 맹장들이 타카노부를 지키다 같이 전사.

    다카하시 쇼운 - 오오토모의 가신으로 5만의 시마즈군에 7백명은 군사를 이끌고 농성 끝에 전사

    초소카베 노부치카 - 아버지 모토치카, 소고 가문과 함께 규슈정벌에 참여했다가 대패. 아버지를
    먼저 후퇴시킨뒤 후위를 막다가 전사.

    이순신 - 노량에서 후퇴하는 적군을 추격하던 중 시마즈군의 철포사격에 전사.

    이이 나오마사 - 세키가하라에서 후퇴하는 시마즈군을 추격하다가 총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26 13: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오토모 이하의 사람들은 노부나가가 살해 당하지 않았음 그냥저냥 살았을지도...(노부치카는 미묘)

      노부나가가 살아있을 당시,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은 코노에 사키히사[近衛 前久]의 중재로 오오토모-시마즈 간에 화평이 성립되었다고 하더군요.

      임진왜란 같은 노부나가의 조선 침략이 있었겠지만...역사의 if가 어떻게 흘러갈지...

  8. 2009.12.01 07: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9. 2009.12.02 06: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사카이 가문[酒井家]은 토쿠가와 가문[徳川家]과 혈연관계인 명문가이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로부터 거슬러 올라가길 7~8대 전의 일이다. ‘토쿠아미[徳阿弥]’라는 이름의
행각승(行脚僧)이 미카와[三河] 서쪽 사카이 향[坂井鄕]에 흘러 들어와 마을 촌장[庄屋]의 신세를 지다 어느덧 그 집의 사위가 되어 아이를 만들었다. 이 아이가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각주:1].

 이 토쿠아미가 사카이 향을 떠나, 이번엔 역시 미카와[三河]의 마츠다이라 향[松平郷] 촌장[庄屋]의 사위가 되어 역시 아이를 만든 것이다. 이것이 이에야스의 조상이라 전해지고 있다.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이지만 어쨌든 사카이 가문과 마츠다이라 가문(후에 토쿠가와 가문)은 밀접한 관계였다. 타다츠구의 부인도 이에야스의 숙모[각주:2]이다.

 토쿠가와 가문 후다이[譜代] 중에서도 최상급의 문벌이었다. 타다츠구 역시 이에야스가 어렸을 때부터 가로(家老)의 지위로 내정을 총괄하고, 전투에 나서면 선봉을 담당하는 등 중책을 맡았다.

 1564년. 이에야스는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3]를 평정하며 동부 미카와로 진출, 이마가와 씨[今川氏]의 중요거점 요시다 성[吉田城]을 함락시켰다. 타다츠구의 노력으로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타다츠구는 이 공으로 인해 미카와 동부의 지배를 일임 받으며 요시다 성주가 되었다. 토쿠가와 가문의 가신 중에서는 처음으로 성주에 임명된 것이다[각주:4]
.

 1567년에 행해진 가신단 편성을 보아도, 타다츠구는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 数正]와 더불어 '선봉군 대장[惣先手侍大将]'이라는 지위[각주:5]로, '이에야스 직속군 선봉대장[旗本先手侍大将]'인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사카기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보다 상위에 있었다.[각주:6]

 그랬던 것이 – 1590년, 이에야스가 칸토우[関東]의 주인이 되었을 때 지위가 역전되었다. 타다츠구는 이 시기 이미 은거하여 가독(家督)을 아들인 이에츠구[家次]에게 물려준 상태였지만, 사카이 가문은 시모우사[下総] 우스이[臼井]에 3만석밖에 하사 받지 못했던 것이다. 타다츠구보다도 아래에 있던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는 12만석. 혼다 타다카츠,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각각 10만석에 봉해졌다. 타다츠구는 참을 수 없었다. 명문가인 사카이 가문이 신참인 이이 가문[井伊家]보다 아래에 놓인 것이다. 타다츠구는 마음을 정하고 이에야스를 만나 자기 자식 이에츠구에게 가증(加增)을 부탁하였다.
 “너도 니 자식이 소중한가?”
 뜬금없는 이에야스의 말이었다. 처음에 타다츠구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머리를 들자, 이에야스는 꾸짖는 듯한 눈빛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타다츠구는 그제서야 그 뜻을 알았다.
 ‘그때를 말하는 것이다’

 1579년. 이에야스의 부인 츠키야마도노[築山殿]와 적자 노부야스[信康]가 노부나가[信長]의 명령에 따라 살해 당한 사건을 말이다. 그때 노부나가에게 그 둘의 살해를 직접 명령 받은 것이 다름아닌 이 타다츠구였던 것이다. 어째서 노부나가에게 노부야스의 무죄를 주장하고 조명(助命)을 탄원하지 않았던 것인가? – 이에야스는 그 통한을… 여태껏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타다츠구는 다음에 이을 말을 찾지 못하였다.

 이 사카이 타다츠구에게는 의외의 일면을 가지고 있었다. '새우잡기[海老すくい]'라는 춤을 추게 하면 누구보다 뛰어난 춤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1575년,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 싸운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 전날 밤. 토쿠가와 진영의 사기는 가라앉아있었다.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이 죽어 현재 없다고는 하여도, 상대는 이름 높은 코우슈우 군단[甲州軍團]이었다. 너무도 강적이었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무언가 떠올려 타다츠구를 불렀다.
 “’새우잡기 춤’을 추어 주지 않겠는가?”
 여러 장수들이 모여들었다. 타다츠구의 춤이 시작되자 그 절묘한 손동작, 몸동작에 모두 순식간에 빠져들어, 그 자리는 웃음의 도가니가 되었다. 이걸로 코우슈우의 병사들에 대한 공포심은 단번에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칸토우[関東]의 패자(覇者) 호우죠우 우지마사[北条 氏政]와의 주연(酒宴)에서도 이것을 추어, 너무나도 뛰어남에 우지마사는 사다무네[貞宗]의 명도(名刀)를 타다츠구에게 주었다 한다.

[사카이 다다쓰구(酒井 忠次)]
1527년 미카와[三河]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사에몬노죠우 타다치카[左衛門尉 忠親]’. 토쿠가와 사천왕(徳川四天王[각주:7]] 중 한 명. 1586년 히데요시[秀吉]에게 재경료(在京料[각주:8]) 천석을 얻고 종사위하(從四位下) 사에몬노카미[左衛門督]에 취임. 1588년에 은거, 1596년에 죽었다.

  1. 이때 아들을 둘 낳아, 첫째의 가문이 대대로 사에몬노죠우[左衛門尉]를 관도명(官途名)으로 하였기에 ‘사에몬노죠 가문[左衛門尉家]’이라고 하였으며, 둘째의 가문은 우타노카미[雅楽頭]를 관도명으로 하였기에 ‘우타노카미 가문[雅楽頭家]라고 한다. 타다츠구는 '사에몬노죠 가문' 출신. [본문으로]
  2. 이에야스의 조부 마츠다이라 키요야스[松平 清康]의 딸로, 이에야스의 부친 히로타다[広忠]의 배다른 여동생. [본문으로]
  3. 혼간지[本願寺] 문도들을 바탕으로 한 그 지역 무사, 농민들의 반란. [본문으로]
  4. 정확히는 사카이 가문 중 우타노카미 가문[雅楽頭家] 출신인 사카이 마사치카[酒井 正親]가 1561년 니시오 성[西尾城]의 성주에 임명 받은 것이 첫 번째. 타다츠구가 요시다 성주에 임명 받은 것은 1564년. [본문으로]
  5. 미카와[三河]를 동서로 나누어 서부의 이시카와 카즈마사, 동부의 사카이 타다츠구가 각각 휘하에 속하는 마츠다이라 일족, 호족 등을 통솔하였다. [본문으로]
  6. 한국 국군의 편제로 비교하자면, 타다츠구는 군단장, 타다카츠나 야스마사는 대대장급. [본문으로]
  7.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등 네 명을 일컬음. [본문으로]
  8. 쿄우토[京都]에 머물면서 생활하라고 주는 땅.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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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xjapan1231 BlogIcon 나오 2008.09.24 00: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구리놈 흉악한게 지가 지 아들 죽여놓고 덤탱이를 사카이 타다쓰구에게 다 씌워버린게 참..ㅡ,.ㅡ 그리고 새우퍼담기 춤이라기보다는 새우잡이 춤이 더 매끄럽지 않을까 합니다 ㅎㅎ;; 그 한국의 병신춤이랑 비슷하더군요 ㅎㅎ;;;;;;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9.24 08: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다 하더라도 사천왕중 제일 장수했으니 그나름 괜찮은 삶 아니었나 싶네요. 저는 일단 장수를 최고의 복으로 보는지라..(30만석 받아도 40대에 죽긴 싫습..=_-;)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xjapan1231 BlogIcon 나오 2008.09.24 09: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쳇.. 다메님!! 그렇게 콕 꼬집어서 말씀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쳇쳇쳇!!!!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9.24 22: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ㅎㅎㅎ; 고의가 아니었지 않지 않지.. (흡!)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5 21: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오님//확실히 말씀하신 것이 더 부드럽군요. 단어 뜻에 집착을 하는 버릇이 있다보니..^^

    다메엣찌님//역사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거나... 소설로는 양 웬리(얀 웬리가 익숙하지만..)...등 짧고 굵게 사는 사람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저는... ^^(보통 저런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얇고 길게 연명들 하더군요... 데헤~)

    아...근데 이에야스의 부하 중에서는 이이 나오마사의 18만석이 최고 아닌가요? 어련하면(...실제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가모우 우지사토가..."히데요시가 죽은 뒤, 천하를 잡는 것은 마에다 토시이에 아니면 나다. 이에야스는 부하한테 아낌없이 영지를 줄 수 있는 그릇이 아니잖여~"...라고 할 정도니까요.

    ps;에~ 혹시... 고의가 아니라고...아니라고 생각하시면 좋지 않냐고 생각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xjapan1231 BlogIcon 나오 2008.09.26 00: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에야스는 후다이가신들이 비대한 영지를 갖는것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ㅎㅎ 후다이가신은 커녕 도자마들도 가이에키하기 바빴는데 ㅎㅎㅎㅎㅎㅎㅎㅎㅎ 그러고보니 이이 나오마사의 사와야마 18만석이 생각해보니 후다이슈 중에서는 최고영지였군요 ㅎㅎㅎ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6 22: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뭐 덕분에 그 후엔 태평성대... 과연 이에야스!!!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9.27 19: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이가 30만석은 아들내미 나오타카대의 일이군요.
    井伊 直孝(いい なおたか)
    その後、大老格に任ぜられるなど(直孝が大老職に就いたかどうかは議論が分かれている)徳川氏における家康時代最後の宿老として徳川家光に仕え、最終的には徳川氏の譜代大名の中でも最高となる30万石(最終的には35万石)
    최종적으로 35만석이라니ㅎㄷㄷ;; 아이즈 츄나곤과 아키 츄나곤을 넘어서는 영지(~~;;)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9 23: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아직도 이이 가문에 대해 너구리 옹께서는 어디가 그리 맘에 들었는지 아직까지 이해가 잘...
    이유는 여러가지 있다곤 합니다만, 어느 하나 저에겐 아직 '아~ 그래서~'라고 할 만한 것이 없더군요.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xjapan1231 BlogIcon 나오 2008.09.29 23: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타케다 신겐과 고사카 마사노부를 생각하시면..ㅎㅎㅎ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nagoomo BlogIcon 볼리바르 2008.09.30 01: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쿠보, 사카이 두 사람은 훗날 천하인 이에야스와 연극을 관람하던 차에 아비를 위해 아들이 죽는 대목에 이르러 이에야스가 "저것을 보아라, 보아라" 하니 얼굴을 들지 못하였다~ 하고 시바 료타로의 책에서 언급하더군요.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30 19: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오님//그들과 같이 러브레터라도 있었음 뭔가 납득할 수 있겠습니다만... 제 머리 속에서는 너구리公이 후장파는 것을 상상할 수 없더군요.

    볼리바르님//그런 에피소드가 있는 반면에, 노부야스의 묘소는 개장은 커녕 돌보지도 않았다는 것을 보면 이에야스에게는 노부야스에게 깊은 불신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부야스를 그리워한 몇몇 에피소드 다음에 노부야스의 묘를 이제는 옮겨야(돌봐야) 겠다...고 어째서 생각하지 못했는지...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에게는 평생에 걸쳐 결코 잊지 못할 억울한 일이 하나 있다.
 "마왕"이라 불리며 공포의 대명사 였던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명령에 따라 아들인 노부야스[信康]와 마누라 츠키야마도노[築山殿]를 자신의 입으로 사형선고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동맹자의 명령이라고는 해도 자신의 손으로 마누라와 아들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 이에야스에게도 엄청난 고뇌가 뒤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 '노부나가의 명령에 따른 노부야스, 츠키야마 살해사건'은 어딘가 이상하다.
 우선 사건의 개략을 살펴보자.


 1560년 5월.
 오다 노부나가는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오케하자마[桶狭間]에서 물리쳤다. 그리고 3년 뒤 천하통일을 목표로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는다. 동맹의 증거로써 노부나가의 딸 토쿠히메[徳姫]와 이에야스의 아들 노부야스의 결혼이 성립된다.

 그리고 1570년.
 이에야스는 그때까지 거성이었던 오카자키 성[岡崎城]을 아들 부부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새로이 지은 하마마츠 성[浜松城]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10년 정도 흐르자... 이에야스의 처 츠키야마도노가 등장하여 쓸데없는 참견을 한다. 아들 노부야스 부부는 금슬이 좋아 사이에 딸 두 명을 두고 있었지만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토쿠가와 가문의 장래를 걱정한 츠키야마가 노부야스에게 미녀를 보낸다. 노부야스는 그 미녀에게 빠졌을 뿐만 아니라 오카자키 성 밑 마을에서 유행하던 풍류춤[風流踊り]에도 흠뻑 빠져버린다.
 거기에 츠키야마도노도 타케다[武田] 측의 스파이 겐케이[減敬]를 통해서 타케다 측과 내통할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츠키야마도노의 모친은 노부나가가 죽인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여동생이다. 노부나가에게는 처음부터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던 것이다.
 이런 것을 보고 그 때까지 무시 받고 있던 토쿠히메의 역습이 시작되었다(이번에는 노부야스의 부인 토쿠히메의 등장인 것이다). 토쿠히메는 지금까지의 사정을 편지에 적어 그것을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를 통해서 애비 노부나가에게 보냈다. 편지는 12개조로 되어 있어 그 중의 2~3개를 거론해 보면,

-. 요즘 오카자키 성 밑 마을에는 춤이 유행하고 있는데 노부야스는 그 춤에 빠졌을 뿐만 아니고 춤 실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활로 싸 죽였다.
-. 노부야스는 토쿠히메에게 딸려 온 시녀 코지쥬우[小侍從]를 자주 고자질한다고 입을 찢어 죽였다.
-. 츠키야마도노는 타케다의 스파이 겐케이라는 의사와 밀통하고 있으며 오다 토쿠가와 가문과 오다 가문을 망하게 해달라며 부탁하고 있다.
 이 편지를 읽은 노부나가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사실관계를 사카이 타다츠구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사카이 타다츠구는,
 "12개 중 10개는 사실이옵니다"
 며 인정해 버린 것이다. 노부나가는 노발대발했다. 화를 냄과 동시에 이것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노부나가에게 는 적자로 노부타다[信忠]가 있다. 그러나 기량이 노부야스보다 훨씬 떨어지기에 내심 장래를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부타다와 노부야스의 시대가 된다면 노부타다는 노부야스의 쨉도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호기로 삼아 노부야스를 죽인다면.... 이라고 생각하여, 이에야스에게 노부야스와 츠키야마도노의 사형을 명했다.

 이에야스는 앙천했다. 그러나 이에야스에게 있어 시국이 어려운 이 때에 노부나가와의 동맹을 깰 수도 없어 눈물을 삼켜가며 부인 츠키야마를 죽이고, 다음에 아들 노부야스의 배를 가르게 하였다.
이상이 사건의 개략이다.....

◎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에게 기대고 있었다?!

 이 사건은 거의 정사로 취급 받고 있으며, 이 사건을 근거로 만들어진 토쿠가와 이에야스 관련의 소설,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고뇌하는 이에야스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정말로 이상한 점이 많다. 그 이상한 점을 거론해 본다.

 우선, 이에야스에게 노부야스의 죽음을 명한 노부나가인데, 아무리 마왕이라 불리며 공포의 대명사라고는 하여도 이때 이에야스가 어쩌면 반항할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일까? 반항까지 안 가더라도, 부인과 아들의 죽음까지 명령하는 노부나가와는 더 이상 같이 못 해 먹겠다며 동맹을 파기해 올 것이라고 생각을 안 했을까??
 그랬다면 정말로 곤란한 것은 노부나가였을 터인 것이다. - 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당시 상황은 이에야스보다는 노부나가가 힘든 때였다.

 노부나가는 [천하포무(天下布武)]를 선언해, 무(武)의 의한 천하통일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에는 이에야스 이외에 모두 적들뿐이었다.
 그 때문에 에치고[越後]의 우에스키[上杉]에게는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를, 츄우고쿠[中国]의 모우리[毛利]에게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를, 탄바[丹波]에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이세[伊勢]에는 타키가와 가즈마스[滝川 一益] 등 장수들을 각지에 파견하고 있었다.

 이것 외에도 '나가시노 전투[長條合戦]'에서 타케다 측과 싸워 한번은 이겼다고는 하나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는 살아 남아 반격의 틈을 노리고 있었다. 거기에 에치젠[越前]의 잇코잇키[一向一揆]가 힘을 길려왔지, 칸토우[関東]에서도 호죠 우지마사[北条 氏政]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당시의 상황은 이렇게 노부나가의 주위가 모두 적 투성이로 기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에야스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있다. 당시 노부나가에게 적을 막는 것뿐만 아니라 내부를 다스리기에도 바빴다. 부하인 시바타 가츠이에와 하시바 히데요시의 불화를 시작으로, 우군으로 편입한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가 배반, 이어서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도 배반...이란 상태였다.
(상기는 세세히 따지면 오류가 있다. 그냥 대세가 그런 분위기였다…는 정도로 하자 – 역자 가필)

 노부나가에게 있어, 정말 기댈 수 있는 것은 이에야스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이에야스에 대해 딸이 푸념을 했다는 정도로 '처와 아들을 죽여라'며 잔인하고 위험한 명령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덧붙여 노부야스의 기량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면서 호기라 생각해 죽이라고 명령한 것도 이상하다. 딸인 토쿠히메의 말이 사실이라면, 노부야스는 춤에 빠진 얼간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백성을 죽이는 바보인 것이다. 기량을 두려워하기는커녕 그 정도라면 가만 놔두어도 자멸할 터이다.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타다는 그런 춤에 빠진 노부야스보다 바보였던 것일까?

 이에야스가 둘을 죽인 것은 역사적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 죽인 날짜도 이상한 것이다.
 위에서 적은 개략에서는 자세히 적지 않았지만, '둘을 죽여라'하고 노부나가가 명령한 것이 1579년 7월16일. 그리고 이에야스가 자객을 풀어 츠키야마도노를 죽인 것은 8월29일인데, 이 사이 한달 반이나 걸린 것이다. 시간이 너무 걸린 것은 아닐까?
 노부나가의 성격으로 본다면 말한 것은 곧바로 실행시켰어야 할 터이다. 더구나 그 이유가 [타케다와의 내통]이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한달 반 동안이나 그대로 놔두고 있었던 것일까??
 더불어 이 츠키야마도노와 노부야스를 한꺼번에 죽이지 않은 것도 이상한 점이다. 최종적으로 노부야스가 자인을 명령 받은 것은 츠키야마도노의 죽음에서 또 보름 정도 지난 9월 15일인 것이다.

◎ 이에야스에게 있어 처와 아들은 방해물이었다??!!

 어쨌든 이 사건에는 이상한 점이 많은데 이 [이상함]은 사건에서 노부나가를 빼버리면 부드럽게 연결되어 간다.
 처음부터 노부나가의 명령 따위는 없었다. 노부나가의 명령이라고 하는 것은 후세의 창작인 것...이라고 해 보는 것이다.

 노부나가가 명령했다......고 쓰여 있는 것은 [徳川実紀[각주:1]], [改正三河風土記[각주:2]], [武徳編年集成[각주:3]] 등 전부 후세의 것으로, 또한 이에야스를 신군(神君)으로 쓰고 있는 자기네들끼리의 것들뿐이다. 이에야스에게 불리한 것들은 쓰여 있지 않다.

 노부나가에게 명령 받았다는 것은 창작이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츠키야마도노와 노부야스는 이에야스 자신의 뜻으로 죽였다...... 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에야스 스스로 사랑하는 처와 귀여운 아들을 죽이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사실 이에야스는 더 이상 츠키야마도노와의 사랑 같은 것이 없었던 것이다.

 1570년.
 이에야스는 그때까지의 거성인 오카자키 성을 노부야스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신축한 하마마츠 성으로 옮겼다. 이때 츠키야마도노는 하마마츠로 가지 않고 노부야스와 함께 오카자키에 남아있었다. 이후 7년간 이에야스는 츠키야마도노와 별거 상태였던 것이다. 사랑이라고는 없었던 것이다.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여기에 있다.

 츠키야마도노와 노부야스는 이에야스의 영지(領地) 왼쪽 반인 오카자키 성을 근거지로 하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오른쪽 반인 하마마츠 성을 근거지로 하고 있었고....
 당시 노부야스는 21살로 이에야스는 36세. 가신들은 자연히 좌와 우로 나뉘어져 있었다. 결국,노부야스를 맹주로 하는 [오카자키 파]와 이에야스를 맹주로 하는[하마마츠 파]로 나뉘어져 있었던 것이다. 파벌이 생겼던 것이다.

 적으로부터의 공격보다도 내부 분열을 우려한 이에야스는 기선을 제압해 오카자키 파의 중심인물 츠키야마도노를 죽였다. 그리고 오카자키 파 면면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주요인물들을 확인해 내기 위해서였다.
 그런 뒤에 오카자키 파의 중핵인 노부야스에게 죽음을 명한 것이다. 귀여운 아들이라고 할 틈은 없었다. 파벌을 형성하여 영지를 둘로 나누려 했던 움직임이 있었던 것이기에, 귀여워했던 만큼 미움도 그 만큼 커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도 파벌항쟁 과정에서 아들 요시노부[義信]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며, 다테 마사무네[伊達 正宗]도 동생 코지로우[小次郎]를 참살하였다.

 덧붙여 주요인물로 확인된 [오카자키 세 행정관(岡崎三奉行)]인 고우리키 키요나가[高力 淸長], 혼다 시게츠구[本田 重次], 아마노 야스카게[天野 康景] 등의 가신은 오카자키 파에 속하였기에 사건 후 푸대접을 받았고, 오카자키 파의 필두가로(筆頭家老)였던 이시카와 가즈마사[石川 數正]는 참을 수 없어 토쿠가와 가문을 떠나 히데요시에게로 도망친 것이다.
(이 부분은 오버. 대부분 이후에도 중요한 일들을 맡았으며 카이에키나 푸대접 등에는 각각의 사정이 있었다. - 역자 가필)

 이에야스를 신군으로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자기들끼리의 책이었기에 이러한 이야기를 그대로 쓸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토쿠히메의 푸념, 노부나가의 잔인한 명령 등이 창작되어 눈물을 꾹 참으며 신군 이에야스는 사랑하는 처와 아들을...... 이 된 것이다.

 츠키야마와 노부야스의 살해는...... 이에야스 본인의 의사였던 것이다..

ps; 이 글은 1994년에 발간된 고토우 쥬이치[後藤 寿一]의 [뭔가 이상하잖아! 일본사(なんかヘンだぞ!日本史)]에 있던 것을 번역한 것입니다.예전에 하이텔 전클에 올렸던 것을 조금 손 봐서 올립니다. 조금 오버기가 있지만 그냥 그런 흐름이었다고 생각해 주시길... 세세하게 파고드면 양이 너무 많아져요~(그래서 그런 능력이 없어서 번역해서는 올리는 것입니다. --; )

  1. 에도 바쿠후의 공식 기록서. 19세기 전반 즈음 편찬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토쿠가와 가문의 역사를 기록. 19세기 전반 편찬. [본문으로]
  3. 이에야스의 전기. 18세기 중반에 작성.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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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zinil2 BlogIcon zinil2 2008.06.29 21: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는 글이네요. 읽고 나서 끄덕끄덕합니다^^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6.29 2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9 22: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zinil2님//처음 댓글 달아 주신 것 같군요. 반갑습니다. ^^

    맹꽁서당님//덧붙여 비교적 예전에 생겼던 기록에는, 이에야스가 노부나가에게 죽이고 싶다고 청하자, 노부나가는 [いかようにも存分次第 - 맘대로 하셔]라고 했다고 합니다. 또한 노부야스가 반역의 생각을 가졌다고 하는 기록이 있으며, 그 기록들에서는 이에야스 쪽에서 청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노부야스를 오카자키에서 쫓아낼 때는, 오카자키에서 일하던 소위 오카자키 파들에게 등성을 금지시키고, 직접 끌고온 하마마츠의 하타모토들로 성을 점거했다고 하더군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6.30 00: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도 이 마쓰다이라 노부야스는 제법 당대엔 인기가 있었던 듯 싶습니다. 생존설까지 뜨는걸 보면..(;)

    뭐 위키에도 이런 내용이 있긴 하던데 세키가하라에서 노부야스를 떠올리는 이에야스의 모습도 있고 해서 진위가 불분명하다.. 뭐 이런식으로 얘길 하더군요. 여기 관한 괜찮은 원서를 시간날때 한번 찾아보곤 싶지만서리..(요새 이런저런 공부 준비로 바빠서;;)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30 08: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카와(오카자키) 사람들만 그렇게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순리대로 라면 노부야스가 쇼우군이었을 테니까요)

    http://ja.wikipedia.org/wiki/%E5%BE%B3%E5%B7%9D%E5%AE%B6%E5%BA%B7%E3%81%AE%E5%BD%B1%E6%AD%A6%E8%80%85%E8%AA%AC

    참고로 이 이에야스 영무자 설의 노부야스 항목의 묘소에 관한 이야기도 재미있더군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mansukizzang BlogIcon 본다충승 2008.07.01 15: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불쌍한 노부타다... 괜히 노부야스랑 비교 되고... 그래도 아직까지는 노부나가가 죽였다는 설이 인정받고 있겠죠? ㅎ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02 02: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부타다의 굴욕?? ^^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런 것 같습니다.
    가끔가다 그런 것에 대해 다룬 책들이 보이는 것을 보면, 아직까지는 대세가 노부나가 명령설인 것 같습니다.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xjapan1231 BlogIcon 나오 2008.09.28 17: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카자키슈와 하마마츠슈 간의 권력다툼의 희생양이라고 하죠 노부야스는.. 그리고 지금은 노부야스에 대한 모반(타케다와의 내통)사실자체도 그리 신빙성이 없고 말이죠.. 무엇보다 고도쿠가 노부나가에게 보낸 12조항 자체도...ㅡㅡ;;;;;;;;;;;;; 여튼 너구리놈 잔악하기 그지없는게 나중에 이것또한 신군전설의 하나로 그 죄를 모두 노부나가와 사카이에게 뒤집어씌운..ㅡㅡ;;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9 23: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만약 토쿠가와 가문이 천하를 잡지 않았다면 지금과는 다른 이야기가 전해 내려왔을 것 같습니다.
    (전 노부나가가 노부야스를 죽인 이유 중에 가장 웃긴 것이....노부타다보다 노부야스가 뛰어나서 죽이려고 했다는 거 더군요)

  10. 골룸 2009.10.28 11: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봤습니다
    하이텔 전클이라... 추억의 이름이네요...

.

 

 미츠히데[光秀]미나미야마시로[南山城]의 들판에서 쓰러뜨린 히데요시는 그 후, 눈을 북쪽으로 돌려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까지 호쿠리쿠[北陸]에서 물리쳐 오다 정권[織田政権] 상속자로서의 발판을 다졌다.

 하지만 그것은 상속이 아니다. 찬탈이다. - 며 노부나가의 차남인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가 오와리[尾張]에서 거병하였고, 토우카이[東海]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와 동맹을 맺고는 그와 연계하였다.

 1584년의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い]이다.

 

 당시 히데요시는 쿄우[京]를 제압하고 오오사카[大坂]에 거성을 두어 그 세력범위는 24개국[国]에 이르렀으며, 총 석고는 620만석을 넘어 이미 판도는 옛 오다 정권보다도 컸다.

 그에 비해 오다 노부카츠는 107만석, 토쿠가와 이에야스 130만석이었다. 가지고 있는 힘으로만 보면 상당한 격차가 있었지만 그러나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의 능력과 그 가신단의 용맹함을 크게 평가하여 이 싸움에서는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였다.

 

 너무 조심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할 정도였다. 총동원 능력 15만 명중에서 투입할 수 있을 만큼의 병력을 미노[美濃]오와리[尾張]에 전개시켰지만 그러나 전군을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만 지키게 할 뿐으로, 이곳 저곳에 야전용 진지를 구축하여 광대한 요새선(要塞線)을 쌓아 대치전의 형태를 취했다. 이에야스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쪽이건 자신들 머리에서 지혜를 짜내 만든 진지를 구축하여 대치하고 있는 이상 먼저 움직이는 쪽이 지게 될 것이다.

 

 개전이 시작된 것은 3월이었다. 4월에 들어서 히데요시 측의 한 부대가 섣불리 움직였다. 장거리를 재빨리 이동하여 이에야스의 본거지 미카와[三河]를 습격하고자 은밀히 행군하던 중에 이에야스에게 간파 당하여 이에야스 주력군의 공격을 받아 괴멸되어 패주하였다.

 

 이에야스는 국지전에서 이겼다. 그 이후에는 진지에 틀어박혀 움직이지 않았고 히데요시가 걸어오는 싸움에도 응하지 않은 채, 이 국지전 승리의 평판을 될 수 있는 한 천하로 퍼트리려 하였다. 히데요시는 조바심이 났다. 히데요시에게 있어 최선은 결전을 벌이고 그 결전을 통해 이에야스를 멸하고자 하는데 있었지만, 이에야스는 조개가 입을 다물고 있는 듯이 하고서는 응하지 않았고, 그 단 한번의 승리를 지키며 계속 지킴으로써 사태의 호전을 기다렸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가 싸움에 응하지 않자, 자신이 가진 가장 뛰어난 능력 중에 하나인 외교로 현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우선 이에야스의 동맹자인 오다 노부카츠를 꼬셔 농락하였다. 노부카츠는 이익에 낚여 아군인 이에야스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단독으로 히데요시와 강화(講和)해 버렸다. 이 때문에 이에야스도 충분한 여력을 남긴 상태로 전쟁터에서 이탈하여 자국으로 돌아갔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에게도 사자를 보내어 강화를 제시하였다. 이에야스로써도 천하의 추세가 이미 히데요시에게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납득하고 있었기에 그 강화를 받아들였다. 전쟁터의 승자이기는 했다. 그러나 모양새로는 패자의 모습을 해야만 했다. 인질을 히데요시에게 보낸 것이다.

 다만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의 입장을 생각하여 표면적으로는 인질이라 말하지 않고,

 - 아드님 중에 한 분을 졸자(拙者)의 양자로 얻고 싶습니다.

 고 말하였다. 실질이 어떻든 양자라고 한다면 이에야스의 면목도 설 것이다.

 이에야스는 그것을 승낙하여 둘째인 오기마루[於義丸]를 바치기로 하고, 가로(家老)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 正]에게 호위시켜 오오사카[大坂]로 보냈다. 히데요시는 오기마루와 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 만나자마자 양부자(養父子)의 의식을 치렀고 곧바로 성인식(元服)을 행한 후, ‘히데[]’라는 글자를 내려 하시바 히데야스[羽柴 秀康]라는 이름을 칭하게 해서는 자기 가족의 일원으로 하였다. 후의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이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승리자라는 위치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그 본거지인 토우카이 지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원래라면 성을 나와 쿄우[京]와 오오사카로 올라와서는 히데요시와 대면했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마치 항복한 사람처럼 비쳐지기에 이에야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의 정략(政略)이었다. 이에야스가 토우카이에 엉덩이를 뭉개고 있는 한 히데요시와 대등한 관계였으며, 오기마루를 보낸 것도 토쿠가와 가문이 하시바 가문으로 양자를 보낸 것에 지나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이런 이에야스의 태도에 당혹했다.

 당연했다. 이에야스가 토우카이 5개국[(미카와[三河], 토오토우미[遠江], 스루가[駿河], 카이[甲斐], 시나노[信濃])에 엉덩이를 뭉개고 있는 한 시코쿠[国], 큐우슈우[九州], 토우호쿠[東北]의 여러 강호들은 이 이에야스와 연계하며 히데요시 정권에 계속 저항할 것이고, 예를 들어 당장 히데요시가 시코쿠를 정벌하고자 하여도 후방에 이에야스가 틈을 노리고 있기에 대군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랬다. 히데요시가 가지고 있는 15만 명의 대군단을 토우카이에 계속 투입하였다면 언젠가는 이에야스를 멸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그러는 동안 천하는 흐트러지고 이제 막 성립되었을 뿐인 히데요시 정권은 무너질 것이다. 히데요시는 그 천하 통일을 단기간에 이룰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는 전쟁보다도 막상 성사만 되면 단번에 끝나는 외교의 길을 선택하였다. 이에야스를 어떻게든 외교로 손에 넣고 싶었다. 이에야스를 가신으로 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에야스를 이쪽으로 올라오게 하고 싶다. 올라와서 히데요시를 알현 이라는 형식으로 둘이 얼굴을 맞대기만 한다면 그걸로 주종관계가 된다.

 어떻게든 쿄우[]로 올라오게 할 수는 없을까?’

 히데요시는 예전부터 이 세상에서 노부나가[信長]를 가장 두려워 하였고, 그가 죽은 지금은 이에야스만을 두려운 자로 보고 있었는데, 막상 이렇게 직면하게 되자 그 이상으로 두려운 인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른 자들처럼 달래는 것도 협박하는 것도 먹혀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인질을 잡았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정치적 결단으로는 오기마루를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인질에 미련이 있었다면 이쪽으로 올라왔겠지만, 그런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인질은 효과가 없었다. 

 히데요시는 필요로 몰렸다. 필요의 앞에 이치라는 것이 있더라도 치워버리는 것이 정치라는 것이다. 만약 이에야스가 가신이 되어 준다고 한다면 무릎을 꿇고 그의 발가락을 빨아도 좋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아사히 히메에 대해서 생각이 미치게 된 것은 필요때문이었다.

 

 코이치로우[小一郎] 힘 좀 빌려줘

 

 하고 동생인 히데나가[秀長]에게 애걸복걸하듯이 말을 하게 된 것은 이 때이다. 일족의 희생이 없으면 안 되었다.

 

 만약 니가 싫다고 한다면 천하로의 희망이 사라지게 된다. 이제 막 생겼을 뿐인 하시바의 천하가 무너지고 이 가문은 멸망. 우리 일족은 죽게 된다. 그럴 정도로 중요한 것이 너의 한 마디 이라는 말에 달려있단다. 응이라고 말해주지 않을래?”

 

 라고 말했다.

 요건이라는 것은 아사히 히메를 이혼시켜 그녀를 이에야스에게 시집 보내고, 히데요시와 이에야스를 인척이라는 끈으로 이어서는 그를 히데요시 정권의 막하(幕下)에 집어 넣자는 것이었다. 그것 외에 방법은 없다. 그러나 그것을 모친인 오나카[仲], 즉 오오만도코로[大政所]가 용서하겠냐는 것이다. 딸의 그러한 불행을 필시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설득한다. 모친을 설득하기 위해서 히데요시보다는 모친이 히데요시 이상으로 사랑하고 있는 이 코이치로우 히데나가가 이야기 하는 편이 좋다. 또 하나, 히데요시에게 있어서 아사히 히메는 아비 다른 여동생이기 때문에 반쪽 형제인 오빠 히데요시의 입으로 이야기하는 것 보다 아사히 히메와 같은 아비, 어미인 히데나가의 입으로 이야기를 하게 하는 쪽이 잘 될 것이다. 그러니 아사히 히메 쪽의 설득도 부탁한다 는 것이었다.

 

 히데나가는 벙쪘다. 예부터 이런 일이 있었냐는 생각이 들었다. 전례가 없을 것이다. 아사히에게는 버젓한 남편이 있으며, 부부 사이도 남들만큼은 되어 아무런 풍파도 없이 편안히 살고 있다. 그 관계를 갑자기 찢고, 찢은 다음 곧바로 다른 남자의 마누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 나라 부부의 역사 속에 여태껏 이랬던 적은 결코 없을 것이다. 이는 절대 맡을 수 없습니다. – 고 히데나가는 비명을 지르듯이 말했다.

 

 알고 있다. 물론 잘 알고 있다

 

 라고 말하자 마자 히데요시는 소리 높여 통곡을 하였다. 히데요시는 웃을 때가 많은 남자이지만 감정이 격해지면 언제라도 울 수가 있었다. 이번에도 울면서 그 어쩔 수 없는 필요와 이유를 빠른 말로 내뱉었고, 내뱉고 있는 동안 얼굴을 계속 울고 있었다. 그 눈물이 히데나가를 침묵시켰다. 결국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시다면 소에다 진베에[副田 甚兵衛]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진베에에게는 할 수 있는 만큼 해 주고 싶다. 5만석을 주어 다이묘우[大名]로 만들 생각이다.”

 

 마누라를 팔고 다이묘우가 되란 말이군 이라는 감정이 히데나가에게는 생기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히데나가는 너무도 소박한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우선은 얌전해 지겠군 이라고 생각할 뿐으로,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보다 모친인 오나카이며 여동생인 아사히였다. 그 설득을 할 수 있을지 어떨지……

 

 히데나가는 우선 모친에게 이야기했다. 생각했던 대로 오나카는 광란하였다. 코이치로우 들어라, 저 원숭이녀석은 꼬꼬마일 때부터 고생만 시켰다. 이런 생활을 하는 것도 내가 바란 것은 아니다. 저 원숭이녀석이 무사가 되어 이렇게 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이 궁궐에서 살고 있는 거다. 저 오와리[尾張] 나카무라의 달빛 새는 지붕 아래서 살고 있었다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고 말했다. 그것을 히데나가는 어르고 달래어 어쨌든 승낙하게 하였다. 다음은 여동생이었다.

 

  히데나가는 아사히를 오오사카 성으로 불러 큰 언니인 토모[とも]와 함께 설득하며,

 

 이미 진베에도 승낙한 일이란다

 

 고 너무도 중대한 거짓말을 하였다. 이 한마디가 아사히의 수족을 차갑게 하였다. 그 자리에서 쓰러져 한때는 숨이 멈추기도 했다. 의사가 회복시켰지만 새로운 결혼에 대한 것보다 진베에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더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 뒤 아무런 말도 안 하게 되어, 히데나가가 하마마츠[浜松][각주:1]로 가는 것을 알겠지? 알겠지? 라고 거듭 묻자, 초점 없는 눈동자로 끄덕였을 뿐이었다.

 

 소에다 진베에는 이 당시 오우미[近江] 중앙부에 있는 하시바 가문 직할령의 행정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 진베에도 아사히와는 별도로 오오사카의 스기하라 호우키[杉原 伯耆]의 저택으로 호출 받아, 대면하자 마자 갑자기,

 

 명령이다

 

 고 그것을 하달 받았다. 진베에는 분노했다.

 작은 칼[脇差]의 칼자루에 손이 갔다.

 

 진베에~ 어쩌려고 그러나

 

 호우키는 처음부터 이리 될 줄 알고 있었는지, 사람이 하는 움직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몸놀림으로 방바닥을 굴러 몸을 뺐다. 간격이 생겼다. 그 간격으로 좌우에 있던 스기하라 가문의 가신 10명 정도가 밀려 들어와 순식간에 둘 사이를 메웠다.

 

 , 날 죽이려는 것인가?”

 

 진베에는 굉장히 당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칼에 손을 대었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상대방들의 눈빛만을 두려워했다.

 

 그럴 리 없잖습니까~”

 

 스기하라 가문의 늙은 가신이 일부러 목소리를 밝게 하여 이 자리를 화기애애하게 만들기 위해서 미소를 만들어 말했다.

 

 손에 위험한 것을 가지고 계신지라, 이렇게 된 것입니다. 우선은 그 손에 드신 것을 좀…”

 

 하고 손바닥을 예의 있게 들어 진베에의 오른손 쪽을 가리켰다. 진베에는 이때가 돼서야 비로소 자신의 오른손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었는지를 알아차렸다.

 

 “…아무 짓도안 할 것이네

 

 힘없이 손을 축 늘어트렸다. 무엇을 하기 위해서 칼에 손을 대었는지, 뽑아서 자신의 배라도 가르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스기하라 호우키에게 칼을 내리치고자 했는지 자신도 이유를 몰랐다.

 그러나 어느 쪽도 아닐 것이다. 이 굴욕과 자신에게 내려진 이 어처구니 없는 운명에, 몸도 마음도 제어할 수 없게 되어 이성을 잃고 이유도 없이 작은 칼에 손을 대고 만 것에 지나지 않았다. 호우키를 벨 용기도 없었다. 벤다고 해도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 짓도 안 하네

 

 하고 진베에는 한번 더 말했다. 벤다고 하면 히데요시이다. 하지만 이백수십 명의 다이묘우를 거느린 육십여 주()의 주인을 벨 수 있을까?

 

 거부한다!”

 

 한 시간 후에 진베에는 외치고 있었다. 거부하는 것 이외에 남자라고 할 수도 없다.

 라고 했지만 마누라 아사히를 빼앗기는 것에 거부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홍수나 지진과 마찬가지로 불가항력이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5만석의 다이묘우가 된다는 것은 거부할 수가 있었다. 이는 진베에의 자유이다. 자기는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거부한다. 마누라를 팔아서 그 대가로 5만석의 다이묘우가 되는 병진이 세상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고 진베에는 소리질렀다.

 

 대가는 필요 없다. 그냥 공짜로 가져 가도록. 진베에가 그리 말했다고 확실히 주군께 전해주시길. 절대 잊지 말도록

 

 현관까지 달려간 후, 거기서 뒤로 돌아서는 어두운 집안을 향해서 한번 더 같은 말을 외쳤다. 공짜이외다. 그냥 바칩니다. 그렇게 전해 주시길. 호우키님, 꼭 이외다. 이 말을 만약 전해주지 않는다면 진베에에게 기다리는 것은 지옥. 아미타(阿彌陀)미륵(彌勒)도 날 구해주지 못할 것이오. 적어도 이 말만은 꼭 위에 전해달라고 외치며 뛰쳐나갔고, 대문을 나서면서도 또 다시 뒤로 돌아서는 또 외쳤다. 그 모습이 결국 미쳤군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 저 사람, 치욕으로 인해 배를 가르겠지?

 하고 문안에 있던 사람들은 생각하였고 실제로 길 위에서 달리고 있는 진베에도 그렇게 생각하였지만, 그러나 숙소로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그것은 어리석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경우, 배를 가르는 것만큼 허무한 것이 없었다. 굴욕의 끝에 죽었다 고 세상에 퍼질 뿐이었다. 배를 가르는 것은 예로부터 자신을 과시하는 최고의 형식이며 화려한 것임에는 틀림없었지만, 이 경우 이렇게 혼자서 자결(自決)해 보았자 남들에게 우울한 동정을 살 뿐일 것이다. 그보다도 살아서 하시바 가문을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무단(無斷)으로 떠난다. 주인에게 실망하였기에 떠나는 형식이다. 거기에 담긴 무언의 항의와 비판을 세상은 읽어 줄 것이다.

 보통 이럴 경우, 떠난 이는 주군 가문에 대한 일종의 반역으로 여겨져 토벌대가 파견되겠지만, 상대가 천하에 가장 가까운 사람인 만큼 부족하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집의 얇은 벽 하나만 의지하여 크게 저항한 뒤 죽어 주마 , 그것 이외에 이 굴욕을 풀 방법은 없었다.

 

 진베에는 다음 날 새벽 숙소를 나와 오오사카를 떠났고, 도중 오우미의 저택에 들려 집을 정리한 뒤 고향인 오와리로 돌아와 아이치 군[愛知郡] 카스모리[烏森]자기 영지(領地) 내에 있는 에서 머리를 깎고 인사이(隠斎)’라는 호를 쓰며 은거해 버렸다.

 

 당연히 위에서 토벌대가 파견되었어야 했지만, 그런 점도 스기하라 호우키는 잘 처리하였다.

 다음날 아침. 진베에가 떠난 것을 확인한 뒤, 등성(登城)하여 히데요시를 알현하고서는 결과를 보고하였다. 그러면서 진베에가 오와리로 돌아간 것은 무단으로 떠난 것이 아닌 병으로 인한 은퇴이며 진베에가 제출한 퇴직서는 저한테 있습니다 - 고 적당히 얼버무린 후,

 

 은거 허락을 내리시겠습니까?”

 

 고 머리를 굴려 말했다.

 물론 히데요시는 호우키의 말 뒤편에 있는 진실이 생생히 떠올랐다. 하지만 이런 경우 죄를 들추어 소란을 피우면 이쪽이 손해였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고 허락하였다. 남아있는 더욱 중대한 것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곧바로 사자를 하마마츠로 보내어 이에야스를 꼬셔 그를 자신의 매제가 되도록 승낙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잘 될까?’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이에 대해선 자신이 없었다.

  1. 이에야스의 본거지가 있는 곳.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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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iroyume BlogIcon shiroyume 2008.06.06 11: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기마루를 '받치기로'의 수정이 ....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06 12: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고맙습니다. ^^ 얼릉 고치겠'읍'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6.06 14: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너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고충이 있으신 줄은 몰랐네요
    그래도 어색함없이 읽히는게 상당히 매끄러운 번역같습니다(직접 원문을 보지는 못했으나^^;)

    아사히도 충격이 심했겠지만 굴욕의 사나이 진베에도 참...
    힘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다지만
    하는 짓은 상당히 병진같습니다 그런 말을 몇 번이나 당부할 필요는 없을텐데 말이죠;;;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06 20: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죄송합니다... 처음 해 놓고 보니 제가 보아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정도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솔직히 매끄러운 편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 그렇게 보아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

    억울하다 보니 어쩔 수 없겠죠. 진베에는....
    이해는 갑니다.
    (어떻게 보면, 배를 가른 사람들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그만큼 희소했기 때문일 거라 생각합니다. 일본 무사들은 굴욕을 당하느니 배를 가른다는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았던 경우가 많았기에 오히려 배를 가른 사람들이 기록된 것은 아닐지...)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mansukizzang BlogIcon 본다충승 2008.06.07 14: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불쌍한 아사히// 아사히 일생에 행복한 날들은 히데요시가 찾아오기전 시골에서 첫번째 남편과 살적이 아닐까 싶네요. 스루가 고젠을 읽으면 공명의 갈림길에서의 아사히 모습이 떠오릅니다. 잘 읽고 갑니다. ^^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gorekun BlogIcon 고어핀드 2008.06.07 20: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기다리고 있다능 ^^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6.07 21: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할머니가 2차대전때 고베에서 살고 계셨는데 종종 하얀 장막 쳐놓고 하리키리 하는 모습을 봤다더군요. 그런데 어릴적에 그런걸 봐서인지 625동란때도 덤덤하셨다고..;;

    아무튼 뭐 멀쩡한 사람인 이상 미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아닙니까(..말이 좀 역설이지만 참.. 상관에게 마누라 뺐긴 셀러리맨 느낌인지라..)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6.07 23: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할복하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않았을 수도 있군요...
    마치 조선시대에 삼족을 멸한다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 처럼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12 21: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본다충승님//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고어핀드님//T.T 흑~ 고맙습니다.

    다메엣찌님//제 생각엔, 그 즈음엔 에도 막부 배양 된 존황사상이 막말유신기에 꽃을 피워, 배를 가르는 것이 활성화 되었다고 생각합니다.(다메엣찌님의 할머님도 修羅場をくぐってきましだね。)

    박선생님//어디까지나 생각만큼은... 이라는 의미입죠 ^^
    배를 갈랐던 사람도 있긴 있으니까요.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rknesseye BlogIcon 흑안 2008.06.17 23: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맨 앞에 나오는 오다 노부카츠는 信雄 아닌가요? 信勝은 노부나가의 동생이었던 칸쥬로 노부유키의 다른 이름으로 알고 있는데, 본문에 저렇게 나와있는 것인지?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0 01: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오타입니다. ^^;
    알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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